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나 콤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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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안나 콤니니는 1083년 비잔티움 황제 알렉시오스 1세 콤네누스와 이레네 두카이나 사이에서 태어난 황녀이다.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태어나 황실의 지위를 나타내는 '포르피로게니토스'로 불렸으며, 문학, 그리스어, 수사학, 과학 등 다양한 분야를 교육받았다. 1097년경 니케포로스 브리엔니오스와 결혼했으나, 동생 요한 2세가 황위를 계승한 후 쿠데타를 시도하다 실패하여 수도원에 은거했다. 그녀는 아버지 알렉시오스 1세의 치세를 다룬 역사서 《알렉시아드》를 저술하여 비잔티움 제국과 제1차 십자군에 대한 기록을 남겼으며, 여성 역사가로서 평가받는다. 안나 콤니니는 여러 소설, 게임, 만화 등 다양한 작품에서 다루어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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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콤니니 | |
---|---|
기본 정보 | |
이름 | 안나 콤니니 |
로마자 표기 | Anna Komnēnḗ |
출생일 | 1083년 12월 1일 |
출생지 | 동로마 제국 콘스탄티노폴리스 포르피라 방 (현재의 터키 이스탄불) |
사망일 | 1153년 |
사망지 | 동로마 제국 콘스탄티노폴리스 케카리토메네 수도원 (현재의 터키 이스탄불) |
매장지 | 케카리토메네 수도원 |
가문 | |
가문 | 콤니노스 왕조 |
아버지 | 알렉시오스 1세 콤니노스 |
어머니 | 에이레네 두카이나 |
배우자 | |
배우자 | 콘스탄티노스 두카스 니케포로스 브리엔니오스 |
자녀 | |
자녀 | 알렉시오스 콤니노스, 메가스 둑스 요한네스 두카스 이리니 두카이나 마리아 브리엔니나 콤니네 콘스탄티노스 (성씨 불명) 안드로니코스 (성씨 불명) |
칭호 | |
칭호 | 카이사릿사 (케사릿사) (카이사르 부인) |
종교 | |
종교 | 정교회 |
역사 | |
주요 활동 | 동로마 제국의 역사가 |
기타 |
2. 생애
알렉시오스 1세와 이레네 두카이나의 딸인 안나는 1083년 콘스탄티노폴리스 황궁의 자주색 방에서 태어나 황족의 지위를 나타내는 ''포르피로게니토스'' 칭호를 받았다.[10] 어릴 적 미하일 7세 두카스의 아들 콘스탄티누스 두카스와 약혼했으나,[2] 콘스탄티누스가 1094년경 사망하면서 약혼은 파기되었다.[6]
안나는 알렉시아드에서 자신의 교육에 대해 언급하며, 문학, 그리스어, 수사학, 과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뛰어난 교육을 받았음을 강조했다.[11] 그녀는 천문학, 의학, 역사, 군사, 지리, 수학 등 다방면에 걸쳐 학문을 익혔다. 중세 학자 니케타스 코니아테스는 안나를 "모든 과학의 여왕인 철학에 열정적으로 헌신했고 모든 분야에서 교육받았다"고 평가했다.[18][19]
1097년, 안나는 니케포로스 브리엔니오스와 결혼했다.[6] 이 결혼은 안나의 아버지 알렉시오스 1세의 정통성을 강화하기 위한 정략결혼이었다.[23] 두 사람 사이에는 여러 자녀가 있었으나, 이레네, 요한, 알렉시오스만이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았다.[25]
1118년 알렉시오스 1세가 사망하고 요한 2세가 즉위하자, 안나는 자신이 황위를 상속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여 남편을 황제로 옹립하려는 음모를 꾸몄다.[28][29] 그러나 남편의 소극적인 태도로 인해 음모는 실패로 돌아갔고,[30] 안나는 재산을 몰수당했다. 이후 안나는 케카리토메네 수도원에 들어가[33] 철학과 역사 공부에 전념하며 여생을 보냈다.
2. 1. 어린 시절
안나는 1083년 12월 1일 알렉시오스 1세 콤네누스와 이레네 두카이나 사이에서 장녀로 태어났다.[5] 콘스탄티노폴리스 황궁의 자주색 방(Porphyra Chamber)에서 태어나 황실의 지위를 나타내는 ''포르피로게니토스''[10] 칭호를 받았다.출생 직후 안나는 미하일 7세 두카스와 알라니아의 마리아의 아들인 콘스탄티누스 두카스와 약혼했다.[2] 이 약혼은 안나의 아버지 알렉시오스 1세의 황제 즉위 정통성을 확립하기 위한 정략 결혼이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15] 1090년경부터 안나는 콘스탄티누스의 어머니 알라니아의 마리아의 집에서 자랐는데,[16] 비잔티움 제국에서는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키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17] 그러나 1094년경 콘스탄티누스가 사망하면서 약혼은 파기되었다.
