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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드 비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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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클로드 비비에는 1948년 퀘벡에서 태어나 1983년 파리에서 살해된 캐나다 작곡가이다. 그는 고아원에서 성장했고, 어린 시절부터 언어와 정체성에 대한 탐구를 시작했다. 비비에는 동성애자였으며, 그의 작품에는 이러한 주제가 반영되어 있다. 그는 유럽에서 음악을 공부하며 카를하인츠 슈톡하우젠의 영향을 받았고, 이후 독자적인 스타일을 발전시켰다. 그의 음악은 다양한 문화와 언어를 융합하여 독창적인 음색을 만들어냈으며, 스펙트럼 음악 기법을 활용한 작품을 남겼다. 비비에는 1980년대 초 파리에서 살해되었으며, 그의 죽음은 음악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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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드 비비에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982년경의 비비에 초상화, 암살되기 1년 전에 촬영됨
1982년경 비비에의 초상화 (사망 1년 전 촬영)
본명클로드 비비에
출생1948년 4월 14일
출생 장소몬트리올, 퀘벡, 캐나다 (또는 근처)
사망1983년 3월 7일
사망 장소파리, 프랑스
국적캐나다
직업작곡가
피아니스트
시인
민족음악학자
학력퀘벡 몬트리올 음악원 (1967–1971)
다름슈테터 페리엔쿠르제 (1972–1974)
배우자크리스토퍼 코 (1982–1983)
클로드 비비에 서명
클로드 비비에 서명
작품
주요 작품싯다르타 (1976)
코페르니쿠스 (1979)
지팡구 (1980)
외로운 아이 (1980)
관련 정보
언어(창작어)

2. 생애

비비에가 자란 1940년대 몬트리올 시내 전경


클로드 비비에는 1948년 몬트리올에서 태어나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고아원에서 자랐으며, 입양 후에는 양아버지의 삼촌에게 성적 학대를 당하기도 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몬트리올 퀘벡 음악원과 유럽에서 공부하며 자신만의 독특한 음악 세계를 구축했다.

1971년부터 3년간 카를하인츠 슈톡하우젠 등에게 배우며 총렬주의와 12음 기법을 넘어선 자신만의 스타일을 발전시켰다. 1974년 캐나다로 돌아온 후 캐나다 방송 공사(CBC)의 의뢰를 받아 작곡 활동을 하고, 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1976년 말부터 1977년 초까지 아시아 각지를 여행하며 음악학을 기록하였고, 특히 발리가믈란 음악에 큰 영향을 받았다. 이후 그의 작품에는 복잡한 리듬과 동양적인 요소들이 나타난다.

1982년, 파리로 이주하여 작곡에 전념했지만, 1983년 3월 혐오 범죄의 희생자가 되어 34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그의 죽음은 음악계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그의 음악적 업적은 오늘날까지도 높이 평가받고 있다.

2. 1. 어린 시절과 청소년기

클로드 비비에는 1948년 4월 14일 캐나다 퀘벡주 몬트리올 인근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며, 같은 날 어머니에 의해 라 크레슈 생-미셸 고아원(현재는 운영되지 않음)에 맡겨졌다.[1] 그의 어머니와 아버지의 신원은 알려지지 않았다.[2][3][4] 비비에는 자신이 프랑스계 캐나다인 혈통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으며, 자신의 부모와 유산에 대한 이야기를 신화화하여 독일계, 동유럽계, 유대인 등의 가족이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의 친구 필립 폴로니는 비비에가 자신의 아버지가 지휘자이거나 어머니가 음악가라고 생각했으며, 독일어와 이탈리아어를 잘한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비비에는 평생 동안 친부모를 찾으려 했지만 실패했고, 이러한 좌절감과 공허한 정체성은 그의 작품, 특히 ''외로운 아이''(1980)에 영감을 주었다.[5]

1950년대 중반 비비에의 첫 영성체 모습


고아원에 맡겨진 후, 비비에는 회색 수녀회로부터 "클로드 로저"라는 이름을 받았고, 생-엉팡-제수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6] 수녀들은 그를 "벙어리"라고 믿어 정신 지체 아동으로 여겼다. 그러나 기록 부족으로 고아원 시절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두 살 반에 마일 엔드 출신의 노동자 계급 비비에 가족에게 입양되었으며, 부모는 아르망과 잔(''née'' 마소)이었다.[7] 비비에 가족은 유산을 겪은 후 소녀를 입양하려 했지만, 몬트리올의 모든 고아원에 소년들만 있어서 클로드가 선택되었다. 비비에는 카리스마 있고 흥분하기 쉬운 아이였지만, 크고 엄격한 가톨릭 집안에서의 시간은 순탄치 않았다.[5] 1950년 크리스마스 이후, 클로드는 불특정 이유로 잠시 고아원으로 다시 보내졌지만, 1951년 8월에 다시 가족에게 돌아왔다.[7][8] 그는 여섯 살 때 말을 배우기 시작했으며, 그 전에는 가족들이 그를 정신 병원에 보내는 것을 고려하기도 했다.

여덟 살 때, 비비에는 양아버지의 삼촌인 조셉에게 강간을 당했다.[7][9] 고해성사 중 사제에게 이 사실을 털어놓았고, 사제는 부모에게 말하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비비에의 부모는 그가 성폭행을 기억해내자 격노했으며, 그가 거짓말을 하거나 모든 일의 책임이 있다고 믿었다. 이 사건은 그들의 관계에 긴장을 초래했고, 비비에는 가족과 교류하는 시간을 줄여나갔으며, 조셉의 성적 학대는 수년간 계속되었다. 비비에가 아홉 살이나 열 살이 되었을 때 가족은 라발 교외로 이사했으며, 경제적 어려움으로 자주 이사했다. 이러한 이사는 비비에를 우울하게 만들었고, 그는 점점 더 외로워졌다.

열세 살 때, 비비에는 마리스트 형제회가 운영하는 기숙 학교에 입학했다. 마리스트 형제회는 젊은 남성들을 사제직으로 준비시키는 프랑스 가톨릭 단체이다. 비비에는 시를 가장 좋아했으며, 아르튀르 랭보와 에밀 넬리건의 작품에 매료되었다. 그는 언어학 및 역사 문학에 대한 관심을 키워 고대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연구했는데, 이는 나중에 그의 langue inventées|창작 언어프랑스어에 영향을 미쳤다.[7] 그는 수도원 지원자 반열에 올랐고, 비슷한 관심사를 가진 친구들을 사귀기 시작했다. 그의 성적은 주베나 수페리외르 생 조제프에서 34명의 학생 중 가장 높았으며, 2년간의 평균 시험 점수는 80%였다. 비비에의 첫 번째 기록된 시는 이 시기에 쓰여졌으며, ''노엘''과 다다이즘에서 영감을 받은 ''Not' petit bonheur'' (1965)가 있다.

비비에는 수업에 다니면서 동료 남학생들에게 "''amour-amitié|사랑-우정프랑스어''"이라고 부르는 것을 경험하면서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알게 되었다. 1966년, 18세가 되자, 그는 친구와 가족에게 커밍아웃을 했다. 당시 동성애 행위는 캐나다에서 불법이었다.[7][10] 그는 생 아산트의 수련원에서 학년 중반에 퇴학당했다. 마리스트 형제회가 제시한 이유는 "부적절한 행동"과 "성숙의 부족"이었지만, 음악 역사가들은 동성애에 대한 기독교의 편협함이 정당한 이유였다는 것을 일반적으로 받아들인다.[4][6] 비비에는 퇴학 통지를 받은 후 몇 시간 동안 흐느껴 울었다고 하며, 마리스트 형제회와 함께한 시간이 자신이 진정으로 행복했던 유일한 시간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는 그 이후로 자신의 성 정체성을 숨기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

2. 2. 음악 교육

비비에가 십 대 시절에 가끔 연주했던 퀘벡 노트르담 대성당의 오르간


비비에가 처음으로 음악을 접한 것은 가족이 다니는 교회에서 미사 중에 찬송가를 부르면서였다.[1] 그는 나중에 크리스마스 이브 자정 미사에서의 경험을 "계시"라고 회상했다.[2] 그의 양부모는 업라이트 피아노를 구입했고, 그가 열네 살 때 가끔 피아노 레슨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왔다.[3] 그는 이 시기에 가장 초기의 작품들을 썼으며, 거의 같은 시기에 음악으로 수익을 올리기 시작했다. 그의 양누나 지젤에 따르면, 그는 또래들에게 음악 레슨을 해주고, 십 대 초반에 인근 아훈칙의 발레 학교에서 피아노 반주를 했다.[4] 또한 오르간에 대한 관심을 키워 퐁비오 지역의 다양한 교회를 찾아 연습하고 연주했다.[5] 프레르 마리스타에(Frères Maristae)로부터 거의 또는 전혀 음악 교육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거의 독학으로 공부했다. 비비에의 급우 질 베로가르는 모차르트, 차이콥스키, 바르토크 및 쇤베르크의 작품을 연주하고 연구하는 것에 매료되었다고 회상했다.[6] 비비에는 스무 살이 되기 전에 목소리와 피아노를 위한 소수의 곡과 여러 오르간 전주곡을 썼을 것으로 추정되며, 이 곡들은 거의 모두 분실되거나 파괴되었다.[7] 비비에의 친구 미셸-조르주 브레장은 1967년에 바르토크에게 영감을 받은 ''피아노 전주곡''(Prélude pour piano)이 쓰여졌지만, 나중에 비비에가 파괴한 것으로 보인다고 회상했다.[8]

