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오도라 (11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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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테오도라는 11세기에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누스 8세의 딸로, 포르피로게니타 칭호를 받았다. 언니 조에에게 밀려 결혼에 실패하고, 감금과 음모에 연루되어 수도원에서 은둔 생활을 했다. 조에와 공동 황제로 즉위하여 통치했으나 콘스탄티누스 9세와 결혼한 조에에게 권력을 빼앗겼다. 조에 사후 단독 황제가 되었지만, 노령으로 인해 후계자 지명 없이 사망하면서 마케도니아 왕조가 끝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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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오도라 (11세기)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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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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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위 | 로마인의 여제 및 전제자 |
칭호 | 테오도라 포르피로게니타 |
로마자 표기 | Theodōra Porphyrogénnētē |
통치 기간 | |
첫 번째 통치 | 1042년 4월 21일 – 1042년 6월 11일 |
두 번째 통치 | 1055년 1월 11일 – 1056년 8월 31일 |
공동 통치 | 조에 (공동 군주) |
섭정 | 콘스탄티누스 9세 (1042–1055) |
생애 | |
출생 | 980년경 |
출생지 | 콘스탄티노폴리스 |
사망일 | 1056년 8월 31일 (76세) |
사망지 | 콘스탄티노폴리스 |
매장지 | 성 사도 교회, 콘스탄티노폴리스 |
가문 | |
왕조 | 마케도니아 |
아버지 | 콘스탄티누스 8세 |
어머니 | 헬레나 |
계승 정보 | |
첫 번째 통치 - 전임 | 미카엘 5세 |
첫 번째 통치 - 후임 | 콘스탄티누스 9세 |
두 번째 통치 - 전임 | 콘스탄티누스 9세 |
두 번째 통치 - 후임 | 미카엘 6세 |
기타 | |
양자 | 미카엘 6세 스트라티오티코스 |
2. 생애
테오도라는 콘스탄티누스 8세와 헬레나의 딸로, 아버지 콘스탄티누스 8세가 단독 황제가 된 후 3년이 채 되지 않아 사망하면서 황제의 자리는 로마누스 3세에게 넘어갔다. 로마누스 3세는 테오도라의 언니인 조에와 결혼했다.
로마누스 3세 즉위 후, 테오도라는 기네카이움에서 생활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프레시안과 공모했다는 혐의를 받았고, 1031년에는 콘스탄티누스 디오게네스와 유사한 음모에 연루되어 페트리온 수도원에 감금되었다.[7] 이후 11년 동안 수도원에 머물렀고, 조에는 남편 로마누스 3세, 미하일 4세와 함께 제국을 통치했다.[8]
1041년 미하일 4세 사망 후 미카엘 5세가 즉위했지만, 민중 봉기로 인해 1042년 4월 19일 테오도라는 조에와 함께 공동 황제로 추대되었다.[7] 테오도라는 미카엘 5세를 처리하고, 자매는 함께 제국을 다스렸다.[7] 그러나 조에는 테오도라의 영향력을 견제하기 위해 콘스탄티누스 9세와 결혼했고, 제국의 통치는 콘스탄티누스 9세에게 넘어갔다.[7]
1050년 조에가 사망하고 1055년 콘스탄티누스 9세가 사망하자, 테오도라는 단독으로 통치하게 되었다.[7][10][11] 테오도라는 귀족들을 통제하고 악행을 저지르기도 했지만, 레오 파라스폰딜로스 등을 고문하여 명성에 흠집을 내기도 했다.[7] 1056년 8월, 테오도라는 병에 걸렸고, 미하일 6세를 후계자로 지명한 후 사망했다.[7]
2. 1. 초기 생애
테오도라는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누스 8세와 헬레나의 셋째이자 막내딸이었다.[4] 그녀는 "자색 옷에서 태어난" 아이를 뜻하는 ''포르피로게니타''였다.[5] 962년, 그녀의 아버지는 공동 황제가 되었고, 1025년 그의 형제 바실리우스 2세가 사망한 후 단독 황제가 되었다. 그의 단독 황제 통치는 1028년 11월 12일까지 3년이 채 되지 않았다.
결혼 적령기의 황족 공주였던 테오도라는 996년 서방의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인 오토 3세의 신붓감으로 고려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언니 조에에게 밀렸고, 오토 3세는 결혼하기 전에 사망했다. 바실리우스 2세는 조카딸들이 비잔티움 귀족과 결혼하면 그 남편에게 황제 자리에 대한 권리가 주어질 것이라고 판단하여 이를 막았다. 테오도라와 조에는 여성으로서 국가 권력을 행사할 수 없었고, 이 문제에 대한 그들의 유일한 발언권은 결혼을 통해 권력을 얻을 남편을 선택하거나 수락 또는 거부하는 것이었다.[6] 결과적으로 테오도라는 제국의 ''기네카이움''(여성 구역)에서 사실상 은둔 생활을 했다.
