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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타 자치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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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크레타 자치국은 1898년 오스만 제국의 종주권 아래 설립된 자치국으로, 1897년 그리스-튀르크 전쟁 이후 열강의 개입과 크레타 무슬림 폭도들의 칸디아 학살 사건을 계기로 수립되었다. 그리스와 덴마크의 게오르기오스 왕자가 초대 고등 판무관으로 임명되었으며, 크레타 은행 설립과 헌병대 창설 등 자치 정부 체제를 갖추었다. 1900년대 초반에는 베니젤로스와 왕자 간의 갈등으로 테리소 반란이 일어났고, 이후 1908년 터키의 혼란을 틈타 그리스와의 합병을 선언했다. 제1차 발칸 전쟁을 거치며 열강의 승인과 오스만 제국의 권리 포기로 1913년 그리스에 최종적으로 통합되었으며, 크레타 무슬림은 로잔 조약에 따라 터키로 이주했다. 1911년 기준 크레타의 인구는 336,151명이었으며, 기독교인이 대다수를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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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타 자치국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일반 명칭크레타
지위오스만 제국의 자치국
위치크레타 섬
크레타 자치국 깃발
깃발
크레타 자치국 문장
문장
국가크레타의 찬가
1900년 오스만 제국의 자치국 크레타 지도
1900년 오스만 제국의 자치국 크레타 지도
수도이라클리오
가장 큰 도시이라클리오
공용어그리스어 (공식), 오스만 튀르크어 (인정)
종교그리스 정교회 (주요 종교), 수니 이슬람 (인정), 유대교
통화크레타 드라크마
역사
사건 시작선포 (1898년 12월 9일)
사건 1테리소 반란 (1905년 3월 23일)
사건 2그리스와 합병 (1908년 10월 7일)
사건 3런던 조약 (1913년 5월 30일)
사건 종료그리스와 통합 (1913년 12월 1일)
이전 국가오스만 크레타
이후 국가그리스 왕국
정치
정치 체제자치국
고등 판무관요르요스 왕자 (1898년–1906년)
알렉산드로스 자이미스 (1906년–1911년)
총리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 (1910년)
입법부숙고 집회
인구
인구 추정치336,151명 (1911년)

2. 역사적 배경

크레타 전쟁 (1645–1669) 이후 오스만 제국의 영토가 된 크레타 섬에는 대부분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살았고, 그들 중 다수는 기독교인이었다. 그리스 독립 전쟁 기간과 그 이후에 섬의 기독교인들은 여러 차례 오스만 제국의 지배에 반기를 들고 그리스와의 통합을 추구했다. 이러한 반란은 잔혹하게 진압되었지만, 유럽 여론의 압력으로 오스만 정부로부터 일부 양보를 얻어냈다. 1878년, 할레파 조약에 따라 섬은 오스만 제국의 종주권 아래 자치국으로 설정되었으나, 오스만 제국은 1889년에 이 합의를 어겼다.[2]

할레파 조약의 붕괴는 섬의 긴장을 고조시켜 1895년에 또 다른 반란을 일으켰고, 1896~1897년에는 섬 대부분으로 확대되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프랑스, 독일 제국, 이탈리아 왕국, 러시아 제국, 영국 6개 열강은 1897년 2월에 크레타에 군함을 파견했으며, 이들의 해군은 연합하여 크레타의 전투를 중단시키기 위해 "국제 전대"를 구성했다.[2]

그리스에서는 민족주의 비밀 결사와 격렬한 미개척지주의 여론이 그리스 정부를 압박하여 군대를 섬으로 파견하게 했다. 국제 전대가 즉시 그들의 활동을 중단시켰지만,[2] 그리스군의 크레타 주둔은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을 유발했다. 크레타 섬 대부분이 크레타 반군과 그리스군의 통제하에 들어갔지만, 준비가 부족했던 그리스군은 오스만군에 의해 격파당했고, 오스만군은 테살리아를 점령했다. 이 전쟁은 열강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러시아)의 개입으로 종식되었으며, 열강은 그리스 군대를 크레타에서 철수시키고 오스만 군대의 진격을 멈추도록 강요했다. 콘스탄티노플 조약에서 오스만 정부는 할레파 조약의 조항을 이행할 것을 약속했다.

