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고트족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동고트족은 3세기경 흑해 북부 연안에 거주하며 로마 제국과 교류 또는 갈등을 겪은 게르만족이다. 4세기 후반 훈족의 침입으로 로마 제국으로 이주하거나 훈족에 복속되었으며, 5세기 말 테오도리크 왕이 이탈리아에 동고트 왕국을 건국했다. 동로마 제국과의 전쟁에서 패배하여 멸망했으며, 이후 이탈리아인 등 다른 민족에 동화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동게르만족 - 반달족
반달족은 게르만 민족의 일파로, 오데르 강과 비스툴라 강 사이에서 기원하여 로마 제국과 갈등을 겪으며 갈리아와 히스파니아를 거쳐 북아프리카에 반달 왕국을 건설했으나 비잔티움 제국에 의해 멸망했고, 그들의 이름은 파괴 행위를 뜻하는 "반달리즘"의 어원이 되었다. - 동게르만족 - 서고트인
서고트인은 게르만족의 일파로, 4~5세기 경 고트족의 서쪽 분파를 지칭하며, 훈족의 압박으로 로마 제국에 이주하여 발칸 반도를 유린하고 서로마 제국 멸망 후 이베리아 반도를 중심으로 서고트 왕국을 건설하여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켜 오늘날 스페인과 포르투갈인의 선조의 일파로 동화되었다. - 고트인 - 아스파르
5세기 동로마 제국에서 알란족-고트족 혼혈 출신으로 군사적, 정치적 역량을 발휘하여 세 황제 시대에 걸쳐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레오 1세 시대에 암살당한 군인이자 정치가이다. - 고트인 - 로마 제국 쇠망사
《로마 제국 쇠망사》는 에드워드 기번이 저술한 로마 제국 역사서로, 기독교의 발흥이 로마 제국 쇠퇴에 영향을 미쳤다는 주장을 담고 있으며, 객관적이고 비판적인 어조로 후대 역사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 고대 게르만족 - 앵글로색슨족
앵글로색슨족은 5세기경 브리튼 섬에 정착한 게르만족 앵글족, 색슨족, 주트족으로 형성된 민족 집단으로, 고대 영어를 사용하며 여러 소왕국을 건설하고 웨섹스 왕국으로 통일되었으나, 노르만 정복 이후 지배가 종식되었지만 그들의 언어와 문화는 현대 영어와 영국 문화의 기반이 되었으며, "앵글로색슨" 용어는 영어권 국가들과 문화를 지칭하는 데 사용되기도 하지만 역사적 정확성과 정치적 함의에 대한 논란이 있다. - 고대 게르만족 - 튜턴족
튜턴족은 기원전 2세기 말 킴브리족, 암브로네스족과 함께 로마 공화정을 위협했던 고대 게르만족의 명칭이다.
동고트족 | |
---|---|
개요 | |
명칭 | 동고트족 |
로마자 표기 | Donggoteu jok |
라틴어 | Ostrogothi, Austrogothi |
![]() | |
역사 | |
시대 | 5세기 ~ 6세기 |
기원 | 고트족 |
주요 활동 지역 | 발칸 반도 |
관련 국가 | 동고트 왕국 |
언어 및 문화 | |
민족 | 게르만족 |
언어 | 고트어 |
종교 | 아리우스파 기독교 |
관련 민족 | |
근연 민족 | 서고트족 |
2. 역사
동고트족은 150년경부터 흑해 북안에 정착했던 고트족의 일파이다. 220년경 두 갈래로 나뉘어 활동하기 시작했는데, 드네프르 강 동쪽에 거주한 집단은 "Austrogoti"가 "Ostgote", 즉 "동고트"로 변화하여 동고트족이라고 불리게 되었다.[3] 도나우 강 중류 지역에 정착한 다른 한 집단은 서고트족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360년, 서쪽으로 이동하는 훈족과 접촉하기 시작했고,[4] 375년에는 훈족에게 정복당했다. 일부는 훈족과 함께 행동했고, 일부는 반달족과 함께 로마 제국에 보호를 요청하여 판노니아로 이주했지만, 로마인들로부터 굴욕을 당했다. 5세기 말, 훈족의 쇠퇴로 테오도리크 대왕(테오도릭(동고트 왕))이 부족을 이끌고 이탈리아에 들어가[6] 493년에 동고트 왕국을 건국했다.[7]
