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레르몽 공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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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클레르몽 공의회는 1095년 교황 우르바노 2세가 비잔티움 제국의 지원 요청에 따라 소집한 종교 회의이다. 이 회의에서 교황은 동방의 기독교 국가 지원과 이슬람 세력에 의해 점령된 성지 해방을 위한 십자군을 호소했고, 이는 제1차 십자군으로 이어지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공의회에서 교황은 연설을 통해 십자군 참가를 독려했으며, 이 연설은 여러 기록자들에 의해 다양한 버전으로 기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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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르몽 공의회 | |
---|---|
공의회 정보 | |
명칭 | 클레르몽 공의회 |
다른 명칭 | 클레르몽 교회 회의 |
종류 | 교회 공의회 |
소집 | 교황 우르바노 2세 |
날짜 | 1095년 11월 |
위치 | 클레르몽페랑 |
이전 공의회 | 피아첸차 공의회 |
다음 공의회 | 투르 공의회 |
주요 내용 | |
주요 의제 | 성직매매 금지 신성 모독 금지 제1차 십자군 선포 |
주요 참석자 | 프랑스 귀족 성직자 |
역사적 배경 | |
배경 | 셀주크 제국의 예루살렘 점령 및 기독교 박해 |
목적 | 동방 교회 보호 성지 회복 |
결과 | 제1차 십자군 결의 |
연설 | |
교황의 연설 | 교황 우르바노 2세의 유명한 연설 |
연설 내용 | "Deus vult" (신이 원하신다) 외침 성지 예루살렘 탈환 촉구 죄 사함 약속 |
2. 배경
1095년 비잔티움 제국 황제 알렉시우스 1세는 점차 세력을 확장해가는 셀주크 투르크에 위협을 느끼고 서방 교회에 군사적 원조를 요청하였다. 황제의 서신은 피아첸차 교회회의에서 교황 우르바노 2세에게 전달되었다. 이후 11월, 우르바노 2세는 클레르몽에서 교회회의를 열어 이 문제를 논의하기로 결정하였다.
교회회의는 11월 18일부터 28일까지 열렸으며, 약 300여 명의 성직자가 참석하였다. 우르바노 2세는 이 회의에서 교회 내 클뤼니 개혁 문제와 프랑스 국왕 필리프 1세의 파문 문제를 논의하였다. 11월 27일, 우르바노 2세는 공의회 교부들 앞에서 동방 문제를 공식적으로 언급하였다. 교황은 서방의 그리스도교회가 이슬람교 세력에게 정복당한 성지를 되찾고, 이슬람의 공격으로 위기에 처한 비잔티움 제국을 구원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공의회에는 약 300명의 성직자가 참석했으나, 참석자나 공의회 결의 서명자의 공식 명단은 남아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석자 중 일부의 부분적인 목록은 다음과 같이 구성할 수 있다.[6]
이름 | 직위 |
---|---|
요안네스 | 포르토 추기경 주교 |
다고베르토 | 피사 대주교 |
성 브루노 | 세니 주교 |
갈테리우스 | 알바노 추기경 주교 |
랑기에리우스, O.S.B. | 레조칼라브리아 대주교 |
리차드 | 마르세유의 S. 빅토르 수도원 추기경 사제이자 원장 |
테우조 | SS. 요안니스 엣 파울리 추기경 사제 |
알베르투스, O.S.B. | 산타 사비나 추기경 사제 |
요안네스 가텔루스 | 교황의 재상 |
그레고리우스 파피엔시스 | 부제 |
위고 오브 베르됭 | 부제 |
위그 드 디 | 리옹 대주교이자 교황 특사 |
아마투스 | 보르도 대주교이자 교황 특사 |
라이날두스 | 랭스 대주교 |
리체리우스 | 상스 대주교 |
롤란두스 | 돌 주교 |
달마티우스 | 나르본 대주교 |
베르나르 드 세디라크 | 톨레도 대주교이자 스페인 특사 |
호엘루스 (호엘) | 르망 주교 |
