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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A. 비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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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찰스 A. 비어드는 미국의 역사학자이자 정치학자로, 1874년에 태어나 1948년에 사망했다. 그는 역사에서 사회경제적 요인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미국의 헌법 제정 및 남북 전쟁과 같은 사건들을 경제적 이해관계의 관점에서 분석했다. 비어드는 1926년 미국 정치학회 회장, 1933년 미국 역사학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저서로는 『미국 헌법의 경제적 해석』, 『미국 문명의 부상』 등이 있다. 그는 프랭클린 D. 루즈벨트 대통령의 외교 정책을 비판하며, 미국의 비간섭주의를 옹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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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A. 비어드
기본 정보
1917년의 비어드
1917년의 비어드
본명찰스 오스틴 비어드
출생지미국인디애나주나이츠타운
사망지미국코네티컷주뉴헤이븐
학력드포 대학교
옥스퍼드 대학교
컬럼비아 대학교
학위 논문 제목https://archive.org/details/officeofjusticeo02bearuoft
학위 논문 발표 년도1904년
사상적 경향진보주의 역사학
지도 교수프레더릭 요크 파월
영향을 준 인물윌리엄 애플먼 윌리엄스
학문 분야역사학
정치학
주요 저서미국 헌법의 경제적 해석 (1913년)
미국 문명의 흥기 (1927년)
경력
직장컬럼비아 대학교
도쿄시 (시정 고문)

2. 생애

찰스 A. 비어드는 1874년 인디애나주 나이츠타운에서 태어나 1948년 코네티컷주 뉴헤이븐에서 사망했다. 그는 역사에서 사회경제적 갈등과 변화의 중요성을 강조했으며, 미국의 여러 제도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경제적 이유가 있었다고 분석했다.

그의 고향 인디애나주 나이트스타운


비어드는 역사 연구에서 객관적인 해석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레오폴트 폰 랑케식 실증주의에 반대하며, 현대 역사 연구의 중요한 학파인 상대주의 학파를 만들었다. 그는 역사 연구에서 절대적인 진실과 완벽한 과거 복원은 불가능하며, 역사가의 주관적인 관점이 들어갈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생각은 20세기의 대표적인 역사관이 되어 에드워드 카에게 이어졌다.[1]

디포 대학교를 졸업하고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대학원 과정을 밟은 그는 월터 브루먼과 협력하여 노동자들이 다닐 수 있는 러스킨 칼리지(현 러스킨 칼리지)를 설립했다. 1902년 미국으로 돌아와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교수가 되었다. 1917년 제1차 세계 대전 참전을 지지했으나, 컬럼비아 대학교의 정치적 자유 문제로 사임했다.[1]

이후 독립적인 학자로서 뉴스쿨 설립을 도왔고, 일본을 방문하여 1923년 간토 대지진 이후 도쿄 재건에 대한 권고안을 담은 책을 발표하기도 했다.[3] 미국 정치학회 회장(1926년)과 미국 역사학회 회장(1933년)을 역임했다.[4][5]

프랭클린 D. 루즈벨트 대통령의 대외 정책에 반대하며 비간섭주의를 주장했고, 제2차 세계 대전 후에도 이 입장을 유지했다. 그는 마지막 두 권의 책에서 루즈벨트가 미국 국민을 속여 전쟁에 끌어들였다고 비난하여 논란이 되기도 했다.[7]

대표적인 저서로는 ≪미국 문명의 흥기(The Rise of American Civilization)≫, ≪루스벨트 대통령과 1941년 전쟁의 발발(President Roosevelt and the Coming of War 1941)≫ 등이 있다.[1]

2. 1. 어린 시절과 교육

찰스 오스틴 비어드는 1874년 11월 27일 인디애나주 나이트스타운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윌리엄 해리슨 비어드는 농부이자 건설업자, 파트타임 은행가이자 부동산 투기업자였다. 어린 시절 찰스는 가족 농장에서 일하고 지역 퀘이커 학교인 스피클랜드 아카데미에 다녔다. 그는 불분명한 이유로 학교에서 퇴학당했지만 1891년 나이트스타운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그 후 몇 년 동안 찰스와 그의 형제 클라렌스는 지역 신문을 운영했다. 그들의 편집 방향은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보수적이었다. 그들은 미국 공화당을 지지했고 금주법을 옹호했는데, 찰스는 후년에 이 문제에 대해 강연하기도 했다. 비어드는 인근 감리교 대학인 디포 대학교에 다녔고 1898년에 졸업했다. 그는 대학 신문의 편집장을 맡았고 토론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3]

