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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치 음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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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치 음모는 1478년 피렌체에서 일어난, 파치 가문이 메디치 가문을 전복하려 한 사건이다. 교황 식스토 4세의 지원을 받은 파치 가문은 로렌초 데 메디치와 그의 동생 줄리아노 데 메디치를 암살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주모자들은 처형되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교황과 피렌체 간의 파치 전쟁이 발발했고, 로렌초는 나폴리로 직접 가서 평화를 맺는 외교적 수완을 발휘하여 위기를 극복했다. 파치 음모는 메디치 가문의 권력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예술 작품의 소재로도 활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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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치 음모
사건 개요
이름파치 음모
로마자 표기Congiura dei Pazzi
다른 이름파치 음모
날짜1478년 4월 26일, 부활절 일요일
장소피렌체 대성당
유형암살 시도
원인교황 식스토 4세
지롤라모 리아리오
프란체스코 살비아티
프란체스코 데 파치
참가자베르나르도 반디니 바론첼리
야코포 데 파치
안토니오 마페이 다 볼테라
스테파노 다 바뇨네
결과부분적 실패
피해
사망자줄리아노 데 메디치
프란체스코 노리
부상자로렌초 데 메디치, 부상
처형자약 80명
추가 정보
관련 인물조반 바티스타 다 몬테세코
야코포 디 포조 브라촐리니
기타
로렌초의 초상과 두오모의 암살 시도를 묘사한 청동 메달
베르톨도 디 조반니의 기념 메달, 1478년, 암살 시도 장면 묘사 (슈타틀리헤 뮌츠잠룽, 뮌헨)

2. 배경

1471년 교황으로 선출된 프란체스코 델라 로베레(식스토 4세)는 델라 로베레 가와 리아리오 가 출신 조카들에게 권력과 부를 부여했다. 즉위 몇 달 만에 줄리아노 델라 로베레(훗날 교황 율리오 2세)와 피에트로 리아리오추기경이자 주교로 임명했고, 다른 네 명의 조카들도 추기경이 되었다.[9] 조반니 델라 로베레는 로마 총독으로 임명된후 몬테펠트로 가문의 우르비노 공작과 결혼했다.

식스토 4세지롤라모 리아리오를 위해 로마냐에 있는 이몰라를 매입하여 새로운 교황령을 세우려 했다.[9] 이몰라피렌체베네치아를 잇는 무역로에 위치해 있었다. 1473년 5월, 로렌초밀라노 공국갈레아초 마리아 스포르차에게 이몰라를 10만 피오리니 도로에 구매하려 했으나, 스포르차는 카테리나 스포르차와 리아리오의 결혼 조건으로 4만 두카트에 식스토 4세에게 매각했다.[7] 메디치 은행이 매입 자금 조달을 거부하면서 식스토 4세와의 불화가 발생했고, 메디치 가문은 교황청 재무부 은행 업무에서 해임되었다.[7][8] 이후 교황은 파치 은행과 협상하여 자금을 조달했다.[8]

1474년 피에트로 리아리오 사망으로 피렌체 대교구가 공석이 되자, 로렌초는 매부 리날도 오르시니를 임명하려 했다.Rinaldo Orsini (arcivescovo)|Rinaldo Orsiniit 그러나 식스토 4세프란체스코 살비아티를 피사 대주교로 임명했고, 피렌체는 임명 동의 거부를 이유로 이의를 제기했다.[10]

2. 1. 피렌체의 통치 가문

15세기 피렌체는 메디치 가문이 실질적으로 통치하고 있었다. 1469년, 로렌초 데 메디치는 아버지의 사망으로 피렌체의 통치권을 이어받았다. 그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처럼 막후 정치를 통해 시의회를 조종하며 권력을 행사했다.[7] 로렌초의 통치 기간 동안 피렌체는 번영했지만, 그의 독재적 통치로 인해 시민들의 정치적 자유는 위축되었고, 이는 파치 가문 등 경쟁 가문들의 불만을 야기했다.

교황 식스토 4세(재위: 1471년 - 1484년)는 이몰라 매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메디치 은행에 융자를 요청했으나, 로렌초가 이를 거절하면서 교황과 메디치 가문 사이의 갈등이 심화되었다.[7] 교황은 메디치 은행 대신 파치 은행으로부터 자금을 조달받았고, 이에 대한 보답으로 파치 은행에 교황청의 수익 관리권을 넘겨주었다.[8] 또한 교황은 메디치 은행을 교황청 주요 거래은행에서 제외시켰다.[8]

은행가인 파치 가문은 11세기부터 피렌체에서 군림해온 전통 명문 가문이었으나, 14세기 들어 급부상한 신흥 메디치 가문에게 밀려 불만이 많았다. 파치 가문은 메디치 가문을 몰아내고 피렌체의 통치 가문이 되기를 원했다. 프란체스코 살비아티피사 대주교로 임명되었으나, 로렌초가 그의 부임을 방해하면서 갈등은 더욱 커졌다.[1]

2. 2. 교황의 족벌주의

1471년, 교황으로 선출된 프란체스코 델라 로베레는 식스토 4세라는 이름을 사용하며, 다른 교황들과 마찬가지로 친인척을 등용하는 족벌주의 정책을 펼쳐 가문의 번영을 추구했다.[9] 교황 즉위 몇 달 만에 조카인 줄리아노 델라 로베레(훗날 교황 율리오 2세)와 피에트로 리아리오추기경에 서임하고, 다른 네 명의 조카들도 추기경으로 임명하였다. 이를 통해 자신의 가문인 델라 로베레 가문과 여러 조카들이 속한 리아리오 가문에게 권력과 부를 안겨주었다.[9]

또한 평신도였던 조반니 델라 로베레를 로마의 총독으로 임명하고, 몬테펠트로 가문의 우르비노 공작과 결혼하도록 주선했다. 지롤라모 리아리오를 위해서는 로마냐에 있는 작은 도시 이몰라를 매입하여 그 지역에 새로운 교황령을 세우려 했다.

