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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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풍발은 407년 후연을 멸망시키고 북연을 건국한 인물이다. 고구려계 고운을 옹립하여 왕으로 세웠으나, 고운이 암살당하자 스스로 천왕이 되었다. 용성을 수도로 삼았으며, 유연과 동맹을 맺고 북위와 대립했다. 430년 사망했으며, 그의 사후 북연은 멸망했다.
풍발은 후연의 태합으로 407년 후연 황제 모용희를 폐위하고 북연을 건국하였다. 처음에는 고구려계인 고운을 왕위에 옹립하였으나, 고운이 측근에게 살해당하자 이를 수습한 뒤 스스로 천왕으로 등극했다.[6]
[1]
서적
Asia major
https://books.google[...]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11-09-19
2. 생애
409년 고운이 측근인 이반(離班)과 도인(桃仁)에게 암살당하자, 풍발은 군사를 준비하며 상황을 주시했다. 부하 장태(張泰)와 이상(李桑)이 궁궐로 진격하여 이반과 도인을 처단했고, 이후 관리들의 지지를 받아 409년 창려(昌黎)에서 천왕으로 즉위했다.[10] 그는 국호를 그대로 "연(燕)"으로 유지하고, 연호를 태평으로 정했으며, 고운에게는 혜의황제(惠懿皇帝)라는 시호를 올렸다.[10]
430년, 풍발은 병이 깊어져 권력을 아들 풍익에게 넘기려 했으나, 총애하던 후궁 송씨가 자신의 아들 풍수거를 왕위에 올리려 하였다. 송씨는 풍발의 회복을 핑계로 풍익의 권력 승계를 막고 외부와의 연락을 끊었다. 풍익과 다른 황실 관리들은 풍발을 만날 수 없었다. 믿었던 관리 호복(胡福)이 이 사실을 당시 재상이었던 풍홍에게 알렸고, 풍홍은 즉시 궁궐을 장악했다. 풍발은 이 소식을 듣고 충격으로 사망했다. 이후 풍홍이 스스로 왕위에 올랐고, 풍익의 군대를 물리친 후 풍발의 아들들을 모두 죽였다.[3]
2. 1. 초기 생애와 배경
풍발의 할아버지 풍화(馮和)는 한족 출신으로[1] 진 진 혜제 치세에 북반부가 한조에 의해 정복된 후 상당군(上黨, 오늘날의 장즈시, 산시성)에 정착했다고 전해진다. 아버지 풍안(馮安)은 서연의 황제 모용영을 장군으로 섬겼다. 394년, 서연이 후연의 황제 모용수에 의해 멸망하자 풍안의 가문은 강제로 오늘날 진저우시, 랴오닝성에 위치한 하룡(和龍, 룡성(龍城)으로도 알려짐)으로 이주되었는데, 풍발은 그곳에서 성장했다. 그의 별명 기지파(Qizhifa)는 선비족 기원을 암시하는 것으로 보아 선비족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으로 보인다. 풍발은 세 명의 남동생을 두었는데, 모두 영웅적인 행동을 숭상하고 사회적 제약을 대체로 무시했지만, 풍발 자신은 신중하고 근면하며 가정을 잘 돌보는 것으로 여겨졌다. 모용보의 치세 동안 그는 장군이 되었다. 그는 모용보의 양자이자 조양공인 모용운을 존경하게 되었고, 그들은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10][4]
407년, 모용보의 잔혹하고 변덕스러운 남동생 모용희 치세 동안 풍발과 그의 형제 풍소불(馮素弗)은 어떤 이유로 모용희의 심기를 거스르게 되었고, 그들은 시골에 숨었다. 그들은 결국 발각되어 살해당할 것이라고 결론짓고, 모용희를 전복시키기로 결심했다. 그들은 비밀리에 수도인 룡성에 다시 들어갔고, 그 해 초에 사망한 부인 부순영 황후를 장례하기 위해 모용희가 룡성을 떠났을 때, 사촌 풍만니(馮萬泥)와 장군 손호(孫護), 장흥(張興)의 도움을 받아 도시 내에서 봉기했다. 풍발과 모용운은 친구였기 때문에 모용운을 설득하여 그들의 지도자로 섬기게 했고, 그들은 재빨리 궁궐을 점령하고 성문을 봉쇄했다. 모용운은 이후 천왕으로 선포되었다.