비어드는 1899년 옥스퍼드 대학교의 프레더릭 요크 파월 밑에서 대학원 과정을 밟기 위해 잉글랜드로 갔다. 그는 월터 브루먼과 협력하여 노동자들이 다닐 수 있는 학교인 러스킨 칼리지(현 러스킨 칼리지)를 설립했다. 학생들은 감면된 수업료와 교환으로 학교의 여러 사업에 종사했다. 비어드는 러스킨 홀에서 처음으로 강의를 했고, 러스킨 홀을 홍보하고 통신 강좌 수강을 장려하기 위해 산업 도시의 노동자들에게 강의했다.[4] 그는 1902년 미국으로 돌아와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역사학으로 대학원 과정을 이수했다. 1904년 박사 학위를 받고 곧바로 강사로 교수진에 합류했다.[5] 비어드는 1900년 동급생인 메리 리터 비어드와 결혼했다. 역사가로서 그녀의 연구 관심사는 여성주의와 노동 조합 운동이었다.[6]

2. 2. 컬럼비아 대학교 교수 시절

비어드는 옥스퍼드 대학교에서의 유학을 마치고 1902년 미국으로 돌아와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역사학 대학원 과정을 이수했다. 1904년 박사 학위를 받고 곧바로 강사로 교수진에 합류했다.[3] 그는 역사학과에서 공법학과로, 이후 정치와 정부에 관한 새로운 교수직으로 자리를 옮겼다. 또한 바나드 대학교에서 미국 역사 강좌를 정기적으로 가르쳤으며,[4] 강의 외에도 토론팀을 지도하고, 특히 도시 개혁을 포함한 공공 문제에 대해 글을 썼다.[4]

컬럼비아 대학교 재직 시절 그는 학생들에게 구하기 어려운 많은 자료들을 제공했다. 그는 수많은 에세이와 발췌문들을 한 권으로 엮어 《영국 역사가 소개 (An Introduction to the English Historians)》(1906)라는 책을 출판했는데, 이는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총서였다.[3] 그는 학술 서적, 교재, 정치 잡지 기고문을 매우 활발하게 집필했다.

그가 컬럼비아 대학교 재직 시절 출판한 많은 저술들 중 가장 논란이 된 것은 《미국 헌법의 경제적 해석 (An Economic Interpretation of the Constitution of the United States)》(1913)이었다. 이 책은 미국 헌법 제정 회의 구성원들의 경제적 이해관계가 그들의 투표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한 해석을 제시했다. 그는 농업주의자들과 기업 이익 간의 극단적인 대립을 강조했다. 학계와 정치인들은 이 책을 비난했지만, 1950년대에 이의가 제기될 때까지 학자들 사이에서는 높이 평가받았다.[5]

1917년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컬럼비아 대학교 학생들이 평화주의자들을 비판하는 등의 정치적 자유 문제로 인해 컬럼비아 대학교를 사직했다.

2. 3. 제1차 세계 대전과 컬럼비아 대학교 사임

비어드는 미국의 제1차 세계 대전 참전을 강력하게 지지했다.[1] 그는 1917년 10월 8일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사임하며, "대학은 실제로 교육계에서 어떠한 지위도 없고, 정치적으로 반동적이며 비전이 없고, 종교적으로 협소하고 중세적인 소수의 적극적인 이사들의 통제하에 있다. 컬럼비아 대학교 이사들의 급료를 받는 한, 독일 제국에 대한 정의로운 전쟁을 지지하는 여론을 효과적으로 지지하는 데 제 역할을 할 수 없다고 확신한다."라고 비난했다.[1] 학문의 자유를 둘러싼 논쟁으로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교수들이 잇따라 사임한 후, 그의 친구인 제임스 하비 로빈슨도 1919년 5월 컬럼비아 대학교를 사임하여 뉴스쿨의 설립자 중 한 명이 되어 초대 소장을 역임했다.[1]