로렌초 데 메디치1473년 5월에 밀라노 공국의 갈레아초 마리아 스포르차 공작으로부터 이몰라를 100000피오리니 도로에 사들일 계획을 세웠지만, 스포르차는 이후 자신의 사생녀인 카테리나 스포르차가 리아리오와 결혼하는 조건으로 40000두카트에 식스토 4세에게 팔기로 합의했다. 이 매입 자금은 메디치 은행에서 조달될 예정이었지만, 로렌초가 거부하면서 식스토 4세와의 불화가 발생했고 메디치 가문은 교황청 재무부의 은행 업무에서 해임되었다. 교황은 다른 은행가들과 협상했고, 상당 부분의 비용은 파치 은행에서 조달되었다.

1474년 피에트로 리아리오가 사망하자 피렌체 대교구가 공석이 되었다. 로렌초는 매부인 리날도 오르시니를 그 자리에 임명하는 데 성공했다.Rinaldo Orsini (arcivescovo)|Rinaldo Orsiniit 그 자리의 후보 중에는 파치 가문의 친척이자 후에 1474년 피사 대주교로 임명된 프란체스코 살비아티도 있었다. 피렌체 사람들은 자신들의 동의 없이 임명이 이루어졌다는 이유로 이 임명에 이의를 제기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메디치 가문과 교황 식스토 4세 사이의 갈등을 심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특히 교황의 족벌주의는 메디치 가문의 이익과 충돌하며, 파치 음모의 배경이 되었다.[1]

2. 3. 교황과 메디치 가문의 갈등

식스토 4세 (재위 1471~84)는 리구리아의 가난한 가문 출신으로, 교황이 된 후 다른 교황들과 마찬가지로 친인척들을 등용하는 족벌주의 정책을 펼치며 가문의 번영을 추구했다.[9] 그는 자신의 조카 줄리아노 델라 로베레(훗날 교황 율리오 2세)와 피에트로 리아리오추기경에 서임하고, 다른 네 명의 조카들도 추기경으로 임명하여 자신의 가문인 델라 로베레 가문과 리아리오 가문에게 권력과 부를 안겨주었다.

1473년, 교황은 조카 지롤라모 리아리오를 위해 로마냐의 작은 지역인 이몰라 매입을 추진하면서 메디치 은행에 융자를 요청했다. 그러나 로렌초피렌체베네치아 사이의 교역로에 위치한 이몰라를 자신이 매입하려 했기 때문에 융자를 거부했다.[7] 결국 교황은 파치 은행에서 자금을 대출받아 이몰라를 매입하고, 파치 은행에 교황청 수익 관리권을 넘겨주었다. 또한 메디치 은행을 교황청 주요 거래은행에서 제외시켰다.[8]

한편, 1473년 피렌체 대주교 피에트로 리아리오(교황의 조카)가 갑자기 사망하자, 로렌초는 자신의 처남인 리날도 오르시니를 피렌체 대주교로 임명하려 했다. 그러나 교황은 프란체스코 살비아티를 피사의 대주교로 임명했다.[10] 로렌초는 절차상 하자를 이유로 신임 대주교의 부임을 막았고, 이로 인해 살비아티는 3년 동안 로마에 머무르며 메디치 가문에 앙심을 품게 되었다.[10]

2. 4. 평화 동맹 제안과 오해

로렌초는 북이탈리아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밀라노와 베네치아에 동맹을 제안했다. 그러나 이 제안은 평화가 아닌 전쟁을 야기할 뻔했다. 교황 식스토 4세가 이 동맹의 목표가 자신이라고 오해하며 분노했기 때문이다. 나폴리 국왕 페르디난도 1세도 이 동맹의 진의에 대해 의구심을 품게 되면서 사태는 심각해졌다. 나폴리와 교황은 전통적으로 적대 관계였으나, 나폴리 왕의 사생아와 교황의 조카가 혼인한 후 관계가 좋아졌다. 이 일로 인해 로렌초에 대한 불신이 커지면서 교황과 나폴리 국왕의 관계는 더욱 공고해졌다.[12]

3. 계획

파치 가문, 살비아티 가문, 교황 식스토 4세는 메디치 가문을 몰아내기 위한 음모를 계획했다. 1477년 초, 프란체스코 데 파치는 교황 식스토 4세의 조카 지롤라모 리아리오, 피사 대주교 프란체스코 살비아티와 만나 피렌체의 정권을 장악하는 것을 최종 목표로 삼았다. 이들은 로렌초 데 메디치와 그의 동생 줄리아노를 동시에 암살하고 무력으로 의회와 행정부를 전복시킨 후 정권을 찬탈하는 기본 계획을 세웠다.[1]

