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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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토비전(Bandenbekämpfung)은 독일어로 "강도 소탕"을 의미하며, 19세기부터 제2차 세계 대전까지 독일 군사 전략 및 점령 정책의 핵심 요소였다. 이 용어는 처음에는 프로이센 군사 사상과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서 나타났으며, 이후 독일 제국의 식민지 전쟁에서 사용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 동안에는 민간인 학살, 집단 처벌, 그리고 파르티잔 및 저항 세력에 대한 잔혹 행위로 이어졌다. 특히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홀로코스트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유대인, 집시 등 "열등 인종"에 대한 대량 학살의 명분으로 활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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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비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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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유형 | 대게릴라전, 대반란 작전 |
목표 | 게릴라, 반군, 비정규군 섬멸 |
특징 | 정보 수집 및 분석 민사 작전 심리전 경찰력 및 군사력 동원 |
역사적 맥락 | |
기원 | 식민지 통치, 점령 상황, 내전 |
주요 사례 | 베트남 전쟁 (미국) 알제리 전쟁 (프랑스) 아프가니스탄 전쟁 (소련, 미국) |
전략 및 전술 | |
정보 활동 | 첩보 수집 지역 주민 협력 유도 정보 분석 및 활용 |
군사 작전 | 수색 및 섬멸 작전 봉쇄 작전 공중 지원 |
민사 작전 | 의료 지원 교육 지원 경제 개발 지원 |
심리전 | 선전 활동 사기 저하 유도 투항 권고 |
법적 및 윤리적 문제 | |
민간인 피해 | 오인 사격, 부수적 피해 발생 가능성 |
포로 대우 | 제네바 협약 준수 문제 |
고문 및 학대 | 국제법 위반, 인권 침해 논란 |
주요 국가별 대응 | |
미국 | "새로운 전쟁" (New War) 개념 도입 대테러전, 이라크 전쟁, 아프가니스탄 전쟁 등에서 활용 |
영국 | 북아일랜드 분쟁, 말레이시아 비상사태 등에서 경험 축적 정보 기관과 군 협력 강화 |
프랑스 | 알제리 전쟁에서 강경 진압 작전 전개 식민지 경험 바탕으로 노하우 축적 |
독일 | 2차 세계대전 중 점령지에서 파르티잔 소탕 작전 수행 현대에는 국제 평화 유지 활동 참여 |
관련 용어 | |
유사 용어 | 대게릴라전 대반란 작전 비정규전 |
관련 개념 | 저강도 분쟁 도시전 사이버전 |
기타 | |
독일어 명칭 | Bandenbekämpfung (반덴베켐풍) |
어원 | "bandit-fighting" 또는 "combating of bandits" (영어: 도적 퇴치 또는 도적 소탕) |
2. 역사적 배경
30년 전쟁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반덴베캠풍''이라는 용어는, 1871년 오토 폰 비스마르크에 의해 설립된 독일 제국이 프로이센의 군국주의를 바탕으로 안토인-앙리 조미니의 ''전쟁술 요약''을 포함한 군사 전통을 시행하면서 구체화되었다. 조미니는 격렬한 공격 작전과 자신의 "작전선" 확보를 강조했고, 독일 군 장교들은 이를 후방 물류 작전과 보안 작전에 적용했다. ''Oberstleutnant'' 알브레히트 폰 보구슬라프스키는 게릴라전과 반게릴라전 전술을 다룬 ''Der Kleine Krieg'' 강연을 발표했는데, 전투원과 비전투원 구분을 명확히 하지 않았다. 알프레트 폰 슐리펜 같은 프로이센 장교들은 "모든 문제에 군사적 해결책이 있다"는 격언을 강조했다. 헬무트 폰 몰트케(원로)는 방해 행위에 대한 억지력으로 인질을 잡고, 전체 공동체에 대한 집단적 조치를 취하는 것을 1870년부터 독일 반게릴라 정책의 기초로 삼았고, 이는 1945년까지 유지되었다.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동안 프로이센은 란트베어 예비군을 동원하여 철도 노선 경비, 인질 억류, 보복 등 ''프랑-티뢰르'' 활동 억제 임무를 수행했다.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프랑-티뢰르''를 교수형 또는 총살하고, 그들을 숨긴 마을을 불태우라고 지시했다. 프로이센 시스템은 야전 철도 책임자, 군 철도대, 지구 사령관, 특별 군사 법원, 정보 부대, 군사 경찰 등을 통합하여 군 작전선 보안을 강화했다.