1967년 가을, 그는 몬트리올 퀘벡 음악원(Conservatoire de musique du Québec à Montréal, CMQM)에 입학했다.[9] 어빙 헬러에게 피아노를, 화성학과 대위법을 이자벨 들롬에게, 푸가를 프랑수아즈 오부-프라테에게, 그리고 작곡을 질 트렘블레에게서 배웠다.[10][11][12] 비비에는 트렘블레의 가장 열성적이고 헌신적인 제자 중 한 명이었다. 트렘블레는 "그는 알고 싶어했습니다. 그는 너무 알고 싶어해서 때로는 매우 피곤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수업 후에 복도에서 저를 따라다니며 질문을 했기 때문입니다."라고 회상했다.[13][14][15] 올리비에 메시앙의 제자였던 트렘블레는 작곡의 개념이 모든 것을 포괄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특정 역사적 시대와 음악 스타일에 집중하는 것을 거부했다.[16] 그는 그레고리오 성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알반 베르크의 음악을 포함하여 그의 학생들과 대조적인 장르를 분석했다.[17][18] 당시 이러한 독특한 관점은 비비에가 이질적인 영향을 결합하는 미래의 스타일에 영감을 주었다. 그의 ''현악 4중주''(Quatuor à cordes, 1968), ''오지카와''(Ojikawa, 1968) 및 ''증식''(Prolifération, 1969, 개정 1976)은 그가 음악원에서 완성한 몇 안 되는 작품 중 하나이다.[19][20] 트렘블레는 비비에를 진지한 작곡가로서의 지위를 지지하고 높이게 되었고, 그와 가까운 우정을 맺었다.[21][22][23][24]

2. 3. 유럽 유학과 음악적 변화

1971년, 질 트렘블레와의 수업을 마친 후, 비비에는 3년 동안 유럽에서 공부했다. 파리 국립 고등 음악원에서 폴 메파노에게, 위트레흐트의 음향학 연구소에서 고트프리트 미하엘 쾨니히에게, 마지막으로 쾰른에서 카를하인츠 슈톡하우젠에게 배웠다.[2] 1968년 몬트리올에서 열린 새로운 음악 콘서트에 참석한 후 슈톡하우젠의 음악을 처음 접했고, 독일 작곡가의 실험적인 음색 접근 방식에 매료되었다. 비비에는 그에게 레슨을 받기 위해 쾰른으로 이사했지만, 처음에는 거절당했다. 슈톡하우젠은 그의 원고 중 하나를 초견으로 읽고 그의 학생들에게 "이것 좀 봐! 이 글을 봐! 이런 사람을 학생으로 받아들이겠어? 이 사람은 그런 글쓰기로는 결코 훌륭한 작곡가가 될 수 없을 거야!"라고 외쳤다고 한다. 1972년 첫 학기에 슈톡하우젠의 다름슈타트 강좌에 정식으로 받아들여지기 전에 한 번 더 거절당했으며, 한스 울리히 훔페르트와 리차드 투프 교수에게서 추가로 공부했다.

독일 작곡가 카를하인츠 슈톡하우젠(사진)은 비비에에게 가르침을 주고 큰 영향을 미쳤다.


비비에는 슈톡하우젠의 영향을 크게 받았고, 종종 그를 음악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작곡가로 존경했다.[3] 그러나 슈톡하우젠은 처음에는 열정적인 비비에에 대해 별로 생각하지 않았다.[4][6] 투프는 "역설적으로, 슈톡하우젠은 클로드를 다른 대부분의 학생들만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것은 비비에를 좌절시키지 않았다. 투프는 "클로드는 수업에서 슈톡하우젠의 가장 충성스러운 추종자였고(사실, 나는 충성심을 클로드의 핵심 특징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슈톡하우젠의 정신적 관점을 상당한 정도로 공유한 유일한 사람이었다"라고 덧붙였다. 비비에는 급우들 사이에서 평판이 좋지 않았는데, 흐트러지고 기이한 외모와 노골적인 화려함 때문에 종종 놀림과 조롱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비에는 제라르 그리세, 동료 퀘벡 출신인 월터 부드루, 호라치우 라둘레스쿠를 포함한 동료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다. 비비에는 라둘레스쿠의 곡 "영원의 기원에 대한 홍수"(1970)의 다름슈타트 공연에서 타악기 연주자로 참여했는데, 작곡가는 이 곡을 "글로벌 사운드 소스"를 위해 쓰여졌다고 묘사했다.

그의 초기 작품에는 스승의 영향을 받은 측면이 있는데, 총렬주의와 12음 기법에 대한 급진적인 접근 방식이 포함된다. 그러나 비비에는 그의 스승과 피에르 불레즈와 같은 동시대 사람들과 달리, 작곡의 주요 동력으로 선율을 계속 사용함으로써 차별성을 보였다. 그는 또한 위트레흐트에서의 첫 학기에 영감을 받아 실험적인 전자 음악을 작곡하기 시작했는데, 이 모든 것이 테이프를 위한 것이었다.[6] 그가 슈톡하우젠의 지도 아래 쓴 첫 번째 곡은 7명의 여성 목소리를 위한 "샹"(1973)이었는데, 그는 이 곡을 "작곡가로서 나의 존재의 첫 번째 순간"이라고 묘사했다. 비비에는 미래의 작곡에서 채택할 접근 방식의 선례인 링 변조의 사용에 익숙해졌다. 슈톡하우젠의 두 대의 피아노와 전자 장치를 위한 "만트라"(1970)는 비비에의 음악적 작업과 가장 강력하게 관련이 있다.

1972년부터 1973년 사이에 비비에는 음악적 언어를 극적으로 변화시켰다. 그는 12음 기법 음악을 "너무 제한적"이라고 거부하고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발전시키기 시작했다. 그는 성악 작품에서 모노디와 호모포니의 가능성을 탐구했으며, 자신의 langues inventées프랑스어 및 다국어 텍스트를 더욱 자신감 있게 적용했다. 오케스트라와 같은 대규모 앙상블을 위한 그의 작품은 ''음색선율''의 적용에서 아르놀트 쇤베르크의 음색적 영향을 보여주기 시작했으며, 구스타프 말러의 풍부한 후기 낭만주의적 표현주의를 보여주었다. 비비에는 말러가 자신과 가장 공통점이 많은 음악가일 것이라고 언급한 적이 있다.[10] 쇼팽과 모차르트는 그가 음악적 적용 면에서 자신을 연관 짓는 또 다른 두 명의 음악가였다.

2. 4. 캐나다 귀국과 민족음악학적 여정

1974년, 비비에는 고국에서 프리랜서 작곡가로서의 경력을 쌓기 위해 몬트리올로 돌아왔다.[1][7] 그는 새로운 시내 아파트 임대료를 지불하기 위해 지역 학교인 갈리포 뮤지크(Galipeau Musique)에서 오르간 교사로 일했지만, 퀘벡에서의 삶에 다시 적응하면서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다.[7] 캐나다 방송 공사(CBC)는 같은 해 비비에에게 마리우스 콘스탄트의 지휘 아래 캐나다 국립 청소년 오케스트라가 연주할 오케스트라 작품을 의뢰했다.[7] 그 결과물인 ''싯다르타''(1976)는 여러 번의 수정을 거쳐 거의 2년 후에 완성되었다.[14] 이 곡은 헤르만 헤세의 1922년 동명의 소설을 기반으로 하였으며,[14] 죄르지 리게티가 언급했듯이, 특히 ''라가''와 같은 아시아 음악에 대한 그의 첫 시도였다.[14] 국립 청소년 오케스트라는 악보를 받은 직후 비비에에게 작품이 연주하기에는 너무 복잡하고 기술적으로 어렵다고 말했고, 그의 사후 여러 해가 지나서야 비로소 연주되었다.[14]

그는 이 기간 동안 라발의 몽모렌시 칼리지, 몬트리올 대학교, 오타와 대학교에서 교수 및 교육직을 맡았다.[7] 비비에는 인터뷰에서 몽모렌시에서 "인기가 없었다"고 말했으며, 동료는 그를 "재앙"과 같은 교사라고 묘사했다.[7] 반면 오타와 대학교에서의 시간은 훨씬 더 보람이 있었다. 1975년 그는 대학의 현대 앙상블인 아틀리에 드 뮈지크 콩템포레인(Atelier de musique contemporaine)을 담당하게 되었다.[7] 그의 교사 계약은 1975년 10월부터 1976년 4월까지 7개월 동안 지속되었으며 시간당 약 20USD를 받았다. 그는 몬트리올의 아파트에서 오타와의 음악 부서까지 버스로 통근하는 일이 잦았다.[7]

비비에 (), 자신의 오페라 ''코페르니쿠스''(1979) 오케스트라 악보를 들고 있다.


