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인규 (영화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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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최인규는 1911년 평안북도 영변군 출신의 영화 감독이다. 1939년 《국경》으로 데뷔하여 일제강점기 후반 친일 영화를 다수 제작했다. 광복 후 우익 계열에서 활동하며, 해방 후 최초의 한국 영화로 알려진 《자유만세》를 연출했다. 1949년 《파시》를 마지막으로 한국 전쟁 중 행방불명되었으며, 친일 행적으로 인해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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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규 (영화 감독)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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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최인규 |
한자 표기 | 崔寅奎 |
본명 | (본명 정보 없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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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일 | 1911년 12월 10일 |
출생지 | 일제 강점기 조선 평안북도 영변군 (현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안북도 녕변군) |
사망일 | 1950년 (추정) |
사망지 | 북한 |
국적 | 일제 강점기 조선, 대한민국 |
직업 | 영화 감독, 영화 배우 |
활동 기간 | 1937년 – 1950년 |
배우자 | 김신재 |
자녀 | (자녀 정보 없음) |
수상 | (수상 정보 없음) |
웹사이트 | (웹사이트 정보 없음) |
2. 생애
최인규는 1911년 평안북도 영변군 출신으로, 인기 영화 배우 김신재의 남편이었다. 형 최완규는 고려영화사 사장이었다. 최인규는 평양상업학교를 중퇴하고 일본에서 운전 조수로 일하며 영화에 관심을 가졌으나, 교토 영화 촬영소 입소에는 실패했다. 1929년경 귀국하여 신의주에서 일하다 1935년 전후 신의주 신연극장에서 영사기사로 근무했다.
1937년경 경성부로 와 이필우의 조수로 영화계에 입문, 《심청》, 《도생록》(1938) 등에 참여하며 경력을 쌓았다. 발성 영화 시대에 기술 인력 세대교체 흐름을 타고 영화계 주도권을 잡았다. 1939년 《국경》으로 데뷔 후, 《태양의 아이들(太陽の子供達일본어)》, 《신풍의 아들들(神風の子供達일본어)》, 《사랑의 맹서(愛の誓일본어)》 등 친일 영화를 다수 연출했다.[1] 1940년부터 1945년 사이 국내 제작 영화 26편 중 친일 영화 18편 가운데 5편을 감독하여, 친일 행적 논란에 휩싸였다.
최인규는 저돌적 성격에 거칠고 강렬한 스타일의 영화를 추구했다. 일본 유학 경험은 없지만, 독특한 사실주의 기법으로 일본 영화계에서도 재능을 인정받았다. 광복 후 1946년 영화감독구락부 등 우익 계열에서 활동하며, 해방 후 최초의 한국 영화 《자유만세》(1946)를 연출했다.[2] 1949년 《파시(波市)》를 마지막으로 한국 전쟁 중 행방불명되었는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납치되어 탈출 시도 중 살해된 것으로 추정된다.[3]
2. 1. 초기 생애 및 영화계 입문
최인규한국어는 1911년 평안북도 영변군에서 태어났다. 인기 영화 배우였던 김신재의 남편이며, 형인 최완규는 고려영화사 사장이었다.평양상업학교를 중퇴하고 자동차 운전을 배운 뒤 일본에 건너가 운전 조수 생활을 했다. 이때부터 영화에 관심을 가져 교토의 영화 촬영소에 입소하려고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1929년경 고향에 돌아와 신의주 신연철공주식회사에서 일했고, 1935년을 전후하여 신의주 신연극장에서 영사기사로 근무했다.
1937년경 경성부로 올라와 녹음기사 이필우의 조수가 되면서 영화계에 정식으로 입문하였다. 안석영 감독의 《심청》 녹음에 참여해 이필우를 도왔고, 이어서 윤봉춘의 《도생록》(1938) 촬영에 조감독으로 발탁되어 녹음을 맡았다. 이 무렵은 발성 영화의 등장으로 영화 기술 인력의 세대 교체가 이루어지던 시기였는데, 최인규는 이필우로 대표되는 구세대를 밀어내고 영화계에서 주도권을 장악하기 시작했다.[1]
2. 2. 감독 데뷔 및 친일 영화 제작
1939년에 《국경》을 연출해 데뷔한 뒤 일제 강점기 후반에 친일 영화를 여럿 연출했다. 예를 들어 부인인 김신재가 출연한 《태양의 아이들(太陽の子供達일본어)》은 시골의 국민학교 교사가 내선일체 논리를 잘 홍보하여 제자들을 지원병으로 참전하게 한다는 내용이다. 비슷한 주제를 형상화한 《신풍의 아들들(神風の子供達일본어)》과 《사랑의 맹서(愛の誓일본어)》도 발표했다.[1]최인규는 저돌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고, 영화 스타일도 거칠고 강렬한 편이었다. 비슷한 기간에 활동한 박기채 등 다른 감독들은 일본 유학파 출신이었으나 최인규는 유학 경력이 없었다. 그런 만큼 독특한 스타일의 사실주의 기법을 구사했으며, 그의 재능은 일본 영화계에서 인정받았다.