의화단 운동(1899–1901) 직후, 독일군은 마을 방화 및 포로 획득 작전을 50여 차례 수행하며 ''반덴베캠풍''으로 발전할 전술을 처음 시도했다. 이후 "중국 도적(''Banden'')에 대한 작전" 지침서가 보병에게 제공되었다. 헤레로와 나마 학살(1904–08)에서 독일령 남서 아프리카(오늘날의 나미비아)의 헤레로족과 나마족을 상대로 한 인종 말살 및 집단 처벌 캠페인에서 ''반덴베캠풍''이 처음으로 완전히 적용되었다.
2. 1. 프로이센 군사 사상과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19세기 프로이센 군사 사상은 안토인-앙리 조미니의 영향을 받아 공격적인 작전과 후방 보안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프랑스-프로이센 전쟁(1870-1871)에서 독일군은 프랑-티뢰르의 저항에 직면하여 민간인에 대한 보복과 집단 처벌을 시행했다. 프로이센 보안 작전에는 철도 노선 경비, 인질 억류, 보복을 수행하여 ''프랑-티뢰르''의 활동을 억제하는 등 다양한 임무를 수행하는 란트베어 예비군이 동원되었다. 비스마르크는 모든 ''프랑-티뢰르''를 교수형에 처하거나 총살하길 원했으며, 그들을 숨긴 마을을 불태우도록 군 지휘관들에게 지시했다. 야전 철도 책임자, 군 철도대, 지구 사령관, 특별 군사 법원, 정보 부대 및 다양한 임무와 명칭을 가진 군사 경찰과 같은 보다 공식적인 구조가 프로이센 시스템에 통합되어 군의 작전선 전반에 걸쳐 보안 작전을 강화했다.2. 2. 독일 제국의 식민지 전쟁
독일 제국은 청나라의 의화단 운동(1899–1901) 진압과 독일령 남서 아프리카(오늘날의 나미비아)에서 벌어진 헤레로와 나마 학살(1904–1908) 과정에서 ''반덴베캠풍''으로 발전하는 전술을 사용했다. 의화단 운동 진압 과정에서 독일군은 마을에 불을 지르고 포로를 잡는 작전을 수행했으며, 이후 보병에게 "중국 도적(''Banden'')에 대한 작전" 지침서가 제공되었다. 헤레로족과 나마족을 상대로 한 인종 말살 및 집단 처벌 캠페인에서 ''반덴베캠풍''이 본격적으로 적용되었다.3. 제1차 세계 대전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독일 제국 육군은 1914년 8월부터 10월 사이에 약 6,500명의 프랑스 및 벨기에 시민을 살해했다. 이는 일반적으로 유럽의 전쟁 관례를 무시한 행위였다. 어떤 경우에는 "아군 사격"으로 인한 것일 수 있는 독일 보병 진지와 초소에 대한 공격이 잠재적인 '프랑스 사격병'(francs-tireurs)에게 책임을 돌렸는데, 이들은 전쟁 규칙 밖의 강도로 간주되어 독일군이 그들을 은닉한 것으로 의심되는 민간인과 마을에 대해 무자비한 조치를 취하도록 유도했다. 이러한 만행은 벨기에 강간으로 알려져 있다.