1976년 말부터 1977년 초까지 비비에는 이집트, 일본, 이란, 태국, 싱가포르, 발리를 여행하며 이 지역들의 음악학을 기록했다.[6][13] 그가 접한 다양한 음악 문화와 전통은 그의 작곡 스타일에 스며들었다.[15] 특히, 더욱 복잡한 리듬에 대한 새로운 집착이 두드러졌다.[15] 그의 피아노 곡 ''시라즈''(1977)는 이란 시라즈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으며, 얽히고설킨 리듬 조합과 빠른 펄스가 특징이다.[15] 비비에는 시라즈 시장에서 두 명의 맹인 가수가 공연하는 것을 듣고 이 곡을 쓰도록 영감을 받았다.[6][15] 그는 곡의 프로그램 노트에 시라즈가 "힘차게 깎아낸 다이아몬드, 도시의 진주"라고 썼다.[15] 싱가포르 방문은 그의 일기에 "종: 기쁨. 황홀경"이라는 세 단어로 묘사되었다.[15]

그는 도쿄 지역의 ''가부키'' 극장을 방문하여 음악과 실제 공연의 의식적인 특성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15] ''지팡구''(1980)는 현악 오케스트라를 위해 쓰여진 일본풍 작품으로, 남인도 카르나틱 음악의 요소(탄부르의 드론 모방, 리듬 ''탈라'', ''라가'' 조작 및 ''찰라나타'' 포함)를 담고 있다.[16] 이 곡의 이름은 일본의 옛 이칭에서 따온 것으로, "해돋이의 땅"을 의미한다.[16] ''지팡구''는 많은 사람들에게 작곡가의 가장 공격적이고 "가혹한" 곡으로 여겨진다.[17]

비비에가 광범위한 연구를 수행한 전통적인 발리 가믈란 오케스트라.


발리에서 그는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으며, 이 지역의 전통 가믈란을 세밀하게 분석하고 그들의 모국어를 배우려고 시도했다.[6][18] 비비에는 현지 주민들에게 배운 모든 것을 적어 놓은 상세한 노트를 보관했는데, 여기에는 발리 언어로 여러 신체 부위가 표시된 해부학 차트도 포함되어 있었다.[18] 그는 발리 여행을 "사랑, 부드러움, 시, 삶에 대한 존경심에 대한 교훈"이라고 묘사했다.[2] 앙상블 곡 ''풀라우 데와타''(1977)와 ''파라미라보''(1978)는 모두 발리 가믈란의 영향을 받았으며, 두 개의 무조 멜로디 사이에서 유럽의 호케와 유사한 리듬 교대 방식인 ''코테칸''의 수정된 형태가 사용되었다.[18]

비비에는 1977년 1월 태국에서 여정을 마치고 몬트리올로 돌아왔으며, 당초 예상했던 것보다 6개월 일찍 여행을 중단했다.[18] 그 이유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지만, 그는 캐나다 예술 위원회에 보낸 편지에서 여행이 그를 "... 지치게 만들었고, 신경적으로, 육체적으로" 만들었다고 썼다.[18]

2. 5. 왕성한 활동과 죽음

1974년, 비비에는 수년간 거의 인정을 받지 못한 후 고국에서 프리랜서 작곡가로서 경력을 쌓기 위해 몬트리올로 돌아왔다.[1][7] 그는 지역 학교인 갈리포 뮤지크(Galipeau Musique)에서 오르간 교사로 일했지만, 퀘벡에서의 삶에 다시 적응하면서 재정적으로 계속 어려움을 겪었다. 캐나다 방송 공사(CBC)는 같은 해 비비에에게 마리우스 콘스탄트의 지휘 아래 캐나다 국립 청소년 오케스트라가 연주할 오케스트라 작품을 의뢰했다. 그 결과물인 ''싯다르타''(1976)는 여러 번의 수정을 거쳐 거의 2년 후에 완성되었다. 헤르만 헤세의 1922년 동명의 소설을 기반으로 한 이 곡은 그의 당시 가장 야심 찬 프로젝트였으며, 죄르지 리게티가 언급했듯이, 특히 ''라가''와 같은 아시아 음악에 대한 그의 첫 시도였다. 그러나 국립 청소년 오케스트라는 악보를 받은 직후 비비에에게 작품이 연주하기에는 너무 복잡하고 기술적으로 어렵다고 말했고, 그의 사후 여러 해가 지나서야 비로소 연주되었다.

그는 이 기간 동안 라발의 몽모렌시 칼리지, 몬트리올 대학교, 오타와 대학교를 포함한 다른 교수 및 교육 직책을 맡았다. 오타와 대학교에서의 비비에의 시간은 훨씬 더 보람이 있었다. 1975년 그는 대학의 가장 중요한 현대 앙상블인 아틀리에 드 뮈지크 콩템포레인(Atelier de musique contemporaine)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의 교사 계약은 1975년 10월부터 1976년 4월까지 7개월 동안 지속되었으며 시간당 약 20USD의 요율로 지급되었다. 그는 몬트리올의 아파트에서 오타와의 음악 부서까지 버스로 통근하는 일이 잦았다.

비비에의 미완성 칸타타 ''Rêves d'un Marco Polo'' (1981–83)의 오리지널 악보


퀘벡 피아니스트 로레인 바일랑쿠르, 작곡가 존 리, 스페인 출신 망명자 호세 에반젤리스타와 함께 몬트리올 대학교에서 그는 'Les Événements du Neuf'라는 제목의 현대 작품의 새로운 공연을 특징으로 하는 일련의 콘서트를 시작했다. 그는 퀘벡 댄스 앙상블 'Le Groupe de la Palace Royale'을 위해 발레곡 'Love Songs'와 'Nanti Malam' (1977)을 포함한 몇몇 곡을 썼다. ''Lonely Child'' (1980)는 CBC의 또 다른 의뢰로 쓰여졌으며, 밴쿠버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세르주 가랑의 지휘를 받았다. 비비에의 소규모 오페라 ''Kopernikus'' (1979)는 1980년 5월 8일 몬트리올의 Théâtre du Monument National에서 오케스트라 형태로 초연되었으며, 바일랑쿠르가 오케스트라를 지휘했다.

그는 같은 해 11월에 프랑스의 스펙트럼 작곡가 제라르 그리세와 트리스탄 뮈라이유와 상의하기 위해 잠시 유럽으로 여행을 갔다. 스펙트럼 음악은 나중에 비비에의 마지막 작품의 주요 명제가 되었다. 그는 자신의 스펙트럼 기법을 ''jeux de couleurs'' ("색상의 놀이")라고 명명했는데, 이는 기본 2성부 텍스처보다 높은 화음과 오케스트라 음색의 혼합이었다. ''Jeux de couleurs''는 멜로디의 수직적 발현에 대한 비비에의 관심에서 비롯되었으며, 오케스트라의 다양한 악기가 배음열을 통해 특정 음색을 복제하는 데 어떻게 사용될 수 있는지에 대한 것이다. 이것은 비비에가 주파수 변조와 다른 간격 알고리즘을 사용하여 12음 평균율을 넘어선 음에 도달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클랑파르벤멜로디''의 원칙에서 상당한 벗어남이다. 그의 악보에서 그는 종종 연주자를 위해 주파수를 정확하게 매핑하기 위해 센트로 조율을 적는다. 비비에는 죽기 직전에 그리세에게 보낸 편지에서 "저도 이제 스펙트럼으로 작곡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저에게 영향을 주셨어요... 단지 제 것을 조금 비틀었습니다!"라고 썼다.

그가 회원이었던 캐나다 음악 센터는 1981년 그를 캐나다의 현대 음악 언어를 지속적으로 옹호하고 기여한 공로를 인정하여 "올해의 작곡가"로 선정했다.

파리의 제네랄-길렘 거리. 왼쪽에서 7번째 문인 22번지는 비비에의 마지막 거주지이자 살해된 장소였다.


1982년 6월, 비비에는 캐나다에서 위촉받을 수 있는 모든 오케스트라와 앙상블을 다 소진했다고 믿고 파리로 잠시 이주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대부분의 소지품을 두고 파리 11구의 북동쪽 회랑에 있는 rue du Général-Guilhem|제네랄 길렘 가프랑스어의 작은 아파트에서 살았다. 비비에는 재정적인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자신감에 차 있었고, 파리에 있는 것에 만족했다.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작곡에 할애했다. 몇 달 후, 그는 미국 작가이자 망명가인 크리스토퍼 코와 짧지만 열정적인 관계를 시작했다. 이 관계는 비비에가 코에게 뉴욕에 다른 남자친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1983년 1월 24일에 끝났다. 그것은 비비에의 몇 안 되는 진지한 관계 중 하나였다.[4]

이 사건은 비비에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고 그를 훨씬 더 편집증적이고 자의식적으로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지역의 다른 게이 바를 계속 방문했고, 친구들은 또 다른 공격이 일어날까 두려워하며 좌절하고 걱정했다. 1983년 3월 7일 월요일 저녁, 비비에는 벨빌 지역의 다른 술집에서 술을 마시고 20세의 파스칼 돌잔을 초대하여 그의 아파트에서 밤을 보냈다.[1][4] 그날 밤과 다음 날 아침 일찍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정황은 여전히 추측의 대상이지만, 돌잔은 나중에 비비에의 초대를 받아들인 것은 그를 강도질하고 죽일 의도였다고 말했다.[5] 그가 정확히 언제 그렇게 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비비에의 시신은 3월 12일 토요일, 그의 아파트를 수색한 경찰에 의해 발견되었다. 그는 두 개의 매트리스 사이에 갇힌 채 발견되었으며, 구타당하고, 목 졸리고, 질식당하고, 큰 단검으로 최소 45번 찔린 상태였으며, 거의 알아볼 수 없었다.[13][16][22] 그는 단검으로 너무 세게 찔려서 단검이 여러 군데에서 매트리스를 관통했고 벽과 천장에 핏방울을 남겼다.

