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라 포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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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라 포셋은 미국의 배우이자 모델로, 1947년 텍사스에서 태어나 2009년 사망했다. 텍사스 대학교 재학 중 모델로 데뷔하여 1970년대 TV 시리즈 《미녀 삼총사》의 질 먼로 역으로 스타덤에 올랐다. 이후 영화와 TV 드라마에서 활동하며 에미상 후보에 여러 번 올랐고, 1980년대에는 연극 무대에도 진출했다. 2006년 항문암 진단을 받고 투병 생활을 기록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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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라 포셋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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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본명 | 페라 레니 포셋 |
다른 이름 | 파라 포셋-메이저스 |
출생일 | 1947년 2월 2일 |
출생지 | 미국 텍사스주 코퍼스크리스티 |
사망일 | 2009년 6월 25일 |
사망지 |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타모니카 |
안장지 | 웨스트우드 빌리지 메모리얼 파크 묘지 |
직업 | 배우 |
활동 기간 | 1969–2009년 |
사생활 | |
배우자 | 리 메이저스 (1973–1982년, 이혼) |
파트너 | 라이언 오닐 (1979–1997년; 2001–2009년) 그레그 로트 (1998–2001년) |
자녀 | 1명 |
대표작 |
2. 생애와 경력
본명은 매리 파라 레니 포셋(Mary Farrah Leni Fawcett)이며, 텍사스주 코퍼스크리스티에서 태어났다. 텍사스 대학교 오스틴 재학 중 캠퍼스 미인으로 선정된 것을 계기로 헐리우드로 진출했다.
당시 배우 리 메이저스(1973년~1982년 결혼)의 도움으로 경력을 시작했으며, 빨간 수영복 차림의 포스터는 상징적인 성공을 거두며 수백만 장이 팔렸다. 이 포스터 외에도 다양한 상품들이 출시되었다.
TV 시리즈 《미녀 삼총사》를 통해 세계적인 스타가 되었으나, 더 도전적인 역할을 위해 하차했다. 이후 텔레비전 영화들에서 연기력을 인정받았으며, 영화 《사도》(1997) 등으로 진지한 배우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1997년에는 50세의 나이로 플레이보이 화보와 비디오에 출연하기도 했다.
2006년 항문암 진단을 받고 투병 과정을 다큐멘터리 《파라의 이야기》(2009) 등으로 남겼다. 2009년 6월 25일 로스앤젤레스에서 사망했으며, 이는 마이클 잭슨이 사망한 날과 같다.
2. 1. 초기 생애
본명은 매리 파라 레니 포셋(Mary Farrah Leni Fawcett)으로, 1947년 2월 2일 텍사스주 코퍼스크리스티에서 태어났다.[2] 아버지는 제임스 윌리엄 포셋(James William Fawcett, 1917–2010)으로 유전 계약업자(석유 사업가)였고, 어머니는 폴린 앨리스 포셋(Pauline Alice Fawcett, 옛 성 에반스, 1914–2005)으로 주부였다.[3][113] 다이앤(Diane)이라는 언니가 있는 두 딸 중 막내였다.[2] 그녀는 아일랜드, 프랑스, 영국 및 초크토 아메리카 원주민 혈통을 가졌다.[4][5][6][114][115][116] 포셋은 자신의 이름 '패라(Farrah)'가 어머니가 성과 잘 어울리도록 지어준 이름이라고 밝힌 바 있다.[4][7]로마 가톨릭 신자였던[71] 포셋은 코퍼스크리스티에 있는 성 패트릭 로마 가톨릭 교구 학교에서 초기 교육을 받았다.[4] 이후 코퍼스크리스티의 W. B. 레이 고등학교를 졸업했는데, 재학 중 1학년부터 4학년까지 매년 동급생들에게 "가장 아름다운" 학생으로 뽑혔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권유로 운동을 시작하여 뛰어난 운동 신경을 가졌으며, 특히 테니스 실력은 프로급이었다고 전해진다.