2. 4. 독립 학자로서의 활동

컬럼비아 대학교를 떠난 후, 비어드는 정규 교수직을 다시 구하지 않았다. 그의 재정적 독립은 《미국 문명의 부상》(1927)과 그 속편 《중도의 미국》(1939), 《미국 정신》(1943)을 포함한 교과서와 베스트셀러에서 얻은 막대한 저작료로 가능했다.[2] 비어드는 아내와 함께 코네티컷주에서 낙농장을 운영했는데, 이곳은 많은 학자들이 방문하는 곳이었다. 그는 맨해튼 그리니치 빌리지에 뉴스쿨 설립을 도왔는데, 이 학교는 교수진이 직접 회원을 통제하는 곳이었다. 도시 문제에 대한 관심을 넓혀 일본을 방문, 1923년 간토 대지진 이후 도쿄 재건에 대한 권고안을 담은 책을 발표하기도 했다.[3]

비어드는 역사가이자 정치학자로서 경력을 쌓았다. 1926년 미국 정치학회 회장, 1933년 미국 역사학회 회장을 역임했다.[4][5] 1936년에는 미국 철학회 회원으로 선출되었다.[6] 정치학 분야에서 그는 교과서, 헌법 연구, 도시 연구국 설립, 도시 공공 행정 연구로 잘 알려져 있다. 브룩우드 노동 대학에서 역사를 가르치기도 했다.

비어드는 뉴딜을 지지하는 대표적인 자유주의자이자 진보 운동의 지도적 지식인이었다. 그러나 그는 대부분의 진보 지도자들이 지지한 다수결 민주주의 비전을 비판적으로 보았다. 그는 개혁 청사진으로 직접 민주주의 조치를 지지하기보다는 투명한 방식으로 양당과 이익 집단을 통합하기 위해 미국 정부 시스템을 간소화하는 데 집중했다.

비어드는 프랭클린 D. 루즈벨트 대통령의 대외 정책에 반대했다. 퀘이커 출신인 그는 비간섭주의의 주요 지지자 중 한 명으로, 미국이 제2차 세계 대전에 개입하는 것을 막으려 했다. 그는 대안으로 "미국 대륙주의"를 제시하며 미국이 유럽에 중대한 이해관계가 없고, 해외 전쟁이 국내 독재로 이어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제2차 세계 대전 후에도 이 입장을 견지했다. 마지막 두 권의 책 《미국 외교 정책의 형성: 1932-1940》(1946)과 《루즈벨트 대통령과 전쟁의 개시》(1948)에서 비어드는 루즈벨트가 미국 국민을 속여 전쟁에 끌어들였다고 비난했는데, 이는 일부 역사학자와 정치학자들의 반박을 받았다. 그는 고립주의자로 비판받았다.[7] 그의 견해는 당대 많은 역사학자와 정치학자들에게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루즈벨트 대통령과 전쟁의 개시》에 나온 일부 주장은 1960년대 위스콘신 학파와 뉴 레프트 역사가들, 윌리엄 애플먼 윌리엄스, 가브리엘 콜코, 제임스 와인스타인에게 영향을 미쳤다. 보수 진영에서는 구보수주의자들, 팻 부캐넌에게 비어드의 대외 정책 견해가 인기를 얻었다. 특히 비간섭주의적 대외 정책을 옹호했던 그의 견해는 2001년 이후 소수의 자유주의 학자들 사이에서 부분적으로 재평가되고 있다. 보스턴 대학교 외교사학자 앤드류 베이세비치는 저서 《미국 제국》(2004)에서 냉전 이후 미국 외교 정책 비판의 출발점으로 비어드의 해외 무력 개입에 대한 회의론을 인용했다.

비어드는 1948년 9월 1일 코네티컷주 뉴 헤이븐에서 사망했다. 그는 뉴욕주 웨스트체스터 군 하츠데일 펀클리프 묘지에 안장되었고, 10년 후 아내 메리도 그곳에 합장되었다.