1940년부터 1945년 사이 국내에서 제작된 영화는 총 26편이었는데, 이 가운데 친일 영화로 분류하기 모호한 8편을 뺀 나머지 18편은 분명한 친일 영화이다. 최인규는 이 18편 가운데 감독별 편수로는 가장 많은 다섯 편을 연출했다.[1] 이처럼 뚜렷한 친일 경력으로 태평양 전쟁 종전 후에 친일 청산 논란이 있을 때 궁색한 처지에 놓이기도 했다.
2. 3. 광복 후 활동 및 납북
광복 후 1946년 영화감독구락부에 가담하는 등 우익 계열에서 활동했고,[2] 해방 이후 만들어진 최초의 한국 영화로 알려진 《자유만세》(1946년)를 연출했다. 1949년 흑산도를 배경으로 한 사실주의 영화 《파시(波市)》를 마지막으로 한국 전쟁 때 행방불명되었는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납치된 것으로 추정되며,[3] 탈출을 시도하다가 살해당했다는 설이 있다.3. 사후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연극/영화 부문에 부인 김신재와 함께 포함되었다.[4]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신상옥은 최인규의 조감독으로 영화 연출을 시작했고[5], 자신의 영화 스승으로 나운규와 찰리 채플린, 그리고 최인규를 꼽은 바 있다.[6] 홍성기도 최인규의 문하생 출신이다.[7]
4. 작품 목록
최인규는 감독, 각본, 촬영, 편집 등 다양한 역할로 영화 제작에 참여했다. 다음은 그의 작품 목록이다.
4. 1. 감독
연도 | 제목 | 역할 | 비고 |
---|---|---|---|
1939 | 국경 | 감독, 각본, 편집 | |
1940 | 수업료 | 감독 | |
1941 | 집 없는 천사 | 감독, 기획 | |
1944 | 태양의 아이들 | 감독 | |
1945 | 사랑의 맹서 | 감독 | |
1945 | 신풍의 아들들 | 감독 | |
1946 | 자유만세 | 감독 | |
1948 | 죄없는 죄인 | 감독, 편집 | |
1948 | 국민투표 | 감독, 각본, 촬영 | |
1948 | 독립 전야 | 감독, 주연, 각본, 원작자 | |
1948 | 희망의 마을 | 감독, 각본, 편집 | |
1949 | 파시 | 감독, 촬영, 편집 |
4. 2. 기타
제목 | 역할 |
---|---|
파시 (1949년) | 감독, 촬영, 편집 |
희망의 마을 (1948년) | 감독, 각본, 편집 |
독립 전야 (1948년) | 감독, 주연, 각본, 원작자 |
국민투표 (1948년) | 감독, 각본, 촬영 |
죄없는 죄인 (1948년) | 감독, 편집 |
자유만세 (1946년) | 감독 |
신풍의 아들들 (1945년) | 감독 |
사랑의 맹서 (1945년) | 감독 |
태양의 아이들 (1944년) | 감독 |
망루의 결사대 (1943년) | 기획, 편집 |
복지만리 (1941년) | 녹음 |
집 없는 천사 (1941년) | 감독, 기획 |
수업료 (1940년) | 감독 |
국경 (1939년) | 감독, 각본, 편집 |
무정 (1939년) | 녹음 |
참조
[1]
간행물
영화계 친일행위의 논리와 성격
http://www.artnstudy[...]
디지털 웹진 Now Art
2002
[2]
서적
한국현대 예술사대계 1 (해방과 분단 고착 시기)
시공사
1999-12-22
[3]
웹사이트
최인규 (崔寅奎)
http://www.kwari.org[...]
한국전쟁 납북사건 자료원
[4]
뉴스
한국 영화의 근간도 친일 -
[5]
뉴스
납북·탈북 ‘영화같은 인생’ 막 내려 - 신상옥 감독 별세
http://www.hani.co.k[...]
한겨레
2008-07-13
[6]
뉴스
영화기자 모임 해체 요구 시위, 일 경찰‘영화인폭동사건’이라며 검거령
https://web.archive.[...]
씨네21
2008-07-13
[7]
뉴스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메가폰을 잡다
http://www.cine21.co[...]
씨네21
2008-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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