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픽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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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토마스 픽턴은 1758년 웨일스에서 태어난 영국의 군인으로, 반도 전쟁과 워털루 전투에 참전했다. 그는 트리니다드의 총독으로 재임하며 가혹한 통치를 펼쳐 논란이 되었으며, 노예 소유와 고문 혐의로 재판을 받기도 했다. 픽턴은 용감한 군인이었지만, 잔혹한 면모도 보여주었으며, 그의 이름은 여러 지명과 시설에 사용되었으나, 최근에는 과거 행적에 대한 비판으로 명칭 변경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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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픽턴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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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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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일 | 1758년 8월 24일 |
출생지 | 웨일스 펨브로크셔 해버퍼드웨스트 |
사망일 | 1815년 6월 18일 |
사망지 | 벨기에 워털루 |
매장지 | 세인트 조지 교회, 하노버 스퀘어, 런던 (이후 세인트 폴 대성당으로 이장) |
별칭 | 전투 픽턴 |
군사 경력 | |
소속 국가 | 그레이트 브리튼 연합 왕국 |
군 종류 | 영국 육군 |
복무 기간 | 1771년–1815년 |
최종 계급 | 중장 |
참전 | 프랑스 혁명 전쟁 나폴레옹 전쟁 (사망) |
지휘 | 서포크 연대 제77 보병 연대 제5사단 |
주요 전투 | |
프랑스 혁명 전쟁 | 트리니다드 침공 |
나폴레옹 전쟁 | 발체렌 전역 반도 전쟁 비토리아 전투 오르테즈 전투 워털루 전투 |
훈장 | |
훈장 | 바스 훈장 대십자 기사 |
2. 초기 생애
1795년 랄프 애버크롬비 경의 지휘 아래 서인도 제도에서 복무하며 세인트루시아 점령 작전에 참여했고, 이 공로로 56 보병 연대의 중령으로 진급했다. 이후 세인트빈센트 섬 점령에도 기여했다.[9]
토마스 픽턴은 웨일스 Pembrokeshire의 포이스턴 홀 출신 토마스 픽턴(1723–1790)과 그의 아내 세실 포웰(1728–1806) 사이에서 태어난 12명의 자녀 중 일곱째였다.[8] 그는 1758년 8월 24일(추정) 펨브로크셔의 Haverfordwest에서 태어났다.[1]
1771년, 그는 영국 육군 12th Regiment of Foot의 소위로 임관했으나, 실제 연대에 합류한 것은 2년 뒤였다. 당시 연대는 지브롤터에 주둔하고 있었으며, 픽턴은 1778년 1월 75th Regiment of Foot (Prince of Wales's Regiment)의 대위로 임명되어 영국으로 돌아올 때까지 그곳에 머물렀다.[9]