돌잔은 주요 용의자로 간주되었고, 약 8개월 후인 10월 26일 클리시 광장의 한 술집에서 체포되었다.[4] 그는 비비에 살인을 자백하며 개 목걸이로 작곡가를 목 졸라 죽이고 비명을 지르지 못하게 하려고 흰 손수건을 입에 쑤셔 넣었다고 진술했다. 돌잔은 여러 번 진술을 바꾸고 정신 이상을 이유로 무죄를 주장하려고 시도했으며, 그의 변호는 "공공 시설에서의 그의 어린 시절이 그의 심리적 문제의 원인이다"라고 주장했다. 돌잔이 떠나 아파트 문을 잠그기 전에 챙긴 유일한 것은 비비에의 지갑에서 발견한 몇천 프랑이었다. 경찰은 결국 돌잔이 비비에 살인 전에 파리에서 다른 게이 남성을 폭행한 적이 있는 노숙자 연쇄 범죄자라는 것을 발견했다.[23]

돌잔의 이후 재판에서, 법원은 비비에와 다른 희생자들이 일련의 약물에 취한 혐오 범죄로 인해 강도질당하고 폭행당하고 살해되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파리 배심원 법원에 의해 확인된 3건의 살인 혐의로 기소되어 유죄 판결을 받았으며, 1986년 11월에 가능한 최고 형량인 종신형을 선고받았다.[25][26]

페르 라셰즈 화장장, 비비에가 1983년 3월 23일 화장된 곳


비비에는 유언을 남기지 않았기에, 파리 당국은 그의 시신이 너무 심하게 훼손되고 부패하여 시체 안치소 직원이 시신을 방부 처리할 수 없다는 이유로 1983년 3월 23일 화장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페르 라셰즈 화장장에서 화장되었고, 그의 유해는 매장을 위해 몬트리올로 옮겨졌다.

진정한 장례식은 비비에의 35번째 생일이었을 4월 14일 몽레알의 Église Saint-Albert-le-Grand에서 거행되었다. 그의 유해는 라발의 살롱 퓬네르 달레르에 안치되었다. 6월 2일에는 살 클로드 샹파뉴 강당에서 공식 추모 연주회가 열렸다.

그의 죽음에 대한 소식이 프랑스와 그의 고향 퀘벡 전역으로 퍼지자, 비비에의 많은 동료와 전직 교사들은 충격을 받았다. 질 트렘블레는 "완전히 놀랐다"라고 말하며, "... 그가 죽었을 때 우리는 매우 슬펐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화가 났습니다. 그에게 화가 났습니다. 아시다시피, 당신은 그런 재능을 가지고 있을 때 그렇게 어리석을 권리가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일부는 그가 스스로를 죽일 만한 동기나 유인이 있었는지 의문을 제기했는데, 특히 그 작곡가가 만성적으로 우울했고 죽음에 대한 매혹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를 시사하는 구체적인 증거는 없다.

3. 개인사

클로드 비비에는 1948년 4월 14일 캐나다 퀘벡주 몬트리올 인근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며, 그의 어머니는 같은 날 그를 라 크레슈 생-미셸 고아원에 맡겼다.[1] 그의 어머니의 이름, 민족, 출신, 그리고 비비에의 아버지의 신원은 알려지지 않았다.[2][3][4]

어린 비비에는 고아원을 운영하는 회색 수녀회로부터 "클로드 로저"라는 이름을 받았으며, 이후 생-엉팡-제수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6] 그는 수녀들이 그를 "벙어리"라고 믿었기 때문에 정신 지체 아동으로 여겨졌다.[6] 기록 보존 부족으로 인해 고아원에서의 그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6]

그는 두 살 반의 나이에 마일 엔드 출신의 노동자 계급 비비에 가족에게 입양되었다.[7] 비비에 가족은 아르망과 잔(''née'' 마소) 부부와 두 명의 친자녀로 구성되어 있었다. 부부는 수년 전 유산을 겪었고 어린 소녀를 입양하려 했지만, 몬트리올의 모든 고아원에 소년들만 있어서 클로드가 선택된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다.[7]

비비에는 카리스마 있고 흥분하기 쉬운 아이였지만, 엄격한 가톨릭 가정에서의 시간은 순탄치 않았다.[5] 1950년 크리스마스 이후, 클로드는 불특정 이유로 잠시 고아원으로 다시 보내졌지만, 약 반년 후 다시 데려왔다.[7][8] 그는 여섯 살 때 말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그 전에는 가족들이 그를 정신 병원에 보내는 것을 고려했다.[6]

여덟 살 때, 비비에는 그의 양아버지의 삼촌인 조셉에게 강간을 당했다.[7][9] 그는 고해성사 중에 사제에게 이 사실을 털어놓았고, 사제는 부모에게 말하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9] 비비에의 부모는 그가 성폭행을 기억해내자 격노했으며, 그가 거짓말을 하거나 모든 일의 책임이 있다고 믿었다.[7] 이 사건은 그들의 관계에 긴장을 초래했으며, 비비에는 가족과 교류하는 시간을 점점 줄여나갔고, 조셉의 성적 학대는 그 후 수년간 계속되었다.[9]

비비에가 아홉 살이나 열 살이 되었을 때 가족은 라발 교외로 이사했으며, 경제적 어려움으로 자주 이사했다.[9] 이러한 이사는 비비에를 우울하게 만들었고, 그는 점점 더 외로워졌다.[9]

열세 살 때, 비비에의 부모는 그를 마리스트 형제회가 운영하는 기숙 학교에 입학시켰다.[9] 그는 시가 가장 좋아하는 과목이었으며, 아르튀르 랭보와 에밀 넬리건의 작품에 매료되었다.[9] 그는 언어학 및 역사 문학에 대한 강한 관심을 키워 고대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연구했는데, 이는 나중에 그의 langue inventées프랑스어에 영향을 미쳤다.[7] 그의 성적은 주베나 수페리외르 생 조제프에서 34명의 학생 중 가장 높았으며, 2년간 평균 80%였다.[9] 비비에의 첫 시는 이 시기에 쓰여졌으며, ''노엘''과 다다이즘에서 영감을 받은 ''Not' petit bonheur'' (1965)가 있다.

1982년 6월, 비비에는 파리로 잠시 이주했다.[9] 그는 파리 11구의 작은 아파트에서 살았다.[9] 재정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자신감에 차 있었고, 파리에 있는 것에 만족했다. 그는 ''상상의 오페라를 위한 세 개의 아리아'' (1982)를 작업했다.[9] 몇 달 후, 미국 작가 크리스토퍼 코와 짧지만 열정적인 관계를 시작했지만, 1983년 1월 24일 끝났다.[4] 코는 나중에 그들의 연애를 소설화한 ''그때와 같은 시절''을 썼다.[4]

1월 25일 저녁, 비비에는 파리의 한 게이 바에서 정체불명의 남성 매춘부를 불러 자신의 아파트로 데려갔다. 그 남자는 가위로 비비에의 얼굴과 목을 베어 상처를 입혔다.[21] 공격자는 비비에의 지갑을 훔쳐 달아나기 전에 가위로 전화선을 끊었다.[21] 비비에는 친구 필리프 폴로니에게 달려갔고, 폴로니는 그를 돌봐주었다.[21]

이 사건은 비비에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고, 그는 더 편집증적이고 자의식적으로 변했다.[21] 그럼에도 그는 게이 바를 계속 방문했고, 친구들은 또 다른 공격을 걱정했다.[21]

1983년 3월 7일 저녁, 비비에는 벨빌 지역의 술집에서 20세 파스칼 돌잔을 초대하여 그의 아파트에서 밤을 보냈다.[1][4] 돌잔은 비비에를 강도질하고 죽일 의도로 초대를 받아들였다고 말했다.[1][5]

3월 8일, 비비에는 해리 할브라이히와 파리 국립고등음악원에서 퀘벡 음악에 대한 강연을 할 예정이었다.[5] 그가 나타나지 않자, 할브라이히는 뭔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했다.[5] 할브라이히는 비비에의 여동생에게 연락했고, 그녀는 그의 아파트 문이 잠겨 있는 것을 발견했다. 할브라이히는 경찰에 신고했고, 3월 12일 토요일, 경찰은 비비에의 시신을 발견했다.[5]

그는 구타당하고, 목 졸리고, 질식당하고, 단검으로 최소 45번 찔린 채 발견되었다.[13][16][22] 단검은 매트리스를 관통했고 벽과 천장에 핏방울을 남겼다.[5]

돌잔은 주요 용의자로 체포되어 범행을 자백했다. 그는 진술을 바꾸고 정신 이상을 주장했지만, 비비에의 전기 작가들은 BDSM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한다.[5] 경찰은 돌잔이 노숙자 연쇄 범죄자임을 발견했다.[23] 그는 게이 바에서 남자들을 유혹하여 폭행하고 귀중품을 훔쳤으며, 르 마레를 포함한 지역에서 여러 남자를 폭행하고 두 명을 더 살해했다.[24]

돌잔은 3건의 살인 혐의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25][26] 1991년, 그는 더 높은 보안 감옥으로 이송되었다.[27]

비비에는 유언을 남기지 않아, 1983년 3월 23일 페르 라셰즈 화장장에서 화장되었다. 그의 유해는 몬트리올로 옮겨졌다. 파리에서 작은 장례식이 열렸고, 많은 친구들과 동료 음악가들이 참석했다.[5]

4월 14일 몽레알에서 장례식이 거행되었다.[5] 6월 2일, 추모 연주회가 열렸다.[5]

그의 죽음 소식에 많은 동료와 교사들은 충격을 받았다. 일부는 그가 자살했을 가능성을 제기했지만, 증거는 없다.[5]

비비에 (왼쪽) 친구 테레즈 데자르댕과 함께 ()