제프루아 드 방돔 | 아벤티노 언덕의 산타 프리스카 성당의 추기경 사제 |
베네딕토 | 낭트 주교 |
페트루스 | 푸아티에 주교 |
이보 | 샤르트르 주교 |
랑베르 | 아라스 주교 |
요안네스 | 오를레앙 주교 |
로제 | 보베 주교 |
라둘푸스 (라울) | 투르 대주교 |
힐고트 | 전 소아송 주교, 마르무티에 수도원 수도사 |
1095년 11월 27일, 클레르몽 공의회 마지막 날 교황 우르바노 2세는 공의회 교부들과 모인 군중 앞에서 동방 문제에 관한 연설을 하였다. 이 연설은 제1차 십자군 원정을 촉발하고 이후 약 2세기 동안 가톨릭 세계 전체를 휩쓴 십자군 운동의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것으로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3. 연설
당시 비잔티움 제국 황제 알렉시우스 1세는 점증하는 셀주크 투르크의 위협에 맞서 서방 교회에 군사적 지원을 요청한 상태였다. 우르바노 2세는 이 요청을 받아들여, 연설을 통해 서방 기독교 세계가 이슬람교 세력에게 점령당한 성지를 해방하고, 이슬람의 공격으로 위기에 처한 동방의 기독교 국가, 특히 동로마 제국을 구원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예루살렘, 안티오크 등지에서 기독교인들이 박해받고 있으며, 투르크인들의 침략이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위협하고 있음을 강조하며 다음과 같이 호소했다.예루살렘, 안티오크 및 그밖의 도시들에서 크리스트교도가 박해를 받고 있다. 신을 믿지 않는 튀르크인들의 진출은 그칠 줄 모르고 이미 일곱차례나 크리스트교도를 격파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다가오고 있다. 성지의 형제들을 구하라. 서유럽의 크리스트교 교도들이여. 지위가 높건 낮건, 재산이 많건 적건, 근동의 크리스트교 교도의 구원에 힘써라. 신은 그대들을 인도하실 것이다. 신의 정의를 위해 싸우다 쓰러지는 자는 죄사함을 받으리라
우르바노 2세는 이 성전에 참여하는 자는 모든 죄를 용서받을 것이라고 약속하며 참여를 독려했다. 전승에 따르면, 교황의 연설이 끝나자 군중은 열광적으로 "Dieu le veult! (신께서 원하신다!)"라고 외쳤다고 전해진다. 다만, 이 외침에 대한 기록은 후대의 특정 사료에만 등장하며, 그 역사적 사실성에 대해서는 연구자들 사이에 이견이 존재한다.[20]
이 연설에 대한 기록은 여러 형태로 남아있으나, 기록자나 기록 시점에 따라 세부 내용에는 차이가 있다.
3. 1. 연설의 기록자
교황 우르바노 2세가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행한 연설에 대한 주요 정보원은 다음 6가지로 알려져 있다.[7]
# 교황 우르바노 2세가 공의회 직후인 1095년 12월 플랑드르의 신자들에게 보낸 서한.
# 1100년 또는 1101년경 익명의 저자가 작성한 ''게스타 프랑코룸'' (Gesta Francorum|프랑크인의 업적la).
# 공의회에 직접 참석했던 샤르트르의 풀케가 1100년에서 1105년 사이에 기록한 ''게스타 프랑코룸 이에루살렘 페레그리난티움'' (Gesta Francorum Iherusalem Peregrinantiumla).
# 공의회에 참석했을 가능성이 있는 로베르 드 몽이 1107년에 작성한 ''히스토리아 히에로솔리미타나'' (Historia Hierosolymitanala).
# 돌의 발드릭 대주교가 1105년경 작성한 기록.
# 노장 구이베르가 1107년 또는 1108년에 작성한 ''데 게스타 페르 프랑코스'' (Dei gesta per Francosla).
이 기록들은 연설의 세부 내용에서 다소 차이를 보인다. 여러 12세기 연대기 작가들의 기록 가운데, 공의회에 직접 참석했던 풀케리우스의 기록이 오늘날 가장 신뢰성 높은 자료로 평가받는다.[8]
3. 2. 연설 내용의 주요 기록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행해진 교황 우르바노 2세의 연설에 대한 주요 정보원은 다음의 6가지이다.[7]
