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켄트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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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켄트 왕국은 5세기부터 825년까지 존재했던 앵글로색슨 왕국으로, 현재의 잉글랜드 켄트 지역에 위치했다. 로마-브리튼 시대의 쇠퇴 이후 유트족이 이주하여 켄트 왕국을 세웠으며, 헨기스트와 호르사가 켄트 왕국의 건국과 관련된 인물로 전해진다. 6세기에는 프랑크 왕국과 교류하며 기독교를 수용하여 번성하였으나, 7세기 후반부터 머시아 왕국의 지배를 받으며 쇠퇴했다. 9세기에는 바이킹의 침입을 겪었으며, 825년 엘렌둔 전투 이후 웨섹스 왕국에 병합되었다. 켄트 왕국은 오이신가스 가문이 통치했으며, 에텔베르트 1세 시기에 전성기를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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켄트 왕국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일반 명칭켄트
공식 명칭
기타 명칭켄트인의 왕국
역사
존속 기간기원후 455년경 – 871년
시대헵타키아
상태속국
상태 설명독립 왕국 (기원후 455–764, 769–785, 796–798)
머시아의 종속국 (764–769, 785–796, 798–825)
시작 사건건국
시작 연도기원후 455년경
종료 사건웨식스 왕국에 완전 통합
종료 연도825년
이전서로마 브리튼
이후웨식스
지리
켄트 왕국 지도
켄트 왕국
정치
정치 체제군주제
수도(정보 없음)
통치자초대: 헹기스트
마지막: 애설레드
통치자 재임 기간초대: ?–488
마지막: 866–871
통치자 직함
입법부위테나게모트
인구 통계
인구(정보 없음)
언어
공용어켄트 고대 영어
종교
종교이교 (7세기 이전)
기독교 (7세기 이후)
화폐
통화스케트, 트림사

2. 역사적 배경

헹기스트에 의해 켄트 왕국이 세워졌다고 전해지는 시기는 5세기 후반이다. 헹기스트의 아들이 북부에서 찾아와 왕조를 세웠다는 설도 있다. 켄트 왕국은 유럽 대륙에 가까워 프랑크 왕국과 교류하고 유사성이 있었다. 앵글로색슨족 최초의 화폐도 켄트에서 만들어졌다.

6세기 후반, 에텔베르트 왕 때 켄트는 전성기를 맞았다. 에텔베르트는 프랑크 왕국 공주 베르타와 결혼하여 대륙과 관계를 맺고, 로마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가 보낸 캔터베리의 아우구스티누스를 통해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캔터베리주교좌가 설치되고 아우구스티누스가 초대 대주교가 되었다.

켄트는 에섹스 등에도 세력을 넓혔지만, 에텔베르트 사후 빠르게 쇠퇴하여 8세기에 머시아 왕국에 복속되었고, 9세기에는 웨섹스 왕국에 병합되었다.

2. 1. 로마-브리튼 시대의 쇠퇴 (3세기 말 ~ 5세기 초)

3세기 말과 4세기 동안, 로마 브리튼은 프랑크족, 색슨족, 픽트족, 스코트족 등에게 반복적으로 침략당했다.[1] 브리튼에서 유럽 본토와 가장 가까운 지역인 켄트는 해상 약탈자들의 공격을 많이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그 결과 켄트 해안을 따라 레굴비움, 루투피에, 두브리스, 포르투스 레마니스와 같은 색슨 해안 요새가 건설되었다.[1]

레굴비움의 로마 요새 벽


이 기간 동안 북부 갈리아 출신의 게르만어를 사용하는 ''포에데라티'' 용병들이 로마군을 보충하기 위해 고용되었고, 켄트의 땅을 대가로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2] 이들은 로마-브리튼 문화에 동화되어 고고학적으로 구별하기 어려워졌다.[3]

4세기와 5세기 초, 로마-브리튼 엘리트들이 비교적 안전한 요새화된 도시로 이동하면서 농촌 별장들이 버려졌다.[4] 그러나 캔터베리는 3세기 말부터 인구가 감소하고 활동이 줄어들었으며, 도버는 4세기 말에 버려지는 등 도시 역시 쇠퇴했다.[5] 407년, 로마 군단은 제국 유럽 대륙 심장부 침략에 대처하기 위해 브리튼을 떠났다.[1]

410년, 로마 황제 호노리우스는 브리튼인들에게 스스로 방어해야 하며 더 이상 제국 군대에 의존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1]