비비에는 외향적인 성격, 여성스러운 몸짓, 독특한 웃음소리로 알려졌다.[5] 그는 뚜렛 증후군으로 추측되는 행동을 보였다.[28]

그는 위생 상태가 좋지 않았고, 셰어링 코트를 입고 다녔으며, 머리가 기름졌다.[28]

비비에는 암흑 공포증을 겪었고, 침실 불을 켜두었다.[28]

3. 1. 성적 지향과 정체성

비비에는 수업을 들으면서 동료 남학생들에게 "사랑-우정프랑스어"이라고 부르는 것을 경험하면서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알게 되었다.[4] 1966년, 18세가 되자, 그는 친구와 가족에게 커밍아웃을 했다. 당시 동성애 행위는 여전히 불법이었고 캐나다에서 매우 꺼려졌다.[7][10] 그는 그 후 생 아산트의 수련원에서 학년 중반에 퇴학당했다.[4] 마리스트 형제회가 제시한 이유는 그의 "부적절한 행동"과 "성숙의 부족"이었지만, 음악 역사가들은 동성애에 대한 기독교의 편협함이 정당한 이유였다는 것을 일반적으로 받아들인다.[4][6] 비비에는 퇴학 통지를 받은 후 몇 시간 동안 흐느껴 울었다고 하며, 마리스트 형제회와 함께한 시간이 자신이 진정으로 행복했던 유일한 시간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는 그 이후로 자신의 성 정체성을 숨기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

비비에는 공개적으로 동성애자였으며, 그의 많은 작품들 – 십 대 시절에 쓴 시들을 포함하여 – 진보적이고 동성애적인 주제를 반영한다. 그는 "궁극적으로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극단적인 페미니스트적 사고, 내가 가진 민감성, 매우 페미니스트적이거나 게이적이며, 남성/여성, 지배/피지배의 통상적인 방식을 약간 벗어나는 사고방식... 나는 매우 내밀하게 머물고, 내 음악은 매우 내밀하다"고 말하곤 했다. 그는 생애 마지막 몇 달 동안 오페라 ''차이콥스키, 러시아 레퀴엠''(Tchaïkovski, un réquiem Russe)을 작업하기 시작했는데, 이 오페라는 작곡가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가 그의 성적 취향이 드러나면서 자살을 강요받았다는 이론을 발전시키려 했다. 그는 이 프로젝트를 유네스코 음악 기구에 발표하고, 대본 작성을 위해 해리 할브라이히에게 도움을 구했지만, 원고 형태로 완성된 부분은 거의 없었고, 오페라는 한 번도 무대에 올려지지 않았다.

비비에의 친구들과 후대의 역사가들은 그가 다소 보헤미안적인 삶을 살았다고 언급하곤 했다. 그는 생애 동안 수많은 연인과 남색적인 관계를 가졌으며, 신원이 확인된 사람은 다니 올리비에리와 크리스토퍼 코뿐이었다. 비비에는 전형적인 근육질의 가죽 옷을 입은 바이커에 특히 매료되었다. 그는 헬스 엔젤스 오토바이 갱의 삶과 연극에 관심을 가졌으며, 한 번은 친구에게 그의 사디스트 성향에 대해 "폭력은 매혹적이고, 에로틱하기도 하다. 매번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다"고 썼다. 그는 퀘벡 LGBT 잡지 ''르 베르다슈''(Le Berdache)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더 이상 내가 게이라는 사실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고 말하며, 과거의 고뇌와 자신의 성 정체성을 받아들이는 데서 얻은 새로운 자신감을 드러냈다.

비비에가 사망 당시 HIV 바이러스 보균자였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크리스토퍼 코가 두 사람이 데이트를 하던 시기인 1980년대 초에 AIDS 양성 반응을 보였기 때문이다. 필립 폴로니는 수년 후 "클로드가 [살인으로] 죽지 않았다면 AIDS로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길이 그렇게 가고 있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코 자신도 1994년 AIDS 관련 합병증으로 사망했다.

3. 2. 민족적 정체성

클로드 비비에는 1948년 4월 14일 캐나다 퀘벡주 몬트리올 인근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어머니는 그를 출생 당일 라 크레슈 생-미셸 고아원에 맡겼다.[1] 비비에의 어머니와 아버지의 신원, 민족, 출신은 알려지지 않았다.[2][3][4]

비비에는 자신이 프랑스계 캐나다인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그는 자신의 부모와 유산에 대한 이야기를 신화화하여, 가족이 독일계, 동유럽계, 유대인 등이라고 말하기도 했다.[2] 그의 친구 필립 폴로니는 비비에가 자신의 아버지가 지휘자이거나 어머니가 음악가였다고 생각했으며, 독일어와 이탈리아어에 대한 자연스러운 소질이 있었다고 전했다.[2] 비비에는 평생 동안 친부모를 찾으려 노력했지만 실패했다.[1] 이러한 좌절감과 공허한 정체성은 그의 작품, 특히 ''외로운 아이''(1980)에 영감을 주었다.[5]

비비에는 유대계라는 증거가 없었음에도 자신이 유대인이라고 주장했다.[2] 1982년 셰 조 골든버그 레스토랑 테러 이후, 인종적 증오 범죄의 희생자가 될까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그는 데자르댕에게 보낸 편지에서 프랑스에서 인종차별을 느꼈다고 썼다.[2]

4. 음악

비비에가 처음으로 음악을 접한 것은 가족이 다니는 교회에서 미사 때 찬송가를 부르면서였다.[1] 그는 나중에 크리스마스 이브 자정 미사에서의 경험을 "계시"라고 회상했다.[2] 양부모는 업라이트 피아노를 구입했고, 열네 살 때 가끔 피아노 레슨을 받도록 도왔다.[3] 초기 작품들은 이 시기에 쓰였으며, 거의 같은 시기에 음악으로 수익을 올리기 시작했다. 양누나 지젤에 따르면, 또래들에게 음악 레슨을 해주고, 십 대 초반에 인근 아훈칙의 발레 학교에서 피아노 반주를 했다.[4] 오르간에도 관심을 키워 퐁비오 지역의 다양한 교회를 찾아 연습하고 연주했다.[5] 프레르 마리스타에(Frères Maristae)로부터 거의 또는 전혀 음악 교육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거의 독학으로 공부했다. 급우 질 베로가르는 모차르트, 차이콥스키, 바르토크, 쇤베르크의 작품을 연주하고 연구하는 것에 매료되었다고 회상했다.[6] 스무 살이 되기 전에 목소리와 피아노를 위한 소수의 곡과 여러 오르간 전주곡을 썼을 것으로 추정되며, 이 곡들은 거의 모두 분실되거나 파괴되었다.[7] 친구 미셸-조르주 브레장은 1967년에 바르토크에게 영감을 받은 ''피아노 전주곡''(Prélude pour piano)이 쓰였지만, 나중에 비비에가 파괴한 것으로 보인다고 회상했다.[8]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이전의 퇴학으로 인해 교회에서 기대하는 경력을 쌓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결정했다.[9] 수련원을 떠난 후 하드웨어 가게, 이튼즈, 라발 지역의 식당에서 일하면서 재정적으로 버티기 위해 다양한 잡일을 했다.[10] 1967년 가을, 몬트리올 퀘벡 음악원(CMQM)에 입학했다.[11]

어빙 헬러에게 피아노를, 화성학과 대위법을 이자벨 들롬, 푸가를 프랑수아즈 오부-프라테, 작곡을 질 트렘블레에게서 배웠다.[12] 트렘블레의 가장 열성적이고 헌신적인 제자 중 한 명이었으며, 트렘블레는 "그는 알고 싶어했습니다. 너무 알고 싶어해서 때로는 매우 피곤했습니다. 수업 후에 복도에서 저를 따라다니며 질문을 했기 때문입니다."라고 회상했다.[13] 올리비에 메시앙의 제자였던 트렘블레는 작곡의 개념이 모든 것을 포괄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특정 역사적 시대와 음악 스타일에 집중하는 것을 거부했다.[14] 그레고리오 성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알반 베르크의 음악을 포함하여 학생들과 대조적인 장르를 분석했다.[15] 이러한 독특한 관점은 이질적인 영향을 결합하는 미래의 스타일에 영감을 주었다. ''현악 4중주''(1968), ''오지카와''(1968), ''증식''(1969, 개정 1976)은 음악원에서 완성한 몇 안 되는 작품 중 하나이다.[16] 트렘블레는 비비에를 진지한 작곡가로서 지지하고 높이 평가했으며, 가까운 우정을 맺었다.[17]

몬트리올에서 디노 올리비에리라는 남성과 처음으로 알려진 연애 관계를 시작했다. 이 시기의 올리비에리에게 헌정된 엽서에는 "아마도 당신을 아주 많이 사랑합니다"라고 적혀 있다.[18]

1971년, 질 트렘블레와의 수업을 마친 후, 3년 동안 유럽에서 공부했다. 파리 국립 고등 음악원에서 폴 메파노, 위트레흐트의 음향학 연구소에서 고트프리트 미하엘 쾨니히, 쾰른에서 카를하인츠 슈톡하우젠에게 배웠다.[2] 1968년 몬트리올에서 열린 새로운 음악 콘서트에 참석한 후 슈톡하우젠의 음악을 처음 접했고, 실험적인 음색 접근 방식에 매료되었다.[19] 쾰른으로 이사했지만, 처음에는 거절당했다. 슈톡하우젠은 원고 중 하나를 초견으로 읽고 학생들에게 "이것 좀 봐! 이 글을 봐! 이런 사람을 학생으로 받아들이겠어? 이 사람은 그런 글쓰기로는 결코 훌륭한 작곡가가 될 수 없을 거야!"라고 외쳤다고 한다.[20] 1972년 첫 학기에 다름슈타트 강좌에 정식으로 받아들여지기 전에 한 번 더 거절당했으며, 한스 울리히 훔페르트와 리차드 투프 교수에게서 추가로 공부했다.[21]

