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메테우스주의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프로메테우스주의는 그리스 신화의 프로메테우스에서 유래된 개념으로, 폭압적인 권위에 대한 저항과 계몽을 상징한다. 유제프 피우수트스키는 러시아 제국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이 사상을 발전시켰으며, 1904년 일본에 보낸 각서에서 러시아에 대항하는 투쟁에서 비러시아 민족들을 활용할 필요성을 강조했다. 폴란드는 발트해, 흑해, 카스피해 유역의 민족들과 협력하며 프로메테우스주의를 추진했으나, 독일의 개입, 재정적 어려움, 피우수트스키의 사망 등으로 쇠퇴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공산 폴란드에서는 공식적으로 추진되지 않았지만, 소련 해체에 영향을 미쳤으며,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정치적 담론에서 다시 중요성을 얻고 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러시아의 국민주의 - 2022년 모스크바 집회
2022년 모스크바 집회는 러시아 정부가 우크라이나 침공을 정당화하고 국내 여론을 결집하기 위해 루즈니키 스타디움에서 개최한 대규모 집회로, 푸틴 대통령 연설, 공연, 'Z' 기호 사용 등으로 반서방 정서와 소련 향수를 드러내 국제 사회의 비판을 받았다. - 프로메테우스 - 프로메테우스 (카프카)
프란츠 카프카의 단편 소설인 프로메테우스는 그의 단편집 《The Complete Stories》에 수록되어 있으며 그의 다양한 작품 세계를 보여준다. - 프로메테우스 - 프로메테우스 (나무)
프로메테우스는 1950년대에 발견된 브리슬콘 소나무로, 한때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된 생물로 여겨졌으나, 연구 과정에서 벌목되어 환경 보호에 대한 인식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 유제프 피우수트스키 - 사나치아
사나치아는 폴란드 정치 부패에 대한 환멸로 결성된 정치 운동으로, 유제프 피우수트스키의 지도 아래 부패 제거와 경제 안정에 주력했지만, 그의 사후 파벌로 나뉘고 공산 정권에 의해 탄압받았다. - 유제프 피우수트스키 - 피우수트스키 개인숭배
피우수트스키 개인숭배는 폴란드의 독립과 폴란드-소비에트 전쟁에서의 지도력으로 폴란드에서 숭배받은 정치가이자 군인인 유제프 피우수트스키에 대한 인물 숭배를 의미하며, 그의 사후 추종자들에 의해 확산되었고 공산주의 정권 하에서 억압받았으나 폴란드 공산주의 몰락 이후 재평가받아 현대 폴란드 정치 및 문화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프로메테우스주의 | |
---|---|
개요 | |
유형 | 정치적 프로젝트 |
목표 | 러시아 제국 약화 중앙 및 동유럽 국가들의 독립 지원 |
시기 | 20세기 초 |
주창자 | 유제프 피우수트스키 |
배경 | |
역사적 맥락 |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베르사유 조약 체제의 불안정성 러시아 혁명 이후 소비에트 연방의 등장 |
주요 목표 | 러시아의 영향력 약화 동유럽 국가들의 독립 및 협력 강화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 도모 |
목표 | |
핵심 목표 | 러시아 제국의 약화 및 해체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 중앙 및 동유럽 국가들의 독립 유지 및 강화 지역 협력 및 연대 구축 |
주창자 및 지지 세력 | |
주요 인물 | 유제프 피우수트스키 |
주요 국가 | 폴란드 제2공화국 |
