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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울리누스 에보라켄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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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울리누스 에보라켄시스는 7세기 초 앵글로색슨족을 기독교로 개종시키기 위해 파견된 로마 출신 수도사였다. 그는 625년 캔터베리 대주교 유스투스에 의해 주교로 서임되었으며, 노섬브리아로 가서 노섬브리아 왕 에드윈과 결혼할 예정이었던 켄트 왕 에드발드의 누이 에델부르크를 따라갔다. 에드윈의 개종을 도왔으며, 요크에 교회를 세우고 린지에서도 선교 활동을 펼쳤다. 에드윈이 사망한 후에는 로체스터 주교로 임명되어 그곳에서 사망했으며, 사후 성인으로 추앙받아 10월 10일을 축일로 기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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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울리누스 에보라켄시스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로체스터 대성당의 조각상
로체스터 대성당의 동상
존칭 접두사성인
직함주교
이름파울리누스
직책요크 주교
임명627년
종료633년
전임창립자
후임차드
주교 서임625년 7월 21일
주교 서임자유스투스
사망일644년 10월 10일
사망 장소켄트 로체스터
매장지로체스터 대성당
축일10월 10일
공경동방 정교회
로마 가톨릭교회
성공회

2. 초기 생애

파울리누스는 601년 그레고리오 1세에 의해 멜리투스 등과 함께 앵글로색슨족을 기독교로 개종시키기 위해 켄트 왕국으로 파견된 로마 출신 수도사였다. 그는 아마도 이탈리아 출신이었을 것이다.[2] 두 번째 선교단은 604년 켄트에 도착했지만, 파울리누스가 노섬브리아로 가기 전까지 그의 활동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2]

파울리누스는 625년 7월 21일 캔터베리 대주교 유스투스에 의해 주교로 서임될 때까지 켄트에 머물렀다.[3] 이후 그는 켄트 왕 에드발드의 누이인 에델부르크를 따라 노섬브리아로 갔는데, 그곳에서 그녀는 에드윈 왕과 결혼할 예정이었다. 결혼 조건 중 하나는 에드윈이 에델부르크가 기독교를 유지하고 원하는 대로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허용하겠다는 약속이었다. 8세기 초에 글을 쓴 베다는 파울리누스가 새로운 여왕에게 종교적 서비스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노섬브리아인들을 개종시키기를 원했다고 보고한다.[2]

베다의 에델부르크의 결혼 날짜에 대한 연대기에는 어려움이 있는데, 에드윈에게 개종을 촉구하는 교황의 현존하는 서신은 에드발드가 최근에야 기독교인이 되었다는 것을 암시하며, 이는 베다의 연대기와 모순된다. 역사가 D. P. 커비는 파울리누스와 에델부르크가 624년보다 일찍 노섬브리아로 갔어야 하며, 파울리누스는 주교가 아닌 사제로 북쪽으로 갔다가 나중에 서임받기 위해 돌아왔다고 주장한다.[5] 역사가 헨리 메이어-하팅은 커비의 추론에 동의한다.[4] 또 다른 역사가인 피터 헌터 블레어는 에델부르크와 에드윈이 625년 이전에 결혼했지만, 그녀는 625년까지 노섬브리아로 가지 않았다고 주장한다.[5] 커비의 주장이 받아들여진다면, 파울리누스의 서임 날짜는 1년 변경되어 626년 7월 21일이 되어야 한다.[6]

베다는 파울리누스를 "키가 크고 약간 구부정하며 검은 머리카락과 마른 얼굴, 매부리코와 가는 코, 존경스럽고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모습"이라고 묘사한다.[7]

2. 1. 이탈리아 출신 수도사

파울리누스는 601년 그레고리오 1세에 의해 멜리투스 등과 함께 앵글로색슨족을 기독교로 개종시키기 위해 켄트 왕국으로 파견된 두 번째 선교단의 일원이었다. 그는 아마도 이탈리아 출신이었을 것이다.[2]