# 교황 우르바노 2세가 공의회에 대해 언급하며 1095년 12월에 작성한 서한.
# 익명의 ''게스타 프랑코룸'' ("프랑크인의 업적", 1100/1101년경).
# 공의회에 참석했던 샤르트르의 풀케의 ''게스타 프랑코룸 이에루살렘 페레그리난티움'' (1100–1105년경).
# 공의회에 참석했을 가능성이 있는 로베르 드 몽의 ''히스토리아 히에로솔리미타나'' (1107년).
# 돌의 발드릭 대주교 (1105년경 작성).
# 노장 구이베르의 ''데 게스타 페르 프랑코스'' (1107/8년).
이들 기록 중 연설 내용을 담고 있는 다섯 가지 버전은 세부 사항에서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일반적으로 공의회에 직접 참석했던 풀케의 설명이 가장 신뢰할 수 있는 버전으로 여겨진다.[8]
1095년 12월, 우르바노 2세가 "플랑드르에서 기다리는" 신자들에게 보낸 서한에는 "야만적인 분노가 동방 지역의 하느님 교회를 비참하게 고통스럽게 하고 황폐하게 만들었다"고 한탄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그는 예루살렘을 언급하며, 이 야만적인 분노가 "그의 수난과 부활로 영광을 얻은 교회와 그리스도의 성스러운 도시를 참을 수 없는 예속 상태로 잡았다"고 지적했다. 또한 군주들에게 르퓌의 아데마르를 원정대 지도자로 임명하고, 성모 승천 축일인 1096년 8월 15일에 출발하여 "동방 교회를 해방"시킬 것을 촉구했다.[9]
익명의 연대기인 ''게스타 프랑코룸''은 연설 자체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제공하지 않는다. 다만 우르바노 2세가 모든 이에게 "주님의 길을 따르라"고 촉구했으며, 하늘에서의 보상을 약속하며 고난을 감수할 준비를 하라고 독려했다고 간략히 언급한다. 이 기록은 교황의 호소가 "갈리아, 프랑크족의 모든 지역과 국가에 빠르게 퍼져나갔고", 소식을 들은 프랑크인들이 즉시 오른 어깨에 십자가를 꿰매며 "그들이 지옥의 손에서 구원받은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한마음으로 따른다고 말했다"고 강조한다.[10]
3. 2. 1. 풀케르의 기록
샤르트르의 풀케(Fulcher of Chartres)는 연설에 참석했으며, 이를 『예루살렘 정복의 프랑크인들의 업적』(Gesta Francorum Jerusalem Expugnantium|게스타 프랑코룸 예루살렘 엑스푸그난티움la)에 기록했다. 그는 몇 년 후(1100년–1105년경) 기억에 의존하여 이 기록을 남겼는데,[11] 이는 일반적으로 연설의 가장 신뢰할 수 있는 버전으로 여겨진다.[8] 풀케는 서문에서 자신이 직접 본 사건만을 기록하고 있으며, 그의 기록은 11세기 교황 연설에서 알려진 연설 스타일과 일치하는 방식으로 표현되었다고 주장한다.[12]
풀처의 기록에 따르면, 교황 우르바노 2세는 먼저 참석한 성직자들에게 그들이 양치기임을 상기시키며, 경계심을 늦추지 말고 부주의와 부패를 피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성직 매매를 삼가고 교회의 법을 준수할 것을 강조했다. 또한 프랑크 지방의 정의와 공공 질서 부재를 비판하며, 성직자를 폭력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하느님의 평화의 재확립을 요구했다. 풀처는 참석한 모든 이들이 교황의 제안에 동의하고 교회의 법령을 지키겠다고 약속했다고 전한다.
연설의 두 번째 부분에서 우르바노 2세는 프랑크 기독교인들에게 자신들의 땅에서 평화와 정의를 회복한 뒤, 동방으로 관심을 돌려 그곳의 기독교인들을 도와야 한다고 촉구했다. 그는 튀르크족[13]이 동방 기독교인들을 공격하여 최근 비잔틴 아나톨리아 지역인 '로마니아' 영토를 지중해 연안, 즉 '성 조지 팔'(마르마라 해)[14]까지 정복했다고 설명했다. 이 과정에서 많은 기독교인이 살해되거나 포로로 잡혔고, 교회가 파괴되었으며 하느님의 왕국이 황폐해졌다고 덧붙였다.[15] 우르바노 2세는 더 이상의 영토 상실과 기독교인에 대한 공격을 막기 위해, 참석한 성직자들에게 자신의 호소를 널리 알리고 귀족과 평민을 포함한 모든 계층의 사람들에게 동방 기독교인을 도우라고 설득할 것을 촉구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명령하신다"(Christus autem imperat|크리스투스 아우템 임페라트la)[16]라는 말로 호소를 마무리하며, 이 원정을 방어적인 정당한 전쟁이자 종교적인 성전으로 규정했다.[17]
