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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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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풍홍은 북연의 마지막 천왕으로, 430년 형 풍발 사후 왕위 다툼 끝에 조카들을 제거하고 즉위했다. 북위의 압박에 고구려로 망명했으나, 교만한 행동으로 장수왕의 미움을 사 결국 살해당했다. 풍홍은 한족 출신으로, 고구려의 지원을 받으며 남조 송나라에 의탁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그의 손녀는 북위의 풍태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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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홍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풍 (馮)
이름홍 (弘)
문통 (文通)
시호소성황제 (昭成皇帝, "civil and successful")
묘호해당 사항 없음
추존 황제 시호소성황제 (昭成皇帝)
존호대연 천왕 (大燕天王)
생년미상
몰년438년
사망 장소고구려
아버지풍안 (馮安)
형제풍발, 풍소불, 풍비
배우자왕부인(王夫人), 모용왕후
자녀풍숭(馮崇), 풍랑(馮朗), 풍막(馮邈), 풍왕인(馮王仁), 좌소의(左昭儀) 풍씨(馮氏)
통치
재위 시작430년
재위 종료436년
즉위 전풍발
계승자해당 사항 없음 (왕조 멸망)
연호태흥 (太興)
연호 시작431년
연호 종료436년
정치 체제천왕 (天王)
왕조북연

2. 생애

430년 풍발이 병으로 사망하자, 풍발의 동생 풍홍과 아들 풍익(馮翼) 사이에 왕위 다툼이 벌어졌다. 풍홍은 조카인 풍익과 그 형제들을 제거하고 천왕 자리에 올랐다.[4]

풍홍은 화북을 통일한 북위의 압박을 지속적으로 받았다. 436년 북위의 압박이 거세지자, 풍홍은 고구려망명을 요청하였다.[4] 장수왕은 장군 갈로와 맹광에게 수만 명의 군사를 주어 풍홍을 맞이하도록 하였다. 고구려군은 풍홍과 북연도성인 화룡성에 남아있던 백성들을 고구려 땅으로 이주시키고 궁궐에 불을 질렀다.

그러나 풍홍은 과거의 위세를 잊지 못하고 교만한 태도를 보였다. 438년 음력 3월, 장수왕은 풍홍을 평곽(平郭)으로 보냈다가 다시 북풍(北豐)에 머물도록 조치했다. 또한 풍홍의 시종들을 빼앗고, 태자 풍왕인(馮王仁)을 볼모로 잡았다. 이에 분개한 풍홍은 남조송나라에 사신을 보내 자신을 받아줄 것을 요청했다. 송 문제 유의륭은 풍홍을 받아들이기로 하고, 사신 왕백구(王白駒) 등을 고구려에 보내 풍홍을 넘겨줄 것을 요구했다.

장수왕은 풍홍이 송나라로 가는 것이 고구려에 이롭지 않다고 판단, 장군 손수고구에게 군사를 주어 풍홍과 그의 가족들을 죽이라고 명령했다. 손수와 고구는 북풍에서 풍홍을 살해하였다.[2] 이후 송나라 사신 왕백구가 풍홍의 군사 7,000명을 이끌고 고구려군을 습격하여 고구는 죽고 손수는 생포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장수왕은 즉시 대군을 동원하여 풍홍의 군사를 공격하고 왕백구를 사로잡아 송나라로 압송했다. 송나라는 고구려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왕백구를 감옥에 가뒀다가 고구려의 눈을 피해 석방하였다.

2. 1. 즉위 전

풍발의 동생으로, 한인이며 동진의 장락군 신도현 출신이다. 아버지는 풍안이다.[1] 407년, 형 풍발이 풍소불(馮素弗)과 함께 폭군 후연 황제 모용희를 몰아내고 모용희의 양자 고운을 황제로 옹립하기 전까지는 풍홍에 대한 역사 기록이 없었다. 고운은 즉위 후 본래 이름으로 개명하였는데, 일부에서는 후연의 마지막 황제로, 다른 일부에서는 북연의 첫 번째 황제로 여겨진다.[1] 같은 해 말, 고운은 풍홍을 진위장군으로 임명했고, 기공에 봉했다.

409년 고운이 측근 이반과 도인에게 암살당한 후, 정권 관리들은 풍발을 새로운 황제로 지지했다. 풍발은 즉위하면서 풍홍을 승진시켰지만, 기공 작위는 유지하게 했다.

410년, 풍발의 사촌 풍완니(馮萬泥)와 풍루천(馮乳陳)은 풍발의 성공에 많이 기여했으나 용성에 있지 못하고 제국 정부를 통제하지 못하며, 친황다오 페이루(肥如)와 차오양시 바이랑(白狼)의 지휘관으로 복무해야 하는 것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 풍발은 풍홍과 장싱(張興)을 보내 공격하게 했고, 패배 후 항복했지만 풍홍은 그들을 처형했다. 이후 풍발은 풍홍을 중산공(中山公)으로 봉했다.