2. 1. 오스만 제국 치하의 크레타

크레타 전쟁 (1645–1669) 이후 오스만 제국의 영토가 된 크레타 섬에는 대부분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살았고, 그들 중 다수는 기독교인이었다. 그리스 독립 전쟁 기간과 그 이후에 섬의 기독교인들은 여러 차례 오스만 제국의 지배에 반기를 들고 그리스와의 통합을 추구했다. 이러한 반란은 잔혹하게 진압되었지만, 유럽 여론의 압력으로 오스만 정부로부터 일부 양보를 얻어냈다. 1878년, 할레파 조약에 따라 섬은 오스만 제국의 종주권 아래 자치국으로 설정되었으나, 오스만 제국은 1889년에 이 합의를 어겼다.

할레파 조약의 붕괴는 섬의 긴장을 고조시켜 1895년에 또 다른 반란을 일으켰고, 1896~1897년에는 섬 대부분으로 확대되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프랑스, 독일 제국, 이탈리아 왕국, 러시아 제국, 영국 6개 열강은 1897년 2월에 크레타에 군함을 파견했으며, 이들의 해군은 연합하여 크레타의 전투를 중단시키기 위해 개입하는 "국제 전대"를 구성했다.[2] 그리스에서는 민족주의 비밀 결사와 격렬한 미개척지주의 여론이 그리스 정부를 압박하여 군대를 섬으로 파견하게 했다. 국제 전대가 즉시 그들의 활동을 중단시켰지만,[2] 그리스군의 크레타 주둔은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을 유발했다. 크레타 섬 대부분이 크레타 반군과 그리스군의 통제하에 들어갔지만, 준비가 부족했던 그리스군은 오스만군에 의해 격파당했고, 오스만군은 테살리아를 점령했다. 이 전쟁은 열강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러시아)의 개입으로 종식되었으며, 열강은 그리스 군대를 크레타에서 철수시키고 오스만 군대의 진격을 멈추도록 강요했다. 콘스탄티노플 조약에서 오스만 정부는 할레파 조약의 조항을 이행할 것을 약속했다.

2. 2. 1897년 그리스-튀르크 전쟁과 열강의 개입

크레타 전쟁 (1645–1669) 이후 오스만 제국의 영토가 된 크레타 섬에는 대부분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살았고, 그들 중 다수는 기독교인이었다. 그리스 독립 전쟁 기간과 그 이후에 섬의 기독교인들은 여러 차례 오스만 제국의 지배에 반기를 들고 그리스와의 통합을 추구했다. 이러한 반란은 잔혹하게 진압되었지만, 유럽 여론의 압력으로 오스만 정부로부터 일부 양보를 얻어냈다. 1878년, 할레파 조약에 따라 섬은 오스만 제국의 종주권 아래 자치국으로 설정되었으나, 오스만 제국은 1889년에 이 합의를 어겼다.[2]

