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레의 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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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칼레의 시민은 1347년 백년 전쟁 중 칼레 포위전 당시,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3세에게 항복하는 조건으로 시민 6명의 목숨을 내놓아야 했던 사건을 말한다. 시민들의 안전을 위해 자발적으로 희생을 택한 여섯 명의 시민들은 잉글랜드 여왕의 간청으로 처형을 면했다. 이 사건은 오귀스트 로댕의 조각 작품으로 묘사되었으며, 특히 1997년 외환 위기 당시 한국 사회에서 지도층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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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레의 시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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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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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어 제목 | Les Bourgeois de Calais |
종류 | 청동 |
제작 연도 | 1884–89년 |
높이 (미터) | 2.016 |
너비 (미터) | 2.054 |
길이 (미터) | 1.959 |
높이 (인치) | 79 3/8 |
너비 (인치) | 80 7/8 |
길이 (인치) | 77 1/8 |
위치 | 칼레, 프랑스 |
2. 역사적 배경
1347년, 잉글랜드 도버와 가장 가까운 프랑스의 해안도시 칼레는 지리적 이점 때문에 잉글랜드의 집중 공격을 받았다. 칼레 시민들은 기근 등의 악조건 속에서도 1년여간 잉글랜드군에 맞서 싸웠으나, 결국 항복을 선언하게 되었다.
처음에 잉글랜드의 왕 에드워드 3세는 1년 동안 자신에게 저항한 칼레의 모든 시민들을 죽이려 했다. 그러나 칼레 측의 여러 번의 사절과 측근들의 조언으로 그 결정을 취소하고, 칼레 시민들에게 새로운 조건을 제시했다.
칼레 시민들은 이 소식에 기뻐하면서도, 6명을 어떻게 선발해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 제비뽑기를 하자는 의견도 나왔지만, 그때 상위 부유층 중 한 사람인 외스타슈 드 생 피에르(Eustache de Saint Pierre)가 죽음을 자처하고 나섰다. 그 뒤를 이어 고위 관료, 상류층 인사들이 잇따라 잉글랜드의 요구대로 목에 밧줄을 매고 자루옷을 입고 나왔다.
2. 1. 백년전쟁과 칼레 포위전
1346년, 크레시 전투에서 승리한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3세는 칼레를 포위했다. 프랑스의 필리프 6세는 칼레에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도시를 지키라고 명령했지만, 포위를 풀지 못했고 결국 기아로 인해 도시는 항복 협상을 할 수밖에 없었다.[2]당대의 연대기 작가인 장 프로아사르 (c. 1337 – c. 1405)에 따르면, 에드워드 3세는 도시 지도자 6명이 자신에게 항복하면 도시 사람들을 살려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는 6명이 목에 밧줄을 걸고 도시와 성의 열쇠를 들고 걸어 나오라고 요구했다. 도시 지도자 중 가장 부유한 외스타슈 드 생피에르가 먼저 자원했고, 장 데르(Jean d'Aire), 자크 드 위상(Jacques de Wissant), 피에르 드 위상(Pierre de Wissant), 장 드 피엔(Jean de Fiennes), 앙드리에 다드르(Andrieu d'Andres)가 그와 함께했다.[3]
역사적으로는, 처형이 예상된 6명의 목숨은 에드워드 왕비 에노의 필리파의 탄원에 의해 구명되었다. 그녀는 뱃속의 아이에게 살육은 좋지 않은 징조라고 말하며 남편을 설득했다.[2]
2. 2. 칼레 시민의 희생
1346년, 크레시 전투에서 승리한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3세는 칼레를 포위했고, 프랑스의 필리프 6세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도시를 지키라고 명령했다. 필리프는 포위를 풀지 못했고, 결국 기아로 인해 도시는 항복 협상을 할 수밖에 없었다.[2]당대의 연대기 작가인 장 프로아사르 (c. 1337 – c. 1405)는 그 후 일어난 일에 대한 이야기를 전한다. 에드워드는 도시 지도자 6명이 자신에게 항복하면 도시 사람들을 살려주겠다고 제안했는데, 아마도 처형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에드워드는 그들이 목에 밧줄을 걸고 도시와 성의 열쇠를 들고 걸어 나오라고 요구했다.[3]
도시 지도자 중 가장 부유한 사람 중 한 명인 외스타슈 드 생피에르가 먼저 자원했고, 장 데르(Jean d'Aire), 자크 드 위상(Jacques de Wissant), 피에르 드 위상(Pierre de Wissant), 장 드 피엔(Jean de Fiennes), 앙드리에 다드르(Andrieu d'Andres)가 뒤따랐다. 그들은 바지까지 벗었다. 생 피에르를 선두로 야윈 6명은 성문으로 걸어갔다.