2. 2. 즉위 과정

馮弘|풍홍중국어한인 출신으로, 동진 장락군 신도현 사람이다. 풍발의 동생으로, 아버지는 풍안이다. 원래는 중산공이었다.[1] 430년, 펑바가 병이 깊어 황태자 펑이(馮翼)에게 권한을 이양하는 조서를 내렸으나, 펑바의 총애를 받던 송비(宋妃)가 자신의 아들 펑서우쥐(馮受居)를 즉위시키려 펑이에게 권력 이양을 미루도록 했다.[1] 펑이는 이에 동의하고 물러났으나, 송비는 펑바의 이름으로 외부와의 통신을 차단했다. 이 때, 송비를 신뢰하던 관리 후푸(胡福)가 송비의 야심을 펑훙에게 알렸고, 펑훙은 궁을 공격하여 장악했다. 펑바는 이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아 사망했고, 펑훙은 스스로 왕위에 올라 펑이의 군대를 격파하고 펑바의 아들들을 모두 살해했다. 펑훙은 "천왕"(''天王'')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다.[1]

2. 3. 북위와의 관계

북위는 431년 하의 영토를 모두 병합한 후, 북연에 대한 공격을 강화했다. 북위 태무제는 북연 영토를 주기적으로 약탈하고 철수하는 공격을 가하여 북연의 자원을 고갈시키고 약화시켰다.[1]

432년 가을, 태무제는 북연의 수도 합룡(和龍, 현대 진저우시, 랴오닝성)을 공격했다. 풍홍은 소와 술을 바쳐 북위 군대를 달래려 했으나 실패했고, 북연의 10개 군이 북위에 항복했다. 북위군은 많은 북연 도시를 점령하고 합룡을 포위했지만, 2개월 후 3만 가구를 베이징, 톈진, 북부 허베이성 지역으로 이주시키고 철수했다. 풍홍은 북위의 봉신이 되라는 제안을 거절했다.[1]

433년경, 풍홍의 아들 풍랑(馮朗)과 풍묘(馮邈)는 요서 (遼西, 현대 탕산시, 허베이성)로 도망가 북위에 항복했다. 풍홍은 장군 풍우(封羽)를 보내 요서를 포위했지만, 북위의 탁발건(拓拔健)이 요서를 구원하고 풍우를 격파했다.[1]

434년 봄, 풍홍은 북위에 평화를 요청하는 사신을 보냈으나 거절당했다. 3개월 후, 풍홍은 딸을 태무제의 후궁으로 바치고 아들 풍왕인(馮王仁)을 북위에 보내는 조건으로 평화 제안을 다시 했고, 태무제는 이를 수락했다. 그러나 풍홍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태무제는 다시 탁발건을 보내 북연을 공격했다.[1]

435년 봄, 풍홍은 유송에 사신을 보내 봉신을 자처했고, 유송 문제는 풍홍을 연왕으로 책봉했지만 실질적인 도움은 주지 않았다. 같은 해, 풍홍은 북위에 조공을 바치고 풍왕인이 병 때문에 오지 못한다고 변명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후 태무제의 동생 탁발비(拓拔丕)가 합룡에 도착했고, 풍홍은 소, 술, 갑옷을 바쳐 달래려 했으나, 북위군은 북연 백성 6천 명을 빼앗아 철수했다.[1]

436년, 풍홍은 고구려로 백성을 대피시키는 계획을 세우고 고구려에 도움을 요청했다. 북위와 고구려 군대가 모두 합룡에 도착했고, 백성들은 고구려로 이주하는 것을 꺼려했다. 결국 고구려 군대는 도시를 약탈하고 풍홍과 백성을 동쪽으로 호송했다. 이로써 북연은 멸망했다.[1]

2. 4. 고구려 망명과 최후

436년 북위의 압박을 받아 고구려망명을 요청하였다.[4] 장수왕갈로와 맹광에게 수만의 군사를 주어 풍홍을 맞이하게 하였고, 북연도성인 화룡성의 백성들을 고구려 땅으로 이주시키고 궁궐에 불을 질렀다.

그러나 풍홍이 과거의 위세를 잊지 못하고 교만하게 굴자 438년 음력 3월, 장수왕은 풍홍을 평곽으로 가게 했다가 다시 북풍에 머물도록 하였다. 또한 풍홍의 시종을 빼앗았으며, 태자 풍왕인(馮王仁)을 볼모로 잡았다. 그러자 풍홍은 분개하여 남조송나라에 사신을 보내 자신을 받아달라고 요청했다. 풍홍의 요청을 받은 송 문제 유의륭은 그를 받아들이기로 하고, 사신 왕백구(王白駒) 등을 고구려에 보내 풍홍을 자신들에게 넘겨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장수왕은 풍홍이 송나라로 가는 것이 고구려에 이롭지 못하다는 판단을 하고 장군 손수고구에게 군사를 주어 풍홍과 그의 가족들을 죽이라고 명했다. 손수와 고구는 북풍에서 풍홍을 살해하였다.[2] 이후 송나라의 사신 왕백구가 풍홍의 군사 7,000명을 이끌고 손수와 고구가 이끄는 고구려군을 습격하는 바람에 고구는 죽고 손수는 생포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장수왕은 즉시 대군을 동원하여 풍홍의 군사를 쳐 왕백구를 사로잡았다. 그리고 사신 편에 송나라로 압송시켰다. 이에 송나라는 고구려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왕백구를 감옥에 가뒀다가 고구려의 눈을 피해 석방하였다.