할레파 조약의 붕괴는 섬의 긴장을 고조시켜 1895년에 또 다른 반란을 일으켰고, 1896~1897년에는 섬 대부분으로 확대되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프랑스, 독일 제국, 이탈리아 왕국, 러시아 제국, 영국 6개 열강은 1897년 2월에 크레타에 군함을 파견했으며, 이들의 해군은 연합하여 크레타의 전투를 중단시키기 위해 개입하는 "국제 전대"를 구성했다.[2] 그리스에서는 민족주의 비밀 결사와 격렬한 미개척지주의 여론이 그리스 정부를 압박하여 군대를 섬으로 파견하게 했다. 국제 전대가 즉시 그들의 활동을 중단시켰지만,[2] 그리스군의 크레타 주둔은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을 유발했다. 크레타 섬 대부분이 크레타 반군과 그리스군의 통제하에 들어갔지만, 준비가 부족했던 그리스군은 오스만군에 의해 격파당했고, 오스만군은 테살리아를 점령했다. 이 전쟁은 열강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러시아)의 개입으로 종식되었으며, 열강은 그리스 군대를 크레타에서 철수시키고 오스만 군대의 진격을 멈추도록 강요했다. 콘스탄티노플 조약에서 오스만 정부는 할레파 조약의 조항을 이행할 것을 약속했다.

3. 크레타 자치국의 성립

크레타 우표, 고등 판무관 그리스와 덴마크의 게오르기오스 왕자를 묘사


1897년 2월, 영국, 프랑스, 러시아 제국 등 6개 열강은 국제 전대를 조직하여 크레타 섬의 혼란을 수습하고자 하였다. 이들은 해군을 동원해 크레타 반군을 진압하고, 주요 도시를 점령하며, 크레타와 그리스 주요 항구를 봉쇄하는 등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그 결과 1897년 3월 말, 크레타 섬 내 조직적인 전투는 종식되었으나, 산발적인 반란은 계속되었다.[3]

1897년 봄, 열강의 크레타 섬 점령 이후 영국 해병대(Royal Marines)가 크레타 섬 하니아의 거리를 행진하고 있다.


열강들은 "제독 위원회"를 설치하여 크레타 섬을 임시 통치하면서, 오스만 제국의 종주권 아래 크레타를 자치 국가로 만드는 방안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이에 반대하며 국제 전대에서 탈퇴하였다.[5]

이러한 상황 속에서 1898년 9월 6일(당시 율리우스력으로 8월 25일), 칸디아(현 이라클리온)에서 크레타 무슬림 폭도들에 의한 학살이 발생하여 영국인과 다수의 크레타 그리스인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6] 이 사건을 계기로 국제 전대는 오스만 제국군을 크레타에서 추방하고, 그리스와 덴마크의 게오르기오스 왕자를 고등 판무관(Ὕπατος Ἁρμοστής|Hýpatos Harmostēsel)으로 하는 자치 정부를 수립하기로 결정하였다.

1898년 12월 21일(율리우스력 12월 9일), 게오르기오스 왕자가 초대 고등 판무관으로 취임하면서 크레타 자치국이 공식적으로 성립되었다. 이로써 크레타는 오스만 제국의 종주권 아래 있었지만, 사실상 독립적인 국가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7][8] 제독 위원회는 1898년 12월 26일에 해산되었다.[9]

이후 그리스 국립은행은 크레타 은행을 설립하여 크레타 자치국의 경제 발전을 지원했고, 이탈리아의 카라비니에리를 모델로 한 크레타 헌병대를 창설하여 치안을 유지했다.

3. 1. 국제 전대의 개입과 자치국 수립

크레타 전쟁 이후 오스만 제국의 영토였던 크레타 섬에는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기독교인들이 다수 거주했으며, 이들은 그리스 독립 전쟁 이후 여러 차례 오스만 제국의 지배에 반기를 들고 그리스와의 통합을 추구했다. 1878년 할레파 조약으로 자치국이 되었으나, 오스만 제국은 1889년에 이 조약을 파기했다.

할레파 조약의 붕괴는 1895년 새로운 반란으로 이어졌고, 1897년 2월, 오스트리아-헝가리, 프랑스, 독일 제국, 이탈리아 왕국, 러시아 제국, 영국 6개 열강은 해군을 파견하여 "국제 전대"를 구성했다.[2] 이들은 크레타의 전투 중단을 위해 개입했다. 미개척지주의 여론에 따라 그리스 정부가 군대를 파견했지만 국제 전대에 의해 저지되었고,[2] 그리스군의 주둔은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을 유발했다. 그리스군은 오스만군에 패배하여 테살리아를 점령당했으나, 열강의 중재로 콘스탄티노플 조약을 체결, 오스만 정부는 할레파 조약 이행을 약속했다.

