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스탄티누스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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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콘스탄티누스 3세는 407년 브리타니아의 로마 군단에 의해 황제로 추대된 인물이다. 그는 갈리아와 히스파니아를 장악하고 아를을 거점으로 삼았으며, 호노리우스와의 대립 끝에 공동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히스파니아에서 막시무스가 반란을 일으키고, 야만족의 침입과 브리타니아의 반란으로 인해 몰락했다. 결국 콘스탄티우스 3세에게 패배하여 411년에 처형당했다. 그는 몬머스의 제프리의 《브리타니아 열왕사》에 등장하며 아서 왕의 조상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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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누스 3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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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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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플라비우스 클라우디우스 콘스탄티누스 |
로마자 표기 | Flavius Claudius Constantinus |
종교 | 니케아 기독교 |
통치 | |
칭호 | 로마 황제 |
관할 지역 | 서방 |
재위 기간 | 407년 - 411년 |
섭정 | 호노리우스 (409년–411년) 콘스탄스 2세 (409년–411년) |
선임자 | 호노리우스 |
후임자 | 호노리우스 |
자녀 | 콘스탄스 2세 율리아누스 |
생애 | |
사망일 | 411년 (9월 18일 이전) |
사망 장소 | 알려지지 않음 |
매장지 | 알려지지 않음 |
2. 생애
405년부터 406년까지 갈리아에 야만족이 대규모로 침입하여 모곤티아쿰 주둔지가 제압당했다. 갈리아 로마 군단은 호노리우스에게 원군을 요청했지만, 호노리우스는 라벤나 방어를 우선하여 원군을 보내지 않았다.
브리타니아 로마 군단은 호노리우스를 "아우구스투스에 어울리지 않는 무능한 인물"로 여기고, 406년 마르쿠스, 407년 그라티아누스를 황제로 선언했으나, 이들은 곧 살해당했다. 407년, 콘스탄티누스가 새로운 황제로 선언되었다.
콘스탄티누스는 브리타니아 부대를 이끌고 브르타뉴에 상륙, 라인강 방비를 굳혀 갈리아를 혼란에서 회복시켰다. 갈리아와 히스파니아 군단이 그를 지지했으며, 아를에 거점을 두었다.
호노리우스는 반달족 출신 장군 스틸리코에게 콘스탄티누스 토벌을 명했다. 스틸리코는 히스파니아의 테오도시우스 친족을 봉기시켜 협공하려 했다. 콘스탄티누스는 아들 콘스탄스 2세에게 부제 칭호를, 동생 율리아누스에게 노빌리시무스 칭호를 부여, 히스파니아로 파견하고 테오도시우스 일족을 콘스탄티노플로 추방했다.
스틸리코는 고트족 장군 살스를 파견했으나, 408년 호노리우스에게 처형당했다. 호노리우스는 콘스탄티누스를 공동 황제로 인정하는 조건으로 강화 협상을 제안, 409년 콘스탄티누스는 정규 집정관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이는 콘스탄티누스 몰락의 시작이었다.
히스파니아 군단은 호노리우스와의 강화에 반대, 막시무스를 새 황제로 선언했다. 브리타니아에는 야만족 해적이 침입, 지지자들이 추방되었다. 콘스탄티누스는 콘스탄스 2세를 공동 황제로 임명, 히스파니아로 파견했으나 게론티우스에게 배신당해 411년 처형되었다.
411년, 갈리아 로마인들은 부르군트 왕군다하르와 알란 왕 고아 등의 지원을 얻어 요비누스를 새 황제로 선언했다. 콘스탄티누스 지지자들은 갈리아 각지에서 패배했다. 아를에는 막시무스 군단이 히스파니아에서 밀려왔고, 콘스탄티누스는 에도비쿠스에게 원군을 요청하며 갇혔다.
콘스탄티우스 3세가 파견되어 히스파니아 군단을 몰아냈지만, 아를을 포위했다. 에도비쿠스는 살해당했고, 콘스탄티누스는 항복했다. 콘스탄티우스는 신변 안전을 약속했지만, 호송 중 호노리우스 지시로 일족과 함께 처형되었다.