고구려가 풍홍을 받아들인 것은 동진하는 북위의 세력 확대를 견제하려는 의미가 있었다. 풍홍을 평곽에 안치한 것은, 평곽이 요하에 가까워 요서를 노릴 수 있는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3]

3. 가계

관계이름비고
조부풍화(馮和)409년 손자 풍발북연 천왕으로 즉위하면서 원황제로 추존.
아버지풍안(馮安)서연 장군. 409년 아들 풍발이 북연 천왕으로 즉위하면서 황제로 추존.
숙부풍영(馮榮)
풍발
풍소불풍발의 동생
사촌형풍만니(馮萬泥)415년 사망
본인풍홍(馮弘)
배우자왕부인(王夫人)풍홍의 본처
배우자모용왕후(慕容王后)
동생풍비(馮丕)상산
아들풍숭(馮崇)장락. 432년 동생들과 함께 북위에 투항. 이후 요서에 봉해짐.
아들풍랑(馮朗)광평. 432년 형제들과 함께 북위에 투항. 이후 서군공(西郡公)에 봉해짐.
손자풍희(馮熙)438년 ~ 495년
손녀문명문성황후(文明文成皇后)441년 ~ 490년, 북위 문성제 탁발준의 황후
아들풍막(馮邈)노릉. 432년 형들과 함께 북위에 투항.
풍씨(馮氏)문성문명황후의 고모. 북위 태무제 탁발도의 좌소의(左昭儀)가 됨.
아들풍왕인(馮王仁)432년 태자 책봉, 438년 사망 추정


4. 평가 및 영향

풍홍은 북연의 왕족으로, 고구려로 망명하여 백성을 이끌고 온 인물이다. 고구려는 풍홍을 평곽에 안치했는데, 이는 그곳이 요하와 가까워 요서 지역을 견제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고구려는 풍홍을 통해 북위의 세력 확장을 견제하고자 했다.[3]

4. 1. 중국계 이민과의 관계

팔왕의 난 이래, 동진을 거쳐 유송에 이르기까지 대규모 인구 이동이 발생했다. 수십만 명에서 백만 명으로 추산되는 중국인이주는 집단적인 것이었고, 화북의 전란과 이민족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이었다. 대량의 이주를 유발한 화북의 혼란은 북위의 화북 통일, 동위서위의 분열, 북주의 재통일로 일단락되지만, 이 시기에 많은 중국인이 요하를 넘어 고구려로 입국했다[3].

전연부견전진에 의해 멸망했지만, 이 과정에서 전연의 모용평이 고구려로 망명했다. 385년 이전으로 추정되는 유주·기주의 유민의 고구려 유입도, 전진과 후연의 투쟁 혼란 속에서 고구려로 유입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북연풍비와 풍홍이 수도 화룡성 백성을 이끌고 고구려로 망명한 것도 주목된다[3].

고구려가 중국계 이민을 필요로 했던 이유는, 오호 십육국 시대의 동란은 북위가 화북을 평정한 것으로 수습되지만, 그것은 북위가 고구려까지 밀려오는 것을 의미하며, 고구려가 북연의 풍홍을 받아들인 것은, 동진하는 북위의 세력 확대를 견제하려는 의미가 있었다. 풍홍을 평곽에 안치한 것은, 평곽이 요하에 가까워 요서를 노릴 수 있는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유송, 유연, , 북연, 북량, , 토욕혼은 북위의 침공을 받아 막대한 피해를 입었지만, 고구려는 동아시아 여러 국가 및 민족이 휘말린 중국의 대립과 거리를 둘 수 있었다[3].

국경을 접하는 화북의 안정이 고구려 정권 안정의 토대가 된 의의는 크며, 이 역할에 중국계 이민이 기여했다. 또한, 화북의 동란으로 인한 중국계 이민의 유입은 고구려에 새로운 문화를 가져왔고, 고구려의 국정 정비 및 군비 확장으로 인한 국가 발전에 거대한 역할을 했다[3].

참조

[1] 서적 古代東アジアの民族と国家 岩波書店 1998-03-25
[2] 뉴스 손수(孫漱) http://encykorea.aks[...] 韓国民族文化大百科事典
[3] 뉴스 5호16국·남북조 상쟁기 이주민과 고구려·백제 http://contents.nahf[...] 国史編纂委員会
[4] 서적 古代東アジアの民族と国家 岩波書店 1998-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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