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펍 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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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펍 록은 1970년대 초 영국에서 시작된 음악 운동으로, 지저분하고 소박한 스타일을 특징으로 한다. 펍 록은 1960년대 록 음악의 영향을 받아 라이브 공연을 중시했으며, 닥터 필굿, 킬번 앤 하이 로드 등이 대표적인 밴드이다. 1970년대 중반 펑크 록의 등장과 함께 쇠퇴했지만, 펑크 록에 영향을 미쳐 펑크 록의 발전에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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펍 록
음악 장르 정보
장르 이름펍 록
스타일 기원루츠 록
로큰롤
비트
로커빌리
리듬 앤 블루스
개러지 록
문화적 기원1970년대, 런던 및 에식스, 영국
파생 장르펑크 록
뉴 웨이브
모드 리바이벌
오이!
브릿팝
관련 토픽오스트레일리아 펍 록
파워 팝
악기 구성기타
베이스
드럼 세트
피아노

2. 특징

펍 록은 라이브 공연을 중심으로 발전했으며, 소규모 펍에서 관객과 친밀하게 소통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이러한 특징은 펍 록의 음악, 공연 문화, 음반 제작 방식 등 다양한 측면에 영향을 미쳤다.
음악, 공연, 음반 제작의 특징펍 록은 하위 섹션에서 상세하게 다루고 있기 때문에, 해당 내용을 요약하여 제시한다.


  • 음악적 특징: 펍 록은 특정 장르에 얽매이지 않고 다양한 스타일을 포괄했지만, 대체로 단순하고 직설적인 로큰롤, 리듬 앤 블루스, 컨트리 록 등을 연주했다.
  • 공연 문화: 소규모 펍에서 관객과 가까이 소통하며 라이브 공연을 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
  • 음반 제작: "라이브" 사운드를 담아내기 위해 스튜디오 녹음 과정을 간소화했다. 이는 주류 록에 비해 훨씬 적은 비용으로 음반을 제작할 수 있게 했다.

2. 1. 음악적 특징

펍 록은 의도적으로 불쾌하고 지저분하며, 포스트 글램적인 특징을 가졌다.[15] 펍 록 밴드들은 데님과 체크 셔츠, 낡은 청바지, 축 처진 머리 등 소박한 복장을 선호했다.[21] 이 운동의 중심 인물인 닥터 필굿은 리더의 지저분한 흰색 수트로 유명했다.[2] 밴드들은 위협적인 모습을 보였는데, 데이비드 웝워스는 닥터 필굿이 "육군의 불미스러운 구역에서 함께 온" 것처럼 보였다고 묘사했다.[3]

펍 록 그룹들은 화려한 프레젠테이션을 경멸했다. 닥터 필굿, 킬번 앤 하이 로드, 덕스 딜럭스와 같은 밴드들은 롤링 스톤스야드버즈와 같은 영국 백인 그룹의 전통에 따라 "백 투 모노" 리듬 앤 블루스를 연주했으며, 퍼지한 오버드라이브 기타와 징징거리는 보컬을 사용했다.[3] 덜 알려진 밴드들은 펑크(funk) 소울(코코모, 클랜시, 카도 벨) 또는 컨트리 록(더 쿠르살 플라이어스, 칠리 윌리 앤 더 레드 핫 페퍼스)을 연주했다.[4]

펍 록은 명확하게 정의된 음악 장르를 따르지 않았지만, 다양한 가수와 뮤지션이 공연할 수 있도록 했다.[5] 펍 록커들은 값비싼 무대 쇼를 하지 않았지만, 초기 리듬 앤 블루스에서 영감을 받아 라이브 쇼의 역동성과 강렬함을 높였다.[5]

펍 록은 비틀즈, 롤링 스톤스, 더 후, 킨크스 등 미국의 1950-60년대 로큰롤, 블루스, 리듬 앤 블루스, 포크 음악에 영향을 받은 브리티시 인베이전 밴드들의 영향을 받았다. 단순한 곡 구성과 연주, 노동자 계급을 의식한 작사가 특징이다. The 101'ers에 소속되었던 조 스트러머(더 클래시의 보컬/기타) 등, 후에 펑크 록으로 데뷔한 뮤지션 중에도 펍 록 씬에 있었던 인물도 있었다.