2. 1. 황제 즉위 전
콘스탄티누스 3세가 황제로 선언되기 전의 삶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출생 연도와 장소, 결혼 여부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두 아들을 두었지만, 왕족식 이름을 받기 전의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다. 5세기의 한 역사가는 그를 대식가로 묘사했고, 다른 역사가는 그의 주요 결점이 정책의 일관성이 없는 것이라고 평가했다.405년부터 406년까지 갈리아 지방에 야만족의 대규모 침입이 있었고, 모곤티아쿰의 주둔지는 야만족에게 제압당했다. 갈리아의 로마 군단은 황제 호노리우스에게 원군을 요청했지만, 호노리우스는 라벤나의 방비를 우선하여 갈리아에 원군을 파견하지 않았다.
브리타니아의 로마 군단은 호노리우스를 "아우구스투스에 어울리지 않는 무능한 인물"로 여기고, 406년에는 병사 중 한 명인 마르쿠스를, 407년에는 귀족 그라티아누스를 호노리우스를 대신할 황제로 선언했다. 그러나 마르쿠스와 그라티아누스는 브리타니아 군단을 만족시키지 못하고 곧 군단에 의해 살해당했고, 407년에 콘스탄티누스가 새로운 황제로 선언되었다.
2. 2. 황제 즉위 배경
395년 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가 사망한 후, 제국은 그의 두 아들인 아르카디우스와 호노리우스에 의해 분할되었다. 아르카디우스는 동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었고, 호노리우스는 서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호노리우스는 미성년자였기 때문에, 유력한 장군 스틸리코가 서방 로마 군대의 실질적인 사령관으로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이 시기에 로마령 브리타니아는 스코티, 색슨족, 픽트족의 습격을 받았다. 396년에서 398년 사이, 스틸리코는 픽트족에 대한 원정을 명령한 것으로 전해지는데, 아마도 브리타니아 동해안에 대한 해상 습격을 진압하기 위한 작전이었을 것이다. 그는 또한 스코티와 색슨족에 대한 원정을 명령했을 수도 있다. 다른 해석으로는 로마령 브리타니아를 방어하던 군대가 외부 지원 없이 픽트족의 침략을 격퇴했다고도 한다. 이는 브리타니아에서 기록된 마지막 로마 군사 작전이다. 스틸리코는 하드리아누스 장벽과 해안 방어 시설을 강화하기 위해 자금을 지원했다.
401년 또는 402년에 스틸리코는 서고트족과 동고트족과의 전쟁에 필요한 병력을 확보하기 위해 하드리아누스 장벽에서 군대를 철수시켰다. 402년은 브리타니아에서 대량의 로마 주화가 발견되는 마지막 해이며, 이는 제국이 남아있는 군인들에게 더 이상 급여를 지급하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픽트족, 색슨족, 스코티는 습격을 계속했고, 그 범위가 확대되었을 수 있다. 405년에는 아일랜드 왕 아홉 명의 인질 닐이 브리타니아 남부 해안을 약탈했다.
동로마 제국과 서로마 제국은 "야만족"이라 불렸던 게르만족의 대규모 침략으로 고통받고 있었다. 406년, 알란족과 고트족 집단이 라다가이수스의 지도 아래 이탈리아를 침략했다. 이들은 90,000~100,000명으로 추산되었으며, 그중 20,000명 이상이 전투병이었다. 스틸리코는 병력을 집중하여 플로렌티아 (오늘날의 피렌체)를 포위하고 있던 고트족을 파에술라 전투에서 격파했다.

406년, 로마령 브리타니아에 주둔한 로마 야전군 약 6,000명의 병사들은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들은 수년 동안 봉급을 받지 못했고, 4년 전 대규모 병력이 유럽 대륙으로 건너가 싸웠지만 돌아오지 않았으며, 해안 방어 시설이 해체되어 새로운 야전군을 형성했고 지휘관이 교체되었다. 그들은 반란을 일으켜 마르쿠스를 황제로 임명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를 죽이고 그라티아누스를 임명했으나, 그 역시 4개월 만에 살해되었다. 406년 12월 31일, 반달족, 수에비 및 알란족을 포함한 여러 야만족 침략 부족들이 라인강을 건너 서 로마 제국을 성공적으로 침략했다. 브리타니아의 로마군은 4세기 초 황제인 콘스탄티누스 1세의 이름을 딴 콘스탄티누스를 지도자로 선택했다. 그는 407년 초, 아마도 2월에 황제로 추대되었다. 콘스탄티누스의 초기 동전에는 그를 "플라비우스 클라우디우스 콘스탄티누스"라고 표기했는데, 그는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이름이라고 생각하여 이 이름을 채택했지만, 사실은 그의 아들인 콘스탄티누스 2세의 이름이었다.