모용희는 룡성으로 돌아와 롱텅 별장 밖에 자리 잡고 도시를 공격할 준비를 했다. 이때, 황궁 경비병 추두(褚頭)가 그에게 도망쳐 황궁 경비병이 모용희가 공격하자마자 모용운을 배반할 준비가 되었다고 알렸다. 그러나 알 수 없는 이유로 모용희는 이 소식에 당황하여 도망쳤다. 그의 장군 모용발(慕容拔)은 룡성을 향한 공격을 유지하려 했고 처음에는 성공했으나, 군대가 모용희가 도망쳤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하면서 붕괴되었고, 모용발은 풍발의 군인에게 살해되었다. 그날 늦게, 모용희는 숲에서 평민 옷을 입은 채 발견되었고, 체포되어 모용운에게 넘겨졌다. 모용운은 그에게 직접 그의 죄를 읽어주고, 그와 그의 아들들의 목을 베었다.[5]
2. 2. 후연의 부장
한족 출신으로, 동진의 장락군신도현 출신이다. 영가의 난이 일어나자 조부 풍허가 상당군으로 이주했다.[10][4] 풍발의 아버지 풍안은 무용과 기량이 뛰어나 서연의 모용영의 장군이 되었다. 394년에 후연이 서연을 멸망시키자 풍발은 동쪽의 화룡(용성)으로 이주하여 집을 장곡에 두었다. 풍발은 어릴 때부터 훌륭하고 말을 많이 하지 않았으며, 관대하고 도량이 컸다. 풍발의 동생 셋은 협객 기질이 있어 수양을 하지 않았지만, 풍발은 근신하며 가업을 도왔다고 한다. 모용보가 후연에서 즉위하자, 그의 중위장군이 되었다. 모용보의 양자인 모용운은 과묵하여 당시 사람들에게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불렸지만, 오직 '''풍발'''만이 그의 도량을 인정하고 벗으로 삼았다.[5]
401년 모용희가 즉위하고, 407년 풍발과 동생 풍소불(馮素弗)은 산과 늪으로 도망쳤다. 『진서』에 따르면, 모용희가 즉위하기 전에 풍소불과 사촌 풍만니(馮萬泥)가 옛날 물에 떠 있는 금룡을 발견하여 붙잡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모용희가 그것을 요구하자 풍소불이 묵묵부답했기 때문이다.[10] 모용희는 몰래 풍발 형제를 주살하려 했고, 후에 풍발 역시 죄를 얻었으므로 산과 늪으로 도망쳤다. 붙잡혀 죽임을 당할 것을 두려워한 형제는 모용희에 대한 반란을 꾀했다. 이에 사촌 풍만니, 장흥(張興), 같은 해 반란에 실패한 부진(苻進)[5] 등 22명이 모의했다.[10]
풍발과 두 동생은 부인에게 수레를 몰게 하여 용성(龍城)에 잠입하여 북부사마(北部司馬) 손호(孫護)의 집에 숨었다. 그리고 모용희가 황후 부훈영의 장례를 위해 용성을 떠나자, 장흥과 부진 등이 난을 일으켰다. 풍발은 모용운을 좋게 여겨 군주로 추대했다. 풍발의 사촌 아들 풍루천(馮乳陳) 등이 고성(鼓噪)하며 홍광문(弘光門)으로 진격하자 금위군은 모두 도망쳤고, 풍발은 입성하여 성문을 닫았다.[6] 점거 보고가 도착하자, 모용희는 급히 귀환하여 밤에 용성의 북문을 공격했지만 이기지 못하고 문밖에 갇혔다. 모용운은 천왕으로 즉위하여 대사(大赦)하고 정시로 개원했다. 국호는 '연(燕)'으로 남았지만, 이때 후연(後燕)은 멸망하고 북연이 되었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모용운은 후연의 황족이고, 실질적인 건국자는 풍발이므로, 고운을 후연의 마지막 황제로 보는 경우도 있다.[7][8]