펍 록은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울 정도로 음악성이 다양했으며, 밴드마다 음악 스타일이 달랐다. 로큰롤을 중심으로 한 밴드도 있었고, 블루스를 주체로 하는 밴드, 컨트리 록, 포크 록 밴드, 개러지 록 밴드 등 다양했다.

2. 2. 공연 문화

이즐링턴의 호프 앤 앵커는 주목할 만한 펍 록 공연장이다.


펍 록은 의도적으로 불쾌하고 지저분하며, 포스트 글램의 성격을 띄었다.[15] 밴드들은 데님과 체크 셔츠, 낡은 청바지, 축 처진 머리 스타일을 고수했다.[21] 이 운동의 중심 인물인 닥터 필굿은 리더의 지저분한 흰색 수트로 유명했다.[2] 밴드들은 위협적인 모습을 보였으며, 데이비드 웝워스는 닥터 필굿이 "마치 ''더 스위니''의 악당들" 또는 "육군의 불미스러운 구역에서 함께 온" 것처럼 보였다고 묘사했다.[3]

펍 록 그룹들은 화려한 프레젠테이션을 경멸했다. 닥터 필굿, 킬번 앤 하이 로드(Kilburn and the High Roads), 덕스 딜럭스(Ducks Deluxe)와 같은 밴드들은 롤링 스톤스야드버즈처럼 영국 백인 그룹의 전통에 따라 "백 투 모노" 리듬 앤 블루스를 연주했으며, 퍼지한 오버드라이브 기타와 징징거리는 보컬을 사용했다.[3] 덜 알려진 밴드들은 펑크(funk) 소울(코코모, 클랜시, 카도 벨(Cado Belle)) 또는 컨트리 록(더 쿠르살 플라이어스(the Kursaal Flyers), 칠리 윌리 앤 더 레드 핫 페퍼스(Chilli Willi and the Red Hot Peppers))을 연주했다.[4] 펍 록커들은 초기 리듬 앤 블루스에서 영감을 받아 라이브 쇼의 역동성과 강렬함을 높였다.[5]

펍 록은 다양한 가수와 뮤지션이 공연할 수 있도록 했지만, 명확하게 정의된 음악 장르를 따르지는 않았다.[5] 메이저 레이블들은 다음 비틀즈를 지역 펍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여 펍 록 밴드들을 스카우트했지만, 아티스트 앤 레퍼토리(A&R) 담당자들은 펍 록이 대중 시장 히트 가능성이 없다고 결정했다.[5] 메이저 레이블의 관심이 없자 펍 록커들은 스태프 레코드와 치즈윅 레코드와 같은 작은 독립 음반사를 통해 음반을 발매했다.[5]