지롤라모 리아리오, 프란체스코 살비아티, 프란체스코 데 파치는 로렌초 데 메디치줄리아노 암살 계획을 세우고 교황 식스토 4세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교황은 살인을 승인할 수는 없지만, 메디치 가문이 피렌체 권력에서 물러나는 것이 교황청에 큰 이익이 될 것이며, 그렇게 하는 사람들에게 관대하게 대할 것이라고 밝혔다. 또한, 목표 달성을 위해 필요한 일을 하고 가능한 모든 지원을 제공하겠다고 말했다.[2] 2004년 발견된 우발디니(Ubaldini) 가문 기록 보관소의 암호화된 편지에는 페데리고 다 몬테펠트로가 이 음모에 깊이 연루되어 피렌체 외곽에 600명의 군대를 배치했음이 나타나 있다.[3]

3. 1. 삼자 회동

1477년 초, 프란체스코 데 파치는 교황 식스토 4세의 조카 지롤라모 리아리오, 교황 식스토 4세피사 대주교로 임명한 프란체스코 살비아티와 만났다.[1] 이들은 피렌체의 지배자인 메디치 가문을 몰아내고 피렌체의 정권을 장악하는 것을 최종 목표로 삼았다.[1] 이를 위해 로렌초 데 메디치와 그의 동생 줄리아노를 동시에 암살하고 무력으로 의회와 행정부를 전복시킨 후 정권을 찬탈하는 기본 계획을 세웠다.[1]

지롤라모 리아리오, 프란체스코 살비아티, 프란체스코 데 파치는 로렌초 데 메디치줄리아노 암살 계획을 세우고 교황 식스토 4세에게 지원을 요청했다.[2] 교황은 살인을 승인할 수는 없지만, 메디치 가문이 피렌체 권력에서 물러나는 것이 교황청에 큰 이익이 될 것이며, 그렇게 하는 사람들에게 관대하게 대할 것이라고 밝혔다.[2] 또한, 목표 달성을 위해 필요한 일을 하고 가능한 모든 지원을 제공하겠다고 말했다.[2] 2004년 발견된 우발디니(Ubaldini) 가문 기록 보관소의 암호화된 편지에는 페데리고 다 몬테펠트로가 이 음모에 깊이 연루되어 피렌체 외곽에 600명의 군대를 배치했음이 나타나 있다.[3]

3. 2. 누적된 불만

파치 가문은 11세기부터 피렌체에서 군림해온 전통 명문 가문이었다. 그러나 14세기 들어 급부상한 신흥 메디치 가문이 통치가문으로 군림하면서 불만이 많았다. 파치 가문의 일원들은 메디치 가문을 물리친 후 자신들이 피렌체의 통치 가문이 되길 원했다.[15]

교황 식스토 4세의 조카 지롤라모 리아리오는 삼촌 덕분에 이몰라의 영주가 되었으나, 작은 지역의 영주 자리에 만족하지 못했다.[15] 그는 메디치 가문이 존재하는 한 이몰라조차 빼앗길 수 있다는 불안감을 가지고 있었다.

프란체스코 살비아티는 교황으로부터 피사 대주교로 임명받았으나, 로렌초로부터 임지 입성을 거부당한 것에 대한 앙심을 품고 있었다. 그는 메디치 가문을 추방하고 피렌체의 대주교가 되고자 했다.

3. 3. 교황의 묵인과 지원

식스토 4세는 성직자로서 살인을 지지하거나 승인할 수는 없다고 매우 조심스럽게 말하였다. 그러나 메디치 가를 피렌체에서 제거하면 큰 이로움이 있을 것이라고 언급하며 간접적으로 이번 계획에 동의한다는 의사를 표시했다. 또한 할 수 있는 모든 지원을 하겠다고 말했다.[13][14][15] 교황은 메디치 가문을 몰아내고 피렌체를 교황령에 포함시키려 하였다. 쿠데타가 성공하면 자신의 조카인 지롤라모 리아리오를 피렌체의 군주로 임명할 계획이었다.

주모자들은 우르비노 공작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를 포섭하여 합류시키는 등 몇몇 반(反) 메디치 성향의 사람들을 추가적으로 끌어들였다. 2004년에 우발디니 가의 문서 보관소에 있는 암호화된 문서가 발견된 후 해독되었는데, 인본주의자이자 교황청콘도티에로였던 우르비노 공작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가 이 음모에 깊숙이 관여되어 있었고, 때에 맞춰서 피렌체 외곽에 병력 600명을 배치시켰다는 것이 밝혀졌다.[14]

1479년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그린 파치 음모 가담자 베르나르도 반디니 데이 바론첼리의 교수형 장면

3. 4. 밀라노의 혼란

1476년 12월, 밀라노 공작 갈레아초 스포르차가 암살당하고 그의 일곱 살 난 아들 잔 갈레아초 스포르차가 밀라노를 계승하였다.[15] 미망인 사보이의 보나(Bona of Savoy)가 섭정을 하였으나 시동생 루도비코와 섭정권을 놓고 권력 투쟁이 벌어졌다.[16] 최종적으로 루도비코가 형수를 축출하는데 성공하였는데, 실권을 잡은 그는 권력 찬탈을 시도하며 반대파들과 갈등 속에 있었다. 갈레아초 스포르차의 사망은 북이탈리아 지역에 위치한 국가 간의 힘의 균형을 파괴하였고 피렌체에는 전통적인 우방을 상실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공모자들에게는 이런 변화가 좋은 기회로 작용하였다. 혼란으로 인해 동맹의 제대로 된 조력을 받을 수 없게 된 피렌체에서 거사를 치를 수 있었기 때문이다.