1965년부터 1968년까지 텍사스 대학교에 다녔다. 처음에는 미생물학을 전공했으나 이후 미술로 전공을 바꾸어 조각가 찰스 움라우프(Charles Umlauf) 밑에서 공부했다.[8][118] 그녀는 움라우프를 "가장 좋아하는 교수"로 꼽으며 멘토 관계를 맺었다. 대학 시절 델타 델타 델타 여성 클럽의 회원이기도 했다.[9]
대학교 1학년 때 "캠퍼스에서 가장 아름다운 10명의 여대생" 중 한 명으로 선정되었는데, 신입생이 이 명단에 오른 것은 처음이었다.[117] 이 일을 계기로 그녀의 사진이 할리우드의 여러 에이전시로 보내졌고, 에이전트 데이비드 미르시(David Mirisch)는 그녀에게 로스앤젤레스로 와서 활동할 것을 제안했다.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미르시의 지속적인 설득 끝에 1968년 여름, 부모님의 허락을 받고 연예계 활동을 위해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했다.[10]
한편, 포셋은 생후 28일 만에 소화기 질환으로 큰 수술을 받았고, 성인이 되어서도 수술 자국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이 때문에 비키니 차림을 꺼렸다고 알려져 있으며, 그녀의 수많은 사진 중 비키니를 입은 모습은 단 한 장뿐이라고 한다.[119][120]
2. 2. 초기 경력 (1968-1975)

파라 포셋은 1968년 21세의 나이로 할리우드에 도착하여 Screen Gems와 주당 350USD의 계약을 맺었다.[11][12] 그녀는 울트라 브라이트 치약, 녹스제마 스킨 크림, Max Factor 화장품, Mercury Cougar 자동차, Beautyrest 매트리스 등 다양한 제품의 광고에 출연하며 경력을 시작했다.[13][14]
초기 연기 경력으로는 텔레비전 시리즈 ''The Flying Nun''(1969)과 ''I Dream of Jeannie''(1969–70)에 게스트로 출연한 것이 있다. 또한 ''Getting Together'', ''Owen Marshall: Counselor at Law'', ''Mayberry R.F.D.'', ''The Partridge Family'' 등 다수의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출연했다.[4] 1969년에는 프랑스 멜로드라마 영화 ''Love Is a Funny Thing''에서 비중 있는 역할을 맡았고, 1970년에는 영화 ''Myra Breckinridge''에서 메리 앤 프링글 역을 연기했다.[16]
1973년, 포셋은 당시 인기 배우였던 리 메이저스와 결혼했으며,[113] 한때 '파라 포셋 메이저스'라는 예명을 사용하기도 했다. 텍사스 출신인 포셋은 남부 억양 때문에 연기 활동에 어려움을 겪었으나, 남편 리 메이저스의 격려와 도움으로 이를 극복하고 배우로서 경력을 이어 나갔다.[128] 그녀는 남편이 주연한 인기 시리즈 ''600만 달러의 사나이''에 4차례 출연했으며,[4] ''The Dating Game''[15]과 ''S.W.A.T''에도 모습을 보였다. 또한, 데이비드 잰슨이 주연한 ''Harry O'' 시리즈에서는 주인공의 여자친구인 수 역할로 반복 출연했다.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 포셋은 꾸준히 광고와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출연했으며, 특히 웰라 샴푸 광고[113] 등을 통해 점차 인지도를 높여갔다. 이러한 활동들은 이후 그녀가 미녀 삼총사로 큰 성공을 거두는 발판이 되었다.
2. 3. 《미녀 삼총사》와 스타덤 (1976-1980)
1976년, 포스터 제작 회사 Pro Arts Inc.는 파라 포셋의 에이전트에게 포스터 제작을 제안했다. 사진작가 브루스 맥브룸이 촬영을 맡았으며[9], 포셋은 거울 없이 직접 머리를 손질하고 레몬즙으로 금발 하이라이트를 강조하며 화장을 했다고 전해진다.[17] 포셋은 40롤의 필름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사진 6장을 골랐고, 최종적으로 빨간색 원피스 수영복을 입은 모습이 선택되었다.[18][17] 이 포스터는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포스터가 되었다.[19][20]같은 해, 포셋은 마이클 앤더슨 감독의 SF 영화 ''로건의 탈출''에서 마이클 요크와 함께 조연으로 출연했다. 당시 남편이었던 텔레비전 스타 리 메이저스와 함께 프로듀서 아론 스펠링과 자주 테니스를 쳤던 인연으로, 스펠링은 포셋을 TV 영화 ''미녀 삼총사''의 질 문로 역으로 캐스팅했다. 1976년 3월 21일 ABC에서 방영된 이 영화에는 포셋(당시 파라 포셋-메이저스 명의 사용) 외에 케이트 잭슨, 재클린 스미스가 출연하여, 정체를 숨긴 재벌 찰스 타운젠드가 운영하는 탐정 사무소 소속의 여성 사립 탐정 역할을 맡았다. 존 포사이드가 목소리로 연기한 찰스 타운젠드는 스피커폰을 통해 세 명의 여성 탐정("천사들")에게 사건을 지시하고 조언했다. 데이비드 도일과 데이비드 오그덴 스티어스가 연기한 남성 동료들이 이들을 도왔다. 영화는 큰 인기를 얻었고, ABC는 이를 두 번째로 방영한 뒤 정식 시리즈 제작을 결정했다.