슈톡하우젠의 영향을 크게 받았고, 종종 그를 음악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작곡가로 존경했다.[3] 그러나 슈톡하우젠은 처음에는 열정적인 비비에에 대해 별로 생각하지 않았다.[4] 투프는 "역설적으로, 슈톡하우젠은 클로드를 다른 대부분의 학생들만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라고 말했다.[22] 그러나 이것은 비비에를 좌절시키지 않았다. "클로드는 수업에서 슈톡하우젠의 가장 충성스러운 추종자였고(사실, 나는 충성심을 클로드의 핵심 특징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슈톡하우젠의 정신적 관점을 상당한 정도로 공유한 유일한 사람이었다."[23] 흐트러지고 기이한 외모와 노골적인 화려함 때문에 종종 놀림과 조롱을 받았다.[24]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라르 그리세, 동료 퀘벡 출신인 월터 부드루, 호라치우 라둘레스쿠를 포함한 동료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다.[25] 라둘레스쿠의 곡 "영원의 기원에 대한 홍수"(1970)의 다름슈타트 공연에서 타악기 연주자로 참여했는데, 작곡가는 이 곡을 "글로벌 사운드 소스"를 위해 쓰였다고 묘사했다.[26]

초기 작품에는 스승의 영향을 받은 측면이 있는데, 총렬주의와 12음 기법에 대한 급진적인 접근 방식이 포함된다.[27] 그러나 스승과 피에르 불레즈 같은 동시대 사람들과 달리, 작곡의 주요 동력으로 선율을 계속 사용함으로써 차별성을 보였다.[28] 위트레흐트에서의 첫 학기에 영감을 받아 실험적인 전자 음악을 작곡하기 시작했는데, 모두 테이프를 위한 것이었다.[6] 슈톡하우젠의 지도 아래 쓴 첫 번째 곡은 7명의 여성 목소리를 위한 "샹"(1973)이었는데, "작곡가로서 나의 존재의 첫 번째 순간"이라고 묘사했다.[29] 미래의 작곡에서 채택할 접근 방식의 선례인 링 변조의 사용에 익숙해졌다.[30] 슈톡하우젠의 두 대의 피아노와 전자 장치를 위한 "만트라"(1970)는 비비에의 음악적 작업과 가장 강력하게 관련이 있다.[31]

1972년부터 1973년 사이에 음악적 언어를 극적으로 변화시켰다.[32] 12음 기법 음악을 "너무 제한적"이라고 거부하고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발전시키기 시작했다.[33] 성악 작품에서 모노디와 호모포니의 가능성을 탐구했으며, 자신의 langues inventées프랑스어 및 다국어 텍스트를 더욱 자신감 있게 적용했다. 오케스트라 같은 대규모 앙상블을 위한 작품은 ''음색선율''의 적용에서 아르놀트 쇤베르크의 음색적 영향을 보여주기 시작했으며, 구스타프 말러의 풍부한 후기 낭만주의적 표현주의를 보여주었다. 말러가 자신과 가장 공통점이 많은 음악가일 것이라고 언급한 적이 있다.[10] 쇼팽과 모차르트는 음악적 적용 면에서 자신을 연관 짓는 또 다른 두 명의 음악가였다.

비비에는 1970년대 중반 오타와 대학교(사진)의 현대 음악 부서를 이끌었다.


1974년, 몬트리올로 돌아와 프리랜서 작곡가로서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1] 새로운 시내 아파트 임대료를 지불하기 위해 지역 학교인 갈리포 뮤지크(Galipeau Musique)에서 오르간 교사로 일했지만, 퀘벡에서의 삶에 다시 적응하면서 재정적으로 계속 어려움을 겪었다. 캐나다 방송 공사(CBC)는 같은 해 마리우스 콘스탄트의 지휘 아래 캐나다 국립 청소년 오케스트라가 연주할 오케스트라 작품을 의뢰했다. 그 결과물인 ''싯다르타''(1976)는 여러 번의 수정을 거쳐 거의 2년 후에 완성되었다. 국립 청소년 오케스트라는 악보를 받은 직후 작품이 연주하기에는 너무 복잡하고 기술적으로 어렵다고 말했고, 사후 여러 해가 지나서야 비로소 연주되었다.

이 기간 동안 라발의 몽모렌시 칼리지, 몬트리올 대학교, 오타와 대학교를 포함한 다른 교수 및 교육 직책을 맡았다. 인터뷰에서 몽모렌시에서 "인기가 없었다"고 말했으며 동료는 "재앙"과 같은 교사라고 묘사했다. 오타와 대학교에서의 시간은 훨씬 더 보람이 있었다. 1975년 대학의 가장 중요한 현대 앙상블인 아틀리에 드 뮈지크 콩템포레인(Atelier de musique contemporaine)을 담당하게 되었다. 교사 계약은 1975년 10월부터 1976년 4월까지 7개월 동안 지속되었으며 시간당 약 20USD의 요율로 지급되었다. 몬트리올의 아파트에서 오타와의 음악 부서까지 버스로 통근하는 일이 잦았다.

1976년 말부터 1977년 초까지 이집트, 일본, 이란, 태국, 싱가포르, 발리를 여행하며 이 지역들의 음악학을 기록하는 데 시간을 보냈다.[6] 접한 다양한 음악 문화와 전통은 작곡 스타일에 쉽게 스며들었다.[15]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더욱 복잡한 리듬에 대한 새로운 집착이었다. 피아노 곡 ''시라즈''(1977)는 이란 시라즈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으며, 얽히고설킨 리듬 조합과 빠른 속도의 펄스가 특징이다. 시라즈 시장에서 두 명의 맹인 가수가 공연하는 것을 듣고 이 곡을 쓰도록 영감을 받았다.[6] 곡의 프로그램 노트에 시라즈가 "힘차게 깎아낸 다이아몬드, 도시의 진주"라고 썼다. 싱가포르 방문은 일기에 "종: 기쁨. 황홀경"이라는 세 단어로 묘사되었다.

도쿄 지역의 ''가부키'' 극장을 방문하여 음악과 실제 공연의 의식적인 특성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지팡구''(1980)는 나중에 현악 오케스트라를 위해 쓰여진 일본풍 작품으로, 남인도 카르나틱 음악의 요소(탄부르의 드론 모방, 리듬 ''탈라'', 추가적인 ''라가'' 조작 및 ''찰라나타'' 포함)를 담고 있다.[16] ''지팡구''는 많은 사람들에게 가장 공격적이고 "가혹한" 곡으로 여겨지는데, 현악기를 위한 많은 확장 기법(예: 스냅 피치카토 및 활 오버프레셔)과 크시슈토프 펜데레츠키의 현악 곡과 유사한 복잡한 멜로디 위에 더 조밀한 화성 내용을 특징으로 하기 때문이다.[17]

발리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으며, 이 지역의 전통 가믈란을 세밀하게 분석하고 모국어를 배우려고 시도했다.[6] 현지 주민들에게 배운 모든 것을 적어 놓은 매우 상세한 노트를 보관했는데, 발리 언어로 여러 신체 부위가 표시된 해부학 차트도 포함되어 있었다. 발리 여행을 "사랑, 부드러움, 시, 삶에 대한 존경심에 대한 교훈"이라고 묘사했다.[2] 앙상블 곡 ''풀라우 데와타''(1977)와 ''파라미라보''(1978)는 모두 발리 가믈란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으며, 두 개의 무조 멜로디 사이에서 유럽의 호케와 유사한 리듬 교대 방식인 ''코테칸''의 수정된 형태가 사용되었다.

1977년 1월 태국에서 여정을 마치고 몬트리올로 돌아왔으며, 당초 예상했던 것보다 6개월 일찍 여행을 중단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지만, 캐나다 예술 위원회에 보낸 편지에서 여행이 "... 지치게 만들었고, 신경적으로, 육체적으로" 만들었다고 썼다.

퀘벡 피아니스트 로레인 바일랑쿠르, 작곡가 존 리, 스페인 출신 망명자 호세 에반젤리스타와 함께 몬트리올 대학교에서 'Les Événements du Neuf'라는 제목의 현대 작품의 새로운 공연을 특징으로 하는 일련의 콘서트를 시작했다. 퀘벡 댄스 앙상블 'Le Groupe de la Palace Royale'을 위해 발레곡 'Love Songs'와 'Nanti Malam'(1977)을 포함한 몇몇 곡을 썼는데, 이 두 곡 모두 발리 영향을 보여준다. ''Lonely Child''(1980)는 CBC의 또 다른 의뢰로 쓰였으며, 밴쿠버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세르주 가랑의 지휘를 받았다. 소규모 오페라 ''Kopernikus''(1979)는 1980년 5월 8일 몬트리올의 Théâtre du Monument National에서 오케스트라 형태로 초연되었으며, 바일랑쿠르가 오케스트라를 지휘했다.

