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국립 관현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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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 국립 관현악단(Orchestre national de France, ONF)은 1934년 프랑스 국립 방송 산하 관현악단으로 창단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해산과 재건을 거쳐 1975년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되었으며, 샹젤리제 극장을 중심으로 활동한다. 역대 상임 지휘자로는 데지레-에밀 앵겔브레슈트, 마뉘엘 로장탈, 샤를 뮌슈, 장 마르티농 등이 있으며, 크리스티안 머첼라루가 현재 음악 감독을 맡고 있다. 프랑스 음악 외에도 다양한 레퍼토리를 소화하며, 1966년과 1978년 두 차례 내한 공연을 통해 한국 클래식 음악 발전에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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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국립 관현악단 | |
---|---|
기본 정보 | |
![]() | |
종류 | 교향악단 |
위치 | 파리, 프랑스 |
설립일 | 1934년 |
공연장 | 오디토리엄 드 라디오 프랑스 |
웹사이트 | 프랑스 국립 관현악단 공식 웹사이트 |
지휘자 | |
음악 감독 | 크리스티안 머첼라루 |
차기 수석 지휘자 | 필립 조르당 |
2. 역사
1934년 1월, 당시 우편 장관이었던 장 미스틀레르의 발의로 프랑스 국립 방송 산하에 관현악단이 창단되었다.[1] 창단 당시의 명칭은 '오케스트르 나시오날'(Orchestre National|오케스트르 나시오날fra)이었으며, 초대 음악 감독으로는 데지레-에밀 앵겔브레슈트가 임명되어 악단의 기틀을 마련했다. 이후 제2차 세계 대전과 나치 독일의 프랑스 점령 시기를 거치며 활동에 제약을 받기도 했으나, 1944년 파리 해방 이후 활동을 재개하며 재건의 과정을 밟았다.
전후 마뉘엘 로장탈, 로제르 데조르미에르, 앙드레 클뤼탕스, 모리스 르 루, 샤를 뮌슈, 장 마르티농 등 여러 지휘자들이 악단을 이끌며 연주력을 회복하고 레퍼토리를 확장했으며, 해외 순회 공연과 음반 녹음 등을 통해 국제적인 명성을 쌓기 시작했다. 특히 클뤼탕스 재임 시기에는 소련 작곡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가 파리를 방문하여 협연하기도 했으며, 마르티농 재임 시기에는 도이체 그라모폰과 계약하여 프랑스 작곡가들의 주요 작품들을 녹음했다.
1975년에는 현재의 명칭인 '''프랑스 국립 관현악단'''(Orchestre National de France|오케스트르 나시오날 드 프랑스fra)으로 개칭되었으며, 이후 로린 마젤, 샤를 뒤투아, 쿠르트 마주어, 다니엘레 가티, 엠마누엘 크리빈, 크리스티안 머첼라루가 차례로 음악 감독을 맡아 악단을 이끌었다. 2027년-2028년 시즌부터는 필리페 조르당이 차기 음악 감독으로 활동할 예정이다.[11][12]
악단은 창단 이후 프랑스 국영 방송 조직의 변화에 따라 여러 차례 명칭이 변경되었다.
