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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타브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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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칸타브리인은 스페인 북부 대서양 해안 지역에 거주했던 고대 민족으로, "고지대 사람들"을 의미하는 라틴어 명칭에서 유래되었다. 기원전 4세기경 이베리아 반도로 이주해온 것으로 추정되며, 켈트족과 혼혈되었다는 로마 기록이 존재한다. 칸타브리아는 여러 부족 연맹으로 구성되었으며, 로마 제국에 저항하며 독립적인 성향을 보였다. 기원전 1세기에 칸타브리아 전쟁을 겪으며 로마에 정복되었지만, 로마화 이후에도 고유한 문화적 특징을 유지했다. 칸타브리인들은 다신교를 믿었으며, 다양한 신들을 숭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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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타브리인
개요
이름칸타브리인
로마자 표기Kantabeuriin
그리스어Καντάβροι
역사적 배경
시대철기 시대
지역이베리아 반도 북부
문화
언어칸타브리아어 (추정)
민족켈트족 또는 원(原) 켈트족
지리
주요 거주지칸타브리아 지역
사회 및 정치
정치 체제부족 사회
기타
관련 민족아스투리아스인
바스크인
바콘족

2. 명칭

''칸타브리''(Cantabrila)는 라틴어화된 지방명으로, "고지대 사람들"을 의미하며, 고대 리구리아어의 복원된 어근 *''cant''- ("산")에서 유래했을 것으로 추정된다.[32][1] 중세 시대와 근세 시대 동안 이 이름은 일반적으로 바스크족을 지칭했다.

3. 지리

칸타브리아 전쟁 기간 칸타브리인의 위치. 고전 사료에 따른 칸타브리아 지역에 살던 부족들, 이웃 민족들, 도시 및 지리적 특징이 나타나 있다.


칸타브리인의 땅 칸타브리아는 본래 오늘날 칸타브리아, 아스투리아스 동부, 카스티야이레온의 인접한 산악 지역, 팔렌시아 북부, 레온의 북동부를 포함한 스페인의 북부 대서양 해안가의 고지대였다.[1] 하지만 이 지역은 로마의 정복 이후에 상당히 줄어들어, 칸타브리아와 아스투리아스 동부 지역만 남게 되었다.[2]

4. 역사

칸타브리인들은 야만적이고 길들여지지 않는 산악 민족으로, 오랫동안 로마 군단에 저항하며 독립 정신과 자유로 유명했다. 칸타브리 전사들은 "거칠고 사나운 싸움꾼들"로 용병업에 적합했지만, 강도질을 하는 경향도 있었다.[37][38][39]

리비우스[40]와 폴리비우스[41] 같은 고대 작가들은 기원전 207년 메타우루스 전투에서 칸타브리인 용병들이 카르타고군에 복무했다고 언급했다. 코르넬리우스 네포스[42]는 칸타브리 부족들이 기원전 195년 대 카토의 켈티베리아 군사 활동으로 로마에 처음 복종했고,[43] 이후 칸타브리 군대가 기원전 2세기 켈티베리아 전쟁에서 바카이이족과 켈티베리아족을 위해 싸웠다고 주장했다.

산탄데르의 칸타브리인 조각상.


이러한 평판 때문에 집정관 가이우스 호스틸리우스 만키누스 휘하의 지쳐있던 로마군은 기원전 137년 누만티아 포위 중, 대규모 칸타브리족-바카이이족 연합 지원군이 온다는 소식에 공포를 느껴 20,000명이 탈영했고, 만키누스는 굴욕적인 평화 협정 조건에서 항복해야 했다.[44][45]

기원전 1세기에 칸타브리족들은 여러 부족들로 이뤄졌고, 베사야강 계곡의 전략적 요충지인 '아라킬룸'(Aracillum, 칸타브리아의 카스트로데에스피나델가예고, 시에라델에스쿠도)에서 부족 연합 형태로 모였다. 기원전 1세기 초, 칸타브리족들은 세르토리우스 전쟁(기원전 82년–기원전 72년) 시기에는 폼페이우스 편에 섰지만, 기원전 49년 레리다(예이다) 전투에서 패배했다.[46] 기원전 56년에는 갈리아 전쟁에 개입하여 아퀴타니족을 도왔지만 실패했다.[47]

플로루스에 따르면, 칸타브리족 대족장 코로코타의 지휘 아래, 그들은 바카이이, 투르모디기이, 우트리고네스를 약탈했고, 기원전 29년 바카이이의 반로마 반란을 지원하여 결국 제1차 칸타브리아 전쟁이 발발했다. 이 전쟁으로 아우구스투스에게 정복당하고 일부 학살당했다.[49] 잔존한 칸타브리인과 부족들은 트란스두리아나 속주로 흡수되었다.

