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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곤 (순녕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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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토곤은 15세기 몽골 오이라트의 지도자이다. 몽골과 명나라의 기록에 따라 출생 배경이 다르게 나타나며, 오이라트 지도자 마흐무드의 아들로, 어릴 적 이름은 바쿰이었다. 아르크타이와의 대립에서 승리하고, 토크토아 부카를 옹립하여 몽골 통일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1439년에서 1440년 사이에 사망했으며, 그의 아들 에센이 뒤를 이어 타이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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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곤 (순녕왕)

2. 생애

《몽골원류》에 따르면, 토곤은 오이라트의 지도자 바트라(마흐무드)와 엘베크 칸의 딸 삼르 공주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적 이름은 '''바쿰'''이었다.[1] 바트라는 케레누트의 오게치 하시하에게 살해당했지만, 오게치 하시하는 천벌을 받아 죽었다. 이후 오게치 하시하의 아들 에세크가 오이라다이 칸을 옹립하고 삼르 공주를 아내로 삼아 바쿰도 데려갔다. 이때 삼르 공주는 오게치 하시하에게 학대받은 것을 원망하여 훗날의 아다이 칸, 알크타이 태사를 도망치게 했는데, 바쿰은 오이라트의 원수인 몽골을 이롭게 하는 행위를 꾸짖었다.

이후 아다이가 칸에 즉위하자 오이라트를 공격했고, 바쿰은 포로가 되었지만 냄비를 씌워 시중들게 하여 '''토곤'''이라는 이름을 지었다.[2] 토곤은 아다이 칸 아래에서 알크타이나 몽골진 부의 몽케베이와 같은 인물들의 적의 속에서 지냈지만, 삼르 공주에게 거두어져 오이라트로 돌아왔다. 토곤은 오이라트로 돌아오자마자 도르벤 오이라트(4 오이라트)의 대표자를 소집하여 도친 몽골(40 몽골)을 공격하는 군대를 출발시켰다.

한문 사료에서 토곤(탈환)의 이름은 그의 아버지 마흐무드(마하목)가 사망한 1416년 무렵부터 나타나기 시작한다. 당시 몽골리아에서는 아르크타이를 중심으로 하는 몽골(명나라가 말하는 달단), 순녕왕 마흐무드(몽골 연대기에서의 바트라 승상)・현의왕 타이핀(몽골 연대기에서의 에세크)・안락왕 바트 볼라드의 세 사람이 이끄는 오이라트(명나라가 말하는 와자), 명나라의 영락제가 패권을 놓고 다투고 있었다. 마흐무드의 세력이 우세했지만, 영락제가 아르크타이에 협력하면서 마흐무드는 아르크타이의 공격에 패하여 1416년에 사망했다.

마흐무드가 사망하자 토곤이 그 뒤를 이었으나, 마흐무드에게 종속적이었던 타이핀, 바트 볼라드 두 사람이 오이라트 내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3] 마흐무드를 잃은 오이라트는 세력이 쇠퇴하고, 아르크타이가 이끄는 몽골이 우세해졌다. 그러나 영락제는 아르크타이의 세력이 너무 커지는 것을 두려워하여 영락 20년(1422년)-21년(1423년)에 걸쳐 몽골 원정을 감행했다. 토곤은 이를 기회로 1423년에 아르크타이를 공격하여 패배시키고, 그 휘하의 사람들과 가축을 약탈했다.[4] 영락제 사후, 토곤은 1431년에 아르크타이를 후룬베이얼 지방에서 쫓아내 울량하 삼위로 도망치게 했다.

1431년경, 토곤은 명나라를 떠나 몽골리아로 온 토크토아 부카(타이순 칸)를 옹립하여 몽골 부족들의 지지를 얻으려 했다. 토곤은 스스로 칸이 되려 했으나, "칭기즈 칸의 자손만이 칸이 될 수 있다"는 칭기즈 칸의 핏줄에 대한 몽골의 전통적인 관습에 부딪혀 좌절되었다.[5]

1433년 타이순 칸을 옹립함으로써 정당성을 얻은 토곤은 아르크타이에 대한 공세를 강화했다. 아르크타이는 타이순 칸과의 전투에서 패배하고 남쪽의 모나산(다르항무밍간 연합기)으로 도망쳤지만, 그곳에서 토곤에게 공격받아 멸망했다.[6] 이로써 토곤은 몽골의 대부분을 제압했다.