로마령 브리타니아에서의 반란은 드문 일이 아니었으며, 동시대인은 이곳을 "찬탈자가 풍부한 지역"이라고 묘사했다. 이곳은 제국의 변방이었고, 자원과 후원에 있어서 소외되었다는 일반적인 인식이 있었다. 콘스탄티누스는 지속적인 권력 기반을 구축하고 반란을 본토로 성공적으로 수출했다. 그는 유스티니아누스와 네비오가스테스를 장군으로 임명하고 아를과 이탈리아로의 교통을 통제하는 고갯길을 장악하도록 지시했다. 그는 브리타니아에 남아 있던 병력과 게론티우스 장군을 데리고 해협을 건너 보노니아로 건너갔다. 이로 인해 로마령 브리타니아는 최전선 군사 방어력이 약화되었다. 콘스탄티누스는 리옹으로 이동하여 그곳에 본부를 설치하고 자신의 이름으로 동전을 주조하기 시작했다. 갈리아의 로마군은 그를 지지했고, 히스파니아 (현대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민간 행정부도 그를 따랐다. 콘스탄티누스는 반달족과의 대결에서 적어도 한 번은 우위를 점했다. 콘스탄티누스는 또한 프랑크족, 알레만니족 및 부르군디족과의 협정을 협상하여 라인강의 경계를 확보했다.

서로마 황제 호노리우스와 그의 총사령관 스틸리코는 동로마 제국과 갈등을 겪고 있었고 알라리크 1세 휘하의 대규모 서고트족과 동맹을 맺었다. 407년 5월 또는 6월에 시작될 예정이었던 동로마 제국 공격 작전은 취소되었다. 대신 고트족의 사루스가 이끄는 소규모 군대가 서쪽으로 보내져 콘스탄티누스의 반란을 진압했다.
사루스는 정규 전투에서 유스티니아누스가 지휘하는 군대를 격파하고 유스티니아누스를 죽였다. 콘스탄티누스는 직접 사루스에 맞서 싸웠지만 발랑스에 포위되었다. 네비오가스테스는 협상을 시도했으나 사루스에게 살해당했다. 게론티우스와 에도비쿠스가 이끄는 또 다른 군대가 도착하여 발랑스를 구원했다. 사루스는 이탈리아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사루스는 알프스 고갯길을 통과하기 위해 이를 통제하는 강도 바가우디에게 통행료를 지불해야 했다. 이 성공으로 콘스탄티누스는 갈리아 대부분과 이탈리아로 가는 알프스 고갯길에 대한 통제권을 확립했다.
2. 3. 브리타니아에서의 옹립과 갈리아 진출
406년, 로마령 브리타니아 주둔 로마 야전군 병사들은 봉급 미지급 등의 불만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마르쿠스를 황제로 추대했으나 곧 죽이고, 그라티아누스를 옹립했으나 4개월 만에 살해했다.406년 12월 31일, 반달족, 수에비, 알란족 등 야만족 부족들이 라인강을 건너 마인츠 근처에서 서로마 제국을 침략했다. 브리타니아 로마군은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이름을 딴 콘스탄티누스를 지도자로 선택, 407년 초 황제로 추대했다. 콘스탄티누스는 "플라비우스 클라우디우스 콘스탄티누스"라는 이름을 채택했는데, 이는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아들 콘스탄티누스 2세의 이름이었다.
콘스탄티누스는 유스티니아누스와 네비오가스테스를 장군으로 임명, 아를과 이탈리아 সংযোগ मार्ग(교통로)를 장악하게 했다. 브리타니아 잔류 병력과 게론티우스 장군을 이끌고 해협을 건너 보노니아로 이동, 리옹에 본부를 설치하고 동전을 주조했다. 갈리아 로마군과 히스파니아 민간 행정부도 그를 지지했다. 콘스탄티누스는 반달족에 우위를 점하고, 프랑크족, 알레만니족, 부르군디족과 협정, 라인강 경계를 확보했다.
서로마 제국 황제 호노리우스는 사루스를 보내 콘스탄티누스를 진압하게 했다. 사루스는 유스티니아누스를 죽이고 발랑스를 포위했지만, 게론티우스와 에도비쿠스 군대에 의해 이탈리아로 후퇴했다. 이로써 콘스탄티누스는 갈리아 대부분과 알프스 고갯길을 장악했다.
