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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소 (당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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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황소는 당나라 말기에 일어난 농민 반란의 지도자이다. 그는 소금 밀매업자 출신으로, 과거 시험에 여러 번 실패한 후 당나라에 반기를 들었다. 874년 왕선지와 함께 반란을 일으킨 황소는, 880년 장안을 점령하고 스스로 황제에 즉위하여 국호를 대제(大齊)로 정했다. 그러나 당나라 군대의 반격과 기근으로 인해 세력이 약화되었고, 결국 884년 조카에게 살해당하며 난이 종결되었다. 황소의 난은 당나라를 멸망으로 이끄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으며, 이후 오대 십국 시대를 초래하는 등 중국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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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소 (당나라)
인물 정보
이름황소
로마자 표기Hwang Chao
한자 표기黃巢
출생835년
사망884년 7월 13일 (48–49세)
즉위 및 통치
칭왕 시기878년 ~ 880년
즉위881년 1월 16일
퇴위884년 7월 13일
나라
연호왕패(王霸) 878년 ~ 880년
금통(金統) 881년 ~ 884년
기타 정보
아버지알려지지 않음
어머니알려지지 않음
배우자조씨
묘호알려지지 않음
시호승천응운계성예문선무황제(承天應運啓聖睿文宣武皇帝)
황소 (잔당오대사연의)

2. 배경

당나라618년에 건국되어 전성기를 지나 안사의 난으로 시작된 긴 쇠퇴기에 접어들었다. 안사의 난 이후 수십 년 만에 힘을 회복하여 840년~847년 위구르 카간국을 멸망시키는 등 정복 활동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874년~884년 한족 출신 반란자 황소의 난으로 당나라의 힘은 크게 약화되었다. 제국군이 반란을 진압한 후, 지방 군사 지휘관인 절도사의 권력이 커지면서, 무능한 정부에 대한 백성들의 원망이 커져 9세기 중반 여러 차례의 반란으로 이어졌다.

2. 1. 당나라 말기의 사회상

안사의 난 이후 절도사들의 권력이 강화되면서 당나라 중앙 정부의 통제력이 약화되었다.[1] 관리들의 부패와 가혹한 세금 징수는 백성들의 삶을 더욱 피폐하게 만들었다.[1] 가난한 농민, 세금에 시달리는 지주와 상인, 그리고 많은 대규모 소금 밀수업자들이 이 시기의 반정부 반란의 기반을 형성했다.[1] 왕선지와 황소는 이 시대의 중요한 반란 지도자였다.[1]

2. 2. 황소의 출신과 초기 활동

황소는 허쩌시 무단구에 속하는 위안취현 출신으로, 출생 연도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의 가문은 여러 세대에 걸쳐 소금 밀수를 해왔으며, 이로 인해 부유했다.[1] 황소는 검술, 승마, 궁술에 능했고, 글쓰기와 수사에도 재능이 있었다.[1] 그는 자신의 부를 이용하여 어려운 사람들을 거두어 휘하에 두었다.[1] 그는 여러 번 과거에 응시했지만 통과하지 못했고, 이후 당나라에 반란을 일으키기로 결심했다.[1]

874년, 같은 소금 밀매업자였던 왕선지가 수천 명의 무리를 이끌고 거병하자, 황소도 수천 명의 무리를 이끌고 이에 참여하여 반란군의 중심 인물 중 한 명이 되었다.[3] 황소는 왕선지와 함께 산둥성, 허난성, 안후이성 일대를 약탈하며 이동했다.[3]

3. 황소의 난 발발과 전개

연간 말(860–874), 의종 시대에 심각한 가뭄과 홍수로 끔찍한 기근이 발생했다. 그러나 당나라 황실 정부는 자연 재해 피해자들을 거의 무시하고, 오히려 세금을 인상했다. 그 결과 생존자들은 스스로 무리를 짓고 당나라 통치에 저항하기 시작했다.[6]

874년, 왕선지와 상군장(尙君長)은 허난성 신샹시의 창위안(長垣)에서 군대를 일으켰다. 황소도 이 시점에서 수천 명의 병력을 모아 왕선지의 군대와 합류했다. 이후 황소는 중국 중부 지역을 돌아다니며 당나라 군대와 여러 차례 교전했다.