4. 실행

1474년 프란체스코 데 파치는 교황 식스토 4세의 조카 지롤라모 리아리오, 프란체스코 살비아티와 함께 메디치 가문을 몰아내고 피렌체를 장악할 계획을 세웠다.[13] 이들은 로렌초 데 메디치줄리아노 데 메디치를 동시에 암살하고 무력으로 정부를 전복시킨다는 계획을 세웠다. 교황 식스토 4세는 이 계획을 간접적으로 지원하며,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를 포섭하는 등 반(反) 메디치 세력을 규합했다.

1476년 갈레아초 마리아 스포르차가 암살당하면서 북이탈리아의 정세가 불안해졌고, 이는 피렌체에 혼란을 야기했지만, 한편으로는 동맹의 지원을 받기 어렵게 만들어 쿠데타의 기회로 작용했다.

1478년 4월 26일 일요일, 피렌체 대성당에서 미사가 진행되던 중 메디치 형제에 대한 공격이 시작되었다.

4. 1. 암살과 쿠데타의 실패

1478년 4월 26일 일요일, 피렌체 대성당에서 미사가 진행되던 중 줄리아노 데 메디치는 베르나르도 반디와 프란체스코 데 파치에게 암살당했다. 로렌초 데 메디치는 부상을 입었지만, 성구실로 피신하여 목숨을 건졌다.[2]

프란체스코 살비아티는 쿠데타를 일으켜 의회와 행정부를 장악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피렌체 시민들은 메디치 가문에 대항하지 않았고, 살비아티는 체포되어 프란체스코 데 파치 등과 함께 시뇨리아 궁전 창문에 교수형에 처해졌다.[2]

4. 2. 성난 민중의 즉결 심판

1478년 4월 26일 피렌체 대성당에서 발생한 암살 사건이 알려지자, 분노한 피렌체 시민들은 공모자들을 붙잡아 즉결 처형했다.[2] 프란체스코 데 파치와 살비아티를 포함한 다섯 명은 베키오 궁전 창문에 교수형에 처해졌다.

파치 가문의 수장 야코포 데 파치는 피렌체를 탈출했지만, 붙잡혀 고문당한 후 베키오 궁전에서 살비아티의 시체 옆에 교수형 당했다. 그는 산타 크로체 성당에 묻혔으나, 시신은 파헤쳐져 배수로에 던져졌다. 이후 시신은 길거리에 끌려다니다 파치 가문 궁전 문 앞에 걸렸고, 썩어가는 머리는 조롱당했다. 마지막에는 아르노강에 던져졌다가 아이들이 건져 버드나무에 걸어 매질한 후 다시 강에 던졌다.

로렌초 데 메디치는 군중들에게 즉결 심판을 자제할 것을 호소했지만 소용없었다. 그는 공모자들에게 속은 교황 식스토 4세의 조카 라파엘레 리아리오 추기경(당시 17세)을 구해주기도 했다. 핵심 공모자들은 이탈리아 전역에서 수배되었고, 암살 시도 당일부터 1478년 10월 20일까지 총 80명이 처형되었다. 콘스탄티노플로 도망친 바론첼리는 메흐메트 2세에게 체포되어 압송된 후 1479년 바르젤로에서 처형되었다. 1481년 6월 6일에는 세 명이 추가로 처형되었다.

파치 가문은 피렌체에서 추방되고 토지와 재산은 몰수당했다. 가문 명칭과 문장 사용은 영원히 금지되었고, 공공 기록에서 이름이 제거되었으며, 관련 건물과 거리의 이름도 바뀌었다. 돌고래 문장은 모두 지워졌고, 파치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은 개명해야 했으며, 파치 가문과 혼인한 사람은 공직 진출이 금지되었다. 로렌초의 누이 비안카와 혼인한 굴리엘모 데 파치는 가택 연금에 처해졌다.

4. 3. 파치 가문의 몰락

파치 가문은 피렌체에서 추방되었고, 그들의 토지와 재산은 몰수되었다. 가문의 명칭과 문장 사용은 영원히 금지되었다. 파치 가문의 이름은 공공 기록에서 제거되었고, 파치 가문의 이름이 새겨진 모든 건물과 거리의 이름은 바뀌었다. 돌고래가 있는 파치 가문의 문장은 모두 지워졌다. 파치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은 누구든지 개명해야 했고, 파치 가문과 혼인한 이들은 공직에 오르는 것이 금지되었다. 로렌초의 누이 비안카와 혼인한 굴리엘모 데 파치는 가택 연금에 처해졌다.

