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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이스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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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포이스 왕국은 현재의 웨일스 지역에 존재했던 중세 웨일스 왕국이다. 이름은 라틴어 '시골'에서 유래되었으며, 로마 시대에는 이 지역이 주로 편성되었고, 비로코니움 코르노비오룸이 수도였다. 초기에는 게르테리온 왕조가 통치했으며, 6세기 유스티니아누스 역병 이후 수도를 펭건으로 옮겼을 가능성이 있다. 7세기에는 머시아와의 분할 점령, 8세기에는 잉글랜드에 대한 군사 작전을 펼쳤다. 9세기에는 기네드 왕국과 통합되었고, 로드리 대왕의 후손들이 웨일스 대부분을 통치했다. 이후 하웰 다의 통치, 바이킹의 침략, 잉글랜드의 노르만 침공을 겪었다. 12세기에는 분열되었고, 13세기에는 기네드의 영향력 아래 놓였다. 1282년 잉글랜드의 침공으로 멸망했지만, 포이스라는 이름은 197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다시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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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이스 왕국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개요
공식 명칭포이스 왕국
현지 명칭웨일스어: Teyrnas Powys
라틴어Regnum Poysiae
시대중세
정치 체제군주제
존속 기간5세기 – 1160년
위치[[파일:Medieval_Wales.JPG|중세 웨일스 왕국 지도]]
수도
언어 및 문화
공용어웨일스어
종교켈트 기독교
통치 및 지도자
역대 지도자브로흐웰 어스기스록 (6세기)
셀러브 압 커난 (사망: 616년)
엘리세드 압 구일록 (사망: 755년)
블레던 압 컨번 (1063년–1075년)
마레두드 압 블레던 (1116년–1132년)
맏고 압 마레디드 (1132년–1160년)
국기 및 문장
포이스의 깃발
마스라발 가문의 포이스 깃발
포이스 문장
포이스 문장
통화
통화케이니옥 cyfreith & 케이니옥 cwta
국가
국가언베나에스 브러데인 (브리튼의 군주)
역사적 맥락
시작 사건브리튼의 로마 통치 종료 (5세기)
종료 사건분할 (1160년, 파독과 웬원원으로 분할)
이전후로마 브리튼
이후포이스 웬원원
포이스 파독

2. 명칭

포이스(Powys)라는 이름은 라틴어 ''pagus'' ('시골')와 ''pagenses'' ('시골 거주자')에서 유래된 것으로 여겨지며, 이는 프랑스어 "pays"와 영어 "peasant"의 기원이기도 하다.[4]

3. 역사

초기 중세 시대 동안 포위스는 게르테리온 왕조가 통치했는데, 이 가문은 보티건과 세비라의 후손이라고 주장했다.[5][6][7] 6세기까지 비로코니움 코르노비오룸이 도시 기능을 유지하며 포위스의 수도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549년 유스티니아누스 역병이 웨일스를 덮쳐 인구가 급감했으나, 잉글랜드는 상대적으로 피해가 적었다. 브로크웰 이스기스로그 왕은 수도를 Caer Guricon에서 Pengwern으로 옮겼을 것으로 추정되나, 펭귄의 정확한 위치는 알려져 있지 않다.

616년, 노섬브리아의 애설프리드 왕은 체스터 전투에서 포위스 군대를 격파하고 뱅고어-온-디 수도승들을 학살했다.[8] 베다는 애설프리드가 수도승들을 학살한 이유를 "그들이 우리에 대항하여 싸우고, 기도함으로써 우리를 반대하기 때문"이라고 기록했다. 642년 마에스 코고위 전투에 포위스 군대가 참전했을 가능성이 있다.

7세기 중엽 포위스는 잉글랜드에 대한 성공적인 군사 작전을 펼쳤다. 717년, 엘리세드 압 구일로그 왕은 수도를 바르네이 강 계곡의 Mathrafal 성으로 이전했다. 머시아의 애설발드 왕은 왓의 둑을 건설하여 포위스와의 경계를 설정했으나, 오스웨스트리(웨일스어: ''Croesoswallt'')를 포위스에 넘겨주는 등 웨일스 측에 유리한 영토 조정이 이루어졌다. 머시아의 오파 왕은 오파의 둑을 건설하여 경계를 더욱 강화했다.