  • 877년 봄, 황소는 천평군(天平軍)의 수도인 윤주(鄆州)를 점령하여 설충을 죽였고, 이어서 의주(沂州, 현대의 린이 린이, 산둥성)를 점령했다.[7]
  • 877년 여름, 그는 상군장(尚君長)의 형제 상양과 차아산 (查牙山, 현대의 주마뎬, 허난성)에서 합류했다. 그는 왕선지와 다시 잠시 합류하여 당나라 장군 송위(宋威)를 송주(宋州, 현대의 상추, 허난성)에서 포위했으나, 당나라 장군 장자면(張自勉)이 도착하여 그들을 격파했고, 그들은 송주 포위를 풀고 흩어졌다.[7]
  • 877년 겨울, 그는 기주와 황주(黃州, 현대의 우한, 후베이성)를 약탈했다. 그러나 당나라 장군 증원유(曾元裕)에게 격파당해 도주했다. 그는 곧 광성(匡城, 현대의 신샹)과 포주(濮州, 현대의 허저)를 점령했다.[7]


878년 봄, 황소는 박주(亳州, 현대의 보저우, 안후이성)를 포위하고 있었는데, 이때 왕선지는 황매(黃梅, 현대의 황강, 후베이성)에서 증원유에게 패하여 죽었다. 상양은 왕선지 군대의 잔당을 이끌고 박주에서 황소와 합류했고, 황소에게 왕의 칭호를 제안했다. 그러나 황소는 대신 충천대장군(衝天大將軍)을 자칭하고 연호를 왕파(王霸)로 바꾸어 당나라 정권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했다. 그는 이어서 다시 의주와 포주를 점령했지만, 당나라 군대에 의해 여러 차례 패배했다. 그는 천평의 새로운 절도사 장석(張裼)에게 편지를 써서 당나라 조정에 자신의 임명을 요청하도록 했다. 장석의 요청에 따라, 희종 황제는 황소를 금군(禁軍) 장군으로 임명했지만, 수도 장안으로 보고하기 전에 윤주로 가서 무장을 해제하도록 명령했다. 그러한 조건에 직면하여, 황소는 제안을 거부했다. 대신 그는 송주와 변주(汴州, 현대의 카이펑, 허난성)를 공격한 다음, 위남(衞南, 현대의 푸양, 허난성), 예현(葉縣, 현대의 핑딩산, 허난성), 양재(陽翟, 현대의 쉬창, 허난성)를 공격했다. 희종은 세 개의 도(道)에서 군대를 징집하여 동쪽 수도 뤄양을 방어하도록 했고, 증원유에게도 뤄양으로 향하도록 명령했다. 당나라 군대가 뤄양 방어에 집중하자 황소는 대신 남쪽으로 진격했다.[7]

황소는 양쯔강을 건너 남쪽으로 진격하여 첸주(虔州, 현재 장시성 간저우), 길주(吉州, 현재 장시성 지안), 요주(饒州, 현재 장시성 상라오), 신주(信州, 현재 상라오) 등 양쯔강 이남의 여러 주를 점령했다. 879년 겨울에는 후난성의 수도 탄저우 (현재 창사에 위치)를 점령했다.[7]

880년 겨울, 황소는 낙양과 장안으로 진군하며, 희종을 사로잡아 죄를 묻겠다는 선언을 발표했다.[3] 결국 낙양과 동관이 함락되었다. 박야군(博野軍)과 봉상절도(鳳翔, 본부는 현재의

3. 1. 왕선지와의 연합 및 결별

874년, 황소는 소금 밀매업자였던 왕선지가 허난성 신샹시 창위안(長垣)에서 군사를 일으키자 수천 명의 병력을 모아 이에 합류했다.[6] 왕선지는 875년까지 산둥성 타이안시에 본부를 둔 천평 절도의 절도사 설충을 전투에서 여러 차례 격파하는 등 세력을 확장했다.