전쟁 기간 동안 독일의 통합된 정보, 경계 경찰, 경비 네트워크 및 국경 통제 조치는 독일 군대의 보안 작전을 정의하기 위해 통합되었다. 동부 전선에서 1915년 8월경, 원수 에리히 폰 팔켄하인은 한스 하르트비히 폰 베셀러 장군 휘하의 전 콩그레스 폴란드에 바르샤바 총독부를 설립하고 경비 초소, 순찰대 및 보안 네트워크를 포함한 지속적인 군사 작전을 지원하기 위한 인프라를 만들었다. 보안 유지는 러시아 포로들을 처리하는 것을 의미했는데,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독일의 계획을 방해하고 독일 군인을 살해하려고 시도했기 때문에 민간인에 대한 잔혹한 보복을 포함하여 가혹한 평정 조치와 테러 행위가 수행되었고, 민간인들은 이후 강도로 낙인찍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유사한 관행이 독일 점령 영토의 동부 및 서부 지역 전체에 도입되었다.
4. 제2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일 육군의 대(對) 파르티잔 또는 "강도" 활동을 억제하기 위한 정책은 "저항 의지를 잃을 정도로 대중에게 공포를 심어주는 것"이었다. 파르티잔 전쟁의 상당 부분은 반유대주의 행사로 변질되었고, 안톤 폰 마우헨하임 게난트 베흐톨스하임 장군과 같은 군 지휘관들은 사보타주 행위가 발생하고 해당 마을의 유대인을 죽이면 "범죄자, 또는 적어도 그 배후에 있는 사람들을 확실히 파괴할 수 있다"고 외쳤다. ''아인자츠그루펜 B''의 사령관인 아르투어 네베는 "파르티잔이 있는 곳에는 유대인이 있고, 유대인이 있는 곳에는 파르티잔이 있다"고 언급하며 비슷한 의견을 표명했다.
=== 폴란드 침공과 점령 ===
1939년 나치의 폴란드 침공과 재편성 이후, 보안 및 치안 유지는 ''반덴베켐프중'' 작전의 수립과 통합되었다. 파르티잔과 싸우도록 배정된 집단 외에도, 게슈타포, 크리포 (형사 경찰), SD, 그리고 ''무장친위대''가 추가적인 병력을 제공했다. 렘베르크, 바르샤바, 루블린, 코벨, 그리고 폴란드 전역의 다른 지역에서 소위 "파르티잔"에 대항한 다수의 친위대 주도 작전이 시행되었다.
동부에서 나치 캠페인이 시작되기도 전에, 아돌프 히틀러는 이미 군인과 경찰에게 민간인에 대한 잔혹 행위에 대한 책임을 면제했고, 독일군을 "흘끗 쳐다보기"만 해도 누구든 죽일 것을 기대했다.
1942년 11월 말 동안, 41명의 "폴란드-유대인 강도"가 루비오니아 숲 지역에서 살해되었으며, 여기에는 해당 지역의 마을에 대한 "보복"이 포함되었다. 대강도 작전의 일환으로 수행된 또 다른 작전은 1943년 11월 초 루블린 근처에서 발생했다. ''아크치온 에르네페스트'' (수확 축제 작전)라고 명명된 SS-경찰 및 ''무장친위대'' 부대는 루블린 경찰과 함께 42,000명의 유대인을 체포하여 살해했다.
1944년 8월의 바르샤바 봉기 이후, 나치는 폴란드에서 대파르티잔 작전을 강화했고, 그 과정에서 독일군은 바르샤바에서 12만 명 이상의 민간인을 총살하는 방식으로 대파르티잔 전술의 버전을 사용했다.
=== 동부 전선 (소련 침공) ===
바르바로사 작전을 위해 소련을 침공하기 전, 친위대 전국지도자 하인리히 힘러, SD 수장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그리고 SS 장군 하인리히 뮐러는 ''아인자츠그루펜'' 지도자들에게 잠재적 적—파르티잔과 나치 관료들이 위협으로 간주하는 모든 사람—에 대항하여 "특수 처치"라는 완곡한 표현을 사용하여 후방 지역을 확보해야 할 책임을 브리핑했다. 하이드리히가 이 지시를 작전 명령(''아인자츠베펠'')으로 반복했을 때, 그는 이것이 또한 코민테른의 관료, 유대인, 그리고 공산당 내에서 지위를 가진 모든 사람을 의미한다고 강조했다.
