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자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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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최자실은 1915년 황해도 해주군에서 출생하여, 이성봉 목사의 부흥회를 통해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되었다. 간호원과 사업가로 활동하며 어려움을 겪었으나, 이성봉 목사의 부흥회를 통해 신앙을 회복하고 순복음신학교에서 조용기를 만나 함께 목회 활동을 시작했다. 1958년 조용기와 함께 텐트 교회를 개척하여 여의도순복음교회로 성장시켰으며, 기도와 금식 사역으로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1989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으며, 오산리 최자실 기념 금식 기도원이 조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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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자실 | |
---|---|
기본 정보 | |
출생 이름 | 최자실 |
출생일 | 1915년 8월 25일 |
출생지 | 황해도, 한국 |
사망일 | 1989년 11월 8일 |
사망지 | 로스앤젤레스 |
직업 | 전도사 |
종교 | 기독교 (오순절교회) |
국적 | 대한민국 |
교육 | 순복음신학교 |
소속 교회 | 여의도순복음교회 |
한국어 이름 정보 | |
한글 | 최자실 |
한자 | 崔子實 |
로마자 표기 | Choe Ja-sil |
매큔-라이샤워 표기 | Ch'oe Chasil |
2. 출생과 성장
최자실은 1915년 8월 15일 황해도 해주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홀어머니 아래에서 성장했다. 가난한 환경 속에서 이웃의 전도와 이성봉 목사의 부흥회를 통해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되었다.[1][2]
2. 1. 학업과 초기 경력
최자실은 12세에 이성봉 목사가 인도하는 부흥회에서 기독교인이 되었다.[2] 이후 간호학을 공부하였고, 서울로 이사하여 사업을 시작하였다.[2]3. 결혼과 시련
최자실은 청년 시절 한경직 목사가 담임하고 있던 신의주 제2장로교회에 출석하였으며, 같은 교회 찬양대원이었던 김창기와 26세에 결혼하였다.[1] 김창기는 배재학당을 거쳐 일본 주오대학 법과를 졸업한 인재였다. 그러나 결혼 후 남편은 교회 출석을 등한시하고 세상일에만 몰두하였다. 최자실은 처음에는 남편에게 신앙생활을 권유했지만, 자녀 양육과 사업에 몰두하면서 신앙에서 멀어지는 시기를 겪었다. 이후 부흥회를 통해 회개하고 다시 신앙을 회복하였다.[1]
3. 1. 사업 성공과 좌절
최자실은 서울에서 성냥공장, 비누공장 등을 운영하며 큰돈을 벌었다.[2] 그러나 1953년 어머니가 69세에 소천하고 열흘 후에 맏딸도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다.[1] 사업 실패로 재산을 모두 잃고, 심장병까지 발병하여 모든 것을 상실한 비참한 상황에 놓였다. 가정불화, 빚 독촉 등 말할 수 없는 고통 속에 수년이 지나고 삶을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1956년, 자살을 결심하고 극약을 산 뒤 북한산 자락인 삼각산으로 올라가 극약을 마시려는 순간, 갑자기 돌개바람이 불어 약봉지가 날아가 버려 자살에 실패했다. 거듭 자살을 시도했지만 이루지 못했다.[1][2]4. 신앙 회복과 사역 시작
이성봉 목사의 권유로 순복음신학교에 입학하여 영적인 경험을 하고, 훗날 사위가 되는 조용기 목사를 만났다. 1958년 졸업 후 최자실과 조용기 목사는 함께 텐트 교회를 시작했는데, 이는 여의도순복음교회로 성장했다.[3] 최자실은 교회 초창기부터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돌보았고, 기도와 금식 사역으로 유명해졌으며, 이 주제로 여러 권의 책을 저술했다.[2]
4. 1. 신학교 시절
이성봉 목사의 소개로 현재의 한세대학교로 발전한 순복음 신학교에 입학했다.[1] 조용기 목사를 만나,[1] 신학교 시절부터 조용기와 한 팀을 이루어 전도와 기도 등으로 미래 목회의 포문을 열었다.[1] 당시 신학생들은 방학 중에도 학교에 나와 철야하며 기도했고,[1] 학문뿐만 아니라 실천도 하였다.[1] 특히 최자실은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밤새 철야기도를 하고 시간만 나면 노방전도를 하는 전도자의 생활을 했다.[1]5. 사역의 과정
최자실은 조용기 목사와 함께 서울특별시 은평구 대조동에서 천막교회를 개척하며 사역을 시작했다.[3] 이후 불광동 천막교회를 거쳐, 서대문구 의주로(현 종로구 평동)에 순복음 중앙 교회를 설립하여 부흥을 이끌었다.[1] 성도 수가 10,000명을 넘어서면서 여의도에 새로운 성전을 건축하게 되었는데, 중동 오일 쇼크 등 여러 어려움 속에서도 건축을 추진하였다.[1] 또한 경기도 파주시 조리읍 오산리에 기도원을 설립하였으며, 그의 헌신을 기념하여 '오산리 최자실 기념 금식 기도원'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1]
5. 1. 천막교회 개척