876년 말, 당나라 재상 왕탁의 친척인 왕료와 후베이성 황강시 기주(蘄州) 태수 배악의 중재로 왕선지는 당나라에 평화적으로 항복하는 대신 관직을 받기로 했다. 희종은 왕선지를 황실 좌신책군(左神策軍)의 장교로 임명하는 임명장을 기주에 전달했다.[6]

그러나 이 약속에 따라 임명장을 받지 못한 황소는 격분하여 "우리가 반란을 일으킬 때 거창한 맹세를 했고 당신과 함께 먼 거리를 행군해 왔다. 이제 당신은 이 직책을 받아들이고 좌신책군으로 가려 한다. 이 5,000명의 병사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고 말하며 왕선지를 비난했다.[6] 그는 왕선지의 머리를 때렸고, 다른 병사들도 합의에 반대했다. 결국 왕선지는 자신의 군대의 분노를 두려워하여 배악을 배신하고 기주를 약탈했다. 이후 반군은 왕선지와 상군장을 따르는 그룹과 황소를 따르는 그룹으로 나뉘었다.[6]

3. 2. 남부 지역 공략

878년 가을, 황소는 북동쪽으로 방향을 돌려 쉬안청에 있는 쉬안주(宣州)를 공격했지만 함락시키지 못했다. 그래서 동남쪽으로 방향을 바꿔 저둥로(浙東) 절도사를 공격했고, 산길을 통해 푸젠로(福建) 절도사를 공격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고변의 부하인 당나라 장수 장린(張璘)과 량쭈안(梁纘)에게 여러 차례 패배했다. 그 결과 황소는 링난 지역으로 더 남쪽으로 방향을 돌리기로 결정했다.[7]

이 무렵, 왕둬는 황소에 대한 작전을 감독하겠다고 자원했고, 황소의 움직임에 대응하여 리시(李係)를 부사령관으로 임명하여 황소의 북쪽 귀환로를 막도록 했다. 한편, 황소는 당나라에 복종하겠다고 제안했지만, 시종(Xizong) 황제는 거절했다. 황소는 직접 시종 황제에게 링난 동로의 절도사가 되게 해달라고 요청했으나, 고위 관료 위총의 반대에 부딪혀 거절당했다. 황소는 이 제안을 받고 모욕으로 여겨 격분했다. 879년 가을, 그는 링난 동로의 수도 광저우(廣州)를 공격하여 하루 만에 함락시키고 리 탸오를 포로로 잡았다. 그는 리 탸오에게 시종 황제에게 그의 요청을 다시 제출하라고 명령했지만, 리 탸오가 거절하여 그를 처형했다.[7]

이전 아랍 및 페르시아 해적[8]이 광저우를 약탈한 적이 있었고,[9] 그 항구는 그 후 50년 동안 폐쇄되었다.[10] 그 후 관계가 다소 긴장되면서, 그들의 존재는 황소의 보복 기간 동안 광저우 대학살로 결말을 맞이했다.[11][12][13][14] 아랍 자료에 따르면 외국인 아랍 및 페르시아 무슬림, 조로아스터교 신자, 유대교인, 기독교인 희생자는 수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그러나 중국 자료에는 그 사건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15][16][17][18] 남중국의 뽕나무 숲이 그의 군대에 의해 파괴되어 해상 실크로드를 통한 비단 수출이 감소했다.[19]

하지만 황소의 군대가 영남 지역에 있었기 때문에 그의 군인들은 질병에 시달렸고 약 30~40%가 사망했다. 그의 핵심 부하들은 북쪽으로 진격할 것을 제안했고 그는 동의했다. 그리하여 그는 계주(桂州, 현재의 구이린)에서 뗏목을 만들어 샹 강을 따라 내려가 879년 겨울에 후난성의 수도 탄저우 (현재 창사에 위치)에 도착했다. 그는 탄저우를 공격하여 하루 만에 점령했다.[7]

