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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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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 대대는 1950년 한국 전쟁 발발 이후 유엔 결의에 따라 파견된 프랑스 지상군 부대이다. 1950년 11월 부산에 도착하여 미국 제2보병사단에 배속되었으며, 원주 전투, 지평리 전투 등 주요 전투에 참전하여 혁혁한 공을 세웠다. 약 3,400명이 참전하여 262명이 전사하고 1,008명이 부상했으며, 휴전 이후 육군 훈장 등을 받고 한국을 떠났다.

2. 경위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대한민국을 지원하기 위한 결의안을 채택했다. 프랑스는 유엔의 결의에 따라 한국 전쟁 참전을 결정했다. 1950년 7월 22일 동부 함대 소속 구축함 1척(La Grandiere)을 파견하였고, 이 함정은 7월 29일 한국 해역에 도착, 미국 제7함대에 배속되었다.[1] 1950년 8월 25일, 프랑스 정부는 구축함 외에 지상군 파견도 결정하여 현역병과 예비역 중에서 지원자를 모집, 1개 대대 규모의 지상군을 파견하기로 했다.[1]

프랑스 대대는 1950년 10월 25일 프랑스 본토의 마르세유에서 출항하여 11월 29일 부산에 도착, 미 제2보병사단 예하 23연대에 배속되어 전투에 참가하게 된다.[1]

3. 구성

프랑스 대대는 3개의 소총 중대, 본부 중대, 지원 중대로 구성되었다. 1중대는 주로 해병대 출신, 2중대는 파리 경비대 출신, 3중대는 공수부대와 외인부대 출신 예비역 지원자들로 구성되어 각기 다른 특성을 보였다.[1] 처음에는 총 병력이 약 400명이었다.[1] 제2차 세계 대전 영웅인 몽클라르 장군이 자원하여 중령으로 강등, 프랑스 대대를 지휘했다.[2]

4. 주요 전투 및 활동

프랑스 대대는 1951년 1월, 강원도 횡성 북쪽에서 북한군 5군단의 신정공세를 저지하는 전투에 처음 투입된 이후, 주로 중부 전선을 중심으로 고지전에 참여하여 많은 격전을 치렀다. 특히 지평리 전투에서 중국군의 포위 공격을 막아내고 승리하여 이름을 알렸다.

1951년 봄, 프랑스 대대는 38선을 넘어 화천군 지역으로 진격했다. 이 과정에서 공병 소대의 실수로 잠시 후퇴하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 미군이 중국군의 새로운 공세를 막는 데 기여했다. 같은 해 가을에는 피의 능선 전투에 참전하여 한 달 동안 60명이 사망하고 200명이 부상당하는 피해를 입었다.

1952년 가을, 프랑스 대대는 충청북도 청원군에서 중국군의 서울 진격을 막는 전투에 참여했다. 이 전투는 제1차 세계 대전 중의 베르됭 전투와 비견될 정도로 치열한 참호전이었으며, 프랑스 대대는 47명이 사망하고 144명이 부상당했지만, 중국군에게는 2,000명의 사상자를 안겨주며 저항했다.

1953년 겨울과 봄, 프랑스 대대는 북한군중국군이 서울로 진격하는 것을 막는 전투에 참여했다.

1953년 7월 한국 휴전 협정이 체결된 후, 프랑스 대대는 한국을 떠났다. 프랑스 대대는 한국 전쟁 기간 동안 육군 훈장 5개, 군사 훈장 색상의 프랑스 포라제르, 대한민국 대통령 표창 2개, 미국 우수 부대 표창 3개를 받았다.

