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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로마누스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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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를로마누스 2세는 서프랑크 왕국의 국왕으로, 루도비쿠스 2세 발부스와 안스가르데의 아들이자 루도비쿠스 3세의 동생이다. 879년 형 루이 3세와 함께 공동 왕으로 즉위하여 부르고뉴와 아키텐을 상속받았으며, 노르만족과의 전투에서 승리하기도 했다. 882년 루이 3세가 죽은 후 단독 왕이 되었으나, 노르만족의 침략과 귀족들의 반란, 흉년 등으로 권력이 불안정했다. 884년 멧돼지 사냥 중 사고로 사망했으며, 그의 사후에는 삼촌인 카롤루스 3세 크라수스가 왕위를 계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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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로마누스 2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생드니 대성당의 카를로만 2세 지상 (1264년)
1264년 생드니 대성당의 카를로만 2세 지상
군주 칭호서프랑크 왕
출생일866년경
사망일884년 12월 6일 (18세 추정)
사망 장소레자ند리 근처
매장지생드니 대성당
왕조카롤링거 왕조
아버지루이 2세
어머니부르고뉴의 아ンス가르드
통치
즉위일879년 4월 10일
대관식879년 9월
선임자루이 2세
후임자카를 3세
공동 통치자루이 3세 (879–882)

2. 생애

879년, 아버지 루이 2세가 사망하자 형 루이 3세와 함께 서프랑크의 왕으로 즉위했다. 일부 귀족들은 단독 왕을 선출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결국 루이 3세와 카를로만 2세는 공동 왕으로 선출되었다. 이들의 즉위는 정당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곧 승인되었다. 880년 3월 아미앵에서 두 형제는 아버지의 유산을 분할했는데, 카를로만 2세는 부르고뉴아키텐을 상속받았다.

프로방스 공작 보소는 이들에게 충성을 거부하고 프로방스 왕으로 선출되었다. 880년 여름, 루이 3세와 카를로만 2세는 군사를 일으켜 보소의 영토 북부와 마콩을 빼앗았다. 또한 두 사람은 8월부터 11월까지 동프랑크 왕국의 카를 3세 (비만왕)와 함께 비엔을 포위했지만 함락시키지 못했다. 882년 여름, 오툉 백작 리샤르가 비엔을 점령했다.

882년 8월, 형 루이 3세가 사망하면서 카를로만 2세는 서프랑크의 단독 왕이 되었다. 그러나 왕국은 노르만족의 침입과 봉건 영주들의 반발로 혼란스러웠고, 그의 권력은 매우 제한적이었다.

884년 12월 12일, 카를로만 2세는 레장들리에서 사냥 중 시종의 실수로 사고를 당해 사망했다. 그의 죽음으로 동프랑크 왕국의 카를 3세가 샤를 3세로서 서프랑크 왕위를 계승했다.[2]

2. 1. 생애 초반

서프랑크 왕국의 국왕이자 프로방스의 왕, 아키텐의 왕인 루도비쿠스 2세 발부스와 그의 첫 부인인 부르고뉴 백작 아르뒤노 드 부르고뉴(Arduino de Borgundy)와 비셈베르가(Wisemberg)의 딸 안스가르드(Ansgarde)의 셋째 아들로, 864년 또는 866년에 태어났다. 그가 태어날 무렵 아버지 루도비쿠스 2세는 아키텐의 왕이었다. 루도비쿠스 3세는 그의 친형이었고, 유복자인 카롤루스 3세 심플렉스는 그의 이복 동생이었다.

카를로마누스 2세는 그의 할아버지 카롤루스 2세 칼부스의 통치기간 중에 태어났으나, 레기노(Regino)에 의하면 할아버지 카롤루스 2세는 안스가르드의 집안이 지위가 낮아 며느리로 받아들이길 거부했다. 카롤루스 2세는 루도비쿠스 2세 발부스와 안스가르드의 결혼을 반대했고, 루도비쿠스 2세와 안스가르드는 862년 12월 비밀리에 결혼하였다. 루도비쿠스 3세가 태어나고 누나 기셀라가 태어난 뒤에 카를로마누스 2세가 태어났다.