''미녀 삼총사'' 정식 시리즈는 1976년 9월 22일 첫 방송되었다. 세 여배우 모두 스타덤에 올랐지만, 포셋의 인기가 단연 압도적이었다.[21][22] 그녀는 '새로운 TV 프로그램에서 가장 좋아하는 배우' 부문 피플스 초이스 어워드를 수상했다.[23][24] 1977년 ''TV 가이드''와의 인터뷰에서 포셋은 "쇼가 3위였을 때는 우리의 연기력 덕분이라고 생각했지만, 1위가 되었을 때는 우리 중 아무도 브래지어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하기도 했다.[25] 포셋은 ''미녀 삼총사'' 출연료보다 포스터 판매 로열티로 훨씬 더 많은 수입을 올렸으며,[26] 그녀의 헤어스타일은 "파라 플립" 또는 "파라 헤어"로 불리며 국제적인 유행을 선도했다.[27][28] 이 헤어스타일은 1980년대까지 미국 여성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29]
그러나 포셋은 1977년 봄, 단 한 시즌 만에 ''미녀 삼총사''에서 하차했다.[30] 하차를 둘러싸고 ABC와 법적 분쟁을 겪었으며, 그녀의 빈자리는 질 문로의 여동생 크리스 문로 역을 맡은 셰릴 래드가 채웠다. 포셋의 갑작스러운 하차 배경으로는 당시 남편 리 메이저스(ABC의 인기 드라마 ''육백만 불의 사나이'' 주연)와의 잦은 별거로 인한 결혼 생활의 어려움, 영화배우로서 더 폭넓은 연기 활동을 하고자 하는 개인적인 야망 등이 거론되었다. 또한, 포스터 등 관련 상품에 대한 로열티 문제로 스펠링과 정식 계약을 맺지 않은 상태였기에, 하차 과정에서 스펠링 측과 장기간의 소송에 휘말리기도 했다. 결국 포셋은 계약 기간보다 4년 일찍 하차하는 대신, ABC와 새로운 계약을 맺고 1978년부터 1980년까지 두 시즌 동안 총 여섯 차례 게스트로 출연하기로 합의했다.[31]
''미녀 삼총사''는 전 세계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특히 첫 세 시즌은 방송 신디케이션을 통해 꾸준히 인기를 얻었다. 이 인기에 힘입어 껌 카드, 패션 인형, 포스터, 퍼즐, 학용품, 소설, 장난감 자동차, 보드 게임 등 다양한 관련 상품들이 출시되었다. 세 명의 "천사들"은 ''TV 가이드''는 물론 ''타임''지를 비롯한 수많은 국내외 잡지의 표지를 장식했다. 2004년에는 TV 영화 ''카메라 뒤에서: 미녀 삼총사의 비공식적인 이야기''가 제작되어 방영되었는데, 여기서는 배우 트리시아 헬퍼가 포셋 역을, 벤 브라우더가 리 메이저스 역을 연기했다.[32]
포셋은 1973년 ''600만 달러의 사나이''로 유명했던 배우 리 메이저스와 결혼하며 '파라 포셋 메이저스'라는 예명을 사용했다.[113] 텍사스 출신이었던 포셋은 남부 억양 때문에 연기를 포기하고 모델 활동을 고려하기도 했으나, 남편 리 메이저스의 격려와 도움으로 억양을 극복하고 배우로서 성공 가도를 달렸다.[128] 하지만 1979년 배우 라이언 오닐과의 관계로 인해 메이저스와 별거를 시작했고,[129][130] 결국 1982년에 이혼했다.[113] 1980년부터는 오닐과 동거 생활을 시작했다.
2. 4. 《미녀 삼총사》 이후의 영화 활동 (1978-1997)
《미녀 삼총사》를 떠난 후 더 도전적인 역할을 추구했으나, 초기 영화 활동에서는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1978년, 《미녀 삼총사》 이후 첫 영화인 어떤 남자가 그녀의 남편을 죽였나(Somebody Killed Her Husband)는 좋지 않은 평가를 받았으며, 일부 평론가들은 이 영화를 "그녀의 경력을 죽인 영화"라고 부르기도 했다.[33] 영화는 흥행에도 실패했다. 1979년에 개봉한 선번(Sunburn)은 찰스 그로딘과 아트 카니가 공동 출연했으나 역시 좋지 않은 평가를 받았다. 1980년에는 커크 더글러스와 함께 스탠리 도넌 감독의 SF 영화 새턴 3(Saturn 3)에 출연했지만, 이 영화 또한 평론가들의 혹평을 받았고 흥행에 실패했다.[34][35] 1981년에는 버트 레이놀즈, 딘 마틴, 새미 데이비스 주니어 등이 포함된 앙상블 캐스트와 함께 코미디 영화 캐논볼 런(The Cannonball Run)에 출연했으며, 같은 해 말에는 텔레비전 영화 텍사스 살인사건(Murder in Texas)에서 캐서린 로스, 샘 엘리엇, 앤디 그리피스와 함께 연기했다.1983년, 포셋은 윌리엄 매스트로시모네가 쓴 논란의 연극 극단적 상황(Extremities)의 오프브로드웨이 무대 공연에서 강간 미수 피해자 역할을 맡아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았다. 수전 서랜던을 대신하여 맡은 이 역할에 대해 그녀는 자신의 경력에서 "가장 고되고, 가장 강렬하며, 가장 육체적으로 힘들고 정서적으로 소모적인" 역할이라고 묘사했다.[24][36] 한 공연 중에는 객석에 있던 스토커가 소란을 피워 공연이 중단되는 사건도 있었다.[37]
이후 텔레비전 영화에서 연기력을 인정받기 시작했다. 1984년, 실화를 바탕으로 한 텔레비전 영화 타는 침대(The Burning Bed)에서 학대받는 아내 프랜신 휴즈 역을 맡아 첫 번째 에미상 후보에 올랐다.[36] 이 작품은 가정 폭력 피해자들을 돕기 위한 전국적인 800 번호를 제공한 최초의 텔레비전 영화였으며[38], 그 시즌에 가장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다.[36]
1986년, 포셋은 연극을 영화화한 극단적 상황(Extremities)에 출연하여 재정적으로 좋은 성과를 거두었고, 이 연기로 골든 글로브 영화 드라마 부문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같은 해 존 에브넷의 텔레비전 영화 두 여자 사이(Between Two Women)에서 콜린 듀허스트와 함께 출연했으며, 이후 여러 텔레비전 영화에서 실존 인물이나 복잡한 여성상을 연기하며 호평을 받았다. 나치 사냥꾼: 베아트 클라르스펠트 이야기(Nazi Hunter: The Beate Klarsfeld Story)에서 베아트 클라르스펠트 역으로, 가엾은 작은 부잣집 딸: 바바라 허튼 이야기(Poor Little Rich Girl: The Barbara Hutton Story)에서 울워스 상속녀 바바라 허튼 역으로 골든 글로브상 후보에 올랐다. 1989년에는 LIFE 잡지의 혁신적인 사진 저널리스트 마거릿 부르크-화이트를 연기한 텔레비전 영화 이중 노출: 마거릿 부르크-화이트 이야기(Double Exposure: The Story of Margaret Bourke-White)로 케이블ACE상을 수상했다.[24]
1989년에는 다이앤 다운스를 연기한 미니시리즈 작은 희생(Small Sacrifices)으로 두 번째 에미상 후보[39]와 여섯 번째 골든 글로브상 후보[40]에 올랐다. 이 미니시리즈는 텔레비전의 우수성을 인정받아 피바디상을 수상했으며, 포셋의 연기는 "텔레비전 미니시리즈에서는 보기 드문 현실감을 가져와 특별한 힘을 가진 드라마를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으며 특별히 언급되었다.[41]
1997년에는 큰 화면 영화 사도(The Apostle)에서 진지한 역할을 맡아 다시 한번 연기력을 인정받았다.
