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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다이 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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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다이 칸은 1425년 오이라다이 칸 사후 아스트부의 알크타이에 의해 추대된 몽골의 칸이었다. 1431년 토곤 타이시와의 전투에서 패배하여 세력을 잃고, 명나라에 귀순했지만 약탈을 자행했다. 1438년 명군에게 패배하여 항복했지만, 토크토아 부하에게 붙잡혀 죽었다. 아다이 칸은 1376년 또는 1390년 출생으로 추정되며, 몽골 동부와 중부를 통일했으나, 서부 몽골을 장악하지 못했다. 그는 톡토아부카 타이순 칸이 즉위하기 전까지 몽골의 유일한 칸으로 인식되었으며, 1439년에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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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다이 칸
아다이 칸
칭호카간
통치 기간1425년 – 1438년
즉위1425년
퇴위1438년
이전오이라다이
이후타이순 칸
본명아다이
왕조보르지긴
아버지외르크 테무르 칸(?)
출생1390년
사망1438년
사망 장소에제네

2. 생애

1425년 오이라다이 칸 사후, 아수드부(알란, 아스, 아스트)의 유력자 알크타이에 의해 아다이가 칸으로 추대되었다. 1431년 오이라트의 토곤 타이시와의 전투에서 패배하여, 본거지인 케룰렌 강 유역에서 쫓겨났다. 1434년 알크타이가 패사한 후, 토곤에 의해 칸으로 추대된 토크토아 부하의 공격을 받아 부하 돌지 베크(朶児只伯)와 함께 에치나로 도망쳤다.

아다이 일행은 표면상으로는 에 귀순했지만, 실제로는 간저우·량저우를 침입하여 약탈했다.[10] 1438년 아다이와 돌지 베크는 명군에게 울루그나(兀魯乃)에서 패배하여 추격을 받아 사막으로 퇴각했고, 150명의 족장이 명군의 포로가 되었다. 아다이 일행은 명에 항복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토크토아 부하에게 패배하여 붙잡혀 죽었다.[10]

2. 1. 즉위 전

아다이 칸의 출생년도는 불분명하며, 1376년생 설과 1390년생 설이 있다.[4] 출생지는 다싱안링산맥 근처 눈 강 유역으로 추정된다. 아다이 칸의 가계는 여러 설이 존재한다. 《몽골원류》, 《황사(黄史)》에 따르면 칭기즈 칸의 막내 동생 테무게 옷치킨의 후손이라는 설이 있다.[8] 티무르 제국의 군주 울루그 베그가 쓴 역사서 《네 울루스의 역사》에 의하면, 쿠빌라이 칸의 동생 아리크 부케의 후손이었다고 한다.[9] 이밖에 칭기즈 칸의 첫째 동생 주치 카사르의 7대손이라는 설, 주치 카사르의 후손으로 하르친부(호르친부) 사람이며 계보가 실전되었다는 설, 보르지긴 씨족 내 우구데이 칸의 아들 카단 가와, 칭기즈 칸의 형제 주치 카사르가의 근친 결혼으로 양쪽의 혈통을 모두 물려받았다는 설도 있다. 몽골 역사가 보우인데리겐(宝音德力根)은 오고타이의 후손 굴리치 울루그 테무르 칸의 아들 설을 지지한다.[1][2][3]

그의 초기 생애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으며, 어느 시점에 하르친부의 부족장이 되었다. 1414년 아룩타이오이라트부에 의해 명나라로 추방당하자 몽골 동쪽으로 진출, 몽골의 중부와 동부 지역 일부를 차지했다.

2. 2. 동몽골의 칸 (1415년 ~ 1425년)

1415년 아수드부의 아룩타이 태사의 지원으로 몽골 제국의 대칸으로 즉위했으나, 서부 몽골의 귀족들은 아다이를 칸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아다이 칸은 즉위 직후 몽골 군사를 이끌고 오이라트로 출정했다.[10]

같은 해 아룩타이오이라트를 습격하여 델베그 칸과 바툴라(마흐무드)를 패사시켰다. 바툴라(마흐무드)의 아들 토곤은 오이라다이를 대칸으로 세웠다. 오이라다이 칸은 서몽골의 대칸이 되었고, 동몽골은 아룩타이와 아다이가 지배했다. 오이라트 토곤과 오이라다이 에세크 칸은 명나라와 연합하여 아룩타이와 아다이 칸에게 타격을 주었다. 칭기즈 칸의 후손들 세력이 부활하는 것을 두려워한 명나라는 오이라트부를 적극 지원하여 몽골 동부와 중부의 부족을 분할하게 했다.

1422년1423년 영락제는 직접 군사를 이끌고 몽골을 공격했고, 아다이는 명나라 군을 피해 도피했다.

1425년 오이라트를 공격하여 참패시킨 뒤 오이라트의 부족장들을 죽이고 바툴라 칭상의 아내 사무르 군즈와 아들 토곤 등을 사로잡아갔다. 오이라트의 참패 후, 몽골의 통일을 염려한 영락제는 오이라트와 서몽골 부족장들을 지원하였다.