기타 지지 세력 | 우크라이나, 조지아, 아제르바이잔, 핀란드, 일본 등의 독립 운동가 및 정치 세력 |
주요 활동 | |
정보 활동 | 소비에트 연방 내부의 민족주의 운동 지원 반소비에트 선전 활동 |
외교 활동 | 동유럽 국가들과의 협력 강화 서방 국가들의 지원 확보 노력 |
군사 활동 | 소비에트 연방에 대한 잠재적 군사 위협 독립 운동 단체에 대한 지원 |
영향 및 평가 | |
긍정적 평가 | 동유럽 국가들의 독립 유지에 기여 소비에트 연방의 팽창을 억제 |
부정적 평가 | 러시아와의 관계 악화 지역 갈등 심화 가능성 |
역사적 중요성 | 냉전 시대 동유럽의 지정학적 상황에 영향 현대 러시아와 주변국 관계에 대한 이해를 돕는 요소 |
관련 용어 | |
관련 개념 | 반러시아주의 동유럽 연방주의 지정학 |
기타 | |
참고 문헌 |
2. 역사적 배경
"프로메테우스주의"라는 용어는 제우스에게 반항하여 인류에게 불을 선사한 그리스 신화의 프로메테우스에서 유래되었으며, 이는 계몽과 폭압적인 권위에 대한 저항을 상징하게 되었다.[3] 유제프 피우수트스키가 발전시킨 프로메테우스주의는 그가 러시아 정부에 의해 동시베리아로 망명하는 동안 얻은 러시아 제국에 대한 깊은 지식에 의해 뒷받침되었다.[3]
1940년 2월 12일, 에드문트 하라스키에비치는 폴란드의 프로메테우스적 노력에 대한 간략한 역사를 기록했다. 그는 1927년부터 1939년 9월 유럽에서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할 때까지 폴란드의 프로메테우스 프로그램을 조정하는 책임을 맡았던 폴란드 군사 정보 장교였다. 하라스키에비치는 나치 독일과 소련에 의해 점령된 폴란드에서 탈출하여 파리에서 그의 논문을 작성했다.[4]
피우수트스키는 1904년 일본 정부에 보낸 각서에서 러시아에 대항하는 투쟁에서 발트해, 흑해, 카스피해 유역에 거주하는 수많은 비러시아 민족들을 활용해야 할 필요성을 지적했다. 그는 폴란드 국민이 역사, 자유에 대한 사랑, 그리고 18세기 말 폴란드를 분할한 세 제국에 대한 타협하지 않는 입장 때문에, 그 투쟁에서 선두적인 역할을 하고 러시아에 의해 억압받는 다른 민족들의 해방을 도울 것이라고 강조했다.[5]
피우수트스키의 1904년 각서의 중요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하라스키에비치에 따르면, 프로메테우스 운동은 19세기 말 러시아 제국 내 많은 민족들 사이에서 시작된 민족 부흥에서 시작되었다. 이 부흥은 러시아 혁명으로 이어진 사회적 과정에서 비롯되었다. 폴란드, 우크라이나, 핀란드,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조지아, 아제르바이잔 등 비러시아 공동체에서 만들어진 거의 모든 사회주의 정당은 민족적 성격을 띠고 독립을 의제 맨 위에 두었다. 이들은 각 민족의 독립 운동을 이끌었으며, 독립을 옹호하는 순수한 민족적 성격을 가진 조직도 있었지만, 사회주의 정당들이 독립 열망을 러시아의 사회 운동과 연관시켰기 때문에 더 큰 역동성을 보여주었다.[7]
발트해 유역의 민족들—폴란드, 핀란드,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은 제2차 세계 대전까지 독립을 유지했다. 흑해 및 카스피해 유역의 민족들—우크라이나, 돈 코사크, 쿠반, 크림, 조지아, 아제르바이잔, 아르메니아, 북 코카서스—는 1919–1921년에 정치적으로 해방되었지만, 러시아 내전 동안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에 독립을 잃었다.[7]
1917–1921년에 발트해, 흑해, 카스피해 유역의 국가들이 러시아의 보호에서 벗어나는 동안, 폴란드는 그 민족들과 적극적으로 협력한 유일한 국가였다. 그러나 이러한 폴란드의 노력은 서방 연합의 반대에 직면했는데, 그들은 반공주의) 백색 러시아인들이 옛 러시아 제국을 재건하려는 노력을 지지했다. 한편, 독일은 점령군과 함께 리투아니아와 라트비아에서 영향력을 강화하고, 우크라이나의 파블로 스코로파츠키를 통해 비볼셰비키 러시아와의 우크라이나 연방을 구상했으며, 독일의 동맹국인 터키의 정치적 이익에 반하여 코카서스에서 독일의 패권을 시도했다.[8]
