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효숙황후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효숙황후는 명나라 영종의 후궁으로, 성화제의 생모이다. 농부의 딸이었던 주씨는 영종의 눈에 띄어 궁에 들어가 귀비가 되었고, 아들 견심(성화제)을 낳았다. 천순제가 즉위한 후 황태후가 되었으며, 손자 홍치제가 즉위하자 태황태후로 존숭되었다. 홍치 17년에 사망했으며, 효숙정순강의광렬보천승성황후의 시호가 올려졌다. 영종과 함께 유릉에 묻혔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명나라의 태황태후 - 성효소황후
    성효소황후는 홍희제의 황후이자 선덕제의 어머니로, 영락제의 며느리로서 시부모를 극진히 섬겼고, 태황태후로서 영종을 섭정하며 명나라 초기의 안정에 기여한 인물이다.
  • 명나라의 태황태후 - 효정순황후
    효정순황후는 명나라 성화제의 황후로, 성화제 즉위 후 황후로 책봉되었으나 실질적인 권한을 가지지 못했고 홍치제 즉위 후 황태후가 되었으며 정덕 13년에 사망했다.
  • 1430년 출생 - 조반니 벨리니
    조반니 벨리니는 베네치아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로, 유화 기법을 통해 색채와 빛의 조화를 이루었으며, 특히 '사크라 콘베르사치오네' 구도의 작품으로 베네치아 회화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
  • 1430년 출생 - 밀성군
    밀성군 이침은 조선 세종의 아들로 밀성군에 봉해졌으며, 오위도총부 도총관을 역임하고 공신에 책록되는 등 조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고, 그의 묘소는 하남시 향토유적으로 지정되었다.
  • 명나라의 추존황후 - 효원정황후
    효원정황후는 명나라 황족으로 만력제의 후궁으로 입궁하여 태창제의 태자비가 되었으나, 태창제 즉위 전에 사망 후 아들인 천계제에 의해 황후로 추존되었다.
  • 명나라의 추존황후 - 공양장황후
    공양장황후는 명나라 선덕제의 황후였으나, 아들을 낳지 못하고 병약하다는 이유로 폐위되어 도사가 되었다가 천순제 때 황후로 복위되었으며, 당시 여성에게 가해지던 사회적 압박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된다.
효숙황후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효숙황후의 초상화
작위황후 (추존)
별칭주귀비(周貴妃), 효숙주태후(孝肅周太后)
능묘유릉(裕陵)
생애
출생일1430년
출생지북경순천부(北京順天府) 창평(昌平)
사망일홍치 17년 3월(1504년)
사망지북경순천부(北京順天府) 자금성
가족 관계
배우자정통제(또는 천순제)
자녀성화제(成化帝) 주견심(朱見深), 중경대장공주(重慶大長公主), 주건택(Zhu Jianze), 숭간왕(Prince Jian of Chong)
아버지영국공(寧國公) 주능(周能)
어머니영국부인, 진씨(Lady Zhen)
형제자매경운후(慶雲侯) 주수(周壽), 장녕백(長寧伯) 주욱(周彧)
가문주(周)
가문 유형씨족
재위
황태후 재위 기간1464년 ~ 1487년
태황태후 재위 기간1487년 ~ 1504년
전임 황태후효공장황후(孝恭章皇后), 효장예황후(孝莊睿皇后)
후임 황태후효정순황후(孝貞純皇后)
전임 태황태후성효소황후(誠孝昭皇后)
후임 태황태후효정순황후(孝貞純皇后)
칭호
시호효숙정순강의광렬보천승성황후(孝肅貞順康懿光烈輔天承聖皇后)
왕조 계승
계승명나라 황실의 계승자
재위 유형재임
선임자효의태후
계승자왕황후
황태후로서의 계승
계승명나라 황실의 계승자
재위 유형재임
선임자효의태후
계승자왕황후

2. 생애

창평 출신으로, 아버지는 주능(周能)이고 어머니는 진씨(甄氏)이다.[1] 출생년도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영종이 사냥을 나갔다가 우연히 주씨의 집에 들렀는데, 온 가족이 겁에 질린 와중에도 주씨는 태연하게 행동하여 황제의 눈에 띄어 후궁이 되었다. 이후 황태후를 거쳐 홍치제가 즉위하자 태황태후로 추존되었으며, 홍치 17년(1504년)에 사망했다.

