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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난도 6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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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페르난도 6세는 1746년부터 1759년까지 스페인 국왕으로 재위했다. 펠리페 5세와 사보이아의 마리아 루이사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우울하고 수줍음이 많은 성격이었으며, 사격과 음악을 즐겼다. 즉위 후, 그는 엔세나다 후작과 카르바할 이 랑카스터와 같은 유능한 신하들을 등용하여 내정을 개혁하고 국력을 증강했으며, 중립 외교를 통해 영국, 프랑스, 포르투갈과의 관계를 개선했다. 1729년 포르투갈의 바르바라와 결혼했으나 자녀는 없었으며, 말년에는 정신 질환을 앓다 1759년 사망했고, 카를로스 3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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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난도 6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루이 미셸 반 로의 페르난도 6세 초상화, 1746-59년경
루이 미셸 반 로의 페르난도 6세 초상화, 1746-59년경
왕위스페인 국왕
통치 기간1746년 7월 9일 – 1759년 8월 10일
이전 통치자펠리페 5세
다음 통치자카를로스 3세
섭정비야리아스 후작
호세 데 카르바할
알바 공작
리카르도 월
배우자바르바라 데 브라간사 (1729년 결혼, 1758년 사망)
전체 이름(Fernando de Borbón y Saboya)
왕가부르봉 가문
아버지펠리페 5세
어머니마리아 루이사 디 사보이아
출생일1713년 9월 23일
출생지마드리드 왕궁, 마드리드, 스페인
사망일1759년 8월 10일
사망지비야비시오사 데 오돈, 마드리드, 스페인
매장지살레사스 레알레스 수도원
서명
종교가톨릭 교회
별칭(신중한 자)

2. 생애

페르난도 6세는 스페인의 국왕 펠리페 5세와 그의 첫 번째 왕비 사보이아의 마리아 루이사 사이에서 태어난 막내아들이다. 그는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가 야심만만한 엘리자베트 파르네세와 재혼하면서 외로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의 위로는 세 명의 형이 있었으나, 두 명은 일찍 사망했고 맏형 루이스 1세1724년 아버지 펠리페 5세의 퇴위로 잠시 왕위에 올랐으나 그 해에 천연두로 급사했다. 이로 인해 페르난도는 아스투리아스 공이 되었지만, 아버지 펠리페 5세가 계모 엘리자베트의 영향으로 다시 복위하여 1746년까지 재위했다. 페르난도는 아버지의 치세 동안 정치에 참여하지 못했다.[9]

1729년 그는 포르투갈의 공주 바르바라 데 브라간사와 결혼했으나 둘 사이에 자녀는 없었다.[10][9] 페르난도는 천성적으로 우울하고 수줍음이 많았으며, 평생 우울증에 시달렸다. 이는 아버지 펠리페 5세와 마찬가지였다.[10][1] 사격과 음악이 그의 유일한 즐거움이었으며, 유명 가수 파리넬리를 후원하며 우울함을 달랬다.[1] 그는 아내 바르바라에게 정신적으로 크게 의존했으며, 이는 그의 말년에 큰 영향을 미쳤다.

1746년 아버지 펠리페 5세가 사망하자 페르난도가 왕위를 계승했다. 즉위 후 페르난도 6세는 계모 엘리자베트 파르네세와 그녀의 이탈리아 측근 세력을 배제하고, 엔세나다 후작, 호세 데 카르바할 이 랑카스터 등 유능한 신하들을 등용하여 국정을 운영했다. 그의 통치 기간 스페인은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이후 프랑스영국 사이에서 신중한 중립 외교 정책을 유지하며 국제 분쟁에 휘말리는 것을 피했다.[1][9] 또한 재정 개혁, 해군력 증강, 사회 기반 시설 건설 등 내정 개혁과 왕립 산 페르난도 미술 아카데미 창설 등 문화 진흥에도 힘썼다.[9] 1753년에는 교황 베네딕토 14세와 콘코르다토를 체결하여 스페인 왕실의 교회에 대한 영향력을 회복하는 중요한 성과를 거두었다.[9]

