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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운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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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운규는 일제강점기 대한민국의 영화감독, 배우, 극작가, 독립운동가이다. 함경북도 회령에서 태어나 독립운동에 참여했으며, 1924년 영화계에 입문하여 배우로 활동하다가 1926년 영화 《아리랑》을 제작하여 민족주의 영화의 선구자로 평가받았다. 그는 《아리랑》을 비롯하여 《풍운아》, 《벙어리 삼룡》 등 여러 작품을 감독, 제작, 출연하며 한국 영화 발전에 기여했으나, 36세의 젊은 나이에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1993년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헌을 기려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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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운규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나운규
한글나운규
한자羅雲奎
로마자 표기Na Un-gyu
출생일1902년 11월 26일
출생지함경북도 회령시(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망일1937년 8월 9일
사망지일제 강점기 조선 경성부(현 서울특별시, 대한민국)
국적대한제국
직업배우
영화감독
영화제작자
독립운동가
영화 기획가
영화 연출가
영화 각본가
영화 편집감독
영화 각색가
투자가
활동 기간1924년 ~ 1937년
배우자조정옥 여사
부모나형권(부)
자녀나종익(장남)
나신자(딸)
나봉한(차남)
학력중화민국 본토 국민정부 시대 만저우 지역 지린룽징 명동중학교 중퇴
수상1993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형제자매3남 3녀 중 막내 (누나 3명, 형 2명(둘째형 나시규(연희전문학교 중퇴))
종교유교(성리학) → 개신교(장로회)
호(號)춘사(春史)
로마자 표기 (호)Chunsa
주요 작품
대표작아리랑
사진
나운규 사진

2. 생애

함경북도 회령에서 출생했다.[18] 본관은 나주 나씨이다. 회령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신흥학교 고등과로 진학, 1918년에는 만주 간도에 있는 명동중학에 들어갔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학교가 폐교되는 바람에 1여 년 동안 북간도와 만주지방을 유랑했다. 이때 독립군 단체와 관련을 맺으면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청회선터널 폭파 미수 사건’의 피의자로 체포되어 청진교도소에서 1년 6개월 동안 복역하고 1923년에 출소한 후 만주로 도피하여 마적단에게 첩자로 몰려 체포되어 온갖 고초를 겪다가 마적단들이 술에 취해서 잠든 틈을 타서 같은 조선사람의 도움으로 풀려나게 된다.[19] 1920년에는 독립군 지도자 중 한 명인 홍범도 장군 산하의 부대에서 활동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20]

1924년 연극의 단역 무대를 처음으로 밟은지도 아직 얼마 아니 되어, 같은해에 일본인이 관리하는 ‘조선 키네마사’에 연구생으로 입사, 윤백남 감독의 《운영전》에서 가마꾼 역(단역)으로 출연하였다. 이후 《농중조》에 출연하며 본격적인 배우로도 명성을 떨쳤다. 1926년에는 무성 영화인 《아리랑》을 제작함으로써 대한민국 영화계의 선구자로 강행군을 하였다. 이 작품은 나운규 자신이 각본을 쓰고 감독과 주연까지 겸하여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였다.

1957년 개정판 ''아리랑'' 포스터


thumb''에 출연한 나운규(왼쪽)]]

종로 단성사에서 상영한 이 작품은 대한민국 영화계에 큰 획을 그었다. 이후 영화계의 중심이 되어 많은 작품을 내고, 대한민국 영화계에서 새로운 개혁을 시도했다. 작품으로 《금붕어》, 《들쥐》, 《벙어리 삼룡》, 《오몽녀》, 《임자 없는 나룻배》 등이 있다.

1927년에는 "나운규 프로덕션"을 설립하여 독립, 『벙어리 삼룡』, 『애를 찾아서』 등의 작품을 제작하였으나, 자금난으로 인해 "나운규 프로덕션"은 해산하였다. 이후에도 『주 없는 나룻배』에 출연하였으나,

안타깝게도 그가 제작한 영화 필름들은 대일본제국을 조롱했다는 사유로 일본 순사들에 의해 강제 소각, 폐기 조치되고 말았다. 그 이후로 관객들도 나운규의 영화를 더 이상 보지 않게 되면서 나운규는 연일 계속 이어지는 흥행 실패에다 관객 감소로 자포자기 심정의 나날을 보내야만 했다. 자신이 설립한 "나운규 프로덕션"도 오래 가지 못했다.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일본 순사들과 총독부의 감시망까지 강화되면서, 당시 한창 청춘이었던 나운규에게는 그야말로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1937년 8월 9일, 안타깝게도 36세라는 한창 젊은 나이에 폐결핵으로 요절하고 말았다. 그의 차남 나봉한도 역시 아버지의 뒤를 이어 감독으로 활동했던 바가 있다.

