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사로비츠 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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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사로비츠 조약은 1718년 오스만 제국과 합스부르크 군주국, 베네치아 공화국 간에 체결된 조약이다. 1714년부터 1718년까지 오스만 제국은 베네치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했으나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에서 패배하여, 이 조약을 통해 헝가리 잔여 지역, 왈라키아 서부, 세르비아 북부, 보스니아 북부를 오스트리아에 할양했다. 베네치아는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포기하고 이오니아 제도 등을 유지했다. 이 조약은 오스만 제국의 군사적 쇠퇴를 보여주는 사건으로, 합스부르크는 세르비아 왕국을 건설했다가 1739년 베오그라드 조약으로 해당 영토를 오스만 제국에 반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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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사로비츠 조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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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약 정보 | |
원어 명칭 | 독일어: Passarowitz 튀르키예어: Pasarofça |
관련 전쟁 | 오스만-베네치아 전쟁 (1714년-1718년) 오스트리아-튀르크 전쟁 (1716년-1718년) |
서명일 | 1718년 7월 21일 |
서명 장소 | 합스부르크 왕국 세르비아 왕국 파사로비츠 (현재의 세르비아 포자레바츠) |
중재국 | 영국 네덜란드 공화국 |
당사국 | 오스만 제국 신성 로마 제국 베네치아 공화국 |
지도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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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 정보 | |
설명 | Peters (2011), 39-50쪽; Ágoston (2011), 93–108쪽; Setton (1991), 449–450쪽 |
2. 배경
1714년부터 1718년까지 오스만 제국은 베네치아를 상대로 오스만-베네치아 전쟁을 벌여 오스만령 그리스와 크레타 섬에서 성공을 거두고 있었다. 하지만 합스부르크 군주국이 베네치아의 동맹으로 참전하면서 오스트리아-튀르크 전쟁이 발발했다.
1714년부터 1718년까지 이어진 오스트리아-튀르크 전쟁과 튀르크-베네치아 전쟁의 결과로 체결된 강화 조약이다. 오스만 제국은 베네치아와의 전쟁에서는 우위를 점했으나, 외젠 공이 이끄는 오스트리아군에게 페테르바르데인 전투와 베오그라드 포위전 등에서 결정적으로 패배하면서 불리한 조건으로 조약을 맺게 되었다.
오스만군은 1716년 페트로바라딘 전투와 1717년 베오그라드 포위전에서 사부아 공자 외젠이 이끄는 오스트리아군에게 연이어 패배하며 전세가 불리해졌다. 이러한 군사적 상황 속에서 그레이트브리튼 왕국과 네덜란드 공화국이 중재에 나서 평화 협상이 시작되었다.
3. 조약의 주요 내용
조약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파사로비츠 조약은 17세기 말부터 시작된 오스만 제국의 군사적 쇠퇴를 명확히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평가된다.
3. 1. 오스만 제국의 영토 할양
오스만 제국은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에서 외젠 공이 이끄는 군대에 페테르바르데인 전투와 베오그라드 포위전 등에서 패배함에 따라 영토를 할양해야 했다. 반면, 베네치아 공화국과의 전쟁에서는 유리한 입장이었으나, 오스트리아와의 전쟁 결과가 조약 내용에 더 큰 영향을 미쳤다.
이 조약에 따라 오스만 제국은 다음 영토를 합스부르크 오스트리아에 할양했다.
또한 합스부르크는 오스만 영토 내에서 상인들의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받았으며, 가톨릭 사제들의 기존 특권 회복을 인정받았다. 이는 합스부르크 황제가 오스만 제국 내 가톨릭 공동체를 통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1]
베네치아 공화국과의 관계에서는 다음과 같은 영토 조정이 이루어졌다.
결과적으로 파사로비츠 조약은 17세기 말부터 이어진 오스만 제국의 군사적 약화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평가된다.