1975년까지 주류 록 앨범 녹음은 고도로 숙련된 레코드 프로듀서들이 감독하는 비싸고 긴 스튜디오 녹음 과정이었으며, 오버더빙, 더블 트래킹, 스튜디오 효과를 통해 고도로 세련된 최종 제품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했다. 일부 주류 밴드들은 완벽한 제품을 만들기 위해 몇 달을 스튜디오에서 보냈다.[5] 펍 록커들은 이러한 복잡한 녹음 과정을 거부하고, 밴드의 "라이브" 사운드와 느낌을 스튜디오에서 포착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주류 록과 펍 록 녹음 방식의 차이는 다른 사운드를 생성했을 뿐만 아니라 각 록 장르의 경제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주류 록의 경우 음반사의 손익분기점이 약 20,000장이었던 반면, 펍 록은 2,000장으로 손익분기점을 넘을 수 있었다.[6] 이는 펍 록 레이블이 주류 밴드의 판매량의 10분의 1로 음반을 발매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펍 록 장면은 주로 라이브 현상이었다. 1972년부터 1975년까지의 정점 기간 동안에는 단 하나의 톱 20 싱글(에이스의 "How Long")이 있었고, 모든 밴드를 합쳐 15만 장 미만의 앨범이 판매된 것으로 추정된다.[7] 많은 밴드들이 펍에서 스튜디오 녹음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었고 라이브 사운드를 재현할 수 없었다.[4] 밴드들은 더 작은 공연장을 옹호함으로써 1960년대 이후 쇠퇴했던 지역 클럽 장면을 되살렸다.[4] 새로운 밴드들은 음반 회사의 지원 없이 공연할 수 있는 장소를 찾을 수 있었다.

펍 록은 일반적으로 그레이터 런던으로 제한되었고 홈 카운티로 약간 넘어갔지만,[4] 스코틀랜드 중부에서도 더 치타스(The Cheetahs)와 더 플라스틱 플라이스(The Plastic Flies)와 같은 지역 밴드가 배출되었다. 펍 록커들은 경기장에서 공연하는 주류 스타들이 청중과 소통을 잃었다고 믿었다. 대신 펍 록 그룹들은 친밀한 장소를 선호했는데, 이는 의미 있는 음악을 만들고 청중과 소통하는 데 필수적이었다.[8] 펍 록의 소규모 공연장 접근 방식은 잘 쓰여진 노래와 가사의 중요성을 높였다.[9] 영국 펍 록 장면은 1976년까지 마무리되었다.[6] 음반 업계는 이미 초기 펑크에 주목하며 다음 "빅 히트"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1976년에는 일부 펍 록 레이블이 더 하드한 펍 록 밴드와 더 댐드와 같은 초기 펑크 밴드를 모두 발매했다.

펍 록 초기 밴드로는 미국에서 영국으로 건너간 에그스 오버 이지가 펍에서 연주를 시작한 것이 있으며,[26] 이후 브린슬리 슈워츠[27], 닥터 필굿, 킬번 & 하이로드[28], 그레이엄 파커, 닉 로, 이언 듀리 등이 뒤를 이었다.

비틀즈, 롤링 스톤스, 더 후, 킨크스 등 1950-60년대 미국의 로큰롤, 블루스, 리듬 앤 블루스, 포크 음악에 영향을 받은 밴드들이 흥기한 브리티시 인베이전은 1964년 이후에 일어났다. 그러한 히트곡을 낼 수 있었던 밴드들과는 달리, 연주 장소를 확보하지 못하는 밴드들이 단순한 곡 구성과 연주, 노동자 계급을 의식한 작사를 특징으로 펍에서 연주를 시작한 것이 펍 록의 기원이다. The 101'ers에 소속되었던 조 스트러머(더 클래시의 보컬/기타) 등, 후에 펑크 록으로 데뷔한 록커 중에도 펍 록 씬에 있었던 뮤지션도 있었다.

록 시장이 비대해진 시대와는 반대로, 수용 인원이 작은 홀이나 클럽에서 소수의 관객을 대상으로 라이브를 하는 밴드들의 스타일은 음악 팬들에게 친근감을 불러일으켰다. 펍에서 연주하는 밴드들을 "펍 록"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에그스 오버 이지는, 그전까지 켄티쉬 타운의 Tally Ho라는 재즈만 연주하던 펍에서, 재즈 외의 음악을 연주한 최초의 밴드가 되었다[29]. 그들의 행동은 닉 로 등의 로컬 뮤지션들에게 큰 자극을 주었다. 펍 록은 음악성이 다양하며, 밴드마다 로큰롤, 블루스, 컨트리 록, 포크 록, 개러지 록 등 다양한 스타일을 선보였다.