3. 3. 북상과 장안 점령

880년 겨울, 황소는 낙양과 장안으로 진군하며, 희종을 사로잡아 죄를 묻겠다는 선언을 발표했다.[3] 기거랑은 황소가 낙양으로 오는 것을 막기 위해 마지막으로 노력했으나, 재상 두로전과 최항은 조정군이 황소를 막을 수 없을 것이라 판단했다. 그들은 희종에게 환관 전령자의 형제 진경선이 있는 서천절도(西川, 본부는 현재의

4. 대제(大齊) 건국과 통치

880년 겨울, 황소는 낙양과 장안으로 진군하며 자신의 목표가 희종을 벌하는 것이라고 선언했다. 당나라 조정은 황소를 막기 위해 마지막 시도를 했으나 실패하고, 동관이 함락되었다. 희종은 전령자의 제안에 따라 장안을 버리고 서천절도로 피난했다.[1] 황소는 장안에 입성하여 새로운 제나라의 황제로 즉위했다. 그는 아내인 조부인을 황후로 삼았으며, 상랑, 조장(趙璋), 당나라 관료 최구(崔璆), 양희고(楊希古)를 재상으로 임명했다.[3]

4. 1. 장안 통치와 한계

황소는 장안에서 황제에 즉위하여 국호를 대제(大齊)로 하고 연호를 금통(金統)으로 정했다.[3] 아내 조부인을 황후로 삼고, 상랑, 조장(趙璋), 당나라 관료 최구(崔璆), 양희고(楊希古)를 재상으로 임명했다.[3]

황소는 처음에는 당나라 황제의 권력을 인수하려 했고, 당나라 4품 이하의 관료(당나라 9품 체계에서)들은 조(趙)에게 등록하여 복종하면 계속 관직에 머물도록 지시했으며, 3품 이상의 관료들만 제거했다.[3] 복종하지 않는 당나라 관료들은 대량으로 처형되었다.[3] 빈민 출신인 황소군 병사들은 관료로서의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당나라 관료를 그대로 채용할 수밖에 없었다.

황소는 또한 여러 지역의 당나라 장군들을 설득하여 그에게 복종하게 하려 했으며, 그들 중 상당수가 이에 응했다. 여기에는 하남성 초작시에 위치한 하양절도사(河陽, 河陽節度使)인 제갈상, 산둥성 유방시에 위치한 평로절도사(平盧, 平盧節度使) 왕경무, 산시성 윈청시에 위치한 하중절도사(河中, 河中節度使)인 왕충롱 등이 포함되었지만, 이들은 결국 다시 당나라에 충성을 맹세했다.[3][20]

4. 2. 당나라의 반격과 제나라의 쇠퇴

881년 겨울, 황소는 낙양과 장안으로 진군하면서 자신의 목표가 희종을 벌하는 것이라고 선언했다. 당나라 조정은 황소를 막기 위해 마지막 시도를 했으나 실패하고, 동관이 함락되었다. 희종은 전령자의 제안에 따라 장안을 버리고 서천절도로 피난했다.[1] 황소는 장안에 입성하여 새로운 제나라의 황제로 즉위하고, 연호를 금통이라 하였다. 그는 당나라 관료들을 등용하고, 여러 지역의 당나라 장군들을 설득하여 복종시키려 했다.[3]

정전 등 여러 절도사들이 제나라에 저항했고, 881년 여름에는 장안을 공격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황소는 장안 백성들을 학살하고, 당나라 군대는 통제를 잃었다.[3]

882년, 희종은 왕도를 제나라에 대한 작전 감독으로 임명했고, 당나라 군대는 다시 장안 주변에 집결했다. 제나라 군대는 장안과 그 주변 지역으로 세력이 축소되었고, 전쟁으로 인한 기근으로 인육을 먹는 지경에 이르렀다.[3] 주전 등 제나라 장군들이 당나라에 항복하면서 제나라의 영토는 더욱 줄어들었다.[20]

사타족 출신 장군 이극용이 당나라에 합류하여 883년 봄, 제나라 주력군을 격파하고 장안으로 접근했다.[3][20] 883년 여름, 이극용은 장안에 입성했고, 황소는 장안을 버리고 동쪽으로 도망쳤다.[20]