2. 5. 일본과의 관계

1922년(다이쇼 11년), 후지타 신페이의 초청으로 일본에 왔다. 이후 일단 귀국하여 다음 해인 1923년(다이쇼 12년)에 다시 일본에 가서 도쿄부 시정 고문으로 고용되었다. 같은 해에 발생한 관동 대지진 복구에 종사하는 등 도쿄시 재건에 공헌했다.[2] 그는 일본을 순방하고 1923년 간토 대지진 이후 도쿄 재건을 위한 권고안을 담은 책을 발표하기도 했다.[3]

2. 6. 정치학 및 역사학 분야 활동

비어드는 역사가이자 정치학자로서 활동했다. 미국 정치학회 회장을 1926년에,[2] 미국 역사학회 회장을 1933년에 역임했다.[3] 1936년에는 미국 철학회 회원으로 선출되었다.[4] 정치학 분야에서는 교과서, 헌법 연구, 도시 연구국 설립, 도시의 공공 행정 연구로 가장 잘 알려져 있으며, 브룩우드 노동 대학에서 역사를 가르치기도 했다.

그는 역사에서 사회경제적 갈등과 변화가 가지는 역동성을 강조하고, 미국의 여러 제도가 성립되는 과정에 경제적 동기가 개입되었다는 것을 분석했다. 또한 역사 연구에 있어서 객관적인 해석을 중시하는 19세기와 20세기 초의 레오폴트 폰 랑케식 실증주의에 반기를 들고, 현대 역사 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학파인 상대주의 학파를 만들었다. 그는 역사 연구에서 절대적인 진리와 완벽한 과거 복원은 불가능하고, 역사가의 주관적인 사관이 필연적으로 개입된다고 했다. 이러한 사관은 20세기의 대표적인 역사관이 되어 20세기 중반 이후 에드워드 카(E. H. Carr)로 이어졌다.

2. 7. 제2차 세계 대전과 비간섭주의

찰스 오스틴 비어드(Charles Austin Beard)는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제창한 뉴딜 정책을 비판하는 등, 경제 및 외교 관계에 관한 학술 연구도 수행했다.[1]

2. 8. 말년과 유산

찰스 A. 비어드는 1874년 미국 인디애나 주 나이츠타운에서 태어나, 1948년 코네티컷주 뉴헤이븐에서 사망했다. 그는 역사에서 사회경제적 갈등과 변화가 가지는 역동성을 강조하고, 미국의 여러 제도가 성립되는 과정에 경제적 동기가 개입되었다는 것을 분석했다. 또한 역사 연구에 있어서 객관적인 해석을 중시하는 19세기와 20세기 초의 레오폴트 폰 랑케식 실증주의에 반기를 들고, 현대 역사 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학파인 상대주의 학파를 만들었다. 그는 역사 연구에서 절대적인 진리와 완벽한 과거 복원은 불가능하고, 역사가의 주관적인 사관이 필연적으로 개입된다고 했다. 이러한 사관은 20세기의 대표적인 역사관이 되어 20세기 중반 이후 에드워드 카(E. H. Carr)로 이어졌다.[1]

미국 귀국 후에는, 모국의 역사의 보수와 혁신에 관한 많은 저서를 집필·간행했다. 1926년에 미국정치학회 회장, 1933년에는 미국역사학회 회장을 역임하는 등 정치학자이자 역사학자로서 유명해졌다. 또 당시 대통령이었던 프랭클린 루즈벨트가 제창한 뉴딜정책을 비판하는 등, 경제 및 외교 관계에 관한 학술 연구도 수행했다.[1]

대표적인 저서로는 ≪미국 문명의 흥기(The Rise of American Civilization)≫, ≪루스벨트 대통령과 1941년 전쟁의 발발(President Roosevelt and the Coming of War 1941)≫ 등이 있다.[1]