안나는 어머니 이레네 두카이나, 시어머니가 될 예정이었던 알라니아의 마리아, 할머니 안나 달라세네 등 여성 가족 구성원들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으며 성장했다.
2. 2. 교육
안나 콤니니는 알렉시아드(서두)에서 자신의 교육에 대해 기술하며 문학, 그리스어, 수사학, 과학 분야에서의 경험을 강조했다.[11] 가정교사들은 그녀에게 천문학, 의학, 역사, 군사, 지리, 수학 등을 가르쳤다. 중세 학자 니케타스 코니아테스는 안나가 "모든 과학의 여왕인 철학에 열정적으로 헌신했고 모든 분야에서 교육받았다"고 기록하며 그녀의 교육 수준을 높이 평가했다.[18][19] 안나 자신의 교육에 대한 인식은 유언장에서 드러나는데, 그녀는 부모가 교육을 받도록 허락해 준 것에 감사를 표했다.[20]안나는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았고, 종교 서적 외에도 호메로스, 헤로도토스, 아리스토파네스 등의 그리스 고전 문학을 즐겨 읽었으며, 신화, 지리학, 수사학, 변증학,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대한 깊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안나는 알렉시아드의 서문에서 자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 진홍색 분만실에서 태어나 자라면서, 읽고 쓰는 것은 물론 완벽한 그리스어를 쓸 수 있도록 노력했고, 수사학을 소홀히 하지 않았으며, 아리스토텔레스의 여러 학문과 플라톤의 대화편을 정독하고, 학문의 4과(四科)(천문학, 기하학, 산술, 음악)로 지성을 연마했다.[47]
이는 안나의 동시대 인물인 게오르기오스 토르니케스(Georgios Tornikes)가 행한 안나의 장례 연설과 대조적이다. 그의 연설에 따르면 안나가 오디세이아와 같은 고대 시가를 부모의 반대로 비밀리에 읽어야 했다. 이러한 내용은 남성에게는 "위험한" 것으로, 여성에게는 "지나치게 교활한" 것으로 여겨졌다. 토르니케스는 안나가 "정신의 약함을 극복하고" 부모에게 들키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시를 공부했다고 덧붙였다.[21]
2. 3. 결혼
1097년, 안나는 명문 군사 귀족 가문 출신이자 역사학자인 니케포로스 브리엔니오스(Nikephoros Bryennios the Younger)와 결혼했다.[6][2] 이 결혼은 알렉시오스 1세가 과거 자신에게 반기를 들었던 브리엔니오스 가문을 포섭하여 정권 안정을 도모하기 위한 정략결혼이었다.[23]안나와 니케포로스 브리엔니오스 사이에는 4명의 자녀가 있었다.
이름 | 비고 |
---|---|
알렉시오스 콤네노스(Αλέξιος Κομνηνός) | |
요하네스 두카스(Ιωάννης Δούκας) | |
에이레네 두카이나(Ειρήνη Δούκαινα) | 모계 조모의 이름을 따름 |
마리아 (성씨 불명) | 요절 |
그리스에서는 장남에게 외조부의 이름, 차남에게 모계 조부의 이름, 장녀에게 외할머니의 이름을 붙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48] 그러나 안나의 장남 알렉시오스는 아버지 알렉시오스 1세가 아닌 모계 조부의 이름을 따랐고, 차남 요하네스도 니케포로스 브리엔니오스의 아버지 이름을 따랐다. 또한 안나의 자녀들은 부계 성씨인 브리엔니오스(Βρυέννιοι) 대신 모계 황실의 성씨인 콤네노스(Κομνηνοί) 또는 모계 조모의 성씨인 두카스(Δούκαι)를 사용했다.
콘스탄티노스(Κωνσταντίνος), 안드로니코스(Ανδρόνικος)라는 두 자녀가 더 있었으나, 이들과 마리아는 어릴 때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2. 4. 요한네스 2세 즉위와 쿠데타 시도
1118년, 아버지 알렉시오스 1세가 사망하면서 동생 요한 2세가 황제로 즉위했다.[27] 안나는 자신이 황위를 "상속받았어야 했다"고 생각하며 불만을 품었다.[28][29] 안나는 어머니 이레네와 함께 남편 니케포로스 브리엔니오스를 황제로 옹립하려 했으나, 니케포로스의 소극적인 태도로 실패했다.[30]1119년 봄, 안나는 콘스탄티노폴리스 교외 별궁에 머물던 요한 2세를 암살하려는 쿠데타를 계획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니케포로스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아 실패로 돌아갔다. 쿠데타 실패 후, 안나는 체포되어 재산을 몰수당했다.