우르바노 2세는 이어서 이슬람교도와의 전투에서 또는 원정길에서 죽는 모든 사람에게 즉각적인 면죄부를 약속했다. 그는 이 무력 호소를 프랑스 내 평화를 위한 이전의 호소와 연결지었다. "신도들을 상대로 부당하게 사적인 전쟁을 벌이던 자들은 이제 이교도에 맞서 오랫동안 시작되었어야 할 이 전쟁을 승리로 끝내라. 오랫동안 강도였던 자들은 이제 기사가 되어라. 형제와 친척과 싸우던 자들은 이제 야만인과 적절한 방식으로 싸우라. 적은 보수를 위해 용병으로 복무했던 자들은 이제 영원한 보상을 얻으라. 몸과 영혼을 다 소진했던 자들은 이제 두 배의 영예를 위해 일하라."[18] 연설은 우르바노 2세가 떠날 계획이 있는 모든 사람에게 가능한 한 빨리 토지를 임대하고 경비를 마련하며, 겨울이 끝나고 봄이 시작될 때 출발하라고 요청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3. 2. 2. 로베르 드 몽의 기록
공의회에 참석했을 가능성이 있는 로베르 드 몽은 1107년에 《히스토리아 예로솔리미타나(Historia Iherosolimitana)》를 저술했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이 기록에 담긴 연설 버전을 선호한다.[19] 로베르의 기록은 더 생생한 묘사와 상세한 설교, 그리고 청중이 자발적으로 "데우스 불트(Deus vult)"라고 외치는 "극적인 청중의 반응"을 포함하고 있어 주목받는다.[20]
이 기록에 따르면, 교황 우르바노 2세는 "프랑크족"에게 기독교 정통성, 개혁, 교회에 대한 복종을 강조하며 동방의 그리스도인들을 도울 것을 호소했다. 또한 풀처의 기록과 마찬가지로, 동방으로 가는 이들에게 죄의 사면을 약속했다.[21]
로베르의 연설 기록은 극적인 "전투 연설"의 수사학을 특징으로 한다. 이 버전에서 우르바노 2세는 동방의 그리스도인을 돕는 것보다 성지 회복을 더 강조하는데, 이는 풀처의 기록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부분이다. 많은 역사가는 이것이 제1차 십자군의 성공 이후 영향을 받아 추가된 내용일 수 있다고 본다. 로베르의 기록은 풀처의 기록처럼 투르크족의 정복으로 인한 동방 기독교인들의 참혹한 상황과 원정 참가자에 대한 죄 사면 약속을 담고 있다. 그러나 로베르의 기록은 정복자들이 저지른 만행에 대해 훨씬 더 생생하게 묘사하는데, 교회의 모독, 강제 할례, 기독교인 남성에 대한 참수와 내장 제거 고문, 기독교 여성에 대한 심각한 강간 등을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22]
또한 이 기록에는 우르바노 2세가 기사들만이 원정에 참여해야 하며, 노인과 허약한 자, 주교의 허락 없이 참여하는 사제는 제외하라고 조언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한 사람들은 도움이 되기보다는 방해가 되고, 이점이 되기보다는 짐이 된다"는 언급과 함께, "여자들은 남편이나 형제 또는 법적 보호자 없이는 전혀 출발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도 덧붙여져 있다. 이는 사건 이후의 관점이 반영된 것일 수 있다.[23]
3. 2. 3. 기타 기록
돌의 대주교인 발드릭(1105년경 작성)은 일반적으로 《게스타 프랑코룸》에 근거하여, 무슬림의 행위와 기사도 정신에 호소하며 성지 탈환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감동적인 설교 내용을 기록했다.[7] 또한 노장의 수도원장인 기베르는 그의 저서 《데 게스타 페르 프랑코스》(1107/8년)에서 우르바노 2세가 그리스인이나 다른 기독교인에 대한 지원보다는 성지 탈환 자체를 더 강조했다고 기록했다.[7]
4. 연설 원문 (한국어 번역)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연설을 통해 예루살렘, 안티오크를 비롯한 동방 지역의 크리스트교도들이 튀르크인들에게 박해받고 있음을 강조했다. 그는 신을 믿지 않는 튀르크인들의 세력이 확장되어 이미 여러 차례 크리스트교도를 격파하고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위협하고 있다고 경고하며, 성지에 있는 형제들을 구원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서유럽의 모든 크리스트교도들에게 지위의 높고 낮음이나 재산의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근동의 크리스트교도를 구원하는 일에 힘쓸 것을 촉구했다. 또한, 이 성스러운 과업에 참여하는 자들에게 신께서 그들을 인도하실 것이며, 신의 정의를 위해 싸우다 목숨을 잃는 자는 모든 죄를 용서받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행해진 우르바누스 2세 연설의 정확한 원문은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연설 내용은 당시 참석자나 이후 역사가들의 기록을 통해 재구성될 뿐이며, 이 기록들 간에는 차이가 존재한다. 연설에 대한 주요 정보원은 다음과 같은 6가지이다.[7]