2. 1. 초기 생애

창평 출신으로, 아버지는 주능(周能)이고 어머니는 진씨(甄氏)이다.[1] 언제 태어났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처음에는 후궁 시녀로 일하다가 영종과 관계를 맺고 빈(嬪)이 되었다.

정통 12년(1447년) 아들 견심(見深, 훗날의 성화제)을 낳았다. 1449년 영종이 몽골에 사로잡히자, 손태후(孫太后)는 주씨의 장남을 황태자로 삼을 것을 명했다. 그러나 영종의 동생 주기유(朱祁鈺)이 황제가 되자 황태자 주견심은 폐위되었다. 1455년에는 주기진의 여섯째 아들 주건제(朱見濟)를 낳았으며, 천순 원년(1457년) 영종의 후궁이 되어 귀비(貴妃)에 봉해졌다.

2. 2. 귀비 책봉과 황태후

정통 12년(1447년) 아들 주견심(見深, 훗날의 성화제)을 낳았으며, 천순 원년(1457년) 영종의 후궁이 되어 귀비(貴妃)에 봉해졌다.[1] 이후 1464년 아들 주견심이 황위에 오르자 황태후에 책봉되었다.

아들 천순제가 즉위하자, 주씨와 천황후(錢皇后)는 모두 황태후의 품계를 받았다. 그러나 두 황태후가 있었기에 황태후 칭호를 누구에게 줄 것인가에 대한 갈등이 있었다. 내시 샤 시(夏時)는 주귀비를 기쁘게 하려고 주씨에게 황태후 칭호를 내리는 명령을 내렸다. 학자 이현(李賢)과 팽식(彭時)은 어느 황태후에게 칭호를 내릴 것인가를 두고 격렬하게 다투었지만, 천황후와 주씨는 서로 존중하는 태도를 보였다. 천순 원년 4월 23일, 주씨는 '성자인수황태후(聖慈仁壽皇太后)'라는 칭호와 상징물을 받았다.

천순제 재위 기간 동안 주씨는 매우 자비롭고 주변 사람들을 존중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천순제는 어머니를 매우 존경하여 감히 어머니의 명령에 거역하지 못했다.

명나라(영종 이전)에서는 황후만이 황제와 함께 매장될 수 있었다. 황제와 황후의 이름은 미리 정해졌고 어떤 상황에서도 변경할 수 없었다. 천황후가 죽자, 주씨는 천황후가 영릉(裕陵)에 있는 영종과 함께 매장되는 것을 막으려 했다. 주씨는 은밀히 영종의 능묘 설계를 변경하여 자신이 나중에 영종과 함께 매장될 수 있도록 했다. 천황후와 영종은 같은 능에 있었지만 다른 터널을 통해 들어가도록 되어 있었다.

영종은 천황후(銭皇后)와 사이에 아이를 낳지 못했고, 주귀비(周貴妃)와 사이에서 주견심(성화제(成化帝))을 낳자, 주귀비는 황태자의 생모로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영종이 죽은 후, 주귀비는 황태후 지위를 놓고 천황후와 대립하였고, 성화(成化) 4년(1468년)에 천황후가 죽자 영종의 유명(遺命)이었던 합장(合葬)에 철저히 반대했다. 결국 성화제가 주씨를 설득하여 합장은 하지 못했지만, 그 근처에 매장되었다.

천황후 사후에는 황태후로서 영향력을 행사했다. 성화제의 귀비인 만귀비(万貴妃)가 다른 비(妃)들에게 질투심을 느껴 황자들을 차례로 살해하자, 살아남은 주유당(朱祐樘, 홍치제(弘治帝))을 만귀비의 손아귀에서 지켜냈다.

2. 3. 태황태후

홍치제가 즉위하자 주황태후를 태황태후로 추존하고 왕황후를 황태후로 추봉했다.[1] 홍치제는 주씨에게 매우 공경하고 효성스러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홍치 11년 겨울, 청녕궁(清寧宮)이 파괴되어 주씨는 인수궁(仁壽宮)으로 거처를 옮겼다.

홍치 17년(1504년)에 사망했다.