총명하고 강하며 엄격한 성격을 지닌 테오도라는 당시 단독 황제였던 콘스탄티누스에게 반항하여, 로마누스 아르기로스와의 결혼을 거부했다. 그녀는 로마누스가 이미 결혼한 상태였고, 그의 아내는 로마누스가 황실과 결혼할 수 있도록 수녀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7] 또한 테오도라는 로마누스와 3촌 관계이므로 결혼하기에는 혈연 관계가 너무 가깝다고 주장했다. 결국 콘스탄티누스 8세는 테오도라 대신 언니 조에를 선택했고, 조에는 아버지 사망 3일 전에 로마누스와 결혼했다.
로마누스가 즉위하자 테오도라는 ''기네카이움''으로 물러나 매일 종교 의식을 치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에는 남편에게 자신의 사람 중 한 명을 테오도라 가문의 수장으로 임명하여 그녀를 감시하도록 했다.[2] 얼마 지나지 않아 테오도라는 불가리아의 왕자 프레시안과 결혼하여 왕위를 찬탈하려는 음모를 꾸몄다는 혐의를 받았다. 프레시안은 눈이 멀게 되어 수도원으로 보내졌지만, 테오도라는 처벌받지 않았다. 1031년, 테오도라는 시르미움의 아르콘인 콘스탄티누스 디오게네스와 비슷한 음모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를 받았다. 테오도라는 페트리온 수도원에 강제로 감금되었고, 조에는 방문하는 동안 여동생에게 "수도사의 복장을 하도록" 강요했다.[7] 테오도라는 그 후 11년 동안 그곳에 머물렀고, 조에는 남편 로마누스 3세와 그가 죽은 후 미하일 4세와 함께 제국을 통치했다.[8]
2. 2. 조에와의 공동 통치
미카엘 4세가 1041년 12월에 사망하자 조에는 미카엘의 조카를 미카엘 5세로 즉위시켰다.[7] 그는 조에를 존중하겠다고 약속했지만, 반역 혐의로 조에를 프린스 제도의 수도원으로 추방했다. 마케도니아 왕조의 적법한 후계자를 이처럼 대하자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민중 봉기가 일어났고, 1042년 4월 19일, 사람들은 조에뿐만 아니라 테오도라를 지지하며 미카엘 5세에 대항하여 봉기했다. 미카엘 5세는 왕위를 지키기 위해 조에를 프린스 제도에서 데려와 공개했지만 민중은 이를 거부했다.[7]궁정의 주요 인물들은 조에에게 공동 통치자가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테오도라여야 한다는 민중의 요구를 지지했다. 귀족 콘스탄티누스 카바실라스가 이끄는 대표단이 테오도라를 설득하기 위해 페트리온 수도원으로 갔다.[7] 테오도라는 거부하고 수도원 예배당으로 도망쳤지만, 콘스탄티누스와 그의 수행원들은 그녀를 강제로 끌어내 황제의 옷으로 갈아입혔다. 하기아 소피아에서 열린 회의에서 사람들은 테오도라를 조에와 함께 황제로 선포했다. 그들은 4월 21일 새벽에 함께 즉위했다. 의식 후 군중들은 궁전을 습격했고, 미카엘 5세는 수도원으로 도망가야 했다.
조에는 즉시 권력을 장악하고 테오도라를 수도원으로 돌려보내려 했지만, 원로원과 민중은 두 자매가 공동으로 통치해야 한다고 요구했다.[7] 테오도라는 미카엘 5세를 처리하라는 요청을 받았다. 조에는 미카엘을 사면하고 석방하고 싶어했지만, 테오도라는 그에게 눈을 멀게 하고 평생 수도사로 보내도록 명령했다. 공식적으로 테오도라는 어린 황제였으며, 모든 공개 행사에서 그녀의 왕좌는 조에의 뒤에 약간 놓였다. 실제로는 그녀가 공동 행정의 원동력이었다. 자매들은 공직 매매를 억제하고 정의를 실현하는 데 집중하며 제국을 다스렸다.[7] 미하일 프셀로스는 공동 통치가 완전한 실패였다고 주장했지만, 요한 스킬리체스는 그들이 이전 통치의 폐단을 양심적으로 바로잡았다고 말했다.