매슈 리지웨이 장군은 미국 의회 합동 회의에서 프랑스 대대의 용맹함을 칭찬하며, 이들이 미국과 프랑스 역사상 최고의 부대와 견줄 만하다고 언급했다. 또한, 제23보병연대 사령관 폴 L. 프리먼 주니어는 프랑스 대대가 어떤 임무를 맡겨도 훌륭하게 수행해낼 것이라고 극찬했다.[1]

프랑스 대대 소속 루이 미세리는 피의 능선 전투에서 보여준 뛰어난 용맹으로 미국의 수훈 십자 훈장을 받았다.[1]

4. 1. 원주 전투 (1951년 1월)

미국 제2보병사단에 배속된 프랑스 대대는 1951년 1월 7일부터 12일까지 원주 전투 (1, 2차)에 참여하여 북한군의 진격을 저지하는 데 기여했다.[1]

4. 2. 쌍굴 전투 (1951년 2월 1일 ~ 2일)

1951년 1월 7일부터 12일까지 원주 전투 (1, 2차)에 참여하여 북한군의 진격을 저지한 프랑스 대대는 1951년 2월 1일 ~ 2일 쌍굴 전투에 참전했다.[1] 이 전투에서 프랑스 대대는 미군과 협력하여 적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격퇴했다.[1]

4. 3. 지평리 전투 (1951년 2월 3일 ~ 16일)

프랑스 대대는 1951년 2월 11일부터 지평리 전투에 참전했다. 이 전투에서 미 2사단 23연대와 프랑스 대대는 중국군의 포위 공격을 3일 동안 막아내고 지평리를 사수하여 중국군의 공격 의도를 분쇄했다. 이는 유엔군이 반격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다.

매슈 리지웨이 장군은 미 의회 합동 회의에서 제23미국보병연대와 프랑스 대대가 영하의 날씨 속에서 수적으로 우세한 중국군 보병의 공격을 격퇴했다고 언급하며, 이들의 전투 행동이 양국의 최고 부대에 부합한다고 극찬했다.

4. 4. 1037고지 전투 (1951년 2월)

프랑스 대대는 서울에서 동쪽으로 약 80km 떨어진 1037고지 전투에 참전하여 공격과 점령 과정에서 40명이 사망하고 200명이 부상당했다.

4. 5. 부채살 계곡 전투 (1951년 5월)

1951년 5월 17일, 프랑스 대대는 부채살 계곡에서 중국군의 춘계 공세를 저지하려다 퇴로가 차단되어 고립되었다. 그러나 미 23연대와 함께 중공군의 차단선을 돌파하고 5월 21일 한계리 남동쪽 643고지 부근으로 철수하였다.[1]

4. 6. 단장의 능선 전투 (1951년 9월 ~ 10월)

미 23연대가 공격에 실패하고 물러난 단장의 능선 전투에 프랑스 대대가 투입되었다. 그러나 프랑스 대대 역시 9월 15일과 26일 공격에서 100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능선 점령에 실패했다. 부대를 재정비한 프랑스 대대는 10월 6일 931고지, 10월 13일 851고지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고, 단장의 능선 전투는 종료했다.[1]

4. 7. 화살머리고지 전투 (1952년 10월)

1952년 7월, 프랑스 대대는 경기도 철원 서쪽 제임스타운 전선에서 중국군과 전초 진지 쟁탈전을 벌였다. 10월 3일에는 지형이 화살촉과 유사하여 화살머리고지라 불리는 고지의 주저항선에 배치되어 중국군과 격전을 치르게 되었다.[1] 10월 6일 저녁, 중국군이 공격을 개시하자 프랑스 대대는 가능한 모든 화력 지원을 받으며 중국군의 파상공세를 저지하였다. 이후 중국군은 7일 새벽과 8일 저녁에 총공격을 감행했으나, 프랑스 대대는 이를 모두 격퇴하였다.[1]

프랑스 대대 소속 루이 미세리 하사는 이 전투에서 보여준 용맹으로 미국 수훈 십자 훈장을 받았다.[1]

4. 8. 중가산 전투 (1953년 6월 ~ 7월)

1953년 6월 20일, 프랑스 대대는 평강 남쪽 중가산 일대에 배치되어 478고지에 디크(Dick) 전초를 설치했다. 중국군은 7월 8일부터 이 전초를 점령하기 위해 여러 차례 공격해왔으나, 프랑스 대대는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고지를 지켜냈다. 이 중가산 전투는 프랑스 대대의 한국전쟁 마지막 전투로 기록되었다.