2. 2. 유트족의 이주와 켄트 왕국 초기 (5세기)

5세기에 켄트는 정치, 사회, 지형적인 측면에서 근본적인 변화를 겪었다.[1] 유트족의 이주 규모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지만, 고고학적, 역사적 증거에 따르면 켄트 지역에는 게르만 민족의 대규모 이주가 실제로 일어났다.[2] 이 과정에서 원주민 일부는 남았는데, 유트족 왕국의 이름 ''칸트웨어''(Cantware, "켄트 거주자")가 로마 시대의 이름 ''칸티아카''(Cantiaca)의 영향을 받은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리처드 버스테건(Richard Verstegan)의 ''부패한 지성의 복원''(A Restitution of Decayed Intelligence, 1605)에 묘사된 헨기스트와 호르사


베데(Bede)의 ''영국 교회 사''(Ecclesiastical History of the English People)와 ''앵글로색슨 연대기''(Anglo-Saxon Chronicle)는 게르만족의 영국 이주를 다룬 늦은 앵글로색슨 시대의 문헌이다. 이들은 5세기의 구전 역사에 의존하며, 당시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기원 신화를 확립하려는 시도를 담고 있다. ''앵글로색슨 연대기''에 따르면, 449년 보티건("Vortigern")이라는 "영국인의 왕"의 초청으로 유트족 지도자 헨기스트와 호르사(Hengist and Horsa)가 켄트의 ''입와인스플리트''(Ypwinesfleot, 현대 엡스플리트)에 도착했다. 그들은 픽트족을 격퇴한 후 영국인에게 등을 돌리고 더 많은 게르만 부족을 영국에 불러들였다. 이들 중 유트족은 켄트와 와이트섬에 정착하여 칸트웨어와 와이트웨어(Wihtware)라는 민족을 세웠다.

''연대기''는 455년에 헨기스트와 호르사가 ''아겔레스트레프''(Ægelesthrep, 아마도 켄트의 에일스퍼드(Aylesford))에서 보티건과 싸워 호르사가 죽었다고 기록한다. 헨기스트는 왕위를 계승하고, 그의 아들 에스크(Æsc)가 그 뒤를 이었다. 456년, 헨기스트와 에스크는 ''크레건포드''(Crecganford, 아마도 크레이포드(Crayford))에서 영국인과 전투를 벌였고, 이후 영국인들은 켄트를 떠나 런던으로 도망쳤다. 베데의 ''교회사''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켄트와 와이트 섬 사람들은 유트족 정착민의 후손이며, 호르사는 영국인과의 전투에서 사망하여 동부 켄트에 묻혔다고 한다.

이러한 설명의 정확성에 대해서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3],[4],[5] 학자들은 헨기스트와 호르사를 민간 전승에서 유래한 신화적 인물로 보기도 한다.

이주해 온 게르만 민족은 주로 로마-영국인의 농경지에 정착했다. 그들은 농업과 가축 사육을 했을 뿐 아니라, 어업과 무역에도 종사했을 가능성이 높다. 앵글로색슨족은 기존의 도로 시스템을 활용했으며, 묘지의 대부분은 로마 도로, 항해 가능한 강 또는 해안 근처에 위치했다. 초기 정착지에 대한 고고학적 증거는 드물지만, 케스턴(Keston)의 로어 워뱅크에 있는 그루벤하우스가 중요한 예시이다. 5세기 도자기는 켄트 주변의 여러 저택 부지에서 발견되어, 이 시기에 이 지역들이 다시 사용되었음을 보여준다.

5세기 동부 켄트의 묘지는 대부분 매장 묘로만 구성되어 켄트적 특징을 보인다. 반면 서부 켄트 묘지는 오르핑턴(Orpington)과 같이 화장과 매장이 혼합되어 있는데, 이는 템스강(River Thames) 북쪽의 색슨족 묘지에서 더 일반적이다. 이는 서부 켄트가 동부 켄트와 독립적이었고, 동색슨족 왕국(Kingdom of the East Saxons)의 일부였음을 시사할 수 있다.

5세기 후반은 헹기스트에 의해 켄트 왕국이 세워졌다고 전해지는 시기이다.