1920년 뮌헨에서 설립된 독일 내 백러시아 망명자들의 비밀 조직 아우프바우는 프로메테우스 운동과 유사한 목표를 가졌지만, 동쪽에서 독일의 경제적 이익에 부합하는 계획을 개발했다. 에리히 루덴도르프와 아돌프 히틀러가 주요 정치적 동맹국이었다. 아우프바우는 군사 개입을 통해 볼셰비키 정부를 전복하고, 볼셰비키 러시아를 여러 국가 사회주의 후계 국가로 분열시키려 했다.[9] 그러나 이 계획은 니콜라이 마르코프의 최고 군주 위원회가 프랑스의 지원을 받아 대러시아 복원을 선호하면서 좌절되었다. 1923년 11월 뮌헨 맥주 홀 폭동에서 히틀러가 독일에서 권력을 잡는 데 실패하면서 계획은 지연되었지만, 1933년 폴타베츠-오스트리아니치는 히틀러의 초청으로 베를린으로 이주했고, 히틀러 및 알프레트 로젠베르크와의 협력이 다시 강화되었다.[9]
독일의 우크라이나 민족 독립 지원은 폴란드의 프로메테우스 계획과 대립했는데, 이는 폴란드 국가의 파괴를 통해 독일-우크라이나 국경을 만드는 것을 수반했기 때문이다. 하라스키에비치는 독일의 접근 방식이 프로메테우스주의의 기본적인 이념적 원칙에서 벗어났다고 주장하며, 폴란드와 독일 사이에 조직적 또는 이념적 관계가 결코 없었다고 강조한다. 폴란드와 동맹을 맺은 프로메테우스 망명자들의 정당한 민족 대표들은 폴란드에 대한 뚜렷한 정치적 충성을 보여주었다.[9]
2. 1. 프로메테우스 신화와 그 상징성
"프로메테우스주의"라는 용어는 제우스에게 반항하여 인류에게 불을 선사한 그리스 신화의 프로메테우스에서 유래되었으며, 이는 계몽과 폭압적인 권위에 대한 저항을 상징하게 되었다.[3] 유제프 피우수트스키가 발전시킨 프로메테우스주의는 그가 러시아 정부에 의해 동시베리아로 망명하는 동안 얻은 러시아 제국에 대한 깊은 지식에 의해 뒷받침되었다.[3]
1940년 2월 12일, 에드문트 하라스키에비치는 폴란드의 프로메테우스적 노력에 대한 간략한 역사를 기록했다. 그는 1927년부터 1939년 9월 유럽에서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할 때까지 폴란드의 프로메테우스 프로그램을 조정하는 책임을 맡았던 폴란드 군사 정보 장교였다. 하라스키에비치는 나치 독일과 소련에 의해 점령된 폴란드에서 탈출하여 파리에서 그의 논문을 작성했다.[4]
피우수트스키는 1904년 일본 정부에 보낸 각서에서 러시아에 대항하는 투쟁에서 발트해, 흑해, 카스피해 유역에 거주하는 수많은 비러시아 민족들을 활용해야 할 필요성을 지적했다. 그는 폴란드 국민이 역사, 자유에 대한 사랑, 그리고 18세기 말 폴란드를 분할한 세 제국에 대한 타협하지 않는 입장 때문에, 그 투쟁에서 선두적인 역할을 하고 러시아에 의해 억압받는 다른 민족들의 해방을 도울 것이라고 강조했다.[5]
피우수트스키의 1904년 각서의 중요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하라스키에비치에 따르면, 프로메테우스 운동은 19세기 말 러시아 제국 내 많은 민족들 사이에서 시작된 민족 부흥에서 시작되었다. 이 부흥은 러시아 혁명으로 이어진 사회적 과정에서 비롯되었다. 폴란드, 우크라이나, 핀란드,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조지아, 아제르바이잔 등 비러시아 공동체에서 만들어진 거의 모든 사회주의 정당은 민족적 성격을 띠고 독립을 의제 맨 위에 두었다. 이들은 각 민족의 독립 운동을 이끌었으며, 독립을 옹호하는 순수한 민족적 성격을 가진 조직도 있었지만, 사회주의 정당들이 독립 열망을 러시아의 사회 운동과 연관시켰기 때문에 더 큰 역동성을 보여주었다.[7]