5년 후인 1783년, 75연대가 해산되었을 때 픽턴은 병사들의 반란을 신속한 개인적 행동과 용기로 진압했다. 이 공로로 소령 계급을 약속받았으나 실제 진급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후 그는 약 12년 동안 아버지의 영지에서 은퇴 생활을 보냈다. 1794년, 그는 사령관인 존 본 경과의 인연을 통해 서인도 제도로 건너갔다. 본 경은 그를 자신의 부관으로 임명하고 17th Regiment of Foot의 대위 자리를 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픽턴은 58th Regiment of Foot 소속으로 소령 계급으로 진급했다.[10]
3. 신세계에서의 경력
1797년 영국군이 트리니다드를 정복하자, 애버크롬비는 픽턴을 섬의 총독으로 임명했다. 픽턴은 이후 5년간 부족한 병력으로 내부 불안과 스페인의 재정복 위협에 맞서 섬을 통치했다. 그는 질서 유지를 위해 강력한 조치를 취했는데, 이는 때로는 단호한 정의 집행으로, 때로는 임의적이고 가혹한 통치 방식으로 평가받으며 논란을 낳았다. 그는 최소 12명의 노예를 처형했으며, 노예 무역은 그의 재산 형성의 중요한 부분이었다.[11][9]
1801년 10월, 픽턴은 현지 계급인 준장으로 승진했다.[12] 1802년 아미앵 조약 체결을 위한 협상이 진행될 당시, 많은 영국인 거주민들은 트리니다드가 스페인에 반환되는 것을 반대하는 청원을 제출했다. 픽턴과 애버크롬비의 의견이 반영되어 트리니다드는 영국 영토로 남게 되었다.[9]
그러나 픽턴의 통치 방식에 대한 임의성과 잔혹성에 대한 보고가 영국 본국에 알려지면서 그의 해임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또한, 그가 토지와 노예 거래를 통해 사적인 이익을 추구하고 있다는 의혹과 함께, 그의 정부(이자 네 자녀의 어머니)였던 자유 유색인 여성 로제타 스미스가 그의 결정에 부적절한 영향을 미친다는 소문도 돌았다.[13][9] 때마침 피트 내각이 물러나고 새로 들어선 애딩턴 행정부는 픽턴이 추진하던 플랜테이션 중심의 경제 개발 방식을 선호하지 않았다. 결국 1802년, 윌리엄 풀러턴을 수석 위원으로, 새뮤얼 후드 경을 차석 위원으로, 그리고 픽턴 자신을 막내 위원으로 하는 3인 공동 통치 위원회가 구성되었다.[9]
스코틀랜드의 유서 깊은 가문 출신이자 휘그당 의원, 외교관, 왕립 학회 회원 등 화려한 경력을 가진 풀러턴은 픽턴과는 매우 다른 배경과 가치관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는 인도에서 복무하며 동인도 회사의 토착민에 대한 강압적인 정책을 비판하고 보다 인도적인 통치를 주장한 바 있었다.[14][15] 사실상 공포 정치에 가까웠던 픽턴의 통치 방식은 풀러턴과의 극심한 갈등을 야기했다. 풀러턴은 픽턴의 과거 행적에 대한 조사를 진행하며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했고, 결국 픽턴은 1803년 5월 31일 총독직에서 사임했다.[9]
3. 1. 트리니다드 총독 시절의 가혹 행위 논란
토마스 픽턴은 1797년 트리니다드 정복 이후 랄프 애버크롬비 경에 의해 섬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다.[9] 이후 5년간 그는 불안정한 내부 상황과 스페인의 재탈환 위협 속에서 부족한 병력으로 섬을 통치했다. 질서 유지를 위해 강력한 조치를 취했는데, 이는 때로는 즉흥적인 정의 집행으로, 때로는 임의적이고 잔혹한 행위로 평가받았다. 그는 최소 12명의 노예를 처형했으며, 노예 무역은 그의 재산 형성의 중요한 부분이었다. 역사가 크리스 에반스는 당시 상황에 대해 "즉시 처형된 범죄자들은 차라리 운이 좋다고 여겨졌을 것이다. 다른 이들은 신체 절단과 고문을 견뎌야 했다"고 기록했다.[11] 픽턴은 또한 토지와 노예 투기로 돈을 벌고 있었고, 그의 정부이자 네 자녀의 어머니였던 자유 유색인 여성 로제타 스미스가 그의 결정에 부패하게 영향을 미친다는 의혹도 있었다.[13][9]
