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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저강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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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저강 전투는 1433년 조선 세종 시기에 압록강 유역의 여진족을 정벌하기 위해 벌어진 군사 작전이다. 당시 여진족은 고려 시대부터 조선 초까지 북방 국경을 침략하여 약탈을 일삼았고, 1432년에도 침략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이에 세종은 최윤덕을 평안도 도절제사로 임명하고 1만 명 이상의 군사를 동원하여 파저강 일대로 출병했다. 전투에서 조선군은 여진족 부락을 공격하여 승리하고, 최윤덕은 우의정에 오르는 등 큰 공을 세웠다. 파저강 전투는 다른 지역의 여진족에게도 영향을 미쳐 함경도 지역의 여진족 분열을 야기했고, 세종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김종서를 함길도 관찰사로 임명하여 6진을 개척하는 등 북방 영토 확장의 발판을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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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저강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전투 개요
분쟁파저강 전투
전체세종의 여진족 정벌
날짜1433년 4월 10일 ~ 1433년 4월 28일
장소현재의 중국 훈강 일대
결과조선의 승리, 사군 개척
교전 세력
교전국 1조선
교전국 2여진족 세력
지휘관 및 지도자
조선평안도도제찰사 겸 중군상장군 최윤덕
우군절제사 이각
좌군장 최해산
도진무 김효성
중군절제사 이순몽
조전절제사 이징석
여연절제사 홍사석
여진족이만주
임할라
삼타나노
김새
병력 규모
조선최윤덕: 2599명
이각: 1770명
최해산: 2070명
김효성: 1888명
이순몽: 2515명
이징석: 3010명
홍사석: 1110명
총병력: 1만 5000명
여진족불명
사상자 규모
조선전사: 4명
부상: 5명
총 사상자: 9명
여진족전사: 170명
포로: 236명
병기 손실: 1200점
마필 및 소 손실: 170마리
총 사상자: 406명

2. 배경

여진족은 고려 말부터 조선 초까지 지속적으로 북방 국경을 침범하며 약탈을 일삼았다. 세종 시기에도 여진족의 국경 침탈은 계속되었다.

2. 1. 고려 말, 조선 초 여진족의 침입

여진족은 고려 1391년 만포진과 갑산을 점거한 이후 조선의 북방 국경 지역을 넘나들며 약탈을 저질렀다. 이에 태종 시기 북방 지역에 관심을 기울여 북방 지역으로 주민들을 이주시키고 각 고을들을 개칭하고 승격시켰다.[1]

2. 2. 세종 시기 여진족의 침입과 조선의 대응

1432년 12월 9일에 야인 400기가 경계에 침입하여 사람과 물건들을 약탈해가니 강계절제사 박초가 추격하여 사람들을 구하고 약탈해가는 물건을 다시 빼앗아 왔다고 보고하였다. 12월 21일에는 파저강 유역의 이만주가 침입하였는데, 이전부터 식량이 부족하여 사군 지역을 자주 침탈하였다. 계속되는 여진족의 침탈을 계기로 조선 조정에서는 본격적으로 여진족 정벌을 논의한다.

1433년 1월, 평안도감사는 여연, 강계에서의 전투에서 전사자 48명을 포함해서 75명의 피해를 보고했다. 이에 세종은 압록강 유역의 여진족 정벌을 위해 1월 11일최윤덕을 평안도도절제사로 임명하였다.

2. 3. 조선 조정의 정벌 준비

1432년 12월 21일 파저강 유역의 여진 이만주가 식량 부족으로 사군 지역을 자주 침탈하자, 조선 조정에서는 여진족 정벌을 본격적으로 논의하기 시작했다.[1] 이듬해 1433년 1월, 평안도감사가 여연 강계에서의 전투에서 전사자 48명을 포함해 75명의 피해를 보고했다. 이에 세종압록강 유역의 여진족 정벌을 위해 1월 11일 최윤덕을 평안도도절제사로 임명했다.

최윤덕 등은 정벌에 신중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세종의 정벌 의지는 확고했다. 최윤덕은 판중추원사 겸 영영변도호부사로 임명되었다. 처음 정벌군 규모는 3천 명으로 논의되었으나, 최윤덕의 건의로 1만 명 이상으로 증강되었다.