2. 5. 만년과 죽음
안나는 쿠데타 실패 후 체포되어 재산을 몰수당했지만, 동생 요안니스 2세와 화해하고 재산을 돌려받은 뒤 어머니 에이레네가 세운 수도원에 은거했다.[1] 남편과 아들들은 요안니스 2세를 섬기는 것이 허락되었다.[2] 요안니스 2세의 관대한 처우 덕분에 그는 "칼로요안니스(선량한 요안니스, 착한 요안니스)"라고 불리게 되었다.[3]수도원에 은거한 안나는 철학, 신학, 의학, 문학(시, 비극, 웅변술), 점성술 등 다양한 학문을 연구했다.[4] 1136년, 남편 니케포로스가 사망하자,[5] 안나는 남편이 쓰던 알렉시오스 1세 치세에 대한 역사서(『역사』)를 이어받아 《알렉시아스》( Ἀλεξιάςel)를 완성했다.[6]
《알렉시아드》를 완성한 후, 안나는 케칼리토메네 수도원에서 사망했다. 사망 연도는 1148년에서 1155년 사이로 추정되지만, 정확한 사망 연도와 사망 원인은 알려져 있지 않다.[7] 사후, 은둔지였던 케칼리토메네 수도원에 매장되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수도원의 정확한 위치는 확인되지 않았다.[8]
3. 알렉시아드
안나는 1140년대 중반이나 1150년대에 《알렉시아드》를 저술했다.[24] 안나는 자신의 남편 니케포로스 브리엔니오스 2세의 미완성 작품을 《알렉시아드》를 시작한 이유로 언급했다.[35] 1137년 사망하기 전, 니케포로스 브리엔니오스 2세는 알렉시오스 1세의 통치 전후의 사건을 기록하려는 역사서를 집필 중이었다.[35] 그의 사망으로 니케포로스 보타네아테스 황제의 통치 사건 기록 이후 역사서는 미완성으로 남았다.[35]
안나는 《알렉시아드》의 자료 수집 방법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었다. "내 자료는… 문학적 허세가 전혀 없는 하찮은 글들과, 나의 아버지가 로마의 홀을 장악했을 당시 군대에서 복무했던 노병들로부터 수집되었다…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검토하고 내가 쓴 것과 비교하고, 그들이 나에게 한 말과 특히 나의 아버지와 삼촌들로부터 자주 들었던 말들을 비교함으로써 나의 역사의 진실을 그들에 근거하였다… 이 모든 자료들로부터 나의 역사 – 나의 진실된 역사 – 의 전체 구조가 짜여졌다."[36] 학자들은 안나가 노병이나 남성 가족 구성원들의 목격자 진술 외에도, 공식 문서에 접근할 수 있게 해준 황실 기록 보관소를 사용했다는 점을 지적했다.[37]
《알렉시아드》에서 안나는 알렉시오스 1세와 서방 사이의 정치 관계와 전쟁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했다. 그녀는 무기, 전술 및 전투를 생생하게 묘사했다. 그녀가 어린 시절에 일어난 사건에 대해 쓰고 있었기 때문에 이것들은 직접 목격한 기록이 아니라는 점이 지적되었다. 그녀가 아버지를 칭찬하고 그의 후계자들을 비방하기 위해 글을 썼다는 사실 때문에 그녀의 중립성은 훼손된다. 그녀의 노골적인 편향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제1차 십자군에 대한 기록은 유일하게 이용 가능한 비잔티움 제국의 목격자 기록이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그녀는 비잔티움 엘리트의 주요 인물들로부터 정보를 수집할 기회를 가졌다. 그녀의 남편 니케포로스 브리엔니오스는 1097년 성목요일 콘스탄티노폴리스 밖에서 십자군 지도자인 고드프루아 드 부용과의 충돌에서 싸웠고, 그녀의 삼촌인 게오르기오스 팔라이올로고스는 1097년 6월 펠레카논에서 알렉시오스 1세가 십자군과 미래 전략을 논의할 때 참석했다. 따라서 《알렉시아드》는 제1차 십자군의 사건을 비잔티움 엘리트의 관점에서 볼 수 있게 해준다. 그것은 제국을 통과하는 서유럽 세력의 규모에 대한 우려와 그들이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안전에 미칠 수 있는 위험을 전달한다.