아우구스투스의 가혹한 조치와 그의 부관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의 안정화 노력에도 불구하고, 칸타브리아 지역은 계속 혼란스러웠다. 거의 매번 부족 봉기(기원전 20년의 심각한 노예 봉기 포함)[50]와 게릴라전이 계속되었고, 서기 1세기 초 히스파니아 타라코넨시스 속주에 포함되면서 자치권을 부여받았다.

4. 1. 기원

칸타브리인의 조상들은 기원전 4세기경 이베리아반도로 이주해왔다고 로마인들은 생각했으며,[33][34] 로마인들은 그들이 대다수의 이베리아반도의 켈트 부족들보다 혼혈이 이뤄졌다고 말했다. 로마 작가들은 그들의 부족 명칭을 평가하며 11개 또는 그 이상의 부족들에 갈리아인, 켈티베리아인, 인도아리아인, 아퀴타니인, 리구리인들의 기원이 포함되어 있다고 여겼다.

고대 칸타브리아 지역 명칭에 대한 자세한 분석은 강한 켈트적인 요소와 거의 비슷하게 강한 ‘준켈트적인 요소’들을 나타내며, 이 지역 내 전 인도유럽인 또는 바스크인들이 실제 존재했다는 주장을 논박했다.[35] 이것은 1998년에 루이스갈베스가 제기한 고고학적 증거와 일치하며, 운터만이 꽤나 그럴싸하다고 생각하던 이베리아반도의 켈트족 정착지가 브르타뉴가론강 하구 사이 지역의 대서양을 거쳐 갈리시아와 칸타브리아 해안가를 따라 정착한 이들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초창기의 견해를 뒷받침한다.[36]

4. 2. 초기 역사

야만적이고 길들여지지 않는다고 여겨지는 산악 민족인 칸타브리인들은 오랜 기간 로마 군단에 저항했고, 그들의 독립 정신과 자유로 유명했다. 칸타브리인 전사들은 “거칠고 사나운 싸움꾼들”이어서 용병업에 적합했으나, 강도질을 하는 경향이 있었다.[37][38][39] 이들에 대한 최초의 언급은 리비우스[40]와 폴리비우스[41] 같은 고대 작가들의 문서에서 발견되었는데, 기원전 207년 메타우루스 전투에서 칸타브리인 용병들이 카르타고군에 복무해서 싸웠다고 언급했다. 또 다른 작가 코르넬리우스 네포스[42]는 칸타브리 부족들이 기원전 195년 켈티베리아 지역에 대한 대 카토의 군사 활동으로 로마에 처음 복종했고,[43] 이후 칸타브리 군대가 기원전 2세기 켈티베리아 전쟁에서 바카이이족과 켈티베리아족을 위해 싸웠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평판 때문에 집정관 가이우스 호스틸리우스 만키누스 휘하의 지쳐있던 로마군은 기원전 137년 누만티아를 포위하다가, 대규모의 칸타브리족-바카이이족 연합 지원군이 접근해온다는 소식에 공포를 느껴 20,000명이 탈영했고, 만키누스는 굴욕적인 평화 협정 조건에서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44][45]

기원전 1세기에 칸타브리족들은 아바리기네스족, 블렌디이족, 카마리키족(타마리키족), 콘카니족, 코니아키족(코니스키족), 몬레카니족, 노에기족, 오르게노메스키족, 플렌투이시이족, 살라에니족, 바디니엔세스족, 벨리키족(벨리케스족) 등 11개 또는 그 이상의 부족들로 이뤄졌고, 베사야강 계곡에 위치한 전략적으로 좋은 곳에 있는 '아라킬룸'(Aracillum, 칸타브리아의 카스트로데에스피나델가예고, 시에라델에스쿠도)에서 부족 연합 형태로 모였다. 다른 중요한 칸타브리족들의 요새에는 'Villeca/Vellica' (팔렌시아의 Monte Cildá|Monte Cildáes), 'Bergida' (Castro de Monte Bernorio|Monte Bernorioes – 팔렌시아), 'Amaya/Amaia' (Peña Amaya|Peña Amayaes부르고스) 등이 포함된다. 기원전 1세기 초에 칸타브리족들은 직업으로 각 로마 장군에게 복무하는 동시에 로마령 스페인 속주의 반란을 지원하고 불안하던 시기에 약탈을 벌이는 등 표리부동한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기회주의적인 정책은 세토리우스 전쟁(기원전 82년–기원전 72년)의 마지막 시기에 폼페이우스와 같은 편에 서는 결과를 이끌었고, 그들은 기원전 49년 레리다(예이다) 전투에서 아프리아누스와 페트리우스 장군들에게 패배할 때까지 폼페이우스의 정책을 따랐다.[46] 이보다 앞서 칸타브리족은 율리우스 카이사르 휘하에서 복무하던 마르쿠스 크라수스의 아들 푸블리우스 크라수스에 대항하는 갈리아 남동쪽의 아퀴타니족들을 돕기 위해 기원전 56년에 군대를 파견하여 갈리아 전쟁에 개입했지만 성공적이지 못했다.[47]