2. 3. 음반 제작

1975년까지 주류 록 앨범 녹음의 표준은 고도로 숙련된 레코드 프로듀서들이 감독하는 비싸고 긴 스튜디오 녹음 과정이었으며, 오버더빙, 더블 트래킹, 스튜디오 효과를 통해 고도로 세련된 최종 제품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했다. 일부 주류 밴드들은 정교하게 제작된 완벽한 제품을 만들기 위해 녹음을 완벽하게 하기 위해 스튜디오에서 몇 달을 보냈다.[5] 펍 록커들은 이처럼 비용이 많이 드는 복잡한 녹음 과정을 거부했다. 대신 펍 록커들은 밴드의 "라이브" 사운드와 느낌을 스튜디오에서 포착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주류 록과 펍 록 녹음 방식의 차이는 다른 사운드(세련된 vs. 날것)를 생성했을 뿐만 아니라 각 록 장르의 경제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주류 록의 경우 비용이 많이 드는 사운드 녹음 과정은 음반사의 손익분기점이 약 20,000장인 것을 의미했다. 펍 록의 경우, 덜 비싼 녹음 과정은 펍 록 레이블이 2,000장으로 손익분기점을 넘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6] 이는 펍 록 레이블이 주류 밴드의 판매량의 10분의 1로 음반을 발매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펍 록 장면은 주로 라이브 현상이었다. 1972년부터 1975년까지의 정점 기간 동안에는 단 하나의 톱 20 싱글(에이스의 "How Long")이 있었고, 모든 밴드를 합쳐 15만 장 미만의 앨범이 판매된 것으로 추정된다.[7] 많은 밴드들이 펍에서 스튜디오 녹음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었고 라이브 사운드를 재현할 수 없었다.[4]

3. 역사

1960년대 브리티시 인베이전 이후, 비틀즈, 롤링 스톤스, 더 후, 킨크스와 같이 미국의 로큰롤, 블루스, 리듬 앤 블루스, 포크 음악에 영향을 받은 밴드들이 등장했다. 그러나 히트곡을 낸 밴드들과 달리, 공연 장소를 구하기 어려웠던 밴드들은 단순한 곡 구성, 연주, 노동자 계급을 의식한 가사를 특징으로 펍에서 연주하기 시작했다. The 101'ers의 조 스트러머(더 클래시의 보컬/기타)처럼, 후에 펑크 록으로 데뷔한 뮤지션 중에도 펍 록 씬에 있던 이들이 있었다.

펍 록 밴드들은 작은 홀이나 클럽에서 소수의 관객을 대상으로 라이브를 하는 스타일을 추구했고, 이는 음악 팬들에게 친근감을 주었다. 펍에서 연주하는 밴드들을 "펍 록"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펍 록은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한 음악성을 지녔다. 로큰롤, 블루스, 컨트리 록, 포크 록, 개러지 록 등 다양한 스타일의 밴드들이 펍 록 씬에서 활동했다.

3. 1. 펍 록 밴드의 등장

1971년 5월, 미국의 컨트리 록 밴드 Eggs over Easy는 켄티시 타운의 "Tally Ho" 펍에서 재즈만 연주하던 관례를 깨고 공연을 시작하며 펍 록 운동의 선구자가 되었다.[10] 이들의 공연은 닉 로우와 같은 지역 음악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11] 곧 Brinsley Schwarz와 같이 당시 유행하던 대형 공연장 시스템의 피해자였던 런던 밴드들이 이 흐름에 합류했다.[4]

맥스 메릿 앤 더 메테오스, 킬번 앤 더 하이 로드, Bees Make Honey, Ace, Chilli Willi and the Red Hot Peppers, Dr. Feelgood, Ducks Deluxe, Rockpile, Any Trouble, The Pirates, The Motors, F.B.I., Gozales, Wreckless Eric, The Inmates, Roogalator, Kokomo 등 다양한 밴드들이 펍 록 밴드로 활동했다.[12]