1958년, 조용기 목사와 함께 서울 은평구 대조동에서 천막교회를 개척하여 어린이와 장년 예배를 시작했다.[3] 온 동네를 다니며 아이들을 모아 알사탕을 주고 찬송가와 성경 말씀을 가르치고 안수기도를 해주었다. 이렇게 모인 아이들이 60~70명에 이르자 불광동에 천막교회를 세웠다. 처음에는 최자실 전도사, 조용기 전도사, 최자실 전도사의 딸 김성혜와 아들 김성광, 그리고 비를 피해 온 할머니까지 총 5명으로 장년예배를 시작했다. 그러나 최자실 전도사의 소문을 듣고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당시 가난하고 병들어 소망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먹을 것을 나누고, 기도를 통한 신유(神癒)의 역사로 교회가 부흥하기 시작했다.[3] 무당들이 회개하고 주정뱅이들이 변화되는 역사가 일어나자, 최자실 전도사는 혼자 감당하기 어려워 조용기 전도사에게 사역 협력을 부탁했고, 조용기 전도사의 설교를 통해 많은 회개의 역사가 일어났다.5. 2. 서대문 순복음 중앙 교회
1961년 11월, 불광동 천막교회 개척 3년 만에 서대문구 의주로(현 종로구 평동)에 순복음 중앙 교회를 설립하였다.[1] 조용기 목사의 설교와 최자실 전도사의 치유 사역 등으로 큰 부흥이 일어났으며, 동북아시아 세계 선교 대회를 개최하는 등 세계적인 규모의 성회를 주최하면서 최자실 전도사의 사역은 세계로 뻗어나갔다.[1]서대문 순복음 중앙 교회 건물은 현재 서울특별시 종로구 평동으로 편입되었으며, 서울 충정로 우체국 부근에 기독교 대한 하나님의 성회 총회 회관과 바위샘교회로 사용되고 있다.[1]
5. 3. 여의도순복음교회 건축
서대문 순복음 중앙 교회는 폭발적인 부흥을 거듭하여, 성도 수가 10,000명을 넘어서면서 더 이상 성도들을 수용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따라 새 성전 건축을 위한 부지를 찾기 시작했으나, 많은 성도들이 모이기에 적합한 장소를 찾는 것은 쉽지 않았다.이때 여의도가 추천되었다. 당시 여의도는 비행기 이착륙 활주로로 이용되는 황폐한 섬이었고, 육지와 연결되는 다리조차 없어 교통이 큰 문제였다. 그러나 조용기 목사는 하나님의 응답을 받고 여의도에 성전을 건축하겠다는 계획을 추진하여, 마침내 부지를 구입하게 되었다. 건축비가 매우 비싸 빚을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우려가 있었지만, 조용기 목사와 최자실 목사는 믿음을 가지고 건축을 추진하였다.
하지만 건축 시작부터 여러 문제가 발생했다. 중동 오일 쇼크의 여파로 달러 대비 원화 가치가 하락하여 건축 자재 가격이 상승하고 교회 헌금도 감소하는 등 자금 문제에 봉착하였다.[1]
5. 4. 오산리 최자실 기념 금식 기도원
최자실은 기도의 동산을 세우는 꿈을 갖고, 경기도 파주시 조리읍 오산리에 위치한 교회 묘지의 연장창고에서 철야 기도를 시작했다. 석 달 뒤 응답을 받고 기도원을 건립하기 시작했다. 기도원 집회를 인도하며 수많은 방해 공작에도 불구하고 기도로 세계 최대 규모의 기도원을 설립하였다.[1]최자실이 소천한 뒤, 그의 눈물 어린 기도와 헌신을 기념하여 기도원의 정식 명칭을 '오산리 최자실 기념 금식 기도원'으로 변경하였다.[1]
6. 해외 선교
최자실은 1964년 일본 순회 전도 여행을 시작으로 1966년 중화민국, 미국 등 해외 각국에서 성회를 인도하며 국제적인 활동을 펼쳤다.[1]
6. 1. 해외 사역 중 사망
최자실은 1964년 일본 순회 전도 여행을 시작으로 1966년 중화민국 순회 선교 여행, 미국 선교 여행 등 해외 각국에서 성회를 인도하며 활발하게 활동하였다.[1] 1989년 미국 여의도 순복음 교회 계열 워싱턴 순복음 교회 성회 인도와 순복음 로스엔젤레스 국제 금식 기도원 창립 4주년 기념 새성전 기공 예배를 끝으로 로스엔젤레스에서 심장 마비로 세상을 떠났다.[1] 여의도순복음교회는 그들의 기도 시설 중 하나를 오산리 최자실 금식 기도원으로 헌정했다.[3]7. 주요 활동 연표
연도 | 내용 |
---|---|
1935년 | |
1958년 | |
1961년 | |
1962년 | |
1964년 | |
1966년 | |
1967년 | 10월 31일 타이완, 도쿄 선교 여행 |
1969년 | |
1971년 | 1월 11일 타이완 선교 여행 |
1972년 | |
1973년 | 순복음 금식 기도원 설립[1] |
1974년 | |
1975년 | 4월 조용기 목사와 미국, 유럽 선교 여행 |
1977년 | 6월 조용기 목사와 일본 도쿄 부흥 성회 인도 |
1979년 | 10월 1일 제12차 PWC 대회 참석 |
1981년 | 7월 7일 울산시 복음화 대성회 인도 |
1985년 | |
1989년 |
8. 저서
- 《나는 할렐루야 아줌마였다》(1980)
- 《Korean Miracles》(1978)
- 《Hallelujah Lady》(2009)
참조
[1]
웹사이트
이북5도위원회
https://www.ibuk5do.[...]
Committee for the Five Northern Korean Provinces
2024-08-29
[2]
논문
Korean Pentecostal Spirituality: A Case Study of Jashil Choi
https://www.aptspres[...]
2002-07
[3]
서적
The New International Dictionary of Pentecostal and Charismatic Movements: Revised and Expanded Edition
Zondervan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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