2. 4. 호노리우스와의 대립과 공동 황제
408년 5월까지 콘스탄티누스는 아를을 점령하여 수도로 삼고, 기존의 제국 행정부와 관리들을 인수하였다. 그는 아폴리나리스를 프라에토리안 총독으로 임명했다. 헤로스는 지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유순한 아를 대주교로 임명되었다. 콘스탄티누스는 아를에서 대량의 고품질 동전을 주조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사루스가 급하게 후퇴하면서 빼앗은 약탈품을 사용한 것으로 보이며, 서방과 동방 황제 모두와 동등한 지위를 과시했다.콘스탄티누스의 장남은 수도원에서 수도사로 지내다가 아버지의 반란으로 황실 법정에 소환되었다. 콘스탄티누스는 그를 카이사르로 임명하여 황태자로 공식 인정하고, 콘스탄스라는 제국 이름을 부여했다. 그는 왕조를 세우기 위해 곧 결혼했다. 408년 초, 콘스탄스는 제론티우스와 함께 히스파니아로 파견되었다. 히스파니아는 테오도시우스 가문의 거점이었지만, 콘스탄티누스가 대륙에 처음 상륙했을 때, 그곳에 있던 호노리우스의 친척과 지지자들은 그의 통치를 거부하거나 군사적으로 대항할 수 없었다. 사루스가 콘스탄티누스의 반란을 진압하려 하자, 호노리우스 가문의 디디무스와 베리니아누스가 반란을 일으켜 히스파니아에서 콘스탄티누스 정권을 전복시켰다. 사루스가 이탈리아로 철수하자, 티치눔(현 파비아)에서 콘스탄티누스와 교전할 대규모 군대가 집결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져, 이들은 피레네 고개를 봉쇄하려 했다. 콘스탄티누스는 호노리우스의 사촌들이 공격을 조직하는 동안, 사루스와 스틸리코 휘하의 군대가 이탈리아에서 양동 작전으로 그를 공격할 것을 우려하여 먼저 히스파니아를 공격했다. 콘스탄스와 제론티우스의 군대는 고개를 돌파했고 증원되었다. 콘스탄스는 사라고사에 자리를 잡고 민간 행정부를 재건했다. 제론티우스는 군대를 이끌고 루시타니아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호노리우스의 지지자들을 격파했으며, 이 전투에서 디디무스와 베리니아누스가 포로로 잡혔다. 콘스탄스는 히스파니아를 콘스탄티누스의 통제 하에 두고 사라고사에 새 아내를 남겨둔 채 아버지에게 보고하기 위해 아를로 돌아왔다. 디디무스와 베리니아누스도 함께 압송되어 민간 반란 혐의로 처형되었는데, 이는 호노리우스와의 관계를 더욱 악화시켰다.
408년 초, 서고트족은 스틸리코에게 인내심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들은 에피루스(현 알바니아)에서 노리쿰(현 오스트리아)으로 이동하여 이탈리아 침략을 막기 위해 금 약 1814.37kg를 지불할 것을 요구했다. 호노리우스와 로마 원로원은 저항할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스틸리코는 갈리아 상황에 집중하기 위해 지불을 승인하도록 설득했다. 그는 이를 위해 티치눔에 군대를 소집했다. 이 계획은 서고트족이 이 군대와 함께 군사 동맹으로 합류하는 것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5월 1일, 동로마 제국의 황제 아르카디우스가 사망하여 일곱 살의 후계자 테오도시우스 2세가 남겨졌다. 스틸리코와 호노리우스는 서방 제국의 이익을 대표하기 위해 콘스탄티노폴리스(동로마 제국의 수도)로 가고 싶어하는 것에 대한 의견 충돌이 발생했다. 스틸리코가 뜻을 이루어 동쪽으로 떠나고 호노리우스는 라벤나에 남게 되었지만, 그와 호노리우스 사이의 균열은 분명했다. 올림피우스 수석 관료가 이끄는 로마 정부는 스틸리코가 테오도시우스를 폐위하고 자신의 아들을 왕위에 앉히기 위해 동쪽으로 가고 싶어한다는 소문을 퍼뜨려 스틸리코에 반대하는 운동을 벌였다. 8월 13일, 호노리우스는 콘스탄티누스를 상대로 티치눔에서 출발하려는 군대를 공식적으로 검토했다. 그와 함께 서방 제국의 많은 고위 장교와 관리들이 있었다. 군인들은 반란을 일으켜 스틸리코의 지지자들을 학살했지만 황제의 신변은 존중했다. 스틸리코는 피난처를 찾은 후 항복했고 8월 22일에 처형되었다.