2. 3. 켄트 왕국의 발전과 서부 확장 (6세기)

6세기 켄트 왕국은 당시 북서유럽에서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던 메로빙거 왕조가 통치하는 프랑크 왕국과 관계를 맺고 있었다.[6] 문헌 자료는 켄트가 이 세기 동안 메로빙거의 지배를 받았을 수 있음을 시사한다. 이 시기 프랑크족 문화 유물에 대한 고고학적 증거가 켄트에서 발견되었지만, 저지대 영국에서는 발견되지 않아 프랑크 왕국과의 무역 독점 관계를 시사한다.

6세기 켄트 유물은 현대 샤랑트, 서부 노르망디, 라인란트, 프리슬란트, 튀링겐, 그리고 남부 스칸디나비아 지역을 포함한 유럽 대륙에서 발견되었다. 영국 해협을 가로질러 세인과 솜 사이, 서섹스에 있는 색슨족 사이에서는 상대적으로 발견되지 않는데, 이는 지리적 위치보다는 특정 부족 또는 민족 집단 간에 무역이 이루어졌음을 시사한다. 햄프셔와 와이트 섬에서도 켄트의 무역 연결에 대한 고고학적 증거가 있으며, 윌트셔와 케임브리지셔와 같은 지역의 묘지에서 복제품이나 모방품이 나타나고 있다.

고고학적 증거에 따르면 6세기 어느 시점에서 동켄트가 서켄트를 합병했다. 남쪽에는 웨일드가 있었는데, 켄트 엘리트들에게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울창한 숲이었고, 왕국 서쪽에 있는 비옥한 지역, 특히 다렌스 강 계곡과 메드웨이 서쪽의 노스 다운스 경사지가 정복 대상이 되었다. 6세기 동안 켄트 고고학적 기록에는 유틀란트 유물이 포함되어 있지만, 지배적인 영향력은 프랑크였다.[6]

2. 4. 기독교화와 전성기 (6세기 말 ~ 7세기 중반)

어거스틴의 초기 삽화 추정


597년, 아우구스티누스가 이끄는 그레고리 선교단이 앵글로색슨 잉글랜드의 기독교화를 위해 켄트에 도착하면서 켄트 왕국은 기독교화되기 시작했다.[7] 애설버트 1세의 아내 버사는 이미 기독교인이었고, 애설버트 1세는 몇 년 후 기독교로 개종하였다.[7] 캔터베리는 잉글랜드 기독교의 중심지가 되었고, 아우구스티누스는 초대 캔터베리 대주교가 되었다.

애설버트 1세는 험버 강 남쪽 지역을 통치하는 브레트왈다로 군림하며 켄트 왕국의 전성기를 이끌었다.[7] 앵글로색슨 연대기는 6세기의 브리튼에서 벌어진 전쟁에 대해 언급하지만, 대부분 서부에서 일어났으며 켄트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유일한 예외는 568년에 켄트인과 웨스트 색슨족 사이의 전투로, 이 전투에서 애설버트 1세의 군대는 켄트로 밀려났다. 애설버트 1세의 통치 기간 동안 애설버트 법이 제정되었는데, 이는 고대 영어로 작성된 가장 오래된 현존 텍스트이다.

애설버트 1세가 레드왈드를 개종시키려 한 시도는 켄트 왕국과 이스트앵글리아 왕국 사이의 연관성을 보여주며, 두 왕국은 북해와 관련된 이익을 공유했다.[7]

이 시기 켄트 왕국의 왕들은 왕국을 끊임없이 이동하며 현지 주민들로부터 물품을 공급받고 답례로 선물을 주고받았다. 7세기와 8세기의 다양한 문서들은 켄트가 두 명의 왕, 아마도 동부의 지배자와 서부의 부하 왕에 의해 통치되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며, 이는 이전의 분열을 반영하는 것일 수 있다. 7세기와 8세기에 프랑크 왕국과의 무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며, 이는 도버, 사레, 포드위치 항구를 통해 켄트의 왕들이 통제한 것으로 보인다.[8]

3. 켄트 왕국의 쇠퇴와 앵글로색슨 시대

로마-브리튼 시대에 오늘날 켄트 주 메드웨이 강 동쪽에 위치한 지역은 ''키비타스''로, ''칸티아카''라고 불렸다.[2] 이 이름은 그 이전 로마 이전 철기 시대에 사용되었던 공통 브리튼어 지명인 ''칸티움''(''땅의 모퉁이'' 또는 ''가장자리 땅'')에서 유래되었다.[2]