1758년 왕비 바르바라가 사망하자 페르난도의 정신 건강은 급격히 악화되었다. 깊은 슬픔과 우울증에 빠진 그는 외부와의 접촉을 끊고 Castillo de Villaviciosa de Odón|빌라비시오사 데 오돈 성es에 은둔하며 기본적인 일상생활마저 거부하는 등 불안정한 상태를 보였다.[10][1][9] 이 기간은 스페인 역사에서 '왕 없는 해'로 알려져 있다. 결국 그는 아내가 사망한 지 약 1년 후인 1759년 8월 10일에 사망했다. 그의 시신은 마드리드의 Convento de las Salesas Reales|살레사스 레알레 수도원es에 안장되었다.[9]

페르난도 6세에게 자녀가 없었기 때문에, 왕위는 당시 나폴리시칠리아의 왕이었던 그의 이복동생 카를로스에게 돌아갔다.[9]

2. 1. 어린 시절

10세의 인판테, 장 랑 작


페르난도는 마드리드 왕궁에서 태어났으며, 펠리페 5세가 첫 번째 부인인 사보이아의 마리아 루이사와의 사이에서 낳은 네 아들 중 막내였다. 그의 어린 시절은 슬프고 외로웠다. 태어난 지 5개월 만에 어머니가 결핵으로 세상을 떠났고, 7개월 후 아버지 펠리페 5세는 야심차고 지배적인 성격의 엘리자베트 파르네세와 재혼했다. 계모 엘리자베트는 자신의 자녀 외에는 애정을 주지 않았으며, 페르난도와 그의 이복형제들을 자신의 자녀들이 권력을 잡는 데 방해가 되는 존재로 여겼다. 아버지 펠리페 5세가 건강 염려증을 앓으면서 엘리자베트는 궁정의 실권을 장악했다.[1]

페르난도의 형제들 중 둘째 펠리페는 그가 태어나기 전에 사망했고, 셋째 펠리페 페테르는 페르난도가 6살 때 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페르난도가 10살이 되던 해에는 맏형 루이스 1세마저 천연두로 사망했다. 루이스 1세는 아버지 펠리페 5세가 1724년 퇴위한 후 왕위를 이어받았으나, 즉위 7개월 만에 17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루이스 1세가 사망하자 페르난도는 아스투리아스 공이 되었지만, 계모 엘리자베트의 주장으로 아버지 펠리페 5세가 다시 왕위에 복귀했다.

페르난도는 다른 인판테(왕자) 형제들과 함께 귀족 조반니 안토니오 메드라노에게 교육을 받았다.[2] 그는 본래 우울하고 수줍음이 많았으며, 자신의 능력에 대해 자신감이 부족했다. 한번은 사격 솜씨를 칭찬받자 "제가 달리 잘하는 것이 없으니 (사격이라도 잘해야) 어렵지 않겠습니까?"라고 답했을 정도였다. 사격과 음악은 그의 유일한 즐거움이었으며, 특히 유명한 카스트라토 가수 파리넬리는 그의 우울함을 달래주는 존재였기에 페르난도는 파리넬리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었다.[1]

2. 2. 결혼

페르난도는 1729년 1월 20일에 포르투갈주앙 5세와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안나의 딸인 포르투갈의 인판타 바르바라와 결혼했다.[1] 당시 페르난도는 열여섯 살이었고, 바르바라는 열여덟 살이었다.[1]

두 사람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다.[10][9] 바르바라는 외모가 뛰어나거나 매력적인 편은 아니었지만, 페르난도는 아내에게 정신적으로 크게 의존하는 모습을 보였다.[10] 1758년 바르바라가 먼저 세상을 떠나자[9], 페르난도의 우울증은 극도로 심해져 빌라비시오사 데 오돈 성에 은둔하며 외부와의 접촉을 끊었다.[10][9] 그는 식사조차 제대로 하지 않았고, 잠을 자거나 옷을 갈아입는 기본적인 일상생활마저 거부했으며, 심지어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10]

