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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움비르 모네탈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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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트리움비르 모네탈리스는 고대 로마 공화정 시기에 화폐 주조를 담당했던 3인으로 구성된 위원회이다. 기원전 211년 데나리우스 도입 이후 설립되었으며, 로마 감찰관이 담당하던 화폐 주조 감독 권한을 넘겨받았다. 초창기에는 신이나 로마의 인격화, 디오스쿠로이 등을 주화에 새겼으며, 제2차 포에니 전쟁 중에는 군사적 목적을 위해 발행되기도 했다. 기원전 139년 가비니우스 법안 통과 이후에는 정치적 선전 수단으로 활용되었고, 율리우스 카이사르 시대에는 카이사르의 선전을 위한 주화가 발행되었다. 이 직책은 주로 원로원 계급의 젊은이들이 맡았으며, 매년 3명이 선출되어 비긴티섹스비리의 일부를 구성했다. 트리움비르 모네탈리스는 유노 모네타 신전에서 유래된 명칭으로, 영어 단어 'money'의 어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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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움비르 모네탈리스
개요
역할로마 공화정과 제정 시대의 주조 책임관
라틴어 명칭triumviri aere argento auro flando feriundo
약칭III.viri.a.a.a.f.f. 또는 IIIVIR AAAFF
임기1년
구성원 수3명
소속 기관원로원 (초기)
20인 위원회 (후기)
역사
기원로마 공화정 시대
임명 방식선출 (공화정 시대)
황제 임명 (제정 시대)
주요 기능로마 제국의 주화 생산 및 관리
역할 변화제정 시대에 황제의 통제하에 놓임
주요 업무
주화 생산금, 은, 청동 주화의 주조 감독
주화 디자인주화 도안 결정 및 관리
품질 관리주화의 무게와 순도 유지
홍보주화를 통한 정치적 메시지 전달
회계주화 생산량 기록 및 관리
권한 및 특권
정치적 경력공직 진출의 발판
사회적 지위높은 사회적 인정
경제적 이익주조 과정에서의 부수적인 이익 가능성
관련 정보
관련 직위모네타 신전 관리인
후대 영향현대 화폐 시스템의 기원

2. 역사

'트리움비르 모네탈리스'는 기원전 211년경 데나리우스를 기반으로 한 통화 제도가 설립되면서 또는 그 이후 시기에 설치되었을 것이다.[2] 감찰관들이 이들이 설립되기 이전에 화폐 주조를 감독했으나, 옛 콰드리가투스 주화의 질적 하락으로 권한을 상실한 것으로 본다.

초기에 로마인들은 오랜 기간에 걸쳐 동일한 유형의 주화들을 만들었으며 이는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방식에서처럼 국가의 상징물들을 넣어 발행하기 위함이었다 (아테나의 부엉이가 들어간 주화처럼). 최초의 로마 주화들은 일반적으로 신들이나, 로마의 인격화, 디오스쿠로이 등을 담았으며, 보통 각 액면가마다 특정한 신이 있었다. 제2차 포에니 전쟁 기간 (기원전 218년 – 202년), '임페리움'을 지닌 일부 정무관들이 군사 활동 중에 주화를 찍어냈으며, 이들은 주화에 자신들의 이름이나 지명의 축약 형태를 집어넣었다. 이 관행은 로마에서만 주조를 하던 화폐 제작자들에게도 곧 도입되었다 (로마에서 최초로 발행된 것들은 이에 따라 특색이 없었다). 이 행위의 목적은 표준 품질을 확실히 하기 위해 모든 주화들에 대한 책임이 있는 정무관들을 알아보기 위함이었다. 화폐 제작자들의 특징들은 모노그램이나 자신들의 이름을 암시하는 상징물, 또는 이 둘을 모두 합한 것이었다. 예시로, 기원전 208년에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돌라벨라는 라틴어로 그의 코그노멘 (dolabella)을 뜻하는 CN DO라는 문구와 곡괭이를 아스에 기입했다. 주화에 서명을 하는 이 관행은 화폐 제작자들이 주화를 로마시의 생산품이라기보다는 자신들의 개인적 생산품으로 점차 여기게 하였다.