이후 동로마 제국과 대립하여 한때 로마를 점령하는 등 이탈리아 대부분을 장악했지만,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파견한 장군 벨리사리우스에게 패배하고, 그의 파면 후 동로마군을 이끈 재상 나르세스에 의해 멸망했다.[8]
2. 1. 초기 역사와 훈족의 침입
동고트족은 3세기부터 로마 기록에 등장하며, 다뉴브 강 하류와 흑해 북부 지역에 거주했다.[1] 이들은 카르피족과 여러 사르마티아인과 같이 이 지역에 더 오래 살았던 민족들과 영향력 및 로마의 보조금을 두고 경쟁했으며, 로마 군대에 병력을 제공했다. 게르만어와 물질 문화를 바탕으로 그들의 고트 문화는 현재 폴란드에 있는 북쪽의 비스툴라 강 방향, 그리고 원래 예탈란드(영어로 서고틀란드와 동고틀란드)와 현재 스웨덴의 고틀란드의 문화에서 유래한 것으로 여겨진다. 3세기 무렵, 고트족은 이미 자신들만의 이름을 가진 하위 집단들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로마 제국과 카르파티아 산맥에 인접해 있던 테르빙기는 적어도 한 번 이상 별도로 언급되었다.나중에 언급되는 동고트족은 더 동쪽에 살았던 그레우퉁기와 관련이 있다. 테르빙기와 그레우퉁기 사이의 경계는 드니스터 강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레우퉁기의 동쪽에는 돈 강 근처에 사는 알란족이 있었다.
4세기 후반, 훈족의 부상으로 많은 고트족과 알란족이 그들과 합류하게 되었고, 다른 일부는 서쪽으로 이동하여 결국 발칸 반도의 로마 영토로 진입했다. 동고트족과 그레우퉁기족은 아마도 같은 민족일 것으로 여겨지며, 훈족에게 정복된 최초의 고트족 중 하나였을 것이다.[4] 376년에 많은 그레우퉁기족이 로마 제국에 들어왔고, 이들 중 많은 수가 나중에 알라리크 1세에 합류하여 서고트 왕국 형성에 기여했을 것이다.
2. 2. 동고트 왕국의 성립과 발전



5세기 후반, 테오도리크 대왕(고트어로 "민족의 지도자"를 의미)은 동로마 제국 황제 제논의 명령을 받아 오도아케르로부터 이탈리아를 되찾기 위해 출발했다. 493년, 라벤나를 점령하고 그곳에 수도를 세웠으며, 오도아케르는 테오도리크에게 살해당했다.[7] 이로써 동고트족의 세력은 이탈리아, 시칠리아, 달마티아 및 이탈리아 북부 지역에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테오도리크 대왕은 동고트족의 왕이자 서쪽 로마 황제의 후계자였지만, 황제 칭호는 사용하지 않았다. 그는 동고트족과 로마인, 두 민족을 모두 통치하며 로마 제국의 문화를 존중하고 두 민족의 융합을 추구했다.[6] 그는 원로원 의원과 집정관과 같은 로마 칭호와 직책을 받았지만, 항상 동고트족의 왕으로 남아 있었다. 또한 가톨릭 교회의 지지를 얻었으며, 논란이 된 교황 선거를 해결하는 데 도움을 주기도 했다. 그는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고, 교황을 달래고 교회와의 동맹을 강화하려 노력했다. 그는 교황을 교회뿐만 아니라 로마 자체에 대한 권위자로 여겼다.
500년경, 테오도리크는 동고트족 왕으로서 30주년을 기념했다. 그는 서고트 왕국, 프랑크 왕국 등 주변 게르만족 국가들과 동맹을 맺으며 세력을 확장했다. 특히 서고트 왕국 툴루즈의 섭정을 맡으면서 갈리아 대부분과 이베리아 반도 거의 전역으로 영향력을 넓혔다.