기간 | 프랑스어 명칭 | 한국어 명칭 |
---|---|---|
1934–1945 | Orchestre National|오케스트르 나시오날fra | 국립 관현악단 |
1945–1949 | Orchestre national de la Radiodiffusion française|오케스트르 나시오날 드 라 라디오디퓌지옹 프랑세즈fra | 프랑스 국립 방송 관현악단 |
1949–1964 | Orchestre national de la Radio-télévision française|오케스트르 나시오날 드 라 라디오텔레비지옹 프랑세즈fra (Orchestre national de la RTF|오케스트르 나시오날 드 라 RTFfra) | 프랑스 라디오 텔레비전 국립 관현악단 (RTF 국립 관현악단) |
1964–1974 | Orchestre national de lOffice de radiodiffusion-télévision française|오케스트르 나시오날 드 로피스 드 라디오디퓌지옹 텔레비지옹 프랑세즈fra (Orchestre national de lORTF|오케스트르 나시오날 드 로르트Ffra) | 프랑스 방송 협회 국립 관현악단 (ORTF 국립 관현악단) |
1975–현재 | Orchestre national de France|오케스트르 나시오날 드 프랑스fra | 프랑스 국립 관현악단 |
2. 1. 창단과 초기 활동 (1934-1944)
1934년 1월, 당시 우편 장관이었던 장 미스틀레르의 제안으로 프랑스 국립 방송 산하에 관현악단이 창단되었다.[1] 창단 당시 명칭은 '오케스트르 나시오날'(Orchestre National|오케스트르 나시오날프랑스어)이었으며, 80명의 단원으로 구성되었다.[1] 초대 음악 감독으로는 데지레-에밀 앵겔브레슈트가 임명되어 엄격한 단원 선발과 연습을 통해 악단의 기틀을 마련했다.[1] 창단 단원들은 파리 오페라 관현악단 등 다른 악단과의 겸직이 금지되는 전속 계약을 맺었다.[1] 첫 콘서트는 1934년 3월 13일 파리 음악원에서 열렸다.[1] 초기에는 앵겔브레슈트 외에도 로제 데조르미에르, 외젠 비고, 그리고 당시 앵겔브레슈트의 부지휘자였던 마뉘엘 로젠탈 등이 주요 지휘자로 활동했다.[1]1939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단원 절반이 프랑스 군에 징집되었다.[1] 남은 단원들은 1939년 10월부터 렌으로 옮겨 활동했으나, 1940년 6월 도시 폭격으로 인해 악단은 해산될 수밖에 없었다.[1] 이후 나치 독일의 프랑스 점령 하에서 비시 정부는 1941년 3월 마르세유에서 악단을 재창설했다.[1] 이 과정에서 유대인 음악가들은 악단에서 배제되었다.[1] 악단은 독일군 군정의 엄격한 감독 아래 축소된 형태로 활동을 이어갔으며, 1943년 3월 파리로 복귀했다.[1]
2. 2. 전후 재건과 발전 (1944-1975)
1944년 파리 해방과 함께 악단은 활동의 자유를 되찾았다. 점령 기간 동안의 역할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진 후, 독일군 포로 수용소에서 풀려난 마뉘엘 로젠탈이 제2대 상임 지휘자로 부임했다.[1] 로젠탈은 독일 점령 하에 금지되었던 동시대 및 프랑스 음악을 오케스트라 프로그램에 복원했다. 악단은 재편성되어 1945년 3월 23일 국영 라디오 라디오디퓨종 프랑세즈 산하로 편입되었고, 명칭은 '오케스트르 나시오날 드 라 라디오디퓨종 프랑세즈'(Orchestre national de la Radiodiffusion françaisefra)가 되었다. 로젠탈과 그 후임인 로제르 데조르미에르는 각각 4년과 5년의 단임에 그쳤지만, 답보 상태에 있던 악단의 연주력을 전쟁 이전 수준으로 회복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악단은 프랑스를 위한 문화 대사 역할도 시작하여 1946년 베를린과 런던, 1948년에는 샤를 뮌슈의 지휘로 북미 순회 공연을 가졌다.[1] 1947년에는 지휘자 파울 클레츠키와 함께 첫 공식 녹음을 진행했는데, 이는 모데스트 무소르크스키의 전람회의 그림(모리스 라벨 편곡)과 라벨의 볼레로였다.[1]1949년 2월 9일, 프랑스 국영 라디오 조직의 이름이 라디오디퓨종-텔레비지옹 프랑세즈(RTF)로 변경되면서 악단 명칭도 '오케스트르 나시오날 드 라 RTF'(Orchestre national de la RTFfra)로 바뀌었다. 동시대 음악 분야에서 악단은 1950년 피에르 불레즈의 ''물의 태양''(Le Soleil des eauxfra)과 메시앙의 ''투랑갈릴라 교향곡''(Turangalîla-Symphoniefra) 유럽 초연(엑상프로방스), 1951년 앙리 뒤티외의 교향곡 1번 초연 등 중요한 연주를 맡았다.[1] 또한 야샤 호렌슈타인의 지휘로 알반 베르크의 ''보체크''(Wozzeckdeu), 안톤 브루크너와 구스타프 말러의 여러 교향곡들을 프랑스 초연으로 선보였다.[1]
1952년, 수석 지휘자였던 데조르미에르가 뇌졸중으로 갑작스럽게 은퇴하면서 이후 8년간 악단은 공식적인 상임 지휘자 없이 운영되었다. 이 시기에는 앙드레 클뤼탕스를 비롯한 정기적인 객원 지휘자들이 주로 활동했다.[2] 클뤼탕스는 프랑스 음악 외에도 독일이나 오스트리아 음악으로 레퍼토리를 확장했으며, 특히 독일 레퍼토리 연주로 명성을 얻었다. 그는 악단을 이끌고 소련 투어(1959), 잘츠부르크 페스티벌(1959), 중동 투어(1960)를 성공적으로 마쳤다.[1] 1954년에는 헤르만 셰르헨의 지휘로 에드가 바레즈의 ''사막''(Désertsfra)을 세계 초연했으며,[1] 1958년에는 작곡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가 직접 파리를 방문하여 클뤼탕스의 지휘로 자신의 피아노 협주곡 두 곡과 교향곡 11번을 녹음하기도 했다. 1950년대 동안 악단은 에이토르 빌라로부스의 지휘로 그의 작품들을 EMI에서 녹음했다.