1897년 2월, 열강은 "제독 위원회"를 통해 섬을 임시 통치하며 질서를 회복하려 했다. 국제 전대는 해군 포격, 주요 도시 점령, 봉쇄를 통해 1897년 3월 말까지 전투를 종식시켰지만, 반란은 계속되었다.[3] 제독 위원회는 크레타를 오스만 제국의 종주권 아래 자치 국가로 만들기로 결정했으나,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는 반대하여 국제 전대에서 철수했다.[5]

1898년 9월 6일, 칸디아(현 이라클리온)에서 크레타 무슬림 폭도들에 의한 학살로 영국인과 다수의 크레타 그리스인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국제 전대는 오스만 제국군을 추방했다.[6] 1898년 12월 21일, 그리스와 덴마크의 게오르기오스 왕자가 고등 판무관(Ὕπατος Ἁρμοστής|Hýpatos Harmostēsel)으로 취임하면서 오스만 제국의 종주권 아래 자치 크레타 국가가 수립되었고, 크레타는 사실상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분리되었다.[7][8] 제독 위원회는 1898년 12월 26일에 해산되었다.[9]

크레타 국가의 고등 판무관으로서의 게오르기오스 왕자의 문장


그리스 국립은행은 크레타 은행을 설립했고, 크레타 헌병대가 공공 질서를 유지했다.

3. 2. 크레타 자치국의 제도

1897년 2월, 열강은 국제 전대를 구성하는 6개국 제독들로 구성된 "제독 위원회"를 통해 크레타 섬을 임시 통치하여 질서를 회복하기로 결정했다. 국제 전대는 해군 포격, 주요 도시 점령, 크레타와 그리스 주요 항구 봉쇄를 통해 1897년 3월 말까지 조직적인 전투를 종식시켰지만, 반란은 계속되었다.[3] 1897년 3월 말과 4월 초, 5개 열강 군대가 크레타 주요 도시를 점령하기 위해 도착했다.[4] 제독 위원회는 오스만 제국의 크레타 통치를 유지하면서 반란을 종식시키려 했으나 불가능했다. 결국 크레타는 오스만 제국의 종주권 아래 자치 국가가 되기로 결정되었다.[5]

1898년 9월 6일(당시 율리우스력으로 8월 25일), 크레타 무슬림 폭도들은 칸디아 (현대 이라클리온)에서 수백 명의 크레타 그리스인을 학살하고 영국 부영사와 가족, 영국 군인 14명을 살해했다. 그 결과, 국제 전대는 1898년 11월 오스만 제국군을 크레타에서 추방했다.[6]

그리스와 덴마크의 게오르기오스 왕자가 1898년 12월 21일(율리우스력 12월 9일) 초대 고등 판무관(Ὕπατος Ἁρμοστής|Hýpatos Harmostēsel)으로 취임하면서 오스만 제국의 종주권 아래, 국제 군사력 주둔, 그리스가 제공한 고등 판무관을 둔 자치 크레타 국가가 설립되었고, 크레타는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사실상 분리되었다.[7][8] 제독 위원회는 1898년 12월 26일에 해산되었다.[9]

그리스 국립은행은 40년 동안 지폐 발행 독점권을 가진 크레타 은행을 설립했다. 크레타 국가는 또한 이탈리아 카라비니에리를 모델로 한 준군사 조직인 크레타 헌병대를 설립했다.