2. 2. 켄트에서의 초기 활동

파울리누스는 601년 그레고리오 1세에 의해 멜리투스 등과 함께 앵글로색슨족을 기독교로 개종시키기 위해 켄트 왕국으로 파견된 로마 출신 수도사였다. 그는 아마도 이탈리아 출신이었을 것이다.[2] 604년 켄트에 도착한 후, 노섬브리아로 가기 전까지 그의 활동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2]

파울리누스는 625년 7월 21일 캔터베리 대주교 유스투스에 의해 주교로 서임되었다.[3] 이후 그는 켄트 왕 에드발드의 누이인 에델부르크를 따라 노섬브리아로 갔는데, 그곳에서 그녀는 노섬브리아 왕 에드윈과 결혼할 예정이었다. 베다는 파울리누스가 새로운 여왕에게 종교적 서비스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노섬브리아인들을 개종시키기를 원했다고 보고한다.[2]

베다의 에델부르크의 결혼 날짜에 대한 연대기에는 어려움이 있는데, 에드윈에게 개종을 촉구하는 교황의 현존하는 서신은 에드발드가 최근에야 기독교인이 되었다는 것을 암시하며, 이는 베다의 연대기와 모순된다. 역사가 D. P. 커비는 파울리누스와 에델부르크가 624년보다 일찍 노섬브리아로 갔어야 하며, 파울리누스는 주교가 아닌 사제로 북쪽으로 갔다가 나중에 서임받기 위해 돌아왔다고 주장한다.[5] 역사가 헨리 메이어-하팅은 커비의 추론에 동의한다.[4] 또 다른 역사가인 피터 헌터 블레어는 에델부르크와 에드윈이 625년 이전에 결혼했지만, 그녀는 625년까지 노섬브리아로 가지 않았다고 주장한다.[5] 커비의 주장이 받아들여진다면, 파울리누스의 서임 날짜는 1년 변경되어 626년 7월 21일이 되어야 한다.[6]

베다는 파울리누스를 "키가 크고 약간 구부정하며 검은 머리카락과 마른 얼굴, 매부리코와 가는 코, 존경스럽고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모습"이라고 묘사한다.[7]

3. 노섬브리아 선교

파울리누스는 625년 7월 21일 캔터베리 대주교 유스투스에 의해 주교로 서임되었다.[3] 이후 그는 켄트 왕 에드발드의 누이인 에델부르흐를 따라 노섬브리아로 갔는데, 그곳에서 그녀는 노섬브리아 왕 에드윈과 결혼할 예정이었다.[2] 결혼 조건 중 하나는 에드윈이 에델부르흐가 기독교를 유지하고 원하는 대로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허용하겠다는 약속이었다. 베다는 파울리누스가 새로운 여왕에게 종교적 서비스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노섬브리아인들을 개종시키기를 원했다고 보고한다.[2]

베다의 에델부르크의 결혼 날짜에 대한 연대기에는 어려움이 있는데, 에드윈에게 개종을 촉구하는 교황의 현존하는 서신은 에드발드가 최근에야 기독교인이 되었다는 것을 암시하며, 이는 베다의 연대기와 모순된다. 역사가 D. P. 커비는 파울리누스와 에델부르크가 624년보다 일찍 노섬브리아로 갔어야 하며, 파울리누스는 주교가 아닌 사제로 북쪽으로 갔다가 나중에 서임받기 위해 돌아왔다고 주장한다.[5] 역사가 헨리 메이어-하팅은 커비의 추론에 동의한다.[4] 또 다른 역사가인 피터 헌터 블레어는 에델부르크와 에드윈이 625년 이전에 결혼했지만, 그녀는 625년까지 노섬브리아로 가지 않았다고 주장한다.[5] 커비의 주장이 받아들여진다면, 파울리누스의 서임 날짜는 1년 변경되어 626년 7월 21일이 되어야 한다.[6]

3. 1. 노섬브리아 왕비 에델부르흐

파울리누스는 625년 7월 21일 캔터베리 대주교 유스투스에 의해 주교로 서임되었다.[3] 이후 그는 켄트 왕 에드발드의 누이인 에델부르흐를 따라 노섬브리아로 갔는데, 그곳에서 그녀는 노섬브리아 왕 에드윈과 결혼할 예정이었다.[2] 결혼 조건 중 하나는 에드윈이 에델부르흐가 기독교를 유지하고 원하는 대로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허용하겠다는 약속이었다. 베다는 파울리누스가 새로운 여왕에게 종교적 서비스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노섬브리아인들을 개종시키기를 원했다고 보고한다.[2]