발트해 유역의 민족들—폴란드, 핀란드,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은 제2차 세계 대전까지 독립을 유지했다. 흑해 및 카스피해 유역의 민족들—우크라이나, 돈 코사크, 쿠반, 크림, 조지아, 아제르바이잔, 아르메니아, 북 코카서스—는 1919–1921년에 정치적으로 해방되었지만, 러시아 내전 동안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에 독립을 잃었다.[7]
1917–1921년에 발트해, 흑해, 카스피해 유역의 국가들이 러시아의 보호에서 벗어나는 동안, 폴란드는 그 민족들과 적극적으로 협력한 유일한 국가였다. 그러나 이러한 폴란드의 노력은 서방 연합의 반대에 직면했는데, 그들은 반공주의) 백색 러시아인들이 옛 러시아 제국을 재건하려는 노력을 지지했다. 한편, 독일은 점령군과 함께 리투아니아와 라트비아에서 영향력을 강화하고, 우크라이나의 파블로 스코로파츠키를 통해 비볼셰비키 러시아와의 우크라이나 연방을 구상했으며, 독일의 동맹국인 터키의 정치적 이익에 반하여 코카서스에서 독일의 패권을 시도했다.[8]
1920년 뮌헨에서 설립된 독일 내 백러시아 망명자들의 비밀 조직 아우프바우는 프로메테우스 운동과 유사한 목표를 가졌지만, 동쪽에서 독일의 경제적 이익에 부합하는 계획을 개발했다. 에리히 루덴도르프와 아돌프 히틀러가 주요 정치적 동맹국이었다. 아우프바우는 군사 개입을 통해 볼셰비키 정부를 전복하고, 볼셰비키 러시아를 여러 국가 사회주의 후계 국가로 분열시키려 했다.[9] 그러나 이 계획은 니콜라이 마르코프의 최고 군주 위원회가 프랑스의 지원을 받아 대러시아 복원을 선호하면서 좌절되었다. 1923년 11월 뮌헨 맥주 홀 폭동에서 히틀러가 독일에서 권력을 잡는 데 실패하면서 계획은 지연되었지만, 1933년 폴타베츠-오스트리아니치는 히틀러의 초청으로 베를린으로 이주했고, 히틀러 및 알프레트 로젠베르크와의 협력이 다시 강화되었다.[9]
독일의 우크라이나 민족 독립 지원은 폴란드의 프로메테우스 계획과 대립했는데, 이는 폴란드 국가의 파괴를 통해 독일-우크라이나 국경을 만드는 것을 수반했기 때문이다. 하라스키에비치는 독일의 접근 방식이 프로메테우스주의의 기본적인 이념적 원칙에서 벗어났다고 주장하며, 폴란드와 독일 사이에 조직적 또는 이념적 관계가 결코 없었다고 강조한다. 폴란드와 동맹을 맺은 프로메테우스 망명자들의 정당한 민족 대표들은 폴란드에 대한 뚜렷한 정치적 충성을 보여주었다.[9]
2. 2. 피우수트스키의 초기 구상 (1904-1918)
유제프 피우수트스키(Józef Piłsudski)는 러시아 제국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프로메테우스주의를 발전시켰다.[3] 그는 러시아 내전 동안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에 의해 우크라이나, 돈 코사크, 쿠반, 크림, 조지아, 아제르바이잔, 아르메니아, 북 코카서스 등이 독립을 잃었다고 보고, 이들 국가들과의 협력을 주장했다.[7]피우수트스키는 1904년 일본 정부에 보낸 각서에서 러시아에 대항하는 투쟁에서 발트해, 흑해, 카스피해 유역의 비러시아 민족들을 활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폴란드 국민이 러시아에 억압받는 다른 민족들의 해방을 돕는 선두 주자라고 보았다.[5]
피우수트스키는 각서에서 "러시아 국가의 구성 부분으로서 폴란드의 힘과 중요성은 러시아 국가를 주요 구성 요소로 분해하고 그 제국에 강제로 편입된 국가들을 해방하는 정치적 목표를 설정할 수 있게 한다."라고 주장하였다.[6]
2. 3. 제1차 세계 대전과 민족 독립 운동
3. 프로메테우스주의의 전개
3. 1. 제1기 (1918-1921): 폴란드의 역할과 초기 협력