대상 국가 |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획득 또는 유지한 영토 | 오스만 제국에 할양 또는 포기한 영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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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 바나트, 왈라키아 서부(올테니아), 세르비아 북부(베오그라드 포함), 보스니아 북부(포사비나), 시르미아 남동부 | - |
베네치아 공화국 | 이오니아 제도 (키테라 포함), 프레베자, 아르타, 달마티아의 이모츠키와 브르고라츠 지역 | 모레아, 크레타의 마지막 전초 기지, 에게나, 티노스 |
3. 2. 베네치아 공화국의 영토 변화
1714년부터 1718년까지 오스만 제국은 베네치아 공화국과 그리스, 크레타 섬 등지에서 전쟁을 벌이는 한편, 오스트리아와도 전쟁 중이었다. 오스만 제국은 베네치아와의 전쟁에서는 우위를 점했지만, 오스트리아에게는 페테르바르데인 전투와 베오그라드 포위전 등에서 패배했다. 파사로비츠 조약은 이 두 전쟁을 종결짓기 위해 체결되었다.조약 결과, 베네치아 공화국은 군사적 열세를 반영하여 영토 변화를 겪었다. 1699년 카를로비츠 조약으로 획득했던 펠로폰네소스반도(당시 모레아)를 오스만 제국에 다시 할양했다. 또한 크레타 섬에 남아 있던 마지막 전초 기지들과 에게해의 에게나 섬, 티노스 섬도 포기했다.
반면, 베네치아는 이오니아 제도에 대한 지배권을 유지했으며, 오스만이 점령했던 키테라 섬을 추가로 확보했다. 그리스 본토에서는 에피루스의 프레베자와 아르타 도시를 계속 보유했다. 달마티아에서는 내륙 지방의 이모츠키와 브르고라츠 지역을 점령하여 일부 영토를 확장했다.
3. 3. 기타 내용
1714년부터 1718년까지 오스만 제국은 베네치아와의 튀르크-베네치아 전쟁에서는 그리스와 크레타 섬 등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에서는 외젠 공이 이끄는 오스트리아군에게 페테르바르데인 전투와 베오그라드 포위전에서 연이어 패배했다. 파사로비츠 조약은 이 두 전쟁의 결과를 종합하여 체결된 강화 조약이다.조약의 내용은 당시 군사적 상황을 그대로 반영했다. 오스만 제국은 다음과 같은 영토를 오스트리아에 할양해야 했다.
또한, 오스트리아는 합스부르크 상인들이 오스만 영토 내에서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권리와 함께, 오스만 제국 내 가톨릭 사제들의 기존 특권을 회복시킨다는 보장을 받았다. 이는 합스부르크 황제가 가톨릭 공동체와의 연계를 통해 오스만 제국의 내부 문제에 개입할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해 주었다.[1]
한편, 베네치아 공화국은 1699년 카를로비츠 조약을 통해 획득했던 펠로폰네소스 반도(모레아)를 오스만 제국에 다시 넘겨주어야 했다. 크레타 섬에 남아 있던 마지막 전초 기지와 에게해의 에게나 섬, 티노스 섬도 포기했다. 대신 베네치아는 이오니아 제도(오스만이 점령했던 키테라 섬 포함)와 에피루스 본토의 프레베자, 아르타는 유지할 수 있었다. 달마티아에서는 내륙 지방의 이모츠키와 브르고라츠 지역을 점령하여 일부 영토를 확장했다.
이 조약은 17세기 말부터 시작된 오스만 제국의 군사적 쇠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4. 조약의 결과 및 영향
파사로비츠 조약은 오스트리아-튀르크 전쟁과 튀르크-베네치아 전쟁의 결과로 체결되었다. 이 조약은 당시의 군사적 상황을 반영하여 발칸 반도의 영토 구도에 큰 변화를 가져왔으며, 특히 합스부르크 제국의 팽창과 오스만 제국의 쇠퇴를 보여주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조약의 주요 결과는 다음과 같다.
- 합스부르크 제국의 영토 확장: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헝가리의 남은 지역, 바나트, 세르비아 북부(베오그라드 포함), 보스니아 북부, 왈라키아 서부(올테니아) 등을 할양받아 발칸 반도에서의 영향력을 크게 확대했다. 합스부르크는 획득한 세르비아 북부와 바나트 지역에 각각 세르비아 왕국과 바나트 왕령지를 설립했다.
- 오스만 제국의 영토 상실 및 쇠퇴: 유럽 내 중요 영토를 다수 상실하며 17세기 말부터 이어진 군사적 쇠퇴가 더욱 분명해졌다.