정확한 생일은 전하지 않지만 카를로마누스 2세는 다른 형제들과 함께 당분간 비밀리에 양육되었다. 루도비쿠스 3세, 기셀라, 카를로마누스 2세, 그리고 두 명의 여동생 힐데가르트, 에르망가르트가 연이어 태어났다. 그러나 875년 루도비쿠스 2세와 안스가르드의 동거는 할아버지 카롤루스 2세에게 발각되었고, 카롤루스 2세는 루도비쿠스 2세에게 안스가르드와의 이혼을 명령했다. 카를로마누스 2세와 루도비쿠스 3세 및 형제자매는 아키텐에서 내쳐졌다. 그리고 아버지 루도비쿠스 2세 발부스프리울리 후작이자 파리 백작의 딸 아델라이드 드 프리울리와 결혼하게 된다.

2. 2. 소년 시절



877년 할아버지 카롤루스 2세가 죽고 아버지 루도비쿠스 2세가 왕이 되면서 루이와 카를로마누스 형제는 정식 왕자로 공인받았다. 카를로마누스는 특별히 아버지 루도비쿠스 2세가 초빙한 베르기의 테오도리히를 가정교사로 초빙하여 그로부터 교육을 받았다. 878년 8월 7일 아버지 루도비쿠스 2세는 교황 요한네스 8세를 설득하여 안스가르데와의 이혼을 무효화시키고 두 아들을 적자로 공인받게 했다. 그러나 아버지 루도비쿠스 2세는 재위 2년만에 사망했다.

879년 4월 10일 아버지 루도비쿠스 2세 사후, 고즐린 수도원장 위그, 베른하르트 드 오베르뉴, 보소 5세 등 몇몇 귀족들은 루도비쿠스 3세에게 왕위를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일각에서는 카를로마누스를 지지했다. 논쟁 끝에 879년 9월 루도비쿠스와 카를로마누스는 공동 왕으로 지정되었다. 루도비쿠스 2세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이미 로렌 지역을 확보했던 동프랑크 왕국루도비쿠스 3세 청년왕이 쳐들어왔고, 루도비쿠스와 카를로마누스는 동프랑크의 루도비쿠스 청년왕을 격퇴하였다. 아버지 루도비쿠스 2세가 일찍 사망하면서 귀족들이 그의 두 아들 중 누구를 국왕으로 선출하느냐를 놓고 논쟁을 벌이다가, 서프랑크에서는 국왕을 선출하는 방법이 정착되었다. 이로서 국왕 및 차기 왕위 계승자는 국왕을 선출하는 귀족, 제후들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법적 지위에 논란이 있었지만 두 사람은 왕국을 공동으로 통치하는 것을 승인받았다.

2. 3. 아키텐과 부르고뉴의 군주

880년 아미앵에서 아버지 루이 2세의 영토를 분할 상속받을 때, 카를로마누스 2세는 아키텐셉티마니아, 부르고뉴를 받았다. 루도비쿠스 3세와 카를로마누스 2세는 로트링겐(로렌)을 공동 영역으로 남겨두었는데, 귀족들의 도움을 얻어 로트링겐의 상속권을 주장하는 위그를 물리쳤다. 카를로마누스 2세는 즉위 초반 아키텐과 부르고뉴의 유력 호족이었던 로고니덴 가문 사람들을 자문으로 삼았다. 형 루도비쿠스 3세가 북부 해안가로 쳐들어오는 노르만족과 싸울 때 지원하였고, 879년에는 직접 군사를 이끌고 "위대한 이교도 군대"를 플랑드르에서 격퇴하였다.

880년 봄, 카를로마누스 2세는 자신의 영토를 침략한 동프랑크와 작센의 군주 청년 루트비히의 군대를 벨기에 서부 샤를루아에서 물리쳤다.

880년 2월, 카를로마누스 2세와 형 루도비쿠스 3세, 동프랑크의 청년 루도비쿠스는 연합하여 왈롱샤를루아까지 내려온 바이킹을 상대로 교전하여 승리하였다. 이 전투에서 서프랑크의 루도비쿠스 3세와 카를로마누스, 동프랑크의 청년 루도비쿠스 3세 연합군은 바이킹 5천 명을 사살하였다. (→티에몽 전투(880년 2월))

880년 9월 21일 또는 3월 22일 이탈리아의 카를로만 3세[8]가 죽자, 티에몽 전투를 계기로 로트링겐 영유권을 주장하며 동프랑크 왕국 작센의 청년 루트비히 3세가 로트링겐을 요구해왔다. 청년 루트비히는 870년메르센 조약은 불법이라며 로트링겐을 요구했다. 작센의 루트비히와 갈등하던 중, 카를로마누스 2세와 루도비쿠스 3세 형제는 루트비히 3세와 함께 리베몽에서 조약을 체결하였다. 청년 루트비히 3세는 카롤루스 2세 칼부스로렌 영토를 불법으로 점유했고, 메르센 조약이 잘못 체결된 조약이라며 반환을 강요했다. 바이킹족을 상대해야 했던 형 루도비쿠스 3세는 전쟁을 피하려 했고, 결국 서프랑크가 차지한 로트링겐 영토는 독일의 청년 루트비히 3세에게 넘어갔다.