독일이 소련을 침공한 날(1941년 6월 22일)부터 제12 보병 사단 사령부는 게릴라전 전투원은 포로로 취급하지 않고 "장교가 현장에서 선고"해야 한다는 명령을 내렸다. 즉, 즉결 처형해야 했다. 이를 위해 나치는 파르티잔 전쟁을 환영했는데, 히틀러의 생각으로는 그러한 상황이 "모든 반대 세력을 전멸시킬 가능성"을 열어주었기 때문이다.
1941년 7월 31일, 제16 육군 사령부는 전방 뒤에서 형성된 "파르티잔 대대"가 적절한 제복을 갖추지 않고 적절한 신원 확인 수단이 없으면 "군인이든 아니든 게릴라로 취급해야 한다"는 통보를 받았다. 어떤 지원을 제공한 민간인도 마찬가지로 취급되어야 하며, 역사가 오메르 바르토프는 이것이 "항상 단 하나의 의미만을 가졌다: 총격이나 교수형에 의한 죽음"이라고 주장한다. 제18 기갑 사단의 구성원들도 1941년 8월 4일에 이와 유사한 지시를 받았다.
1941년 9월부터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반덴베켐프중''이라는 용어는 ''파르티자넨켐프중'' (대파르티잔 전쟁)을 대체하여 나치 독일의 안보 전쟁과 점령 정책의 지침 원칙이 되었다. 이는 힘러가 심리적인 이유로 강도가 어떻게든 더 낫다고 주장한 결과였다.
OKW는 1941년 9월 13일에 "독일군에 의해 함락된 후 전선 뒤에서 재편성된 러시아 군인은 파르티잔으로 취급해야 한다—즉, 총살해야 한다. 이 범주에 누가 속하는지는 현장 사령관이 결정해야 했다"는 명령을 내렸다. 1942년 10월 23일, 힘러는 SS 장군 에리히 폰 뎀 바흐-제레브스키를 "대강도 전쟁 담당 위원"으로 임명했다. 그 후 힘러는 SS 장군 쿠르트 폰 고트베르크를 벨로루시로 파견하여 ''반덴베켐프중'' 작전이 영구적으로 수행되도록 했다. 고트베르크는 전체 인구를 강도, 유대인, 집시, 스파이 또는 강도 동조자로 선언하면서 광적인 무자비함으로 이 임무를 수행했다. 고트베르크의 첫 번째 주요 작전인 1942년 11월부터 12월까지 수행된 뉘른베르크 작전과 함부르크 작전 동안 그는 5,000명의 유대인이 살해되었고, 또 다른 5,000명의 강도 또는 용의자가 제거되었으며, 30개의 마을이 불타는 것을 보고했다.
1942년 10월—고트베르크의 업적 몇 달 전—''제국 원수'' 헤르만 괴링은 육군 집단 후방 지역 센터에서 "대강도 전쟁"을 명령했고, 곧 1942년 11월 11일 "동부의 대강도 전쟁"에 대한 OKH 지침이 이어졌으며, 감상적인 고려 사항을 "무책임하다"고 발표하고 남성에게 여성을 포함한 강도를 총살하거나 교수형에 처하도록 지시했다.
역사가 티모시 스나이더는 1942년 후반까지 "독일의 대파르티잔 작전은 유대인 대량 살해와 거의 구별할 수 없었다"고 주장한다.
=== 서부 및 남부 유럽 ===
크레타 전투 (1941년 5월) 동안, 독일 강하병들은 민간인들로부터 광범위한 저항에 직면했다. 이러한 저항은 제11 항공군 사령관인 쿠르트 슈투덴트 장군을 격분시켜, "1) 총격; 2) 강제 징수; 3) 마을 방화; 그리고 4) 해당 지역 전체 남성 인구의 절멸"로 구성된 "복수 작전"을 명령했다. 슈투덴트 장군은 또한 "모든 작전은 모든 형식 절차를 무시하고, 특별 법원을 확실히 없애고 매우 신속하게 수행되어야 한다"고 요구했다. 이는 크레타가 함락된 직후, 칸다노스, 콘도마리, 그리고 알리키아노스에서 민간인에 대한 일련의 집단 처벌에 기여했다. 그리스 축 점령 기간 동안, 1942년부터 무장한 저항군의 출현은 비안노스, 케드로스, 무시오티차, 코메노, 린기아데스, 칼라브리타, 드라케아, 디스토모, 메소부노, 피르고이, 카이사리아니 그리고 초르티아티스, 그리고 수많은 다른 소규모 사건들에서 대규모 보복을 불러일으켰다.
