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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석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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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진석중은 일제강점기 경상남도 거제 출신으로, 밀양 농잠학교를 졸업하고 통영군 산림계에서 공직 생활을 시작하여 지방기수로 승진했다. 해방 후 공직을 그만두고 고향에서 사업가로 변신하여 양조장과 어장을 경영하며 지역 사회 발전에 기여했다. 1948년 초대 도의원 선거에 당선되어 도의회 의장을 역임했으며, 제4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국회 상공위원장으로 활동하며 상공업 관련 법률 정비를 주도했다. 4.19 혁명으로 정계에서 물러난 후 고혈압으로 사망했다. 그의 생가는 등록문화재 제277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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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석중
기본 정보
진석중 의원 사진
진석중 의원
출생1960년 11월 7일 (63세)
본관여양 진씨(驪陽陳氏)
지역구경상남도 거제시
소속 정당국민의힘
학력부산대학교 법학과 졸업
경력
주요 경력민주정의당 입당
한나라당 거제 지구당 사무국장
한나라당 경남도당 조직국 국장
경상남도의회 의원
의정 활동
소속 위원회 (현재)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 위원
의원 선수초선

2. 생애

진석중은 여양 진씨 29세손으로 경상남도 거제군 동부면(현 거제시 동부면) 학동에서 태어났다. 거제보통학교와 밀양농잠학교에서 신학문을 배웠으며, 졸업 후 통영군 산림계에서 공직 생활을 시작, 뛰어난 업무 능력으로 빠르게 승진했다.[5]

광복 이후 공직을 그만두고 고향에서 가업을 이어받아 사업가로 변신했다. 학동~연담간 도로 개설, 거제군 복군 추진 등 지역 사회 발전에 힘썼다.[5]

1948년 초대 경상남도의회 의원에 당선되어 정계에 입문, 도의회 의장을 역임했다. 1958년 제4대 총선에서 당선되어 국회 상공위원장으로서 한국 상공업 법률 정비에 힘썼으나,[5] 1960년 4.19 혁명으로 국회가 해산되면서 정치 경력이 단절되었고, 1961년 고혈압으로 사망했다.[6]

2. 1. 초기 생애 및 교육

여양 진씨 29세손이며, 여평군 진극일의 후손이다.[5] 경상남도 거제군 동부면(현 거제시 동부면) 학동 여양 진씨 문중 출신이다.[5] 학동부호 진치주의 5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거제보통학교로 유학을 갔는데, 당시 대부분 서당에서 한문을 배우다 농업이나 어업에 종사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선친 진치주는 시대 상황을 고려하여 진석중에게 신학문을 배우도록 했다.

학교에 입학한 진석중은 초창기 학동에서 거제까지 왕복 60리 길을 걸어 다녔다(집안 사람 동행). 그러다 4학년 무렵 거제 읍내에서 하숙을 했다.

신식교육으로 학문에 눈을 뜬 진석중은 졸업 이듬해 밀양 농잠학교로 진학했다. 밀양 농잠학교는 지금의 중고등학교 과정으로 당시 꽤 이름이 알려진 학교였다. 진석중은 여기서 새로운 농업기술과 특히 잠업에 대한 전문기술을 습득했다.

그는 급우들에게 “고향으로 돌아가 보릿고개에 허덕이는 우리 조선인들에게 봉사하면서 살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고 한다.[5]

2. 2. 공직 생활

밀양 농잠학교 졸업 후 진석중은 산림공무원을 선택하여 통영군 산림계에 배치되었다. 그는 7년 만에 지방기수(현 과장급)로 승진했는데, 이는 동료들보다 5~6년 빠른 진급이었다. 이러한 빠른 승진은 그의 성실함과 근면성, 그리고 높은 덕망 덕분에 주위의 호평이 끊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5]

해방 후, 진석중은 일제강점기 공무원 생활에 대한 반성으로 공직을 그만두었다. 고향인 학동으로 돌아와 갈곶리 도장포에서 양조장과 어장(권현망, 정치망)을 경영하며 가업을 이었다. 그는 거제군 굴지의 사업가로 변신했다.[5]