대부분의 공연장은 "리젠트 공원 북쪽"의 빅토리아 시대 대형 펍에 위치해 있었으며, 적합한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13] 특히 이즐링턴의 어퍼 스트리트에 있는 호프 앤 앵커 펍은 주목할 만한 장소였으며, 여전히 공연장으로 사용되고 있다.[3]

Tally Ho와 호프 앤 앵커를 시작으로 Cock, Brecknock, Lord Nelson, 풀럼의 Greyhound, Red Lion, Rochester Castle, 웨스트 켄싱턴의 Nashville, 그린 레인스의 Pegasus Pub, 노스 핀칠리의 The Torrington, 딩월스와 캠던 타운의 더블린 캐슬, 엔젤의 Pied Bull, 켄티시 타운의 불 앤 게이트, 올림피아 근처의 Kensington, 넌헤드의 뉴랜드스 태번, 케닝턴 오발의 Cricketers, 푸트니의 하프 문과 허니 힐의 하프 문 (사우스 런던의 전초 기지), 그리고 핀스버리 파크의 더 시어 조지 로비 등 다양한 펍들이 펍 록 공연장으로 사용되었다. 런던 외곽의 공연장으로는 대거넘 라운드하우스, 리 온 시의 Grand, 그리고 캐니 아일랜드의 Admiral Jellicoe 등이 있었다.[4] 이러한 공연장 네트워크는 나중에 펑크 장면을 위한 즉석 발사대 역할을 했다.[2]

1974년, 펍 록은 런던에서 가장 인기 있는 음악 장면이었다.[14] 그 당시 런던의 거의 모든 대형 펍이 라이브 음악을 제공했고, 뜨거운 간식과 때때로 스트리퍼도 있었다.[4] 에식스 출신의 R&B 그룹 Dr. Feelgood가 선두 주자였다.[15] 1975년 가을까지 해머스미스 고릴라스, 조 스트러머의 101ers, 에디 앤 더 핫 로즈, 더 카운트 비숍스와 같은 밴드들이 합류했다.[16]

펍 록은 여러 프로토 펑크 밴드를 배출한 후 영국 펑크의 폭발적인 성장으로 빠르게 대체되었다. 조 스트러머, 이안 듀리, 엘비스 코스텔로를 포함한 일부 아티스트들은 새로운 그룹으로 옮겨가면서 이러한 변화에 적응할 수 있었다.[4] 몇몇 밴드들은 나중에 톱 40 차트에서 성공을 거두기도 했지만, 펍 록의 전성기는 지나갔다. 많은 펍들이 펑크 공연장으로 살아남았지만 (특히 Nashville과 The Hope & Anchor), 조지 로비와 Pied Bull과 같은 유명한 펍은 문을 닫거나 철거되었다. 뉴랜드스 태번은 살아남아 현재 더 아이비 하우스라고 불리며, 2023년에는 많은 새로운 밴드를 선보이는 번성하는 음악 공연장으로 다시 자리 잡았다.

펍 록의 초기에는 미국에서 영국으로 건너간 에그스 오버 이지[26]가 펍에서 연주를 시작했으며, 브린슬리 슈워츠[27], 닥터 필굿, 킬번 & 하이로드[28], 그레이엄 파커, 닉 로, 이언 듀리 등이 뒤를 이었다.

1964년 이후 비틀즈, 롤링 스톤스, 더 후, 킨크스 등 미국의 1950-60년대 로큰롤블루스, 리듬 앤 블루스, 포크 음악에 영향을 받은 밴드들이 흥기한 이른바 브리티시 인베이전이 일어났다. 히트곡을 낼 수 있었던 밴드들과는 달리, 연주 장소를 확보하지 못하는 밴드들이 단순한 곡 구성과 연주, 노동자 계급을 의식한 작사를 특징으로 펍에서 연주를 시작한 것이 펍 록의 기원이다. The 101'ers에 소속되었던 조 스트러머 (더 클래시의 보컬/기타) 등, 후에 펑크 록으로 데뷔한 록커 중에도 펍 록 씬에 있었던 뮤지션도 있었다.