5. 황소의 최후와 난의 종결

황소는 봉국(현재의 주마뎬 시)으로 향했고, 그의 장군 맹개(孟楷)에게 봉국의 수도 채주(蔡州)를 공격하게 했다. 봉국 절도사 진종권은 맹개에게 패배한 후 성문을 열고 황소에게 항복하여 그의 군대에 합류했다. 이후 맹개는 진주(陳州, 현재의 저우커우 시)를 공격했으나, 진주 지사 조주의 반격에 기습당해 전사했다. 맹개의 죽음에 분노한 황소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진주를 포위했지만, 300일 가까이 지나도록 함락시키지 못했다. 군량 부족으로 황소는 군대가 주변 지역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납치해 식량으로 사용하도록 허락했다.[20]

황소의 난은 당나라 멸망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으며, 이후 오대 십국 시대의 혼란을 초래했다.[23] 이 난은 황건적의 난이나 태평천국의 난에 비견될 정도로 당나라를 크게 약화시켰다. 결국 황소의 추종자였던 주전충애제로부터 왕위를 찬탈하고 907년에 당나라가 멸망하면서, 수십 년간의 혼란스러운 내전오대 십국 시대가 시작되었다.

정치학자 왕유화는 황소의 난이 당나라뿐만 아니라 중국 제국 역사에서도 전환점을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수도 지역의 대학살로 인해 한나라 이후 정치를 독점해 온 대부분의 귀족 가문이 멸망했기 때문이다. 이후 송나라부터 중국의 정치 관료는 과거제를 통해 두각을 나타낸 더욱 분산된 지역 향신 가문에 의존하게 되었다.[23]

5. 1. 황소의 죽음

884년 봄, 황소는 다음 목표가 될 것을 두려워한 주기, 감화 절도사 사보, 주전충(당시 이름이 주전충으로 바뀜), 선무 절도사는 모두 이극용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이극용은 하동 절도사의 절도사로, 그들을 돕기 위해 남쪽으로 향했다. 이극용은 주기, 주전충, 사보, 그리고 제극랑이 보낸 군대와 합세하여 태강(太康, 현재 저우커우)에서 상양을, 서화(西華, 현재 저우커우)에서도 황사예를 공격하여 격파했다. 황소는 두려움에 질려 진주 포위를 풀고 철수했다. 그의 야영지가 홍수로 파괴되자, 황소는 선무의 수도 변주로 향하기로 결정했다. 주전충은 황소의 초기 공격을 격퇴했지만, 이극용에게 긴급 지원을 요청했다. 이극용은 황소가 북쪽으로 황하를 건너려 할 때 왕만도(王滿渡, 현재 정저우 시)에서 공격을 가해 그의 군대를 격파했다. 상양은 사보에게 항복했고, 다른 많은 장군들이 주전충에게 항복했다. 이극용은 추격했고, 황소는 동쪽으로 도망쳤다. 추격전 동안 황소의 막내 아들이 이극용에게 붙잡혔다. 그러나 추격전으로 이극용의 군대는 지쳤고, 추격을 중단하고 변주로 돌아갔다.[20]

황소는 태녕의 수도 연주로 향했다. 사보의 장수 이사열(李師悅)은 상양과 함께 연주에서 황소와 교전하여 그를 격파하고 그의 군대의 거의 전부를 전멸시켰고, 그는 랑호곡(狼虎谷, 현재 라이우 시)으로 도망쳤다. 884년 7월 13일,[1] 황소의 조카 임언(林言)은 황소, 그의 형제들, 그의 아내, 그리고 그의 자녀들을 죽이고 그들의 머리를 잘라 사보에게 항복하려 했다. 그러나 사보의 진영으로 가는 길에 그는 사타와 박야 군의 불규칙 병력을 만나 그들에게 살해당하고 머리를 빼앗겨 사보에게 바쳐졌다.[20] (그러나, ''신당서''의 다른 기록에 따르면, 황소는 그의 군대가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고 임언에게 그의 머리를 가지고 항복하라고 지시한 후 자살했다.)[5]

일부에서는 임언이 황소와 그의 다른 측근들의 머리를 시푸에게 가져간 것은 진짜 황소가 도망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미끼였다고 추측한다. 랑호곡은 쉬주에 있는 시푸의 진영에서 말로 500 리 이상, 즉 3~4일 거리에 있었고, 더운 여름 동안 부패가 이미 시작되어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황소에게는 여러 명의 형제들이 있었고 그들은 서로 닮았을 것이다.