로드리 마우르(로드리 대왕)는 878년 사망할 때까지 오늘날 웨일스의 대부분을 통치했다. 그의 아들들은 웨일스 역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할 왕조를 세웠다. 머프린은 포위스를, 아나라우드 압 로드리와 카드엘 압 로드리는 각각 기네드에 아베르프라우 왕조를, 데네부르 가문을 세웠다.[9][10]

942년 데헤우바르스의 하웰 다(로드리의 손자)는 기네드와 포위스를 점령하고,[11] 웨일스 법을 개혁했다(''키프라이트 하웰''). 945년 화이트랜드에서 의회를 열어 법전을 성문화했다. 하웰의 통치는 평화로웠고, 후세에 ''훌륭한'' (Hywel Dda|하웰 다cy)이라고 불렸다.

마레두드 압 오와인은 할아버지 하웰 다의 왕국을 재건하고, 986년까지 데헤우바르스와 포위스의 왕이자 기네드를 점령했다. 999년 마레두드가 죽자 포위스는 리윌린 압 세이실에게 넘어갔고, 데헤우바르스는 분할되었다. 리윌린 압 세이실의 아들 그리피드는 모든 웨일스를 통일하고 잉글랜드 정치에도 영향을 미쳤다.

마스라팔 왕조는 앵하레드 공주와 친빈 압 구에르스탄의 결혼으로 시작되었다. 앵하레드의 아들 블레드린 압 친빈은 1063년 포위스를 상속받고, 하웰 다의 법전을 개정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블레드린 압 친빈과 그의 형제는 노르만 침공에 맞서 앵글로색슨족과 함께 싸웠다. 1075년 블레드린 사후, 포위스는 그의 아들과 손자에게 넘어갔고, 블레드린의 아들인 이오르워스, 카드와간, 마레두드 사이에서 분할되었다. 정복왕 윌리엄은 노르만 남작들이 웨일스 변경 지역을 개척하도록 했다. 1090년까지 포위스 대부분이 노르만족의 손에 들어갔으나, 블레드린 압 친빈의 세 아들이 저항하여 1096년까지 대부분을 되찾았다.

1160년, 마도그 압 마레두드 사후 포이스 왕국은 르하에드르 강을 기준으로 분할되었다.[1] 르하에드르 강 북쪽은 오와인 브로긴틴, 그리피드 마엘로르, 오와인 피찬에게, 남쪽은 오와인 키페일리오그에게, 모흐난트는 요르워스 고흐 압 마레두드에게 할당되었다.[1] 1166년, 오와인 키페일리오그와 오와인 피찬은 요르워스 고흐를 공격하여 모흐난트를 분할했다.[1] 세기말, 왕국들은 포이스 파도그와 포이스 웨네윈윈으로 나뉘었다.[1]

13세기, 기네드의 르웰린 압 그리피드가 웨일스 공으로 인정받으면서 포이스는 기네드의 영향력 아래 놓였다.[3] 1282년,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1세의 침공으로 기네드가 멸망하고, 포이스 파도그의 일부가 변경 영주에게 넘어갔다.[6]

1282년 잉글랜드 침공 이후, 포이스 웬윈윈은 항복과 재승인을 통해 변경 영주 지위를 유지했다. 1535-1542년 웨일스 법(Laws in Wales Acts)으로 변경 영주들이 폐지되면서, 포이스 지역은 덴비셔와 몽고메리셔로 재편되었다.[1] 1974년, 몽고메리셔, 브레크노크셔, 래드노셔를 통합한 포이스 주(County of Powys)가 신설되었으나,[2] 역사적 포이스 왕국의 영역과는 차이가 있다.[2]

3. 1. 초기 중세 시대

초기 중세 시대 동안 포이스는 보티건의 후손이라고 알려진 게르테리온 왕조가 통치했다.[5][6][7] 비로코니움 코르노비오룸(현재의 록스터)은 6세기까지 도시 기능을 유지하며 포이스의 수도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549년, 유스티니아누스 역병이 웨일스 지역을 강타하여 인구가 급감했다. 반면 잉글랜드는 상대적으로 피해가 적었다. 인구 감소와 앵글로색슨족의 침입이 잦아지자 브로크웰 이스기스로그 왕은 수도를 Caer Guricon에서 Pengwern으로 옮겼을 것으로 추정된다. 펭귄의 정확한 위치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슈루즈베리나 The Wrekin의 언덕 요새인 Din Gwrygon일 가능성이 제기된다.