1993년 8월 대한민국 정부는 동갑내기 영화인 윤봉춘과 함께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2. 1. 초기 생애 및 독립운동

나운규는 함경북도 회령에서 출생했다.[19] 회령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신흥학교 고등과, 만주 간도에 있는 명동중학에 진학했지만, 일제의 탄압으로 학교가 폐교되어 북간도와 만주를 유랑했다. 이 시기 독립군 단체와 관계를 맺으며 독립운동을 했고, ‘청회선터널 폭파 미수 사건’으로 체포되어 1년 6개월간 복역했다.[19] 1920년에는 홍범도 장군 산하 부대에서 활동하기도 했다.[20]

1921년 서울로 돌아와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학교)에 입학하여 사회과학을 공부했다. 영화에 대한 관심은 이때부터 시작되었으며, 극장에서 영화를 보며 메모를 하고 표정 연습을 했다.

1923년 출소 후 만주로 도피하여 마적단에게 첩자로 몰려 고초를 겪었으나, 조선인의 도움으로 풀려났다.[19] 석방 후에는 고향 회령의 예림회 극단에 합류했다. 그후 극단을 나와 부산으로 가는 기차표를 샀고, 조선키네마에 배우로 취직 지원을 했다.

1924년 연극 단역으로 무대에 섰고, 같은 해 조선 키네마사에 연구생으로 입사, 윤백남 감독의 《운영전》에서 가마꾼 역(단역)으로 출연하며 영화계에 데뷔하였다. 이후 《농중조》에 출연하며 배우로 명성을 얻었다.

2. 2. 영화계 입문 및 활동

함경북도 회령에서 출생한 나운규는[18] 회령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신흥학교 고등과, 만주 간도에 있는 명동중학에 진학했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학교가 폐교되면서 1여 년간 만주 일대를 유랑했다.[19] 이 시기 독립군 단체와 관계를 맺으며 독립운동을 했고, ‘청회선터널 폭파 미수 사건’으로 체포되어 청진교도소에서 복역했다.[19] 1920년에는 홍범도 장군 산하 부대에서 활동하기도 했다.[20]

1924년 연극 단역으로 무대에 오른 나운규는 같은 해 ‘조선 키네마사’에 연구생으로 입사, 윤백남 감독의 《운영전》에서 가마꾼 역으로 출연하며 영화계에 입문했다. 이후 《농중조》에 출연하며 배우로서 명성을 얻었다.[19] 1926년에는 자신이 각본, 감독, 주연을 맡은 무성 영화 《아리랑》을 제작, 대한민국 영화계에 큰 획을 그었다.[19] 이 작품은 단성사에서 상영되어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나운규는 영화계의 중심인물로 떠올랐다.[19]

thumb''에 출연한 나운규(왼쪽)]]

나운규는 키가 작고 두꺼비 같은 외모였지만, 스크린에서 보여준 분노와 좌절은 당시 한국인들의 심정을 대변했다.[6] 특히 《아리랑》은 신파 스타일과 민족주의 정신을 결합하여 일본 강점에 대한 저항을 은유적으로 표현, 단순한 오락거리가 아닌 저항의 매개체로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는다.[7]

1927년 9월, 나운규는 단성사 극장주 박성필의 지원으로 나운규 프로덕션을 설립하고 동대문 근처 장신동에 제작사를 열었다.[8] 이 회사는 한국인이 한국인을 위해 영화를 제작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8] 1929년 작품 ''사랑을 찾아서''는 1,000명이 넘는 단역 배우를 기용한 대작으로, 나운규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일본의 압제에서 벗어나기 위해 두만강을 건너는 한국인들을 다루었다.[9]

그러나 ''벙어리 삼룡''(1929)의 실패로 나운규의 스튜디오는 문을 닫았고,[8] ''아리랑'' 이후 눈물샘을 자극하는 신파 영화들은 한국 언론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 유현목 감독은 나운규가 1931년 신파 영화 ''금강산''(금강산의 슬픔)에서 일본 여성을 연인으로 등장시킨 것이 한국인들에게 배신으로 여겨져 그의 경력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했다.