그 후 오대십국 시대에 유행했던 전설에 따르면 황소는 도망친 후 불교 승려가 되었다고 한다. 예를 들어 송나라 학자 왕밍칭(王明清)은 그의 저서 《회주록》에서 "장전의가 서경(즉 뤄양)의 유수(留守)였을 때 승려들 중에서 황소를 알아봤다"고 주장했다.[21]

5. 2. 난의 영향

황소의 난은 당나라 멸망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으며, 이후 오대 십국 시대의 혼란을 초래했다.[23] 이 난은 황건적의 난이나 태평천국의 난에 비견될 정도로 당나라를 크게 약화시켰다. 결국 황소의 추종자였던 주전충애제로부터 왕위를 찬탈하고 907년에 당나라가 멸망하면서, 수십 년간의 혼란스러운 내전오대 십국 시대가 시작되었다.

정치학자 왕유화는 황소의 난이 당나라뿐만 아니라 중국 제국 역사에서도 전환점을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수도 지역의 대학살로 인해 한나라 이후 정치를 독점해 온 대부분의 귀족 가문이 멸망했기 때문이다. 이후 송나라부터 중국의 정치 관료는 과거제를 통해 두각을 나타낸 더욱 분산된 지역 향신 가문에 의존하게 되었다.[23]

6. 평가 및 해석

황소는 중국 역사상 수많은 반란 지도자 중 한 명이었지만, 그의 반란이 끼친 영향은 황건적의 난이나 태평천국의 난에 비견될 수 있다. 황소의 난은 당나라를 크게 약화시켜, 결국 907년에 멸망하는 결과를 초래했다.[23]

정치학자 왕유화는 황소의 난이 당나라뿐만 아니라 중국 제국 역사에서도 전환점을 보여준다고 주장한다. 수도 지역의 대학살로 인해 한나라 이후 정치를 독점해 온 대부분의 귀족 가문이 멸망했기 때문이다. 이후 송나라부터 중국의 정치 관료는 과거제를 통해 두각을 나타낸 더욱 분산된 지역 향신 가문에 의존하게 되었다.[23]

6. 1. 중국 역사에서의 평가

황소는 중국 역사상 수많은 반란 지도자 중 한 명이었지만, 그의 반란이 끼친 영향은 황건적의 난(후한을 분열시킴)이나 태평천국의 난(청나라를 불안정하게 만듦)에 비견될 수 있다. 황소의 난은 당나라를 크게 약화시켰고, 결국 그의 추종자였던 주전충애제로부터 왕위를 찬탈하고 오대 십국 시대라 불리는 수십 년간의 혼란스러운 내전을 시작하면서 907년에 멸망하게 되었다.[21]

정치학자 왕유화는 황소의 난이 당나라뿐만 아니라 중국 제국 역사에서도 전환점을 표시한다고 주장한다. 수도 지역의 대학살로 인해 한나라 이후 정치를 독점해 온 대부분의 귀족 가문이 멸망했기 때문이다. 이후 송나라부터 중국의 정치 관료는 과거제를 통해 두각을 나타낸 더욱 분산된 지역 향신 가문에 의존하게 되었다.[23]

6. 2. 한국사와의 연관성

황소의 난은 신라고려 초의 혼란스러운 사회상과 비교되어, 민중 봉기가 갖는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황소의 난은 당나라를 크게 약화시켰고, 결국 그의 추종자였던 주전충애제로부터 왕위를 찬탈하고 오대십국 시대라 불리는 수십 년간의 혼란스러운 내전을 시작하면서 907년에 멸망하게 되었다.[21] 이는 황건적의 난이나 태평천국의 난에 비견될 수 있다.