아르크타이에게 옹립되었던 아다이 칸은 아라샤 지방으로 도망쳐 명나라와 오이라트 사이에서 생명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1436년-1437년에 명나라와 오이라트 양쪽으로부터 공격을 받아 쇠퇴하여 1438년에는 오이라트의 공격으로 멸망했다.[7]

《몽골원류》에서는 토곤이 아다이 칸을 죽인 뒤 스스로 칸이 되려다 "천벌"을 받아 사망했다고 전한다.[8] 이는 칭기즈 칸의 혈통(보르지긴 씨)을 부정하는 것이 몽골 사회에서 용납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화로 여겨진다.[9]

1439년까지 토곤의 조공 기록이 남아있지만, 1440년에는 그의 아들 에센이 사자를 파견하고 있어, 1439년-1440년경에 토곤은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10] 토곤이 사망한 후, 일시적으로 장남인 에센과 차남 사이에서 다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최종적으로 에센이 토곤의 지위를 계승하여 "타이시(태사 회왕이라고도 함)"라고 칭했다.

2. 1. 초기 생애와 오이라트의 부상

《몽골원류》에 따르면, 토곤은 오이라트의 지도자 바트라(마흐무드)와 엘베크 칸의 딸 삼르 공주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적 이름은 '''바쿰'''이었다.[1] 바트라는 케레누트의 오게치 하시하에게 살해당했지만, 오게치 하시하는 천벌을 받아 죽었다. 이후 오게치 하시하의 아들 에세크가 오이라다이 칸을 옹립하고 삼르 공주를 아내로 삼아 바쿰도 데려갔다. 이때 삼르 공주는 오게치 하시하에게 학대받은 것을 원망하여 훗날의 아다이 칸, 알크타이 태사를 도망치게 했는데, 바쿰은 오이라트의 원수인 몽골을 이롭게 하는 행위를 꾸짖었다.

이후 아다이가 칸에 즉위하자 오이라트를 공격했고, 바쿰은 포로가 되었지만 냄비를 씌워 시중들게 하여 '''토곤'''이라는 이름을 지었다.[2] 토곤은 아다이 칸 아래에서 알크타이나 몽골진 부의 몽케베이와 같은 인물들의 적의 속에서 지냈지만, 삼르 공주에게 거두어져 오이라트로 돌아왔다. 토곤은 오이라트로 돌아오자마자 도르벤 오이라트(4 오이라트)의 대표자를 소집하여 도친 몽골(40 몽골)을 공격하는 군대를 출발시켰다.

한문 사료에서 토곤(탈환)의 이름은 그의 아버지 마흐무드(마하목)가 사망한 1416년 무렵부터 나타나기 시작한다. 당시 몽골리아에서는 아르크타이를 중심으로 하는 몽골(명나라가 말하는 달단), 순녕왕 마흐무드(몽골 연대기에서의 바트라 승상)・현의왕 타이핀(몽골 연대기에서의 에세크)・안락왕 바트 볼라드의 세 사람이 이끄는 오이라트(명나라가 말하는 와자), 명나라의 영락제가 패권을 놓고 다투고 있었다. 마흐무드의 세력이 우세했지만, 영락제가 아르크타이에 협력하면서 마흐무드는 아르크타이의 공격에 패하여 1416년에 사망했다.

마흐무드의 사후, 토곤이 그 뒤를 이었지만, 그전까지 마흐무드에게 종속적이었던 타이핀, 바트 볼라드 두 사람이 오이라트 내의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3] 마흐무드를 잃은 오이라트는 세력이 쇠퇴하고, 아르크타이가 이끄는 몽골이 우세해졌다. 그러나 영락제는 아르크타이의 세력이 너무 커지는 것을 두려워하여 영락 20년(1422년)-21년(1423년)에 걸쳐 몽골 원정을 감행했다. 토곤은 이를 기회로 1423년에 아르크타이를 공격하여 패배시키고, 그 휘하의 사람들과 가축을 약탈했다.[4] 영락제 사후, 토곤은 선덕 6년(1431년)에 아르크타이를 후룬베이얼 지방에서 쫓아내 울량하 삼위로 도망치게 했다.

2. 2. 아르크타이와의 대립

아버지 마흐무드가 사망하자, 토곤은 그 뒤를 이었지만, 그전까지 마흐무드에게 종속적이었던 타이핀, 바트 볼라드 두 사람이 오이라트 내의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3] 마흐무드를 잃은 오이라트는 세력이 쇠퇴하고, 아르크타이가 이끄는 몽골이 우세해졌다. 그러나 영락제는 아르크타이의 세력이 너무 커지는 것을 두려워하여 영락 20년(1422년)부터 21년(1423년)에 걸쳐 몽골 원정을 감행했다. 이를 기회로 본 토곤은 아르크타이를 공격하여 1423년에 그를 패배시키고, 휘하의 사람들과 가축을 약탈했다.[4] 영락제가 사망한 후, 토곤은 더욱 아르크타이에 대한 압박을 강화하여, 1431년의 원정으로 아르크타이는 본거지인 후룬베이얼 지방에서 쫓겨나 울량하 삼위로 도망쳤다.