3. 주요 저서

출판 연도제목비고
1901산업혁명(The Industrial Revolution)[8]
1904잉글랜드의 사법관 직무: 그 기원과 발전(The Office of Justice of the Peace in England: In its Origin and Development)[9]
1913미국 헌법의 경제적 해석(An Economic Interpretation of the Constitution of the United States)
1914제퍼슨 민주주의의 몇 가지 경제적 기원(Some Economic Origins of Jeffersonian Democracy)미국사학회지(The American Historical Review)[10]
1915제퍼슨 민주주의의 경제적 기원(Economic Origins of Jeffersonian Democracy)[11]
1919국가 정부와 세계 대전(National Governments and the World War)프레더릭 오스틴 오그(Frederic Austin Ogg)와 공저[12]
1921미국사(History of the United States)메리 리터 비어드(Mary Ritter Beard)와 공저, 2권
1923도쿄의 행정과 정치(The Administration and Politics of Tokyo)
1927미국 문명의 부상(The Rise of American Civilization)메리 리터 비어드와 공저[13]
1929발칸의 중심축: 유고슬라비아: 정부와 행정에 관한 연구(The Balkan Pivot: Yugoslavia: A Study in Government and Administration)조지 라딘(George Radin)과 공저
1932진보의 한 세기(A Century of Progress)
1932강인한 미국 개인주의의 신화(The Myth of Rugged American Individualism)
1934신앙의 행위로서의 서면 역사(Written history as an act of faith)미국사학회지(American Historical Review)
1935그 고귀한 꿈(That Noble Dream)미국사학회지(The American Historical Review)[14]
1936전쟁의 악마 이론: 역사의 본질과 전쟁을 피할 가능성에 대한 연구(The Devil Theory of War: An Inquiry into the Nature of History and the Possibility of Keeping Out of War)
1939중간 과정의 미국(America in Midpassage)메리 리터 비어드와 공저
1940미국을 위한 외교 정책(A Foreign Policy for America)
1942미국 정신, 미국에서의 문명 사상에 대한 연구(The American Spirit, a Study of the Idea of Civilization in the United States)메리 리터 비어드와 공저
1946미국 외교 정책의 수립, 1932-1940; 책임에 관한 연구(American Foreign Policy in the Making, 1932–1940; a Study in Responsibilities)
1948루즈벨트 대통령과 전쟁의 시작, 1941; 외관과 현실에 관한 연구(President Roosevelt and the Coming of the War, 1941; a Study in Appearances and Realities)


4. 비어드의 사상과 영향

찰스 A. 비어드는 미국의 역사학자로, 사회경제적 갈등과 변화가 역사에서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는 미국의 여러 제도가 성립되는 과정에 경제적 동기가 작용했다고 분석했다. 1874년 인디애나 주에서 태어나 1948년 코네티컷 주에서 사망했다. 비어드는 객관적 해석을 중시하는 전통적 실증주의에 반대하고, 역사가의 주관이 개입될 수밖에 없다는 상대주의 역사학파를 만들었다. 이는 에드워드 카(E. H. Carr)에게 이어져 20세기 대표적인 역사관이 되었다.

비어드는 진보주의 역사 서술의 선구자로, 미국 헌법과 미국 남북 전쟁을 경제적 갈등의 관점에서 해석했다.[1] 그는 미국 북동부 산업가, 중서부 농민, 미국 남부 농장주 간의 갈등을 미국 남북 전쟁의 원인으로 보았다.[1] 헌법의 경제적 해석에서 헌법이 경제적 결정론자인 토지 소유 기초자들의 산물이라고 주장하여 당시 급진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1] 그는 이데올로기를 경제적 이해관계의 산물로 보았다.[1]

비어드는 남북 전쟁을 경제적 문제로, 노예제와 노예 해방 운동 같은 도덕적 문제는 부차적인 것으로 보았다. 주권에 대한 헌법적 문제나 미국 민족주의는 무시했고, 전투 자체도 일시적인 사건으로 간주했다.[7] 찰스 램즈델은 비어드가 남북전쟁의 원인을 경제적 문제로 강조했으며, 노예제도의 옳고 그름과는 관련이 없다고 주장했다.

주요 저서로는 ≪미국 문명의 흥기(The Rise of American Civilization)≫, ≪루스벨트 대통령과 1941년 전쟁의 발발(President Roosevelt and the Coming of War 1941)≫ 등이 있다.

4. 1. 진보주의 역사학

비어드는 "진보주의 역사가" 또는 "진보주의 역사 서술"의 선구자로서 미국 헌법 채택과 미국 남북 전쟁이 초래한 변혁과 관련하여 경제적 자기 이익과 경제적 갈등이라는 주제를 도입했다.[1] 그는 미국 북동부의 산업가, 중서부의 농민, 미국 남부의 농장주들 사이의 장기적인 갈등을 강조했는데, 그는 이들을 미국 남북 전쟁의 원인으로 보았다.[1] 그가 미국 헌법의 기초자들의 재정적 이해관계에 대한 연구 (''헌법의 경제적 해석'')는 1913년 당시 급진적인 것으로 여겨졌는데, 그는 그것이 경제적 결정론자인 토지 소유 기초자들의 산물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1] 그는 이데올로기를 경제적 이해관계의 산물로 보았다.[1]