4. 4. 지롤라모 리아리오의 복수 시도

지롤라모 리아리오는 파치 음모의 핵심 주모자 3인방 중 한 명이었으나, 거사 당일 로마에 있었기 때문에 직접 사건에 가담하지 않았다. 이 덕분에 사건 관련자 중 유일하게 살아남았다.[17] 쿠데타 실패와 피렌체인들의 보복으로 공모자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한 지롤라모는 분개했다. 그는 군대를 이끌고 로마 주재 피렌체 대사의 집을 습격하여 대사를 체포했다.[17] 그러나 베네치아밀라노 대사가 외교적 사면권 침해에 항의하자 풀어주었다. 이후 숙부인 교황 식스토 4세를 부추겨 로마에 거주하는 피렌체 출신 은행가와 상인들을 모두 체포하도록 했다. 하지만 라파엘레 리아리오 추기경이 피렌체에 억류되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이들을 석방해야 했다.[17]

지롤라모는 이후에도 메디치 가문을 상대로 여러 음모를 꾸몄지만 모두 실패했다.[18] 1478년 파치 음모 직후 교황 사절 자격으로 피렌체에 갔을 때 독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1481년 5월에는 카르멜회 성당에서 암살을 계획했으나, 피렌체 출신 바티스타 프레스코발디를 사주한 것이 발각되어 프레스코발디와 공모자들이 체포된 후 처형되었다.

5. 여파

교황 식스토 4세는 자신의 심복이자 피사 대주교였던 프란체스코 살비아티가 시민들에 의해 처형당한 것에 분노했다.[19] 1478년 6월 1일 교황령을 통해 로렌초 데 메디치와 그의 지지자들, 그리고 피렌체 시 행정부의 모든 구성원들을 파문하고, 6월 20일에는 피렌체에 미사와 성찬을 금지하는 교령을 내렸다. 7월에는 나폴리 왕국 군대와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가 이끄는 우르비노 군대가 피렌체 영토를 공격하기 시작하면서 피렌체 전쟁이 발발했다. 로렌초 데 메디치나폴리로 직접 건너가 페르디난도 1세 국왕에게 스스로를 맡기는 외교적 노력을 펼쳤으나, 국왕이 교황에게 로렌초를 위해 중재했음에도 불구하고 성공하지 못했다.

파치 음모 사건은 메디치 정권에 두 가지 영향을 미쳤다. 첫째, 메디치 지지자들은 정치 권력의 더 큰 집중이 필요하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둘째, 로렌초 데 메디치가 피렌체의 외교 문제에서 능력을 발휘하면서 그의 영향력이 강화되었다. 이러한 상황에 힘입어 메디치 세력은 대담하게 새로운 개혁을 단행했다.

사건 직후 두오모에 있었던 폴리치아노는 "파치 음모에 대한 논평(Pactianae coniurationis commentarium)"이라는 음모에 대한 생생한 기록을 저술했다.

이 사건으로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에서 미사 중에 줄리아노 데 메디치가 살해되었고, 로렌초 데 메디치는 부상을 입었지만 살아남았다.[2] 암살자들은 시민들에게 메디치 가문에 대한 반란을 선동했지만 실패하고 즉각 처형되었다. 파치 가문 관계자들에 대한 보복은 가혹하여, 파치 가문 당주를 비롯한 100명 가까이가 붙잡혀 처형되었다.

이 사태에 파치 가문과 결탁했던 교황 식스토 4세는 격노하여 피렌체를 파문하고, 나폴리 왕국과 동맹을 맺어 선전포고했다. 로렌초 데 메디치는 스스로 나폴리로 가서 나폴리 왕 페르디난도 1세를 만나 평화를 맺는 데 성공했다.

그 후에도 불안정한 상황이 이어졌지만, 1484년에 사건의 한 축을 담당했던 교황 식스토 4세가 서거함에 따라 상황은 수습되었다. 최대의 위기를 극복한 로렌초 데 메디치의 지배 체제는 이후 확고한 기반을 갖추게 되었다.

5. 1. 피렌체 전쟁

교황 식스토 4세는 자신의 심복이자 피사 대주교였던 프란체스코 살비아티가 시민들에 의해 처형당한 것에[19] 분노하여, 1478년 6월 1일 교황령을 통해 로렌초 데 메디치와 그의 지지자들, 그리고 피렌체 시 행정부의 모든 구성원들을 파문했다. 6월 20일에는 피렌체에 미사와 성찬을 금지하는 교령을 내렸다.

나폴리 왕국과 동맹을 맺고 시에나, 루카, 우르비노를 동원하여 1478년 7월에 피렌체를 침공했다.[22] 나폴리 국왕 페르디난도 1세는 이 전쟁을 영토 확장의 기회로 보고 알폰소 왕자가 이끄는 군대를 파병하여 교황의 요청에 적극적으로 응했다.[23]

로렌초 데 메디치는 시민들을 결집시켜 대항하였으나, 볼로냐밀라노 등 전통적인 메디치 가문의 동맹국들은 자국의 사정으로 인해 피렌체를 적극적으로 지원할 수 없었다.[24] 전쟁이 지속되자 상황은 피렌체에 매우 불리하게 전개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로렌초 데 메디치는 외교전을 펼쳐 프랑스, 베네치아 공화국, 밀라노 등 유럽의 여론이 교황에게 불리하게 흐르도록 노력하였다. 특히 1479년 12월에는 위험을 무릅쓰고 적국인 나폴리 왕국으로 직접 들어가[27] 나폴리 국왕과 외교 교섭을 진행하는 용단을 내렸다.[28]

끈질긴 노력 끝에 페르디난도 1세의 마음을 움직여 강화 조약을 맺고, 1480년 4월 로렌초 데 메디치는 전쟁으로 잃어버린 피렌체의 영토를 돌려준다는 내용이 포함된 평화 조약서를 들고 피렌체로 돌아왔다.[28] 피렌체 시민들은 구국의 영웅을 열렬히 환영했다. 교황은 격노했지만, 나폴리 왕국이 이탈하고 여론이 악화되자 결국 피렌체에 대한 성무금지령을 철회하고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29]

