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데리코 (나폴리)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페데리코는 1496년 조카 페르디난도 2세의 사망으로 나폴리 왕위를 계승했다. 그는 프랑스 왕 루이 12세와 아라곤 왕 페르난도 2세의 동맹에 의해 1501년 폐위되었고, 나폴리는 잠시 루이 12세의 지배를 받았다가 1504년 페르난도 2세에게 넘어갔다. 페데리코는 이후 프랑스로 건너가 1504년 투르에서 사망했다. 그는 두 번 결혼하여 자녀를 두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452년 출생 - 지롤라모 사보나롤라
지롤라모 사보나롤라는 1452년 이탈리아에서 태어난 도미니크 수도사이자 종교 개혁가로, 피렌체에서 활동하며 정치적, 종교적 개혁을 시도했으나 교황과 대립하여 파문당하고 화형에 처해졌다. - 1452년 출생 - 리처드 3세
리처드 3세는 잉글랜드 요크 왕가 마지막 왕으로, 장미 전쟁에서 공을 세웠으나 조카들을 런던탑에 가두고 왕위에 올랐다가 보즈워스 전투에서 패배하여 사망하며 요크 왕가의 몰락을 초래했고, 셰익스피어 희곡 등에서 악인으로 묘사되기도 했다. - 트라스타마라가 - 후안 1세 (카스티야)
후안 1세 (카스티야)는 엔리케 2세의 아들로 카스티야의 왕이 되었으며, 포르투갈 병합 시도 실패, 유대인 관용 정책, 아르메니아 왕 구출 등의 활동을 했고, 아라곤의 엘레오노르와 포르투갈의 베아트리스와 결혼했으며, 낙마 사고로 사망하여 아들 엔리케 3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 트라스타마라가 - 후아나 라 벨트라네하
후아나 라 벨트라네하는 카스티야 왕위 계승 분쟁의 중심인물로, 엔리케 4세의 딸로 인정받았으나 사생아 의혹 속에 이사벨 1세와 왕위를 다투다 왕위 계승권을 잃고 자신을 여왕으로 여기며 수도원에서 여생을 보냈다. - 1504년 사망 - 윤필상
윤필상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세조와 성종 때 활약하며 이시애의 난 평정에 기여하고 좌의정을 거쳐 명나라를 도와 건주위 토벌에 공을 세웠으나, 무오사화를 주도하여 사림을 숙청하고 갑자사화 때 사사된 후 중종반정으로 복권되었다. - 1504년 사망 - 효숙황후
효숙황후는 명나라 영종의 후궁이자 성화제의 생모로, 후궁 시녀 출신으로 빈이 되었고 아들 성화제 즉위 후 황태후, 손자 홍치제 즉위 후 태황태후로서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며 명나라 정치에 큰 영향을 미쳤으나, 권력 남용 논란 등 긍정적·부정적 평가가 공존한다.
페데리코 (나폴리)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 | |
칭호 | 나폴리 왕 |
재위 기간 | 1496년 9월 7일 – 1501년 8월 1일 |
이전 통치자 | 페르디난도 2세 |
다음 통치자 | 루이지 3세 |
출생일 | 1452년 4월 19일 |
출생지 | 나폴리 왕국 나폴리 |
사망일 | 1504년 11월 9일 |
사망지 | 프랑스 왕국 플레시 레 투르 성 |
매장지 | 플레시 레 투르 교회 |
배우자 | 안나 디 사보이아 이사벨라 델 발초 |
자녀 | 샬로트, 라발 백작부인 페르디난도, 칼라브리아 공작 |
가문 | 트라스타마라 가문 |
아버지 | 페르디난도 1세 |
어머니 | 이사벨라 디 키아로몬테 |
2. 생애
나폴리에서 페르디난도 1세 국왕과 그의 첫 번째 부인 클레르몽의 이사벨라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1496년, 아들 없이 요절한 조카 페르디난도 2세의 뒤를 이어 나폴리 왕위에 올랐다.[3]
왕위에 오른 페데리코는 곧 프랑스 국왕 샤를 8세와 그의 후계자 루이 12세가 주장하는 나폴리 왕위 계승권 문제에 직면했다. 루이 12세는 1499년부터 나폴리 정복을 시도했고, 페데리코는 이를 막기 위해 자신의 사촌인 아라곤의 국왕 페르난도 2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나 페르난도 2세는 1500년 11월 11일 그라나다 조약을 통해 루이 12세와 비밀리에 동맹을 맺고 나폴리 왕국을 분할하기로 합의했다.