나운규는 감옥에서 보낸 시간과 고문으로 인해 건강이 좋지 않았으며, 1937년 34세(한국식 나이 36세)의 나이로 결핵으로 사망했다.[6] 그의 경력은 짧았지만, 한국 무성 영화의 황금기를 대표하는 영화 제작자로 평가받는다.

2. 3. 나운규 프로덕션 설립과 좌절

나운규는 1926년 무성 영화 《아리랑》을 제작하여 대한민국 영화계에 큰 획을 그었다.[19] 이 작품은 나운규 자신이 각본, 감독, 주연을 맡아 뛰어난 재능을 발휘했으며, 단성사에서 상영되어 큰 성공을 거두었다.[19] 《아리랑》은 단순한 오락거리가 아닌, 일제 강점에 대한 저항을 표현하는 매개체로 한국 영화의 위상을 높였다.[7]

이러한 성공을 바탕으로 나운규는 1927년 9월, 단성사 극장주 박성필의 자금 지원을 받아 나운규 프로덕션을 설립하고 동대문 근처 장신동에 제작사를 열었다.[8] 이는 한국인이 한국인을 위해 영화를 제작하는 것을 목표로 한 독립적인 영화 제작사였다.[8] 나운규 프로덕션은 1929년 작품 《사랑을 찾아서》와 같은 대작을 제작하기도 했다. 이 영화는 1,000명이 넘는 단역 배우를 기용하였으며, 나운규 자신이 경험했던 것처럼 일본의 압제에서 벗어나기 위해 두만강을 건너는 한국인들을 다루고 있다.[9]

그러나 나운규 프로덕션은 《벙어리 삼룡》(1929)의 흥행 실패와[8] 자금난으로 인해 곧 문을 닫게 되었다.[19] 이후 나운규는 작품 활동을 이어갔지만, 대일본제국을 조롱했다는 이유로 일본 순사들에 의해 영화 필름들이 강제 소각, 폐기 조치되면서 어려움을 겪었다.[19] 관객 감소와 조선총독부의 감시 강화는 나운규를 더욱 좌절시켰다.[19]

2. 4. 말년과 죽음

함경북도 회령에서 출생한 나운규는[18] 어린 시절 독립운동을 하다 체포되어 복역한 경험이 있다.[19] 1920년에는 홍범도 장군 산하의 부대에서 활동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20] 1924년 연극 무대를 통해 연기를 시작한 나운규는 윤백남 감독의 《운영전》에 단역으로 출연하며 영화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1926년에는 《아리랑》을 제작, 감독, 주연하며 대한민국 영화계에 큰 획을 그었다. 이후 "나운규 프로덕션"을 설립하여 활동하였으나, 대일본제국 순사들에 의해 영화 필름이 소각, 폐기 조치되는 등 탄압을 받았다. 흥행 실패와 총독부의 감시 속에서 자포자기 심정으로 나날을 보내던 나운규는 1937년 8월 9일, 36세의 젊은 나이에 폐결핵으로 사망했다.[19] 그의 차남 나봉한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감독으로 활동했다. 1993년 8월 대한민국 정부는 나운규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3. 사후 평가 및 영향

일본과의 협력 의혹에도 불구하고 나운규는 당시와 그 이후 수십 년 동안 한국 영화의 선구자 중 한 명으로서의 명성에 손상을 입지 않았다. 나운규의 장례식 행렬은 아리랑을 연주하는 악대가 선두를 맡았고, 비가 내리는 와중에도 많은 조문객들이 참석했다.[10] 1938년 11월 조선일보가 실시한 한국 최고의 무성영화 설문조사에서 나운규 감독의 아리랑이 1위를 차지했다. 나운규 감독의 다른 두 작품인 '사랑을 찾아서'와 풍운아(1926)도 10위권에 들었다.[11]

나운규 감독의 마지막 영화인 오몽녀(1937)는 한국 최고의 유성영화 순위에서 2위를 차지했다.[11]

그의 삶은 최무룡이 감독하고 주연을 맡은 1966년 영화 '나운규 일생'의 소재가 되었다.[12] 한국영화감독조합1990년부터 시작된 춘사영화제의 이름으로 나운규의 필명을 사용하여 그에게 경의를 표했다.[13] 1990년에 나운규(羅雲奎)의 호인 "춘사(春史)"를 따서 "춘사영화예술상"이 제정되었으며, 2001년부터는 "춘사나운규영화예술제", 2006년부터는 "이천춘사대상영화제"라는 이름으로 영화제가 개최되고 있다.