4. 2. 헌법 해석에 대한 논쟁

비어드가 컬럼비아 대학교에 재직할 당시 출판한 저술 중 가장 논란이 된 것은 1913년에 출간된 《미국 헌법의 경제적 해석》이었다. 이 책에서 비어드는 헌법 제정 회의 구성원들의 경제적 이해관계가 투표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분석했다. 그는 농업주의자와 기업 이익 간의 대립을 강조했다. 학계와 정치인들은 이 책을 비난했지만, 1950년대까지 학자들 사이에서는 높이 평가받았다.[6]

역사가 칼 L. 베커(Carl L. Becker)는 저서 《뉴욕 주의 정당사, 1760-1776》(1909)에서 미국 독립혁명에 대해 두 가지 혁명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하나는 자치를 위한 대영국 혁명이고, 다른 하나는 국내 권력을 누가 잡을 것인가를 결정하는 혁명이었다. 비어드는 《미국 헌법의 경제적 해석》(1913)과 《제퍼슨 민주주의의 경제적 해석》(1915)에서 계급 갈등이라는 관점으로 베커의 논제를 확장했다. 비어드에게 헌법은 부유한 채권 보유자들(채권을 가진 사람들)이 농민과 지주들(토지를 가진 사람들)에 대항하여 수립한 반혁명이었다. 비어드는 헌법이 혁명으로 인해 일반 대중, 특히 농민과 채무자들 사이에서 촉발된 급진적인 민주적 경향을 역전시키도록 고안되었다고 주장했다. 1800년에 농민과 채무자들은 플랜테이션 노예 소유주들의 지도하에 자본가들을 타도하고 제퍼슨 민주주의를 수립했다고 보았다. 다른 역사가들은 주들이 반역자(Loyalist)들의 거대한 반봉건적 토지 소유권을 몰수하여 소규모로 일반 농민들에게 분배했다는 점을 지적하며 계급 갈등 해석을 뒷받침했다.[6]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William Howard Taft)와 같은 보수주의자들은 헌법을 폄하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진보적 해석에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많은 학자들이 결국 비어드의 논제를 받아들였고, 1930년까지는 당시의 표준적인 해석이 되었다.[6]

1950년경부터 역사가들은 유권자들이 실제로 두 개의 경제적 입장으로 양극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진보적 해석이 사실상 틀렸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찰스 A. 바커, 필립 크라울, 리처드 P. 매코믹(Richard P. McCormick), 윌리엄 풀, 로버트 토마스, 존 문로, 로버트 E. 브라운, B. 캐서린 브라운, 그리고 특히 포레스트 맥도널드(Forrest McDonald)가 이러한 주장을 주도했다.[6] 포레스트 맥도널드는 저서 《우리 국민: 헌법의 경제적 기원》(1958)에서 비어드가 헌법 제정에 관여된 경제적 이해관계를 잘못 해석했다고 주장했다. 토지와 상업의 두 가지 상반되는 이해관계 대신, 맥도널드는 상반되는 목표를 가진 30여 가지의 식별 가능한 경제적 이해관계를 확인했고, 이것이 대표자들이 타협하도록 강요했다고 주장했다.[6] 피터 노빅(Peter Novick)은 역사적 논쟁을 평가하면서 "1960년대 초 역사학계에서는 ... 비어드의 ... 헌법 제정에 대한 진보적 견해가 결정적으로 반박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졌다. 미국의 역사가들은 ... 헌법 제정자들이 이기적인 동기가 아니라 정치적 통합, 국가 경제 발전 및 외교적 안보에 대한 우려에 따라 행동했다고 보게 되었다."라고 결론지었다.[6] 비어드의 전기 작가인 엘렌 노어는 그의 헌법 해석이 최근의 더욱 정교한 분석으로 무너졌다고 결론짓는다.[6]

이러한 견해는 비어드가 항상 비판해 온 입장, 즉 당의 이해관계가 요구할 때 수사적 이상을 바꾸는 경향이 있다는 입장을 재확인한 것에 불과했다.[6] 비어드의 경제적 결정론은 주로 사상의 힘, 특히 공화주의가 혁명을 자극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을 강조하는 지적 역사 접근 방식으로 대체되었다.[6] 그러나 미국 역사 행위자들의 경제적 이해관계를 조사하려는 유산은 21세기에도 여전히 발견할 수 있다. 최근에 로버트 A. 맥과이어는 『더 완벽한 연합을 형성하기: 미국 헌법의 새로운 경제적 해석』(2003)에서 정교한 통계 분석에 의존하여 헌법 제정에 있어 경제적 이해관계의 영향에 대한 비어드의 기본적인 논제가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6]