동고트족의 지배는 에르마나리크 시대만큼 광대하고 화려했지만, 야만인이 아닌 문명화된 세력의 지배였다는 점에서 성격이 달랐다.
테오도리크는 로마 문화와 정부를 부활시키려 노력했으며, 이탈리아 국민에게 이익을 가져다주었다.
다음은 동고트 왕국의 역대 왕과 여왕이다.
이름 | 재위 기간 |
---|---|
발라미르 | 447년–약 465년 |
테오데미르 | 약 465년–475년 |
테오도리크 대왕 | 475년–526년 |
아탈라리크 | 526년–534년 |
아말라순타 | 534년–535년 |
테오다하드 | 535년–536년 |
비티게스 | 536년–540년 |
일디바드 | 540년–541년 |
에라릭 | 541년 |
토틸라 | 541년–552년 |
테이아 | 552년–553년 |
2. 3. 동로마 제국과의 전쟁과 멸망

테오도리크 사후, 동고트족과 서고트족은 통합되지 못했다. 아탈라리크가 동고트 왕위를 계승했고, 프로방스 지역이 추가되었으나, 고트족 엘리트 간의 분쟁은 계속되었다. 아말라순타가 섭정이 되었지만, 결국 테오다하드가 권력을 잡고 아말라순타를 살해했다. 이러한 내분과 더불어 아리우스파 기독교를 믿는 동고트족은 동로마 제국의 귀족 및 교황과 갈등을 겪었다.[8]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서로마 제국의 영토 회복을 목표로 동고트 왕국을 공격했다. 그는 아리우스파를 포함한 이교도들을 공직에서 배제하는 법을 제정했고, 이에 동고트 왕 테오도리크는 가톨릭 신자들을 박해하는 것으로 대응했다.[8] 535년,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벨리사리우스에게 동고트족 공격을 명했다. 벨리사리우스는 시칠리아를 빠르게 점령하고 이탈리아 본토로 진격, 536년 나폴리와 로마를 함락시켰다.[8] 537년, 비티게스가 이끄는 10만 명 이상의 동고트족 군대가 로마를 포위했지만, 벨리사리우스는 이를 막아냈다. 이후 벨리사리우스는 북쪽으로 진군하여 540년 동고트족의 수도 라벤나를 함락시켰다.[8]
벨리사리우스는 비티게스를 사로잡았지만,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비티게스를 이탈리아의 봉신 왕으로 삼으려 했기에 벨리사리우스는 무조건 항복만을 요구했다. 고트 귀족들은 에라릭을 새 왕으로 추대하려 했으나, 벨리사리우스는 이를 이용해 라벤나에서 왕위에 오른 후 고트 지도자들을 체포하고 왕국을 제국에 넘겼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벨리사리우스를 콘스탄티노플로 소환했고, 라벤나가 함락되자 동고트족의 수도는 파비아로 옮겨졌다.[8]

벨리사리우스가 떠난 후, 동고트족은 토틸라를 새 왕으로 선출했다. 토틸라는 이탈리아 북부를 재정복하고 로마를 점령하여 로마 상원 의원들을 처형하는 등 세력을 회복했다.[8] 550년,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대규모 군대를 파견했고, 551년 로마 해군은 토틸라의 함대를 격파했다. 552년 나르세스가 이끄는 동로마 제국군이 이탈리아에 상륙했고, 타기나에 전투에서 토틸라가 전사했다.[8] 동고트족은 테이아를 중심으로 누케리아 전투에서 마지막 저항을 했으나 패배하고 항복했다. 이후 동고트족은 이탈리아를 떠났고, 그 이름은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8]
동고트족의 멸망으로 서유럽의 주도권은 프랑크족에게 넘어갔다. 테오도리크가 추구했던 로마와 게르만 요소의 결합을 통한 이탈리아 국가 건설의 기회는 사라졌다. 동고트족의 멸망 원인으로는 지도력 공백, 정치적 분열, 프랑크족의 부상 등이 꼽힌다.[8]
카이사레아의 프로코피우스에 따르면, 일부 동고트족은 로마의 지배하에 루기아 동맹국들과 함께 이탈리아에서 평화롭게 살았으며, 이후 롬바르드족의 이탈리아 정복에 합류했다.[8]
동고트족의 역대 왕은 다음과 같다.