기록 | 작성 시기 | 작성자/특징 |
---|---|---|
교황 우르바노 2세 서한 | 1095년 12월 | 공의회 직후 플랑드르 신자들에게 보낸 서한 |
게스타 프랑코룸 ("프랑크인의 업적") | 1100/1101년경 | 익명의 기록 |
게스타 프랑코룸 이에루살렘 페레그리난티움 | 1100–1105년경 | 샤르트르의 풀케 (공의회 참석자로 알려짐) |
히스토리아 히에로솔리미타나 | 1107년 | 로베르 드 몽 (공의회 참석 가능성이 있음) |
기록 | 1105년경 | 돌의 발드릭 대주교 |
데 게스타 페르 프랑코스 | 1107/8년 | 노장 구이베르 |
현재 알려진 연설에 대한 다섯 가지 버전은 세부적인 내용에서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이 중 공의회에 직접 참석했던 것으로 알려진 풀케의 기록이 일반적으로 가장 신뢰할 수 있는 버전으로 여겨진다.[8]
우르바누스 2세 자신이 1095년 12월 플랑드르의 신자들에게 보낸 서한에서는 "야만적인 분노가 동방 지역의 하느님 교회를 비참하게 고통스럽게 하고 황폐하게 만들었다"고 개탄하며, 특히 예루살렘이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로 영광을 얻은 교회와 성스러운 도시임에도 불구하고 참을 수 없는 예속 상태에 놓였다"고 언급했다. 그는 군주들에게 르퓌의 아데마르를 원정대의 지도자로 임명하고, 성모 승천 축일인 1096년 8월 15일에 출발하여 "동방 교회를 해방"시킬 것을 촉구했다.[9]
익명의 연대기인 ''게스타 프랑코룸''은 연설의 구체적인 내용을 상세히 전하지는 않는다. 다만 우르바누스 2세가 모든 이에게 "주님의 길을 따르라"고 촉구하고, 하늘에서의 보상을 확신하며 많은 고난을 감수할 준비를 하라고 독려했다고 기록했다. 이 기록은 또한 우르바누스 2세의 호소에 대한 소식이 갈리아와 프랑크족의 모든 지역으로 빠르게 퍼져나갔으며,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즉시 오른편 어깨에 십자가를 꿰매 달고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겠다고 맹세했다고 전한다.[10]
우르바노 2세가 공의회 마지막 날 군중을 향해 행한 이 연설은 제1차 십자군의 발발과 이후 약 2세기 동안 가톨릭 세계를 휩쓴 십자군 운동의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것으로 평가받는다. 연설을 들은 군중은 큰 열광 속에서 "Deus vult|데우스 불트!la (신께서 그것을 원하신다!)"라고 외쳤다고 전해지지만, 이 구호가 실제로 외쳐졌는지에 대해서는 사료의 불확실성으로 인해 의문을 제기하는 연구자들도 있다.
5. 클레르몽 공의회 참석자
공의회에는 약 300명의 성직자가 참석했다. 참석자나 공의회 결의 서명자의 공식 명단은 남아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석자 중 일부의 부분적인 목록을 구성할 수 있다.[6]
- 요안네스, 포르토 추기경 주교
- 다고베르토, 피사 대주교
- 성 브루노, 세니 주교
- 갈테리우스, 알바노 추기경 주교
- 랑기에리우스, O.S.B., 레조칼라브리아 대주교
- 리차드, 마르세유의 S. 빅토르 수도원 추기경 사제이자 원장
- 테우조, SS. 요안니스 엣 파울리 추기경 사제
- 알베르투스, O.S.B., 산타 사비나 추기경 사제
- 요안네스 가텔루스, 교황의 재상
- 그레고리우스 파피엔시스, 부제
- 위고 오브 베르됭, 부제
- 위그 드 디, 리옹 대주교이자 교황 특사
- 아마투스, 보르도 대주교이자 교황 특사
- 라이날두스, 랭스 대주교
- 리체리우스, 상스 대주교
- 롤란두스, 돌 주교
- 달마티우스, 나르본 대주교
- 베르나르 드 세디라크, 톨레도 대주교이자 스페인 특사
- 호엘루스 (호엘), 르망 주교
- 제프루아 드 방돔, 아벤티노 언덕의 산타 프리스카 성당의 추기경 사제
- 베네딕토, 낭트 주교
- 페트루스, 푸아티에 주교
- 이보, 샤르트르 주교
- 랑베르, 아라스 주교
- 요안네스, 오를레앙 주교
- 로제, 보베 주교
- 라둘푸스 (라울), 투르 대주교
- 힐고트, 전 소아송 주교, 마르무티에 수도원 수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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