1802년, 픽턴의 통치 방식에 대한 잔혹성과 임의성에 대한 보고가 영국 본국에 전해지면서 그의 해임 요구가 거세졌다. 새로운 애딩턴 행정부는 픽턴이 선호하던 플랜테이션 중심의 경제 개발을 원치 않았고, 결국 윌리엄 풀러턴을 수석 위원으로 하는 3인 통치 위원회를 구성했다. 새뮤얼 후드 경이 두 번째 위원, 픽턴은 막내 위원이 되었다.[9] 풀러턴은 부유한 스코틀랜드 가문 출신으로 외교관 경력과 인도에서의 군 지휘 경험이 있었으며, 휘그당 의원이자 왕립 학회 회원이었다. 그는 동인도 회사의 토착민에 대한 비인도적인 정책을 비판하며 "그들이 두려워하는 만큼 미워하게 하라"는 식의 통치보다 인도적인 정책이 더 효과적이라고 주장한 인물이었다.[14][15]
픽턴의 통치는 사실상 공포 정치에 가까웠고, 이는 풀러턴과의 극심한 갈등으로 이어졌다. 풀러턴은 픽턴의 과거 행적에 대한 공개 조사를 시작했고, 위원회 회의에서 비판적인 보고를 이어갔다. 결국 픽턴은 1803년 5월 사임했다.[9] 영국으로 돌아온 픽턴은 풀러턴이 제기한 혐의로 인해 1803년 12월 추밀원의 명령으로 체포되었으나, 즉시 4만파운드의 보석금을 내고 풀려났다.[9] 추밀원은 대부분의 혐의를 기각했으며, 특히 즉결 처형 혐의에 대해서는 픽턴이 당시 트리니다드에 적용되던 스페인 법[16]이나 계엄령 상황을 근거로 정당화한 주장을 수용했다.[17]
그러나 픽턴은 1806년 킹스 벤치 법원에서 단 하나의 혐의, 즉 1801년 루이사 칼데론이라는 14세의 자유 뮬라토 소녀에게 고문을 가하여 자백을 강요한 경범죄 혐의로 재판을 받게 되었다. 칼데론은 동거남의 집에서 약 500GBP 상당의 금품을 훔치도록 연인을 도왔다는 혐의를 받았다. 고문은 지역 치안 판사의 서면 요청에 따라 픽턴의 서면 승인하에 이루어졌으며, '피켓'이라 불리는 영국 군사 처벌의 변형된 형태가 사용되었다. 이는 묶인 용의자를 한쪽 발가락으로 평평한 말뚝 위에 서 있게 하는 고문이었다.[18] 칼데론은 첫날 55분, 다음날 25분 동안 천장에 매달린 채 발끝으로 말뚝 위에 서 있는 고문을 당했지만 자백하지 않았고, 8개월간 더 투옥되었다가 석방되었다.[19][11]
재판 과정에서 칼데론은 직접 고문의 성격과 지속 시간에 대해 증언했고, 그녀의 모습은 당시 대중의 큰 관심을 끌었다.[20] 법적 쟁점은 스페인 법하에서 고문이 허용되는지 여부였다. 검찰 측 증거와 픽턴 측 변호인의 증인 심문 과정에서 불리한 증언("미스터 보빌은 ... 윌리엄 가로우의 반대 심문에서 그는 고문이 처음 도입된 것은 피크턴 장군에 의해서였다고 말했다." ... "트리니다드의 법무 장관인 글루체스터 씨는 ... 그의 반대 심문에서 그는 '카에둘라'와 '라에코필라지오네'도 권위 있는 서적임을 인정했다. 이 책들은 스페인령 서인도 제도에 명시적으로 적용되는 법전을 포함하고 있었으며, 그 안에는 고문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20]이 나오자, 배심원단은 고문이 허용되지 않는다고 판단하여 픽턴에게 유죄 평결을 내렸다.[9]