616년, 노섬브리아의 애설프리드 왕은 체스터 전투에서 포이스 군대를 격파하고 뱅고어-온-디 수도원의 수도승들을 학살했다.[8] 베다는 애설프리드가 수도승들을 학살한 이유를 "그들이 우리에 대항하여 싸우고, 기도함으로써 우리를 반대하기 때문"이라고 기록했다.

642년 마에스 코고위 전투에 포이스 군대가 참전했을 가능성이 있다. 9세기 englyn-시 모음집인 ''Canu Heledd''에 따르면, 펭귄 지역은 머시아와 포이스에 의해 분할 점령되었으나, 이는 9세기 포이스의 정치적 상황을 반영한 기록일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

7세기 중엽 포이스는 잉글랜드에 대한 성공적인 군사 작전을 펼쳤다. 엘리세드 압 구일로그 왕 시대인 717년, 수도를 바르네이 강 계곡의 Mathrafal 성으로 이전했다. 머시아의 애설발드 왕은 왓의 둑을 건설하여 포이스와의 경계를 설정했으나, 오스웨스트리(웨일스어: ''Croesoswallt'')를 포이스에 넘겨주는 등 웨일스 측에 유리한 영토 조정이 이루어졌다. 머시아의 오파 왕은 오파의 둑을 건설하여 경계를 더욱 강화했으나, 웨일스 측에 유리한 조정이 계속되었다는 분석도 있다.

3. 2. 로드리, 하웰, 그리피드 시대

로드리 마우르(로드리 대왕)는 878년에 사망할 때까지 오늘날 웨일스의 대부분을 통치했다. 그의 아들들은 차례로 웨일스 역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할 왕조를 세웠고, 각 왕조는 로드리의 후손이라고 주장했다. 머프린은 포위스를 상속받았고, 그의 형제인 아나라우드 압 로드리와 카드엘 압 로드리는 각각 기네드에 아베르프라우 왕조를, 데네부르 가문을 세웠다.[9][10]

942년 데헤우바르스의 하웰 다(로드리의 손자이자 카드엘의 아들)는 사촌 이달왈 포엘이 죽자 기네드를 점령했다. 그는 같은 시기에 리윌린 압 메르프린으로부터 포위스를 빼앗았고[11] 그들의 자녀들 사이의 왕조적 결혼을 주선했다. 하웰은 920년에 그의 모계와 부계 상속으로 데헤우바르스를 설립했고, 앵글로색슨족의 왕 에텔스탄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종종 에텔스탄의 궁정을 방문했다. 하웰은 영국 법률 제도를 연구했고, 그의 영토에서 웨일스 법을 개혁했다(나중에 ''키프라이트 하웰'' 또는 "하웰의 법"이라고 불림). 그리고 928년 로마로 순례를 떠났을 때 교황이 축복한 것으로 알려진 그의 법률을 모았다.

하웰은 웨일스에서 화폐 사용을 장려했으며, 잉글랜드와의 관계의 혜택으로 체스터에서 자신의 화폐를 주조했다. 945년 하웰은 화이트랜드에서 의회를 열어 자신의 법전을 성문화했으며, 저명한 성직자 블레기워드의 도움을 받았다. 하웰의 업적은 후세에 그를 ''훌륭한'' (Hywel Dda|하웰 다cy)이라고 부르게 했고, 그의 통치는 이례적으로 평화로운 통치로 인정받고 있다. 그가 죽자 기네드는 아베르프라우 왕조로 돌아갔지만, 포위스와 데헤우바르스는 그의 아들들 사이에서 분할되었다.

마레두드 압 오와인은 그의 할아버지 하웰 다의 왕국을 재건했다. 그는 986년까지 데헤우바르스와 포위스의 왕이었고, 기네드를 점령했다. 마레두드는 포위스에서 잉글랜드의 침략과 기네드에서 바이킹의 습격을 격퇴했다. 그는 바이킹에게 포획된 인질에게 1페니를 지불한 것으로 기록되었는데, 이는 당시 큰 액수였다. 999년 마레두드가 죽자 포위스는 마레두드의 장녀인 공주 앙하레드 (그녀의 첫 번째 남편 세이실 압 오위안과 결혼)를 통해 그의 손자 리윌린 압 세이실에게 넘어갔고, 데헤우바르스는 그의 아들들 사이에서 분할되었다.