4. 3. 남북전쟁과 재건 시대 해석

비어드의 남북전쟁 해석은 1927년 출판 이후 1950년대 후반 미국의 시민권 운동 시대까지 역사학자들과 일반 대중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비어드는 노예제, 노예 해방 운동, 그리고 도덕적 문제들을 축소하여 다루었다. 그는 주권에 대한 헌법적 문제들을 무시했으며, 전쟁에서 최종 승리를 이끈 힘으로서의 미국 민족주의조차 무시했다. 실제로 격렬했던 전투 자체는 단순히 일시적인 사건으로 간과되었다. 찰스 램즈델은 비어드가 남북전쟁의 원인을 경제적 문제로 강조했으며, 노예제도의 옳고 그름과는 근본적으로 관련이 없다고 주장했다.[7]

토마스 J. 프레스리는 비어드가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이념적 차이에 뿌리를 둔 경쟁하는 지역 국가 간의 갈등"을 묘사한 기존의 국수주의적 해석에 맞서 싸웠다고 말한다. 프레스리는 비어드가 대신 "상이한 물질적 이익에서 기원한 두 경제 체제 간의 투쟁"을 묘사했다고 말했다. 계급 투쟁의 계산이 훨씬 더 중요했다. 비어드는 남북전쟁이 실제로는 "북부와 서부의 자본가, 노동자, 농민들이 남부의 농장 귀족을 국가 정부에서 권좌에서 몰아낸 사회적 대격변"이라고 선언하면서, 이러한 사건들을 두 번째 미국 혁명이라고 주장했다. 비어드는 특히 전후 시대에 관심이 많았는데, 북동부의 산업가들과 서부의 농민들이 남부 귀족에 대한 승리의 대가를 거두었기 때문이다. 호프슈타터는 비어드의 주장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 "북부 자본가들은 그들의 경제 계획을 강제로 적용할 수 있었고, 관세, 은행, 자영농, 이민에 관한 일련의 조치들을 신속하게 통과시켜 경제 개발 계획의 성공을 보장했다. 흑인 해방에 대한 배려는 북부의 정책과 거의 관련이 없었다. 흑인에게 시민권을 부여한 14조 수정 조항은 비어드가 주로 기업에 우호적인 소수의 입법 초안 작성자들의 음모의 결과로 여겼는데, 그들은 흑인의 지위 향상이라는 명목 아래 주 정부의 규제로부터 기업에 강력한 보호를 제공하는 기본 법을 만들었다."

재건 시대와 금빛 시대를 다루면서, 하워드 비일과 C. 반 우드워드와 같은 비어드의 제자들은 탐욕과 경제적 원인에 초점을 맞추고 부패의 중심성을 강조했다. 그들은 평등권에 대한 수사가 진정한 동기, 즉 북동부의 산업가들의 이익을 증진시키기 위한 연막이라고 주장했다. 기본적인 결함은 통일된 사업 정책이 있다는 가정이었다. 1950년대 이후 비어드의 경제적 접근 방식은 거부되었는데, 특정 하위 집단을 연구한 보수적인 학자들이 사업가들이 정책에 대해 통일되어 있다는 비어드의 가정에 심각한 결함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사업가들은 통화 또는 관세 정책에 대해 광범위하게 의견이 달랐다. 펜실베이니아 사업가들은 높은 관세를 원했지만 다른 주의 사업가들은 그렇지 않았다. 철도는 대량으로 구매하는 철강에 대한 관세로 인해 피해를 입었다.

4. 4. 비간섭주의와 외교 정책 비판

비어드는 남북 전쟁을 경제적 문제로 강조하고, 노예제, 노예 해방 운동과 같은 도덕적 문제들을 축소하여 다루었다. 그는 주권에 대한 헌법적 문제나 미국 민족주의를 무시하고, 격렬했던 전투 자체도 일시적인 사건으로 간과했다.[7] 찰스 램즈델은 비어드가 남북전쟁의 원인을 경제적 문제로 강조했으며, 노예제도의 옳고 그름과는 근본적으로 관련이 없다고 주장했다.