4. 내부 갈등과 테리소 반란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는 1901년 초 사임한 후 3년 동안 게오르기오스 왕자 파벌과 격렬한 정치 투쟁을 벌였다. 이로 인해 크레타 섬은 정치적, 행정적으로 교착 상태에 빠졌다. 1905년 3월, 베니젤로스와 그의 지지자들은 테리소에 모여 "혁명 의회"를 구성하고 정치 개혁을 요구하며, 크레타와 그리스의 통합(에노시스)을 주장했다.

크레타 헌병대는 왕자에게 충성했지만, 많은 대의원이 반란에 가담했다. 열강이 계엄령을 선포했음에도 불구하고, 군대는 반군에 대항하지 않았다. 8월 15일, 크레타 의회는 베니젤로스의 제안에 찬성 투표를 했고, 열강의 중재로 게오르기오스 왕자가 사임하고 새로운 헌법을 만들기로 합의했다. 1906년 선거 결과, 게오르기오스 왕자는 알렉산드로스 자이미스로 교체되었고, 그리스 장교들이 헌병대를 장악하면서 크레타는 사실상 그리스의 통제하에 놓이게 되었다.

4. 1. 베니젤로스와 게오르기오스 왕자의 대립

1898년 크레타 행정 위원회, 왼쪽에서 두 번째가 베니젤로스


테리소에서 푸미스, 베니젤로스, 마노스와 함께


크레타 자치국의 5 드라크마 동전(1901년)


1898년 12월 13일, 그리스와 덴마크의 게오르기오스 왕자가 3년 임기의 고등 판무관으로 도착했다. 1899년 4월 27일에는 행정위원회가 창설되었고, 하니아 출신의 젊고 아테네에서 교육받은 변호사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가 법무부 장관으로 참여했다. 1900년까지 베니젤로스와 게오르기오스 왕자는 국내 정책, 그리고 그리스와의 통합인 ''에노시스'' 문제를 놓고 의견 차이를 보였다.

베니젤로스는 1901년 초에 사임했고, 그 후 3년 동안 그와 그의 지지자들은 왕자의 파벌과 격렬한 정치 투쟁을 벌였으며, 이로 인해 섬은 정치적, 행정적 교착 상태에 빠졌다. 결국 1905년 3월, 베니젤로스와 그의 지지자들은 하니아 근처 언덕에 있는 테리소 마을에 모여 "혁명 의회"를 구성하고, 정치 개혁을 요구했으며, 열강 영사들에게 보낸 선언문에서 "크레타의 그리스와의 정치적 통합을 단일 자유 헌법 국가로" 선언했다. 크레타 헌병대는 왕자에게 충성을 유지했지만, 수많은 대의원들이 반란에 가담했고, 열강이 7월 18일에 계엄령을 선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군대는 반군에 대항하여 움직이지 않았다.

8월 15일, 크레타 의회는 베니젤로스의 제안에 찬성 투표를 했고, 열강은 협정을 중재하여 게오르기오스 왕자가 사임하고 새로운 헌법을 만들기로 했다. 1906년 선거에서 친왕자 정당들은 38,127표를, 친베니젤로스 정당들은 33,279표를 얻었지만, 1906년 9월 게오르기오스 왕자는 전 그리스 총리 알렉산드로스 자이미스로 교체되었고 섬을 떠났다. 또한 그리스 장교들이 헌병대 조직에서 이탈리아인들을 대체했고, 외국 군대의 철수가 시작되어 크레타는 ''사실상'' 그리스의 통제하에 놓이게 되었다.

4. 2. 테리소 반란



1898년 12월 13일, 그리스와 덴마크의 게오르기오스 왕자가 3년 임기의 고등 판무관으로 도착했다. 1899년 4월 27일에는 행정위원회가 창설되었고, 하니아 출신의 젊고 아테네에서 교육받은 변호사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가 법무부 장관으로 참여했다. 1900년까지 베니젤로스와 게오르기오스 왕자는 국내 정책, 그리고 그리스와의 통합인 ''에노시스'' 문제를 놓고 의견 차이를 보였다.[4]