2. 3. 즉위와 통치

아버지 펠리페 5세1724년 장남 루이스 1세에게 잠시 왕위를 넘겼으나, 루이스 1세가 그 해에 갑자기 사망하면서 다시 복위하여 1746년까지 재위했다. 페르난도의 다른 형들도 일찍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펠리페 5세가 사망하자 페르난도가 왕위를 계승하였다.[9] 그는 아버지 펠리페 5세처럼 평생 우울증에 시달렸으며, 이 때문에 연극이나 오페라 같은 오락거리에 몰두하는 경향이 있었다.[10]

페르난도 6세가 1746년 왕위에 올랐을 때, 스페인은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 참여하고 있었으나 이 전쟁은 스페인에게 별다른 이득을 가져다주지 못했다. 그는 통치를 시작하며 계모 엘리자베타 파르네세와 그녀의 이탈리아 출신 측근들의 영향력을 배제하였다. 국왕으로서 페르난도 6세는 프랑스 왕국그레이트브리튼 왕국 사이의 갈등에서 일관되게 중립 정책을 추구했으며, 어느 한쪽 편을 들라는 유혹적인 제안들을 거절했다.[1]

그의 통치 기간에는 친프랑스 성향의 엔세나다 후작과 친영국 성향의 호세 데 카르바할 이 랑카스터가 주요 인물로 활동했다. 두 사람 사이의 정치적 다툼은 1754년 카르바할이 사망하고 엔세나다가 실각하면서 끝났고, 이후 아일랜드 출신의 리카르도 월이 가장 영향력 있는 고문이 되었다.[9] 페르난도 6세는 엔세나다 후작과 카르바할 같은 유능한 신하들을 통해 내정 개혁과 문화 진흥에도 힘썼다. (내정 개혁, 문화 정책 참조)

1751년, 페르난도 6세는 교황 클레멘스 12세1738년에 내린 금지령(In eminenti apostolatus)에 따라 스페인프리메이슨 활동을 금지시켰다. 하지만 그의 후임자인 카를로스 3세 시대에는 프리메이슨 조직이 다시 스페인에서 활동하게 된다.[3]

페르난도 6세는 1729년 포르투갈의 공주 바르바라 데 브라간사와 결혼했지만 둘 사이에 자녀는 없었다. 그는 아내 바르바라에게 정신적으로 크게 의존했으며, 1758년 바르바라가 먼저 세상을 떠나자 그의 우울증은 극도로 심해졌다.[10][9] 그는 Castillo de Villaviciosa de Odón|빌라비시오사 데 오돈 성es에 은둔하며 기본적인 식사 외에는 잠도 자지 않고 옷도 갈아입지 않는 등 외부와 단절된 생활을 하다가[10][9] 이듬해 사망했다. 그의 시신은 마드리드의 Convento de las Salesas Reales|살레사스 레알레 수도원es에 안장되었다.

페르난도 6세에게 자녀가 없었기 때문에, 왕위는 당시 나폴리시칠리아의 왕이었던 이복동생 카를로스에게 돌아갔다.[9]

2. 3. 1. 내정 개혁

스페인 국왕 페르난도 6세


페르난도 6세는 즉위 후 엔세나다 후작이나 호세 데 카르바할 이 랑카스터와 같은 유능한 인물들을 중용하여 내정 개혁에 힘썼다.[9] 특히 재무부, 해군 및 인디아스 장관이었던 엔세나다 후작은 국가 현대화를 목표로 다양한 개혁을 추진하였다. 이는 스페인이 프랑스영국과 같은 강대국과 동등한 위치를 확보하고, 지브롤터 문제 등에서 유리한 입지를 차지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재정 및 경제 개혁
은화: 페르난도 6세 재위 기간 동안 주조된 8 레알 누에바에스파냐


엔세나다 후작은 1749년 새로운 재무 모델을 제안하였다. 그는 전통적인 세금 대신 각 납세자의 재산 소유와 경제적 능력을 평가하여 부과하는 특별세인 지적도(Cadastre) 도입을 추진하였다. 또한 코르테스와 군대에 대한 국가 보조금 삭감도 제안하였으나, 이러한 개혁안은 귀족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결국 폐기되었다.