폴란드는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소련 및 우크라이나와의 전쟁을 통해 동쪽 국경을 확정했고, 포즈난과 실롱스크 봉기, 바르미아와 마주리에서의 주민투표를 통해 독일과의 서쪽 국경을 확정했다. 또한, 체신 실롱스크, 스피시 및 오라바의 분쟁 지역을 놓고 체코슬로바키아와의 주민투표와 짧은 전쟁을 통해 남쪽 경계를 확정했다.[11]발트해 유역에서 핀란드, 에스토니아, 리투아니아, 라트비아가 독립 국가로 등장했으며, 폴란드는 이들을 최초로 승인한 국가 중 하나였다.[11] 그러나 폴란드-리투아니아 전쟁 이후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흑해와 카스피해 유역에서는 우크라이나, 크림 반도, 조지아, 아제르바이잔, 돈, 쿠반, 북캅카스의 해방이 있었다. 이델-우랄과 투르키스탄에서도 민족 부흥의 조짐이 나타났지만, "국민 의회" 소집에 그쳤다.[12]
폴란드는 1920년 4월 바르샤바 협정을 통해 시몬 페트류라의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과 정치 및 군사 동맹을 체결하고, 피우수트스키의 키예프 원정 (1920년 4월 25일 시작)을 감행했다.[13] 보흐단 쿠틸로프스키를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 주재 폴란드 장관으로 임명하고(1919년 2월), 캅카스에 폴란드 장관 및 군사 임무를 파견했다.[13] 1920년 5월 17일, 크림 공화국은 국제 연맹에 크림 반도를 폴란드의 보호령으로 해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13]
이 시기 유제프 피우수트스키 원수의 측근으로는 비톨트 요드코, 티투스 필리포비치, 율리안 스타체비치 장군, 발레리 스와베크 대령, 타데우시 셰첼 대령, 차르네츠키 소령, 아우구스트 잘레스키, 레온 바실레프스키, 헨리크 유제프스키, 율리우시 우카시에비치, 타데우시 호우우코, 마리안 슈물라코프스키, 얀 돔프스키, 미로스와프 아르치셰프스키, 바츠와프 젱제예비치 소령 및 로만 놀이 있었다.[14]





3. 2. 제2기 (1921-1923): 망명 정부와의 협력
폴란드의 두 번째 프로메테우스주의 시기(1921–1923)는 리가 조약으로 폴란드-소비에트 전쟁이 종결된 이후, 폴란드가 발트해 연안 국가들과 함께 확정된 동부 국경 내에서 독립적인 삶을 이어나간 시기를 가리킨다. 그러나 흑해와 카스피해 유역의 국가들은 소비에트 연방에 흡수되어 독립을 잃었고, 이들 국가들의 "합법적인" 정부와 정치 대표들은 망명했다.[15]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 정부는 폴란드, 프랑스, 체코슬로바키아로, 조지아 정부는 프랑스로, 아제르바이잔 정부는 튀르키예와 프랑스로 망명했다. 쿠반 및 돈 정부는 체코슬로바키아, 북 코카서스 산악 민족 센터는 튀르키예, 아르메니아 민족 센터는 프랑스, 타타르 민족 센터(크림, 이델-우랄, 투르케스탄)는 튀르키예, 프랑스, 폴란드로 망명했다.[15]
이 시기에는 유제프 피우수트스키 원수가 여전히 권력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처음에는 국가 원수 (''나첼니크 파스테'')로, 나중에는 잠시 참모 총장(''슈타브 구우니'')으로 있었다. 프로메테우스주의 문제는 참모 총장인 블라디슬라프 시코르스키 장군과 스타니스와프 할레르 장군, 그리고 참모 총장 제2국 (''오드지알 II'': 정보)의 국장인 이그나치 마투셰프스키 대령도 관여하게 되었다.[15]
폴란드는 폴란드 외무부, 이스탄불, 부쿠레슈티, 프라하, 테헤란, 파리의 폴란드 외교 사무소, 그리고 폴란드 참모 총장과 공식적인 접촉을 유지하는 프로메테우스 정치 망명자들과 협력했다. 1922년 이른 시기에 조지아 정부의 추천을 받은 첫 번째 조지아 장교 그룹이 폴란드군에 입대했다.[15]
3. 3. 제3기 (1923-1926): 프로메테우스주의의 일시적 중단