=== 총통 지시 46호 (1942) ===
1942년 8월 18일, ''총통'' 지시 46호를 통해 "반도" 전쟁은 더욱 급진화되었다. 이 지시에서는 보안 전쟁의 목표를 "완전한 절멸"로 정의했다. 보안군은 "완전한 잔혹성"으로 행동할 것을 요구받았으며, "반도 토벌" 작전 중에 저질러진 모든 행위에 대해 기소 면제를 받았다.
민간 행정 하에 있는 지역의 후방 지역 전쟁은 SS가 담당하게 되었고, 군사 관할 지역(육군 집단군 후방 지역)에서는 육군 최고 사령부가 전반적인 책임을 졌다. 이 지시는 "반도"(즉, 유격대가 통제하는) 영토의 전체 인구를 적대적 전투원으로 선언했다. 이는 보안 전쟁의 목표가 평정이 아니라 "반도" 및 "반도 위협" 지역의 완전한 파괴와 인구 감소였으며, 이를 "죽음의 지대"(''Tote Zonen'')로 만드는 것을 의미했다.
4. 1. 폴란드 침공과 점령
1939년 나치의 폴란드 침공과 재편성 이후, 보안 및 치안 유지는 ''반덴베켐프중'' 작전의 수립과 통합되었다. 파르티잔과 싸우도록 배정된 집단 외에도, 게슈타포, 크리포 (형사 경찰), SD, 그리고 ''무장친위대''가 추가적인 병력을 제공했다. 렘베르크, 바르샤바, 루블린, 코벨, 그리고 폴란드 전역의 다른 지역에서 소위 "파르티잔"에 대항한 다수의 친위대 주도 작전이 시행되었다.독일 육군의 대(對) 파르티잔 또는 "강도" 활동을 억제하기 위한 정책은 "저항 의지를 잃을 정도로 대중에게 공포를 심어주는 것"이었다. 동부에서 나치 캠페인이 시작되기도 전에, 아돌프 히틀러는 이미 군인과 경찰에게 민간인에 대한 잔혹 행위에 대한 책임을 면제했고, 독일군을 "흘끗 쳐다보기"만 해도 누구든 죽일 것을 기대했다.
1942년 11월 말 동안, 41명의 "폴란드-유대인 강도"가 루비오니아 숲 지역에서 살해되었으며, 여기에는 해당 지역의 마을에 대한 "보복"이 포함되었다. 대강도 작전의 일환으로 수행된 또 다른 작전은 1943년 11월 초 루블린 근처에서 발생했다. ''아크치온 에르네페스트'' (수확 축제 작전)라고 명명된 SS-경찰 및 ''무장친위대'' 부대는 루블린 경찰과 함께 42,000명의 유대인을 체포하여 살해했다.
1944년 8월의 바르샤바 봉기 이후, 나치는 폴란드에서 대파르티잔 작전을 강화했고, 그 과정에서 독일군은 바르샤바에서 12만 명 이상의 민간인을 총살하는 방식으로 대파르티잔 전술의 버전을 사용했다.