3세기 말과 4세기 동안, 로마 브리튼은 프랑크족, 색슨족, 픽트족, 스코트족에게 반복적으로 침략당했다.[3] 브리튼에서 유럽 본토와 가장 가까운 지역이기 때문에, 켄트는 해상에서 온 약탈자들의 많은 공격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그 결과 켄트 해안을 따라 레굴비움, 루투피에, 두브리스, 포르투스 레마니스와 같은 네 개의 색슨 해안 요새가 건설되었다.[3]

또한, 이 기간 동안 북부 갈리아에서 온 게르만어를 사용하는 용병, 즉 ''포에데라티''가 로마군을 보충하기 위해 고용되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켄트의 땅이 그 대가로 지급되었다.[4] 이 ''포에데라티''는 로마-브리튼 문화에 동화되었을 것이다.[4]

4세기와 5세기 초에 걸쳐, 농촌의 별장들이 버려졌다는 증거가 있는데, 이는 로마-브리튼 엘리트들이 비교적 안전한 요새화된 도시 중심지로 이동했음을 시사한다.[5] 그러나 도시 중심지 역시 쇠퇴를 겪었다. 캔터베리는 3세기 말부터 인구가 감소하고 활동이 줄어들었고, 도버는 4세기 말에 버려졌다.[6] 407년, 로마 군단은 제국의 유럽 대륙 심장부로의 침략에 대처하기 위해 브리튼을 떠났다.[3]

410년, 로마 황제 호노리우스는 브리튼의 신민들에게 편지를 보내, 그들이 이제부터 스스로를 방어해야 하며 제국의 군대에 더 이상 의존할 수 없다고 발표했다.[3] 5세기 후반, 헹기스트에 의해 켄트 왕국이 세워졌다고 전해진다.[7] 유럽 대륙에 근접해 있어, 대륙의 프랑크 왕국과의 유사성·교류도 있었다.[7] 앵글로색슨족 최초의 화폐도 켄트에서 만들어졌다.[7]

6세기 후반, 에텔베르트 왕 아래에서 켄트 왕국은 크게 성장했다. 에텔베르트는 프랑크 왕국의 공주 베르타와 결혼하여 대륙과 관계를 맺었고, 캔터베리의 아우구스티누스의 선교 활동으로 기독교를 수용했다.[7] 캔터베리에는 주교좌가 설치되었고, 아우구스티누스가 초대 대주교가 되었다.[7] 켄트 왕국은 한때 에섹스 등에도 세력을 확대했지만, 에텔베르트 사후 급속히 쇠퇴하여 8세기에는 머시아 왕국에 복속되었고,[7] 최종적으로는 9세기에 웨섹스 왕국에 병합되었다.[7]

3. 1. 머시아의 지배와 쇠퇴 (7세기 중반 ~ 9세기 초)

7세기 말, 켄트 왕국은 점차 머시아 왕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최소한 680년대까지 런던위크에 켄트 왕궁과 관리인이 있었지만, 그 후 그 도시는 머시아의 손에 넘어갔다. 런던위크의 상실은 켄트의 해협 무역 독점과 템스 강 통제를 깨뜨려 경제적 영향력을 약화시켰을 것이다.[1] 베데의 후기 기록에 따르면, 676년에 머시아 왕 에텔레드 1세가 이끄는 공격으로 많은 켄트 교회가 파괴되었다.[1] 머시아의 켄트 지배는 그 이후 수십 년 동안 증가했는데, 689~690년경에는 머시아의 종주권 아래 있던 동색슨 왕들이 서켄트에서 활동했으며, 에텔레드가 탄넷의 민스터와 레컬버의 기독교 공동체의 수입에 대해 중재했다는 기록이 있어 왕국의 동부에 대한 강력한 머시아의 통제를 보여준다.[1]

686년 켄트는 웨섹스의 캐드왈라에게 정복되었다. 1년 이내에 캐드왈라의 형제 멀이 켄트 반란에서 살해되었고, 캐드왈라는 다시 왕국을 파괴하기 위해 돌아왔다.[1] 이후 켄트는 혼란 상태에 빠졌다. 머시아는 추종 왕 오스윈을 지지했지만, 그는 약 2년 동안만 통치한 것으로 보이며, 그 후 위트레드가 왕이 되었다.[1] 위트레드의 법으로 유명한 위트레드는 이전 몇 년간의 파괴와 혼란 이후 왕국을 재건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694년에는 멀의 살해에 대한 보상을 지불하여 웨섹스와 평화를 맺었다.[1]