결국 1501년 프랑스와 아라곤 연합군에 의해 나폴리가 함락되면서 페데리코는 폐위되었다. 그는 프랑스로 망명하여 루이 12세에게 의탁했고, 앙주 공국에서 연간 3만 파운드의 연금을 받으며 지내다가 1504년 투르에서 사망했다. 나폴리 왕국은 잠시 프랑스의 지배하에 있다가 1504년 페르난도 2세가 차지하게 되었다.
페데리코는 두 번 결혼했다. 첫 번째 부인은 사보이 공작 아메데오 9세의 딸인 사보이의 안으로, 1478년 결혼하여 딸 샤를로타 (1479/1480–1506)를 낳았으나 1480년에 사별했다.[8] 두 번째 부인은 이사벨라 델 발초로, 슬하에 페르디난도 (1488–1550), 줄리아 (1492–1542), 알폰소 (1499–1515), 이사벨라 (1500–1550), 체사레 (1501–1501/1503) 등 다섯 자녀를 두었다.
2. 1. 어린 시절과 교육
나폴리에서 페르디난도 1세와 그의 첫 번째 부인인 클레르몽의 이사벨라 사이에서 태어났다.1452년 4월 19일 카푸아노 성(Castel Capuano)에서 세례를 받았으며, 그의 대부는 당시 외교적 목적으로 알폰소 5세를 방문 중이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3세였다.[3]
그의 할아버지인 알폰소 5세가 1458년 6월 27일에 사망하고 아버지 페르디난도 1세가 나폴리 왕위를 계승하자, 페르디난도 1세는 아들에게 좋은 교육 환경을 제공하기 위해 당대 최고의 교사들을 붙여주었다. 여기에는 안드레아 다 카스텔포르테, 조반니 엘리시오 칼렌치오, 지롤라모 발다사레, 오페리아노 포르티 등이 포함되었다.[3]
2. 2. 페란테 왕 시절
1464년 아버지 페란테 왕과 함께 타란토에서 살던 시절, 페데리코는 형 알폰소의 약혼녀이자 밀라노 공작 프란체스코 스포르차의 딸인 이폴리타 마리아 스포르차를 밀라노에서 나폴리까지 호위하라는 명령을 받았다.[13][3] 그는 1465년 3월 18일 기병 320명과 함께 나폴리를 떠났고, 길을 가던 중 3월 30일에 어머니 이사벨라의 사망 소식을 들었다. 1465년 4월 2일 로마에서 교황 바오로 2세를 만나 황금 장미를 수여받았다. 이후 시에나와 피렌체를 방문하여 4월 17일에는 로렌초 데 메디치의 환대를 받았다. 밀라노에 도착하여 6월 7일까지 머물렀고, 신부와 함께 나폴리로 돌아오라는 명을 받았다. 그는 왔던 길을 되돌아갔으나, 결혼을 취소하겠다고 위협한 밀라노 공작 때문에 외교 협상이 다시 열릴 때까지 시에나에 머물러야 했다. 그는 1465년 9월 14일에야 나폴리로 돌아올 수 있었다.[13][3]
1464년부터 1473년까지 페데리코는 카피타나타, 테라 디 바리(Terra di Bari), 테라 도트란토(Terra d'Otranto) 지역에서 국왕의 부관이자 군 사령관으로 복무했다. 그는 신하들로부터 충성 서약을 받고, 세금 징수를 감독하며, 베네치아 공화국과의 무역 협정을 시행하는 역할을 맡았다. 또한 아버지 페란테 왕이 주도하는 외교 활동에도 참여하여, 나폴리 왕국과 동맹을 맺고자 하는 여러 영주들을 접견했다. 대표적으로 1472년 3월에는 아베르사와 나폴리에서 로마의 지사이자 세니갈리아의 영주이며 교황 식스토 4세의 조카인 조반니 델라 로베레를 맞이했고, 1473년 8월 30일에는 파엔차의 영주 카를로 만프레디를 접견했다.[13][3]
2. 3. 외교와 결혼 주선
1470년 4월 초, 부르고뉴의 용담공 샤를은 자신의 유일한 딸이자 상속녀인 마리를 페데리코와 결혼시키겠다고 제안했다.[14][4] 이 계획은 부르고뉴 공국과 나폴리 왕국 사이에 동맹 협약이 체결된 후인 1471년 11월에 구체화되었다.[14][4]
