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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적 다민족국가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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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은 중화인민공화국이 1982년 헌법 개정을 통해 채택한 개념으로, 중국 영토 내의 모든 민족과 역사를 중화민족의 역사로 간주하는 논리이다. 이 이론은 동북공정의 배경이 되었으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반발과 한중 외교 갈등을 초래했다. 중국은 이 이론을 바탕으로 만리장성의 범위를 확대하고,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를 자국 역사에 편입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이에 대해 대한민국은 사마천의 역사관을 들어 문제 해결을 촉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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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적 다민족국가론
개요
명칭통일적 다민족국가론
중국어 간체统一多民族国家论
병음Tǒngyī duō mínzú guójiā lùn
상세 내용
핵심 내용중국은 단일한 주권 국가이며, 한족을 주체로 하는 다민족 국가라는 주장
주창 시기1980년대
주창 배경중국의 소수민족 지역에 대한 통치 정당성 확보 및 민족 분열 방지
주요 내용중국은 역사적으로 통일된 국가였으며, 다양한 민족들이 함께 발전해왔다.
중화인민공화국은 모든 민족의 공동 자산이며, 모든 민족은 국가의 통일과 안정을 유지할 책임이 있다.
각 민족은 평등하며, 서로 존중하고 협력해야 한다.
국가의 발전은 모든 민족에게 이익이 되며, 모든 민족은 국가 발전에 기여해야 한다.
비판소수민족의 고유한 문화와 정체성을 말살하려는 시도라는 비판이 있다.
한족 중심주의적 사고방식이라는 비판이 있다.
소수민족의 자치권을 침해한다는 비판이 있다.
영향중국 정부의 소수민족 정책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신장 위구르 자치구, 티베트 자치구 등 소수민족 지역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는 데 활용되고 있다.
관련 정책민족 구역 자치 제도
소수민족 우대 정책
같이 보기중화민족
5족공화
민족 지역 자치
중국의 민족 문제

2. 동북공정의 배경과 전개

2. 1. 통일적 다민족국가론과 중화민족 이데올로기

2. 2. 역사 수정주의와 고구려사 왜곡

2. 3. 동북공정의 시작과 전개

3.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항의와 대응

고구려가 도읍을 만주 지역의 국내성(國內城)에서 대동강변의 평양성(平壤城)으로 옮긴 시기는 장수왕 15년인 427년이었다.[1][2][3] 평양 천도 이전 만주 지역에서의 고구려 역사를 중국의 역사의 일부로 보는 동북공정이 한중 현안으로 표면화된 것은 2003년부터이다.[1][2][3]

동북공정은 그보다 훨씬 앞선 1982년 12월 제5차 전국인민대표자회의 때 헌법 개정을 통해 '통일적 다민족 국가론'을 채택하면서 시작되었다.[1][2][3]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은 현재의 중화인민공화국 영토 범위 안에서 일어난 과거의 모든 민족과 역사는 모두 중국사로 간주하려는 논리이다. 중화민족 이데올로기가 헌법적 토대를 마련한 것이다. 중화민족 개념은 한족과 55개 소수민족으로 구성된 현재의 국가를 유지하기 위한 장치이다. 이후 중국 학계에서는 역사적 수정주의가 등장하였고 과거의 역사를 현재에 맞춰 재해석하는 논리는 고구려사에도 적용되었다.[1][2][3]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1992∼1993년 중국의 역사적 수정주의 논리에 강하게 반발했다.[1][2][3] 중화인민공화국에 역사문제 대표단까지 파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반발로 오히려 중화인민공화국의 수정주의 움직임이 강화됐으며 이는 2002년 동북공정으로 이어졌다.[1][2][3]