가이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카프라리우스의 데나리우스, 기원전 125년. 뒷면에는 기원전 251년 파노르무스에서 승리한 후 루키우스 메텔루스의 개선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마르쿠스 세르빌리우스의 데나리우스, 기원전 100년경. 뒷면에는 그의 조상 풀렉스 게미누스의 결투가 묘사되어 있다.

2. 1. 초기 (기원전 211년 ~ 기원전 139년)

''트리움비리 모네탈리스''는 아마도 데나리우스를 기반으로 하는 화폐 시스템이 만들어진 기원전 211년경 또는 그 직후에 설립되었을 것이다.[1] 그 이전에는 감찰관이 주화를 감독했지만, 그들은 마지막 콰드리가투스 발행의 품질 저하로 인해 이 권한을 잃었을 것이다.

로마인들은 처음에는 오랜 기간 동안 동일한 유형의 주화를 제작했다. 목표는 그리스 도시 국가의 방식(예: 아테네 주화의 부엉이와 같이)으로 공적인 유형의 주화를 발행하는 것이었다. 최초의 로마 주화는 일반적으로 신, 로마의 의인화, 디오스쿠리를 특징으로 하며, 종종 각 액면에 특정 신이 배정되었다. 제2차 포에니 전쟁 (기원전 218년 – 202년) 동안, 여러 ''임페리움''을 가진 행정관들이 원정 중에 주화를 주조했으며, 자신의 이름 또는 위치의 약자로 서명했다. 이 관행은 곧 로마에서 독점적으로 주조한 주화 발행인에 의해 채택되었다(그동안 로마에서 발행된 첫 번째 주화는 익명이었다). 이 조치의 목적은 모든 주화에 대한 책임자를 식별하여 표준 품질을 보장하는 것이었다. 주화 발행인의 서명은 약자, 또는 그들의 이름을 암시하는 기호, 또는 이 둘의 조합이었다. 예를 들어, 기원전 208년에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돌라벨라는 라틴어로 그의 코그노멘(''돌라벨라'')의 의미인 CN DO와 곡괭이 문자가 새겨진 아스에 서명했다. 이러한 주화 서명 관행은 점차 주화 발행인들이 주화를 로마 도시의 것이 아닌 개인적인 작품으로 여기게 만들었다.

2. 2. 기원전 139년 이후

가비니우스 표결법이 제정된 기원전 139년 이후, 로마 공화정 주화는 급격한 변화를 겪었다. 귀족 계층은 대중에게 영향을 주는 전통적 수단을 더 이상 사용할 수 없었고, 야심가들은 자기 홍보 수단으로 주화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부터 화폐 주조자들은 주화 앞면에 로마의 얼굴, 뒷면에 디오스쿠로이나 전차를 모는 신을 담은 전통적 형태에서 벗어났다. 대신 이들은 승리 (월계관, 전리품, 빅토리아 여신 등)나 조영관의 의무 사항 (곡물 분배와 경기 행사 진행)과 관련한 주제를 택했다. 기원전 123년부터, 아마도 기원전 124년에 통과된 과도한 야망을 규제하는 법규 때문에 옛 형태로 대략 10년간 다시 돌아왔으나, 인물에 대한 형태는 기원전 115년부터 다시 계속 이뤄졌다.

이 시기부터 화폐 주조자들은 보통 전투에서 승리나 용맹과 같은 선조들의 업적과 관련된 형상들을 사용하였다. 이들은 또한 자신이 제2대 로마의 왕 누마의 아들 폼포를 통하여 그의 후손이라 주장했던 루키우스 폼포니우스 몰로의 기원전 97년 데나리우스와 같이, 전설상의 선조에 대한 자신들의 주장을 기재하기도 했다.

기원전 101년 가이우스 푼다니우스의 데나리우스. 뒷면엔 전차를 탄 개선 장군으로서의 가이우스 마리우스를 묘사하며, 말등에 있는 젊은 사내는 아마 그의 아들일 것이다.