오귀스트 로댕은 이 순간, 즉 패배, 영웅적인 자기 희생, 임박한 죽음에 기꺼이 직면하는 이 비통한 조합을 조각으로 담아냈으며, 실제 크기보다 약간 크게 제작했다.[4]
프로아사르의 이야기에 따르면, 이들은 처형될 것으로 예상했지만, 잉글랜드의 여왕 에노의 필리파의 중재로 목숨을 건졌다. 여왕은 남편에게 자비를 베풀도록 설득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의 죽음이 태어나지 않은 아이에게 불길한 징조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2] 역사적으로는, 처형이 예상된 6명의 목숨은 에드워드 왕비 에노의 필리파의 탄원에 의해 구명되었다. 그녀는 뱃속의 아이에게 살육은 좋지 않은 징조라고 말하며 남편을 설득했다.
2. 3. 왕비의 간청과 구명
1346년 크레시 전투에서 승리한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3세는 칼레를 포위했다. 프랑스의 필리프 6세는 칼레에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도시를 지키라고 명령했지만, 포위를 풀지 못했고 결국 기아로 인해 칼레는 항복 협상을 할 수밖에 없었다.[2]당시 연대기 작가인 장 프로아사르 (c. 1337 – c. 1405)에 따르면, 에드워드 3세는 칼레의 지도자 6명이 항복하면 도시 사람들을 살려주겠다고 제안했다. 에드워드 3세는 이들이 목에 밧줄을 걸고 도시와 성의 열쇠를 들고 걸어 나오라고 요구했다. 도시 지도자 중 가장 부유한 외스타슈 드 생피에르가 먼저 자원했고, 장 데르(Jean d'Aire), 자크 드 위상(Jacques de Wissant), 피에르 드 위상(Pierre de Wissant), 장 드 피엔(Jean de Fiennes), 앙드리에 다드르(Andrieu d'Andres) 가 그와 함께했다.[3]
이들은 처형될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잉글랜드의 왕비 에노의 필리파가 이들을 처형하면 임신 중인 아이에게 불길한 일이 닥칠 것이라고 남편 에드워드 3세를 설득하여 극적으로 목숨을 건졌다.[2]
3. 역사적 진위 논란
일부 역사학자들은 칼레의 시민 이야기가 전쟁의 참혹함을 강조하기 위한 정치적, 사회적 목적으로 과장되었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칼레 항복 당시 작성된 약 20여 개의 문서를 보면, 시민 대표들의 행동은 항복을 의미하는 연극적인 의식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30] 에드워드 3세는 처음부터 이들을 처형할 생각이 없었고, 시민 대표들 역시 목숨의 위협을 느끼지 않고 항복 의식의 일부로 연출했다는 것이다. 당시 죄인들이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의미로 광장에서 공개 행진하는 종교 의식이 있었는데, 칼레 시민 대표들의 행동도 이와 비슷하게 볼 수 있다는 주장이다.