베다의 에델부르크의 결혼 날짜에 대한 연대기에는 어려움이 있는데, 에드윈에게 개종을 촉구하는 교황의 현존하는 서신은 에드발드가 최근에야 기독교인이 되었다는 것을 암시하며, 이는 베다의 연대기와 모순된다. 역사가 D. P. 커비는 파울리누스와 에델부르크가 624년보다 일찍 노섬브리아로 갔어야 하며, 파울리누스는 주교가 아닌 사제로 북쪽으로 갔다가 나중에 서임받기 위해 돌아왔다고 주장한다.[5] 역사가 헨리 메이어-하팅은 커비의 추론에 동의한다.[4] 또 다른 역사가인 피터 헌터 블레어는 에델부르크와 에드윈이 625년 이전에 결혼했지만, 그녀는 625년까지 노섬브리아로 가지 않았다고 주장한다.[5] 커비의 주장이 받아들여진다면, 파울리누스의 서임 날짜는 1년 변경되어 626년 7월 21일이 되어야 한다.[6]

3. 2. 에드윈 왕의 개종

베다는 파울리누스가 에드윈에게 626년 부활절에 그와 에델버그의 딸이 태어난 것은 파울리누스의 기도 덕분이라고 말했다고 전한다. 딸의 탄생은 웨섹스 출신의 웨스트 색슨 무리가 왕을 암살하려다 실패한 사건과 일치했다. 에드윈은 웨섹스에 대한 승리를 거두면 기독교로 개종하고 그의 새로운 딸 앤플래드에게 세례를 받도록 허락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그는 웨스트 색슨에 대한 군사적 성공 이후 즉시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고, 파울리누스가 왕이 왕위를 차지하기 전, 이스트 앵글리아의 래드월드 왕의 궁정에서 망명 생활을 할 때 꾼 꿈의 내용을 밝힌 후에야 개종했다.[2] 베다에 따르면, 이 꿈에서 낯선 사람이 에드윈에게 누군가 그의 머리에 손을 얹으면 미래에 그의 권력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파울리누스가 에드윈에게 꿈을 밝히자 그는 왕의 머리에 손을 얹었고, 이것이 에드윈에게 필요한 증거였다. 7세기 후반의 교황 그레고리 1세성인전에서는 파울리누스가 그 환상의 낯선 사람이라고 주장한다;[2] 만약 사실이라면, 파울리누스가 래드월드의 궁정에서 얼마 동안 시간을 보냈을 가능성이 있다;[8] 비록 베다는 그런 방문에 대해 언급하지 않지만.[2]

초자연적인 일과 파울리누스의 설득만으로 에드윈이 개종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노섬브리아 귀족들도 기꺼이 받아들인 것으로 보이며, 왕은 또한 교황 보니파시오 5세로부터 개종을 촉구하는 편지를 받았다.[2] 결국 설득된 에드윈은 627년 요크에서 많은 추종자들과 함께 세례를 받았다.[9] 한 이야기에 따르면, 파울리누스는 에드윈과 에델버그와 함께 예버링에 있는 그들의 궁전에 머무는 동안 36일 동안 새로운 개종자들에게 세례를 베풀었다고 한다.[9] 파울리누스는 또한 린지에서 활발한 선교 활동을 펼쳤으며,[10] 그의 선교 활동은 에드윈의 왕권의 한계를 보여주는 데 도움이 된다.[11]

교황 그레고리의 계획은 요크가 잉글랜드의 두 번째 수도 대교구가 되는 것이었으므로, 파울리누스는 그곳에 교회를 세웠다.[9] 돌로 지어졌지만, 그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2] 파울리누스는 또한 왕실 영지에 여러 교회를 지었다.[12] 링컨에 있는 그의 교회는 베일의 성 바울 교회 초기 건축 단계와 동일시되었다.[2]