그러나 1752년에는 지로 레알 은행(Banco del Giro Real)을 설립하여 중요한 성과를 거두었다. 이 은행은 스페인 외부의 공공 및 민간 자금 이전을 관리하고 모든 외국환을 왕실 재무부로 집중시켜 국가 재정을 강화하는 데 기여하였다. 이는 훗날 카를로스 3세 치세에 설립된 스페인 은행의 전신으로 여겨진다.

아메리카 대륙과의 상업 분야에서도 개혁이 이루어졌다. 기존의 인디아스 독점 체제를 완화하고 식민지 무역의 비효율성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페르난도 6세는 대규모 선단 대신 개별적으로 등록된 선박이 아메리카 대륙과 자유롭게 무역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새로운 시스템을 선호하였다. 이 조치는 국가 수입을 증대시키고 밀무역과 같은 부정부패를 감소시키는 효과를 가져왔으나, 기존의 독점적 이익을 누리던 상인들 사이에서는 많은 반발을 사기도 하였다.
군사력 강화엔세나다 후작은 강력한 해군력이 해외 제국 유지와 국제 사회에서의 발언권 강화에 필수적이라고 판단하였다. 이에 따라 해군 예산을 증액하고, 카디스, 페롤, 카르타헤나, 아바나 등 주요 항구의 조선소 능력을 확장하는 데 주력하였다. 이는 아버지 펠리페 5세 시대부터 시작된 해군력 증강 정책을 계승하고 더욱 확대한 것이었다.
종교 정책펠리페 5세 시기에는 교황청이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6세를 스페인 국왕으로 인정했던 문제로 인해 관계가 긴장 상태였다. 페르난도 6세는 정치적, 재정적 이익을 추구하는 왕권 강화 정책을 유지하며 교회와의 관계 개선을 모색하였다. 결정적인 성과는 1753년 교황 베네딕토 14세와 체결한 콘코르다토(종교 협약)였다. 이를 통해 스페인 왕실은 카를로스 2세 시대에 잃었던 주교 임명권과 성직자에 대한 징세권 등 보편적 후원권을 확보하게 되었고, 이는 왕권 강화와 재정 확보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9]
사회 및 문화 진흥페르난도 6세는 도로, 교량, 조선소 건설 등 사회 기반 시설 확충에도 힘썼다. 문화적인 측면에서는 1752년 왕립 산 페르난도 미술 아카데미 창설을 지원하고 천문대를 설치하는 등 학술 및 예술 진흥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그의 궁정에서는 왕비 바르바라 데 브라간사의 음악 교사였던 유명 작곡가 도메니코 스카를라티가 555곡에 달하는 하프시코드 소나타를 작곡하기도 하였다.
정치적 안정과 중립 외교페르난도 6세의 치세 동안 내정에서는 친프랑스파인 엔세나다 후작과 친영국파인 카르바할 사이에 격렬한 정치적 대립이 있었다. 이러한 갈등은 1754년 카르바할이 사망하고 엔세나다가 실각할 때까지 이어졌으나, 페르난도 6세는 중립적인 입장을 견지하며 국내 정치의 안정을 유지하려 노력하였다.[9] 후임 수상으로는 아일랜드 출신으로 친영국 성향을 가진 리카르도 발이 임명되었으나, 페르난도 6세는 그의 치세 동안 계속 중립 노선을 유지했으며, 유럽 대륙을 휩쓴 7년 전쟁에도 참전하지 않았다.