5. 한국전쟁 이후

한국 휴전 협정 체결 이후, 1953년 10월 22일 프랑스 대대는 수송선을 타고 인도차이나로 이동했다. 프랑스 대대는 그곳에서 2개 대대 규모의 연대로 확대되어 프랑스 ''제100 기동 부대''의 핵심이 되었다. 인도차이나에서의 복무 동안, 이 부대(새로운 명칭인 ''한국 연대'')는 1954년 6월 ''식민지 도로 19번''을 따라 벌어진 망양 고개 전투, 그리고 한 달 뒤 ''식민지 도로 14번''을 따라 벌어진 추드레 고개 전투에서 격렬한 전투에 참여하여 많은 사상자를 냈다. 인도차이나에 도착한 시점부터 1954년 7월 20일 휴전까지 제1대대는 238명이 전사하거나 부상당했고, 제2대대는 202명이 전사하거나 부상당했다. 또한, 대대에 배속된 인도차이나인 34명이 전투 중 사망했다. 1954년 9월 1일, ''한국 연대''는 해산되어 대대 규모로 축소되었다. 이 대대는 1955년 7월 17일까지 인도차이나에 주둔하다가 사이공에서 알제리로 이동하여 진행 중인 반란 진압에 참여했다.

프랑스 대대가 1953년 11월 1일 사이공에서 수송선에서 하선


1955년 8월 10일, 대대는 알제에 상륙하여 콘스탄틴 지역에서 일련의 주둔 및 수색 파괴 작전을 시작했다. 1960년 9월 1일, 이 대대는 제156 보병 연대(156e Régiment d'Infanterie|156e Régiment d'Infanterie프랑스어)와 통합되어 ''제156 보병 연대-한국 연대''라는 명칭을 받았다. 총 48명의 연대 병력이 알제리에서 전사했다. 이 연대는 에비앙 협정 이후 프랑스로 귀환했으며, 1962년 프랑스로 돌아온 후 해산되었다.

6. 평가 및 의의

프랑스 대대는 한국 전쟁에서 뛰어난 용맹성과 헌신을 보여주며 유엔군의 승리에 기여했다.[1] 특히, 지평리 전투에서의 활약은 매슈 리지웨이 장군 등 미군 지휘관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1]

매슈 리지웨이 장군은 1952년 5월 22일 미국 의회 합동 회의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저는 폴 L. 프리먼 주니어 대령이 지휘하는 제23미국보병연대와 프랑스 대대에 대해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일반 전선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두 번이나 고립되었고, 영하의 날씨에서 두 번이나 완전히 포위되었지만, 중과부적으로 압도적인 중국군 보병의 주야간 공격을 격퇴했습니다...저는 이 자리에서 이 미국 군인들과 프랑스 동료들이 미국이나 프랑스가 자국 역사에서 배출한 최고의 부대의 전투 행동에 모든 면에서 부합했다고 확신한다는 것을 기록하고 싶습니다.

제23보병연대 사령관 폴 L. 프리먼 주니어는 프랑스 대대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 그들(프랑스군)에게 방어를 명령하면, 그들이 그 위치를 지킬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 점령해야 할 언덕을 보여주면, 그들이 꼭대기에 오를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습니다. 이틀 동안 자리를 비워도, 포탄 폭풍과 적의 물결이 그들을 덮쳐도 프랑스군은 여전히 그곳에 있습니다!

프랑스 대대 소속 루이 미세리는 피의 능선 전투에서 보여준 용맹한 행동으로 미국으로부터 수훈 십자 훈장을 받았다. 그의 인용문은 다음과 같다.