파울리누스에게 세례를 받은 사람들 중에는 위트비 수도원의 초대 원장이 된 힐다[13]와 힐다의 후계자인 에드윈의 딸 앤플래드도 있었다.[14] 잉글랜드의 유일한 로마 주교인 파울리누스는 또한 유스투스의 죽음 이후, 628년에서 631년 사이에 다른 그레고리 선교사인 호노리우스를 캔터베리 대주교로 서임했다.[2]

3. 3. 요크 주교좌 설립

626년 부활절에 에드윈 왕과 에델버그 왕비 사이에 딸 앤플래드가 태어났는데, 베다는 파울리누스의 기도 덕분이라고 전한다. 딸의 탄생은 웨섹스의 웨스트 색슨 무리가 왕을 암살하려다 실패한 사건과 일치했다. 에드윈은 웨섹스에 대한 승리를 거두면 기독교로 개종하고 딸에게 세례를 받도록 허락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그는 즉시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고, 파울리누스가 왕이 왕위를 차지하기 전 이스트 앵글리아의 래드월드 왕의 궁정에서 망명 생활을 할 때 꾼 꿈의 내용을 밝힌 후에야 개종했다.[2] 7세기 후반의 교황 그레고리오 1세의 성인전에서는 파울리누스가 그 환상의 낯선 사람이라고 주장한다.[2]

노섬브리아 귀족들도 기독교 개종을 받아들인 것으로 보이며, 왕은 교황 보니파시오 5세로부터 개종을 촉구하는 편지를 받았다.[2] 결국 설득된 에드윈은 627년 요크에서 많은 추종자들과 함께 세례를 받았다.[9] 파울리누스는 예버링에 있는 궁전에 머무는 동안 36일 동안 새로운 개종자들에게 세례를 베풀었다고 한다.[9] 파울리누스는 또한 린지에서 활발한 선교 활동을 펼쳤다.[10]

교황 그레고리오 1세의 계획은 요크가 잉글랜드의 두 번째 수도 대교구가 되는 것이었으므로, 파울리누스는 그곳에 교회를 세웠다.[9] 돌로 지어졌지만, 그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2] 파울리누스는 또한 왕실 영지에 여러 교회를 지었다.[12] 링컨에 있는 그의 교회는 베일의 성 바울 교회 초기 건축 단계와 동일시되었다.[2]

파울리누스에게 세례를 받은 사람들 중에는 위트비 수도원의 초대 원장이 된 힐다[13]와 힐다의 후계자인 에드윈의 딸 앤플래드도 있었다.[14] 잉글랜드의 유일한 로마 주교인 파울리누스는 또한 628년에서 631년 사이에 호노리우스를 캔터베리 대주교로 서임했다.[2]

4. 로체스터 주교

해트필드 체이스 전투에서 에드윈기네스의 웨일스인과 머시아 앵글족 연합군에게 패배하여 사망하면서, 그의 왕국은 최소 두 부분으로 분열되었다.[2] 전통적으로 전투는 633년 10월 12일에 벌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2] 그러나 호노리우스 1세가 634년 6월에 파울리누스와 대주교 호노리우스에게 대주교의 권위를 상징하는 팔리움을 보낸다는 편지를 썼다는 점에서 전투 날짜에 대한 문제가 제기된다.[15] 교황의 편지에는 에드윈의 사망 소식이 전투의 추정 날짜로부터 거의 9개월이 지난 후에도 로마에 도달했다는 낌새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역사가 D. P. 커비는 전투가 634년에 발생했을 가능성이 더 높다고 주장한다.[15]

에드윈의 패배와 죽음으로 노섬브리아의 기독교는 급격히 쇠퇴했다.[16] 과부가 된 퀸 에델부르그는 에드발드의 켄트 왕국으로 도망쳤고, 파울리누스는 그녀와 함께 에드윈과 에델부르그의 아들, 딸, 그리고 손자와 함께 갔다.[2] 두 소년은 안전을 위해 대륙으로 가서 다고베르트 1세 왕의 궁정에 머물렀다.[2] 에델부르그, 에안플레드, 그리고 파울리누스는 켄트에 남아 있었고, 파울리누스는 그곳에서 로체스터 교구의 주교직을 제안받아 사망할 때까지 맡았다.[2] 파울리누스에게 보내진 팔리움은 그가 요크를 떠난 후에야 도착했기 때문에 그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2] 파울리누스의 대리인인 야고보 부제는 북쪽에 남아 로마 선교를 재건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16]