1901년 초, 베니젤로스는 사임했고, 그 후 3년 동안 그와 그의 지지자들은 왕자의 파벌과 격렬한 정치 투쟁을 벌였다. 이로 인해 섬은 정치적, 행정적 교착 상태에 빠졌다.[4] 1905년 3월, 베니젤로스와 그의 지지자들은 하니아 근처 언덕에 있는 테리소 마을에 모여 "혁명 의회"를 구성하고, 정치 개혁을 요구했으며, 열강 영사들에게 보낸 선언문에서 "크레타의 그리스와의 정치적 통합을 단일 자유 헌법 국가로" 선언했다.[4] 크레타 헌병대는 왕자에게 충성을 유지했지만, 수많은 대의원들이 반란에 가담했고, 열강이 7월 18일에 계엄령을 선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군대는 반군에 대항하여 움직이지 않았다.[4]

8월 15일, 크레타 의회는 베니젤로스의 제안에 찬성 투표를 했고, 열강은 협정을 중재하여 게오르기오스 왕자가 사임하고 새로운 헌법을 만들기로 했다.[4] 1906년 선거에서 친왕자 정당들은 38,127표를, 친베니젤로스 정당들은 33,279표를 얻었지만, 1906년 9월 게오르기오스 왕자는 전 그리스 총리 알렉산드로스 자이미스로 교체되었고 섬을 떠났다.[4] 또한, 그리스 장교들이 헌병대 조직에서 이탈리아인들을 대체했고, 외국 군대의 철수가 시작되어 크레타는 ''사실상'' 그리스의 통제하에 놓이게 되었다.[4]

4. 3. 반란의 결과



1898년 12월 13일, 그리스와 덴마크의 게오르기오스 왕자가 3년 임기의 고등 판무관으로 도착했다. 1899년 4월 27일에는 행정위원회가 창설되었고, 하니아 출신의 젊고 아테네에서 교육받은 변호사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가 법무부 장관으로 참여했다. 1900년까지 베니젤로스와 게오르기오스 왕자는 국내 정책, 그리고 그리스와의 통합인 ''에노시스'' 문제를 놓고 의견 차이를 보였다.[11]

베니젤로스는 1901년 초에 사임했고, 그 후 3년 동안 그와 그의 지지자들은 왕자의 파벌과 격렬한 정치 투쟁을 벌였으며, 이로 인해 섬은 정치적, 행정적 교착 상태에 빠졌다.[11] 결국 1905년 3월, 베니젤로스와 그의 지지자들은 하니아 근처 언덕에 있는 테리소 마을에 모여 "혁명 의회"를 구성하고, 정치 개혁을 요구했으며, 열강 영사들에게 보낸 선언문에서 "크레타의 그리스와의 정치적 통합을 단일 자유 헌법 국가로" 선언했다.[11] 크레타 헌병대는 왕자에게 충성을 유지했지만, 수많은 대의원들이 반란에 가담했고, 열강이 7월 18일에 계엄령을 선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군대는 반군에 대항하여 움직이지 않았다.[11]

8월 15일, 크레타 의회는 베니젤로스의 제안에 찬성 투표를 했고, 열강은 협정을 중재하여 게오르기오스 왕자가 사임하고 새로운 헌법을 만들기로 했다.[11] 1906년 선거에서 친왕자 정당들은 38,127표를, 친베니젤로스 정당들은 33,279표를 얻었지만, 1906년 9월 게오르기오스 왕자는 전 그리스 총리 알렉산드로스 자이미스로 교체되었고 섬을 떠났다.[11] 또한, 그리스 장교들이 헌병대 조직에서 이탈리아인들을 대체했고, 외국 군대의 철수가 시작되어 크레타는 ''사실상'' 그리스의 통제하에 놓이게 되었다.[11]