올림피우스는 서고트족에게 막대한 금액을 지불하는 정책을 뒤집었고 이탈리아 군대의 원주민들은 고트족, 특히 동료 군인들과 그들의 아내와 자녀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후자는 이탈리아 도시에 살면서 때로는 남편과 아버지의 훌륭한 행동에 대한 인질로 공개적으로 살았고, 쉬운 표적이 되었다. 고트족 중 일부는 북쪽으로 도망쳐 알라릭에 합류하여 그의 전투력을 크게 증가시켰다. 알라릭은 즉시 알프스를 건너 이탈리아 남쪽으로 향하여 시골을 황폐하게 만들었다. 그는 로마 외곽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막대한 몸값을 요구했다. 408년 말, 콘스탄티누스는 라벤나로 사절단을 보냈다. 그를 달래야 할 필요성을 느낀 호노리우스는 그를 공동 황제로 인정하고 공식적인 인정을 위해 보라색 옷을 보냈다. 두 사람은 409년에 공동 로마 집정관이 되었다. 이 무렵, 콘스탄티누스는 콘스탄스를 공동 황제의 지위로 올렸는데, 이론적으로는 호노리우스나 테오도시우스, 그리고 콘스탄티누스와 동등한 지위였다.
서고트족이 이탈리아 깊숙이 들어가 저항이 없자, 올림피우스의 영향력은 끝났다. 새로운 수석 장관 요비우스가 평화 협상에 들어갔지만 호노리우스는 알라릭과 합의하는 것을 계속 거부했다. 보복으로 서고트족은 이탈리아를 계속 돌아다니며 로마 시에서 막대한 돈을 갈취했다. 알라릭은 자신의 황제인 원로원 의원 프리스쿠스 아탈루스를 옹립했지만 소용없었다. 410년 8월 24일, 서고트족은 로마로 진입하여 3일 동안 도시를 약탈했다.
2. 5. 몰락과 죽음
409년, 히스파니아의 장군 게론티우스가 반란을 일으켜 막시무스를 황제로 선포했다. 게론티우스는 타라코(오늘날의 타라고나)에 궁정을 세우고 콘스탄티누스 3세에게 대항하기 위해 야만족들을 선동했다. 406년 말 갈리아에 들어온 야만족들은 아키타니아와 나르보넨시스를 황폐화시켰다. 게론티우스는 피레네 산맥 수비대를 약화시켰고, 결국 야만족 군대와 협력하여 콘스탄티누스 3세를 공격했다.408년부터 색슨 해적들이 로마 브리튼을 습격했고, 409년 브리튼의 로마 거주자들은 콘스탄티누스 3세의 관료들을 추방하고 스스로 방어하기로 결정했다. 아모리카 (오늘날의 브르타뉴)의 바가우다에 또한 독립을 선언했다.
410년 봄, 콘스탄티누스 3세는 북부 이탈리아로 진격했으나 포 강에서 임무를 포기하고 아를로 철수했다. 콘스탄스는 게론티우스를 진압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410년 봄 아를로 돌아왔다. 게론티우스는 비엔에서 콘스탄스를 격파하고 죽였다. 게론티우스의 군대는 아를로 진격하여 콘스탄티누스 3세를 포위했다.
411년, 호노리우스는 콘스탄티우스를 파견하여 콘스탄티누스 3세를 진압하게 했다. 콘스탄티우스는 아를에서 게론티우스를 격파하고 포위 공격을 시작했다. 에도비쿠스가 이끌던 콘스탄티누스 3세의 지원군은 매복 공격으로 격파되었다. 요비누스를 지지하기 위해 라인강 수비대가 이탈하자 콘스탄티누스 3세는 항복했다. 콘스탄티우스 3세는 안전 통행을 약속했지만, 콘스탄티누스 3세와 율리아누스를 투옥하고 411년 8월 또는 9월에 참수했다. 그의 머리는 기둥에 걸려 9월 18일 호노리우스에게 바쳐졌고, 이후 카르타고 외부에 전시되었다.
405년부터 406년까지 갈리아에 야만족이 대규모로 침입했고, 모곤티아쿰 주둔지는 야만족에게 제압당했다. 갈리아의 로마 군단은 황제 호노리우스에게 원군을 요청했지만, 호노리우스는 라벤나 방어를 우선하여 갈리아에 원군을 보내지 않았다.
브리타니아의 로마 군단은 호노리우스를 "아우구스투스에 어울리지 않는 무능한 인물"로 여기고, 406년에는 병사 마르쿠스를, 407년에는 귀족 그라티아누스를 황제로 선언했다. 그러나 마르쿠스와 그라티아누스는 브리타니아 군단을 만족시키지 못하고 곧 살해당했고, 407년에 콘스탄티누스가 새로운 황제로 선언되었다.