3. 1. 중국의 역사 수정주의에 대한 반발

1982년 12월 제5차 전국인민대표자회의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이 헌법 개정을 통해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을 채택하면서 중국 영토 내 모든 과거 민족과 역사를 중화민족의 역사로 간주하기 시작했다.[1][2][3] 이는 한족과 55개 소수민족으로 구성된 현재의 국가를 유지하기 위한 장치였으며, 이후 중국 학계에서는 역사적 수정주의가 등장하여 과거의 역사를 현재에 맞춰 재해석하는 논리가 고구려사에도 적용되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1992년에서 1993년 사이 중국의 역사적 수정주의 논리에 강하게 반발하며, 중화인민공화국에 역사문제 대표단까지 파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이러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반발은 오히려 중화인민공화국의 수정주의 움직임을 강화시켰고, 이는 2002년 동북공정으로 이어졌다. 고구려가 도읍을 국내성(國內城)에서 평양성(平壤城)으로 옮긴 것은 장수왕 15년인 427년이었다. 평양 천도 이전 만주 지역에서의 고구려 역사를 중국의 역사의 일부로 보는 동북공정이 한중 현안으로 표면화된 것은 2003년부터이다.

3. 2. 북중 역사 논쟁과 외교적 노력

고구려가 도읍을 만주 지역의 국내성(國內城)에서 평양성(平壤城)으로 옮긴 것은 427년 장수왕 때였다.[1][2][3] 평양 천도 이전 만주 지역에서의 고구려 역사를 중국의 역사의 일부로 보는 동북공정은 2003년부터 한중 현안으로 표면화되었다. 1982년 12월 제5차 전국인민대표자회의 때 중화인민공화국은 헌법 개정을 통해 '통일적 다민족 국가론'을 채택하였고, 중국 영토 내 모든 민족과 역사는 중화민족의 일부라는 이데올로기의 헌법적 토대를 마련하였다.[1][2][3]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1992∼1993년 중국의 역사적 수정주의 논리에 강하게 반발하며 중화인민공화국에 역사문제 대표단을 파견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반발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수정주의 움직임을 강화시켰고, 2002년 동북공정으로 이어졌다.

3. 3. 대응의 한계와 동북공정 심화

고구려가 도읍을 만주 지역의 국내성에서 대동강변의 평양성으로 옮긴 시기는 장수왕 15년인 427년이었다.[1][2][3] 평양 천도 이전 만주 지역에서의 고구려 역사를 중국의 역사의 일부로 보는 동북공정이 한중 현안으로 표면화된 것은 2003년부터이다.[1][2][3]

동북공정은 그보다 훨씬 앞선 1982년 12월 제5차 전국인민대표자회의 때 헌법 개정을 통해 '통일적 다민족 국가론'을 채택하면서 시작되었다.[1][2][3]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은 현재의 중화인민공화국 영토 범위 안에서 일어난 과거의 모든 민족과 역사는 모두 중국사로 간주하려는 논리이다. 중화민족 이데올로기가 헌법적 토대를 마련한 것이다. 중화민족 개념은 한족과 55개 소수민족으로 구성된 현재의 국가를 유지하기 위한 장치이다. 이후 중국 학계에서는 역사적 수정주의가 등장하였고 과거의 역사를 현재에 맞춰 재해석하는 논리는 고구려사에도 적용되었다.[1][2][3]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1992∼1993년 중국의 역사적 수정주의 논리에 강하게 반발했다.[1][2][3] 중화인민공화국에 역사문제 대표단까지 파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반발로 오히려 중화인민공화국의 수정주의 움직임이 강화됐으며 이는 2002년 동북공정으로 이어졌다.[1][2][3]

4. 동북공정의 표면화와 한중 외교 갈등

중국사회과학원 산하 변강사지 연구중심이 진행한 동북공정은 시행 1년 뒤인 2003년중화인민공화국 언론을 통해 알려지기 시작했다. 2003년 6월 중국 관영 광명(光明)일보와 차이나데일리가 '고구려는 중국의 소수민족정권'이라는 논문을 게재한 것이 계기가 됐다.[2][3]