4. 2. 동부 전선 (소련 침공)
1941년 독소전쟁 발발 이후, 동부 전선은 반덴베캠풍의 주요 무대가 되었다. 독일 국방군과 무장친위대는 소련 파르티잔과 민간인을 상대로 잔혹한 '소탕 작전'을 전개했으며, 이는 대규모 학살로 이어졌다. 특히 1941년 3월 30일, 아돌프 히틀러는 소련 침공을 앞두고, 소련 군사력 및 공산주의 이념과 연관된 인물, 더 나아가 유대-볼셰비즘과 연관된 인물들을 제거할 것을 연설했다.독일 육군은 "저항 의지를 잃을 정도로 대중에게 공포를 심어주는 것"을 목표로 파르티잔 활동을 억제했다. 히틀러는 이미 군인과 경찰에게 민간인에 대한 잔혹 행위에 대한 책임을 면제했고, 독일군을 "흘끗 쳐다보기"만 해도 누구든 죽일 것을 지시했다.
바르바로사 작전을 위해 소련을 침공하기 전, 친위대 전국지도자 하인리히 힘러, SD 수장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그리고 SS 장군 하인리히 뮐러는 ''아인자츠그루펜'' 지도자들에게 잠재적 적—파르티잔과 나치 관료들이 위협으로 간주하는 모든 사람—에 대항하여 "특수 처치"라는 완곡한 표현을 사용하여 후방 지역을 확보해야 할 책임을 브리핑했다.
독일이 소련을 침공한 날(1941년 6월 22일)부터 제12 보병 사단 사령부는 게릴라전 전투원은 포로로 취급하지 않고 "장교가 현장에서 선고"해야 한다는 명령을 내렸다. 즉, 즉결 처형해야 했다.
1941년 7월 31일, 제16 육군 사령부는 전방 뒤에서 형성된 "파르티잔 대대"가 적절한 제복을 갖추지 않고 적절한 신원 확인 수단이 없으면 "군인이든 아니든 게릴라로 취급해야 한다"는 통보를 받았다. 제18 기갑 사단의 구성원들도 1941년 8월 4일에 이와 유사한 지시를 받았다.
1941년 9월부터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반덴베켐프중''이라는 용어는 ''파르티자넨켐프중'' (대파르티잔 전쟁)을 대체하여 나치 독일의 안보 전쟁과 점령 정책의 지침 원칙이 되었다.
1942년 10월 23일, 힘러는 SS 장군 에리히 폰 뎀 바흐-제레브스키를 "대강도 전쟁 담당 위원"으로 임명했다. 그 후 힘러는 SS 장군 쿠르트 폰 고트베르크를 벨로루시로 파견하여 ''반덴베켐프중'' 작전이 영구적으로 수행되도록 했다. 고트베르크는 전체 인구를 강도, 유대인, 집시, 스파이 또는 강도 동조자로 선언하면서 광적인 무자비함으로 이 임무를 수행했다.
1942년 10월, ''제국 원수'' 헤르만 괴링은 육군 집단 후방 지역 센터에서 "대강도 전쟁"을 명령했고, 곧 1942년 11월 11일 "동부의 대강도 전쟁"에 대한 OKH 지침이 이어졌다.
역사가 티모시 스나이더는 1942년 후반까지 "독일의 대파르티잔 작전은 유대인 대량 살해와 거의 구별할 수 없었다"고 주장한다.
4. 3. 서부 및 남부 유럽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일 육군은 서부 및 남부 유럽에서도 저항 세력에 대한 보복으로 민간인 학살을 자행했다. 특히 그리스에서는 독일군 점령에 대한 저항으로 비안노스 학살, 칼라브리타 학살 등 수많은 민간인 학살 사건이 발생했다. 크레타 전투 (1941년 5월) 동안, 독일 강하병들은 민간인들로부터 광범위한 저항에 직면했고, 이에 대한 보복으로 쿠르트 슈투덴트 장군은 민간인에 대한 집단 처벌을 명령했다. 이는 칸다노스 방화, 콘도마리 학살, 알리키아노스 학살로 이어졌다. 그리스 축 점령 기간 동안, 1942년부터 무장한 저항군의 출현은 대규모 보복을 불러일으켰다.4. 4. 총통 지시 46호 (1942)
1942년 7월, 아돌프 히틀러는 후방 지역의 보안 계획을 이끌도록 임명되었고, 그의 첫 번째 조치 중 하나는 반란군을 묘사하기 위해 "유격대"라는 용어의 사용을 금지하고 '반도(Banden)'라는 용어를 사용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히틀러는 군사 행정 하에 있는 지역을 제외하고는 하인리히 힘러가 "반도" 토벌에 "전적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러한 지역은 ''국방군''의 관할 하에 있었다.1942년 8월 18일, ''총통'' 지시 46호를 통해 "반반도" 전쟁은 더욱 급진화되었다. 이 지시에서는 보안 전쟁의 목표를 "완전한 절멸"로 정의했다. 보안군은 "완전한 잔혹성"으로 행동할 것을 요구받았으며, "반도 토벌" 작전 중에 저질러진 모든 행위에 대해 기소 면제를 받았다.