테오도라와 조에는 원로원 회의나 대중 연설에 함께 참석했지만, 그들의 공동 통치가 상당한 압박을 받고 있다는 것이 곧 분명해졌다. 테오도라에 대한 질투심을 버리지 못한 조에는 제국을 통치하고 싶어하지 않았지만, 테오도라가 혼자 공무를 수행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궁정에서는 각 황제 뒤에 파벌이 형성되었다. 2개월 동안 갈등이 일어난 후, 조에는 새로운 남편을 찾아 테오도라의 영향력을 제거하기로 결정했다.[7] 그녀는 결국 1042년 6월 11일에 콘스탄티누스 9세와 결혼했고, 제국의 관리는 그에게 돌아갔다. 테오도라와 조에는 계속 황제로 인정받았고, 테오도라는 모든 공식 행사에 계속 참석했지만, 권력은 형부에게 귀속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테오도라는 궁정에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환관 요한을 체포하고 눈을 멀게 하도록 명령했다.[7]
콘스탄티누스 9세가 통치 초기에 정부를 특별 대우한 것은 그가 테오도라와 조에를 살해할 계획이라는 소문을 불러일으켰다. 이로 인해 1044년 콘스탄티노폴리스 시민들의 민중 봉기가 일어났고, 콘스탄티누스가 해를 입을 뻔했다.[9] 군중은 조에와 테오도라가 발코니에 나타나 암살의 위험이 없다고 안심시키자 비로소 잠잠해졌다.[7]
2. 3. 단독 통치
1050년 조에가 사망한 후, 테오도라는 수도원으로 은퇴한 것으로 보이며, 1055년 1월 11일 콘스탄티누스 9세가 사망할 때까지 단독으로 통치하도록 내버려 두었다.[7] 콘스탄티누스가 죽어가자, 고문들은 테오도라 대신 비잔틴 불가리아 테마의 ''두크'' (공작)인 니케포로스 프로테우온에게 왕위를 넘겨주도록 설득했다.[7] 그러나 테오도라는 노령에도 불구하고 통치할 권리를 강력하게 주장하면서 그들의 계획을 무산시켰다. 그녀는 은퇴에서 벗어나 원로원을 소집했고, 황실 근위병은 콘스탄티누스 사망 직전에 그녀를 "황제"로 선포했다.[10][11]이후 고위 관료와 유럽 군 부대의 지도자들을 숙청하는 일이 뒤따랐다. 니케포로스 프로테우온은 테살로니카에서 체포되어 강제로 머리를 깎였다. 서부 ''타그마''가 황제로 선포하려 했던 니케포로스 브리엔니오스는 테오도라의 명령으로 해임 및 추방되었고, 그 후 그녀는 그의 재산을 몰수하고 그의 지지자들을 궁정에서 추방했다.[7]
테오도라는 귀족들을 통제하고 수많은 악행을 저질렀다. 그러나 그녀는 사적인 적들에게 과도한 가혹함을 보였고 레오 파라스폰딜로스와 같은 부하들을 부적절하게 고문하여 명성에 흠집을 냈다.[7] 군대 및 궁정 직위는 그녀의 가신인 내시들이 채웠고, 이삭 콤네노스와 같은 유능한 지휘관들은 사소한 관리들로 교체되었다.[7] 가능한 한 많은 권력을 자신의 손에 집중시키기로 결심한 그녀는 원로원에서 직접 주재했으며 민사 소송에서 최고 재판관으로서 항소를 심리했다. 그녀가 성직자들을 임명한 것은 여성 대신 남성이 해야 한다고 여긴 총대주교 미카엘 케룰라리오스의 반감을 샀다.
테오도라의 단독 통치 기간 동안, 그녀의 동전과 봉인에는 '테오도라, δέσποινα (데스포이나) and 포르피로게니타' 및 '테오도라, 아우구스타 and 포르피로게니타'라는 비문이 새겨져 있다.[12]
테오도라가 76세가 되자, 총대주교 미카엘 케룰라리오스는 테오도라가 후계자를 확보하기 위해 그녀와 결혼하여 왕위를 계승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녀는 어떤 형식으로든 결혼을 고려하는 것을 거부했다. 그녀는 또한 왕위 계승자를 지명하는 것을 거부했다. 테오도라는 1056년 8월 말에 장 질환으로 심하게 병들었다. 8월 31일 그녀의 고문들은 레오 파라스폰딜로스를 의장으로 하여 그녀에게 후계자로 누구를 추천할지 결정하기 위해 만났다. 프셀루스에 따르면, 그들은 늙은 공무원이자 전 군사 재무부 장관인 미하일 브링가스를 선택했는데, 그의 주요 매력은 "그는 통치하기보다는 다른 사람들의 지시에 따라 통치하는 데 적합했다"는 점이었다. 테오도라는 말을 할 수 없었지만, 파라스폰딜로스는 그녀가 적절한 순간에 고개를 끄덕였다고 결정했다. 이 소식을 들은 총대주교는 이를 믿지 않으려 했다. 결국 그는 설득되었고 브링가스는 미하일 6세로 즉위했다. 테오도라는 몇 시간 후에 사망했고, 그녀의 죽음과 함께 마케도니아 왕조의 189년 통치가 끝났다.[7]
참조
[1]
서적
Catalogue of the Imperial Byzantine Coins in the British Museum
https://books.google[...]
Рипол Классик
1908
[2]
서적
Satire in the Middle Byzantine Period: The Golden Age of Laughter?
https://books.google[...]
Brill
2020
[3]
서적
Daily Life of Women: An Encyclopedia from Ancient Times to the Present ''[3 volumes]''
https://books.google[...]
ABC-CLIO
2020
[4]
문서
Kazhdan
[5]
문서
Norwich
[6]
문서
Garland, Zoe Porphyrogenita
[7]
문서
Finlay
[8]
문서
Norwich 276, 279
[9]
문서
Finlay, pg. 503
[10]
문서
Garland (1999), pp. 165–66
[11]
문서
Treadgold (1997)
[12]
서적
Blood Royal: Dynastic Politics in Medieval Europe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20-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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