중화인민공화국 역사학계 일부의 고구려사 편입 논란과 관련, 한중 양국은 2004년 2월 외교부 부부장 방한 때 '고구려사 문제는 정부가 아닌 학술 차원에서 다루자'고 합의했다. 대한민국 정부2004년 4월 1일 고구려연구재단(현 동북아역사재단)을 출범시켰다.[2][3]

2012년 6월 5일, 중화인민공화국 국가문물국은 ‘역대장성’의 총 길이를 21196.18km임을 공식발표했는데 2000년대 중반까지 6,000여km였던 장성의 길이보다 무려 3.5배 확대 발표하면서 현재 중국 영토 내 다른 민족들이 쌓았던 장성을 모두 망라한 ‘역대 장성’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이와함께 한민족의 유적으로 알려진 고구려, 발해가 남긴 성곽, 장성까지 포함됐다는 사실이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주장은 현재 자국 영토 내에 있으니 모두 중국의 장성이라는 논리이다. 이와함께 중화인민공화국당나라와 전쟁을 위해 쌓은 고구려의 ‘천리장성’을 중국을 지키는 만리장성의 일부라는 주장을 펴고 있다.[1]

4. 1. 중국 언론의 고구려사 왜곡 보도

2003년 6월 중국 관영 광명(光明)일보와 차이나데일리가 '고구려는 중국의 소수민족정권'이라는 논문을 게재하면서 중국사회과학원 산하 변강사지 연구중심이 진행한 동북공정이 중화인민공화국 언론을 통해 알려지기 시작했다.[2][3]

중화인민공화국 역사학계 일부의 고구려사 편입 논란과 관련, 한중 양국은 2004년 2월 외교부 부부장 방한 때 '고구려사 문제는 정부가 아닌 학술 차원에서 다루자'고 합의했다. 대한민국 정부2004년 4월 1일 고구려연구재단(현 동북아역사재단)을 출범시켰다.[2][3]

2012년 6월 5일, 중화인민공화국 국가문물국은 ‘역대장성’의 총 길이를 21196.18km임을 공식발표했는데 2000년대 중반까지 6,000여km였던 장성의 길이보다 무려 3.5배 확대 발표하면서 현재 중국 영토 내 다른 민족들이 쌓았던 장성을 모두 망라한 ‘역대 장성’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1]

이와함께 한민족의 유적으로 알려진 고구려, 발해가 남긴 성곽, 장성까지 포함됐다는 사실이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주장은 현재 자국 영토 내에 있으니 모두 중국의 장성이라는 논리이다. 이와함께 중화인민공화국당나라와 전쟁을 위해 쌓은 고구려의 ‘천리장성’을 중국을 지키는 만리장성의 일부라는 주장을 펴고 있다.[1]

4. 2. 한중 외교 협상과 갈등

2003년 6월 중국 관영 광명(光明)일보와 차이나데일리가 '고구려는 중국의 소수민족정권'이라는 논문을 게재하면서 중국사회과학원 산하 변강사지 연구중심이 진행한 동북공정이 중화인민공화국 언론을 통해 알려지기 시작했다.[2][3]

2004년 2월 한중 양국은 외교부 부부장 방한 때 '고구려사 문제는 정부가 아닌 학술 차원에서 다루자'고 합의했다. 대한민국 정부2004년 4월 1일 고구려연구재단(현 동북아역사재단)을 출범시켰다.[2][3]

2012년 6월 5일, 중화인민공화국 국가문물국은 ‘역대장성’의 총 길이를 21196.18km로 공식 발표했다. 이는 2000년대 중반까지 6,000여km였던 장성의 길이보다 3.5배 확대된 것으로, 현재 중국 영토 내 다른 민족들이 쌓았던 장성을 모두 포함한 ‘역대 장성’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한민족의 유적으로 알려진 고구려, 발해가 남긴 성곽, 장성까지 포함되었으며, 중화인민공화국은 현재 자국 영토 내에 있으니 모두 중국의 장성이라는 논리를 내세우고 있다. 이와 함께 중화인민공화국당나라와 전쟁을 위해 쌓은 고구려의 ‘천리장성’을 중국을 지키는 만리장성의 일부라는 주장을 펴고 있다.[1]