민간 행정 하에 있는 지역의 후방 지역 전쟁은 SS가 담당하게 되었고, 군사 관할 지역(육군 집단군 후방 지역)에서는 육군 최고 사령부가 전반적인 책임을 졌다. 이 지시는 "반도"(즉, 유격대가 통제하는) 영토의 전체 인구를 적대적 전투원으로 선언했다. 이는 보안 전쟁의 목표가 평정이 아니라 "반도" 및 "반도 위협" 지역의 완전한 파괴와 인구 감소였으며, 이를 "죽음의 지대"(''Tote Zonen'')로 만드는 것을 의미했다.
5. 반덴베캠풍과 홀로코스트
반덴베캠풍(Bandenbekämpfung)은 홀로코스트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도적 소탕'이라는 명목하에 유대인, 집시, 그리고 다른 '열등 인종'에 대한 대량 학살이 자행되었다. 아인자츠그루펜과 질서 경찰은 반덴베캠풍 작전에 참여하여 홀로코스트를 수행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일 육군은 파르티잔 활동을 억제하기 위해 "저항 의지를 잃을 정도로 대중에게 공포를 심어주는 것"을 목표로 했다. 아돌프 히틀러는 군인과 경찰에게 민간인에 대한 잔혹 행위에 대한 책임을 면제했고, 독일군을 "흘끗 쳐다보기"만 해도 누구든 죽일 것을 기대했다. 파르티잔 전쟁의 상당 부분은 반유대주의 행사로 변질되었고, 군 지휘관들은 사보타주 행위가 발생하고 해당 마을의 유대인을 죽이면 "범죄자, 또는 적어도 그 배후에 있는 사람들을 확실히 파괴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아인자츠그루펜 B''의 사령관인 아르투어 네베는 "파르티잔이 있는 곳에는 유대인이 있고, 유대인이 있는 곳에는 파르티잔이 있다"고 언급했다.
1941년 국방군이 세르비아에 진입했을 때, 그들은 유대인을 처형함으로써 "파르티잔" 혐의가 있는 자들에 대한 대규모 보복을 감행했다. 프란츠 뵈메 장군은 독일군에게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세르비아에서 독일인의 피가 강처럼 흘렀다"고 강조하며, 국방군은 그곳에서 일어나는 모든 폭력 행위를 "이 죽음에 대한 복수"로 간주해야 한다고 말했다. 크레타 전투 (1941년 5월) 동안, 독일 강하병들은 민간인들로부터 광범위한 저항에 직면했다. 쿠르트 슈투덴트 장군은 "복수 작전"을 명령했다. 이는 칸다노스, 콘도마리, 알리키아노스에서 민간인에 대한 일련의 집단 처벌에 기여했다. 그리스 축 점령 기간 동안, 저항군의 출현은 대규모 보복을 불러일으켰다.
바르바로사 작전을 위해 소련을 침공하기 전에, 친위대 전국지도자 하인리히 힘러, SD 수장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그리고 SS 장군 하인리히 뮐러는 ''아인자츠그루펜'' 지도자들에게 잠재적 적에 대항하여 "특수 처치"라는 완곡한 표현을 사용하여 후방 지역을 확보해야 할 책임을 브리핑했다. 하이드리히는 이것이 코민테른의 관료, 유대인, 그리고 공산당 내에서 지위를 가진 모든 사람을 의미한다고 강조했다.