879년, 아버지 루이 2세가 사망하자 형 루이 3세와 함께 즉위했다. 몇몇 귀족들은 단독으로 왕을 선출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결국 루이 3세와 카를로만 2세가 공동으로 왕위에 올랐다. 그 정당성에 의문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두 사람의 즉위는 승인되었고, 880년 3월 아미앵에서 아버지의 유산을 분할, 카를로만 2세는 부르고뉴아키텐을 상속받았다.

그러나 프로방스 공작 보소는 두 사람에 대한 충성을 거부하고 프로방스 왕으로 선출되었다. 880년 여름, 루이 3세와 카를로만 2세는 보소를 상대로 군사를 동원하여 보소의 영토 북부와 마콩을 빼앗았다. 또한 두 사람은 8월부터 11월까지 동프랑크 왕 카를 3세 (비만왕)와 함께 비엔을 포위했지만 실패했다. 882년 여름, 오텡 백작 리샤르에 의한 포위 공격 이후 비엔을 점령했다.

2. 4. 왕국 재통일 및 단독 군주

882년 8월 5일루도비쿠스 3세가 후계자 없이 낙마 사고로 죽으면서 카를로마누스 2세는 서프랑크 왕국의 유일한 왕이 되었고, 형의 영지를 흡수하였다.[9] 그러나 왕국은 노르만족의 침입으로 매우 혼란하였고, 지역 제후, 영주, 기사들의 반란과 반발, 흉년과 기근까지 겹치면서 그의 권력은 불안정했다.

879년 아버지 루이 2세가 사망하자 형 루도비쿠스 3세와 함께 즉위했다. 몇몇 귀족들은 단독으로 왕을 선출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결국 루도비쿠스 3세와 카를로마누스 2세가 공동으로 왕위에 올랐다. 그 정당성에 의문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두 사람의 즉위는 승인되었고, 880년 3월 아미앵에서 아버지의 유산을 분할하여 카를로마누스 2세는 부르고뉴아키텐을 상속받았다.

그러나 프로방스의 보소는 두 사람에 대한 충성을 거부하고 프로방스 왕으로 선출되었다. 880년 여름, 루도비쿠스 3세와 카를로마누스 2세는 보소를 상대로 군사를 동원하여 보소의 영토 북부와 마콩을 빼앗았다. 또한 두 사람은 8월부터 11월까지 동프랑크 왕국의 카롤루스 3세와 함께 비엔을 포위했지만 실패했다. 882년 여름, 오툉 백작 리샤르에 의한 포위 공격 이후 비엔을 점령했다.

2. 5. 혼란과 최후

882년 노르만 족이 프리슬란트를 넘어 왕국의 북부를 휩쓸고 랭스 지역까지 쳐들어오자 랭스 대주교 힝크마르(Hincmar)를 시켜 격퇴하게 했지만, 힝크마르의 군대는 패배했고, 에페르네에서 패주했다. 882년 1월 20일 동프랑크의 루트비히 청년왕이 사망하자 카를로마누스 2세와 루도비쿠스 3세는 로트링겐을 되찾으려 했다. 같은 해 노르만 족이 다시 쳐들어왔는데, 카를로마누스 2세는 아시네를 침공한 노르만 족을 직접 격퇴했다. 882년 9월부터 카를로마누스 2세는 본격적으로 로트링겐(후일의 로렌)을 다시 회복하려 했지만 삼촌인 동프랑크 왕국카롤루스 3세 크라수스의 압력으로 무산되었다. 카를로마누스 2세는 이미 왕국을 통치하고 있었지만, 882년 11월 보름스의 제국 의회에 소환되어 카롤루스 3세 크라수스로부터 서프랑크 왕국 전체의 국왕으로 책봉되었다.