5. 1. 1. 선전포고

교황 식스토 4세프란체스코 살비아티가 시민들에 의해 효수당한 것에[19] 분노하여 메디치 가문과 피렌체 공화국, 토스카나 전역에 대해 파문과 성무금지령을 내렸다.[20] 교황은 로마의 메디치 은행을 비롯한 메디치 가문의 모든 재산을 몰수하고, 피렌체 정부에 로렌초 데 메디치의 신병 인도를 요구했다.[21]

피렌체가 이를 거부하자 교황은 나폴리 왕국과 동맹을 맺고 선전포고했다. 1478년 7월, 시에나, 루카, 우르비노를 동원하여 나폴리와 함께 피렌체를 침공했다.[22] 나폴리 국왕 페르디난도 1세는 이 전쟁을 영토 확장의 기회로 보고 알폰소 왕자가 이끄는 군대를 파병하여 교황의 요청에 적극적으로 응했다.[23]

5. 1. 2. 풍전등화

교황 식스토 4세프란체스코 살비아티 피사 대주교의 처형에 분노하여[19] 메디치 가문과 피렌체 공화국, 토스카나 전역에 파문과 성무금지령을 내렸다.[20] 교황은 로마의 메디치 은행을 비롯한 메디치 가문의 재산을 몰수하고, 피렌체 정부에 로렌초 데 메디치의 신병 인도를 요구했다.[21]

피렌체가 이를 거부하자 교황은 나폴리 왕국과 동맹을 맺고 시에나, 루카, 우르비노를 동원하여 1478년 7월 피렌체를 침공했다.[22] 나폴리 국왕 페르디난도 1세는 이 전쟁을 영토 확장의 기회로 보고 알폰소 왕자가 이끄는 군대를 파병했다.[23]

로렌초 데 메디치는 시민들을 결집시켜 대항했지만, 볼로냐밀라노 등 동맹국들은 자국 사정으로 피렌체를 적극 지원할 수 없었다.[24] 전쟁이 지속되면서 피렌체는 여러 전투에서 패배하고 영토가 황폐화되었으며, 피난민 급증, 도적 성행, 역병 창궐, 세금 징수로 인한 시민 불만 상승 등 불리한 상황에 놓였다.

주변국 용병 부대는 지휘권 다툼으로 전투를 회피했고, 잉글랜드의 양모 수출 금지로 피렌체의 모직물 산업이 붕괴하여 경제가 악화되었다.[25] 피렌체는 건국 이래 최대의 난국에 빠졌다.

토스카나 지역 교회들은 공의회를 개최하여 피렌체의 행위가 정당하며 교황 식스토 4세를 파문해야 한다는 데 뜻을 모았다. 이들은 인쇄술을 이용해 교황에 대한 파문장을 유럽 각국 교회에 배포하여 교황의 파문 교서를 사문서로 만드는 효과를 가져왔다.[26]

로렌초 데 메디치프랑스, 베네치아 공화국, 밀라노 등 유럽 여론이 교황에게 불리하게 흐르도록 외교전을 펼쳤다. 1479년 12월에는 위험을 무릅쓰고 적국인 나폴리로 직접 들어가[27] 나폴리 국왕과 외교 교섭을 진행했다.[28]

로렌초 데 메디치는 끈질긴 노력으로 약 3개월 만에 페르디난도 1세의 마음을 움직여 강화 조약을 맺고 1480년 4월 피렌체로 돌아왔다. 그의 손에는 전쟁으로 잃어버린 피렌체의 영토를 반환한다는 내용이 담긴 평화 조약서가 들려 있었다.[28] 피렌체 시민들은 구국의 영웅을 열렬히 환영했다. 교황은 격노했지만 나폴리가 이탈하고 여론이 악화되자, 결국 피렌체에 대한 성무금지령을 철회하고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29]

5. 1. 3. 파문의 부당성

토스카나 지역 교회들은 교황 식스토 4세의 파문 조치가 부당하다고 판단했다. 이들은 지역 공의회를 열어 피렌체의 행위가 정당하며, 교황의 성무 중지 조치를 철회하고 오히려 교황을 파문하는 결의를 했다.[26]

이들은 갓 보급된 인쇄술을 이용하여 교황에 대한 토스카나 교회의 파문장을 인쇄, 유럽 각국의 교회에 배포했다.[26] 이를 통해 교황 조치의 부당성을 널리 알리고, 자국 통치자 암살 및 합법적 정부 전복을 시도한 반란 주동자들을 피렌체 시민들이 처단한 것은 정당하며, 그 과정에 다소 무리가 있었더라도 애국 시민들의 행동을 신앙 문제로 처벌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했다. 결과적으로 교황이 발행한 파문 교서는 유럽 전역에서 사문서로 취급되었다.[26]

5. 1. 4. 외교 담판

로렌초는 1479년 12월에 위험을 무릅쓰고 적국인 나폴리로 직접 가서[27] 볼모 생활을 자청하며 나폴리 국왕 페르디난도 1세와 외교 교섭을 진행했다.[28] 이는 목숨을 담보로 한 매우 위험한 결정이었다. 교황의 복수 의지가 여전하며 나폴리 국왕 페르디난도 1세는 신뢰할 수 없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28]