2. 3. 북연 천왕 즉위
409년 고운이 측근인 이반(離班)과 도인(桃仁)에게 암살당했다.[10] 이들은 고운의 총애를 받았음에도 불만을 품고 암살을 저지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풍발은 암살 소식을 듣고 군사를 준비하며 상황을 주시했고, 부하 장태(張泰)와 이상(李桑)이 궁궐로 진격하여 이반과 도인을 처단했다.[6] 이후 관리들의 지지를 받아 풍발은 409년 창려(昌黎)에서 천왕으로 즉위했다.[10]
풍발은 국호를 그대로 "연(燕)"으로 유지하고, 연호를 태평으로 정했으며, 고운에게는 혜의황제(惠懿皇帝)라는 시호를 올렸다.[10]
2. 4. 북연 통치
후연의 태합이었던 풍발은 407년 후연 황제 모용희를 폐위하고 북연을 건국하였다. 처음에는 고구려계인 고운을 왕위에 옹립하였으나, 고운이 측근에게 살해당하자 이를 수습한 뒤 스스로 천왕으로 등극했다.[6]
고운은 풍발을 시중·도독중외제군사·정북대장군·개부의동삼사·녹상서사·무읍공으로 삼고, 풍만니를 상서령, 풍소불을 창려윤, 풍발의 동생 풍홍을 정동대장군, 손호를 상서좌복야, 장흥을 보국대장군으로 삼았다.[6]
풍발은 요녕성 조양(용성)을 수도로 삼고, 요서 지방을 영유했다. 430년 동생인 풍홍이 뒤를 이었다.
고운이 암살된 후, 풍발은 그의 동생 풍수부를 범양공(范陽公)이자 재상으로 임명했고, 그 외 중요한 직책은 손호, 장흥, 그의 동생 풍홍, 지공(冀公) 풍홍, 그의 사촌 풍만이, 광천공(廣川公), 그리고 다른 사촌의 아들 풍유진(馮乳陳) 상곡공(上谷公)에게 돌아갔다. 그는 그의 어머니 장씨 부인을 태후로, 그의 아내 손씨 부인을 공주로, 그의 아들 풍영을 태자로 책봉했다.
풍발과 풍수부 모두 근면하고 검소하며 총명하다고 여겨졌으며, 이 시기 북연은 잘 다스려졌다. 풍발은 정사에 근면했고, 농경을 장려했으며, 세역(稅役)을 가볍게 하여 시민들이 크게 기뻐했다고 한다.
410년, 풍만니와 풍유진은 용성에 있지 않고 황실 정부를 통제하지 못하고, 비여(현대의 친황다오, 허베이성)와 백랑(현대의 랴오닝성, 자오양시)의 지휘관으로 복무해야 한다는 사실에 분개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풍발은 풍홍과 장흥을 보내 그들을 공격했고, 패배한 후 항복했지만 풍홍은 그들을 처형했다.
그 해, 풍발은 고운과 고운의 아내 이황후를 황실 예우로 매장했지만, 명휘를 지키지 않고 고운의 이름을 장례에 관한 조서에 사용했다.
414년, 풍발은 그의 신하 추광을 그의 고향인 창락(현대의 헝수이, 허베이성)으로 보내 그의 일족을 찾게 했고, 추광은 풍발의 사촌인 풍매(馮買)와 풍도(馮睹)가 이끄는 5,000 가구를 데리고 돌아왔다. 풍발은 또한 고구려에서 그의 형제 풍비를 찾아 그를 환영하여 창산공(昌山公)으로 책봉했다.
415년 새해 무렵, 풍수부가 사망했다. 신하를 기리는 관례가 최대 세 번인 것과 달리, 그는 그의 형제를 일곱 번이나 애도했다.