3. 사후

효숙황후 주씨가 1504년에 사망하자, 명나라 조정 신료들은 주씨가 황제와 황후만이 받을 수 있는 사당 제사를 받아야 하는지에 대해 논쟁을 벌였다. 유훤(劉悰), 사건(謝遷), 이동양 등의 학자들은 주씨가 생전에 황후가 아니었으므로 사당 제사를 받거나 황제와 함께 묻히는 것은 부당하다고 반대했다.[1] 그러나 주씨는 사후에 황후 묘호를 받았고, 자신의 뜻에 따라 영종과 함께 묻혔다. 주씨가 매장된 후, 권황후(錢皇后)의 능이 영종의 능과 분리되어 있다는 것이 발견되었으나, 권황후는 영종과 함께 다시 매장되지 않았다.[1] 주씨 사후, 후대 명나라 황제의 생모들은 황후 칭호를 받지 못했더라도 남편과 함께 매장되었다.[1]

홍치제는 주씨에게 효숙정순강의광렬보천승성태황태후(孝肅貞順康懿光烈輔天承聖太皇太后)라는 시호를 추존했다.[1]

가정제 때, 주씨에게 다른 시호가 추증되었다. 그녀의 최종 시호는 효숙정순강의광렬보천승성황후(孝肅貞順康懿光烈輔天承聖皇后)였다.[1]

4. 존호, 시호, 능호

1487년(성화 23년) 명나라황태후에게 '''성자인수황태후'''(聖慈仁壽皇太后)라는 휘호가 올려졌다. 1504년(홍치 원년)에는 태황태후로 격상되어 '''성자인수태황태후'''(聖慈仁壽太皇太后)로 다시 올려졌다.

태황태후 주씨가 사망한 이후인 1504년(홍치 17년)에 '''효숙정순강의광렬보천승성예황후'''(孝肅貞順康懿光烈輔天承聖睿皇后)라는 시호가 올려졌으나, 가정제 때 정후(첫번째 부인)에게만 황제의 시호를 사용하도록 하여, '''효숙정순강의광렬보천승성태황태후'''(孝肅貞順康懿光烈輔天承聖太皇太后)로 잠시 시호가 올려졌으나, 다시 개시하여 '''효숙정순강의광렬보천승성황후'''(孝肅貞順康懿光烈輔天承聖皇后)로 최종적으로 올려졌다.

능호는 유릉(裕陵)이고, 태묘에는 부묘되지 못했다[2].

5. 가족 관계

관계이름
아버지주능(周能)[1]
남편영종
자녀이름
장녀숭경공주(崇慶公主)
장남주건심(朱見深)
6남주견제(朱見濟)


6. 기타

효숙황후는 장평현의 가난한 농부 주능의 딸로, 영종이 사냥을 나갔다가 우연히 그녀의 집에 들렀을 때 황제의 눈에 띄어 궁궐에 들어갔다.[1] 그녀는 숭경공주, 천순제, 주견제를 낳았다. 손태후(孫太后)의 명으로 천순제가 황태자가 되었으나, 주기유(朱祁鈺)가 황제가 되면서 폐위되기도 했다. 주기진이 복위한 후 귀비가 되었고, 천순제가 즉위하자 '성자인수황태후(聖慈仁壽皇太后)'라는 칭호를 받으며 황태후가 되었다.

천순제 재위 기간 동안 주씨는 자비롭고 주변 사람들을 존중하는 인물로 알려졌으며, 천순제는 어머니를 매우 존경했다. 홍치제가 즉위한 후에는 태황태후로 추존되었으며, 홍치제 역시 그녀에게 효성스러웠다. 홍치 11년 겨울, 청녕궁이 파괴되어 헌수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6. 1. 대중문화

배우작품배역
허사이페이(何賽飛)후궁·제왕의 여자주태후(周太后)
생랑희(盛朗熙)여의전주귀비(周貴妃)
꾸니쩌링(曲尼次仁)명란전주귀비(周貴妃)
방샤올리(方曉莉)명탐정주태후(周太后)


참조

[1] 서적 History of Ming, vol 300. Biographies no. 188, Consort kins' #출판사 정보 없음
[2] 서적 明史 卷114 列傳 卷1 - 孝肅周太后 #출판사 정보 없음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