같은 해 11월에 프랑스의 스펙트럼 작곡가 제라르 그리세와 트리스탄 뮈라이유와 상의하기 위해 잠시 유럽으로 여행을 갔는데, 그리세는 다름슈타트 학파에서 알고 지내던 오랜 친구였다.[25] 그들은 함께 "저음과 멜로디 음 사이의 관계에 대한 스펙트럼 계산"을 연구했다. 스펙트럼 음악은 나중에 마지막 작품의 주요 명제가 되었다. 자신의 스펙트럼 기법을 ''jeux de couleurs'' ("색상의 놀이")라고 명명했는데, 이는 기본 2성부 텍스처보다 높은 화음과 오케스트라 음색의 혼합이었다. ''Jeux de couleurs''는 멜로디의 수직적 발현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되었으며, 오케스트라의 다양한 악기가 배음열을 통해 특정 음색을 복제하는 데 어떻게 사용될 수 있는지에 대한 것이다. 주파수 변조와 다른 간격 알고리즘을 사용하여 12음 평균율을 넘어선 음에 도달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클랑파르벤멜로디''의 원칙에서 상당한 벗어남이다. 악보에서 종종 연주자를 위해 주파수를 정확하게 매핑하기 위해 센트로 조율을 적는다. 죽기 직전에 그리세에게 보낸 편지에서 "저도 이제 스펙트럼으로 작곡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저에게 영향을 주셨어요... 단지 제 것을 조금 비틀었습니다!"라고 썼다.

캐나다 음악 센터는 1981년 캐나다의 현대 음악 언어를 지속적으로 옹호하고 기여한 공로를 인정하여 "올해의 작곡가"로 선정했다.

4. 1. 개요

클로드 비비에는 퀘벡 출신의 저명한 현대 음악 작곡가이다. 1948년에 태어나 1983년에 사망할 때까지 짧지만 강렬한 삶을 살았다. 비비에는 어린 시절 가톨릭 미사에서 찬송가를 부르며 처음 음악을 접했고, 이후 파이프 오르간에 대한 관심을 키워 다양한 교회에서 연습하고 연주했다.[1] 십 대 시절에는 피아노 레슨을 받기도 했으며, 이 시기에 초기 작품들을 작곡하고 음악으로 수익을 올리기 시작했다.[2]

비비에는 몬트리올 퀘벡 음악원(CMQM)에서 질 트렘블레 등에게 작곡을 배웠다.[3] 트렘블레는 올리비에 메시앙의 제자로, 다양한 장르를 분석하며 학생들에게 작곡의 포괄적인 개념을 가르쳤다.[4] 이는 비비에가 이질적인 영향을 결합하는 미래의 스타일을 형성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

1971년, 비비에는 유럽으로 유학을 떠나 카를하인츠 슈톡하우젠 등에게 배웠다.[5] 그는 슈톡하우젠의 실험적인 음색 접근 방식에 매료되었고, 그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6] 그러나 비비에는 선율을 중요하게 여기며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발전시켰다.[7]

1974년, 비비에는 몬트리올로 돌아와 프리랜서 작곡가로 활동하며, 캐나다 방송 공사(CBC)의 의뢰를 받아 오케스트라 작품 ''싯다르타''(1976)를 작곡했다.[8] 이 작품은 죄르지 리게티가 언급했듯이 아시아 음악, 특히 ''라가''에 대한 그의 첫 시도였다.[9] 그는 오타와 대학교 등에서 교편을 잡기도 했다.[10]

1976년 말부터 1977년 초까지 비비에는 아시아를 여행하며 다양한 음악 문화를 접하고, 가믈란과 같은 전통 음악을 연구했다.[11] 이러한 경험은 그의 작품에 반영되어, ''시라즈''(1977), ''지팡구''(1980) 등에서 복잡한 리듬과 동아시아 음악의 영향을 보여주었다.[12]

비비에는 스펙트럼 음악의 선구자 중 한 명으로,[13] 그의 후기 작품은 배음과 음색에 대한 탐구를 보여준다.[14] 그는 캐나다 음악 센터로부터 "올해의 작곡가"로 선정되기도 했다.[15]

비비에는 48개의 작품을 남겼으며, 그의 음악은 죄르지 리게티와 루이 안드레센 등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16] 리게티는 비비에의 음악을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올리비에 메시앙 이후 가장 중요한 발전 중 하나라고 평가했다.[17]

4. 2. 언어와 다국어 사용

비비에는 어릴 적부터 언어학 연구에 매료되었으며, 그의 성악 작품 텍스트와 대본에는 여러 언어가 사용되었고, 종종 서로 병치되었다. 그는 프랑스어, 독일어, 영어를 완벽하게 구사하는 다언어 구사자였으며, 그리스어, 라틴어, 이탈리아어, 발리어, 말레이어, 일본어 등에 대한 광범위한 연구를 진행했다.[7] 다만, 후자의 언어들에 대한 그의 교육 수준과 회화 능력은 완전히 알려지지 않았다.

비비에의 음악에는 다국어 텍스트가 사용된 예가 많이 나타난다. 《Chants》(1973)에서는 주로 라틴어 텍스트가 사용되었으며, 때로는 거꾸로 말하는 형태로 조작되기도 했다.[7] 또한, 폴란드어("엄마"를 뜻하는 "mamouchka") 등 다른 언어의 어휘도 나타난다.[7] 《Liebesgedichte》(1975)에는 베르길리우스의 《목가》의 라틴어 텍스트가 다른 많은 인용구와 함께 사용되었다.[7] 《영혼 불멸을 믿으십니까?》(1983)의 후반부에서는 남성 화자가 프랑스어와 영어를 결합한 텍스트를 낭독한다.[7]

4. 2. 1. 창작 언어 (langue inventées)

비비에는 어린 시절 새로운 언어를 만드는 경향이 있었다고 회상하며, 자신의 정체성과 부모의 부재가 그로 하여금 "원하는 대로 자신의 기원을 [만들어내고], 이상한 언어를 말하는 척하게 했다. [...] 내 모든 감수성이 정교해졌고, 점점 더 스스로를 감쌌다. 마침내 나는 보호받고 있었다!"[7]고 말했다. 이러한 기법이 처음 사용된 예는 그의 작품 《오지카와》(1968)에서 볼 수 있는데, 성악가가 엮어낸 일련의 무의미한 단어(예: ''"Niêdokawa ojikawa na'a'a'ouvina ouvi"'')가 등장한다.[7] 이는 다다 운동가인 휴고 볼과 크리스티안 모르겐슈테른의 소리 시와 그램멜롯과 유사하다.[7] 《사랑의 시》(1975)도 비슷한 모티프를 따르지만, 텍스트는 더욱 균일해지고, 반복과 음소 목록을 포함하여 기능하는 언어의 기본이 형성되기 시작한다.[7] 그는 방문한 모든 국가의 공식 언어를 배우려고 시도했고, 이러한 언어들, 대부분 아시아 기원의 언어들이 그의 언어의 소리에 영향을 미쳤다.[7] 비비에는 "이 모든 언어는 자동 기술의 결과다. 나는 항상 나만의 언어를 발명해왔다"[7]고 말하곤 했다.

비비에가 사용하는 특정 음소는 의도적으로 "감정적 내용"과 성악가가 부르는 음의 주파수와의 관계를 고려하여 선택되었다.[7] 그는 이러한 소리를 표기하기 위해 분음 부호가 있는 수정된 라틴 문자를 사용했지만, 때때로 키릴 문자를 포함한 다른 문자 체계에서 상형 문자를 빌려오기도 했다.[28] 대부분의 '창작 언어' 단어는 단음절로 구성되어 있으며, 다음절 단어는 원고에서 의도적으로 하이픈으로 연결된다.[7]

4. 3. 평가

클로드 비비에는 사망 전까지 48개의 작품을 남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작품은 앙상블 구성이 다양하며, 합창, 실내악, 테이프를 위한 실험 음악, 대규모 오페라 등을 포함한다.[7] 비비에의 음악 스타일은 그의 경력 전반에 걸쳐 끊임없이 변화했다. 그는 한때 20세기 중후반 유럽 작곡가들 사이에서 유행했던 음렬주의를 지지했지만, 이후 이를 버리고 반감을 가지게 되었다.

비비에는 스펙트럼 음악의 창시자 중 한 명으로 여겨지며, 페테르 외트뵈시와 클래런스 바로우 등 동료 작곡가들과 함께 "독일 피드백" 그룹으로 불리는 초기 개척자 그룹에 속했다. 비비에의 작곡 스타일은 올리비에 메시앙과 유사하다는 평가를 받는데, 특히 동성적 질감에서 조밀한 화음 사용, 조율된 젖꼭지 징, 가믈란과 유사한 건반 악기 및 선율적인 자체 진동 악기 등 동아시아 악기 사용이 그러하다.[7] 그는 사후에 번성한 포스트모더니즘 경향에 기여한 다름슈타트 악파의 가장 중요한 동문 중 한 명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일부 음악학자들은 비비에를 이 시대의 최초이자 가장 중요한 작품 중 일부를 쓴 독자적인 포스트모더니스트 작곡가로 분류하기도 한다.

그의 많은 작품들은 실내악 작품인 ''예수,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1973), ''사랑의 노래''(1975), ''성체 배령자들''(1977) 등을 포함하여 기독교의 중요한 주제를 중심으로 한다.[7] 그는 엄격한 종교적 환경에 반감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특정 종교에 대한 충성심 없이 여전히 하느님을 믿는 강한 영적 성향을 유지했다.

헝가리 작곡가 죄르지 리게티(György Ligeti)는 만년에 비비에의 음악을 알리는 데 헌신했다.