당대 가장 부유한 상속녀 중 한 명이었던 마리에게는 여러 군주와 귀족들이 구혼했다.[15][5] 구혼자 중에는 카톨릭 군주 페르난도, 로렌 공작 니콜라 1세, 사보이아의 필리베르토 1세, 클래런스 공작 조지, 샤를 드 기옌 등이 있었다.[15][5] 프랑스의 루이 11세는 부르고뉴 영지에 대한 앙주의 권리를 교환하는 대가로 아라곤이나 나폴리의 군주를 지명하는 데 관심을 보였다.[15][5]
1472년 2월, 페데리코의 아버지인 페르디난도 1세는 이 계획을 지지했고, 부르고뉴 사절단은 용담공 샤를이 여전히 페데리코를 염두에 두고 있다고 주장했다.[15][5] 그러나 용담공 샤를과 로렌 공작 니콜라 사이에 동맹이 맺어지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샤를은 1472년 5월 25일 아라스에서, 니콜라는 5월 27일에 동맹에 서명했다.[15][5] 그 결과, 나폴리와 아라곤의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던 로렌의 니콜라와 마리가 약혼하게 되었고, 이 소식은 페데리코가 나폴리 궁정에서 교육받던 여름에 전해졌다.[15][5] 마리는 1472년 6월 13일에 약혼에 동의했다.[15][5]
1472년 10월, 새로운 부르고뉴 사절단이 나폴리에 도착하여 마리와의 약혼에도 불구하고 용담공 샤를과 나폴리 왕의 관계는 변함없음을 강조했다.[13][3] 사절단은 떠나면서 페데리코에게 프랑스어를 가르칠 기사 두 명을 남겨두었다.[13][3] 이는 용담공 샤를이 딸의 혼인을 외교적 도구로 활용했음을 보여준다.[13][3]
하지만 마리와 니콜라의 약혼은 오래가지 못했다. 1472년 11월 5일[5] (혹은 10월 5일[15]), 보부아르(Beauvoir)에 있는 용담공 샤를의 진영에서 니콜라는 두 공작 사이의 동맹을 위태롭게 하지 않기 위해 약혼을 포기했다.[5][15] 마리는 12월 3일에 약혼 포기를 공식적으로 선언했다.[5][15]
1473년, 용담공 샤를이 딸 마리를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3세의 아들인 막시밀리안 1세와 결혼시키려 한다는 소문이 돌면서 양측의 동맹 약속이 지켜지지 않자,[5] 페르디난도 1세는 아라곤의 후안 2세의 딸 후아나와 페데리코의 혼인 가능성을 모색하기 시작했다.[5] 또한, 원래 페데리코와 맺으려 했던 혼담, 즉 비시냐노(Bisignano) 군주 루카 산세베리노(Luca Sanseverino)의 딸과의 결혼 가능성도 다시 검토되었다.[5]
2. 4. 용담공 샤를 궁정 시절
페르디난도 1세 국왕은 페데리코와 용담공 샤를의 딸(마리 드 부르고뉴) 사이의 결혼 가능성을 추진하기로 결정하고 부르고뉴 공작이 그 제안을 받아들이도록 할 기회를 모색했다. 1474년 11월 26일, 포지아에서 페르디난도는 부르고뉴 궁정에 대사로 카파초 주교 프란체스코 베르티니에게 협상을 진행할 수 있는 전권을 위임했다. 11월 28일, 칼라브리아 공작 알폰소가 아버지와 그의 형제인 카파초 주교에 의해 협상 대사로 확정되었다.[3]페데리코는 1474년 10월 26일 나폴리를 떠나, 이탈리아에서 많은 방문을 거치며 디종으로 갈 기회를 기다렸다. 그는 로마, 우르비노를 방문했고, 페라라에서는 그의 매형인 에르콜레 1세 데스테와 함께 환영을 받았다. 1475년 1월 5일, 400명의 수행원과 함께 그는 베네치아의 도제 피에트로 모체니고로부터 성대한 환영을 받았는데, 그 자리에서 세레니시마 공화국의 대표단은 부첸타우로에서 환영받았다.[3]
용담공 샤를의 궁정에 합류할 기회는 1475년 1월 30일 샤를과 갈레아초 마리아 스포르차 간의 군사 협정 체결로 마련되었다. 2월 초, 그는 밀라노를 떠나 토리노로 갔고, 그곳에서 부르고뉴 공작과 밀라노 공작 사이의 동맹의 주요 중개인인 욜랑드 드 프랑스가 그를 무술 및 궁술의 대가로 임명했다. 그는 2월 말에 베상송에 주둔했는데, 당시 용담공 샤를은 노이스를 포위하고 있었다.