서울의 '아리랑고개' 근처는 아리랑 시네마 센터, 아리랑 정보 도서관, 영화 세트장을 표방하는 소규모 테마파크, 나운규 탄생 100주년 기념비, 그리고 매년 열리는 영화제가 있는 '영화의 거리'로 탈바꿈했다.[14]

그는 신상옥에게 영향을 미쳤다.[15]

3. 1. 한국 영화계의 선구자

나운규는 한국 영화의 선구자 중 한 명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10] 1938년 11월 조선일보가 실시한 한국 최고의 무성영화 설문조사에서 나운규 감독의 아리랑이 1위를 차지했으며, '사랑을 찾아서'와 풍운아(1926)도 10위권에 들었다.[11] 그의 마지막 영화인 '오몽녀(1937)'는 한국 최고의 유성영화 순위에서 2위를 차지했다.[11]

나운규의 장례식에는 아리랑을 연주하는 악대가 선두에 섰고, 비가 내리는 와중에도 많은 조문객들이 참석했다.[10] 그의 삶은 최무룡이 감독하고 주연을 맡은 1966년 영화 '나운규 일생'의 소재가 되었다.[12] 한국영화감독조합은 1990년부터 시작된 춘사영화제의 이름으로 나운규의 필명을 사용하여 그에게 경의를 표했다.[13]

서울의 '아리랑고개' 근처는 아리랑 시네마 센터, 아리랑 정보 도서관, 영화 세트장을 표방하는 소규모 테마파크, 나운규 탄생 100주년 기념비, 그리고 매년 열리는 영화제가 있는 '영화의 거리'로 탈바꿈했다.[14] 그는 신상옥에게 영향을 미쳤다.[15]

3. 2. 민족주의 영화의 효시

일본과의 협력 의혹에도 불구하고 나운규는 한국 영화의 선구자 중 한 명으로 평가받고 있다. 1938년 11월 조선일보가 실시한 한국 최고의 무성영화 설문조사에서 나운규 감독의 《아리랑》이 1위를 차지했으며, 《사랑을 찾아서》와 《풍운아》(1926)도 10위권에 들었다.[11] 또한, 나운규의 마지막 영화인 《오몽녀》(1937)는 한국 최고의 유성영화 순위에서 2위를 차지했다.[11] 그의 장례식에는 아리랑을 연주하는 악대가 선두에 섰고, 비가 내리는 와중에도 많은 조문객들이 참석했다.[10]

나운규의 삶은 1966년 최무룡이 감독하고 주연을 맡은 영화 《나운규 일생》의 소재가 되었다.[12] 한국영화감독조합은 1990년부터 시작된 춘사영화제의 이름으로 나운규의 필명을 사용하여 그에게 경의를 표했다.[13] 서울의 '아리랑고개' 근처는 아리랑 시네마 센터, 아리랑 정보 도서관, 영화 세트장을 표방하는 소규모 테마파크, 나운규 탄생 100주년 기념비, 그리고 매년 열리는 영화제가 있는 '영화의 거리'로 조성되었다.[14] 그는 신상옥에게 영향을 미쳤다.[15]

3. 3. 춘사영화제

나운규의 장례식에는 아리랑을 연주하는 악대가 선두에 섰고, 비가 내리는 와중에도 많은 조문객들이 참석했다.[10] 1938년 11월 조선일보가 실시한 한국 최고의 무성영화 설문조사에서 나운규 감독의 아리랑이 1위를 차지했고, '사랑을 찾아서'와 풍운아(1926)도 10위권에 들었다.[11] 나운규 감독의 마지막 영화인 '오몽녀'(1937)는 한국 최고의 유성영화 순위에서 2위를 차지했다.[11]

그의 삶은 최무룡이 감독하고 주연을 맡은 1966년 영화 '나운규 일생'의 소재가 되었다.[12] 1990년에는 나운규의 호인 "춘사(春史)"를 따서 "춘사영화예술상"이 제정되었으며,[13] 한국영화감독조합은 춘사영화제의 이름으로 나운규에게 경의를 표했다. 2001년부터는 "춘사나운규영화예술제", 2006년부터는 "이천춘사대상영화제"라는 이름으로 영화제가 개최되고 있다.