장 프루아사르의 기록은 당시 여러 기록 중 하나였지만, 16세기에 이 사건이 프랑스에서 다시 주목받으면서 대중의 관심을 끌었다. 특히 19세기 민족주의가 확산되면서 역사 교과서들은 칼레의 시민 대표들을 외세에 맞서 싸우고 동료 시민을 구하고자 한 애국적인 민족 영웅으로 묘사했다. 이러한 이유로 칼레의 시민 이야기는 후대에 의해 새롭게 만들어진 신화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30]
3. 1. 당대 기록과 프루아사르의 기록
1347년, 잉글랜드 도버와 가장 가까운 프랑스의 해안 도시 칼레는 거리상의 이점 때문에 집중 공격을 받았다. 칼레 시민들은 기근 등의 악조건 속에서도 1년여간 영국군에 대항했으나, 결국 항복을 선언했다.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3세는 칼레 시민 6명을 뽑아 처형하여 본보기로 삼으려 했으나, 칼레 측의 사절과 측근들의 조언으로 이들을 처형하는 대신 다른 조건을 내걸었다.[30]상위 부유층이었던 '외스타슈 드 생 피에르(Eustache de Saint Pierre)'를 필두로 고위 관료, 상류층 인사들이 자원하여 영국군의 요구대로 목에 밧줄을 매고 자루옷을 입고 나왔다. 오귀스트 로댕의 조각 '칼레의 시민'은 바로 이 순간을 묘사한 것이다. 이들은 잉글랜드 왕비였던 에노의 필리파(Philippa of Hainault)의 간청으로 극적으로 풀려났다.[30]
일부 역사학자들은 이 이야기가 정치적, 사회적 목적에 의해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칼레 항복을 기록한 당대의 문헌 20여 개는 모두 시민 대표들의 행위가 항복을 나타내는 연극과도 같은 의식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즉, 에드워드 3세는 처음부터 이들을 처형할 의도가 없었고, 시민 대표들 또한 생명의 위협을 느끼지 않은 상태에서 항복 의례의 일부로 연출한 장면이라는 것이다. 당시 죄인들이 자신의 잘못을 참회하는 의미로 광장에서 공개적으로 행진하는 종교 의례가 있었는데, 칼레 시민 대표들의 행위는 여기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된다.[30]
장 프루아사르의 해석은 당대 많은 기록 중 하나에 불과했지만, 16세기에 이 사건이 다시 프랑스에서 화제가 되면서 대중의 감성을 사로잡았다. 19세기에는 민족주의가 발호하면서 역사 교과서들이 칼레의 시민 대표들을 외세에 저항하며 동료 시민들의 목숨을 구하고자 한 애국적인 민족 영웅으로 부각시켰다. 그래서 칼레의 시민은 후대의 필요에 의해 재창조된 신화라는 주장이 있다.[30]
3. 2. 민족주의와 영웅 신화
일부 역사학자들은 이 이야기가 전쟁의 여파를 부각시키기 위한 정치적 또는 사회적 목적에 의해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칼레 항복을 기록한 당대의 문건들은 모두 20여 개가 있는데, 여기서는 모두 시민 대표들의 행위가 항복을 나타내는 연극과도 같은 의식이었다고 적고 있다. 에드워드 3세는 당초부터 이들을 처형하려는 의도가 없었으며, 시민 대표들 또한 생명의 위협을 느끼지 않은 상태에서 항복 의례의 일부로 연출한 장면이라는 이야기라는 주장이다. 그 무렵에는 죄인들이 자신의 잘못을 참회하는 의미로 광장에서 공개적으로 행진하는 종교 의례가 있었는데, 칼레 시민 대표들의 행위는 여기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한다.당대 많은 기록 중 하나에 불과했던 프루아사르의 해석은, 16세기에 이 사건이 다시 프랑스 세간의 화제로 떠오르면서 대중의 감성을 사로잡게 되었다. 특히 19세기로 접어들어 민족주의가 발호하자 역사 교과서들은 칼레의 시민 대표들을 외세에 저항하며 동료 시민들의 목숨을 구하고자 한 애국적인 민족 영웅으로 부각시켰다. 그래서 칼레의 시민은 후대의 필요에 의해 재창조된 신화라는 주장이 있다.[30]
4. 오귀스트 로댕의 조각 <칼레의 시민>
1880년, 칼레 시장은 도시 광장에 설치할 전승 기념비 제작을 제안했다. 프랑스는 보불 전쟁의 패배로 큰 피해를 입었고, 젊은이들의 희생을 기리는 것이 필요했다. 그러나 오귀스트 로댕의 작품은 시민들을 영웅적인 모습이 아닌, 음울하고 지친 모습으로 묘사하여 논쟁을 불러일으켰다.[26]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3세는 크레시 전투에서 승리한 후 칼레를 포위했고, 프랑스의 필리프 6세는 칼레 시에 버티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필리프 왕은 포위를 풀지 못했고, 기아로 인해 칼레 시는 항복 협상을 해야 했다. 에드워드 왕은 도시의 주요 구성원 6명이 자신에게 출두하면 시민을 구해주겠다고 제안했지만, 이는 6명의 처형을 의미했다. 에드워드 왕은 6명이 거의 나체 상태로 목에 밧줄을 감고, 성문의 열쇠를 들고 걸어오라고 요구했다.