결혼 소식이 이탈리아 궁정들 사이에 빠르게 퍼졌고, 부르고뉴 공작의 고문인 기 드 브리뮤는 이 소식의 전개에 특히 놀라움을 표했다. 페르디난도는 결혼 계획이 정치적 불확실성과 문제에 따라 변동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이는 부르고뉴 궁정에서 더욱 그러했다. 그는 아들 페데리코에게 두 가지 주요 임무를 맡겼다. 첫 번째는 용담공 샤를에게 그가 창설한 에르민 훈장을 수여하고, 그를 금양모 기사단에 환영하는 것이었다. 두 번째 임무는 샤를의 측근에 있는 니콜라 디 몬포르테 피에트라발레(캄포바소 백작)를 교체하는 것이었다. 그는 페르디난도의 전 봉신이자 르네 당주를 섬겼으며, 피에몬테, 롬바르디아, 에밀리아에서 부르고뉴 군대를 위해 용병을 모집했던 인물이었다.[3] [6]
페데리코가 부르고뉴 궁정에 도착하는 동안, 용담공 샤를의 이복 형제인 앙투안 드 부르고뉴는 그의 아들 필리프, 리오넬로 데스테의 사생아인 프랑수아 데스테, 기욤 드 로슈포르, 그리고 백 명의 병사들과 함께 나폴리로 출발했다. 이는 페르디난도 1세 국왕에게 금양모 기사단 훈장을 전달하기 위함이었는데, 페르디난도는 용담공 샤를의 요청으로 1473년 발랑시엔 장에서 기사단 입회를 인정받았다. 약 1475년 2월 15일 메헬렌에 도착한 앙투안 드 부르고뉴는 3월 4일부터 3월 6일까지 욜란데 공작부인의 영지인 몽칼리에리에 머물렀다. 그는 이 시기에 샹베리 영지에서 페데리코를 만났을 가능성이 높다.[7]
앙투안 드 부르고뉴는 1475년 3월 9일부터 3월 16일까지 밀라노 궁정에서 환영을 받았고, 그 후 나폴리로 이동하여 4월 15일 칼라브리아 공작 알폰소의 환영을 받았다. 4월 20일, 페르디난도 1세 국왕은 금양모 기사단에 정식으로 서임되었고, 그 규약을 준수할 것을 맹세했다. 부르고뉴 사절단의 도착은 마상 시합을 포함한 성대한 축제의 기회가 되었다.
2. 5. 루이 11세 궁정 시절
1478년 9월 11일, 아메데오 9세 디 사보이아와 욜랑드 드 프랑스의 딸인 안나와 결혼했다.[8] 그는 젊은 아내와 함께 아내의 외삼촌인 루이 11세의 궁정에서 지냈다. 1480년에 아내가 사망하자 그는 나폴리로 돌아왔다.1485년, 페데리코는 스퀼라체 대공 작위를 받았고, 아버지의 명에 따라 여러 외교 임무를 수행했다.