415년 후반, 손호의 형제 손백인, 손질지, 손을발은 승진 부족에 불만을 품고 불평했다. 풍발은 세 사람을 처형하고 손호를 승진시켜 그를 진정시키려 했지만, 손호는 우울해졌고, 그래서 풍발은 그를 독살했다. 한편, 장군 무은제도 그가 승진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불만을 품고 그의 방어 기지를 고구려에 제공하려 했고, 풍발은 그를 처형했다.
426년, 풍발의 태자 풍영이 사망했고, 그는 다른 아들 풍익을 태자로 책봉했다.
430년, 풍발은 심각한 병에 걸렸고, 그의 권한을 풍익에게 넘겨주는 조서를 발표했다. 그러나 풍발이 가장 아끼는 후궁인 송씨는 그녀의 아들 풍수거가 왕위를 계승하기를 원했고, 풍익에게 풍발이 곧 회복될 것이며, 권력을 넘겨받는 데 너무 조급해하지 말라고 말했다. 풍익은 동의하고 그의 궁궐로 물러났다. 송씨는 거짓으로 풍발의 이름으로 외부와의 통신을 끊는 명령을 내렸고, 풍익과 풍발의 다른 아들들은 물론 황실 관리들도 풍발을 만날 수 없었다. 그녀의 신뢰를 받는 관리 중 한 명인 호복만이 궁궐에 들어가 보안을 책임질 수 있었다. 그러나 호는 송씨의 야망에 은밀히 분개했고, 그는 당시 재상이었던 풍홍에게 그녀의 의도를 알렸다. 풍홍은 즉시 궁궐을 공격하여 통제권을 장악했다. 풍발은 이 소식을 듣고 충격으로 사망했다. 풍홍은 이후 스스로 왕위에 올랐고, 풍익의 군대를 물리친 후 풍발의 모든 아들을 학살했다.
2. 4. 1. 외교 관계
411년, 유연의 칸 우지구려 호려는 풍발에게 말 3,000필을 바치고 풍발의 딸 낙랑공주와의 결혼을 요청했다. (낙랑공주는 아마도 풍발의 아내인 손씨 공주의 딸일 것이며, 풍수부는 이 요청을 거절하고 풍발의 후궁 중 한 명의 딸을 대신 보내는 것을 제안했다.) 풍발은 유연과의 동맹이 그의 국가에 유익할 것이라고 믿고 낙랑공주를 우지구려 호려에게 시집보냈다.[2]
414년 말, 자신의 딸 중 한 명을 풍발에게 시집보내려던 우지구려 호려가 조카 우지구려 불루진에게 전복되었고, 쿠데타 지도자들은 그와 그의 딸을 북연으로 보냈다. 풍발은 그를 존경받는 손님으로 대했고, 원래 계획대로 그의 딸 자의 (昭仪)를 후궁으로 삼았다.[3] 우지구려 호려는 풍발에게 그를 고향으로 호송할 군대를 보내달라고 요청했고, 풍발은 다소 망설이면서 그의 장군 만릉을 보내 우지구려 호려를 호송했지만, 만릉은 가는 길에 우지구려 호려를 죽이고 돌아왔다. 대신 풍발은 새로운 칸 우지구려 다탄과 동맹을 맺었는데, 다탄은 우지구려 불루진을 전복시켰다.
같은 해 말, 북위 명원제는 사자 홀뉴우 시문을 보내 북연과 평화를 협상하려 했지만, 홀뉴우가 화룡에 도착했을 때, 그는 북연 궁궐에 들어가는 것을 거부하고, 풍발이 그의 궁궐에서 나와 명원제의 조서를 받아들일 것을 요구했다 (복종의 표시로). 풍발은 거절하고 홀뉴우를 궁궐로 끌고 들어갔다. 홀뉴우는 절을 거부했고, 풍발은 그의 경비병들에게 홀뉴우의 머리를 누르게 한 다음 그를 감옥에 가두었다. 나중에, 여러 차례, 홀뉴우는 풍발을 모욕했지만, 풍발은 그를 처형하라는 제안을 거부하고, 홀뉴우가 그의 국가에 충실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그는 나중에 여러 번 홀뉴우가 굴복하도록 설득하려 했지만, 홀뉴우는 매번 거절했다. 대신 풍발은 하 황제 혁련발발과 동맹을 맺었다.