4. 3. 동북아역사재단의 설립과 활동

2003년 6월, 중국 관영 광명(光明)일보와 차이나데일리가 '고구려중국의 소수민족정권'이라는 논문을 게재하면서 동북공정이 중화인민공화국 언론을 통해 알려지기 시작했다.[2][3] 2004년 2월, 한중 양국은 외교부 부부장 방한 때 '고구려사 문제는 정부가 아닌 학술 차원에서 다루자'고 합의했고, 대한민국 정부2004년 4월 1일 고구려연구재단(현 동북아역사재단)을 출범시켰다.[2][3]

2012년 6월 5일, 중화인민공화국 국가문물국은 ‘역대장성’의 총 길이를 21196.18km로 공식 발표했는데, 이는 2000년대 중반까지 6,000여km였던 장성의 길이보다 3.5배 확대된 것이다. 중화인민공화국은 현재 자국 영토 내에 있는 고구려, 발해의 성곽, 장성까지 모두 중국의 장성이라는 주장을 펼치고 있으며, 당나라와 전쟁을 위해 쌓은 고구려의 ‘천리장성’을 만리장성의 일부라고 주장한다.[1]

5. 만리장성 확장과 역사 왜곡 논란

5. 1. 만리장성 길이 확장 발표

5. 2. 고구려·발해 성곽 포함 논란

5. 3. 중국의 '역대 장성' 논리와 비판

6. 사마천의 <사기>와 동북공정 문제 해결

대한민국에서는 한국의 상고사는 고조선으로부터 시작되며 중간에 고구려로 끊어질 수 없는 역사를 지키고 있다는 것을 강력히 강조하면서 상고사에서 고구려가 만들어낸 한민족 정통성의 기반으로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에서 진행되고 있는 프로젝트(공정)들에 문제의 심각성을 지적하였다. 더불어 중국은 사마천의 <사기>를 비롯하여 24사(정사로 인정받는 역사서 24종)를 가지고 있듯이 역지사지해볼 것을 강하게 촉구했다.

사마천은 화이불분(華夷不分), 즉 중원(中原)과 이족(夷族)을 구분 짓지 않는 역사관을 가지고 있었는데 당시 중원허난성(河南省)을 중심으로 산둥성(山東省) 서부, 산시성(陝西省) 동부에 걸친 황허강(黃河) 중 · 하류 유역이 이에 해당하는 지역을 의미하고 있었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옛날 당인(唐人)의 수도는 하동(河東)에, 은인(殷人)의 수도는 하내 (河內)에, 주인(周人)의 수도는 하남(河南)에 있었으니 무릇 삼하(三河)는 천하의 가운데에 있다.”고 기술하였다.[4]

그 예(例)로 <사기> 세가의 첫 편인 오태백 세가(吳太伯世家)는 오나라주나라 태왕의 아들인 태백의 후예이고 월나라우임금의 후예이며, 흉노의 선조는 황제(黃帝)의 후예라는 시각으로 보면서 우월론적 중화주의를 전면 부정하는 관점을 갖고 화이동근(華夷同根)을 강조하여 <사기>를 서술하였다.

한편 사마천은 성공한 인물도 중요하지만 성공의 기반을 마련해준 인물의 역사적 의미를 강조한 사마천의 독특한 역사관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또한 사마천은 미덕과 평화를 중요시 했다. 사마천이 중시했던 인물은 제후에 오른 사람들이 주인공이 아니었다.