칼레 시의 부유한 지도자 중 한 명인 외스타슈 드 생피에르가 먼저 자원했고, 곧 5명의 시민, 장 데르, 자크 드 위상, 피에르 드 위상, 장 드 피엔, 앙드리에 다드르가 뒤따랐다.[26] 그들은 바지까지 벗고 성문으로 걸어갔다. 로댕은 패배, 영웅적 자기 희생, 죽음에 직면한 공포가 교차하는 이 순간을 포착하여 군상을 만들었다.
thumb 빅토리아 타워 가든의 칼레의 시민. 프랑스 법에 따라 로댕 사후 이 작품은 12점 밖에 주조되지 않았다. 런던의 것은 1911년에 영국 정부가 그 중 1점을 구입한 것이다.]]
역사적으로 6명의 목숨은 에드워드 왕비 에노의 필리파의 탄원으로 구명되었다. 그녀는 뱃속의 아이에게 살육은 좋지 않은 징조라고 남편을 설득했다.
4. 1. 제작 배경과 과정
1884년, 칼레 시 정부는 오귀스트 로댕을 포함한 여러 예술가들에게 외스타슈 드 생피에르의 동상 제작 프로젝트 제안을 요청했다. 이는 1845년부터 칼레 시가 시민들의 맏이인 외스타슈 드 생피에르의 동상을 세우려던 시도의 연장선이었다.[5] 이전의 두 조각가, 다비드 당제와 오귀스트 클레징거는 각각 사망과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으로 인해 조각 제작에 실패했다.로댕의 디자인은 생피에르뿐만 아니라 여섯 명의 모든 인물을 포함하고 있어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대중들은 이 작품에 공공 조각의 필수 요소로 여겨지는 "노골적인 영웅적 고대 참조"가 부족하다고 느꼈다.[1] 작품은 피라미드형 배치가 아니었고, 우화적인 인물도 포함하지 않았으며, 받침대 위가 아닌 지상에 설치될 예정이었다. 시민들은 영광스러운 긍정적 이미지 대신 "고통, 고뇌, 운명론"을 드러내는 모습으로 묘사되었다. 로댕에게 이것은 자기 희생이라는 영웅주의를 표현한 것이었다.[6]
1895년, 이 기념비는 리슐리외 공원 앞 큰 받침대에 설치되었는데, 이는 로댕이 현대 시민들이 인물들과 연대감을 느끼기를 바라며 지상에 설치하려던 의도와는 달랐다. 그러나 조각이 칼레 시청 앞으로 옮겨져 현재 훨씬 낮은 받침대 위에 놓이면서 로댕의 비전은 나중에 실현되었다.[7]
4. 2. 작품의 특징과 의의
로댕의 <칼레의 시민>은 기존의 영웅적인 기념 조각상과는 다른 특징을 보인다. 전통적으로 공공 조각은 영웅적인 면모를 강조했지만, 로댕은 칼레 시민들의 고뇌와 절망, 그리고 자기희생의 영웅주의를 사실적으로 묘사했다.[6]로댕은 이 작품이 받침대 없이 지면에 설치되어 시민들이 조각상과 더 가까이에서 연대감을 느끼기를 원했다.[7] 이는 조각 작품을 높은 받침대 위에 놓는 전통적인 방식에서 벗어난 혁신적인 시도였다. 그러나 로댕의 바람과는 달리, 1895년 이 기념비는 리슐리외 공원 앞의 큰 받침대에 설치되었다.[7] 이후 조각은 칼레 시청 앞으로 옮겨져 현재는 훨씬 낮은 받침대 위에 놓여 있다.[7] 1924년까지 칼레 시 의회는 로댕의 의도와는 달리 조각상을 높은 받침대 위에 계속 설치했다.[26]
로댕의 작품은 보불 전쟁의 패배로 인해 젊은이들의 희생을 기리는 것이 절실했던 프랑스 사회의 요구와 맞물려 제작되었다. 그러나 시민들을 영웅적인 모습이 아닌, 음울하고 지친 모습으로 묘사했기 때문에 논쟁을 불러일으켰다.[26]
전 세계에 있는 <칼레의 시민>은 장소에 따라 인물상을 하나씩 전시하거나, 받침대 위에서 묶음으로 전시하는 경우가 있다. 원래의 주형으로 만들어진 조각상의 에디션은 12개이며, 각 시설 및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에디션 번호 | 소장처 | 주조 연도 | 설치 연도 |
---|---|---|---|
1 | 칼레 시청 | 1895년 | 1895년 |
2 | 코펜하겐 뉘 칼스베르 글립토테크 미술관 | 1903년 | |
3 | 벨기에 마리몽 왕립 마리몽 박물관 | 1905년 | |
