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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로 폰테코르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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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질로 폰테코르보는 이탈리아의 영화 감독, 각본가, 작곡가이며, 특히 정치적 주제를 다룬 작품으로 유명하다. 그는 피사에서 유복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화학을 공부했지만, 파시즘의 증가로 파리로 이주하여 영화계에 입문했다. 폰테코르보는 네오리얼리즘 스타일을 활용한 《알제 전투》(1966)로 가장 잘 알려져 있으며, 이 영화는 알제리 전쟁을 다루며 혁명과 저항에 대한 메시지를 담았다. 그는 또한 《광활한 푸른 길》(1957), 《카포》(1960), 《케마다!》(1969), 《오그로》(1979) 등의 작품을 연출했으며, 베니스 영화제 감독으로도 활동했다. 폰테코르보는 울혈성 심부전으로 2006년 로마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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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로 폰테코르보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본명Gilberto Pontecorvo
출생일1919년 11월 19일
출생지이탈리아 피사
사망일2006년 10월 12일 (86세)
사망지로마, 이탈리아
직업영화 감독, 각본가, 작곡가
배우자Maria Adele "Picci" Ziino (1964년 결혼)
자녀마르코 폰테코르보
친척브루노 폰테코르보 (형제), 귀도 폰테코르보 (형제)
활동 기간1953년–2003년
서훈이탈리아 공화국 공로 훈장 대십자 기사
주요 작품
수상
베네치아 국제 영화제황금사자상
1966년 "알제리 전투"
국제영화비평가연맹상
1966년 "알제리 전투"
피에트로 비안키상
2000년

2. 초기 생애 및 배경

질로 폰테코르보는 피사의 유복한 이탈리아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형제 중에는 1950년 소련으로 망명한 저명한 핵물리학자 브루노 폰테코르보가 있었다. 폰테코르보는 피사 대학교에서 화학을 전공했으나 두 과목만 이수한 후 중퇴했다. 대학에서 그는 좌파 학생 및 교수들과 교류하며 처음으로 정치에 눈을 뜨게 되었다.

1938년, 이탈리아 내 반유대주의 정서가 심화되자 폰테코르보는 형을 따라 파리로 이주하여 저널리스트와 테니스 강사로 일했다. 파리에서 그는 영화계에 입문하여 여러 단편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고, 요리스 이벤스, 이브 알레그레 등 유명 감독들의 조수로 활동했다. 또한 파블로 피카소,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장 폴 사르트르 등과 교류하며 견문을 넓혔으며, 스페인 내전에 참전한 친구들의 영향을 받아 정치적 신념을 형성했다.

1941년 이탈리아 공산당에 입당한 폰테코르보는 북부 이탈리아에서 반파시스트 파르티잔 조직 활동을 전개했다. 1943년부터 1945년까지는 '바르나바'라는 가명으로 밀라노 이탈리아 저항 운동 지도자로 활동했다.[1]

전후 폰테코르보는 공산주의 주간지 『파투글리아』 편집에 참여했다.[1] 헝가리 봉기 진압을 위한 소련의 개입에 실망하여 1956년 공산당을 탈당했지만,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믿음은 유지했다.[2] 그는 1983년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을 "많은 이탈리아 유대인처럼 단지 좌파"라고 칭했다.[2]

2. 1. 가계 및 유년 시절

폰테코르보는 피사에서 부유하고 세속적인 이탈리아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사업가였다. 질로의 형제자매로는 1950년 소련으로 망명한 국제적으로 명성이 높은 핵물리학자이자 비아 파니스페르나 보이즈 중 한 명인 브루노 폰테코르보, 유전학자인 귀도 폰테코르보,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레이더 연구에 참여한 엔지니어 폴리 [폴] 폰테코르보, 그리고 데이비드 마라오니가 있었다. 그의 누이들은 줄리아나(탈베트와 결혼), 로라(코파와 결혼), 안나(뉴턴과 결혼)였다.[2]

폰테코르보는 피사 대학교에서 화학을 공부했지만, 단 두 과목만 통과한 후 중퇴했다. 그곳에서 그는 처음으로 반대 정치 세력을 인식하게 되었고, 좌파 학생들과 교수들을 처음 만났다. 1938년, 파시스트의 부상으로 이탈리아에서 반유대주의가 증가하는 것에 직면하여, 그는 형 브루노를 따라 파리로 갔고, 그곳에서 저널리스트와 테니스 강사로 일자리를 찾았다.[1]