작은 홀이나 클럽에서 소수의 관객을 대상으로 라이브를 하는 스타일은 음악 팬들에게 친근감을 불러일으켰으며, 펍에서 연주하는 밴드들을 "펍 록"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에그스 오버 이지는 켄티쉬 타운의 Tally Ho라는 재즈만 연주하던 펍에서 재즈 외의 음악을 연주한 최초의 밴드가 되었고[29], 그들의 행동은 닉 로우 등의 로컬 뮤지션들에게 큰 자극을 주었다.

펍 록은 밴드마다 음악 스타일이 달랐다. 로큰롤, 블루스, 컨트리 록, 포크 록, 개러지 록 등 다양한 스타일의 밴드들이 활동했다.

3. 2. 주요 공연 장소

1971년 5월, 미국의 컨트리 록 밴드 Eggs over Easy가 켄티시 타운의 "Tally Ho" 펍에서 공연하면서 펍 록 운동의 선구자가 되었다.[10] 이들은 닉 로우와 같은 지역 음악가들에게 영감을 주었고, Brinsley Schwarz와 같은 런던 밴드들도 합류했다.[11][4]

대부분의 공연장은 "리젠트 공원 북쪽"의 빅토리아 시대 대형 펍에 위치해 있었다.[13] 특히 이즐링턴의 어퍼 스트리트에 있는 호프 앤 앵커 펍은 주목할 만한 장소였다.[3]

Tally Ho와 호프 앤 앵커 외에도 Cock, Brecknock, Lord Nelson, 풀럼의 Greyhound, Red Lion, Rochester Castle, 웨스트 켄싱턴의 Nashville, 그린 레인스의 Pegasus Pub, 노스 핀칠리의 The Torrington, 딩월스와 캠던 타운의 더블린 캐슬, 엔젤의 Pied Bull, 켄티시 타운의 불 앤 게이트, 올림피아 근처의 Kensington, 넌헤드의 뉴랜드스 태번, 케닝턴 오발의 Cricketers, 푸트니의 하프 문과 허니 힐의 하프 문 (사우스 런던의 전초 기지), 핀스버리 파크의 더 시어 조지 로비 등이 주요 공연 장소였다.[4] 런던 외곽의 공연장으로는 대거넘 라운드하우스, 리 온 시의 Grand, 캐니 아일랜드의 Admiral Jellicoe 등이 있었다.[4]

이러한 공연장 네트워크는 나중에 펑크 장면을 위한 발사대 역할을 했다.[2] 1974년, 펍 록은 런던에서 가장 인기 있는 음악 장면이었고,[14] 거의 모든 대형 펍이 라이브 음악을 제공했다.[4]

하지만 펍 록은 영국 펑크의 성장으로 빠르게 대체되었다. 조지 로비와 Pied Bull과 같은 유명한 펍은 문을 닫거나 철거되었지만, 뉴랜드스 태번(현재 더 아이비 하우스)은 살아남아 2023년에도 음악 공연장으로 운영되고 있다.

3. 3. 전성기와 쇠퇴

1974년, 펍 록은 런던에서 가장 인기 있는 음악 장면이었다. 당시 런던의 거의 모든 대형 펍은 라이브 음악을 제공했고, 뜨거운 간식과 때때로 스트리퍼도 있었다.[4] 선두 주자는 에식스 출신의 R&B 그룹 Dr. Feelgood였다.[15] 1975년 가을까지 해머스미스 고릴라스, 조 스트러머의 101ers, 에디 앤 더 핫 로즈, 더 카운트 비숍스와 같은 밴드들이 합류했다.[16]