725년 위트레드의 사망 이후 켄트에 대한 기록은 단편적이고 불분명하다. 40년 동안 두 명 또는 심지어 세 명의 왕이 동시에 통치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이러한 분열은 켄트를 오파의 부상하는 권력의 첫 번째 목표로 만들었을 수 있다.[1] 764년에 그는 켄트를 장악하고 추종 왕들을 통해 통치했다. 770년대 초에는 오파가 켄트를 직접 통치하려 했던 것으로 보이며, 반란이 일어났다.[1] 776년 오트퍼드에서 전투가 벌어졌고, 결과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 이후의 기록에 따르면 반군이 승리한 것으로 보인다. 에그버트 2세와 후일 엘문드는 그 이후 거의 10년 동안 오파와 독립적으로 통치한 것으로 보인다.[1] 그러나 이는 오래가지 못했고, 오파는 785년에 켄트에 대한 자신의 권위를 확고히 재확립했다.[1]

784년에 헌장을 증명한 직후 앨문드 왕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며, 그의 아들 에그버트는 머시아의 오파에 의해 켄트에서 추방되어 망명했다.[1] 헌장에서 오파가 785년까지 켄트를 장악했음이 분명하다. 그는 자신의 새로운 소유지의 종주국 역할만 한 것이 아니라, 켄트를 합병하거나 적어도 그 중요성을 줄이려고 시도했다.[1] 캔터베리 대주교 젠버트가 그의 아들 에그프리스에게 왕관을 씌우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에, 그는 리치필드에 머시아에 새로운 교구를 설립했다.[1] 오파의 후계자 코엔울프에 따르면 젠버트의 일부는 그의 주교직에서 사임했고 친머시아적 인물인 하이게베르트가 오파 왕에 의해 "존경스러운 젠버트와 켄트 사람들에 대한 적대감 때문에" 그의 자리를 대신하도록 선택되었다.[1] 796년 오파가 사망했고, 머시아가 약해진 이 순간에 에드버트 프렌 휘하의 켄트 반란이 일시적으로 성공했다.[1] 그러나 오파의 후계자인 코엔울프는 798년에 켄트를 재정복하고 그의 형제 쿠스레드를 왕으로 세웠다. 807년 쿠스레드가 사망한 후 코엔울프는 켄트를 직접 통치했다.[1]

머시아의 권위는 825년 엘렌둔 전투의 승리에 이어 웨섹스에 의해 대체되었고, 머시아의 추종 왕 볼드레드는 추방되었다.[1]

3. 2. 바이킹의 침입 (9세기 초 ~ 11세기 중반)

앵글로색슨 연대기에 따르면, 켄트는 8세기 후반부터 바이킹의 공격을 받기 시작했다. 켄트와 잉글랜드 남동부 지역은 부유한 수도원이 많고 해안가에 위치하여 바이킹에게 매력적인 공격 대상이었다. 804년, 림밍의 수녀들은 공격을 피해 캔터베리로 피난했고, 811년에는 켄트 군대가 시피 섬에 주둔한 바이킹 군대를 격퇴했다. 이후 바이킹의 공격은 다음과 같이 기록되었다.

  • 835년: 시피 섬
  • 841년: 로머니 습지
  • 842년: 로체스터
  • 851년: 캔터베리 (애클레 전투)와 샌드위치 (샌드위치 전투)
  • 853년: 테닛
  • 865년: 켄트 전역


켄트는 주요 육상 및 해상 교통로에 쉽게 접근할 수 있어 더욱 공격받기 쉬웠다. 811년, 바이킹은 켄트 북부 해안에 요새를 건설했고, 851~852년에는 테닛, 854~855년에는 시피 섬에서 겨울을 보냈다. 캔터베리와 로체스터는 로마 시대 성벽이 남아있었지만, 842년 로체스터, 851년 캔터베리, 885년 로체스터가 공격을 받았다. 특히 885년 로체스터는 알프레드 대왕의 군대에 의해 해방될 때까지 포위되었다.