기원전 101년, 가이우스 푼다니우스는 자신의 데나리우스에 개선식 중의 마리우스를 새겼는데, 이는 로마 화폐에 살아있는 인물이 등장한 최초의 경우였다. 마리우스가 우세하던 시기의 대부분의 화폐 주조자들 역시 마찬가지로 그와 관련한 주제가 있는 주화들을 발행했다. 동맹시 전쟁과 기원전 80년대의 내전 때문에, 몹시나 많은 데나리우스들이 이 기간에 만들어졌다. 아폴로는 이 시대 가장 흔한 주제였으며, 자유와 그의 연관성 때문일 것이다.

기원전 80년대 말, 술라는 공화정 정부를 상대로 일으킨 내전에 사용할 자금을 대기 위해 주화를 발행한 최초의 로마 장군이었고, 아우레우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승전을 거둔 뒤에, 술라는 베누스의 후예라고 하는 자신의 주장을 강조하는 주화들을 찍어냈으나, 마리우스와는 달리, 화폐 주조자들에게는 자기들만의 주제를 발행하도록 내버려두었다. 새로운 혁신이 기원전 54년에 이뤄졌는데, 퀸투스 폼페이우스 루푸스의 데나리우스는 자신의 조부들인 술라와 루푸스의 얼굴을 새겼으며, 이는 일부 화폐 주조가들도 따라하였다.

2. 2. 1. 개인 및 정치적 선전의 증가

가비니우스 표결법이 제정된 기원전 139년 이후, 로마 공화정 주화는 급격한 변화를 겪었다. 귀족 계층은 대중에게 영향을 주는 전통적 수단을 더 이상 사용할 수 없었고, 야심가들은 자기 홍보 수단으로 주화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부터 화폐 주조자들은 주화 앞면에 로마의 얼굴, 뒷면에 디오스쿠로이나 전차를 모는 신을 담은 전통적 형태에서 벗어났다. 대신 이들은 승리 (월계관, 전리품, 빅토리아 여신 등)나 조영관의 의무 사항 (곡물 분배와 경기 행사 진행)과 관련한 주제를 택했다. 기원전 123년부터, 아마도 기원전 124년에 통과된 과도한 야망을 규제하는 법규 때문에 옛 형태로 대략 10년간 다시 돌아왔으나, 인물에 대한 형태는 기원전 115년부터 다시 계속 이뤄졌다.

이 시기부터 화폐 주조자들은 보통 전투에서 승리나 용맹과 같은 선조들의 업적과 관련된 형상들을 사용하였다. 이들은 또한 자신이 제2대 로마의 왕 누마의 아들 폼포를 통하여 그의 후손이라 주장했던 루키우스 폼포니우스 몰로의 기원전 97년 데나리우스와 같이, 전설상의 선조에 대한 자신들의 주장을 기재하기도 했다.

기원전 101년, 가이우스 푼다니우스는 자신의 데나리우스에 개선식 중의 마리우스를 새겼는데, 이는 로마 화폐에 살아있는 인물이 등장한 최초의 경우였다. 마리우스가 우세하던 시기의 대부분의 화폐 주조자들 역시 마찬가지로 그와 관련한 주제가 있는 주화들을 발행했다. 동맹시 전쟁과 기원전 80년대의 내전 때문에, 몹시나 많은 데나리우스들이 이 기간에 만들어졌다. 아폴로는 이 시대 가장 흔한 주제였으며, 자유와 그의 연관성 때문일 것이다.

기원전 80년대 말, 술라는 공화정 정부를 상대로 일으킨 내전에 사용할 자금을 대기 위해 주화를 발행한 최초의 로마 장군이었고, 아우레우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승전을 거둔 뒤에, 술라는 베누스의 후예라고 하는 자신의 주장을 강조하는 주화들을 찍어냈으나, 마리우스와는 달리, 화폐 주조자들에게는 자기들만의 주제를 발행하도록 내버려두었다. 새로운 혁신이 기원전 54년에 이뤄졌는데, 퀸투스 폼페이우스 루푸스의 데나리우스는 자신의 조부들인 술라와 루푸스의 얼굴을 새겼으며, 이는 일부 화폐 주조가들도 따라하였다.