펍 록은 여러 프로토 펑크 밴드를 배출한 후 영국 펑크의 폭발적인 성장으로 빠르게 대체되었다. 조 스트러머, 이안 듀리, 엘비스 코스텔로를 포함한 일부 아티스트들은 새로운 그룹으로 옮겨가면서 이러한 변화에 적응할 수 있었다.[4] 몇몇 밴드들은 나중에 톱 40 차트에서 성공을 거두기도 했지만, 펍 록의 전성기는 지나갔다. 실제로 많은 펍들이 펑크 공연장으로 살아남았지만(특히 Nashville과 The Hope & Anchor), 더 시어 조지 로비와 Pied Bull과 같은 여러 유명한 펍은 문을 닫거나 철거되었다. 뉴랜드스 태번은 살아남아 현재 더 아이비 하우스라고 불리며, 2023년에는 많은 새로운 밴드를 선보이는 번성하는 음악 공연장으로 다시 자리 잡았다.

4. 대표적인 아티스트

5. 유산

펍 록은 펑크 록 탄생에 큰 영향을 미쳤지만, 결국 펑크 록에 의해 쇠퇴한 음악 장르이다. 펍 록은 펑크 록의 모태가 되었지만, 펑크 록의 등장으로 그 자리를 내주게 되었다.

이언 듀리와 더 블록헤즈가 1978년 런던 라운드하우스에서 공연하는 모습

5. 1. 펑크 록과의 관계



노스탤지어 센트럴은 "펍 록은 펑크에 의해 죽었을지 모르지만, 펍 록이 없었다면 영국에 펑크가 아예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라고 평가했다.[7] 초기에는 펍 록과 펑크 록의 경계가 모호했다.[2] 한때 핫 로즈와 섹스 피스톨즈는 모두 "스트리트 록"의 라이벌로 여겨지기도 했다.[17] 섹스 피스톨즈는 더 블록헤즈[18]와 101ers의 내슈빌 공연 오프닝을 맡았고,[2] 1976년 2월 더 마퀴에서 에디 앤 더 핫 로즈의 오프닝을 맡으며 큰 기회를 얻었다.[19] 닥터 필굿은 뉴욕에서 라몬즈와 함께 공연하기도 했다. "펑크"라는 단어는 핫 로드의 티셔츠에 처음 등장하여 ''톱 오브 더 팝스''에 데뷔했으며, 펑크 팬진 ''스니핀 글루''는 닥터 필굿의 앨범 ''Stupidity''를 "록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라고 평가했다.[2]

펑크는 준비된 라이브 공연장 외에도 닥터 필굿의 윌코 존슨과 같은 펍 록 기타 영웅들의 에너지, 폭력성, 냉담한 태도를 물려받았다.[2] 닥터 필굿은 이후 펑크의 메시아를 위한 세례 요한으로 묘사되기도 했다.[20] 음악 언론의 과대 광고와 초기 펑크의 음반 발매 사이의 틈새에서, 더 거친 펍 록 밴드들은 실제 녹음된 음악을 갈망하는 사람들을 위해 선두에 섰지만,[2] 오래가지 못했다.

섹스 피스톨즈의 보컬 존 라이든은 펍 록 밴드들을 "라이브 음악의 모든 문제점"으로 거부했는데, 그들이 경기장 현장과 싸우지 못했고, 자신들을 배타적인 펍 클리크로 축소하는 것을 선호했기 때문이다.[21] 펍 록의 기본으로 돌아가는 접근 방식은 섹스 피스톨즈의 스티브 존스와 같은 펑크 기타리스트에게는 여전히 너무 복잡한 코드 구조를 포함했는데, 그는 "만약 우리가 그 복잡한 코드를 연주했다면, 닥터 필굿이나 그런 펍 록 밴드들처럼 들렸을 것"이라고 불평했다.[22] 1976년이 끝날 무렵, 펑크들은 펍 록커들과 아무런 관계를 맺고 싶어하지 않았다.[23] 더 스트랭글러스와 같은 밴드들은 외면당했지만 그들은 신경 쓰지 않았다.[24]

닥터 필굿의 리 브릴로가 400GBP을 대출하여 설립한 독립 레코드 레이블 스티프 레코드는 최초의 영국 펑크 싱글인 The Damned의 "New Rose"를 발매했다.[24] 스티프 레코드의 초기 고객은 펍 록커와 펑크 록 밴드의 혼합으로 구성되어 유명해졌다.