- 베네치아 공화국의 영토 변화: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오스만 제국에 넘겨주었으나, 1699년 카를로비츠 조약으로 얻었던 크레타 섬의 일부 거류지와 이오니아 제도 등은 유지했다.
국가 | 획득 영토 | 상실 영토 |
---|---|---|
합스부르크 제국 | 바나트, 세르비아 북부(베오그라드 포함), 보스니아 북부, 왈라키아 서부(올테니아), 헝가리 일부 | - |
오스만 제국 | 펠로폰네소스 반도 (베네치아로부터) | 바나트, 세르비아 북부, 보스니아 북부, 올테니아, 헝가리 일부 |
베네치아 공화국 | - | 펠로폰네소스 반도 (이오니아 제도, 달마티아 해안 일부, 크레타 섬 거류지는 유지) |
합스부르크가 이 조약으로 얻은 지배권은 약 21년 동안 지속되었으나, 이후 오스트리아-러시아-튀르크 전쟁 (1735년-1739년)의 결과로 체결된 1739년 베오그라드 조약에 따라 오스만 제국은 세르비아 북부, 보스니아 북부, 올테니아 등 일부 영토를 되찾게 된다. 그럼에도 파사로비츠 조약은 18세기 초 유럽의 세력 균형 변화를 보여주는 중요한 역사적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4. 1. 합스부르크 세르비아 왕국 설립
이 조약은 합스부르크에게 현재 세르비아 북부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부여했다. 이 지역은 합스부르크가 1688년에서 1690년 사이에 벌어진 대튀르크 전쟁 동안 잠시 점령했던 곳이다. 합스부르크는 이 지역에 세르비아 왕국을 왕령지로 설립했으며, 바나트 역시 또 다른 왕령지로 만들었다.
합스부르크의 지배는 21년 동안 지속되었으나, 이후 오스트리아-러시아-튀르크 전쟁 (1735년-1739년)에서 오스만 제국이 승리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1739년 체결된 베오그라드 조약에 따라 오스만 제국은 북부 보스니아, 합스부르크 세르비아(베오그라드 포함), 테메스와르 바나트의 남부 지역을 되찾았다. 또한, 올테니아는 왈라키아로 반환되었다.
4. 2. 오스만 제국의 쇠퇴 가속화
1714년부터 1718년까지 오스만 제국은 베네치아와 그리스, 크레타 섬에서 벌인 튀르크-베네치아 전쟁에서는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하지만 같은 시기 오스트리아-튀르크 전쟁에서는 페테르바르데인 전투와 베오그라드 포위전에서 사보이 공자 외젠이 이끄는 오스트리아군에게 연이어 패배했다. 파사로비츠 조약은 이 두 전쟁의 결과를 종합하여 체결된 강화 조약이다.이 조약은 당시의 군사적 상황을 그대로 반영했다. 오스만 제국은 헝가리의 남은 지역, 왈라키아 서부(올테니아), 세르비아 북부, 보스니아 북부 등을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제국에 할양해야 했다. 반면, 베네치아는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오스만 제국에 넘겨주었고, 1699년 카를로비츠 조약으로 얻었던 영토 중에서는 크레타 섬의 일부 거류지와 이오니아 제도 등만을 유지하게 되었다. 파사로비츠 조약은 17세기 말부터 18세기에 걸쳐 오스만 제국이 군사적으로 쇠퇴기에 접어들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4. 3. 합스부르크의 지배와 종식
이 조약을 통해 합스부르크는 이전에 대튀르크 전쟁(1688년-1690년) 동안 잠시 점령했던 현재 세르비아 북부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게 되었다. 합스부르크는 이 지역에 세르비아 왕국을 왕령지로 설립했으며, 바나트 역시 또 다른 왕령지로 만들었다.
합스부르크의 지배는 21년간 이어졌으나, 이후 오스트리아-러시아-튀르크 전쟁 (1735년-1739년)에서 튀르크가 승리하면서 막을 내렸다. 1739년 체결된 베오그라드 조약에 따라 오스만 제국은 북부 보스니아, 베오그라드를 포함한 합스부르크령 세르비아, 테메스와르 바나트의 남부 지역을 되찾았다. 또한, 올테니아는 왈라키아로 반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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