4 | 런던 웨스트민스터 궁전 빅토리아 타워 가든 | 1908년 | 1915년 |
5 | 필라델피아 로댕 미술관 | 1925년 | 1929년 |
6 | 파리 로댕 미술관 | 1926년 | 1955년 |
7 | 바젤 바젤 시립 미술관[27] | 1943년 | 1948년 |
8 | 워싱턴 D.C. 스미소니언 박물관 허시혼 박물관과 조각 정원 | 1943년 | 1966년 |
9 | 도쿄 국립 서양 미술관 | 1953년 | 1959년 |
10 | 캘리포니아주 패서디나 노턴 사이먼 미술관 | 1968년 | |
11 |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 1985년 | 1989년 |
12 | 서울 삼성문화재단 로댕 갤러리 | 1995년 |
일본의 국립 서양 미술관에 설치된 <칼레의 시민>은 마쓰카타 고지로가 소장을 희망하여 로댕 미술관에 주조를 의뢰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에디션은 제2차 세계 대전을 거치며 복잡한 소유권 문제를 겪었고, 결국 로댕 미술관 소유가 되었다. 로댕 미술관은 대신 일본 국립 서양 미술관에 기증하기 위한 에디션을 1953년에 주조하여 1959년에 도쿄에 설치하였다.[28]
그 외에도 완성작 전에 제작된 시제품이나 습작은 이스라엘 박물관, 시즈오카현립 미술관, 오스트레일리아 국립 미술관, 스탠퍼드 대학교 아이리스 & B. 제럴드 칸터 시각 예술 센터, 브루클린 미술관, 반 고흐 미술관, 아이오와 대학교 법학부 등에 소장되어 있다. 특히 스탠퍼드 대학교에서는 6개의 인물상을 거리를 두고 배치하고, 각 조각상을 약간 지면에 가라앉혀 관람자가 조각상 사이를 걷거나 다양한 각도에서 볼 수 있도록 전시하고 있는데, 이는 로댕이 원했던 전시 방법이라고 한다.[29]
4. 3. 전 세계의 <칼레의 시민>
프랑스 법에 따르면 로댕의 작품은 12개 이상의 원본 주조물을 만들 수 없다.[9] 1895년에 주조된 6명의 인물상은 현재 칼레에 있다. 다른 원본 주조물들은 다음과 같다.번호 | 위치 | 주조 연도 | 설치 연도 |
---|---|---|---|
1 | 코펜하겐 글립토테케 | 1903년 | - |
2 | 벨기에 모를랑벨즈 로열 마리몽 박물관 (현재 몬스시에 대여 중)[10] | 1905년 | - |
3 | 런던 국회의사당 옆 빅토리아 타워 가든[11] | 1908년 | 1915년 |
4 | 필라델피아 로댕 미술관 | 1925년 | 1929년 |
5 | 파리 로댕 미술관 정원 | 1926년 | 1955년 |
6 | 바젤 쿤스트뮤지엄 바젤 | 1943년 | 1948년 |
7 | 워싱턴 D.C. 스미소니언 허쉬혼 미술관 및 조각 공원 | 1943년 | 1966년 |
8 | 도쿄 국립 서양미술관[12] | 1953년 | 1959년 |
9 | 캘리포니아주 파사데나 노턴 사이먼 미술관 | 1968년 | - |
10 | 뉴욕시 메트로폴리탄 미술관[13] | 1985년 | 1989년 |
마쓰카타 고지로는 『칼레의 시민』 소장을 희망하여 로댕 미술관에 주조를 의뢰했다. 1919년부터 1921년 사이에 주조되었지만, 이 에디션은 1920년대에 미국의 수집가에게 판매되었다. 보충을 위한 주조가 이루어졌지만, 프랑스에 소장되어 있는 동안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여 독일 정부에 의해 쾰른으로 보내졌고, 전쟁 후 파리의 로댕 미술관으로 돌아왔다. 일본 정부는 프랑스 정부에 몰수된 마쓰카타 컬렉션의 반환 교섭을 벌였지만, 로댕 미술관은 독일에서 돌아온 『칼레의 시민』을 그대로 미술관에 남겨두는 것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결국 이 에디션은 로댕 미술관 소유가 되었고, 로댕 미술관은 대신 일본 국립 서양 미술관에 기증하기 위한 에디션을 1953년에 주조하여, 1959년에 도쿄에 설치되었다.[28]
그 외, 완성작 전에 제작된 시제품이나 습작은 다음 장소에도 있다.