토마스 J. 프레스리에 따르면, 비어드는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이념적 차이에 뿌리를 둔 경쟁하는 지역 국가 간의 갈등"을 묘사한 기존의 국수주의적 해석에 맞서, "상이한 물질적 이익에서 기원한 두 경제 체제 간의 투쟁"을 묘사했다.[7] 비어드는 남북전쟁을 "북부와 서부의 자본가, 노동자, 농민들이 남부의 농장 귀족을 국가 정부에서 권좌에서 몰아낸 사회적 대격변"으로 규정하고, 이를 두 번째 미국 혁명이라고 주장했다.

비어드는 특히 전후 시대에 관심이 많았는데, 북동부의 산업가들과 서부의 농민들이 남부 귀족에 대한 승리의 대가를 거두었기 때문이다. 호프슈타터는 비어드의 주장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 "북부 자본가들은 그들의 경제 계획을 강제로 적용할 수 있었고, 관세, 은행, 자영농, 이민에 관한 일련의 조치들을 신속하게 통과시켜 경제 개발 계획의 성공을 보장했다. 흑인 해방에 대한 배려는 북부의 정책과 거의 관련이 없었다. 흑인에게 시민권을 부여한 14조 수정 조항은 비어드가 주로 기업에 우호적인 소수의 입법 초안 작성자들의 음모의 결과로 여겼는데, 그들은 흑인의 지위 향상이라는 명목 아래 주 정부의 규제로부터 기업에 강력한 보호를 제공하는 기본 법을 만들었다."

재건 시대와 금빛 시대를 다루면서, 하워드 비일과 C. 반 우드워드와 같은 비어드의 제자들은 탐욕과 경제적 원인에 초점을 맞추고 부패의 중심성을 강조했다. 그들은 평등권에 대한 수사가 진정한 동기, 즉 북동부의 산업가들의 이익을 증진시키기 위한 연막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1950년대 이후 비어드의 경제적 접근 방식은 거부되었는데, 보수적인 학자들이 사업가들이 정책에 대해 통일되어 있다는 비어드의 가정에 심각한 결함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사업가들은 통화 또는 관세 정책에 대해 광범위하게 의견이 달랐다. 펜실베이니아 사업가들은 높은 관세를 원했지만 다른 주의 사업가들은 그렇지 않았다. 철도는 대량으로 구매하는 철강에 대한 관세로 인해 피해를 입었다.

참조

[1] 뉴스 Quits Columbia; Assails Trustees https://www.nytimes.[...] 1917-10-09
[2] 웹사이트 Past Presidents List http://www.apsanet.o[...]
[3] 웹사이트 Past Presidents List http://www.historian[...]
[4] 웹사이트 APS Member History https://search.amphi[...] 2023-06-02
[5] 웹사이트 The Old Cause http://www.antiwar.c[...]
[6] 서적
[7] 서적
[8] 웹사이트 The industrial revolution http://archive.org/d[...] London : S. Sonnenschein & co., lim. 1901-05-02
[9] 웹사이트 The office of justice of the peace in England in its origin and development http://archive.org/d[...]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904-05-02
[10] 학술지 Some Economic Origins of Jeffersonian Democracy http://www.jstor.org[...]
[11] 웹사이트 economic origins of jeffersonian democracy http://archive.org/d[...] 1915-05-02
[12] 웹사이트 National Governments and the World War http://archive.org/d[...] 1919-05-02
[13] 웹사이트 Rise of American civilization http://archive.org/d[...] New York: Macmillan, 1930 1930-05-02
[14] 학술지 That Noble Dream http://www.jstor.org[...]
[15] 웹사이트 南北戦争の経済史的意義(1) 研究史の整理 https://hdl.handle.n[...]
[16] 웹사이트 On Monuments and Historical Memory https://www.independ[...]
[17] 웹사이트 Contemporary American history https://purl.dlib.in[...]
[18] 웹사이트 米国近世政治経済史 {{国立国会図書館のデジタル化資料|10[...]
[19] 웹사이트 政治の経済的基礎 {{国立国会図書館のデジタル化資料|96[...]
[20] 웹사이트 The administration and politics of Tokyo https://hdl.handle.n[...]
[21] 웹사이트 東京市政論 {{国立国会図書館のデジタル化資料|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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