2. 3. 2. 문화 정책

페르난도 6세는 문화 진흥에도 관심을 기울여 스페인의 국력 증강에 힘썼다.[9] 1752년에는 산 페르난도 왕립 미술 아카데미의 창설을 지원했으며, 천문대 설치 등에도 노력을 기울였다.[9] 또한, 왕비 바르바라 데 브라간사의 음악 교사였던 이탈리아 출신의 유명 작곡가 도메니코 스카를라티가 마드리드 궁정에서 활동하며 555곡에 달하는 하프시코드 소나타를 작곡하는 등 음악 분야에서도 주목할 만한 성과가 있었다.

2. 4. 중립 외교

페르난도 6세는 1746년 왕위에 올랐을 때, 스페인이 거의 이득을 보지 못한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 휘말려 있었다. 그는 통치를 시작하며 계모와 그녀의 이탈리아 출신 측근들의 영향력을 배제했다. 그의 외교 정책의 핵심은 프랑스 왕국그레이트브리튼 왕국 사이의 갈등에서 엄격한 중립을 지키는 것이었다. 그는 어느 한쪽 편에 서서 다른 나라와 전쟁을 벌이자는 유혹적인 제안들을 모두 거절했다.[1]

그의 치세 동안 궁정 내에서는 두 주요 파벌이 대립했다. 제논 데 소모데비야, 엔세나다 후작은 친프랑스 정책을 주장했고, 호세 데 카르바할 이 란카스터는 그레이트브리튼과의 동맹을 지지했다. 이 둘 사이의 경쟁은 1754년 카르바할이 사망하고 엔세나다가 정치적으로 몰락하면서 끝났다. 이후 아일랜드 출신의 리카르도 월이 국왕의 가장 강력한 조언자가 되었다. 월은 출신 배경상 친영국 성향이었지만, 페르난도 6세의 중립 정책을 이어받아 7년 전쟁에도 참전하지 않았다.[9] 이러한 중립 정책 속에서도 스페인은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7년 전쟁 기간 동안 군사력을 꾸준히 강화했다.

당시 스페인의 주요 외교 과제 중 하나는 포르투갈과의 관계였는데, 특히 콜로니아 델 사크라멘토를 둘러싼 갈등이 심각했다. 이곳은 영국 상인들이 라플라타 강 유역으로 밀수품을 들여오는 통로로 이용되고 있었다. 1750년, 호세 데 카르바할 이 란카스터의 중재로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마드리드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에 따라 포르투갈은 사크라멘토 식민지와 라플라타 강 자유 항행권을 포기하는 대신, 스페인으로부터 브라질 국경의 두 지역(아마존강 유역과 남부 지역)을 할양받았다. 남부 지역에는 30개의 예수회 과라니족 정착촌 중 7개가 포함되어 있었다. 스페인이 이 지역의 예수회 선교사들을 추방하려 하자, 이에 반발한 과라니족과의 무력 충돌, 즉 과라니 전쟁이 발생하여 11년간 지속되었다. 이 조약을 둘러싼 논란은 스페인 궁정에도 영향을 미쳐, 조약에 반대하며 예수회를 옹호했던 엔세나다 후작과 국왕의 고해사제 라바고 신부가 해임되는 결과를 낳았다.

한편, 페르난도 6세는 1753년 로마 교황 베네딕토 14세와 콘코르다토(정교 협약)를 체결하여, 카를로스 2세 시대에 상실했던 스페인 내 주교 임명권과 성직자에 대한 과세권을 되찾는 성과를 거두었다.[9]

2. 5. 말년과 죽음

페르난도 6세는 통치 마지막 해에 정신적 능력을 빠르게 잃어갔다. 그는 평생 우울증에 시달렸는데[10], 1758년 8월 아내 바르바라가 사망하자 증상이 극도로 심해졌다. 페르난도는 바르바라에게 정신적으로 크게 의존하고 있었기에[10], 아내의 죽음은 그의 마음을 무너뜨렸다.[1]