2. 2. 2. 율리우스 카이사르 시대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기원전 49년 로마에 도착한 후, 최초의 트리움비르 모네탈리스들은 개인적인 도안을 만들 수 있었지만, 기원전 46년부터는 비너스(카이사르의 수호 여신), 빅토리아, 포르투나, 또는 그가 받은 명예와 관련된 도안을 통해 카이사르의 선전에 거의 전적으로 헌신했다. 기원전 44년,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정치적인 이유로 트리움비르의 수를 4명으로 일시적으로 늘렸고, 그래서 이들은 쿼드룸비리(quadrumviri)가 되었다. 그들은 카이사르의 머리를 새긴 데나리우스를 주조했는데, 이는 살아있는 로마인이 헬레니즘 군주와 같은 방식으로 자신의 초상을 동전에 새긴 첫 번째 사례였다.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이후 몇 년 동안의 트리움비르 모네탈리스는 주로 다시 개인적인 도안을 발행했지만, 그들의 생산은 제2차 삼두정치 (옥타비아누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그리고 레피두스)의 구성원들에 의해 점차적으로 소외되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초상을 담은 왕조적 주화를 소유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정식 트리움비르 모네탈리스는 기원전 41년에 주화를 주조했고, 기원전 40년과 39년에는 단 한 명의 '모네탈리스'(monetalis)만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자신의 주화를 발행할 수 있었다.

2. 3. 제2차 삼두정치와 쇠퇴

기원전 49년,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로마에 입성한 이후, 초기 트리움비르 모네탈리스들은 개인적인 형태의 주화를 제작했다. 그러나 기원전 46년부터 이들의 제작품은 베누스(카이사르의 수호신), 빅토리아, 포르투나 등 카이사르의 영예와 관련된 유형들을 담으며, 대부분 카이사르의 선전물이었다. 기원전 44년, 카이사르는 정치적 목적 때문에 화폐 제작자 수를 일시적으로 4명으로 늘렸고(콰드룸비리), 이들은 카이사르의 얼굴이 담긴 데나리우스를 발행했는데, 이는 살아있는 인물의 초상을 주화에 담은 최초의 로마 사례였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암살 이후, 화폐 제작자들은 다시 개인 형태의 주화를 발행했지만, 점차 제2차 삼두정치(옥타비아누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레피두스) 인물들에 의해 배제되었고, 삼두정치관들은 자신들의 초상이 담긴 독자적 주화를 발행했다. 화폐 제작자들 세 명 모두가 화폐를 마지막으로 발행한 것은 기원전 41년, 기원전 40년, 기원전 39년이며, 단 한 명의 모네탈리스만이 실질적으로 주화를 발행했다.

악티움 해전에서 옥타비아누스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격파한 기원전 30년 이후, 옥타비아누스는 공화국의 외관을 복원하여 트리움비르 모네탈리스는 몇 년 동안 다시 자신의 주화를 주조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이후 황실 조폐국에서 발행된 주화에는 황제와 그의 가족만 언급되었다. 제국 시대의 수많은 비문은 이 직책이 주화 생산을 계속 관리했음을 보여준다.

3. 임무와 선발

공화정 시기에, 이 직위는 정치적 경력을 밟기 시작한 원로원 계급의 젊은이들이 주로 맡았다. 매년 인원 세 명이 선발되었으며, 하급 정무관들 26명으로 이뤄진 '비긴티섹스비리의 일부를 구성했다.

처음부터, 트리움비르 모네탈리스는 1년직이었으며, 그럼에도 이들이 선출된 것인지 임명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 합의된 것은 없다. 마이클 크로포드는 화폐 제작자들이 로마 시민들한테서 선출된 것이라 여겼지만 그럼에도 이 관직이 임용자들에게 원로원 입회 자격을 주지는 않았다. 앤드루 버네트는 같은 해의 화폐 제작자들과 집정관들 간의 다수의 가문적 연관성이 있다는 점을 주목하며, 반대로 이들이 집정관들한테서 임명된 것이라 보았다.