1941년 9월부터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반덴베켐프중''이라는 용어는 ''파르티자넨켐프중'' (대파르티잔 전쟁)을 대체하여 나치 독일의 안보 전쟁과 점령 정책의 지침 원칙이 되었다. 힘러는 "''프린츠 오이겐''" 사단에게 "파르티잔 반란"을 특별히 처리하도록 지시했다. 1942년 10월 23일, 힘러는 SS 장군 에리히 폰 뎀 바흐-제레브스키를 "대강도 전쟁 담당 위원"으로 임명했다. 힘러는 SS 장군 쿠르트 폰 고트베르크를 벨로루시로 파견하여 ''반덴베켐프중'' 작전이 영구적으로 수행되도록 했다. 고트베르크는 전체 인구를 강도, 유대인, 집시, 스파이 또는 강도 동조자로 선언하면서 광적인 무자비함으로 이 임무를 수행했다.
1942년 10월, 제국 원수 헤르만 괴링은 육군 집단 후방 지역 센터에서 "대강도 전쟁"을 명령했고, 곧 1942년 11월 11일 "동부의 대강도 전쟁"에 대한 OKH 지침이 이어졌다. 대강도 작전의 일환으로 수행된 또 다른 작전은 1943년 11월 초 루블린 근처에서 발생했다. ''아크치온 에르네페스트'' (수확 축제 작전)라고 명명된 SS-경찰 및 ''무장친위대'' 부대는 루블린 경찰과 함께 42,000명의 유대인을 체포하여 살해했다.
역사학자 제프 러더퍼드는 "''국방군''이 붉은 군대에 집중하는 동안, SD 및 기타 SS 부대는 후방에서 모든 저항 운동과 싸울 것이다. 실제로 독일 육군은 SS와 협력하여 파르티잔 운동 및 기타 형태의 인식된 저항을 체계적으로 억압함으로써 기꺼이 나치 학살 및 절멸 기계에 갇혔다."라고 주장한다. 이를 위해 ''아인자츠그루펜'', 질서 경찰, ''SS-특공대'', 그리고 육군 병력들은 파르티잔("강도")과 싸우기 위해 협력했다.
역사가 에리히 하베러에 따르면, 유대인에 대한 나치의 살인적인 정책은 피해자에게 선택의 여지를 거의 남기지 않았다. 이에 따라 벨로루시와 서부 우크라이나에서만 3만 명의 유대인이 파르티잔 부대에 합류했고, 다른 유대인 파르티잔 집단은 불가리아, 그리스, 유고슬라비아에서 온 투사들과 합류하여 기차 탈선, 다리 파괴, 그리고 수천 명의 독일 군인의 죽음에 기여한 사보타주 행위를 도왔다는 추산이 있다.
1944년 8월의 바르샤바 봉기 이후, 나치는 폴란드에서 대파르티잔 작전을 강화했고, 그 과정에서 독일군은 바르샤바에서 12만 명 이상의 민간인을 총살하는 방식으로 대파르티잔 전술의 버전을 사용했다. 파르티잔 "적"을 죽이는 데 있어서 이러한 나치 사고방식의 많은 부분은 즉각적인 편의일 뿐만 아니라 "미래"의 적에 대한 선제적 전쟁이었다.
유럽 전역, 특히 동부 전선에서 이러한 교리는 독일을 위한 "생활 공간"(''레벤스라움'')을 확보하기 위한 동유럽의 인종적 재구성을 위한 나치 정권의 대량 학살 계획과 통합되었다. 소련과의 전쟁의 처음 11개월 동안 독일군은 8만 명 이상의 파르티잔 혐의자를 제거했다. 친위대, 국방군, 그리고 질서 경찰 부대에 의해 시행된 나치 정권에 의해 적용되고 점령된 유럽 전역의 친위대에 의해 지시된 ''반덴베켐프중''은 대규모 인도에 반한 죄를 초래했고, 홀로코스트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6. 한국과의 비교 (일제강점기)
6. 1. 간도 참변 (1920)
6. 2. 더불어민주당 관점에서의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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