픽턴은 즉시 재심을 청구했고, 1808년 열린 재심에서 그의 변호인단은 고문이 지역 치안 판사의 요청에 따른 것이며 스페인 법상 합법적이었고 칼데론 역시 법적으로 고문 가능한 연령이었음을 강조했다. 또한, 스페인 통치 말기에 고문이 실제로 행해졌다는 트리니다드 주민들의 증언을 다수 제출했다. 결국 배심원단은 고문이 할양 당시 섬의 법에 의해 허용되었으며 픽턴은 악의 없이 정당하다고 믿는 명령을 내렸다고 판단하여 이전 판결을 뒤집었다.[21] 그러나 자유민에 대한 고문이 영국 법 정신에 너무나 위배되므로 픽턴이 스페인 법과 관계없이 이를 허용해서는 안 되었다는 검찰 측 주장에 대해 추가적인 법적 검토를 요청했다. 법원은 이 문제를 더 심리할 때까지 픽턴의 출석 의무를 유예했으나, 최종 판결은 내려지지 않았다.[9]
군부와 노예 소유주 친구들은 픽턴의 법적 비용을 모금해 주었으며, 픽턴은 포트오브스페인 대화재 구호 기금으로 같은 금액을 기부했다. 그는 이 기간 동안 소장으로 진급했고, 1809년에는 발헤렌 원정에 참여하여 네덜란드 플러싱의 총독을 역임했다.[9]
4. 유럽에서의 군 복무
1810년, 웰링턴 공작의 요청에 따라 픽턴은 스페인에서 사단을 지휘하게 되었다. 웰링턴은 미란다 장군이 픽턴을 추천하며 "매우 영리하다"고 평했지만, "자만심이 너무 강해 카라카스나 서인도 제도에 보내면 그곳의 왕이 되려 할 것"이라며 신뢰하지는 않았다고 회상했다. 그러나 웰링턴은 직접 픽턴을 만난 후 "거칠고 입이 험한 악마 같았지만, 항상 매우 훌륭하게 행동했다. 어떤 임무든 그보다 더 잘 해낼 사람은 없었고, 미란다가 말한 야심을 확인할 만한 것은 없었다"고 평가했다.[22]
반도 전쟁 기간 동안 픽턴은 웰링턴의 주요 부관 중 한 명으로 활약했다. 비록 웰링턴이 베레스포드, 힐, 크라우퍼드 등에게 보냈던 완전한 신뢰를 픽턴에게 주지는 않았지만, 명확하게 정의된 임무를 단호하고 철저하게, 시간을 엄수하며 수행하는 능력 면에서는 군대 내 최고 수준이었다. 그의 초기 지휘는 다소 순탄치 않았는데, 이는 그의 엄격하고 괴팍한 성격과 더불어 어려운 상황 때문이었다. 1810년 7월 코아 강 전투에서 크라우퍼드의 사단이 교전에 휘말렸을 때, 픽턴은 교전을 피하라는 웰링턴의 직접적인 명령 때문에 지원을 거부했다. 그러나 직후 벌어진 부사쿠 전투에서는 프랑스군을 혼란에 빠뜨리며 협곡 너머로 격퇴하는 데 성공하며 능력을 입증했다.[9]
토레스 베드라스 방어선에서 겨울을 보낸 후, 푸엔테스 데 오노로 전투에서 활약하며 자신과 그가 이끌던 "싸우는" 제3사단의 명성을 높였다. 1811년 9월에는 현지 계급으로 중장에 임명되었고, 같은 달 엘 보돈 전투에서는 프랑스 기병대의 격렬한 압박 속에서도 제3사단이 신속하고 질서 있게 퇴각하여 큰 영광을 얻었다. 10월에는 제77 보병 연대의 대령으로 임명되었다.[23]
1812년 첫 작전인 시우다드 로드리고 포위전에서 픽턴은 크라우퍼드와 함께 두 개의 성벽 틈새를 돌파했다. 이 전투에서 크라우퍼드와 픽턴의 부관인 헨리 매키넌 소장은 치명상을 입었다. 한 달 후 바다호스 포위전에서는 그의 대담한 판단력과 통찰력으로 제3사단이 수행한 성에 대한 보조 공격을 실제 주요 공격으로 전환시켜 요새 함락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이 격렬한 전투에서 부상을 입었지만 그는 참호를 떠나지 않았고, 다음 날 최근 상속받은 재산으로 자신의 지휘 아래 있던 모든 생존 장병에게 기니 금화를 하사했다. 부상과 열병으로 인해 건강 회복을 위해 영국으로 돌아가야 했지만, 1813년 4월 다시 전선에 복귀했다. 영국에 머무는 동안 그는 섭정 조지 4세로부터 바스 훈장 기사(KB) 작위를 수여받았고, 1813년 6월에는 육군 중장으로 정식 진급했다. 이 시기 픽턴은 카마던셔의 이스코에드(Iscoed) 영지를 매입했으며,[24] 1813년 3월 19일 보궐 선거에서 펨브로크 자치구의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25]