서울의 '아리랑 고개' 근처는 아리랑 시네마 센터, 아리랑 정보 도서관, 영화 세트장을 표방하는 소규모 테마파크, 나운규 탄생 100주년 기념비, 그리고 매년 열리는 영화제가 있는 '영화의 거리'로 탈바꿈했다.[14] 그는 신상옥에게 영향을 미쳤다.[15]

3. 4. 대한민국 정부의 추서

1993년 대한민국 정부는 나운규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일본과의 협력 의혹에도 불구하고, 나운규는 한국 영화의 선구자로 평가받고 있다. 1938년 11월 조선일보가 실시한 한국 최고의 무성영화 설문조사에서 나운규 감독의 아리랑이 1위를 차지했으며, '사랑을 찾아서'와 '풍운아'(1926)도 10위권에 들었다. 또한, 나운규의 마지막 영화인 '오몽녀'(1937)는 한국 최고의 유성영화 순위에서 2위를 차지했다.

그의 삶은 최무룡이 감독하고 주연을 맡은 1966년 영화 '나운규 일생'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1990년에는 나운규의 호인 "춘사(春史)"를 따서 춘사영화예술상이 제정되었으며, 2001년부터는 "춘사나운규영화예술제", 2006년부터는 "이천춘사대상영화제"라는 이름으로 영화제가 개최되고 있다. 신상옥 감독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서울의 '아리랑고개' 근처는 아리랑 시네마 센터, 아리랑 정보 도서관 등이 있는 '영화의 거리'로 조성되었으며, 나운규 탄생 100주년 기념비와 영화 세트장을 표방하는 소규모 테마파크도 있다.

4. 작품 목록


  • 운영전 (운영전한국어) (1925) (배우 데뷔)
  • 심청전 (심청전한국어) (1925) (배우)
  • 장한몽 (장한몽한국어) (1926) (배우)
  • 농중조 (농중조한국어) (1926) (배우)
  • 아리랑 (아리랑한국어) (1926) (감독, 각본, 배우)
  • 풍운아 (풍운아한국어) (운명의 병사) (1926) (감독, 각본, 배우, 편집)
  • 들쥐 (들쥐한국어) (1927) (감독, 각본, 배우, 편집)
  • 흑과백 (흑과백한국어) (흑과 백) (1927)
  • 금붕어 (금붕어한국어) (1927) (감독, 배우, 편집)
  • 잘 있거라 (잘 있거라한국어) (1927) (감독, 제작자, 각본, 배우, 편집)
  • 옥녀 (1928) (옥녀한국어) (감독, 제작자, 각본, 편집)
  • 벙어리 삼룡 (벙어리 삼룡한국어) (1929) (감독, 제작자, 각본, 배우)
  • 사랑을 찾아서 (사랑을 찾아서한국어) (1929) (감독, 제작자, 각본, 배우, 편집)
  • 사나이 (사나이한국어) (1929)
  • 아리랑 그 후 이야기 (아리랑 그 후 이야기한국어) 또는 ''아리랑 후편'' (아리랑 후편한국어) (아리랑 2) (1930) (각본, 배우)
  • 철인도 (철인도한국어) (1930) (감독, 각본, 배우, 편집)
  • 금강한 (금강한한국어) (금강의 슬픔) (1931) (감독, 배우)
  • 남편은 경비대로 (남편은 경비대로한국어) (1931)
  • 개화당 이문 (개화당 이문한국어) (1932) (감독, 각본, 배우, 편집)
  • 임자없는 나룻배 (임자없는 나룻배한국어) (1932) (배우)
  • 암굴왕 (암굴왕한국어) (1932)
  • 종로 (종로한국어) (1933)
  • 무화과 (무화과한국어) (무화과나무) (1935) (감독, 편집)
  • 강 건너 마을 (강 건너 마을한국어) (1935) (감독, 각본, 편집)
  • 그림자 (그림자한국어) (1935) (감독, 각본, 배우)
  • 황무지 (황무지한국어) (1935)
  • 아리랑 3 (아리랑 제3편한국어) (1936) (감독, 각본, 배우)
  • 칠번통 소사건 (칠번통 소사건한국어) (7번 대나무피리 사건) (1936) (감독, 각본, 배우, 편집)
  • 오몽녀 (오몽녀한국어) (1937) (감독)[16]

모든 작품의 필름은 현존하지 않는다.