416년, 북연 장군 고류관빈은 이전에 북연에서 북위로 망명했지만, 다시 북연으로 돌아왔고, 북위의 명원제에게 공격을 받았다. 북위군은 고류관빈뿐만 아니라 다른 두 북연 장군 고류관창과 고류관제도 죽였는데, 아마도 고류관빈의 친척일 것이다.
418년, 북위 명원제는 북연을 기습 공격하여 화룡을 포위하고 공격했다. 풍발은 북위의 공격에 맞서 도시를 방어하고 지켜냈다. 북위군은 북연으로부터 약 10,000 가구를 빼앗고 철수했다.
이후 몇 년 동안, 북위는 유송과 하에 노력을 집중했고, 북위와 북연 사이에 더 이상 큰 충돌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2. 5. 최후
馮跋중국어은 병이 깊어져 권력을 아들 풍익에게 넘기려 했으나, 총애하던 후궁 송씨가 자신의 아들 풍수거를 왕위에 올리려 하였다. 송씨는 풍발의 회복을 핑계로 풍익의 권력 승계를 막고 외부와의 연락을 끊었다. 풍익과 다른 황실 관리들은 풍발을 만날 수 없었다.
믿었던 관리 호복(胡福)이 이 사실을 당시 재상이었던 풍홍에게 알렸고, 풍홍은 즉시 궁궐을 장악했다. 풍발은 이 소식을 듣고 충격으로 사망했다. 이후 풍홍이 스스로 왕위에 올랐고, 풍익의 군대를 물리친 후 풍발의 아들들을 모두 죽였다.[3]
3. 가계
관계 이름 비고 조부 풍화 409년 손자 풍발이 북연 천왕 즉위 후 원황제 추존. 부 풍안 서연 장군. 409년 아들 풍발이 북연 천왕 즉위 후 선황제 추존. 모 장태후 409년 아들 풍발이 북연 천왕 즉위 후 태후 존봉. 배우자 손왕후 409년 남편 풍발이 북연 천왕 즉위 후 왕후 책봉. 측실 송부인(宋夫人) 아들 풍수거 출생. 측실 욱구려소의 유연 제2대 카간 애고개가한 욱구려곡률의 딸. 414년 결혼. 장남 풍영(馮永) 409년 아버지 풍발이 북연 천왕 즉위 후 태자 책봉. 411년 이후 대선우 겸임. 426년 병사. 아들 풍익(馮翼) 426년 형 풍영 사후 태자 책봉. 430년 숙부 풍홍에게 피살. 아들 풍수거(馮受居) 430년 숙부 풍홍에게 피살. 딸 낙랑공주 411년 유연 제2대 카간 애고개가한 욱구려곡률과 결혼. 동생 풍소불 ? ~ 415년 동생 풍홍 동생 풍비 상산공 숙부 풍영(馮榮) 사촌형 풍만니(馮萬泥) ? ~ 410년 사촌형 풍매(馮買) 사촌동생 풍도(馮睹/馮覩) 조카 풍유진(馮乳陳) ? ~ 410년, 풍발 사촌형의 아들.
그 밖에 100여 명이 넘는 아들들이 있었으나, 풍홍 즉위 후 모두 풍홍에게 피살됨.
4. 대중 매체에서의 등장
참조
[2]
서적
Asia major
https://books.google[...]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11-09-19
[3]
서적
Asia major
https://books.google[...]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11-09-19
[4]
서적
『魏書』巻97
[5]
서적
『晋書』巻124「慕容雲載記」
[6]
서적
『資治通鑑』巻114
[7]
서적
三崎『五胡十六国、中国史上の民族大移動』、P109
[8]
서적
『晋書』『魏書』等
[9]
서적
三崎『五胡十六国、中国史上の民族大移動』、P110
[10]
서적
『晋書』「馮跋載記」巻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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