비토리아 전투에서 픽턴은 격렬한 포화 속에서 주요 다리를 건너 사단을 이끌었다. 그의 보고에 따르면, 제3사단은 적의 40~50문 대포 사격에 맞서 다리를 신속하게 점령했으나, 이로 인해 노출된 우익 측면으로 반격을 받아 1,800명의 병력 손실을 입었다. 이는 전투에서 연합군 전체 손실의 3분의 1 이상에 해당하는 규모였다.[26] 비토리아 전투와 이후 피레네 산맥 전투에서의 제3사단의 활약은 단호하고 숙련된 전투 지휘관으로서 픽턴의 명성을 더욱 공고히 했다. 1814년 초, 카탈루냐 방면 영국군 지휘관직을 제안받았으나 웰링턴과 상의 후 거절했다.[9]
사단 해체 시 장교들은 감사의 표시로 픽턴에게 귀중한 은제 식기를 선물했으며, 1814년 6월 24일 그는 뛰어난 공로를 인정받아 영국 하원으로부터 일곱 번째 감사 결의를 받았다. 다른 장군들과 달리 귀족 작위를 받지는 못했지만, 1815년 초 바스 훈장의 기사단 대십자(GCB)로 승급되었다.[25]
5. 워털루 전투와 죽음
나폴레옹이 엘바 섬에서 돌아오자, 픽턴은 웰링턴의 요청에 따라 영국-네덜란드 군에서 높은 지휘권을 받아 제5 보병 사단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다른 모든 군 고위 장교들과 함께 6월 15일에 열린 리치먼드 공작부인의 무도회에 초대되었다.[27]
6월 18일,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이 에를롱 백작의 군단을 보내 13시 30분에 라 에 생트 근처의 영국-연합군 중앙을 공격하자, 픽턴은 진격하는 프랑스 군대를 향해 총검 돌격을 지휘했다. 그는 맹렬한 용맹함으로 공격을 격퇴하는 동안 - 그의 마지막 말은 "돌격! 돌격! 만세! 만세!"[28]였다 - 머리에 머스킷 총알을 맞고 쓰러졌다.[9]
웰링턴은 그의 죽음을 알리며 전쟁 장관 배서스트 경에게 다음과 같이 썼다.
"경께서는 이처럼 필사적인 전투가 치러졌고, 이처럼 유리한 고지를 얻는 데 막대한 손실이 따르지 않을 수 없음을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유감스럽게도 아군의 손실은 막대했습니다. 폐하께서는 토마스 픽턴 중장님을 잃으셨는데, 픽턴 중장님은 종종 폐하의 군대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이셨습니다. 그는 적군의 가장 심각한 공격을 총검 돌격으로 격퇴하며 영광스럽게 사단을 이끌다가 전사했습니다."[29]
이후 검사 결과, 픽턴의 시신에서는 이틀 전인 6월 16일 카트르 브라 전투에서 엉덩이에 심각한 머스킷 총알 상처를 입었던 사실이 발견되었다. 그는 이 부상을 하인을 제외하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고, 외과 의사와 상담하는 대신 스스로 상처를 붕대로 감고 전투에 참여했다.[30]
그의 시신은 6월 25일 켄트 주 딜에 도착하여 다운스에 정박한 함포의 예포를 받았다. 그날 저녁 캔터베리에 도착하여 픽턴이 유럽 대륙으로 가는 길에 식사했던 퐁텐 여관의 방에 안치되었다. 6월 26일 오전 6시, 사울의 "장송 행진곡"에 맞춰, 팔을 뒤로 한 채 제52 보병 연대가 동반한 장례 행렬은 7월 3일 런던에 도착했다.