2. 5. 후기 경력 (1997-2009)
1997년 로버트 듀발이 제작한 독립 영화 사도에서 그의 아내 역할로 출연하여 인디펜던트 스피릿 어워드 여우조연상 후보에 오르며 연기력을 인정받았다.[31] 같은 해, 50세의 나이로 플레이보이 1997년 7월호 화보와 비디오 '플레이보이: 파라 포셋, 나의 전부'에 출연하여 화제를 모았으며, 이는 높은 판매고를 기록했다. 이 비디오에는 포셋이 자신의 몸으로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는 모습이 담겼는데, 이는 그녀가 오랫동안 가져왔던 꿈이었다.[31] 그녀는 이전 1995년 12월호 플레이보이에서도 세미 누드 포즈를 취한 바 있다.[31]1997년 6월 5일, 데이비드 레터맨 쇼에 출연했을 당시 횡설수설하고 정신없어 보이는 모습으로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다.[42][43] 포셋은 이후 하워드 스턴 쇼에서 이것이 진행자와 농담을 하는 방식이었으며, 부분적으로는 플레이보이 화보와 비디오 홍보를 위한 것이었다고 해명했다. 그녀는 1999년에 다시 레터맨 쇼에 출연했으며,[44] 2009년 레터맨은 호아킨 피닉스와의 인터뷰 후 "파라 포셋에게 사과해야 합니다."라고 언급하기도 했다.[45][46]
2000년에는 로버트 알트만 감독의 영화 닥터 T에서 리처드 기어의 아내 역을 맡았다. 이 영화에서 그녀의 캐릭터는 정신적 붕괴를 겪으며, 포셋은 처음으로 완전한 누드 연기를 선보였다.
2001년경 예술가이자 디자이너인 크리스토퍼 시코네와 교류하며 자신의 추상화와 조각품을 보여주었다.[47] 2002년에는 조각가 키스 에드미어와 협업한 작품이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미술관에서 "컨템포러리 프로젝트 7: 키스 에드미어와 파라 포셋 2000"이라는 제목으로 전시되었고,[48] 이후 피츠버그의 앤디 워홀 미술관에서도 전시되었다. 이 조각품은 사진 시리즈와 책으로도 소개되었다.[38]
2003년 11월, 브로드웨이 연극 '바비 볼랜드'로 데뷔를 준비했으나, 프리뷰 공연 중 제작이 취소되어 공식적으로 개막하지 못했다. 포셋은 이 결정에 크게 실망한 것으로 전해졌다.[49][50]
이후에도 텔레비전 활동을 이어가며 앨리 맥빌, 스핀 시티(4개 에피소드), 가디언(4개 에피소드) 등 인기 시리즈에 출연했다. '가디언'에서의 연기로 2004년 에미상 후보에 오르며 세 번째 에미상 후보 지명을 받았다.[31]
2006년 10월 항문암 진단을 받고 절제 수술을 받았다. 미녀 삼총사 동료였던 재클린 스미스와 케이트 잭슨은 유방암을 극복한 경험을 바탕으로 포셋의 투병을 지원했다.[156] 2007년 2월, 60세 생일에 암을 극복했다고 발표했으나,[157][158] 같은 해 5월 재발이 확인되었다.[159] 이후 독일 프랑크푸르트 대학교 병원에서 줄기 세포 치료를 시도했으나[160][161], 이는 미국 내에서 논란이 되기도 했다.[162]
2009년 4월 암이 간으로 전이되어 UCLA 부속 병원에 입원했으나, 병원 직원이 병세를 언론에 유출하는 사건이 발생했다.[164] 이후 산타모니카 병원으로 옮겼다.
2009년 5월 15일, NBC는 그녀의 2년 반 동안의 암 투병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 '파라의 이야기'(Farrah's Story)를 방송했다. 라이언 오닐이 촬영하고 포셋 자신이 내레이션을 맡은 이 프로그램은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으며,[166][167][168] 에미상 후보에 올라 그녀의 네 번째 에미상 후보 지명이 되었다.[169][170]
포셋은 2009년 6월 25일 로스앤젤레스에서 사망했다. 이는 마이클 잭슨이 사망한 날과 같은 날이었다.
3. 개인사
본명은 매리 파라 레니 포셋(Mary Farrah Leni Fawcett)이며, 텍사스주 코퍼스크리스티에서 태어났다. 텍사스 대학교 오스틴 재학 중 캠퍼스 미인으로 선정된 것을 계기로 헐리우드로 진출하는 용기를 얻었다.