2. 3. 몽골 통일 시도와 좌절

1431년경, 토곤은 명나라를 떠나 몽골리아로 온 토크토아 부카(타이순 칸)를 옹립하여 몽골 부족들의 지지를 얻으려 했다. 토곤은 스스로 칸이 되려 했으나, "칭기즈 칸의 자손만이 칸이 될 수 있다"는 칭기즈 칸의 핏줄에 대한 몽골의 전통적인 관습에 부딪혀 좌절되었다.[5]

1433년 타이순 칸을 옹립함으로써 정당성을 얻은 토곤은 아르크타이에 대한 공세를 강화했다. 아르크타이는 타이순 칸과의 전투에서 패배하고 남쪽의 모나산(다르항무밍간 연합기)으로 도망쳤지만, 그곳에서 토곤에게 공격받아 멸망했다.[6] 이로써 토곤은 몽골의 대부분을 제압했다.

한편, 아르크타이에게 옹립되었던 아다이 칸은 아라샤 지방으로 도망쳐 명나라와 오이라트 사이에서 생명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1436년-1437년에 명나라와 오이라트 양쪽으로부터 공격을 받아 쇠퇴하여 1438년에는 오이라트의 공격으로 멸망했다.[7]

《몽골원류》에서는 토곤이 아다이 칸을 죽인 뒤 스스로 칸이 되려다 "천벌"을 받아 사망했다고 전한다.[8] 이는 칭기즈 칸의 혈통(보르지긴 씨)을 부정하는 것이 몽골 사회에서 용납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화로 여겨진다.[9]

1439년까지 토곤의 조공 기록이 남아있지만, 1440년에는 그의 아들 에센이 사자를 파견하고 있어, 1439년-1440년경에 토곤은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10]

2. 4. 사망

아다이 칸이 죽은 시점에 토곤이 죽었다는 것은 『몽골원류』의 창작으로 여겨지지만, 칭기스 칸과 그 자손인 보르지긴 씨를 부정하는 것이 몽골 사회에서는 용납되지 않는다는 것을 나타내는 일화로 보인다.[9] 정통 4년 (1439년)까지 토곤이 조공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지만, 정통 5년 (1440년)에는 그의 아들 에센이 사자를 파견하고 있어, 1439년-1440년경에 토곤은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10] 토곤이 사망한 후, 일시적으로 장남인 에센과 차남 사이에서 다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최종적으로 에센이 토곤의 지위를 계승하여 "타이시(태사 회왕이라고도 함)"라고 칭했다.

3. 가계


  • 고하이 태위
  • 바툴라 승상/순녕왕 마흐무드
  • '''토곤 태사'''(Toγon Tayisi|토곤 태사mn/태사 순녕왕 탈환, Toγon|토곤mn)
  • 에센 태사/에센 칸
  • 오슈 테무르 태사
  • 케시크 오로크

4. 평가

토곤은 몽골 제국 붕괴 이후 혼란기 속에서 오이라트를 규합하고 세력을 확장하여 몽골 통일을 시도한 지도자였다. 그는 칭기즈 칸의 혈통을 중시하는 전통적인 몽골 사회의 질서에 도전한 개혁적인 인물로 평가될 수 있다.[9]

그러나 토곤은 스스로 칸이 되려고 선언하였으나, "주의 오르도"(칭기스 칸의 4대 오르도, 현재의 에진호로 기 팔백실)를 떠난 곳에서 천벌을 받아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8] 이는 몽골 사회에서 칭기즈 칸과 그 자손인 보르지긴 씨를 부정하는 것이 용납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화로 여겨진다.[9]

1439년까지 토곤이 조공을 한 기록이 남아있지만, 1440년에는 그의 아들 에센이 사자를 파견하고 있어, 1439년에서 1440년경에 토곤은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10] 토곤 사후, 일시적으로 장남인 에센과 차남 사이에서 다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최종적으로 에센이 토곤의 지위를 계승하였다.

참조

[1] 서적 アルタン・トブチ 2010
[2] 서적 2004
[3] 서적 1959
[4] 서적 1959
[5] 서적 1959
[6] 서적 2002
[7] 서적 1959
[8] 서적 2004
[9] 서적 1988
[10] 서적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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