그러기에 <공자세가>(孔子世家) 나 <진섭세가>(陳涉世家)에서 공자는 후세에 제왕(諸王)들과 황제의 존경을 받는다는 점에서 제후의 위치와 다를 바가 없다하여 세가에 포함시켰고, 진섭은 진(秦)에 반기를 들고 진 타도에 실패하였지만 진섭이 봉한 제후들과 장상들이 결국 진을 몰락시켰다는 점에서 세가에 포함시켰다.

이처럼 사마천은 덕으로 다스리는, 어질고 바른 정치인 덕정(德政)을 중시하는 통치관을 지니고 있었고, 인간의 가치를 높게 평가하는 안목으로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 가장 근본은 인(人)이라고 생각했다. 이같은 역사관으로 쓰여진 <사기>를 바탕으로 중국 정사의 대표적인 역사학자 사마천은 '하해불택세류(河海不擇細流, 황하와 바다는 가는 물줄기로 가리지 않는다)'라는 명문을 내놓으면서 <사기>에서 중국 문명의 원류는 중원(中原)임을 분명히 밝혀주고 있다.[2][3]

6. 1. 사마천의 화이불분(華夷不分) 역사관

사마천은 화이불분(華夷不分), 즉 중원(中原)과 이족(夷族)을 구분 짓지 않는 역사관을 가지고 있었다.[4] 여기서 중원은 허난성을 중심으로 산둥성 서부, 산시성(陝西省) 동부에 걸친 황허강 중 · 하류 유역을 의미한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옛날 당인의 수도는 하동에, 은인의 수도는 하내에, 주인의 수도는 하남에 있었으니 무릇 삼하는 천하의 가운데에 있다."고 기술하였다.[4]

<사기> 세가의 첫 편인 오태백 세가(吳太伯世家)를 보면, 오나라는 주나라 태왕의 아들인 태백의 후예이고 월나라는 우임금의 후예이며, 흉노의 선조는 황제의 후예라는 시각으로 보면서 우월론적 중화주의를 전면 부정하는 관점을 갖고 화이동근(華夷同根)을 강조하였다.

사마천은 성공한 인물뿐만 아니라 성공의 기반을 마련해준 인물의 역사적 의미를 강조하는 독특한 역사관을 보였다. 또한 미덕과 평화를 중요시하며, 덕으로 다스리는 어질고 바른 정치인 덕정(德政)을 중시하는 통치관을 지니고 있었다. <공자세가>(孔子世家)에서 공자는 후세에 제왕들과 황제의 존경을 받는다는 점에서 제후와 다를 바 없다 하여 세가에 포함시켰고, <진섭세가>(陳涉世家)에서 진섭은 진(秦)에 반기를 들고 진 타도에 실패하였지만 진섭이 봉한 제후들과 장상들이 결국 진을 몰락시켰다는 점에서 세가에 포함시켰다.

이처럼 인간의 가치를 높게 평가하는 안목으로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 가장 근본은 인(人)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역사관으로 쓰여진 <사기>를 바탕으로 중국 정사의 대표적인 역사학자 사마천은 '하해불택세류(河海不擇細流, 황하와 바다는 가는 물줄기로 가리지 않는다)'라는 명문을 내놓으면서 <사기>에서 중국 문명의 원류는 중원임을 분명히 밝혀주고 있다.[2][3]

6. 2. <사기>에 나타난 중원 중심 역사관

사마천은 화이불분(華夷不分), 즉 중원(中原)과 이족(夷族)을 구분 짓지 않는 역사관을 가지고 있었다.[4] 당시 중원허난성(河南省)을 중심으로 산둥성(山東省) 서부, 산시성(陝西省) 동부에 걸친 황허강(黃河) 중 · 하류 유역을 의미했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옛날 당인(唐人)의 수도는 하동(河東)에, 은인(殷人)의 수도는 하내 (河內)에, 주인(周人)의 수도는 하남(河南)에 있었으니 무릇 삼하(三河)는 천하의 가운데에 있다.”고 기술하였다.[4]

사마천은 <사기>에서 오나라주나라 태왕의 아들인 태백의 후예이고 월나라우임금의 후예이며, 흉노의 선조는 황제(黃帝)의 후예라는 시각으로 보면서 우월론적 중화주의를 전면 부정하는 관점을 갖고 화이동근(華夷同根)을 강조하였다.