4. 1. 감독 작품

나운규는 1926년 《아리랑》을 시작으로, 《풍운아》(1926년), 《옥녀》(1928년), 《벙어리 삼룡이》(1929년) 등을 감독했다.[16] 《아리랑》의 후속편으로 《철인도》(1930년)와 《오몽녀》(1936년)를 제작했는데, 《오몽녀》는 《아리랑》 3편으로 유성영화였다.[21] 그 외에도 《개화당 이문》(1932년), 《칠번통 소사건》(1934년), 《무화과》(1935년) 등을 감독했다. 나운규는 감독뿐만 아니라 배우로도 활동하여, 《운영전》(1925),《심청전》(1925)《장한몽》(1926),《농중조》(1926)등에 출연하였다. 감독,각본,주연을 맡은 《아리랑》(1926)을 비롯하여,《풍운아》(1926),《벙어리 삼룡》(1929),《사랑을 찾아서》(1929),《금강한》(1931)등의 작품이 있다. 그가 제작한 모든 작품의 필름은 현재 남아있지 않다.

4. 2. 출연 작품

나운규는 다양한 영화에 출연하거나 감독했다.[16]

나운규가 제작한 모든 영화 필름은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16]

5. 가족 관계

아버지 나형권(羅衡權)이다. 둘째 형은 나시규(羅始奎)이다. 부인은 조정옥(趙貞玉, 1898~1968)이다. 장남은 나종익(羅鍾益)이며, 딸은 나신자(羅信慈)이다. 차남은 연극배우이자 영화감독나봉한(羅奉漢)이다.

6. 학력

함경북도 회령보통학교를 졸업하고 회령 신흥학교 고등과로 전학하였다. 이후 중화민국 지린 성 룽징에 있는 명동중학교를 중퇴하였다.

7. 수상

1993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상했다.

8. 나운규를 연기한 배우

참조

[1] 서적 Chunsa Na Un-gyu chonjip: ku saengae wa yesul
[2] 서적 The Remasculization of Korean Cinema
[3] 웹사이트 Eulogies for legendary director Na Woon-gyu discovered http://english.yonha[...] Yonhap News Agency 2017-03-08
[4] 서적 Korean Film; History, Resistance, and Democratic Imagination
[5] 서적
[6] 서적
[7] 서적 Im Kwon-Taek; The Making of a Korean National Cinema
[8] 웹사이트 Formation of Korean Film Industry Under Japanese Occupation http://www.cinekorea[...]
[9] 서적
[10] 서적 The History of Korean Cinema Motion Picture Promotion Corporation
[11] 서적
[12] 영화 Na Woon-Gyui ilsaeng https://www.imdb.com[...]
[13] 웹사이트 Chunsa Art Film Festival Underway http://www.kocca.or.[...] Korean Culture & Content Agency (KOCCA) 2002-11-27
[14] 웹사이트 Street of Motion Pictures http://rki.kbs.co.kr[...] Korean Broadcasting System 2005-04-07
[15] 웹사이트 Last Interview http://english.donga[...] The Dong-a Ilbo 2017-03-08
[16] 인물 https://www.imdb.com[...]
[17] 웹사이트 나운규 http://kmdb.or.kr/ac[...] 2011-08-29
[18] 웹사이트 인물정보(人物情報) http://people.search[...] 2011-08-29
[19] 웹인용 나운규(羅雲奎)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 2018-04-13
[20] 뉴스 <아리랑> 지워지지 않는 '춘사'의 기억 https://news.naver.c[...] 오마이뉴스 2003-05-27
[21] 백과사전 나윤규 http://100.nate.com/[...] 한국학중앙연구원
[22] 뉴스 나운규의 삶과 예술 드라마로 제작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2017-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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