헐리우드에서 배우 리 메이저스를 만나 1973년 결혼했으며(1982년 이혼), 그의 도움 아래 경력을 시작했다. 빨간 수영복 차림으로 찍은 포스터는 6백만 장 이상 판매되며 상징적인 이미지가 되었고, 이 인기를 바탕으로 다양한 관련 상품들이 출시되었다.
인기 TV 시리즈 《미녀 삼총사》에서 하차한 후에는 더 도전적인 역할을 찾았으나, 주로 텔레비전용 영화에 출연하며 경력을 이어갔다. 1980년대 여러 TV 영화를 거쳐, 1997년에는 영화 《사도》에서 진지한 역할로 연기력을 인정받았다. 같은 해, 50세의 나이로 플레이보이 비디오 《파라 포셋, 나의 전부》를 발매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2006년 항문암 진단을 받았으며, 이후 자신의 투병 과정을 다큐멘터리 영화 《날개와 기도하는 사람: 파라의 인생을 위한 투쟁》(2008)과 텔레비전 영화 《파라의 이야기》(2009)를 통해 공개했다. 2009년 6월 25일, 마이클 잭슨과 같은 날 로스앤젤레스에서 암으로 사망했다.
3. 1. 결혼과 연애
파라 포셋은 1960년대 후반부터 배우 리 메이저스와 교제하기 시작했으며[51], 1973년에 결혼했다.[113] 결혼 기간 동안 포셋은 남부 억양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으나, 메이저스의 도움으로 이를 극복했다.[128] 포셋은 연기 활동 크레딧에 '파라 포셋-메이저스'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두 사람은 1979년부터 별거에 들어갔고, 1982년에 최종적으로 이혼했다.[113] 이들 사이에 자녀는 없었다. 포셋은 암 투병 중이던 2007년, 전 남편 메이저스와 23년 만에 전화 통화를 하기도 했다.[137]1979년, 메이저스와 별거 중이던 포셋은 배우 라이언 오닐과 연인 관계를 시작했다.[52][129][130] 두 사람은 1980년부터 동거했으며, 1985년 아들 레드먼드 제임스 포셋 오닐을 낳았다.[53][54][113] 포셋은 1994년 인터뷰에서 오닐과의 관계에 어려움이 있음을 토로했고,[55] 오닐의 딸 테이텀 오닐은 아버지가 포셋에게 폭력을 행사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55] 두 사람은 1997년경 헤어졌다가 2001년에 다시 관계를 회복했다. 포셋이 암 투병 중이던 2009년 6월 22일, 오닐은 포셋이 자신의 청혼을 받아들였다고 언론에 밝혔으나,[56][149][150][151] 3일 후 포셋이 사망하여 결혼은 성사되지 못했다. 포셋은 유언을 통해 아들 레드몬드에게 전 재산(600만달러)을 남겼고, 오닐에게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153][154]
1997년부터 1998년까지 포셋은 캐나다 영화 제작자 제임스 오어와 교제했다.[57] 오어는 포셋이 출연한 영화 ''맨 오브 더 하우스''의 작가이자 프로듀서였다. 이 관계는 1998년, 오어가 자신의 청혼을 거절한 포셋을 폭행하여 유죄 판결을 받으면서 끝났다.[58][113]
포셋은 텍사스 대학교 재학 시절 롱혼 풋볼 스타였던 그레그 로트와 교제했으며, 1998년에 관계를 다시 시작하여 포셋이 사망할 때까지 연인 관계를 유지했다고 로트는 주장했다. 로트는 오닐이 포셋의 임종을 앞두고 자신이 그녀를 만나는 것을 방해했으며,[59] 오닐과 포셋의 관계는 보여주기식이었다고 주장했다.[60] 포셋은 유언을 통해 로트에게 10만달러를 남겼다.[59]
3. 2. 암 투병과 죽음
2006년 항문암 진단을 받았고,[65] 화학요법과 수술을 포함한 치료를 시작했다.[66] 미녀 삼총사의 동료였던 재클린 스미스와 케이트 잭슨은 유방암을 극복한 경험을 바탕으로 포셋의 투병을 지원했다.[155][156]2007년 2월 2일, 포셋의 60번째 생일에 AP 통신은 포셋이 암에서 벗어났다고 보도했다.[67] 포셋은 "오늘은 저와 제 가족에게 매우 행복한 날입니다. 안타깝게도 병과 계속 싸워야 하는 분들께 제 소식이 어떤 영감을 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라는 소감을 밝혔다.[157][158] 그러나 2007년 5월, 암은 재발했고 간으로 전이된 4기 암 진단을 받았다. 최초 암 치료 부위에서 악성 폴립이 발견되기도 했다.[68][159]
결장루 조성을 원치 않았던 포셋은 독일로 건너가 "대체 치료법"으로 알려진 치료를 받았다.[69][70] 이 치료에는 항문 종양 제거 수술, 간암 관류 및 색전술, 미국에서의 화학 요법 등이 포함되었다. 처음에는 종양이 줄어들었으나 몇 달 후 재발하여 레이저 절제 요법과 화학색전술을 포함한 새로운 치료가 필요했다.[71] 2007년 9월에는 라이언 오닐과 함께 프랑크푸르트 대학교 병원에서 줄기세포 치료를 받기도 했으나, 미국에서 불법적인 인간 ES 세포 사용이라는 비판을 받았다.[160][161][162] 친구 알라나 스튜어트의 도움으로 포셋은 자신의 투병 과정을 기록하기 시작했다.[72]
2009년 4월 초, 포셋은 미국으로 돌아와 입원했다.[73][74] 암이 간으로 전이되었으며,[75] 입원 자체는 암 때문이 아니라 복부 혈종 때문이라고 보도되었다.[75] 4월 9일 퇴원했지만,[76] 캘리포니아 대학교 로스앤젤레스 캠퍼스(UCLA) 부속 병원 직원이 그녀의 병세를 언론에 유출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164] 이후 캘리포니아주 산타모니카 병원으로 옮겼다.