그는 깊은 슬픔과 우울증에 빠져 은둔 생활을 시작했으며[10], 기본적인 식사 외에는 잠도 자지 않고 옷도 갈아입지 않았으며, 수염도 깎지 않은 채 밤에는 잠옷 차림으로 공원을 배회하는 등 기행을 보였다.[10][1] 심지어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다.[10] 결국 그는 1759년 8월 10일 사망할 때까지 빌라비시오사 데 오돈 성에 사실상 유폐된 상태로 지냈다.[9] 바르바라가 사망한 1758년 8월부터 페르난도 6세가 사망한 1759년 8월까지 약 1년간은 스페인 역사에서 국왕의 통치가 부재했던 '왕 없는 해'로 알려져 있다.

페르난도 6세의 정신 질환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다. 일부는 그가 아내의 죽음으로 인한 극심한 우울증을 겪었다고 주장한다.[1] 다른 의견으로는 무관심, 충동성, 판단력 상실, 그리고 오른쪽 전두엽 이상을 시사하는 간질 발작과 같은 증상을 동반하는 급속도로 진행되는 임상 증후군을 앓았다는 주장도 있다.[4]

페르난도 6세와 바르바라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기 때문에[10], 그의 사후 왕위는 이복동생인 나폴리 왕이자 시칠리아 왕이었던 카를로스 3세가 계승했다.[9] 페르난도 6세는 마드리드의 살레사스 레알레 수도원에 매장되었다.[9]

3. 유산과 평가

역사학자 스탠리 G. 페인은 페르난도 6세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페르난도 6세가 통치자로서 가진 큰 장점은 스페인을 평화롭게 유지하고 유럽의 분쟁에 더 이상 휘말리지 않게 한 것이다."라고 언급했다. 하지만 그는 또한 "결국 그의 아버지처럼 정신 질환에 시달린 페르난도 6세의 마지막 5년은 무능과 무활동의 시기였다."라고 지적했다.[5]

3. 1. 대중문화

페르난도 6세의 허구적 버전은 2011년 모험 영화 ''캐리비안의 해적: 낯선 조류''에 등장한다. 영화에서 페르난도(배우 세바스찬 아르메스토)는 젊음의 샘의 발견에 대해 알게 된 후, 자신의 가장 신뢰하는 요원인 "스페인 사람"을 보내 샘을 찾아 파괴하도록 지시한다. 이는 그가 샘을 하느님의 관점에서 혐오스러운 존재로 여겼기 때문이다. 또한 영화 속 설정상 그의 거처는 실제 스페인의 수도인 마드리드가 아닌 카디스에 위치해 있다.

4. 문장

4. 1. 인판테 시절

4. 2. 아스투리아스 공 시절

4. 3. 스페인 국왕 시절

참조

[1] EB1911 Ferdinand VI. of Spain
[2] 간행물 Entre Sevilla y Napoles: Juan Antonio Medrano, Ferdinando Sanfelice y los Borbones de España de Felipe V a Carlos III. https://dialnet.unir[...] 2005
[3] 서적 A History of Spain and Portugal University of Wisconsin Press 1973
[4] 웹사이트 Estudio de la enfermedad del rey Fernando VI http://digibuo.uniov[...]
[5] 문서 Payne, pp. 359-360
[6] 서적 Símbolos de España Madrid: Centro de Estudios Políticos y Constitucionales
[7] 뉴스 Las armas del Príncipe de Asturias - ABC http://www.abc.es/in[...]
[8] 웹사이트 Fernando VI, Rey de España (1713-1759) http://encuadernacio[...] Royal Library of Spain 2013-03-18
[9] 웹사이트 Ferdinand VI, King of Spain https://www.britanni[...] Encyclopaedia Britannica 2019-01-03
[10] 서적 권력과 광기 말글빛냄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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