> 수훈 십자 훈장은 1951년 9월 26일, 한국 피아리에서 제23보병연대, 제2보병사단에 배속된 프랑스 대대 제3중대에서 복무하면서 유엔의 무장한 적에 대한 군사 작전과 관련하여 특별한 영웅적 행위를 한 프랑스 육군 소속 루이 미세리 하사에게 수여됩니다. "피의 능선"에 대한 공격에서 분대장으로서, 미세리 하사는 적의 박격포와 포병 사격의 맹렬한 포화 속에서 분대를 이끌고 적의 벙커가 위치한 경사면으로 향했습니다. 그는 분대를 두 개로 나누어 세 명의 부대원을 이끌고 벙커를 공격했습니다. 그의 동료들이 그의 전진을 엄호하는 동안, 그는 불의 세례를 받으며 홀로 전진하여 첫 번째 벙커를 공격하고 침묵시켰습니다. 그는 그의 분대가 전진하고 재편성될 수 있도록 길을 열 때까지 공격을 계속했습니다. 적이 반격을 시작했을 때, 미세리 하사는 심각한 부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격퇴하여 그의 소총으로 15명의 사상자를 입혔습니다. 이 위치가 유지 불가능해지고 후퇴 명령을 받았을 때, 그는 부하들을 한 명씩 뒤로 보냈고, 부상을 입은 상태에서 그를 도운 한 명을 제외하고는 임무에 대한 완전한 보고를 하기 전까지는 후송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이 치명적인 공격 동안 "피의 능선" 정상에 도달한 몇 안 되는 사람들 중 한 명인 미세리 하사의 용감함과 특별한 헌신은 그에게 최고의 영예를 안겨주며 육군과 프랑스 공화국의 최고의 전통을 지켜냅니다.

프랑스군의 한국전쟁 참전은 대한민국과 프랑스 양국 간의 우호 관계 증진에 크게 기여했다.[1]

7. 전후 한-프랑스 관계

(이전 출력이 없으므로, 수정할 내용이 없습니다. 원본 소스와 요약, 그리고 작성할 섹션 제목을 제공해주시면 위키텍스트 형식으로 작성해드리겠습니다.)

8. 기록

항목내용
참전 기간1950년 7월 29일 (구축함), 1950년 11월 29일 (지상군) ~ 1953년 11월 6일 (1965년 6월까지 일부 잔류)
연인원약 3,400여 명
인명 피해전사 262명, 부상 1,008명
훈장



매슈 리지웨이 장군은 1952년 5월 22일 미국 의회 합동 회의에서 프랑스 대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I shall speak briefly of the Twenty-Third US Infantry Regiment, Colonel Paul L. Freeman commanding, with the French Battalion...Isolated far in advance of the general battle line, twice it has been surrounded by enemy forces in temperatures dropping below zero, and twice has fought its way out...I wish to record here my conviction that these American fighting men, with their French comrades-in-arms, measured up in every way to the battle conduct of the finest troops America or France has produced throughout their national existence.영어

(번역) ...저는 폴 L. 프리먼 주니어 대령이 지휘하는 제23미국보병연대와 프랑스 대대에 대해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일반 전선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두 번이나 고립되었고, 영하의 날씨에서 두 번이나 완전히 포위되었지만, 중과부적으로 압도적인 중국군 보병의 주야간 공격을 격퇴했습니다...저는 이 자리에서 이 미국 군인들과 프랑스 동료들이 미국이나 프랑스가 자국 역사에서 배출한 최고의 부대의 전투 행동에 모든 면에서 부합했다고 확신한다는 것을 기록하고 싶습니다.

프랑스 대대 소속 루이 미세리는 그의 행동으로 미국으로부터 수훈 십자 훈장을 받았다. 그의 인용문은 다음과 같다.