2. 6. 나폴리 군주 시절
1496년, 아들이 없이 요절한 조카 페르디난도 2세의 뒤를 이어 나폴리 왕위를 계승했다. 그러나 즉위 직후부터 프랑스 국왕 샤를 8세가 제기한 나폴리 왕위 계승권 주장에 맞서야 했다. 페데리코는 1497년 6월 26일에 대관식을 치렀다.
샤를 8세의 뒤를 이은 루이 12세 역시 나폴리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며 1499년부터 1501년까지 나폴리 정복을 시도했다. 위기에 처한 페데리코는 프랑스군을 격퇴하기 위해 사촌인 아라곤의 국왕 페르난도 2세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페르난도 2세는 루이 12세와 비밀리에 결탁하여 1501년 페데리코를 폐위시키는 데 가담했다. 이후 페르난도 2세는 프랑스 세력을 몰아내고 1504년 나폴리 왕국을 자신의 영토로 만들었다. 모든 영토를 잃은 페데리코는 한때 적이었던 프랑스 국왕 루이 12세에게 망명하여 자비를 구하는 신세가 되었다. 루이 12세는 그에게 앙주 공국에서 연간 3만 파운드의 연금을 지급하며 거처를 마련해주었다.
페데리코는 결국 왕위를 되찾지 못하고 1504년 망명지인 투르에서 사망했다.
2. 7. 나폴리 상실 후
프랑스의 국왕 루이 12세와 아라곤의 국왕 페르난도 2세는 1500년 11월 11일 그라나다에서 비밀리에 그라나다 조약을 체결했다. 페르난도 2세는 페데리코의 사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두 군주는 나폴리 왕국을 함께 침략하여 정복한 뒤 영토를 분할하기로 합의했다. 조약에 따라 루이 12세는 나폴리, 테라 디 라보로, 아브루초 지역과 함께 예루살렘 왕 및 나폴리 왕의 칭호를 차지하고, 페르난도 2세는 풀리아와 칼라브리아의 공작이 되기로 했다. 이들은 명목상의 종주권을 가진 교황 알렉산데르 6세에게 계획에 대한 지지를 구했다.페르난도 2세는 말라가에서 곤살로 데 코르도바가 지휘하는 50척의 함대를 준비시켜 1,200마리의 말과 8,000명의 보병을 수송했다. 이 군대는 공식적으로는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 베네치아를 지원한다는 명분으로 파견되었으나, 1500년에서 1501년 사이에 시칠리아를 거쳐 나폴리 침공에 투입되었다. 1501년, 프랑스와 아라곤 연합군은 나폴리를 성공적으로 점령했고, 페데리코는 왕위에서 폐위되었다.
나폴리는 잠시 루이 12세의 통치하에 있었으나, 1504년에 결국 페르난도 2세가 차지하게 되었다. 왕위를 잃은 페데리코는 프랑스로 망명하여 투르에서 지내다가 1504년에 사망했다.
3. 사망
1501년 8월, 프랑스 군대가 나폴리를 침략하여 함락시키자, 당시 블루아에 머물던 페데리코는 프랑스 국왕 루이 12세와 협상해야 했다. 그는 연금과 메인 백작령을 받는 조건으로 나폴리에 대한 권리를 포기했다. 이후 페데리코는 루이 12세를 따라 이탈리아로 갔다가 1503년 3월 투르로 돌아왔고, 1504년 그곳에서 사망했다.
4. 가족
페데리코는 두 번 결혼했다. 첫 번째 부인은 사보이의 안나로, 1478년에 결혼하여 딸 하나를 두었으나 1480년에 사별했다.[18][19] 이후 1486년 이사벨라 델 발초와 재혼하여 다섯 명의 자녀를 더 얻었다.[18]
4. 1. 첫 번째 부인: 사보이의 안나
페데리코는 첫 번째 부인으로 안나 디 사보이아(1455년–1480년)와 결혼했다.[18] 안나는 사보이 공작 아메데오 9세와 프랑스의 샤를 7세의 딸인 발루아의 욜란다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다. 두 사람은 1478년 9월 11일 밀라노에서 결혼식을 올렸으나, 안나는 결혼한 지 2년 후인 1480년에 세상을 떠났다.페데리코와 안나 사이에는 딸 한 명이 있었다.