정치학자 왕유화는 황소의 난이 당나라뿐만 아니라 중국 제국 역사에서도 전환점을 표시한다고 주장한다. 수도 지역의 대학살로 인해 한나라 이후 정치를 독점해 온 대부분의 귀족 가문이 멸망했기 때문이다. 이후 송나라부터 중국의 정치 관료는 과거제를 통해 두각을 나타낸 더욱 분산된 지역 향신 가문에 의존하게 되었다.[23]

6. 3. 문학 작품에서의 황소

황소는 분노와 폭력을 표현할 때조차 서정적인 몇 편의 시를 썼다. 그중 한 구절은 다음과 같다.[22]

: "수도에는 금빛 갑옷을 입은 병사들로 가득하다"()

이 시는 분노에 찬 정신으로 반란을 준비하는 모습을 묘사하는 데 사용되었다. 이후 이 구절은 2006년 영화 황후화의 중국어 제목으로 사용되었다. 명나라(1368-1644)의 창시자인 홍무제도 비슷한 시를 썼다.[22]

황소는 몇 수의 한시를 남겼으며, 「제국화(題菊花) [https://www5a.biglobe.ne.jp/~shici/p52.htm]」, 「영국(詠菊) [https://www5a.biglobe.ne.jp/~shici/pb02.htm]」 등에서 반란에 대한 의지를 노래했다.

황소를 소재로 한 문학 작품으로는 타니 코세이의 『장안 열일 - 대당 제국을 쓰러뜨린 거괴 황소』(쇼덴샤)가 있다.

참조

[1] 간행물 Academia Sinica http://sinocal.sinic[...]
[2] 서적 Zizhi Tongjian https://zh.wikisourc[...]
[3] 서적 Zizhi Tongjian https://zh.wikisourc[...]
[4] 서적 Outline of Chinese History
[5] 서적 New Book of Tang https://zh.wikisourc[...]
[6] 서적 Zizhi Tongjian https://zh.wikisourc[...]
[7] 서적 Zizhi Tongjian https://zh.wikisourc[...]
[8] 서적 Atlas of Islamic History Routledge
[9] 서적 A Borrowed Place: The History of Hong Kong Kodansha International
[10] 서적 A Borrowed Place: The History of Hong Kong Kodansha International
[11] 서적 Voyage du marchand arabe Sulaymân en Inde et en Chine, rédigé en 851, suivi de remarques par Abû Zayd Hasan (vers 916) https://archive.org/[...] Paris Éditions Bossard
[12] 서적 Jews in old China: studies by Chinese scholars https://books.google[...] Hippocrene Books 2010-06-28
[13] 서적 Male anxiety and female chastity: a comparative study of Chinese ethical values in Ming-Chʻing times https://books.google[...] Brill 2010-06-28
[14] 서적 A Splendid Exchange: How Trade Shaped the World https://books.google[...] Grove Press 2010-06-28
[15] 서적 China: a macro history https://books.google[...] M.E. Sharpe 2010-06-28
[16] 웹사이트 A History Of The Arrival And The Development Of Islam In Kedah http://www.mykedah2.[...] 2018-06-20
[17] 서적 History of Humanity: From the seventh to the sixteenth century https://books.google[...] Routledge 1994-05-24
[18] 서적 Familiar Strangers: A History of Muslims in Northwest China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Washington Press 1997-05-24
[19] 서적 A Splendid Exchange https://books.google[...] Grove/Atlantic, Inc. 2010-06-28
[20] 서적 Zizhi Tongjian https://zh.wikisourc[...]
[21] 웹사이트 英雄末路:自殺?他殺? 黃巢死因至今撲朔迷離 http://big5.news.cn/[...] 2014-09-21
[22] 웹사이트 黃金甲歷史背景與劇情深度影評 http://tw.myblog.yah[...] 2009-06-14
[23] 서적 The Rise and Fall of Imperial China Princeton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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