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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사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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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최사추는 고려 시대의 문신으로, 문종 때 과거에 급제하여 선종, 헌종, 숙종, 예종 대에 걸쳐 40여 년간 벼슬하며 활약했다. 그는 요나라 사신 왕정의 문서를 입수하여 외교적 능력을 인정받아 관직이 올랐으며, 고문개 등의 반역 모의를 적발하여 문하시중에 임명되고 보정공신 칭호를 받았다. 숙종 대에 수태보로 있다가 사직을 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예종 대에 수태사 중서령으로 치사했다. 최사추는 청렴하고 부지런하며, 늙어서도 나라를 걱정하는 충심을 보였으며, 사후 숙종 묘정에 배향되고 시호는 충경이다.

2. 생애

어렸서부터 공부에 힘쓰고 글을 잘 지었다. 1063년(문종 17) 과거에 급제한 후, 선종조에 전중소감 지상서호부사(殿中少監 知尙書戶部事)에 임명되었고 서경부유수(西京副留守)가 되었다.[1] 요나라 사신 왕정(王鼎)의 문서를 입수하여 왕에게 보고하여 어사대부(御史大夫)로 임명되고, 동지중추원사 좌산기상시(同知中樞院使 左散騎常侍)로 옮겼다.[1]

헌종(獻宗) 대에 이부상서 지추밀원사(吏部尙書 知樞密院事)에 임명되었다.[1] 숙종 즉위 후 참지정사(叅知政事)를 거쳐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로 승진했다.[1] 1103년(숙종 8) 수태위 판이부사(守太尉 判吏部事)에 올랐다.[1]

같은 해 대장군(大將軍) 고문개(高文盖) 등의 반역 모의를 적발하여 처벌하고, 그 공으로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임명되고 보정공신(輔正功臣) 칭호를 받았다.[1]

1104년(숙종 9)에 수태보(守太保)로서 늙었다고 하여 세 번이나 사직을 청하였으나, 숙종이 허락하지 않았다.[1] 위계정은 최사추의 사직을 반대하는 의견을 내기도 했다.[1]

최사추는 부지런하고 청렴하였으며, 벼슬한지 40여 년 동안에 작은 과실도 없었다. 재상이 되어서는 대체(大体)를 힘쓰고 보존하는 것을 논의하였으며, 감히 함부로 옛 법을 고치지도 않았다.[1]

2. 1. 초기 생애와 관직 진출

최사추는 어렸서부터 공부에 힘쓰고 글을 잘 지었다. 1063년(문종 17) 과거에 급제하였다.[1] 명문가 자제로서 학식이 넓고 견문이 풍부하여 왕의 눈에 띄어 내시(內侍)로 발탁되었으며, 왕과의 문답에서 능력을 인정받아 왕의 총애를 받았다.[1]

2. 2. 외교적 활약과 정치적 성장

선종 대에 전중소감 지상서호부사(殿中少監 知尙書戶部事)에 임명되었고 서경부유수(西京副留守)로 파견되었다.[1] 요나라 사신 왕정(王鼎)을 접대하면서 계략을 써서 요나라의 내부 정보를 빼돌리는 등 외교적 능력을 발휘했다.[1] 요나라 사신의 상소문에는 "요는 태평한 날이 오래되어 군사(軍事)에 힘쓸 준비가 되어있지 않습니다."라는 내용과 송(宋)이 남하(南夏)를 정벌하는 일을 언급하였다.[1] 이 공로로 어사대부(御史大夫), 동지중추원사 좌산기상시(同知中樞院使 左散騎常侍) 등으로 승진했다.[1]

2. 3. 고려 조정에서의 역할

어렸서부터 공부에 힘쓰고 글을 잘 지었다. 1063년(문종 17) 과거에 급제한 후, 선종(宣宗)조에 전중소감 지상서호부사(殿中少監 知尙書戶部事)에 임명되었고 서경부유수(西京副留守)가 되었다.[1] 요나라 사신 왕정(王鼎)의 문서를 입수하여 왕에게 보고하여 어사대부(御史大夫)로 임명되고, 동지중추원사 좌산기상시(同知中樞院使 左散騎常侍)로 옮겼다.[1]

헌종(獻宗) 대에 이부상서 지추밀원사(吏部尙書 知樞密院事)에 임명되었다.[1] 숙종(肅宗) 즉위 후 참지정사(叅知政事)를 거쳐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로 승진했다.[1] 1103년(숙종 8) 수태위 판이부사(守太尉 判吏部事)에 올랐다.[1]

같은 해 대장군(大將軍) 고문개(高文盖) 등의 반역 모의를 적발하여 처벌하고, 그 공으로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임명되고 보정공신(輔正功臣) 칭호를 받았다.[1]

1104년(숙종 9)에 수태보(守太保)로서 늙었다고 하여 세 번이나 사직을 청하였으나, 숙종이 허락하지 않았다.[1] 위계정(魏繼廷)은 최사추의 사직을 반대하는 의견을 내기도 했다.[1]

최사추는 부지런하고 청렴하였으며, 벼슬한지 40여 년 동안에 작은 과실도 없었다. 재상이 되어서는 대체(大体)를 힘쓰고 보존하는 것을 논의하였으며, 감히 함부로 옛 법을 고치지도 않았다.[1]

2. 4. 은퇴와 죽음

1104년(숙종 9) 고령을 이유로 여러 차례 사직을 청했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았다. 위계정 등 중신들이 만류하고 숙종이 간곡하게 부탁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사직했다.[1]

예종 대에 수태사 중서령(守太師 中書令)으로 치사(致仕)했으며, 왕으로부터 조서(詔書)·제첩(制牒)·다약(茶藥)·의백(衣帛)·안장 얹은 말(鞍馬)을 받는 등 극진한 예우를 받았다. 왕이 이전에 용봉다(龍鳳茶)를 하사하자, 최사추가 감사하는 시를 지어 올렸고, 왕은 이에 화답하는 시를 내렸다.[1]

왕실과의 인척 관계를 통해 더욱 두터운 신임을 받았으며, 80세의 나이에도 나라를 걱정하는 충심을 보였다. 최사추가 죽자 왕은 크게 슬퍼하며 3일 동안 조회를 정지하고, 부의를 넉넉하게 하사했으며, 백관(百官)이 모여 장례를 치르도록 하였다. 사후 숙종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충경(忠景)이다.[1]

3. 가계

조부는 문하시중 최충이고, 아버지는 상서령 최유길이다. 어머니는 충주 박씨이다. 형제로는 최사량(崔思諒)과 최사훈(崔思訓)이 있다. 부인은 인천 이씨이다.

3. 1. 가계도

조부는 문하시중 최충(崔冲)이고, 아버지는 상서령 최유길(崔惟吉)이다. 어머니는 충주 박씨(忠州朴氏)이다. 형제로는 최사량(崔思諒)과 최사훈(崔思訓)이 있다. 부인은 인천 이씨(仁川李氏)이다.

4. 평가

4. 1. 긍정적 평가

4. 2. 부정적 평가

4. 3. 종합적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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