또한 진석중은 학동, 수산, 일운 인근 지역 주민들의 민원 해결을 위한 사업을 기획했다. 주민들의 숙원 사업은 학동~연담간 도로 개설이었다. 진석중은 자신의 인맥과 사비를 투입하여 1년 만에 통영군수의 승낙을 얻어냈다. 이 도로 개설로 노자산과 가라산에서 생산되는 참나무 숯과 학공 인근 바다에서 잡히는 수산물이 읍내, 고현, 장승포로 원활하게 유통될 수 있게 되었다.[5]

2. 3. 기업 활동

해방 후 진석중은 일제강점기 공무원 생활에 대한 반성의 의미로 공직을 그만두었다. 고향 학동으로 돌아와 정착하면서 갈곶리 도장포에서 양조장과 어장(권현망, 정치망)을 경영하며 가업을 이어받아 당시 거제군 굴지의 사업가로 변신했다.[5]

진석중은 학동, 수산, 일운 인근 지역 사람들을 위한 민원 해결 사업을 기획했다. 그 지역 사람들의 숙원사업은 학동~연담간 도로 개설이었다. 진석중이 주민 숙원 사업에 뛰어든지 1년 만에 통영군수의 승낙을 받았다. 진석중 자신의 인맥과 사비를 집중 투입한 결과였다. 노자산과 가라산에서 생산되던 참나무 숯과 학공 인근 바다에서 잡히는 수산물들이 신설 도로를 통해 읍내, 고현, 장승포로 원활하게 유통되었다.[5]

그 외 거제 어업협동조합 보통위원, 경남어민회 고문, 부산 수산물 판매회사 사장, 경남 상공분과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했다.[3]

2. 4. 지역 사회 공헌

진석중은 지역 사회 발전을 위해 여러 활동을 펼쳤다. 일제강점기부터 공무원으로 일하며 지역 사정에 밝았던 그는, 해방 후 고향으로 돌아와 주민들의 숙원 사업 해결에 앞장섰다. 특히 학동, 수산, 일운 지역 주민들의 오랜 바람이었던 학동~연담 간 도로 개설을 위해 노력했다. 통영군수의 승인을 얻어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인맥과 사비를 투입하여 도로 개통을 성공시켰다.[5] 이 도로는 노자산과 가라산에서 생산되는 참나무 숯과 학공 인근 바다에서 잡히는 수산물이 읍내, 고현, 장승포로 원활하게 유통될 수 있도록 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또한, 진석중은 거제군 복군 추진에도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경상남도의회 의장 시절, 당시 국회의원이었던 이채오와 함께 수십 차례 서울을 오가며 노력한 끝에 거제군 복군을 이끌어냈다.[5]

2. 5. 정치 활동

여양 진씨 29세손이며, 여평군 진극일의 후손이다.[5] 경상남도 거제군 동부면 (현 거제시 동부면) 출신으로, 해방 후 일제강점기 공무원 생활에 대한 반성으로 공직을 그만두고 고향인 학동으로 돌아와 정착했다.[6] 갈곶리 도장포에서 양조장과 어장(권현망, 정치망)을 경영하며 거제군 굴지의 사업가가 되었다.

1948년 초대 도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2위를 큰 표차로 따돌리고 당선되었고, 2대에는 경쟁자가 없어 무투표로 당선되어 도의회 의장직을 맡았다.[5] 도의회 의장으로서 진석중은 거제군 복군 추진 사업을 벌였으며, 당시 국회의원 이채오와 함께 수십 차례 서울로 오르내리며 노력한 결과 거제군 복군을 이끌어냈다.[3]