플로루스에 의하면, 칸타브리족의 대족장 코로코타의 지도하에서 그들이 탐을 내던 부유한 지역들인 바카이이, 투르모디기이, 우트리고네스에 대한 약탈은 기원전 29년에 그들의 지원을 받아 일어난 바카이이의 반로마 반란과 결부되어 있었고, 결국 제1차 칸타브리아 전쟁 발발로 이어져 아우구스투스에 의한 정복과 일부 학살이라는 결과를 초래했다.[49] 잔존한 칸타브리인들과 부족들은 새롭게 만들어진 트란스두리아나 속주로 흡수되었다.

그럼에도 아우구스투스의 가혹한 조치와 그의 부관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가 이 전쟁의 여파로 이 지역을 안정시키기 위한 행위는 칸타브리아 지역을 더욱 혼란스럽게 했다. 거의 매번 일어나는 부족들의 봉기(인접한 아스투리아스로 빠르게 퍼져나간 기원전 20년에 일어난 심각한 노예 봉기를 포함)[50]와 게릴라 전투는 이 지역에 자치권을 부여하고 새롭게 만들어진 히스파니아 타라코넨시스 속주에 포함시킨 서기 1세기 초까지 지속되었다.

4. 3. 칸타브리아 전쟁

기원전 1세기 초, 칸타브리족은 로마 장군에게 용병을 제공하기도 하고, 로마 스페인 속주 내 반란을 지원하거나 약탈을 하는 등 이중적인 행태를 보였다. 이러한 기회주의적인 정책으로 칸타브리족은 처음에는 퀸투스 세르토리우스 편에 섰지만, 세르토리우스 전쟁의 마지막 단계에서는 폼페이우스에게 충성을 바꿨다. 그들은 폼페이우스 장군인 루키우스 아프라니우스와 마르쿠스 페트레이우스가 기원전 49년 일레르다 전투에서 패배할 때까지 폼페이우스 편을 들었다.[19][20]

기원전 56년, 칸타브리족은 갈리아 전쟁에 개입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그들은 율리우스 카이사르 휘하의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군단장과 동남부 갈리아의 아퀴타니 부족을 돕기 위해 약 4만 명의 병력을 보냈지만, 크라수스는 5만 명의 칸타브리-아퀴타니 연합군을 제압하고 3만 8천 명을 학살했다.[21][22]

코로코타 추장의 지휘 아래 칸타브리족은 바카에이, 투르모디기, 아우트리고네스를 약탈했고,[23] 기원전 29년 바카에이의 반로마 봉기를 지원하여 결국 첫 번째 칸타브리아 전쟁이 발발했다. 이 전쟁으로 인해 칸타브리족은 황제 아우구스투스에게 정복당하고 일부는 멸망했다.[25] 남은 칸타브리아 인구와 부족 영토는 보좌 집정관 루키우스 세스티우스 알바니아누스 퀴리날리스 휘하의 새로 창설된 트란스두리아나 속주에 흡수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우구스투스가 고안하고 그의 군단장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가 시행한 가혹한 조치들은 칸타브리아의 불안정을 더욱 심화시켰다. 기원전 1세기 초까지 끊임없는 부족 봉기(기원전 20년에는 인근 아스투리아스까지 확산된 심각한 노예 봉기 포함)[26]와 게릴라전이 칸타브리아 지역을 괴롭혔고, 이 지역은 새로운 히스파니아 타라코넨시스 속주에 포함되면서 지역 자치 형태를 부여받았다.

4. 4. 로마화

로마인들이 ''카스트라 레기오 피소라카'' (마케도니카 제4군단의 주둔지 – 팔렌시아), ''옥타비올카'' (칸타브리아의 발데올레아 인근), ''이울리오브리가'' (레이노사의 레토르티요)에 식민지와 요새들을 세웠음에도, 칸타브리아 지역은 완전히 로마화되지 못했고 칸타브리인들은 로마 시기에 켈트족의 언어, 종교, 문화적인 많은 측면들을 잘 보존했다.[1] 칸타브리족은 그들의 전사적 특징을 잃지 않았고, 수십 년 간 로마 제국군에 보조병들을 보내주었고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서기 43년-60년의 브리튼 제도 침략에 칸타브리족 병력들이 참여했다.[1]