2009년 5월 7일, 포셋은 위독한 상태로 보도되었고, 집에서 정맥 주사를 맞으며 지냈다.[80] 당시 수감 중이던 아들 레덤드 제임스 포셋-오닐과 수갑을 찬 상태로 잠시 만나기도 했다.[77] 포셋의 암 전문의 로렌스 피로와 친구 케이트 잭슨은 투데이 쇼에 출연하여 포셋이 혼수상태에 빠졌거나 약 39.01kg까지 체중이 감소했으며 살 의지를 잃었다는 타블로이드 매체의 소문을 부인했다.[78]

포셋과 알라나 스튜어트가 촬영하고 포셋이 직접 내레이션을 맡은 2시간 분량의 다큐멘터리 ''파라의 이야기''(Farrah's Storyeng)는[79] 2009년 5월 15일 NBC에서 방영되었다.[80][81] 이 다큐멘터리는 첫 방송에서 약 900만 명이 시청했으며,[82] MSNBC, 브라보, 옥시젠 등 케이블 채널에서도 재방송되었다. 포셋은 이 작품이 난치병 환자에게 용기를 주길 바랐지만, 방영 당시 그녀의 죽음이 임박했음은 널리 알려져 있었다. 방영 직전, 제작에 참여했던 프로듀서 크레이그 J. 네비우스는 라이언 오닐과 스튜어트가 포셋의 의도(대체 치료법 탐구)와 다르게 내용을 편집했다며 소송을 제기하는 논란도 있었다.[83][165] 포셋은 사후에 ''파라의 이야기'' 프로듀서로서 네 번째 에미상 후보에 올랐다.[84][169][170]
2009년 6월 25일 오전 9시 28분(PDT), 캘리포니아주 산타모니카의 세인트 존스 헬스 센터에서 항문암으로 사망했다. 향년 62세였다.[85] 임종 시 라이언 오닐과 알라나 스튜어트가 곁을 지켰다.[86][87][88] 공교롭게도 같은 날 마이클 잭슨이 사망하여 상대적으로 언론의 주목은 덜 받았으나, 그녀의 죽음은 전 세계 언론에 보도되었다.[113][146][171][172][173][174][175][176]
2009년 6월 30일, 로스앤젤레스에서 비공개 장례식이 열렸다. 아들 레덤드는 구치소에서 잠시 나와 장례식에 참석하여 첫 번째 성경 구절을 낭독했다. 포셋은 로스앤젤레스의 웨스트우드 빌리지 메모리얼 공원에 안장되었다.[89][90] 전 남편 리 메이저스는 "그녀는 지상의 천사였고, 이제 영원한 천사가 되었다"고 애도했다.[177][178]
4. 유산
1976년 파라 포셋을 상징하는 유명 포스터에 등장했던 빨간색 원피스 수영복은 2011년 2월 2일 미국 국립 미국사 박물관(NMAH)에 기증되었다.[17][101] 이 수영복은 패션 디자이너 노마 카말리가 디자인했으며,[102] 포셋의 유언 집행인이 스미소니언 박물관에 기증 의사를 밝혔고, 오랜 연인이었던 라이언 오닐이 워싱턴 D.C.의 NMAH에 직접 전달했다.[103] 빨간 수영복을 입은 포셋의 상징적인 모습은 금색 체인과 그녀 특유의 옆집 소녀 스타일 헤어를 재현한 한정판 바비 인형으로도 제작되었다.