2. 2. 학창 시절과 정치 입문

폰테코르보는 피사에서 부유하고 세속적인 이탈리아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사업가였다. 피사 대학교에서 화학을 공부했지만, 단 두 과목만 통과한 후 중퇴했다. 그곳에서 그는 처음으로 반대 정치 세력을 인식하게 되었고, 좌파 학생들과 교수들을 처음 만났다. 1938년, 파시즘의 부상으로 이탈리아에서 반유대주의가 증가하는 것에 직면하여, 그는 형 브루노 폰테코르보를 따라 파리로 갔고, 그곳에서 저널리스트와 테니스 강사로 일자리를 찾았다.[1]

파리에서 폰테코르보는 영화계에 참여하게 되었고, 몇 편의 단편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그는 네덜란드 다큐멘터리 영화 제작자이자 잘 알려진 마르크스주의자인 요리스 이벤스의 조수가 되었는데, 그의 영화로는 『비』와 『다리』가 있다. 그는 또한 필름 느와르 장르에서 작품으로 알려진 프랑스 감독 이브 알레그레의 조수로 일했는데, 그의 영화로는 『아주 예쁜 작은 해변』과 『오만함』이 있다. 이러한 영향 외에도 폰테코르보는 예술가 파블로 피카소, 작곡가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및 정치 사상가 장 폴 사르트르와 같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그의 시야를 넓혔다. 이 기간 동안 폰테코르보는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발전시켰다. 그는 파리의 많은 친구들이 스페인 내전에서 공화주의 측에서 싸우기 위해 짐을 싸는 것을 보고 감동받았다.[1]

1941년, 폰테코르보는 이탈리아 공산당에 가입했다. 그는 반파시스트 파르티잔을 조직하기 위해 북부 이탈리아로 갔다. 그는 가명 ''바르나바''로 활동하며 1943년부터 1945년까지 밀라노에서 이탈리아 저항 운동의 지도자가 되었다.[1]

전쟁 후, 그는 1948년부터 1950년까지 다리오 볼라리와 함께 공산주의 주간지 『파투글리아』를 공동 편집했다.[1] 폰테코르보는 헝가리 봉기를 진압하기 위한 소련의 개입 이후인 1956년에 공산당과의 관계를 끊었다. 그러나 그는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헌신을 포기하지 않았다.[2]

2. 3. 파리에서의 활동과 공산당 입당

1938년, 폰테코르보는 형 브루노를 따라 파리로 건너가 저널리스트와 테니스 강사로 일했다.[1] 파리에서 폰테코르보는 영화계에 참여하여 여러 편의 단편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그는 네덜란드 다큐멘터리 영화 제작자이자 마르크스주의자인 요리스 이벤스의 조수로 일했으며, 프랑스 감독 이브 알레그레의 조수로도 활동했다.[1] 이 시기에 파블로 피카소,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장 폴 사르트르 등과 교류하며 시야를 넓혔고, 스페인 내전에 참전한 친구들의 영향을 받아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발전시켰다.[1]

1941년, 폰테코르보는 이탈리아 공산당에 가입했다.[1] 그는 반파시스트 파르티잔을 조직하기 위해 북부 이탈리아로 갔고, '바르나바'라는 가명으로 1943년부터 1945년까지 밀라노에서 이탈리아 저항 운동의 지도자가 되었다.[1]

1956년, 헝가리 봉기를 진압하기 위한 소련의 개입 이후 공산당과의 관계를 끊었지만,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헌신은 포기하지 않았다.[1] 1983년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나는 완전한 혁명가는 아니다. 나는 많은 이탈리아 유대인처럼 단지 좌파 사람일 뿐이다."라고 말했다.[2]

2. 4.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1941년, 폰테코르보는 이탈리아 공산당에 가입했다.[1] 그는 북부 이탈리아로 가서 반파시스트 파르티잔을 조직했다. 1943년부터 1945년까지 밀라노에서 ''바르나바''라는 가명으로 이탈리아 저항 운동의 지도자로 활동했다.[1]

2. 5. 공산당 탈당

폰테코르보는 1956년 헝가리 혁명을 진압하기 위한 소련의 개입 이후 이탈리아 공산당과의 관계를 끊었다.[1] 그러나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헌신을 포기하지 않았다.[2] 1983년 인터뷰에서 "나는 완전한 혁명가는 아니다. 나는 많은 이탈리아 유대인처럼 단지 좌파 사람일 뿐이다."라고 말했다.[2]

3. 영화 경력

질로 폰테코르보는 영화 감독, 각본가, 영화 음악 작곡가로 활동했다. 피사 대학교에서 화학 학위를 받은 후, 반유대주의를 피해 프랑스로 건너가 저널리즘에 입문했다. 1933년 파리에서 영화계에 발을 들여놓은 그는 여러 편의 단편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고 조감독으로 경력을 쌓았다. 이 시기 파블로 피카소,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장 폴 사르트르 등 저명인사들과 교류하며 시야를 넓혔고, 스페인 내전 참전자들과의 만남은 그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1941년 이탈리아 공산당에 입당한 폰테코르보는 북부 이탈리아에서 반파시스트 파르티잔을 양성했으며, 1943년부터 1945년까지 밀라노 레지스탕스 운동의 지도자로 활동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무방비 도시』에 감명을 받아 영화 제작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1956년 소련의 헝가리 침공에 실망하여 공산당을 탈당했지만,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관심은 계속 유지했다.