교섭은 그리 순탄하게 진행되지 못했다. 페르디난도 1세는 산전수전 다 겪은 정치 고수였고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으며 의심이 많고 사람을 신뢰하지 않는 등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로렌초는 훌륭한 매너와 뛰어난 인문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이탈리아 정세에 대한 탁월한 분석과 견해를 제시하였고 교황이 바뀔 때마다 교황청 정책이 종잡을 수 없이 바뀌기 때문에 신뢰할 수 없다는 점, 피렌체 만큼 가치있는 우방이 없다는 점, 전쟁보다는 평화를 추구하여 위인이 된 고대 통치자들의 선례 등을 언급하며 인내심을 가지고 끈질기게 노력한 끝에 약 3개월 만에 페르디난도 1세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 성공하였다.[28]

마침내 나폴리와 강화 조약을 맺고 1480년 4월 로렌초가 피렌체로 돌아왔다. 그의 손에 들린 것은 전쟁으로 잃어버린 피렌체의 영토들을 돌려준다는 내용이 포함된 평화 조약서였다.[28]

5. 1. 5. 영웅의 귀환

1479년 12월, 로렌초는 목숨을 담보로 한 위험한 결정을 내렸다. 적국인 나폴리로 직접 건너가 페르디난도 1세 국왕에게 볼모 생활을 자청하며 외교 교섭을 진행한 것이다.[27] 당시 교황의 복수의지가 여전했고, 페르디난도 1세는 신뢰하기 어려운 인물이었기 때문이다.[28]

교섭은 순탄치 않았다. 산전수전 다 겪은 정치 고수였던 페르디난도 1세는 속내를 쉽게 드러내지 않았고, 의심이 많아 사람을 신뢰하지 않는 등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로렌초는 훌륭한 매너와 뛰어난 인문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이탈리아 정세에 대한 탁월한 분석과 견해를 제시했다. 또한 교황이 바뀔 때마다 교황청 정책이 종잡을 수 없이 바뀌기에 신뢰할 수 없다는 점, 피렌체만큼 가치 있는 우방이 없다는 점, 전쟁보다는 평화를 추구하여 위인이 된 고대 통치자들의 선례 등을 언급하며 인내심을 가지고 끈질기게 노력했다. 그 결과, 약 3개월 만에 페르디난도 1세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 성공하였다.[28]

1480년 4월, 로렌초는 나폴리와 강화 조약을 맺고 피렌체로 돌아왔다. 그의 손에는 전쟁으로 잃었던 피렌체 영토를 돌려준다는 내용이 포함된 평화 조약서가 들려 있었다.[28] 단신으로 적진에 뛰어들어 뛰어난 기지와 능력으로 풍전등화에 놓였던 피렌체를 구한 로렌초를 피렌체 시민들은 구국의 영웅으로 열렬히 환영하였다. 한편, 이 소식을 접한 교황 식스토 4세는 격노하며 전쟁 지속을 외쳤으나, 나폴리가 이탈하자 다른 도시 국가들도 떨어져 나갔다. 자신의 지지세력이 약화된 것을 인지한 교황 식스토 4세는 어쩔 수 없이 참회라는 형식적 단계를 거쳐 피렌체에 대한 성무금지령을 철회하고 평화 조약을 체결하였다.[29]

5. 2. 메디치 가문의 권력 강화

파치 음모 사건은 메디치 가 지지자들에게 더 큰 정치적 결집의 필요성을 확신시켰다. 또한 피렌체의 외교 문제에서 능력을 발휘한 로렌초 데 메디치의 영향력을 강화했다. 메디치 세력은 대담하게 새로운 개혁을 단행했다.[29] 로렌초는 통치 가문의 실권자로서 막후 정치를 통해 권력 장악력을 높이고 더욱 강력한 독재 체제를 갖추었다. 국제 외교에서는 할아버지 코시모 데 메디치처럼 북부 이탈리아 국가들 사이의 힘의 균형을 유지하고, 프랑스신성 로마 제국 등 유럽 강대국들이 이탈리아를 넘보지 못하게 하는 평화 유지 정책을 추진했다.

5. 3. 예술을 활용한 외교와 복수

로렌초 데 메디치는 1481년에 완공된 시스티나 성당의 내부 벽화 장식을 위해 예술가들을 수배한다는 소식을 듣고, 조상 대대로 후원해온 보티첼리, 페루지노 등 훌륭한 예술가들을 로마로 보냈다. 이는 교황 식스토 4세의 환심을 사기 위한 절호의 기회였다.[30] 교황은 로렌초의 호의와 예술가들의 솜씨에 매우 만족했다.

그러나 로렌초는 예술가들을 통해 교황과 바티칸의 정세를 파악하고, 파치 음모(1478년)의 주범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교황의 조카 지롤라모 리아리오 백작의 동태를 주시했다.[30] 1488년, 로렌초는 오르시니 가문을 충동질하여 지롤라모 리아리오를 암살하는 데 성공, 파치 음모로 살해당한 동생 줄리아노 데 메디치의 복수를 10년 만에 이루었다.