883년 초, 바이킹 족이 쉽게 아브빌까지 쳐들어오자 카를로마누스 2세는 이를 겨우 물리쳐서 쫓아냈지만, 884년 노르만족은 다시 솜강 주변에 나타나 약탈을 감행하였다.[1] 노르만족은 아미엥에서 집단으로 천막을 치고 유숙하면서, 돈을 요구했다.[1] 카를로마누스 2세는 꽁피에뉴에서 12000데나리온 은화로 노르만족들을 매수하여 되돌려보냈다.[1] 그러나 일부 바이킹족은 되돌아가지 않고 로렌 주변의 국경지대와 루벤 지역에서 천막을 치고 유숙하였다.[1] 카를로마누스 2세의 치세기간 중 노르만족 해적들은 수시로 서프랑크의 해안가를 약탈했고, 결국 부르고뉴 귀족들의 반란이 일어났다.[1] 보소에게는 어린 딸이 있었고, 보소는 카를로마누스 2세에게 딸이 성년이 되면 결혼시키기로 약속했다.[1] 그러나 보소와의 계약은 보소의 이른 죽음과 카를로마누스 2세의 이른 죽음으로 성사되지 못했다.[1]

884년 12월 초, 카를로마누스 2세는 오트노르망디의 레장들리(Les Andelys)에 멧돼지 사냥을 나갔다가, 레 장들리의 베주(Bézu) 마을에서 우연히 그의 시종 베르톨드(Bertold)에 의해 사고로 부상당했다.[2] 그는 884년 초의 바이킹족과의 전투 중에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2] 장 레들리에서 부상과 낙마사고를 당한 지 수일 후, 884년 12월 12일에 사고 후유증으로 죽었다.[2] 사망 당시 카를로마누스 2세에게는 카롤루스라는 서자는 있었지만, 정식 결혼으로 얻은 적자는 없었다.[2] 이복 동생 단순왕 샤를은 나이가 너무 어렸으므로 왕국은 삼촌인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롤루스 3세 크라수스에게 넘어갔다.[2] 이로서 일시적으로 샤를마뉴의 제국은 다시 짧은 시간 동안 명목상 통일된다.[2]

2. 6. 사후

카를로마누스 2세는 죽기 직전 이름 미상의 첩에게서 아들 카롤루스를 얻었다. 그러나 카를로마누스 2세의 서계 가계 역시, 손자의 대에 이르러 후손을 남기지 못하고 죽음으로써 단절되고 만다. 노르만족의 침략으로 혼란에 처해있던 서프랑크의 귀족들은 카를로마누스 2세의 서자나 어린 동생 샤를 르 생쁠 대신 정치적 안정을 꾀하기 위해 카롤루스 3세 크라수스를 선택했다.

카를로마누스 2세의 시신은 파리 생드니 수도원의 1층 성소의 루도비쿠스 3세의 석관 왼편에 안치되었다.루도비쿠스 3세의 석관은 그의 오른편에 안치되었고, 오른편 아래에는 피핀 3세, 왼편에는 피핀 3세의 왕비 랑의 베르트라다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다.

884년 12월 12일, 카를로만 2세는 사냥 중 사고로 사망했다. 왕위는 동프랑크 왕이었던 카를 3세가 샤를 3세로서 계승했다.

3. 가족 관계


가운데가 카를 2세의 라인으로 가운데 가지의 세 번째 오른쪽이 카를로마누스 2세다. 카를로마누스 2세의 뒤로 아들 카롤루스와 손자 카롤루스가 있다.


루도비쿠스 3세와 카를로마누스 2세가 있는 동전

참조

[1] 웹사이트 statue (gisant) : Louis III, roi de France https://www.pop.cult[...] French Ministry of Culture
[2] 서적 The New Cambridge Medieval History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3] 서적 Carloman (Frankish princes)
[4] 서적 The New Cambridge Medieval History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5] 간행물 Annales Vedastini http://www.thelatinl[...]
[6] 간행물 Obituaires de la province de Sens https://gallica.bnf.[...]
[7] 간행물 Annales S. Benigni Divionensis 884 https://www.dmgh.de/[...] Monumenta Germaniae Historica|MGH
[8] 문서 그와 같은 이름을 쓰는 5촌 당숙이다.
[9] 문서 이르밍가르트는 큰할아버지 [[로타르 1세]]의 손녀딸이자, 같은 이름의 5촌당숙 [[이탈리아인 루트비히]]의 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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