기네드는 일시적으로 아베르프라우 가문으로 돌아갔지만, 다음 세기에는 더 높은 역사적 가문이 버려지면서 바이킹의 침략과 끊임없는 전쟁으로 인해 찬탈자들이 아베르프라우와 데네부르 가문을 전복시켰다. 그들은 11세기 말까지 회복되지 못했다. 리윌린 압 세이실의 아들 그리피드는 그의 왕권을 통해 모든 웨일스를 통일하고, 데헤우바르스의 사촌을 몰아내고 심지어 잉글랜드로 확장하여 그곳의 정치에 영향을 미쳤다. 그리피드가 죽자 데헤우바르스는 다양한 주장을 가진 일련의 통치자들을 거쳤지만, 1063년 마레두드 압 오와인 압 에드윈의 인물로 역사적인 데네부르 왕조로 돌아갔다.

3. 3. 마스라팔 가문 시대

마스라팔 왕조는 앵하레드 공주(데헤이바르스와 포위스의 마레두드 압 오와인의 딸)가 두 번째 남편인 친빈 압 구에르스탄과 결혼하며 창건되었다. 왕조의 이름은 역사적인 영지인 마스라팔 성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앵하레드의 아들 블레드린 압 친빈은 1063년 외가의 이복 형제인 그리피드 압 류엘린이 죽자 포위스를 상속받았다. 블레드린(이 이름은 웨일스어로 "늑대"를 의미한다)은 아베르프라우의 주장자인 키난 압 이아고와의 전투 후 1063년에 기네드를 확보했고, 잉글랜드의 참회왕 에드워드는 그해 늦게 블레드린의 점유를 승인했다. 또한, 블레드린은 하웰 다의 법전을 개정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블레드린 압 친빈과 그의 형제 리왈론은 노르만 침공에 맞서 앵글로색슨족과 함께 싸웠다. 1067년에는 머시아의 와일드의 에드릭과 동맹하여 헤리퍼드에서 노르만족을 공격했고, 1068년에는 머시아 백작 에드윈 (머시아 백작)과 노섬브리아 백작 모카 (노섬브리아 백작)과 함께 노르만족을 다시 공격했다. 1070년에는 기네드를 차지하려는 그의 이복 조카, 즉 그리피드 압 류엘린의 아들들을 메차인 전투에서 격파했다. 블레드린 압 친빈은 1075년 리스 압 오와인에 대항하여 데헤이바르스에서 원정하던 중 사망했다. 블레드린의 죽음과 함께 포위스는 그의 아들과 손자에게 차례로 넘어갔다. 기네드는 그의 사촌 트레하에른 압 카라독에게 넘어갔고, 그는 1081년 미니드 카른 전투에서 죽었으며, 이후 그리피드 압 키난의 인물로 역사적인 아베르프라우 왕조로 돌아갔다. 포위스 자체는 블레드린의 아들인 이오르워스, 카드와간, 마레두드 사이에서 분할되었다.

정복왕 윌리엄이 잉글랜드를 장악한 후, 그는 웨일스인들에게 노르만 남작들이 스스로 영주를 개척하도록 맡겼다. 그리하여 앵글로-웨일스 국경을 따라 웨일스 변경 지역이 형성되었다. 1086년까지 슈루즈베리의 노르만 백작 로저 드 몽고메리는 노르망디의 그의 고향에서 이름을 딴 몽고메리 성을 리드휘먼의 세번 여울에 건설했다. 몽고메리 이후 다른 노르만족은 북 포위스의 ''칸트레피''인 이알, 친라이스, 에데르니온, 난헤우드위를 주장했다. 여기에서 그들은 아르와스틀, 케리, 케드와인을 차지했다. 1090년까지 포위스의 거의 전체, 웨일스의 대부분이 노르만족의 손에 들어갔다. 블레드린 압 친빈의 세 아들은 저항을 이끌고 포위스를 복원했다. 1096년까지 그들은 몽고메리 성을 포함한 포위스의 대부분을 되찾았다. 로저 몽고메리는 잉글랜드 국왕 윌리엄 2세에 반란을 일으켰고, 그의 아들 로버트 벨렘은 1102년에 그의 땅을 몰수당했다.