2. 3. 대칸 즉위 이후 (1425년 ~ 1438년)

1425년 오이라다이 에세크 칸이 죽자 아수드부 (알란, 아스, 아스트)의 수장 아룩타이에 의해 아다이 칸이 전 몽골의 대칸으로 선언되었다. 아다이 칸은 아룩타이를 타이시로 임명했다. 1426년 아자이 칸은 전체 몽골의 대칸으로 선언되었으나, 실권은 아룩타이에게 있었다.[10]

1425년 오이라트부에서 자란 엘베그 니굴세그치 칸의 손자 아자이 타이지는 아다이의 편을 들었다. 아다이 칸은 아자이 타이지, 아룩타이 등과 함께 부이르 누르 전투에서 오이라트족을 격파했다. 이때 아룩타이는 바툴라 칭상의 아들 바하마를 사로잡아 토곤이라는 이름을 붙여 노예로 삼았다. 그러나 아다이 칸은 사무르 공주의 부탁으로 토곤을 풀어주어 오이라트로 돌려보냈다.

아다이 칸은 겉으로는 명나라에 복종, 귀순했지만, 감숙성 감주, 량주 등을 침입하여 약탈하고 돌아왔다.[10] 1430년 아다이 칸은 서부 몽골에 확보한 영토 대부분을 잃었고, 다시 수복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1431년 오이라트부의 토곤이 기습 공격해 왔고, 아다이 칸은 그와의 싸움에서 패배하여 케룰렌강 유역 밖으로 쫓겨났다.

1433년 토곤은 아다이에 대한 봉기를 일으켰고, 아다이 칸은 진압하다가 패배하였다. 1433년 톡토아부카가 몽골 서부에서 오이라트부 수장 토곤 등의 지원을 받아 몽골의 대칸으로 추대되었다.

2. 4. 최후

1434년 오이라트의 토곤과 타이순 칸의 공격으로 아자이 칸과 아룩타이는 크게 패하였다. 아룩타이는 내몽골 모나산(지금의 다얼한마오밍안)으로 도망쳤다가 그해 9월 숙적인 토곤 또는 토곤의 아들 에센과 추격대에 의해 살해되었다. 아자이 칸은 부하 도르지벡 등과 함께 하르친부 또는 어지나로 도주했다. 다시 몽골로 돌아온 아자이와 그의 군대는 명나라 북부 국경을 넘어 감주와 량저우를 공격, 약탈하고 되돌아왔다.[5]

1438년 아다이 칸과 도르지벡은 오르구나에서 명나라군과 오이라트군의 연합군에 패배하여 사막으로 퇴각했고, 이때 몽골의 부족장 150명이 명나라군에 포로로 사로잡혀 끌려갔다. 아자이 칸은 명나라에 항복했고, 아라 산으로 도주하여 웅거하며 명나라의 지원을 받아 명맥을 유지했다. 명나라는 몽골 통치자의 위기를 이용, 아다이 칸과 도르지벡 장군에게 명나라로 귀순과 작위를 보장하며 회유했지만, 아다이 칸은 이를 거절했다.[5]

그해 쿠빌라이 가의 타이순 칸과 오이라트의 토곤 타이시, 에센과 4만 명 병력의 공격을 받고 칭기즈 칸오르도, 혹은 칭기즈 칸의 사당에 피신했으나, 토곤 타이시에게 세 번 포위당했다. 그 뒤 아룩타이가 살해되자 명나라 섬서포정사로 피신했으며, 오이라트 토곤 타이시에게 사로잡힌 뒤 살해당했다. 혹은 타이순 칸에 의해 포살되었다는 설도 있다.[5] 아다이 일행은 표면상으로는 에 귀순했지만, 실제로는 간저우·량저우에 침입하여 약탈을 자행했다.[10] 1438년에 아다이와 돌지 베크는 명군에게 울루그나(兀魯乃)에서 패배하여 추격을 받아 사막으로 퇴각했다. 150명의 족장이 명군의 포로가 되었고, 아다이 일행은 명에 항복했다. 항복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다이는 토크토아 부하에게 패배하여 붙잡혀 죽었다.[10]

3. 사후

아다이 칸의 영향력은 서부 몽골 전 지역에 미치지는 못했지만, 1433년 톡토아부카 타이손 칸(서몽골에서 칸이 됨)이 칸이 되기 전까지 몽골의 유일한 대칸으로 인식되었다. 이후 오이라트1438년 케룰렌강 유역을 합병하여 전 몽골 초원을 손에 넣었고, 허수아비 대칸인 타이순 칸을 북원의 대칸으로 내세웠다.

4. 기타

일설에는 오이라트에서 사무르 곤즈의 도움으로 풀려난 올제이투 카툰이 그와 재혼했다는 설이 있다.

참조

[1] 서적 Shajrat Ul Atrak: Or The Genealogical Tree Of The Turks And Tatars "//books.google.com/[...]
[2] 간행물 アジア・アフリカ言語文化研究所-アジア・アフリカ言語文化研究 東京外国語大学
[3] 웹사이트 Mongolian rulers http://sitemaker.umi[...]
[4] 논문 15世紀中葉前的北元可汗世系及政局 (Genealogy and political situation of the Northern Yuan Khans of the mid-15th century) https://wap.cnki.net[...] 2000
[5] 서적 Our great Qing: the Mongols, Buddhism and the state in late imperial China
[6] 서적 モンゴル帝国から大清帝国へ
[7] 서적 モンゴル帝国から大清帝国へ
[8] 서적 モンゴル帝国から大清帝国へ
[9] 서적 モンゴル帝国から大清帝国へ
[10] 서적 騎馬民族史 正史北狄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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