매년, 원로원은 많은 양의 주화 생산을 요구했고, 그러면 재무관들 (주요 재정 정무관)은 화폐 제작자들에게 주화 제작에 필요한 정확한 금속 양을 전해주었다. 대부분 시기, 화폐 제작자들은 교대로 제작을 했고 한 시기에 제작하는 이는 한 명뿐이었으며, 이는 일부 화폐 제작자들은 동료들이 이미 요구되는 주화량을 만들어버리면 주화를 절대 만들지 못한다는 걸을 의미했다. 또한 가끔씩 같은 해의 화폐 제작들 간의 생산량에 대해 엄청난 차이를 설명하기도 했는데 첫 번째 화폐 제작자들이 주화의 대부분을 찍어냈다. 이들 간의 순서는 사회적 지위에 달린 것으로 보이며 고위 가문 출신 인물들이 처음으로 발행을 했었다. 귀족 계층들 외에도, 다수의 화폐 제작자들은 아시아 속주에서 활동했던 사업가 가문 출신 루키우스 미누키우스, 기원전 70년대에 은행가로 알려진 루키우스 악스시우스 나소 등 은행업 및 무역업에서의 경험을 보고 선발되었다.

3. 1. 선발 방식 논쟁

공화정 시대 트리움비르 모네탈리스는 주로 정치 경력을 시작하는 원로원 가문 출신의 젊은이들이 맡았으며, 이들은 1년 동안 재임하며 26명의 하급 행정관 그룹인 ''비긴티섹스비리''에 속했다.

이 직책은 연임이었으나, 선출 방식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하다. 마이클 크로포드는 트리움비르 모네탈리스가 로마 시민에 의해 선출되었다고 주장하는 반면, 앤드루 버넷은 이들이 집정관에 의해 임명되었다고 주장한다.

매년 원로원은 일정량의 동전 생산을 요구했고, 퀘스토르는 동전 생산에 필요한 귀금속을 트리움비르 모네탈리스에게 이전했다. 대부분의 경우 이들은 교대로 주조를 담당했으며, 한 번에 한 명만 활동했다. 귀족 외에도 은행 및 무역 전문성을 가진 인물들이 선발되기도 했는데, 아시아에서 활동하는 사업가 가문의 일원인 루키우스 미누키우스, 또는 기원전 70년대에 은행가로 알려진 루키우스 악시우스 나소 등이 그 예이다.

3. 2. 주화 생산 과정

트리움비르 모네탈리스는 1년 임기의 직위로, 매년 세 명이 선발되어 비긴티섹스비리의 일원이었다. 이들은 선출직인지 임명직인지에 대해 학자들 간의 의견이 분분하다. 마이클 크로포드는 이들이 로마 시민에 의해 선출되었다고 본 반면, 앤드루 버네트는 집정관에 의해 임명되었다고 주장한다.

매년 원로원은 대량의 주화 생산을 요구했고, 재무관은 화폐 제작자들에게 필요한 금속 양을 전달했다. 대부분의 경우 화폐 제작자들은 교대로 주화를 제작했으며, 한 번에 한 명만 제작에 참여했다. 이 때문에 일부 화폐 제작자들은 주화를 전혀 만들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제작 순서는 사회적 지위에 따라 결정되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고위 가문 출신이 먼저 주화를 발행했다. 귀족 외에도 은행 및 무역 경험을 가진 인물들이 선발되기도 했는데, 아시아 속주에서 활동한 사업가 가문 출신 루키우스 미누키우스와 기원전 70년대에 은행가로 알려진 루키우스 악스시우스 나소 등이 그 예이다.

4. 명칭의 유래

트리움비르 모네탈리스는 고대 로마조폐국이 유노 모네타("유노 조언자" 또는 "경고") 신전에 위치한 데서 명칭을 얻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조폐국은 여신의 별칭에 "과 관련된"이라는 의미를 추가했고, 이는 영어 단어 ''money''의 어원이 되었다.

참조

[1] 서적
[2]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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