3. 4. 분열

1160년, 마도그 압 마레두드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르웰린 압 마도그가 살해된 후, 포이스 왕국은 르하에드르 강을 따라 분할되었다.[1]

  • 르하에드르 강 북쪽의 캉트레프는 마도그의 남은 아들들에게 할당되었다.[1]
  • * 페늘린은 오와인 브로긴틴에게 주어졌지만, 그는 거의 즉시 이웃한 그위네드의 봉신이 되어 페늘린은 그위네드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1]
  • * 마엘로르와 이알 (예일)은 그리피드 마엘로르에게 주어졌다.[1]
  • * 스위드 어 와운 (난헤우드위, 킨라이스)는 오와인 피찬에게 주어졌다.[1]
  • 르하에드르 강 남쪽의 캉트레프 (키페일리오그, 이슬리그, 카에레이니온)는 마도그의 조카인 오와인 키페일리오그에게 할당되었다.[1]
  • 르하에드르 강을 가로지르는 캉트레프인 모흐난트는 마도그의 이복 형제인 요르워스 고흐 압 마레두드에게 주어졌다.[1]


1166년, 오와인 키페일리오그와 오와인 피찬은 요르워스 고흐를 공격하여 모흐난트에서 몰아내고 그 땅을 나누었다.[1] 오와인 키페일리오그는 모흐난트 우치 르하에드르를 차지했고, 오와인 피찬은 모흐난트 이스 르하에드르를 차지했다(이것은 스위드 어 와운의 일부가 되었다).[1] 1187년 오와인 피찬이 사망하고 그의 영지는 그리피드에게 넘어갔다.[1]

세기가 끝날 무렵, 그 결과로 생긴 왕국들은 다음 세대의 통치자들의 이름을 따서 알려지게 되었다.[1]

  • 포이스 파도그: 르하에드르 강 북쪽, 그리피드의 아들 마도그를 따라.[1]
  • 포이스 웨네윈윈: 르하에드르 강 남쪽, 오와인 키페일리오그의 아들인 그웬윈윈을 따라.[1]

3. 5. 외부 세력의 영향

13세기, 기네드의 르웰린 압 그리피드가 웨일스 공으로 인정받으면서 포이스는 기네드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다.[3] 포이스 웬윈윈과 포이스 파도그는 모두 르웰린을 웨일스 공으로 인정했다.[3] 1274년, 포이스 웬윈윈의 그리피드 압 웬윈윈이 잉글랜드로 망명했다가 복위하는 등 잉글랜드와 기네드 사이의 갈등이 심화되었다.[4]

1282년,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1세의 침공으로 기네드가 멸망하고, 포이스 파도그의 일부가 변경 영주(Marcher Lord)에게 넘어갔다.[6] 오와인 글린두르의 반란(1400-1415) 이후 포이스 파도그의 자치권은 소멸되었다. (요약에서 발췌)

3. 6. 왕국 이후의 포이스

1282년 잉글랜드의 침공 이후, 포이스 웬윈윈은 잉글랜드 왕에게 충성을 맹세하여 항복과 재승인을 통해 변경 영주로서의 지위를 유지했다. 이는 잉글랜드 왕의 봉신이 되면서도, 다른 변경 영주와 마찬가지로 완전한 독립을 유지하며 잉글랜드의 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됨을 의미했다.

1535-1542년 웨일스 법(Laws in Wales Acts)으로 변경 영주들이 폐지되면서, 포이스 지역은 덴비셔와 몽고메리셔로 재편되었다.[1] 포이스 파도그는 덴비셔 영주와 합쳐져 덴비셔가 되었고, 포이스 웬윈윈은 대부분 몽고메리셔가 되었다.[1]

197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몽고메리셔, 브레크노크셔, 래드노셔를 통합한 포이스 주(County of Powys)가 신설되었으나,[2] 역사적 포이스 왕국의 영역과는 차이가 있다.[2] 브레크노크셔는 전통적으로 포이스 왕국에 속하지 않았고, 래드노셔는 10세기 중반 이후 포이스의 일부가 아니었으며, 포이스 파도그의 대부분 지역은 새로운 클루이드 주에 포함되었다.[2]

4. 포이스의 통치자

포위스 왕국의 행정 구역


포이스 왕국의 통치자 목록은 포위스 군주 목록 문서에서 자세히 다루고 있다. 포이스 왕국은 1160년부터 포위스 파도그와 포위스 웬윈윈으로 나뉘었다.[1]