4. 1. 노섬브리아의 혼란과 켄트로의 귀환

해트필드 체이스 전투에서 기네스의 웨일스인과 머시아 앵글족 연합군에게 패배한 에드윈은 633년 10월 12일에 사망했다.[2] 그러나 호노리우스 1세가 634년 6월에 파울리누스와 대주교 호노리우스에게 팔리움을 보낸다는 편지를 썼는데, 이 편지에는 에드윈의 사망 소식이 로마에 도달하지 않았다는 낌새가 없었다.[15] 역사가 D. P. 커비는 이러한 정황을 근거로 전투가 634년에 발생했을 가능성이 더 높다고 주장한다.[15]

에드윈의 패배와 죽음으로 그의 왕국은 최소 두 부분으로 분열되었다.[2] 에드윈의 직계 후계자들이 이교로 돌아가면서 노섬브리아의 기독교는 급격히 쇠퇴했다.[16] 과부가 된 퀸 에델부르그는 에드발드의 켄트 왕국으로 도망쳤다. 파울리누스는 그녀와 함께 에드윈과 에델부르그의 아들, 딸, 그리고 손자를 데리고 갔다. 두 소년은 안전을 위해 대륙으로 가서 다고베르트 1세 왕의 궁정에 머물렀다. 에델부르그, 에안플레드, 그리고 파울리누스는 켄트에 남아 있었고, 파울리누스는 로체스터 교구의 주교직을 제안받아 사망할 때까지 맡았다.[2] 파울리누스에게 보내진 팔리움은 그가 요크를 떠난 후에야 도착했기 때문에 그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2] 파울리누스의 대리인인 야고보 부제는 북쪽에 남아 로마 선교를 재건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16]

4. 2. 로체스터 주교 재임

해트필드 체이스 전투에서 에드윈이 기네스 웨일스인과 머시아 앵글족의 연합군에게 패배하여 사망하면서, 그의 왕국은 최소 두 부분으로 분열되었다.[2] 전통적으로 전투는 633년 10월 12일에 벌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2] 그러나 호노리우스 1세가 634년 6월에 파울리누스와 대주교 호노리우스에게 대주교의 권위를 상징하는 팔리움을 보낸다는 편지를 썼다는 점에서 전투 날짜에 대한 문제가 제기된다.[15] 교황의 편지에는 에드윈의 사망 소식이 전투의 추정 날짜로부터 거의 9개월이 지난 후에도 로마에 도달했다는 낌새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역사가 D. P. 커비는 전투가 634년에 발생했을 가능성이 더 높다고 주장한다.[15]

에드윈의 패배와 죽음으로 노섬브리아의 기독교는 급격히 쇠퇴했다.[16] 과부가 된 퀸 에델부르그는 에드발드의 켄트 왕국으로 도망쳤고, 파울리누스는 그녀와 함께 에드윈과 에델부르그의 아들, 딸, 그리고 손자와 함께 갔다.[2] 두 소년은 안전을 위해 대륙으로 가서 다고베르트 1세 왕의 궁정에 머물렀다.[2] 에델부르그, 에안플레드, 그리고 파울리누스는 켄트에 남아 있었고, 파울리누스는 그곳에서 로체스터 교구의 주교직을 제안받아 사망할 때까지 맡았다.[2] 파울리누스에게 보내진 팔리움은 그가 요크를 떠난 후에야 도착했기 때문에 그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2] 파울리누스의 대리인인 야고보 부제는 북쪽에 남아 로마 선교를 재건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16]