6. 사후
그는 세인트 조지 교회(하노버 스퀘어)에 있는 가족 묘소에 안장되었다. 의회의 명령에 따라 그의 기념비가 세인트 폴 대성당에 세워졌으며,[31] 1823년에는 기금 모금을 통해 또 다른 픽턴 기념비가 카마던에 세워졌고, 국왕이 100 기니를 기부했다. 1859년 6월 8일, 그의 시신은 웰링턴 공작의 시신 옆인 세인트 폴 대성당에 다시 안장되었다.
그는 펨브로크셔의 세인트 마이클 교회(러드벅스턴)에서도 기념되고 있으며, 이곳은 그가 성장한 교구이다.[32] 워털루 전장에도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33]
7. 유산
픽턴은 군사적 능력과 용맹함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동시에 트리니다드 총독 시절 보여준 잔혹함과 가혹한 통치 방식으로 인해 논란이 많은 인물이기도 하다.[7] 그의 이름은 영국과 영연방 국가 곳곳의 지명, 도로, 건물, 군사 시설 등에 붙여져 그의 업적을 기리는 듯 보였다.[34][35]
그러나 최근 노예제와 식민주의 역사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확산되면서, 특히 그의 트리니다드 통치 기간 동안 자행된 고문과 잔인한 행위들이 재조명받고 있다.[7] 이로 인해 그의 이름을 딴 장소나 시설의 명칭을 변경해야 한다는 사회적 요구와 논쟁이 여러 지역에서 일어나고 있다.[7] 예를 들어, 뉴질랜드의 피크턴 시에서는 도시 이름을 마오리 이름인 와이토히(Waitohi)로 변경하자는 논의가 진행되기도 했다.[7] 이러한 움직임은 과거 인물의 공과를 어떻게 기억하고 평가할 것인가에 대한 현대 사회의 고민을 보여준다.
7. 1. 픽턴의 이름을 딴 장소 및 시설
'''지명'''- 피크턴(Picton, Ontario): 캐나다 프린스에드워드 군(Prince Edward County, Ontario)에 위치한 지역이다.
- 피크턴(Picton, New Zealand): 조지 플로이드 시위 이후, 도시 이름을 원래의 마오리 이름인 와이토히(Waitohi)로 변경할지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7]
- 피크턴(Picton, New South Wales): 피크턴의 군 동료였던 라클란 맥쿼리(Lachlan Macquarie)가 명명한 마을이다.
- 피크턴 정션(Picton Junction): 서호주(Western Australia) 남서부에 정착한 워털루 참전 용사들이 명명했다.