5. 2. 독립 음반사

닥터 필굿의 리 브릴로가 400GBP을 대출하여 설립한 독립 레코드 레이블 스티프 레코드는 최초의 영국 펑크 싱글인 The Damned의 "New Rose"를 발매했다.[24] 스티프 레코드의 초기 고객은 펍 록커와 펑크 록 밴드의 혼합으로 구성되었으며, 이로 인해 그들은 유명해졌다.

참조

[1] 웹사이트 Pub Rock | Music http://www.britannic[...] 2016-03-15
[2] 뉴스 Give pub rock another chance https://www.theguard[...] The Guardian 2010-01-21
[3] 서적 Savage (1991)
[4] 뉴스 Pub Rock http://www.punk77.co[...] NME 1977-10-29
[5] 서적 One Chord Wonders: Power and Meaning in Punk Rock PM Press 2015
[6] 서적 One Chord Wonders: Power and Meaning in Punk Rock PM Press 2015
[7] 웹사이트 Pub Rock http://nostalgiacent[...] 2014-06-20
[8] 서적 One Chord Wonders: Power and Meaning in Punk Rock PM Press 2015
[9] 서적 One Chord Wonders: Power and Meaning in Punk Rock PM Press 2015
[10] 서적 Birch (2003)
[11] 웹사이트 Pub Rock https://web.archive.[...] 2010-07-17
[12] 웹사이트 Kokomo http://www.kokomo.ba[...] Kokomo 2023-11-16
[13] 웹사이트 Pub Rock- Pre Punk music http://www.punk77.co[...] Punk77.co.uk 2006-05-12
[14] 서적 Savage (1991)
[15] 서적 Savage (1991)
[16] 서적 Savage (1991)
[17] 서적 Savage (1991)
[18] 서적 Lydon (1995)
[19] 서적 Lydon (1995)
[20] 뉴스 The Dr Feelgood factor | Features | Culture https://www.independ[...] 2009-02-13
[21] 서적 Lydon (1995)
[22] 서적 Lydon (1995)
[23] 서적 Lydon (1995)
[24] 서적 Savage (1991)
[25] 웹사이트 パブ・ロック[pub rock](パブロック)とは? 意味や使い方 https://kotobank.jp/[...] 2024-06-22
[26] 웹사이트 Eggs Over Easy Songs, Albums, Reviews, Bio & M... https://www.allmusic[...] 2024-06-22
[27] 문서 닉 로우, 이안 곰이 재직했던
[28] 문서 이안 듀리가 재직했던
[29] 웹사이트 Pub Rock https://web.archive.[...] 2010-07-17
[30] 문서 「히트 미 위드 유어 리듬 스틱」 등 펑크의 댄스 넘버 걸작을 발표했다
[31] 문서 첫 앨범 수록곡 「앨리슨」은 다른 뮤지션들에게도 커버되었다
[32] 문서 컨트리 록을 연주했던 밴드
[33] 문서 80년대에는 미국에서도 소히트를 냈다
[34] 문서 믹 그린이 재직했던 밴드
[35] 문서 컨트리 록 밴드이다
[36] 문서 71年に「アイ・ヒア・ユー・ノッキング」のヒットを出している
[37] 문서 パブロックからパンクロックへと転換したグループ
[38] 문서 ダムドをプロデュース。ニック・ロウ自身は78年にニューウェイヴ・アルバムを発表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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