안나는 십자군을 "켈트족"이라고 언급했는데, 이는 서방 야만인을 지칭하는 고대 그리스 용어를 반영한다.[38]
《알렉시아드》는 아티카 방언으로 쓰여졌고,[39] 문체는 투키디데스, 폴리비오스, 크세노폰을 본떴다. 그 결과, 당시 특징적인 아티시즘을 위한 투쟁을 보여주며, 언어는 매우 인위적이다. 안나 자신도 이러한 오류를 기억 상실과 노령화의 결과로 설명하며 언급했다.[40]
또한 《알렉시아드》는 아버지, 어머니, 남편의 죽음을 포함한 안나의 감정적 혼란을 보여준다. 《알렉시아드》의 끝에서 안나는 "그러나 나는 살아 있으면서 천 번의 죽음을 맞았다… 그러나 나는 [니오베]보다 더 슬픔에 잠겨 있다. 나의 불행은 크고 끔찍하지만, 나는 여전히 살아 있다 – 더 많은 것을 경험하기 위해… 그러므로 나의 역사는 여기서 끝맺자. 내가 이러한 슬픈 사건을 쓰면서 더욱 분노하게 될까 봐 두렵다."라고 썼다.[42]
1136년, 남편 니케포로스는 요하네스 2세의 시리아 원정에 참여했으나 건강을 악화시켜 수도로 돌아와 그대로 사망했다. 안나는 그 전까지 역사학과는 별다른 인연이 없었지만 남편이 남긴 『역사』를 이어받아 체험자들에게 직접 이야기를 듣고 궁정 문서를 열람하는 등 (수도원 외출이 허락되었고, 황제의 친족이었기 때문에 궁궐 출입도 가능했다) 취재를 거듭하여, 『알렉시아스 (알렉시오스 1세 전)』(Ἀλεξιάς|알렉시아스el)로 완성하여 세계사에서도 몇 안 되는 여성 역사가가 되었다.
4. 평가
안나 콤니니는 비잔티움 제국의 황녀이자 뛰어난 지성을 가진 여성 역사가로 평가받는다. 중세 시대에 여성이 역사서를 저술한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으며, 안나는 여성으로서 학문적 성취를 이루고 역사 기록에 참여한 선구적인 인물로 여겨진다.[34]
안나는 철학, 문학, 문법, 신학, 천문학, 의학 등 다방면에 정통했으며, 당대 사람들은 그녀를 "세속적이고 신성한 지혜의 최고봉에 오른" 사람으로 평가했다.[34]
그러나 안나의 《알렉시아드》는 아버지 알렉시오스 1세를 지나치게 미화하고, 동생 요한네스 2세에 대한 개인적인 반감을 드러내는 등 편향성이 있다는 비판도 받는다.[36] 그녀의 중립성은 훼손되었다는 평가를 받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렉시아드》는 제1차 십자군에 대한 유일한 비잔티움 제국 측 기록으로서 역사적 가치가 매우 높다.[36]
《알렉시아드》는 아티시즘 경향을 보여주는 인위적인 문체로 쓰여졌으며, 사건 연대기에 일부 오류가 존재한다.[39] 피터 프랑코판은 이러한 오류가 자료의 부족이나 오류 때문일 수 있다고 주장하며, 안나 자신도 기억 상실과 노령화를 언급했다.[40]
5. 안나 콤네나를 다룬 작품
- 월터 스콧의 1832년 소설 『파리의 로베르트 백작』에서 조역으로 등장한다.[43]
- 해리 터틀도브의 비데소스 시리즈 소설(1987년~2005년)에서는 알리피아 가브라라는 안나 콤네나를 모델로 한 허구의 인물이 등장한다.[43]
- 2006년 게임 『미디블 II: 토탈 워』에 안나 콤네누스라는 이름으로 비잔티움 공주로 등장한다.[43]
- 낸 호손의 1101년 십자군 소설 『사랑하는 순례자』(2011년)에서 조연으로 등장한다.[43]
- 보드 게임 『네이션스』(2013년)에서 안나 콤니니는 중세 시대의 고문이다.[43]
5. 1. 소설
- 트레이시 배럿의 1999년 소설 ''비취색 황녀 안나''의 주인공이다.[43]
- 조피아 코삭-슈추츠카가 1935년에 쓴 3부작 『십자군』 첫 번째 권에 등장한다.
- 월터 스콧의 1832년 소설 『파리의 로베르트 백작』에서 조역으로 나온다.