폰테코르보는 영화를 제작할 때 사회적 상황을 정확하게 묘사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투자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3. 1. 초기 영화 (1950년대)

폰테코르보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이탈리아로 돌아와 언론 활동을 접고 영화 제작을 시작했다.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파이자''(1946)를 본 것이 계기가 되었다.[3] 1953년 ''미시오네 티미라제프''를 시작으로 여러 다큐멘터리를 촬영했고, 1957년에는 아드리아 해의 작은 섬에서 어부와 그 가족의 삶을 다룬 첫 장편 영화 ''광활한 푸른 길''(''La grande strada azzurra'')을 연출했다. 이 영화는 카를로비 바리 국제 영화제에서 상을 받았다.

그 후 2년 동안 폰테코르보는 나치 강제 수용소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 ''카포''(1960)를 연출했다. 이 영화는 젊은 유대인 소녀의 강제 수용소 탈출 시도에 관한 것으로, 1961년 아카데미상에서 최우수 외국어 영화상 후보에 올랐다.[3] 같은 해, 이탈리아 영화 기자 협회는 디디 페레고에게 최우수 조연 여우상인 실버 리본을 수여했으며, 마르델플라타 영화제는 수잔 스트라스버그에게 여우주연상을 수여했다.

3. 2. 《카포》(1960)

1960년, 나치의 강제 수용소를 배경으로 한 영화 《카포》를 발표했다. 수용소에서 카포가 된 소녀(수잔 스트라스버그 분)를 그린 이 작품은 제33회 아카데미상에서 외국어 영화상 후보에 올랐다.[7]

3. 3. 《알제 전투》(1966)

폰테코르보는 1966년 걸작 《알제 전투》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이 영화는 알제리 전쟁 당시 알제리 저항군을 묘사하며, 네오리얼리즘 스타일을 사용했다. 그는 뉴스 영화 스타일의 영상과 비전문 배우들을 활용했다.[7]

그는 주로 일반 매체에서 거의 다루지 않았던 소외된 알제리 원주민들에게 초점을 맞췄다. 폰테코르보는 스타일 면에서 매우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적이었지만, 알제리 영화 회사와 공동 제작했다. 각본은 민족해방전선(FLN) 지도자들이 출연할 의도로 쓰여졌다. (예를 들어, 자파르 역은 FLN 지도자 야세프 사아디가 연기했다.) 폰테코르보의 주제는 분명히 반제국주의적이었다. 그는 나중에 이 영화를 "알제리뿐만 아니라 전 세계 제3세계에서 독립을 위해 투쟁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바치는 찬가"라고 묘사하며 "국가의 탄생은 양측 모두에게 고통을 수반하지만, 한쪽은 정당한 이유가 있고 다른 쪽은 그렇지 않다"라고 말했다.[7]

《알제 전투》는 큰 성공과 영향력을 거두었다. 이 영화는 미국에서 널리 상영되었으며, 폰테코르보는 여러 상을 받았다. 그는 감독상과 각본상(공동 작업)으로 두 번의 아카데미상 후보에 올랐다. 이 영화는 혁명 단체뿐만 아니라 게릴라 저항에 대처하는 군사 독재 정권(특히 콘도르 작전 기간인 1970년대)에서도 훈련용 비디오로 사용되었다. 이 영화는 알제리에서 매우 인기가 있었고 현재도 인기가 있으며, 프랑스로부터의 독립 투쟁에 대한 대중적인 기억을 제공한다.[7]

제27회 베네치아 국제 영화제에서 아내, 『알제 전투』의 원작자·출연자·프로듀서인 야세프 사디와 함께 참석했다(1966년).