CBC 라디오 진행자이자 작곡가인 데이비드 예거는 "비비에는 모든 이론을 이해할 만큼 훌륭했지만, 이론이 자기 표현을 방해하게 두지 않았다. 그의 음악은 복잡성과 명료성을 모두 갖춘 독특한 목소리였다"라고 말했다. 그의 친구 해리 할브라이히는 "그의 음악은 정말 다른 어떤 것과도 같지 않으며 모든 흐름의 가장자리에 완전히 위치해 있다. 직접적이고 감동적인 표현에서 그의 음악은 이 주변적 천재를 분류할 수 없는 메마른 마음만을 혼란스럽게 했다. 클로드 비비에는 다른 많은 사람들이 찾고 또 찾았던 것, 즉 진정한 새로운 단순함의 비밀을 발견했다"라고 썼다.

현대주의 작곡가 루이 안드레센과 죄르지 리게티는 비비에를 자신들의 음악에 큰 영감을 준 인물로 꼽았다. 리게티는 후에 비비에의 사후 작품을 옹호하는 데 시간을 쏟았으며, "그의 음악은 스트라빈스키와 메시앙의 작품 이후 가장 중요하고, 어쩌면 가장 중요한 발전 중 하나일 것이다"라고 말했고, "그는 어떤 새로운 경향에도 속하지 않았고, 복고적이지도 않았지만 동시에 아방가르드 밖에 있었다. 그가 위대한 거장임을 드러내는 것은 바로 복잡한 음색의 유혹과 관능성 속에 있다"라고 말했다.

4. 4. 주요 작품 목록

클로드 비비에는 사망하기 전까지 48개의 작품을 완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작품들은 합창곡, 실내악, 테이프를 위한 실험 음악, 대규모 오페라 등 다양한 편성을 포함한다.[1] 비비에의 음악 스타일은 그의 경력 동안 끊임없이 변화했다.[1]

다음은 그의 주요 작품 목록을 연대순으로 정리한 것이다.[2]

연도작품명
1967'Lhomme'' (유실), 오르간 독주
1967Prélude pour piano (유실), 피아노 독주
1967Invention sur un thème pentatonique (미완성), 오르간 독주
1968현악 사중주
1968오지카와, 소프라노, 클라리넷, 팀파니
1968–69Musique pour une liberté à bâtir, 여성 목소리, 오케스트라
1969, 1976Prolifération, 마르테노, 피아노, 타악기
1970–71Hiérophanie, 소프라노와 앙상블
1971Musik für das Ende, 20개의 목소리, 타악기
1971–72Deva et Asura, 실내 관현악
1972Variation I, 테이프
1972[무제], 테이프
1972Hommage: Musique pour un vieux Corse triste, 테이프
1972Désintégration, 두 대의 피아노, 선택적 테이프
1973Chants, 7명의 여성 목소리
1973O! Kosmos, 소프라노, 혼성 4부 합창
1973Jesus erbarme dich, 소프라노, 합창
1974Lettura di Dante, 소프라노, 혼성 7중주
1975Hymnen an die nacht, 소프라노, 피아노
1975Liebesgedichte, 4개의 목소리, 앙상블
1975플루트와 피아노를 위한 곡, 플루트, 피아노
1975바이올린과 클라리넷을 위한 곡, 바이올린, 클라리넷
1975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곡, 바이올린, 피아노
1975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곡, 첼로, 피아노
1975Pour guitare, 기타 독주
1975Pianoforte, 피아노 독주
1975Improvisation pour basson et piano, 바순, 피아노
1976Siddhartha, 오케스트라
1976Woyzeck, 테이프
1976Learning, 4대의 바이올린, 타악기
1977Journal, 4개의 목소리, 합창, 타악기
1977Love Songs, 발레 7명의 성악가
1977Pulau Dewata, 악기 조합 자유
1977Shiraz, 피아노 독주
1977Les Communiantes, 오르간 독주
1977Nanti Malam, 7개의 목소리
1978Paramirabo, 플루트, 바이올린, 첼로, 피아노
1978Greeting Music, 플루트, 오보에, 타악기, 피아노, 첼로
1979코페르니쿠스, 2막 오페라
1979오리온, 오케스트라
1980Aikea, 3명의 타악기 연주자
1980지팡구, 현악 오케스트라
1980외로운 아이, 소프라노, 오케스트라
19805개의 타악기 노래, 타악기 독주
1981부샤라, 소프라노, 실내 앙상블
1981그리고 나는 이 낯선 도시를 다시 볼 것이다, 실내 앙상블
1981A Little Joke, 혼성 4부 합창
1981Prologue pour un Marco Polo, 소프라노, 알토, 테너, 바리톤, 베이스 솔리스트, 앙상블
1981Samarkand, 목관 5중주, 피아노
1981어둠아, 넌 어디에 있니!, 메조 소프라노, 오케스트라, 테이프
1982Trois airs pour un opéra imaginaire, 소프라노, 앙상블
1981–83'Rêves dun Marco Polo'' (미완성), 합창, 내레이터, 실내 앙상블
1983영혼의 불멸을 믿으십니까? (미완성), 합창, 내레이터, 실내 앙상블
1983차이콥스키, 러시아 레퀴엠 (미완성), 오페라


참조

[1] 뉴스 The tragic real-life story of Quebec composer Claude Vivier is mirrored in his music https://www.cbc.ca/r[...] CBC Radio 2022-07-05
[2] 뉴스 From the Edge of Experience, a New Sound https://www.nytimes.[...] The New York Times 2022-07-02
[3] 간행물 Claude Vivier: A Cosmic Seeker's Star Ascends https://operacanada.[...] Opera Canada 2022-07-05
[4] 간행물 Black Magic https://van-magazine[...] VAN Magazine 2022-07-06
[5] 뉴스 Claude Vivier weekend review – unruly and utterly distinctive https://www.theguard[...] The Guardian 2022-06-30
[6] 뉴스 Soul's rebirth https://www.theguard[...] The Guardian 2022-07-06
[7] 간행물 Claude Vivier is the most famous composer you've never heard of https://xtramagazine[...] Xtra Magazine 2022-07-06
[8] 뉴스 All the ghosts of Claude Vivier https://www.lemonde.[...] Le Monde 2022-07-20
[9] 뉴스 Le destin tragique de Claude Vivier https://www.lapresse[...] La Presse 2022-07-20
[10] 간행물 Zipangu and Lonely Child: Two Claude Vivier masterpieces in magnificent performances by the London Sinfonietta https://operatoday.c[...] Opera Today 2022-07-06
[11] 간행물 SCRUTINY | Kopernikus Heralds Opera in the 21st Century https://www.ludwig-v[...] Ludwig Van Toronto 2022-07-20
[12] 뉴스 Why Quebec composer Claude Vivier was ahead of his time https://www.theglobe[...] The Globe and Mail 2022-06-30
[13] 뉴스 Far Out, Far In, Far and Away https://www.nytimes.[...] The New York Times 2022-07-05
[14] 뉴스 Claude Vivier's Transcending Of Tragedy / Slain Canadian composer's 'Siddhartha' exemplifies the nature of his work https://www.sfgate.c[...] The San Francisco Chronicle 2022-07-25
[15] 간행물 The Death and Life of Spectral Music https://van-magazine[...] VAN Magazine 2022-07-20
[16] 뉴스 Claude Vivier ought to be a modern classic. Why isn't he? https://www.spectato[...] The Spectator 2022-07-06
[17] 뉴스 Dudamel conducts Stravinsky's 'Firebird' to opulent heights https://www.latimes.[...] The Los Angeles Times 2022-07-20
[18] 뉴스 M.T.T. Moves On: The Week's 8 Best Classical Music Moments on YouTube https://www.nytimes.[...] The New York Times 2022-07-20
[19] 뉴스 Legendary theatre and opera director Peter Sellars to visit New Zealand https://www.nzherald[...] New Zealand Herald 2022-07-20
[20] 간행물 Claude Vivier nommé compositeur de l'année La Scena Musicale
[21] 뉴스 It was only a matter of time https://www.theglobe[...] The Globe and Mail 2022-08-08
[22] 뉴스 A Canadian Composer's Death-Obsessed Search for Connection https://www.nytimes.[...] The New York Times 2022-07-02
[23] 뉴스 Pascal, 20 ans, avoue le meurtre de trois homosexuels Libération
[24] 서적 My Father and I: The Marais and the Queerness of Community Cornell University Press 2009
[25] 뉴스 C'est Claude Vivier qu'on assassine https://www.radiofra[...] Radio France 2022-07-31
[26] 뉴스 La 'java' meurtrière de Pascal Dolzan https://www.lemonde.[...] Le Monde 2022-07-25
[27] 간행물 Mutinerie: Procès de Tarbes https://docplayer.fr[...] La lettre de cavales 2022-07-31
[28] 웹사이트 Four Things You Need to Know About Claude Vivier https://soundstreams[...] Soundstreams Canada 2022-07-16
[29] 뉴스 Queer Pitch: is there such a thing? https://www.theguard[...] The Guardian 2022-07-20
[30] 뉴스 Christopher Coe, 41; Wrote Gay Novels https://www.nytimes.[...] The New York Times 2022-08-03
[31] 뉴스 Orchestra heads underground for new fans at abandoned Tube station https://metro.co.uk/[...] Metro 2022-08-02
[32] 뉴스 Late composer Claude Vivier goes underground https://www.thetimes[...] The Times 2022-07-25
[33] 간행물 New Chamber Opera: 'Vivier: A Night Report' by Marko Nikodijevic https://www.sikorski[...] Sikorski 2022-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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