- 베라 무타프치에바가 1991년에 쓴 소설 『나, 안나 콤니나』가 있다.[43]
-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2004년 추리소설 『비잔티움의 살인』에서 안나 콤니나는 악당의 학문적이고 연애적인 과거 환상의 중심 인물이다.
- 벤 블루시가 2008년에 쓴 소설 『섬에서 살아가기』에서 언급된다.
- 사토 후타바의 역사 만화 『안나 콤네나』(2021년 연재 중)의 주인공이다.[44]
5. 2. 기타
- 월터 스콧의 1832년 소설 《파리의 로베르트 백작》에서 조역으로 등장한다.[43]
- 1999년 트레이시 배럿의 청소년 소설 《비잔티움의 안나》의 주인공이다.[43]
- 조피아 코삭-슈추츠카가 1935년에 쓴 3부작 《십자군》의 첫 번째 권에서 중요한 인물로 등장한다.[43]
- 해리 터틀도브의 비데소스 시리즈 소설(1987-2005)에서는 알리피아 가브라라는 안나 콤니니를 모델로 한 허구의 인물이 등장한다.[43]
- 1991년 소설 《나, 안나 콤니나》는 불가리아 작가이자 역사가인 베라 무타프치에바가 썼다.[43]
-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2004년 추리소설 《비잔티움의 살인》에서 안나 콤니니는 악당의 학문적이고 연애적인 과거 환상의 중심 인물이다. 이 소설에는 안나 콤니니의 삶, 작품, 역사적 맥락에 대한 상당한 세부 사항이 포함되어 있다.[43]
- 2006년 게임 《미디블 II: 토탈 워》에 안나 콤네누스라는 이름으로 비잔티움 공주로 등장한다.[43]
- 2008년 알바니아 작가 벤 블루시가 쓴 소설 《섬에서 살아가기》에서 언급된다.[43]
- 낸 호손의 1101년 십자군 소설 《사랑하는 순례자》(2011)에서 조연으로 등장한다.[43]
- 보드 게임 《네이션스》(2013)에서 안나 콤니니는 중세 시대의 고문이다.[43]
- 사토 후타바의 역사 만화 《안나 콤네나》(2021)의 주인공이다.[44]
- 트레이시 배럿의 《비취색 황녀 안나》(2001)는 안나 콤니니의 일생을 그린 역사 소설이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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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ing the Early Crusades: Text, Transmission and Mem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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Вера Мутафчиева - Официален уебсайт
http://veramutafch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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ビザンツ皇女で女性歴史家、アンナ・コムネナの少女時代を描く4コマが単行本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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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1일としている史料もあるが『アレクシアス』ではエイレーネー皇后が産気づいた1日にアレクシオス1世が遠征から凱旋し、「夜明けに女の子が生まれた」と記されているので、皇帝が帰還した1日から明けた2日の早朝に生まれたとするのが妥当と考えられる。12世紀のビザンツ人のが残したメモにも「12月2日、土曜日、九刻、インディクティオ7年に『緋色の生まれ』のアンナ殿が生まれた」と書かれている(井上浩一『歴史学の慰め アンナ・コムネナの生涯と作品』P18)
[46]
문서
「ポルフュラ(Πορφύρα, Porphyra)」という緋紫色(皇帝を象徴する色とされる)の壁に覆われた皇后専用の産室で、ここで生まれた皇子・皇女は皇帝の嫡出子であることを示す「緋色の産室生まれ(ポルフュロゲネトス en|Porphyrogennetos|el|Πορφυρογέννητος Πορφυρογέννητος)」と呼ばれ、特別扱いされた(井上浩一『歴史学の慰め アンナ・コムネナの生涯と作品』P13)
[47]
문서
一方で弟のヨハネスの誕生時については「浅黒い肌」「黒い瞳は、生まれてきた男児の身体から判断する限り、その奥にある激しい気質を示していた」と容姿や性格に対して否定的ともとれる描写をしており、周囲の反応も自らの誕生時はあらゆる人々から喜ばれたと書いたのに対して、ヨハネスの時はお追従で喜んでる者もいたかのような描き方をしており、ヨハネスの誕生に対しては悪意が読み取れるとされる(井上浩一『歴史学の慰め アンナ・コムネナの生涯と作品』P42-45)
[48]
문서
現代ギリシャにおいてもこの命名法が使用されており、例えば2020年現在のギリシャの首相ギリシャ共和国首相キリアコス・ミツォタキスの父方の祖父の名は「キリアコス」(Κυριάκος Κ. Μητσοτάκης)であ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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