- 카를로타 (1479/1480년 – 1506년): 라발 백작 기 16세와 혼인했다.[19] 카를로타의 딸인 안 드 라발은 후에 나폴리 왕위를 주장하기도 했다.
4. 2. 두 번째 부인: 이사벨라 델 발초
페데리코는 첫 번째 부인 안나가 1480년에 사망한 후, 1486년에 이사벨라 델 발초 (? - 1533년)와 두 번째로 결혼했다.[18] 두 사람 사이에서는 5명의 자녀(3남 2녀)가 태어났다.- 칼라브리아 공작 페르디난도 (1488년 12월 15일 – 1550년): 발렌시아 부왕을 지냈다. 페르난도 2세의 후처였던 제르멘 드 푸아(그녀에게는 세 번째 결혼)와 첫 번째 결혼을 했고, 이후 Mencia de Mendoza|멘치아 데 멘도사es와 재혼했다.
- 줄리아 (1492년 – 1542년 3월 10일): 1533년 몬페라토 후작 조반니 조르조와 결혼했으나, 남편은 결혼 9일 만에 사망했다.
- 알폰소 (Alfonso, 1499년–1515년): 요절했다.
- 이사벨라 (Isabella, 1500년–1550년)
- 체사레 (Caesar, 1501년–1501년/1503년): 요절했다.
참조
[1]
논문
"Introduction: Reassessing Naples, 1266–1713"
2008
[2]
문서
[3]
웹사이트
Federico d'Aragona, Re di Napoli, di Gino Benzoni, Dizionario Biografico degli Italiani- Volume 45 (1995)
http://www.treccani.[...]
2014-04-24
[4]
서적
Charles the Bold and Italy (1467-1477): Politics and Personnel. Richard J. Walsh. Liverpool University Press, 2005, page 303
https://books.google[...]
Liverpool University Press
2014-04-29
[5]
웹사이트
Histoire ecclésiastique et civile de Lorraine,Dom Augustin Calmet, Chez Jean-Baptiste Cusson, Nancy, 1728 , pages 892-894
https://books.google[...]
2014-04-29
[6]
웹사이트
Cola (Nicola) di Monforte, di Francesco Storti, Dizionario Biografico degli Italiani- Volume 75 (2011)
http://www.treccani.[...]
2014-04-30
[7]
서적
dicendo aveva aùto aviso che don Federico passava per Chiamberi e non per qui, e lui lo andaria a trovarlo, dove non staria che una nocte, et un giorno con Madama
[8]
서적
Charles the Bold and Italy (1467–1477): Politics and Personnel
Liverpool University Press
2005
[9]
서적
The Counts of Laval
Ashgate Publishing Company, Aldershot
2007
[10]
논문
"Jacquet's Tributes to the Neapolitan Aragonese"
1988
[11]
문서
[12]
문서
[13]
웹인용
Federico d'Aragona, Re di Napoli, di Gino Benzoni, Dizionario Biografico degli Italiani- Volume 45 (1995)
http://www.treccani.[...]
2014-04-24
[14]
웹인용
Charles the Bold and Italy (1467-1477): Politics and Personnel. Richard J. Walsh. Liverpool University Press, 2005, page 303
http://books.google.[...]
2014-04-29
[15]
웹인용
Histoire ecclésiastique et civile de Lorraine,Dom Augustin Calmet, Chez Jean-Baptiste Cusson, Nancy, 1728 , pages 892-894
http://books.google.[...]
2014-04-29
[16]
웹인용
Cola (Nicola) di Monforte, di Francesco Storti, Dizionario Biografico degli Italiani- Volume 75 (2011)
http://www.treccani.[...]
2014-04-30
[17]
서적
dicendo aveva aùto aviso che don Federico passava per Chiamberi e non per qui, e lui lo andaria a trovarlo, dove non staria che una nocte, et un giorno con Madama
1475-03-19
[18]
논문
"Jacquet's Tributes to the Neapolitan Aragonese"
1988
[19]
서적
The Counts of Laval
Ashgate Publishing Company, Aldershot
2007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