5. 죽음과 시성

파울리누스는 644년 10월 10일 로체스터에서 사망하여[17] 교회의 성구실에 묻혔다.[18] 로체스터의 그의 후임은 최초의 영국인인 이타마르가 임명되었고, 그는 그레고리 선교 관구의 주교로 서임되었다.[19] 파울리누스 사후, 파울리누스는 성인으로 존경받았으며, 축일은 10월 10일이다. 1080년대에 로체스터에 새로운 교회가 건설되었을 때 그의 유해는 새로운 성당으로 이장되었다.[2] 또한 캔터베리에도 파울리누스의 성당이 있었고, 그에게 헌정된 교회는 최소 다섯 곳이 있었다.[20] 로체스터가 파울리누스의 유해 일부를 보관하고 있었지만, 그곳에서 그의 숭배가 촉진된 것은 노르만 정복 이후였던 것으로 보인다.[21] 그는 로마 가톨릭 교회, 성공회, 동방 정교회에서 성인으로 여겨진다.[22][23]

5. 1. 죽음과 매장

파울리누스는 644년 10월 10일 로체스터에서 사망하여[17] 교회의 성구실에 묻혔다.[18] 로체스터의 그의 후임은 최초의 영국인인 이타마르가 임명되었고, 그는 그레고리 선교 관구의 주교로 서임되었다.[19] 파울리누스 사후, 파울리누스는 성인으로 존경받았으며, 축일은 10월 10일이다.[2] 1080년대에 로체스터에 새로운 교회가 건설되었을 때 그의 유해는 새로운 성당으로 이장되었다.[2] 또한 캔터베리에도 파울리누스의 성당이 있었고, 그에게 헌정된 교회는 최소 다섯 곳이 있었다.[20] 로체스터가 파울리누스의 유해 일부를 보관하고 있었지만, 그곳에서 그의 숭배가 촉진된 것은 노르만 정복 이후였던 것으로 보인다.[21] 그는 로마 가톨릭 교회, 성공회, 동방 정교회에서 성인으로 여겨진다.[22][23]

5. 2. 시성과 숭배

파울리누스는 644년 10월 10일 로체스터에서 사망하여[17] 교회의 성구실에 묻혔다.[18] 로체스터의 그의 후임은 최초의 영국인인 이타마르가 임명되었고, 그는 그레고리 선교 관구의 주교로 서임되었다.[19] 파울리누스 사후, 파울리누스는 성인으로 존경받았으며, 축일은 10월 10일이다. 1080년대에 로체스터에 새로운 교회가 건설되었을 때 그의 유해는 새로운 성당으로 이장되었다.[2] 또한 캔터베리에도 파울리누스의 성당이 있었고, 그에게 헌정된 교회는 최소 다섯 곳이 있었다.[20] 로체스터가 파울리누스의 유해 일부를 보관하고 있었지만, 그곳에서 그의 숭배가 촉진된 것은 노르만 정복 이후였던 것으로 보인다.[21] 그는 로마 가톨릭 교회, 성공회, 동방 정교회에서 성인으로 여겨진다.[22][23]

6. 평가

7. 추가 자료



  • 헨리 메이어-하팅/Mayr-Harting, H. M. R. E.영어 (1967). 〈Paulinus of York〉. G. J. Cuming. 《Studies in Church History IV: The Province of York》. Leiden: Brill. 15–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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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그레고리오 선교

|제목 = 앵글로색슨족에 대한 가톨릭교회의 그레고리오 선교사업의 선교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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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우구스티노
  • 호노리오
  • 부제 야고보
  • 유스토
  • 라우렌시오
  • 멜리토
  • 바울리노
  • 베드로
  • 로마노


| 아랫글 =




}}

참조

[1] 서적 Ecgbert
[2] 서적 Paulinus (St Paulinus)
[3] 서적
[4] 서적
[5] 서적
[6] 서적
[7] 서적
[8] 서적
[9] 서적 Paulinus
[10] 서적
[11] 서적
[12] 서적
[13] 서적
[14] 서적
[15] 서적
[16] 서적
[17] 서적
[18] 서적
[19] 논문 Naming of Bishop Ithamar
[20] 서적
[21] 간행물 Shrines of Saints Archaeology Data Services
[22] 서적
[23] 서적
[24] 서적
[25] 서적 Ecgbe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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