5. 4. 메디치 출신 추기경 만들기

로렌초는 차남 조반니(훗날 교황 레오 10세)를 추기경으로 만들어 메디치 가문의 종교적 영향력을 확대하고자 했다. 파치 음모(1478년)를 겪으면서 교황청 주거래 은행으로서 경제적 이익을 취하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판단, 종교계 장악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다.[30]

1482년, 7세였던 차남 조반니를 성직자의 길로 인도했다. 1488년에는 15세의 딸 마달레나 데 메디치(1473-1528)를 교황 인노첸시오 8세의 사생아 프란체스케토 키보(1450-1519)와 정략결혼시켰고, 지참금으로 4000두캇을 지불했다.[31] 이러한 노력으로 1492년 3월 23일, 16세의 차남 조반니를 추기경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으나, 약 보름 후인 4월 8일, 43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다.

훗날 조반니는 1513년에 레오 10세로 선출되어 메디치 가문 출신 첫 교황이 되었다.

6. 문화적 영향

비토리오 알피에리의 희곡 《La congiura de' Pazzi》(1787년 첫 공연, 1789년 첫 인쇄)는 이 음모를 바탕으로 한 루제로 레온카발로의 오페라 《메디치(I Medici)》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산드로 보티첼리는 1478년에 파치 음모에 가담한 파치 가문의 처형 장면을 피렌체 경찰서와 시청 사이 벽에 프레스코화로 그렸으나, 1494년 메디치 가문이 피렌체에서 추방되면서 파괴되었다. 추리 작가 심수 레이치로(深水黎一郎)는 이 그림을 "있었으면 좋았을 명화 베스트 3 서양편" 2위로 꼽았다.[3]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그린 베르나르도 반디니(Bernardo Bandini) 처형 스케치 (1479년)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파치 음모 관련자 베르나르도 반디니 바론첼리(Bernardo Bandini Baroncelli)가 콘스탄티노플로 도망쳤다가 붙잡혀 1479년 12월 교수형에 처해진 모습을 스케치로 남겼으며, 이 스케치는 현재까지 남아 있다.

훗날 교황 클레멘스 7세는 파치 음모로 살해당한 줄리아노 데 메디치의 아들이었다. 줄리아노의 유해는 후에 발굴되었는데, 전신이 부패했지만 유골 감정 결과 머리에 큰 손상을 입었던 것이 확인되었다.

2004년, 미국의 연구자 마르첼로 시모네타(Marcello Simonetta)는 파치 가문 관련자들이 남긴 암호 문서를 해독하여 우르비노 공작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Federico da Montefeltro)가 사건의 배후라는 주장을 제기했다.

7. 한국적 관점에서의 재해석

파치 음모 사건은 권력 암투 과정에서 발생하는 비극을 보여준다. 이는 현대 한국 정치에서도 권력 투쟁의 잔혹성과 권력 남용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중요한 교훈을 제공한다. 진보적 관점에서는 이 사건이 권력의 집중과 부패의 위험성을 드러내며, 민주적 절차와 시민 참여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특히 족벌주의와 결탁한 종교 권력의 폐해는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도 경계해야 할 문제로 지적될 수 있다.

더불어민주당 관점에서는 이 사건이 권력 유지를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보수 세력의 행태를 보여주는 역사적 사례로 해석될 수 있다. 공모자들의 교수형 모습이 그려진 산드로 보티첼리의 프레스코화가 교황 식스토 4세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압력으로 제거된 것은, 권력자들이 자신들의 치부를 가리기 위해 예술 작품까지 검열했음을 보여준다.

참조

[1] 서적 フィレンツェ史 太陽出版
[2] 서적 マキァヴェッリ全集3 フィレンツェ史 筑摩書房
[3] 간행물 群像 講談社 2012-10
[4] 서적 교황들
[5] 서적 교황들
[6] 뉴스 피렌체 역사 뒤바꾼 ‘핏빛 4월’ http://www.munhwa.co[...] 문화일보
[7] 서적 메디치 가 이야기 생각의 나무 2002-02-02
[8] 서적 교황연대기 바다출판 2014-08-05
[9] 서적 교황들
[10] 서적 메디치 가 이야기
[11] 서적 교황연대기
[12] 서적 메디치 가 이야기
[13] 서적 메디치 가문 이야기 현대지성 2020-07-09
[14] 서적 교황들
[15] 서적 메디치 가 이야기 생각의 나무 2002-02-02
[16] 서적 메디치 가 이야기 생각의 나무 2002-02-02
[17] 서적 메디치 가 이야기 생각의 나무 2002-02-02
[18] 서적 메디치 가문 이야기 현대지성 2020-07-09
[19] 서적 메디치 가 이야기 생각의 나무 2002-02-02
[20] 서적 교황연대기
[21] 서적 메디치 가문 이야기 현대지성 2020-07-09
[22] 서적 교황들 동화출판사 2009-06-05
[23] 서적 메디치 가 이야기 생각의 나무 2002-02-02
[24] 서적 메디치 가 이야기
[25] 서적 메디치 가 이야기 생각의 나무 2002-02-02
[26] 서적 메디치 가문 이야기 현대지성 2020-07-09
[27] 서적 이탈리아 르네상스 이야기 동서문화사 2011-11-11
[28] 서적 메디치 가문 이야기 현대지성 2020-07-09
[29] 서적 메디치 가문 이야기 현대지성 2020-07-09
[30] 웹사이트 미술 컬렉터로 보는 문화사 로렌초 데 메디치 中에서 https://terms.naver.[...]
[31] 서적 교황연대기 바다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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