1960년, 모리스 르 루가 악단 최초의 '음악 감독' 직함으로 부임하여 1967년까지 활동했다. 1962년부터는 샤를 뮌슈가 임명되어 르 루와 공동 상임 지휘자로 활동했으며, 뮌슈는 1968년 파리 관현악단으로 옮길 때까지 재임했다. 1964년 6월 27일, 방송국의 명칭이 '프랑스 방송 협회'(Office de Radiodiffusion-Télévision Françaisefra, ORTF)로 변경됨에 따라 악단 이름도 '오케스트르 나시오날 드 로르트F'(Orchestre national de l'ORTFfra)로 개칭되었다. 이 시기 파리에 ''메종 드 라 라디오''가 개관했지만, 악단은 여전히 샹젤리제 극장에서 주로 공연했다. 1966년에는 샤를 뮌슈와 조르주 세바스티앙의 지휘로 일본을 처음 방문했다.
1968년, 장 마르티농이 음악 감독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철저한 계획과 연습 방침으로 악단의 연주력 향상에 주력했으며, 신설된 파리 관현악단과의 경쟁 속에서 악단의 위상을 지키려 노력했다. 동시에 도이체 그라모폰과 계약하여 클로드 드뷔시의 관현악 작품 전곡과 카미유 생상스의 교향곡 등 프랑스 음악을 중심으로 여러 음반을 녹음했다.
마르티농이 지병인 골수암 악화로 1973년 퇴임한 후, 세르주 첼리비다케가 '수석 객원 지휘자'(Premier Chef Invitéfra)로 초빙되었다. 1974년 10월, 악단 창립 40주년을 기념하여 첼리비다케의 지휘와 아르투로 베네데티 미켈란젤리의 협연으로 기념 콘서트가 열렸다. 그러나 첼리비다케는 일부 단원들과의 갈등으로 인해 1975년 계약을 종료하고 슈투트가르트 남서독일 방송 교향악단으로 이임하면서 단기 재임에 그쳤다. 1975년 1월 라디오 프랑스가 창설되면서 악단은 현재의 명칭인 '프랑스 국립 관현악단'(Orchestre National de Francefra)으로 최종 개칭되었다.