2011년, 잡지 ''멘스 헬스''는 "역대 가장 핫한 여성 100인" 목록에 파라 포셋을 31위로 선정했다.[104]
유명 팝송 "조지아행 미드나잇 트레인"은 파라 포셋과 당시 남편이었던 리 메이저스에게서 영감을 받아 만들어졌다.[105] 작곡가 짐 웨더리는 친구인 메이저스에게 전화를 걸었으나 포셋이 대신 받았고, 그녀는 어머니를 만나러 "휴스턴행 미드나잇 비행기"를 탈 예정이라고 말했다. 웨더리는 이 대화에서 영감을 얻어, 로스앤젤레스를 떠나는 실패한 여배우와 그녀 없이는 살 수 없는 남자 친구에 관한 노래의 "등장인물"[106]로 그들을 사용했다. 이후 노래의 설정은 성별이 바뀌고, 비행기는 기차로, 휴스턴은 조지아로 변경되었다. 글래디스 나이트 & 더 핍스가 부른 이 노래는 1973년 빌보드 차트 1위를 기록했다.[107]
1980년에는 라이언 오닐의 주선으로 포셋과 예술가 앤디 워홀의 만남이 이루어졌고, 워홀은 이 만남 동안 포셋의 초상화 두 점을 제작했다.[108]
4. 1. 앤디 워홀 초상화 분쟁
파라 포셋은 자신의 미술품 컬렉션을 모교인 텍사스 대학교에 유증했다. 그러나 대학 측이 컬렉션을 인수했을 때, 앤디 워홀이 그린 포셋의 초상화 중 하나가 사라진 상태였다.[59]2011년, 해당 초상화를 포셋의 오랜 파트너였던 라이언 오닐이 보관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텍사스 대학교는 초상화의 반환을 요구하며 오닐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오닐은 포셋이 생전에 자신에게 이 초상화를 선물했다고 주장했다. 반면 포셋의 대학 시절 남자친구였던 그레고리 로트는 포셋이 초상화의 소유권을 포기한 적이 없으며, 모든 미술품을 자신의 모교에 기증하기를 원했다고 증언하며 대학 측의 주장을 뒷받침했다.[59]
2013년 12월, 로스앤젤레스 법원은 해당 앤디 워홀 초상화가 라이언 오닐의 소유라고 판결했다.[92]
4. 2. 사회적 영향
파라 포셋의 사망 소식은 같은 날 몇 시간 후에 일어난 마이클 잭슨의 사망 소식에 의해 언론 보도에서 상당 부분 가려졌다.[93][94] 사망 당일 밤, ABC는 바바라 월터스가 포셋과 과거에 진행했던 여러 인터뷰 클립과 라이언 오닐, 재클린 스미스, 앨라나 스튜어트, 로렌스 피로 박사와의 새로운 인터뷰를 담은 ''20/20''의 한 시간짜리 특별 에피소드를 방영했다.[95] 월터스는 금요일 ''20/20'' 에피소드에서도 이 이야기를 이어갔다. CNN의 ''래리 킹 라이브''는 원래 포셋만을 위한 프로그램을 기획했으나, 잭슨의 사망으로 인해 두 이야기를 모두 다루도록 변경되었다. 포셋의 오랜 친구인 셰어와 포셋의 미니시리즈 ''소소한 희생''의 총괄 프로듀서였던 수잔 드 파스가 이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포셋에게 경의를 표했다. 우연히도 드 파스는 1960년대와 70년대에 모타운 레코드에서 일하며 마이클 잭슨을 포함한 잭슨 파이브의 성장에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기도 하다. NBC는 다음 날 저녁인 6월 26일 황금 시간대에 ''파라의 이야기''를 재방송한 후, ''데이터라인 NBC'' 특집 "파라 포셋: 천사의 삶과 죽음"을 방송했다.그 주말과 다음 주에도 TV를 통한 추모는 계속되었다. MSNBC는 포셋과 잭슨을 다룬 ''헤드라이너스 앤 레전드'' 에피소드를 연이어 방송했다. TV 랜드는 ''미녀 삼총사''와 ''체이싱 파라'' 에피소드를 모아 미니 마라톤 형식으로 방영했다. E!는 ''마이클 & 파라: 잃어버린 아이콘''을, 바이오그래피 채널은 ''바이오 리멤버스: 파라 포셋''을 방송했다. 다큐멘터리 ''파라의 이야기''는 옥시젠 네트워크와 MSNBC에서 재방송되었다.[96] BET은 포셋이 출연했던 2004년 영화 ''더 쿡아웃''을 방영했다.
래리 킹은 포셋 현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70년대의 TV는 오늘날보다 훨씬 더 큰 영향을 미쳤다. ''미녀 삼총사''는 매주 엄청난 시청률을 기록했고, 오늘날처럼 TV 환경을 지배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아마도 ''아메리칸 아이돌''이 근접할 수 있지만, 지금은 너무나 많은 채널과 쇼가 있어서 ''미녀 삼총사''가 얻었던 시청자 수나 관심을 얻기 어렵다. 그녀는 이 매체가 분명히 지배적일 때 주요 TV 스타였다."[97]
케이트 잭슨은 그녀의 전 동료 배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녀는 가족과 친구들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이타적인 사람이었고, 얼마나 큰 마음이었는지. 파라는 투병 기간 동안 엄청난 용기와 은총을 보여주었고 주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나는 그녀의 친절함, 그녀의 날카로운 유머, 그리고 물론 그녀의 아름다운 미소를 잘 기억한다... 파라를 생각할 때, 그녀의 미소를 기억하라, 왜냐하면 그것이 그녀가 기억되기를 바라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미소."[98]
2010년 3월, 미국 영화 예술 과학 아카데미는 제82회 아카데미 시상식의 "추모" 몽타주에서 파라 포셋을 제외하여 가족과 친구들에게 실망감을 안겼다. 주로 영화 역할로 알려지지 않은 마이클 잭슨이 몽타주에 포함되면서 논란은 더욱 커졌다. 파라 포셋의 친구이자 동료였던 라이언과 테이텀 오닐, 제인 폰다, 영화 평론가 로저 에버트는[99] 이 누락에 대해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미국 영화 예술 과학 아카데미(AMPAS)의 전무 이사 브루스 데이비스는 포셋이 2009년 9월 제61회 프라임타임 에미상에서 "뛰어난 텔레비전 작품"으로 인정받았다고 언급하며, 제외 결정에 대해 "시상식 1~2일 전에는 특히 가족 구성원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말을 할 수 없다. 그들은 놀라움과 상처를 받는 경향이 있으며, 우리는 이를 이해하고 유감스럽게 생각한다."[100]라고 해명했다.