4. 5. 중세 초기

칸타브리족들은 그들의 이웃 부족인 아스투레스족처럼 4세기 말 게르만족 대이동이라는 혼란기에 다시 나타났다.[1] 그 때부터 칸타브리족들은 기독교화되기 시작했고 6세기에 서고트족에게 난폭하게 진압당했다.[2] 그러나 칸타브리아와 칸타브리족들은 바스코네스족을 상대로 하는 서고트족의 전쟁 (7세기 말)과 관련하여 수십 년 후에 다시 언급된다. 그들은 8세기 이슬람교도의 이베리아 정복 이후 언어와 문화가 완전히 라틴화되었다.

5. 문화

대 플리니우스와 스트라본의 기록에 따르면,[51][52][27][28] 칸타브리아 지역에는 자철석, 호박, 금, 주석, 납, 철, 소금 광산 등이 있었다고 한다. 특히 스트라본은 카베손데라살 (또는 카베손 데 라 살) 일대의 소금 광산을 언급했다. 그러나 칸타브리인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스트라본은 출산 후 의례에 대해 묘사했는데, 이 의례에서는 산모가 일어나고 아버지가 산모를 대신하여 간호를 받기 위해 침대에 누웠다고 한다.

6. 종교

문헌과 비문 증거에 따르면, 칸타브리족은 갈라이키족과 아스투레스족과 마찬가지로 다신교를 믿었으며, 신성한 참나무나 소나무 숲, 산, 하천, 작은 시골 신전에서 남신과 여신을 포함하는 광대하고 복잡한 인도유럽 신들을 숭배했다.

칸타브리족은 드루이드교를 실천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지만, 의례적인 증기 목욕, 축제 춤, 신탁, 점술, 인간 및 동물 희생 등 의례를 수행하는 조직화된 사제 계급의 존재에 대한 충분한 증거가 있다. 스트라본[29]은 북서부 사람들이 이름 없는 전쟁의 신에게 말을 희생했다고 언급했으며, 호라티우스[30]와 실리우스 이탈리쿠스[31]는 콩카니족이 의식에서 말의 피를 마시는 관습이 있었다고 덧붙였다.

참조

[1] 서적 Roma contra Cantabros y Astures 1982
[2] 기타 Historia Naturalis
[3] 기타 Geographikon
[4] 논문 Linguistic Strata in Ancient Cantabria: the evidence of toponyms http://dialnet.uniri[...]
[5] 서적 La Europa Atlántica en la Edad del Bronce. Un viaje a las raíces de la Europa occidental. Ed. Crítica
[6] 논문 Celtiberians: Problems and Debates https://web.archive.[...] 2011-12-09
[7] 기타 Epitomae Historiae Romanae
[8] 기타 Punica
[9] 기타 Geographikon
[10] 기타 Ab Urbe Condita
[11] 기타 Istorion
[12] 시 Punica
[13] 시 Punica
[14] 기타 De Viris Illustribus
[15] 인용
[16] 기타 Tiberius Gracchus
[17] 기타 Romaika
[18] 기타 De Bello Gallico
[19] 기타 De Bello Civili
[20] 기타 Pharsalia
[21] 기타 De Bello Gallico
[22] 기타 Historiae Adversos Paganos
[23] 기타 Historiae Adversos Paganos
[24] 기타 Epitomae Historiae Romanae
[25] 기타 Augustus
[26] 기타 Romaiké Historia
[27] 기타 Historia Naturalis
[28] 기타 Geographikon
[29] 기타 Geographikon
[30] 시 Odes
[31] 기타 Hispania
[32] 서적 Roma contra Cantabros y Astures 1982
[33] 기타 Historia Naturalis
[34] 기타 Geographikon
[35] 논문 Linguistic Strata in Ancient Cantabria: the evidence of toponyms http://dialnet.uniri[...]
[36] 저널 Celtiberians: Problems and Debates http://www4.uwm.edu/[...] 2018-07-08
[37] 서적 Epitomae Historiae Romanae
[38] 서적 Punica
[39] 서적 Geographikon
[40] 서적 로마사
[41] 서적 Istorion
[42] 서적 De Viris Illustribus
[43] 사료 현대 역사가들의 언급
[44] 서적 Tiberius Gracchus
[45] 서적 Romaika
[46] 서적 De Bello Civili
[47] 서적 De Bello Gallico
[48] 서적 Epitomae Historiae Romanae
[49] 서적 Augustus
[50] 서적 Romaiké Historia
[51] 서적 Historia Naturalis
[52] 서적 Geographikon
[53] 서적 Geographikon
[54] 서적 송가
[55] 서적 Hispan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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