5. 그리스와의 통합

1907년 2월 헌법이 공포되었지만, 이후 크레타는 그리스와의 통합을 추진했다. 제1차 발칸 전쟁이 발발하자 그리스는 크레타와의 합병을 인정하고 스테파노스 드라구미스를 섬의 총독으로 파견했다. 1913년 2월 14일 열강들은 수다 요새에서 자국 국기를 내렸고, 1913년 5월 런던 조약을 통해 묵시적으로 현상 유지를 인정했으며, 오스만 제국의 메흐메트 5세 술탄은 섬에 대한 공식적인 권리를 포기했다.[10]

5. 1. 일방적인 통합 선언

1908년, 터키의 국내 혼란과 자이미스 총리의 섬 휴가 기간을 틈타 크레타 대표들은 그리스와의 일방적인 합병을 선언했다.[10] 크레타 자치국의 국기는 그리스 국기로 대체되었고, 모든 공무원은 그리스 국왕 게오르기오스 1세에게 충성을 맹세했으며, 그리스 헌법과 법률이 섬에서 시행되었다. 이 행위는 국제적으로, 심지어 그리스에서도 인정받지 못했는데, 1910년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가 그리스 총리로 선출되었다. 1912년 5월 크레타 대표들은 아테네로 가서 그리스 의회에 들어가려 했지만, 경찰에 의해 강제로 저지당했다.

5. 2. 발칸 전쟁과 최종 통합

1908년, 터키의 국내 혼란과 자이미스 총리의 섬 휴가 기간을 틈타 크레타 대표들은 그리스와의 일방적인 합병을 선언했다.[10] 크레타 자치국의 국기는 그리스 국기로 대체되었고, 모든 공무원은 그리스 국왕 게오르기오스 1세에게 충성을 맹세했으며, 그리스 헌법과 법률이 섬에서 시행되었다. 이 행위는 국제적으로, 심지어 그리스에서도 인정받지 못했는데, 1910년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가 그리스 총리로 선출되었다. 1912년 5월 크레타 대표들은 아테네로 가서 그리스 의회에 들어가려 했지만, 경찰에 의해 강제로 저지당했다.

제1차 발칸 전쟁이 발발하자 그리스는 마침내 합병을 인정하고 스테파노스 드라구미스를 섬의 총독으로 파견했다. 열강들은 1913년 2월 14일 수다 요새에서 자국 국기를 내리고, 1913년 5월 런던 조약을 통해 묵시적으로 현상 유지를 인정했으며, 메흐메트 5세 술탄은 섬에 대한 공식적인 권리를 포기했다.

1913년 12월 1일, 공식적인 합병 기념식이 열렸다.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콘스탄티노스 1세 국왕이 참석한 가운데 그리스 국기가 하니아의 피르카 요새에 게양되었다. 크레타의 무슬림 소수 민족은 처음에는 섬에 남아 있었지만, 나중에는 1923년 터키와 그리스 간에 체결된 로잔 조약에 따라 합의된 일반적인 그리스와 터키 간의 인구 교환에 따라 터키로 이주했다.

6. 인구

1911년 총인구는 336,151명이었다.[11]

종교인구
기독교307,812명[11]
무슬림27,852명[11]
유대교487명[11]


참조

[1] 서적 Handbook for the Diplomatic History of Europe, Asia, and Africa 1870–1914 National Board for Historical Service, [[United States Government Publishing Office]] 2018-11-03
[2] 문서 McTiernan, pp. 13–14.
[3] 문서 McTiernan, pp. 13–23.
[4] 문서 McTiernan, pp. 20–21.
[5] 문서 McTiernan, p. 28.
[6] 문서 McTiernan, pp. 32–35.
[7] 서적 Eleftherios Venizelos: The Trials of Statesmanship Edinburgh University Press 2008
[8] 문서 McTiernan, pp. 36–39.
[9] 문서 McTiernan, p. 39.
[10] 간행물 The Cretan Question 1910-04
[11] 서적 First encyclopaedia of Islam: 1913–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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