The Distinguished Service Cross is presented to Louis Misseri, Sergeant, Army of France, for extraordinary heroism in connection with military operations against an armed enemy of the United Nations while serving with the Third Company of the French Battalion, attached to the Twenty-Third Infantry Regiment, Second Infantry Division, in action against enemy aggressor forces at Pia-ri, Korea on September 26, 1951. As a squad leader in an attack on "Heartbreak Ridge." Sergeant Misseri led his squad through an intense barrage of enemy mortar and artillery fire to the slope of a hill occupied by a series of enemy bunkers. Dividing his squad into two sections, he personally led three men in an assault on the bunkers. While his comrades covered his advance, he moved forward alone through a hail of fire, attacked and silenced the first bunker. He continued his attack, opening the way for his squad to advance and reorganize. When the enemy launched a counterattack, Sergeant Misseri, although seriously wounded, repulsed them, accounting for fifteen casualties with his rifle. When this position became untenable and the order to withdraw was given, he sent his men back one by one and, although wounded, refused to be evacuated until he had made a complete report of the mission, except for one man who assisted him. One of the few men to reach the crest of "Heartbreak Ridge" during this bitter assault, Sergeant Misseri's gallantry and extraordinary devotion to duty reflect the highest credit on himself and uphold the finest traditions of the Army and the Republic of France.영어

(번역) 수훈 십자 훈장은 1951년 9월 26일, 한국 피아리에서 제23보병연대, 제2보병사단에 배속된 프랑스 대대 제3중대에서 복무하면서 유엔의 무장한 적에 대한 군사 작전과 관련하여 특별한 영웅적 행위를 한 프랑스 육군 소속 루이 미세리 하사에게 수여됩니다. "피의 능선"에 대한 공격에서 분대장으로서, 미세리 하사는 적의 박격포와 포병 사격의 맹렬한 포화 속에서 분대를 이끌고 적의 벙커가 위치한 경사면으로 향했습니다. 그는 분대를 두 개로 나누어 세 명의 부대원을 이끌고 벙커를 공격했습니다. 그의 동료들이 그의 전진을 엄호하는 동안, 그는 불의 세례를 받으며 홀로 전진하여 첫 번째 벙커를 공격하고 침묵시켰습니다. 그는 그의 분대가 전진하고 재편성될 수 있도록 길을 열 때까지 공격을 계속했습니다. 적이 반격을 시작했을 때, 미세리 하사는 심각한 부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격퇴하여 그의 소총으로 15명의 사상자를 입혔습니다. 이 위치가 유지 불가능해지고 후퇴 명령을 받았을 때, 그는 부하들을 한 명씩 뒤로 보냈고, 부상을 입은 상태에서 그를 도운 한 명을 제외하고는 임무에 대한 완전한 보고를 하기 전까지는 후송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이 치명적인 공격 동안 "피의 능선" 정상에 도달한 몇 안 되는 사람들 중 한 명인 미세리 하사의 용감함과 특별한 헌신은 그에게 최고의 영예를 안겨주며 육군프랑스 공화국의 최고의 전통을 지켜냅니다.

제23보병연대 사령관 폴 L. 프리먼 주니어는 프랑스 대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If I order them to defend, I can be sure that they will hold the position. If I show them a hill to capture, I can be sure they will be on top. If I leave for two days, the French will still be there despite the storm of shells and waves of enemies that engulf them!영어

(번역) 그들에게 방어를 명령하면, 그들이 그 위치를 지킬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 점령해야 할 언덕을 보여주면, 그들이 꼭대기에 오를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습니다. 이틀 동안 자리를 비워도, 포탄 폭풍과 적의 물결이 그들을 덮쳐도 프랑스군은 여전히 그곳에 있습니다!

참조

[1] 웹사이트 Archived copy http://www.cdef.terr[...] 2012-05-19
[2] 서적 Ebb and Flow: November 1950 – July 1951, United States Army in the Korean War http://www.history.a[...] Center of Military History, United States Army 2021-10-25
[3] 서적 United States Army in the Korean War: Truce Tent and Fighting Front https://history.army[...] United States Army Center of Military History
[4] 웹사이트 Interred at UNMCK http://www.unmck.or.[...]
[5] 뉴스 Text of Gen. Ridgway's Report to Congress on Korea and Japan https://www.proquest[...] 1952-05-23
[6] 웹사이트 French Korean War Recipients of the Distinguished Service Cross – Citations (France) http://www.homeofher[...] 2006-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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