4. 1. 게르트린니온 가문


  • 그르테이른 (대왕 보티건): 마그누스 막시무스의 딸 세비라와 결혼.[1]
  • 카데이에른 펜디가이드 (c. 430–447): 그르테이른의 장남으로 추정되며, 성 게르마누스에게 축복을 받음.[1]
  • 카델 디른루그 (c. 447–460)[1]
  • 리드페드 프리흐 (c. 480)[1]
  • 켄젠 글로드리드 (c. 500)[1]
  • 파스겐 압 켄젠 (c. 530)[1]
  • 모건 압 파스겐 (c. 540)[1]
  • 브로크웰 이스기드로그 (c. 550)[1]
  • 이아고 압 브로크웰 (?–582)[1]
  • 키난 가르윈 (582–610)[1]
  • 셀리프 압 키난 (610–613)[1]
  • 만우간 압 셀리프 (613)[1]
  • 에일루드 포위스 (613–?)[1]
  • 벨리 압 에일루드 (c. 655)[1]
  • 그윌로그 압 벨리 (695–725)[1]
  • 엘리세드 압 그윌로그 (725–755?)[1]
  • 브로크파엘 압 엘리세드 (755?–773)[1]
  • 카델 압 브로크파엘 (773–808)[1]
  • 켄젠 압 카델 (808–854): 기네드에 의해 왕위를 찬탈당하고 로마로 망명, 그곳에서 가문이 존속됨.[1]

4. 2. 마나우 가문


  • 로드리 마우르 (854년–878년): 기네드 출신, 어머니를 통해 상속받음.
  • 메르빈 압 로드리 (878년–900년)
  • 루엘린 압 메르빈 (900년–942년)
  • 하웰 다 (942년–950년): 아베르프라우 가문으로부터 찬탈.
  • 오와인 압 하웰 (950년–986년): 그 후 디네프르 가문의 방계 가문이 통치하며, 마스라팔 왕조의 통치자를 세움.
  • 마레두드 압 오와인 (986년–999년)
  • 루엘린 압 세이실 (999년–1023년): 앙게레드의 아들로 첫 남편과의 사이에서 태어남. 앙게레드는 마레두드 압 오와인의 딸이었음.
  • 리더르흐 압 이에스틴 (1023년–1033년)
  • 이아고 압 이드왈 (1033년–1039년)
  • 그루피드 압 루엘린 (1039년–1063년)

4. 3. 마스라팔 포이스 공작


  • 블레드윈 압 킨핀 (1063년 ~ 1075년) 및 리왈론 압 킨핀 (1063년 ~ 1070년) (공동 통치)
  • 이오르워르스 압 블레드윈 (1075년 ~ 1103년, 일부 지역)
  • 카드완 압 블레드윈 (1075년 ~ 1111년, 일부 지역)
  • 오와인 압 카드완 (1111년 ~ 1116년, 일부 지역)
  • 마레두드 압 블레드윈 (1116년 ~ 1132년)
  • 마도그 압 마레두드 (1132년 ~ 1160년)

참조

[1] 서적 Welsh Medieval Law https://archive.org/[...] Oxford Univ. 1909-02-01
[2] 서적 Owen Glyndwr and the Last Struggle for Welsh Independence https://archive.org/[...] G. P. Putnam's Sons 1901-02-01
[3] 서적 Poetry of Wales https://archive.org/[...] Houlston & Sons 1873-02-01
[4] 웹사이트 Archaeological assessment of Wroxeter, Shropshire https://archaeologyd[...] 2022-10-30
[5] 웹사이트 Magnus Maximus https://www.worldhis[...] 2017-07-18
[6] 서적 Arthurian Figures of History and Legend: A Biographical Dictionary https://books.google[...] McFarland 2014
[7] 서적 A Welsh Classical Dictionary; People In History And Legend Up To About A. D. 1000 https://archive.org/[...] The National Library of Wales 1993
[8] 서적 Early Welsh Saga Poetry: A Study and Edition of the ‘Englynion’ Brewer 1990
[9] 서적 A History of Wales Penguin Group 1990
[10] 서적 A History of Wales from the Earliest Times to the Edwardian Conquest https://archive.org/[...] Longmans, Green, and Co 1911
[11] 서적 A History of Wales: from the earliest times to the Edwardian conquest https://www.library.[...] Creative Media Partners 2021-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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