892년, 알프레드 대왕 치하에 잉글랜드 남부가 통일되었을 때, 켄트는 위기에 처했다. 알프레드는 구드럼을 격파하고 웨드모어 조약을 통해 바이킹이 동앵글리아와 북동부에 정착하도록 허용했지만, 다른 덴마크인들은 여전히 이동 중이었다. 숙련된 전사 지도자 헤스텐은 파리를 포위하고 브르타뉴를 점령한 후 북부 프랑스에서 대규모 군대를 소집했다. 892년, 350척의 바이킹 배가 불로뉴쉬르메르에서 켄트 남부 해안으로 항해했다. 5,000명에서 10,000명에 달하는 병력과 가족, 말들이 리멘 강 어귀 (로열 밀리터리 운하의 동서 경로, 개간된 로머니 습지)를 통해 들어와 성 룸월드의 교회 근처 보니턴에 있는 색슨 요새를 공격하여 모두 죽였다. 그들은 이동하여 이듬해 애플도어, 켄트에 요새를 건설했다. 이 소식을 들은 동앵글리아 등의 덴마크인들이 알프레드에 대항하여 봉기했다. 그들은 애플도어에서 켄트를 약탈하여 "Seleberhtes Cert"(현재 애쉬포드, 켄트 근처 그레이트 차트)를 파괴했다. 그들은 더 내륙으로 이동하여 잉글랜드인들과 여러 전투를 벌였지만, 4년 후 포기했다. 일부는 동앵글리아로 후퇴했고, 다른 일부는 북부 프랑스로 도망가 노르망디에 정착했다.

토르켈 키스가 이끄는 대규모 바이킹 군대는 1011년 캔터베리 포위전을 벌여 도시를 약탈하고 1012년 4월 19일 대주교 알페지를 살해했다. 토르켈은 알페지를 몸값을 받고 팔기 위해 살려두려 했지만 실패했다.

3. 3. 웨섹스 왕국에 병합 (9세기)

825년, 엘렌둔 전투에서 승리한 웨섹스 왕국이 켄트 왕국을 차지하고, 머시아 왕국의 종속왕 볼드레드를 추방하였다. 이후 켄트는 웨섹스 왕국에 완전히 병합되었다.

4. 켄트 왕국의 군주

이름재위 기간
헹기스트449-488
에슈488-512
옥타?
엘멘릭?
에텔베르트 1세580/90-616
에드발드616-640
에오체베르트640-664
에크베르트 1세664-673
호로스헤어673-685
에드릭685-686
위프트레드694-725
에드베르트 1세725-748
에텔베르트 2세748-762
에드베르트 2세?


4. 1. 오이신가스 가문

헹기스트에 의해 5세기 후반에 켄트 왕국이 세워졌다고 전해진다. 헹기스트의 아들이 북부에서 와서 왕조를 세웠다는 설도 있다. 켄트 왕국은 유럽 대륙에 가까이 있어, 대륙의 프랑크 왕국과 유사성이 있고 교류도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앵글로색슨족의 최초 화폐도 켄트에서 만들어졌다.

6세기 후반, 에텔베르트 1세 때 켄트 왕국은 크게 발전했다. 에텔베르트 1세는 프랑크 왕국의 공주 베르타와 결혼하여 대륙과 관계를 맺었고, 로마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가 보낸 캔터베리의 아우구스티누스를 통해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수도 캔터베리에는 주교좌가 설치되었고, 아우구스티누스가 초대 대주교가 되었다.

켄트 왕국은 한때 에식스 등에도 세력을 넓혔지만, 에텔베르트 1세가 죽은 후 급격히 쇠퇴하여 8세기에는 머시아 왕국에 복속되었다. 최종적으로는 9세기에 웨섹스 왕국에 합병되었다.

이름재위 기간
헹기스트449-488
에슈488-512
옥타?
엘멘릭?
에텔베르트 1세580/90-616
에드발드616-640
에오체베르트640-664
에크베르트 1세664-673
호로스헤어673-685
에드릭685-686
위프트레드694-725
에드베르트 1세725-748
에텔베르트 2세748-762
에드베르트 2세?


5. 같이 보기

참조

[1] 서적 The Cruciform Brooch and Anglo-Saxon England 2015
[2] 서적 The Kingdom and People of Kent, AD 400-600 2010
[3] 서적 Kings and Kingdoms
[4] 서적 Who's Who
[5] 서적 The Anglo-Saxons
[6] 서적 Kings and kingdoms of early Anglo-Saxon England https://www.worldcat[...] Seaby 1990
[7] 서적 Kings and kingdoms of early Anglo-Saxon England https://www.worldcat[...] Seaby 1990
[8] 서적 Kings and kingdoms of early Anglo-Saxon England https://www.worldcat[...] Seaby 1990
[9] 서적 The Oxford Illustrated History of the Vikings Oxford University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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