사마천은 성공한 인물뿐만 아니라 성공의 기반을 마련해준 인물의 역사적 의미를 강조하였으며, 미덕과 평화를 중요시했다. 공자는 후세에 제왕(諸王)들과 황제의 존경을 받는다는 점에서, 진섭은 진(秦)에 반기를 들고 진 타도에 실패하였지만 진섭이 봉한 제후들과 장상들이 결국 진을 몰락시켰다는 점에서 세가에 포함시켰다.

이처럼 사마천은 덕으로 다스리는, 어질고 바른 정치인 덕정(德政)을 중시하는 통치관을 지니고 있었고, 인간의 가치를 높게 평가하여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 가장 근본은 인(人)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역사관을 바탕으로 사마천은 '하해불택세류(河海不擇細流, 황하와 바다는 가는 물줄기로 가리지 않는다)'라는 명문을 내놓으면서 <사기>에서 중국 문명의 원류는 중원(中原)임을 분명히 밝혀주고 있다.[2][3]

6. 3. 사마천의 덕치(德治)와 인본주의 사상

사마천은 화이불분(華夷不分), 즉 중원(中原)과 이족(夷族)을 구분 짓지 않는 역사관을 가지고 있었다.[4] 중원은 허난성(河南省)을 중심으로 산둥성(山東省) 서부, 산시성(陝西省) 동부에 걸친 황허강(黃河) 중 · 하류 유역을 의미한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옛날 당인(唐人)의 수도는 하동(河東)에, 은인(殷人)의 수도는 하내 (河內)에, 주인(周人)의 수도는 하남(河南)에 있었으니 무릇 삼하(三河)는 천하의 가운데에 있다.”고 기술하였다.[4] <사기> 세가의 첫 편인 오태백 세가(吳太伯世家)는 오나라주나라 태왕의 아들인 태백의 후예이고 월나라임금의 후예이며, 흉노의 선조는 황제(黃帝)의 후예라는 시각으로 보면서 우월론적 중화주의를 전면 부정하는 관점을 갖고 화이동근(華夷同根)을 강조하여 <사기>를 서술하였다.

사마천은 성공한 인물뿐만 아니라 성공의 기반을 마련해준 인물의 역사적 의미를 강조했다. 또한 미덕과 평화를 중요시하며, 제후에 오른 사람들만이 아닌 인물들을 중시했다. <공자세가>(孔子世家)에서 공자는 후세에 제왕(諸王)들과 황제의 존경을 받는다는 점에서 제후의 위치와 다를 바 없다 하여 세가에 포함시켰고, 진섭은 진(秦)에 반기를 들고 진 타도에 실패하였지만 진섭이 봉한 제후들과 장상들이 결국 진을 몰락시켰다는 점에서 세가에 포함시켰다.

이처럼 사마천은 덕으로 다스리는 어질고 바른 정치인 덕정(德政)을 중시하는 통치관을 지니고 있었고, 인간의 가치를 높게 평가하는 안목으로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 가장 근본은 인(人)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역사관으로 쓰여진 <사기>를 바탕으로 중국 정사의 대표적인 역사학자 사마천은 '하해불택세류(河海不擇細流, 황하와 바다는 가는 물줄기로 가리지 않는다)'라는 명문을 내놓으면서 <사기>에서 중국 문명의 원류는 중원(中原)임을 분명히 밝혀주고 있다.[2][3]

6. 4. <사기>를 통한 동북공정 문제 해결 촉구

대한민국에서는 한국의 상고사는 고조선으로부터 시작되며 중간에 고구려로 끊어질 수 없는 역사를 지키고 있다는 것을 강력히 강조하면서 상고사에서 고구려가 만들어낸 한민족 정통성의 기반으로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에서 진행되고 있는 동북공정에 문제의 심각성을 지적하였다.[4] 더불어 중국은 사마천의 <사기>를 비롯하여 24사(정사로 인정받는 역사서 24종)를 가지고 있듯이 역지사지해볼 것을 강하게 촉구했다.