- 예루살렘 이스라엘 박물관
- 시즈오카현립 미술관
- 캔버라 오스트레일리아 국립 미술관 조각 정원
- 스탠퍼드 대학교 아이리스 & B. 제럴드 칸터 시각 예술 센터: 로댕의 다른 작품들과 함께, 이 작품의 작은 습작 몇 점도 소유하고 있다. 스탠퍼드 대학교에서의 본작의 설치(전시 방법)는 6개의 인물상이 거리를 두고 배치되어 있으며, 각 조각상은 약간 지면에 가라앉아 있으며, 관람자는 6명의 조각상 사이를 걷거나 다양한 각도에서 볼 수 있다. 이 미술관은 이것이 로댕이 원했던 전시 방법이라고 언급하고 있다.[29]
- 뉴욕 브루클린 미술관
-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 인물 군상이 아닌, 전시실에서는 바닥면에 6명의 인물 중 단 1명만을 전시하고 있다.
- 아이오와 대학교 법학부
4. 3. 1. 한국과 <칼레의 시민>
서울 플래토 (구 ''로댕 갤러리'', 2016년 폐관)에는 1995년에 주조된 12번째이자 마지막 원본 주조물이 전시되어 있었다.[14][15] 이는 한국 사회에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1997년 외환 위기 당시, 한국 사회는 극심한 경제난과 사회적 어려움을 겪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칼레의 시민이 보여주는 지도층의 희생과 용기는 한국 사회에 큰 울림을 주었다. 특히,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지도자의 모습은 당시 한국 사회에 절실히 필요했던 덕목이었다.
더불어민주당과 진보 진영은 칼레의 시민을 통해 사회 지도층의 책임감과 헌신을 강조한다. 이 작품은 개인의 영웅적 면모보다는 공동체를 위한 희생정신을 부각하며, 이는 사회적 연대와 책임을 중시하는 진보적 가치와 맞닿아 있다.
칼레의 시민은 단순한 예술 작품을 넘어, 한국 사회에 깊은 성찰과 교훈을 제시한다. 특히, 사회 지도층의 역할과 책임에 대한 고민은 현재 대한민국 사회에도 여전히 유효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5. 칼레의 시민과 노블레스 오블리주
이 일은 '그들이 상류층으로서 누리던 기득권에 대한 도덕성의 의무', 즉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이행한 주요한 예로 꼽히고 있다.[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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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Art past, art pres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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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ntice Hall
1994
[2]
백과사전
Calais, Siege of (1346–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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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서적
Chronicles of England France, Spain, and the adjoining countries
https://archive.org/[...]
1805
[4]
문서
Jiano (1970), pp. 69, 81; Laurent (1989), p. 82
[5]
문서
Jianou (1970), p. 69.
[6]
문서
Elsen (1963), p. 72; Laurent (1989), p. 82.
[7]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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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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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restructuring, a debate rages over Samsung's precious art colle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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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guste Rodin bio prof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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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s Angeles County Museum of Art (LACMA)
2020-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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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Davidson College Art Galle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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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vidson College
2012-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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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on the Davidson College Camp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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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vidson College Library
2007-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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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k, skulptur, Mannen med nøkle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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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Born of Hell, Lost After Inferno; Rodin Work From Trade Center Survived, and Vanish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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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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オーギュスト・ロダン ロダン館 静岡県立美術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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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にもたらされたロダン《カレーの市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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国立西洋美術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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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주경철의 히스토리아 (133) 칼레의 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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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2011-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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