- 피크턴 섬(Picton Island): 남아메리카 비글 해협(Beagle Channel) 동쪽 입구에 위치하며, 로버트 피츠로이(Robert Fitzroy)와 필립 파커 킹(Phillip Parker King)이 명명했다.[34]
'''도로'''
이름 | 위치 | 비고 |
---|---|---|
피크턴 로드(Picton Road) | 아버시찬(Abersychan), 웨일스 | |
피크턴 로드(Picton Road) | 루스(Rhoose), 웨일스 | |
피크턴 스트리트(Picton Street) | 그리피스타운(Griffithstown), 웨일스 | |
피크턴 테라스(Picton Terrace) | 블레이나우페스티니오그(Blaenau Ffestiniog), 웨일스 | |
피크턴 테라스(Picton Terrace) | 카마던(Carmarthen), 웨일스 | |
피크턴 로드 | 호주 | 고속도로 |
피크턴 스트리트(Picton Street) | 호윅(Howick), 오클랜드, 뉴질랜드 | |
피크턴 스트리트(Picton Street) | 몽펠리에, 브리스톨(Montpelier, Bristol), 영국 | 1783년, 당시 대위였던 피크턴이 브리스톨 칼리지 그린(College Green, Bristol)에서 반란을 일으킨 제75대대와 대치하여 군사적 반란(mutiny)을 막은 것을 기념하여 명명되었다. 이 거리에는 피크턴 로지(Picton Lodge)라는 이름의 2층 빌라도 있다. |
피크턴 스트리트(Picton Street) | 스페인 항구(Port of Spain), 트리니다드 토바고 |
'''펍'''
- 포스카울(Porthcawl)에 있는 ''제너럴 피크턴 인''(General Picton Inn)
- 매스텍(Maesteg)의 낸티필론(Nantyffyllon), 피크턴 플레이스(Picton Place)에 있는 ''더 제너럴 피크턴''(The General Picton). 간판에는 토마스 경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이 지역에는 그를 기리는 피크턴 스트리트(Picton Street)도 있는데, 그는 이 지역에 많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 ''더 피크턴''(The Picton)은 뉴포트(Newport, Wales)의 커머셜 로드(Commercial Road)에 있는 펍이다. 간판에는 토마스 경이 군복을 입고 왼쪽 어깨에 칼날을 기댄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기타'''
- 피크턴 막사(Picton Barracks): 벌퍼드 캠프(Bulford Camp), 윌트셔(Wiltshire)에 위치하며, 1992년부터 영국 육군 제3사단(3rd Division)의 본부로 사용되고 있다.
- 피크턴 막사(Picton Barracks): 카마던(Carmarthen), 웨일스에 위치한다.[35]
- HMS Sir Thomas Picton: 1915년에 진수된 왕립 해군의 모니터함이다.
- 제너럴 피크턴(General Picton): 사우스 웨일스(South Wales)의 림니(Rhymney)에 있는 림니 양조장(Rhymney Brewery)에서 생산하는 오크통 에일(cask ale)의 이름이다.
- 피크턴(The Picton): 웰링턴 칼리지(Wellington College, Berkshire)에 있는 남학생 기숙사이다.
- 피크턴 하우스(Picton House): 펨브로크셔(Pembrokeshire)에 있던 피크턴의 옛 학교인 하버퍼드웨스트 그래머 스쿨(Haverfordwest Grammar School, 1978년 폐교)의 기숙사 이름이었다.
- 토마스 픽턴 경 학교(Sir Thomas Picton School) (''Ysgol Sir Thomas Picton''): 펨브로크셔(Pembrokeshire), 웨일스, 하버퍼드웨스트에 있던 남녀 공학 종합학교였으나, 2018년에 폐교되었다.
- 피크턴 기념비(Picton Monument, Carmarthen): 웨일스 카마던에 세워진 기념비이다.
- 피크턴 아케이드(Picton Arcade): 스완지(Swansea) 시내 중심가에 있는 쇼핑 구역으로, 킹스웨이(Kingsway)와 옥스퍼드 스트리트(Oxford Street)를 연결한다.
- 피크턴 하우스(Picton House): 지브롤터(Gibraltar)의 알라메다 부동산(Alameda Estate)에 위치한 건물이다.
- 피크턴 요새(Fort Picton, 세인트 데이비드 타워(St. David’s Tower)): 트리니다드 포트오브스페인(Port-of-Spain)의 라벤틸 언덕(Laventille Hills)에 위치한 요새이다.
7. 2. 대중문화에서의 묘사
1970년 소련-이탈리아 합작 서사 영화인 《워털루》에서 픽턴 역은 영국 배우 잭 호킨스가 맡았다.[36]픽턴의 재판은 2011년 텔레비전 시리즈 가로우의 법 시즌 3 에피소드 3에 묘사되었으며, 픽턴 역은 패트릭 발라디가 연기했다.[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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