1966년, 『알제 전투』를 발표했다. 알제리 독립 전쟁 당시 알제리 측 민중의 저항을 그린 이 작품은 로셀리니 등의 네오 리얼리즘의 영향을 받았으며, 뉴스 화면과 같은 영상과 아마추어 배우를 사용하여, 거의 보통의 미디어에서 주목받지 못했던 시민권을 갖지 못한 민중들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 제27회 베네치아 국제 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하고, 제39회 아카데미상에서 외국어 영화상에, 제41회 아카데미상에서 감독상각본상에 노미네이트되었다. 이 작품은 혁명 그룹과 마찬가지로 정부의 전략가를 훈련하기 위한 비디오로도 사용되었으며, 알제리에서는 해방 투쟁의 기억으로도 남아 있다.[7]

3. 4. 《케마다!》(1969)

말론 브란도가 주연한 이 영화는 가상의 포르투갈 식민지에서 일어나는 혁명을 다루며, 소앤틸리스 제도를 배경으로 가상의 노예 반란을 묘사한다.[4]

3. 5. 《오그로》(1979)

Operación Ogroes(''오그로 작전'')는 프란시스코 프랑코 독재 정권 말기에 발생한 바스크 테러 사건을 다룬 영화이다.[4] 이 영화는 바스크 조국과 자유(ETA)가 루이스 카레로 블랑코를 암살한 사건을 다룬다.

3. 6. 후기 활동

폰테코르보는 바스크 테러 사건을 다룬 ''오그로''(1979)를 제작했다. 그는 1990년대 초반까지 단편 영화를 계속 제작했으며, 《알제리 전투》의 후속 다큐멘터리인 《리토르노 아드 알제리》(1992)를 연출했다.[4]

1992년, 폰테코르보는 구글리엘모 비라기를 대신하여 베니스 영화제의 감독으로 선정되어 1992년부터 1994년까지 영화제를 책임졌다. 1991년에는 제41회 베를린 국제 영화제의 심사위원이었다.[4]

1991년 인터뷰에서 폰테코르보는 장편 영화를 적게 연출한 이유에 대해 자신이 완전히 사랑할 수 있는 영화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라고 답했으며, 흥미 부족으로 많은 영화 컨셉을 거절했다고 밝혔다.

4. 사망

질로 폰테코르보는 2006년 로마에서 울혈성 심부전으로 86세의 나이에 사망했다.[5][7]

5. 작품 목록

질로 폰테코르보는 다음과 같은 영화들을 감독했다.


알제 전투》(1966년)

  • 번! (1969)
  • 오그로 (1979)

5. 1. 장편 영화

제목개봉 연도감독각본음악비고
광활한 푸른 길 (La grande strada azzurra)1957카를로비바리 국제 영화제 크리스탈 글로브상 후보
카포 (Kapò)1960마르델플라타 국제 영화제 심사위원 대상 후보
알제리 전투 (La Battaglia di Algeri)1966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
최우수 감독상(이탈리아 은곰상) 수상
아카데미 감독상 후보
아카데미 각본상 후보
최우수 음악상(이탈리아 은곰상) 후보
번! (Burn!) (Queimada)1969다비드 디 도나텔로상 감독상 수상
오그로 (Operación Ogro)1979



5. 2. 단편 영화 및 다큐멘터리

제목연도감독비고
미시오네 티미리아제프[6]1953
포르타 포르테세1954
페스타 아 카스텔루초1954
우오미니 델 마르모1955
카니 디에트로 레 스바레1955
파네 에 조르포1959
글리 우오미니 델 라고1959
파라스1963
아디오 아 엔리코 베를링구에르1984
운 알트로 몬도 에 포시빌레2001
피렌체, 일 노스트로 도마니2003


  • ''조반나'' (1957, ''Die Windrose''의 일부)
  • ''우디네'' (1984, ''12명의 감독과 12개의 도시''의 일부)
  • ''질로 폰테코르보의 알제 복귀'' (1992)
  • ''사탕 요정의 춤'' (1996)
  • ''보호에 대한 향수'' (1997)

참조

[1] 학술지 Truman's bombs and De Gasperi's hooked-nose: images of the enemy in the Communist press for young people after 18 April 1948 2011-05
[2] 웹사이트 Rethinking Nordic Colonialism: A Postcolonial Exhibition Project in Five Acts http://www.rethinkin[...] 2006-03-24
[3] 웹사이트 The 33rd Academy Awards (1961) Nominees and Winners http://www.oscars.or[...] 2011-10-29
[4] 웹사이트 Berlinale: 1991 Juries http://www.berlinale[...] 2011-03-21
[5] 웹사이트 Talking with Gillo Pontecorvo http://geraldpeary.c[...]
[6] 서적 Film History: An Introduction, Third Edition McGraw Hill
[7] 웹사이트 Talking with Gillo Pontecorvo http://geraldpeary.c[...] 2018-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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