3. 전투 과정

1433년 최윤덕황해도평안도의 군병 1만 5000명으로 구성된 정벌군을 이끌고 압록강 북쪽 지류인 파저강 일대로 출진했다. 최윤덕은 평안도도절제사 겸 3군도통사, 김효성은 도진무였다.[1]

3. 1. 파저강 전투의 전개

1433년 4월 10일부터 4월 19일까지 최윤덕이만주 휘하의 여진족 부락들을 공격하여 대승을 거두고 무기와 가축을 노획했다.[1]

4월 19일, 최윤덕은 어허강까지 진출하여 강변에 수비병력 600명을 배치하고, 동이 틀 무렵 적장 임할라와 삼타나노의 본거지를 공격했다.[1] 그러나 두 마을은 모두 비어 있었고, 야인들은 궁시 사격을 하려 했다.[1] 최윤덕은 이들을 정중히 대접하여 물러가게 했다.[1]

4월 20일, 홍사석 부대는 최윤덕 부대와 합류하여 야인 장정 31명을 사로잡았으나, 곧 포로들이 폭동을 일으켜 26명이 사살되고 5명이 억류되었다.[1]

최윤덕과 홍사석은 임할라와 삼타나노를 추격하여 그들의 본거지를 공격하고, 수색 활동을 전개하며 함정과 장애물을 설치했다.[1] 지자산군사 조복명과 지재령군사 김잉은 병력 1400명과 야인 포로들을 이끌고 길을 수리했다.[1]

토벌 도중 야인들이 밭에 불을 질러 군사들이 식량 부족에 시달렸으나, 곧 회복하고 파저강 일대의 야인들을 평정하였다.[1]

4. 결과 및 영향

이 정벌은 1433년 10월 함경도 두만강 유역 여진족들의 분열을 야기했다. 이에 세종김종서를 함길도 관찰사로 임명하여 사민정책 등을 펼치면서 함경도에서 조선의 내실을 다져 6진을 개척하였다.[1] 이후 세종은 계속해서 여진족을 몰아내고 북방 지역 탈환에 나서 이천을 보내 제2차 파저강 전투를 치러 사군을 완성하였다.[1]

4. 1. 파저강 전투의 직접적인 결과

이 전투의 공로로 회군 이후 5월에 정벌군의 총사령관인 최윤덕우의정에 오르게 되었다. 이어 근정전에서 펼쳐진 출병 장수들의 위로연에서 세종은 최윤덕에게 세자의 술잔을 앉아서 받도록 하는 등 정벌의 성과에 대해서 만족하였다.[1]

그러나 이후에도 여진족의 침입에 대비하여 우의정이 된 최윤덕을 외직인 평안도도절제사에 3년간 겸직시켰다. 임기를 마친 최윤덕에 이어 또 한 명의 신뢰하는 장수인 이천을 1436년 평안도도절제사로 임명하여 여진족에 대한 경계를 풀지 않았다.[1]

4. 2. 파저강 전투의 장기적인 영향

파저강 전투는 다른 지방의 여진족들에게도 영향을 미쳐, 1433년(세종 15년) 10월에는 함경도 두만강 유역의 여진족 분열을 야기했다.[1] 세종김종서를 함길도 관찰사로 임명하고 사민정책을 추진하여 6진을 개척하는 등 북방 영토를 확장했다.[1]

이 전투의 공로로 회군 이후 5월에 정벌군의 총사령관인 최윤덕우의정에 올랐다.[1] 근정전에서 펼쳐진 출병 장수들의 위로연에서 세종은 최윤덕에게 세자의 술잔을 앉아서 받도록 하는 등 정벌의 성과에 대해서 만족하였다.[1]

그러나 이후에도 여진족의 침입에 대비하여 우의정이 된 최윤덕을 외직인 평안도도절제사에 3년간 겸직시켰다.[1] 임기를 마친 최윤덕에 이어 이천을 1436년 평안도도절제사로 임명하여 여진족에 대한 경계를 풀지 않았다.[1] 이후 세종은 계속해서 여진족을 몰아내고 북방 지역 탈환에 나서 이천을 보내 제2차 파저강 전투를 치러 사군을 완성하였다.[1]

5. 역사적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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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1. 긍정적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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