이탈리아의 동고트족은 고트어를 사용했으며, 이는 울필라스가 번역한 성경에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고트어는 "연속적인 텍스트"가 남아 있는 유일한 동게르만어군 언어이다.[2] 고트어와 관련된 언어는 16세기와 17세기 후반까지 크리미아에서 산발적으로 사용되었다 (크리미아 고트어).[2]
요르다네스가 자신의 저서에서 언급한 6세기 스칸디나비아의 동고트족에 대한 기록은 여러 논란을 야기한다. 요르다네스는 비스툴라 강 어귀 북쪽의 큰 섬 "스칸자"에 거주하는 민족 중 "오스트로고트족(''Ostrogothae'')"을 언급했는데, 현대 학자들은 이를 스칸디나비아 반도로 이해한다.[2] 이는 6세기에 이탈리아에 강력한 동고트 왕국이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스칸디나비아에도 동고트족이 살았다는 것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3. 문화
기록으로 남아있는 고트어 자료로는 울필라스의 성경과 다른 종교 서적 및 단편들이 있다. 라틴어로 된 고트족의 법률로는 약 500년경의 테오도리크의 칙령과 카시오도루스의 ''Variae''가 있다.[2]
5세기의 마르세유의 살비안은 그의 저서 ''De Gubernatione Dei''에서 로마인들의 악덕과 "야만인들", 특히 고트족의 미덕을 대조하였다. 살비안은 로마 가톨릭 사제였음에도 불구하고 아리우스파 고트족의 순결, 경건함, 가톨릭 신자들에 대한 관용, 로마 신민에 대한 좋은 대우 등을 칭찬했다.[2]
4. 동고트족과 관련된 논란 및 이견
학자들은 이 기록의 진위 여부와 해석에 대해 다양한 의견을 제시한다. 아르네 쇠비 크리스텐센은 세 가지 가능성을 제시했다.[2]
월터 고퍼트는 요르다네스가 고트족이 브리튼이나 다른 북쪽 섬에서 노예였다는 이야기를 비판하기 위해 이 내용을 언급했다는 점에 주목한다. 그는 요르다네스가 고트족의 기원을 북쪽으로 보는 것을 거부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한다.[2]
또한 요르다네스가 스칸디나비아를 "민족의 자궁"이라고 칭하며 고트족을 비롯한 여러 북방 민족의 기원지로 언급한 이유에 대해서도 많은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요르다네스 이전부터 고트족과 다른 "스키타이" 민족을 고그와 마곡의 후손과 동일시하는 유대교-기독교 전통이 존재했으며, 이들은 에스겔서와 요한계시록에서 먼 섬과 연관되어 있었다.[2]
동고트족은 150년경부터 흑해 북안에 정착했던 고트족의 일파로, 220년경에는 드네프르 강 동쪽에 거주하며 '''그루퉁기 아우스트로고티'''(Grutungi Austrogoti)라고 불렸다. 이 명칭은 "모래가 많은 평야에 사는 사람들"이라는 뜻을 가졌다고 한다.[2] 그러나 곧 "그루퉁기" 부분은 사라지고 "Austrogoti"가 "Ostgote", 즉 "동고트"로 변화하여 동고트족이라고 불리게 되었다.[3] 이러한 그레우퉁기족과 동고트족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학자들 사이에서 이견이 존재한다.
참조
[1]
서적
Panegyrici Latini
291
[2]
서적
松谷 2003
[3]
서적
シュライバー,岡ら訳 1979
[4]
서적
松谷 2003
[5]
서적
松谷 2003
[6]
서적
松谷 2003
[7]
서적
松谷 2003
[8]
서적
松本 2008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