2. 3. 프랑스 국립 관현악단 시대 (1975-현재)
1975년 1월 라디오 프랑스의 창설로 인해 ORTF가 7개 조직으로 분할되면서, 악단은 현재의 명칭인 '''프랑스 국립 관현악단'''(Orchestre national de Francefra)으로 최종 개칭되었다. 이와 함께 라디오 프랑스로 관리 및 운영이 이관되었다. 세르지우 첼리비다케가 초대 음악 감독으로 주목받았으나, 일부 단원과의 갈등으로 1975년에 1년도 채 안 되어 사임했다. 이후 한동안 상임 지휘자를 두지 않고 레너드 번스타인, 볼프강 사발리쉬, 오자와 세이지와 같은 유명 객원 지휘자들이 활동하며 국제적 명성을 쌓는 데 집중했다. 1976년에는 여러 소규모 앙상블을 통합하여 새로운 상설 오케스트라인 오케스트르 필하모니크 드 라디오 프랑스가 창설되기도 했다.1977년 로린 마젤이 수석 객원 지휘자(Premier chef invitéfra)로 취임했으며, 1988년부터 1991년까지 음악 감독을 역임했다. 마젤의 뒤를 이어 샤를 뒤투아가 1991년부터 2001년까지 음악 감독을 맡았다. 2002년부터 2008년까지는 쿠르트 마주어가 음악 감독으로 활동했으며, 2006년 8월에는 프롬스에서 악단의 데뷔 무대를 지휘했다.[3]
다니엘레 가티는 2008년부터 2016년까지 음악 감독을 역임했다. 2016년 6월, 라디오 프랑스는 엠마누엘 크리빈을 2017년-2018년 시즌부터 3년 초기 계약으로 차기 음악 감독으로 임명한다고 발표했다.[4] 크리빈은 2016년-2017년 시즌 동안 음악 감독 내정자(Directeur musical désignéfra) 직함을 가졌다.[5] 그러나 2020년 5월, 크리빈은 원래 예정된 퇴임보다 1년 앞서 즉시 음악 감독직에서 사임했다.[7]
2018년 9월 악단을 처음 객원 지휘했던 크리스티안 머첼라루는[8] 2019년 11월 차기 음악 감독으로 발표되었으며, 임기는 2021년 9월 1일부터 4년이었다.[6] 크리빈의 조기 사임으로 머첼라루는 예정보다 1년 빠른 2020년 9월 1일에 음악 감독으로 취임했다.[9] 2022년 9월, 악단은 머첼라루의 음악 감독 계약을 2027년까지 연장한다고 발표했다.[10] 머첼라루는 2026년-2027년 시즌 종료와 함께 임기를 마칠 예정이다.[11][12]
2024년 11월, 악단은 필리페 조르당을 2027년-2028년 시즌부터 차기 음악 감독으로 임명한다고 발표했다.[11][12] 조르당은 2022년 10월에 처음 악단을 객원 지휘한 바 있다.
악단은 EMI 레코드를 통해 프랑스 레퍼토리를 녹음했으며, 라디오 프랑스 자체 레이블을 통해서도 내이브 레코드와 협력하여 음반을 발매하고 있다.
2. 3. 1. 한국과의 관계
1977년 로린 마젤이 수석 객원 지휘자로 취임했으며, 이듬해인 1978년에 이 콤비로 한국을 방문하여 공연을 가졌다.3. 주요 활동 및 특징
1944년부터 샹젤리제 극장을 주요 공연장으로 삼아 활동하며, 관현악 연주회 외에 오페라나 발레 공연에도 참여한다. 국립 관현악단이자 방송 관현악단으로서 메종 드 라디오 프랑스의 살르 올리비에 메시앙에서도 종종 연주회를 개최한다. 연주회는 주로 라디오 프랑스를 통해 라디오와 텔레비전으로 중계된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동시대 작곡가들의 현대 음악 연주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올리비에 메시앙, 에드가 바레즈, 앙리 뒤티외, 야니스 크세나키스 등 프랑스 작곡가나 프랑스에 거주하던 작곡가들의 신작을 세계 초연 또는 프랑스 초연하며 현대 음악 발전에 기여했다. 최근에는 중국 출신 작곡가 천 치강의 작품을 버진 클래식스 레이블로 녹음하기도 했다.
프랑스 음악뿐만 아니라 말러, 쇼스타코비치, 베토벤, 브람스, 브루크너, 차이콥스키 등의 유명 관현악 작품도 폭넓게 연주한다. 최근 라디오 프랑스의 방송 중계 음원이 음반으로 제작되면서 프랑스 외 작곡가 작품의 녹음도 활발히 선보이고 있다.
방송국 소속 악단으로서 현대 작품 연주에 적극적이며, 넓은 레퍼토리와 풍부한 녹음을 자랑한다. 역대 수석 지휘자와 음악 감독들이 프랑스 음악에 강점을 보여왔기 때문에, 프랑스 음악 녹음으로 특히 명성이 높다. 특히 장 마르티농 지휘의 클로드 드뷔시 관현악 전집과 카미유 생상스 교향곡 전집, 로린 마젤 지휘의 모리스 라벨 관현악곡집, 샤를 뒤투아 지휘의 알베르 루셀 교향곡 전집 등은 오늘날에도 명반으로 높이 평가받는다.
4. 역대 지휘자
상임 지휘자
1951년 ~ 1958년
음악 감독
1975년
음악 감독
1988년 ~ 1990년
명예 음악 감독
2008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