사마천은 화이불분(華夷不分), 즉 중원과 이족(夷族)을 구분 짓지 않는 역사관을 가지고 있었다.[4] 사마천은 <사기>에서 “옛날 당인(唐人)의 수도는 하동(河東)에, 은인(殷人)의 수도는 하내 (河內)에, 주인(周人)의 수도는 하남(河南)에 있었으니 무릇 삼하(三河)는 천하의 가운데에 있다.”고 기술하였다. 당시 중원허난성을 중심으로 산둥성 서부, 산시성 동부에 걸친 황허강 중 · 하류 유역이 이에 해당하는 지역을 의미하고 있었다.[4]

<사기> 세가의 첫 편인 오태백 세가(吳太伯世家)는 오나라주나라 태왕의 아들인 태백의 후예이고 월나라는 우임금의 후예이며, 흉노의 선조는 황제(黃帝)의 후예라는 시각으로 보면서 우월론적 중화주의를 전면 부정하는 관점을 갖고 화이동근을 강조하였다.[4]

사마천은 성공한 인물도 중요하지만 성공의 기반을 마련해준 인물의 역사적 의미를 강조하였고, 미덕과 평화를 중요시 했다. 사마천이 중시했던 인물은 제후에 오른 사람들이 주인공이 아니었다. <공자세가>(孔子世家) 나 <진섭세가>(陳涉世家)에서 공자는 후세에 제왕들과 황제의 존경을 받는다는 점에서 제후의 위치와 다를 바가 없다하여 세가에 포함시켰고, 진섭은 진(秦)에 반기를 들고 진 타도에 실패하였지만 진섭이 봉한 제후들과 장상들이 결국 진을 몰락시켰다는 점에서 세가에 포함시켰다.[4]

사마천은 덕으로 다스리는, 어질고 바른 정치인 덕정(德政)을 중시하는 통치관을 지니고 있었고, 인간의 가치를 높게 평가하는 안목으로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 가장 근본은 인(人)이라고 생각했다. 이같은 역사관으로 쓰여진 <사기>를 바탕으로 중국 정사의 대표적인 역사학자 사마천은 '하해불택세류(河海不擇細流, 황하와 바다는 가는 물줄기로 가리지 않는다)'라는 명문을 내놓으면서 <사기>에서 중국 문명의 원류는 중원임을 분명히 밝혀주고 있다.[2][3]

참조

[1] 뉴스 동북공정 10년 과연 끝난 것인가? 중일 야욕 어디까지(KBS스페셜) http://www.newsen.co[...] 뉴스엔 2013-05-24
[2] 뉴스 사마천 '史記'로 푼 동북공정 갈등 https://news.naver.c[...] 연합뉴스(네이버) 2013-05-24
[3] 서적 신 중화주의, 중화민족 대가정 만들기와 한반도 푸른역사
[4] 문서 여기서 삼하란 [[중국의 역사]]에서 가장 앞선 세 왕조인 하(夏)·상(商)·서주(西周)가 개발했던 [[중원 (중국)|중원]]을 가리킨다. 본래 [[한족]](漢族)의 본 거주지역, 즉 과거 [[주나라]](周)가 있던 곳을 지칭하던 말로서, 이곳을 지배해야 중국을 통일할 수 있다고 생각할 정도로 중요하게 인식하던 지역이다. 주(周)왕조 이후 한족(漢族)의 세력이 확대됨에 따라 [[장강]]과 그 서쪽 영역도 [[중원 (중국)|중원]]으로 인식되어 [[화베이 평원]](華北平原)까지 넓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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