1958년에는 윤병한, 반성환 등 거물급 유지들을 물리치고 제4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5] 칠원 윤씨 문중의 윤병한과 거제 반씨 문중의 반성환은 거제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텃밭을 가지고 있는데다 일본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한 엘리트였기에, 고졸 출신이자 오지 출신인 진석중의 당선은 거제군 사회에 큰 화제가 되었다. 국회에 진출하자마자 진석중은 국회상공위원장을 맡았다. 당시 한국의 경제 질서는 체계가 잡혀있지 않았고 관련법 또한 제대로 정비된 것이 없었기에, 관계부서 공무원들이 재량껏, 임의대로 해석하고 결정하던 시기였다. 진석중은 국회 상공위원회에서 한국의 모든 상공업 법률을 정비했으며, 그가 정비한 법률들은 이후 제3공화국의 경제 프로젝트의 근간이 된다.[6]

4.19의거로 국회가 해산되면서 진석중은 정치계를 떠났고, 이듬해 7월 20일 고혈압으로 사망했다.[6]

그 외 거제 어업협동조합 보통위원, 경남어민회 고문, 부산 수산물 판매회사 사장, 경남 상공분과위원회 위원, 자유당 경상남도당 고문·중앙위원 등을 역임했다.[3]

2. 6. 정치 경력 단절과 사망

1960년 4.19 혁명으로 국회가 해산되면서 진석중은 정치 경력이 단절되었다.[6] 이듬해인 1961년 7월 20일, 고혈압으로 갑작스럽게 생을 마감했다.[6]

3. 등록 문화재

1947년에 건립된 진석중의 동부면 학동리 살림집은 당시 도서 지방 상류층의 생활상을 보여주며, 등록문화재 제277호로 지정되었다.[7]

이 가옥은 거제시 동부면 학동리 315에 있으며, 해방 이후인 1947년에 건축된 지방 상류층 살림집이다. 동서로 긴 사다리꼴 대지에 안채(본채), 별채(건너채), 창고(광채), 대문 등이 '튼ㅁ'자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주옥(主屋)인 안채의 벽장과 창호, 별채의 욕실과 화장실 등은 일본식이 절충되었다. 별채는 일반적인 ‘ㅡ’자형 평면의 뒤쪽(後部)에 실내 화장실과 욕실 및 복도를 배치한 구조이다.

이러한 안채와 별채의 합리적이고 기능적인 공간 구성, 생활에 편리함을 제공하는 설비는 근대적 성격을 잘 보여준다. 1940년대 말 경남 남해안 도서 지방 상류층 주거의 특징과 변화상을 살펴볼 수 있는 근대기 주택이라는 점에서 가치가 높다.[1][4]

4. 약력

직책
거제공립보통학교 졸업
밀양농잠학교 졸업
거제어업조합 통상위원
경남어민회 고문
부산수산물판매회사 사장
경남도의회 의장
자유당 경남도당 고문
자유당 중앙위원[3]
초대 경상남도의회의원
제2대 경상남도의회의원 (무투표 당선)
경상남도의회 의장
제4대 국회의원 (경남 거제군, 자유당)[3]
국회 상공위원장[1]


5. 역대 선거 결과

연도선거 종류소속 정당득표수 (득표율)순위당락비고
1958년총선자유당18,585표 (45.00%)1위당선초선


참조

[1] 웹사이트 진석중 국회의원 http://www.geojesimi[...] 2024-01-18
[2] 웹사이트 (84)여양 진씨(驪陽陳氏)-97,372명 http://www.seoulecon[...] 2024-01-18
[3] 웹사이트 대한민국헌정회 https://rokps.or.kr/[...] 2024-01-17
[4] 웹사이트 학동 진석중 가옥 https://www.geoje.go[...] 2024-01-18
[5] 문서 여양진씨 19세손 진봉일이 여양진씨 15세손 여평군 진극일을 입향조로 학동에 정착하였다.
[6] 웹인용 진석중 국회의원 http://m.geojesiminn[...] 2019-03-16
[7] 뉴스 우리동네 등록문화재 (2)한려해상권 http://www.knnews.co[...] 경남신문 2008-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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