콘스탄티누스는 브리타니아 부대를 이끌고 브르타뉴에 상륙한 후, 라인강 방비를 굳혀 갈리아를 혼란에서 회복시켰다. 콘스탄티누스는 갈리아와 히스파니아 군단의 지지를 받았다. 콘스탄티누스는 갈리아의 아를에 거점을 두었다.
호노리우스는 반달족 출신 장군 스틸리코에게 콘스탄티누스를 토벌하도록 명령했다. 스틸리코는 히스파니아의 테오도시우스 친족을 봉기시켜 콘스탄티누스를 협공하려 했다. 콘스탄티누스는 아들 콘스탄스 2세에게 부제 칭호를, 콘스탄스 2세의 동생 율리아누스에게 노빌리시무스 칭호를 부여하여 히스파니아로 파견하고, 테오도시우스 일족을 콘스탄티노플로 추방했다.
스틸리코는 고트족 장군 살스를 파견하여 콘스탄티누스를 괴롭혔지만, 408년 호노리우스에 의해 처형당했다. 호노리우스는 콘스탄티누스를 공동 황제로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강화 협상을 제안했다. 콘스탄티누스는 409년 정규 집정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이 타협은 콘스탄티누스 몰락의 시작이었다.
호노리우스와의 강화에 반대하는 히스파니아 군단은 막시무스를 새로운 황제로 선언했다. 콘스탄티누스가 무방비 상태로 둔 브리타니아에는 야만족 해적이 밀려들었고, 브리타니아의 지지자들이 추방되었다. 콘스탄티누스는 콘스탄스 2세를 공동 황제로 임명하여 히스파니아로 파견했지만, 장군 게론티우스의 배신으로 패배하고 411년에 처형되었다.
갈리아의 로마인은 부르군트 왕군다하르와 알란 왕 고아 등의 지원을 얻어, 411년에 요비누스를 새로운 황제로 선언했다. 콘스탄티누스의 지지자들은 갈리아 각지에서 요비누스의 지지자들에게 패배했다. 손실된 콘스탄티누스의 거점 아를에는 막시무스의 군단이 히스파니아에서 밀려왔다. 콘스탄티누스는 에도비쿠스에게 원군을 요청해 아를에 갇혔다.
히스파니아 군단은 콘스탄티누스의 공동 황제 호노리우스가 파견한 콘스탄티우스 3세에 의해 쫓겨났지만, 콘스탄티우스는 아를을 포위했다. 에도비쿠스는 콘스탄티우스에게 살해당했고, 콘스탄티누스는 항복했다. 콘스탄티우스는 콘스탄티누스의 신변 안전을 약속했지만, 라벤나로 호송 중 호노리우스의 지시로 일족과 함께 처형되었다.
3. 전설 속의 콘스탄티누스 3세
콘스탄티누스 3세는 브리튼의 콘스탄티누스 2세로도 알려져 있다. 그는 12세기의 위서인 몬머스의 제프리의 《브리타니아 열왕사》에 등장하는 콘스탄티누스와 연관되어 있는데, 이 콘스탄티누스는 그라키아누스 무니켑스의 통치 이후 권력을 잡는다. 제프리의 콘스탄티누스는 그의 아들 우서 펜드래곤을 통해 전설적인 아서 왕의 할아버지가 된다.
《브리타니아 열왕사》는 아서 왕 전설에 콘스탄티누스 3세를 브리튼의 왕 '''콘스탄틴 2세'''로 편입시켰다. 그는 콘스탄스, 보티건, 오렐리우스 암브로시우스(암브로시우스 아우렐리아누스), 유서 펜드라곤의 아버지로 묘사되며, 유서를 통해 아서 왕의 할아버지가 된다.
4. 평가
콘스탄티누스 3세는 브리타니아에서 로마 제국의 통치에 불만을 품은 세력에 의해 추대되었으며, 그의 통치는 내부 분열과 외부의 침략으로 특징지어진다. 콘스탄티누스는 갈리아와 브리타니아에서 그의 통치 영역을 확보하려 했으나, 서로마 제국의 황제 호노리우스에 의해 파견된 장군들에 의해 결국 패배하고 처형되었다. 그의 짧은 통치는 서로마 제국의 쇠퇴와 브리타니아에서의 로마 지배 종말을 상징하는 사건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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