4. 3. 대중문화
파라 포셋의 사망 소식은 같은 날 몇 시간 후에 일어난 마이클 잭슨의 사망 소식에 의해 언론의 주목도가 크게 분산되었다.[93][94] 포셋이 사망한 날 밤, ABC는 바바라 월터스가 과거 포셋과 진행했던 여러 인터뷰 클립과 라이언 오닐, 재클린 스미스, 앨라나 스튜어트, 로렌스 피로 박사와의 새로운 인터뷰를 담은 ''20/20''의 한 시간짜리 특별 에피소드를 방송했다.[95] 월터스는 금요일 ''20/20'' 에피소드에서도 이 이야기를 이어갔다. CNN의 ''래리 킹 라이브''는 원래 포셋만을 위한 추모 방송을 기획했으나, 마이클 잭슨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면서 두 사람의 이야기를 모두 다루는 것으로 프로그램 구성을 변경했다. 포셋의 오랜 친구인 셰어와 포셋이 출연한 미니시리즈 ''소소한 희생''의 총괄 프로듀서였던 수잔 드 파스는 이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포셋에게 경의를 표했다. 흥미롭게도 드 파스는 1960년대와 70년대에 모타운 레코드에서 일하며 마이클 잭슨을 포함한 잭슨 파이브의 성장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인물이다. NBC는 다음 날 저녁인 6월 26일, ''파라의 이야기''를 황금 시간대에 재방송한 후 ''데이터라인 NBC'' 특집 "파라 포셋: 천사의 삶과 죽음"을 방송했다.그 주말과 다음 주에도 포셋을 추모하는 TV 프로그램들이 이어졌다. MSNBC는 포셋과 잭슨을 다룬 ''헤드라이너스 앤 레전드'' 에피소드를 연속으로 방송했다. TV 랜드는 ''미녀 삼총사''와 ''체이싱 파라'' 에피소드를 연달아 방송하는 미니 마라톤을 편성했다. E!는 ''마이클 & 파라: 잃어버린 아이콘''을, 바이오그래피 채널은 ''바이오 리멤버스: 파라 포셋''을 방송했다. 다큐멘터리 ''파라의 이야기''는 옥시젠 네트워크와 MSNBC에서 재방송되었다.[96] BET은 포셋이 출연했던 2004년 영화 ''더 쿡아웃''을 방송했다.
래리 킹은 '파라 포셋 현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70년대의 TV는 오늘날보다 훨씬 더 큰 영향을 미쳤다. ''미녀 삼총사''는 매주 엄청난 시청률을 기록했고, 오늘날처럼 TV 환경을 지배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아마도 ''아메리칸 아이돌''이 근접할 수 있지만, 지금은 너무나 많은 채널과 쇼가 있어서 ''미녀 삼총사''가 얻었던 시청자 수나 관심을 얻기 어렵다. 그녀는 이 매체가 분명히 지배적일 때 주요 TV 스타였다.[97]
케이트 잭슨은 함께 활동했던 동료 배우 포셋에 대해 다음과 같이 추모했다.
:그녀는 가족과 친구들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이타적인 사람이었고, 얼마나 큰 마음이었는지. 파라는 투병 기간 동안 엄청난 용기와 은총을 보여주었고 주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나는 그녀의 친절함, 그녀의 날카로운 유머, 그리고 물론 그녀의 아름다운 미소를 잘 기억한다... 파라를 생각할 때, 그녀의 미소를 기억하라, 왜냐하면 그것이 그녀가 기억되기를 바라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미소.[98]
2010년 3월, 미국 영화 예술 과학 아카데미는 제82회 아카데미 시상식의 "추모(In Memoriam)" 영상에서 파라 포셋을 제외하여 가족과 친구들에게 실망감을 안겼다. 주로 영화 배우로 알려지지 않았던 마이클 잭슨이 해당 영상에 포함된 사실은 논란을 더욱 키웠다. 포셋의 오랜 파트너였던 라이언 오닐과 그의 딸 테이텀 오닐, 친구인 제인 폰다, 그리고 영화 평론가 로저 에버트 등은[99] 아카데미의 결정에 대해 공개적으로 비판의 목소리를 냈다. 아카데미 측의 전무 이사 브루스 데이비스는 포셋이 이미 2009년 9월 제61회 프라임타임 에미상에서 "뛰어난 텔레비전 작품"으로 인정받았다는 점을 언급하며, 제외 결정에 대해 "시상식이 열리기 하루나 이틀 전에, 특히 가족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말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들은 놀라움과 상처를 받는 경향이 있으며, 우리는 이를 이해하고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 해명했다.[100]
5. 출연 작품
티나
릴라
파라 포셋-메이저스 명의
파라 포셋-메이저스 명의
트리쉬 홀랜더
빅토리아 웹스터
파라 포셋-메이저스 명의
파라 포셋-메이저스 명의
파라 포셋-메이저스 명의
골든 글로브상 TV 드라마 부문 여우주연상 후보 (1976)
파라 포셋-메이저스 명의
파라 포셋-메이저스 명의
실화 및 토마스 톰슨의 책 Blood and Money 기반
프라임타임 에미상 미니시리즈/영화 부문 여우주연상 후보
골든 글로브상 미니시리즈/TV 영화 부문 여우주연상 후보
골든 글로브상 미니시리즈/TV 영화 부문 여우주연상 후보
케이블ACE 어워드 TV 영화/미니시리즈 부문 여우주연상
프라임타임 에미상 미니시리즈/영화 부문 여우주연상 후보
골든 글로브상 미니시리즈/TV 영화 부문 여우주연상 후보
프라임타임 에미상 드라마 시리즈 부문 게스트 여우주연상 후보
프라임타임 에미상 논픽션 스페셜 부문 후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