유제프 피우수트스키가 권력에서 물러난 1923년부터 1926년까지, 폴란드 정부는 프로메테우스주의 문제를 의제에서 제외했다.[16] 소련은 요시프 스탈린의 국적 프로그램을 소련의 비러시아 지역에서 자치 공화국을 설립하여 실행하는 한편, 해당 공화국 인구의 독립에 대한 마지막 충동을 억압했다.[16]폴란드는 폴란드 정부의 지식이나 동의 없이 프로메테우스주의 망명객과의 접촉을 지속했다. 군사 문제에서는 내무부 국적부(''Wydział'')의 책임자인 샤첼 대령, 차르네츠키 소령, 헨리크 수차넥-수체키 대위가, 외무부에서는 동부부 책임자인 율리우시 우카시에비치가 관여했다. 폴란드 정부의 공식적인 태도에 대한 예외는 조지아의 프로메테우스주의에 적용되었으며, 알렉산데르 스크르진스키 외무 장관과 스타니스와프 할레르 참모총장 양쪽의 지지를 받았다.[16]

3. 4. 제4기 (1926-1932): 프로메테우스주의의 부활과 조직적 협력
1926년 5월 쿠데타로 유제프 피우수트스키가 권력을 되찾은 이후 1932년 소련-폴란드 불가침 조약이 체결될 때까지 프로메테우스주의 단체들은 가장 활발하고 조직적인 협력을 진행했다.[16]1927년, 폴란드 외무부와 참모총장은 프로메테우스 문제를 공식적인 조직 형태로 다루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다양한 고위 관계자들이 이 문제를 다루었지만, 단일한 공식 기구는 없었다. 이제 외무부와 참모총장이 정치적 대표를 맡고, 군사부와 내무부가 간접적으로 관련되어 긴밀히 협조했다(군사부는 외국 계약 장교, 내무부는 폴란드 내 우크라이나 문제).[16]
이 시기 바르샤바에 근동 및 극동 연구 프로그램을 갖춘 동방 연구소(Instytut Wschodni w Warszawie)가 설립되어 프로메테우스주의 문제에 대한 정치적 도구로 활용되었다. 동방 연구소에는 동양학 청년 서클이 설립되어 크라쿠프, 빌뉴스, 하얼빈에 지부를 두었다. 프로메테우스주의 문제에 전념하는 분기별 간행물 동방/Wschódpl가 창간되었고, 바르샤바, 빌뉴스, 포즈난, 크라쿠프, 파리, 베를린, 카이로에서 프로메테우스주의 학생들을 위한 학술 장학금이 설립되었다. 또한 바르샤바, 파리, 헬싱키, 하얼빈에 프로메테우스 클럽이 설립되었고, 파리와 헬싱키에서 선전 월간지 ''Promethee''와 ''Prometheus''가 창간되었으며, 파리의 ''France-Orient''와 협력 관계가 구축되었다.[17]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 군 참모 조직은 조직-작전 부서(폴란드 장군 율리안 스타체비치 지휘), 정보 부서(폴란드 제2부 지휘), 선전 부서(폴란드 참모총장실 Z 지휘)를 포함하여 구성되었다. 페틀류라파 우크라이나 장교들은 폴란드군의 계약 장교로 모집되었고, 바르샤바("A.T.E."), 파리("Ofinor"), 부쿠레슈티("Ukraintag")에 3개의 언론사가 창설되었으며, '폴란드-우크라이나 게시판'이 창간되었다. 바르샤바에는 우크라이나 학습원이 설립되었고, 유럽 국가의 페틀류라파 망명 센터를 조정하는 우크라이나 총괄 위원회가 설립되었다.[17]

코카서스 지역에서는 터키와 이란에 아제르바이잔, 조지아, 코카서스 산맥과의 연락을 위한 사무소가 조직되었다. 조지아 조직은 자국에 약 20차례 원정을 수행했으며, 코카서스 산맥 조직은 최소 월간 단위로 자국과 정기적인 연락을 유지했다. 코카서스 민족 위원회가 창설되고 코카서스 연맹 헌법이 제정되었으며, 합법적인 민족 대표들의 추천에 따라 조지아 장교, 아제르바이잔인, 코카서스 산악인들이 폴란드군에 계약 장교로 추가 모집되었다.[18] 특히 아제르바이잔에서 코카서스 지역의 혁명적 동요가 심화되면서 모든 코카서스 민족 구성원들이 협력하여 참여했다.[19]
이델-우랄, 크림 반도, 투르케스탄에서는 독립을 옹호하는 선전이 발전했고, 프로메테우스주의 언론에 대한 소련의 격렬한 논쟁이 있었다. 이들 국가와의 관계가 수립되었다.[19] 1931년 예루살렘에서 열린 세계 무슬림 회의에는 사이드 샤밀 (이맘 샤밀의 손자)과 가야즈 이스하키 (카잔 타타르인 지식인) 등 프로메테우스주의 대표들이 참여하여 소련에 반대하는 정치적 측면을 강화했다. 사이드 샤밀 베이는 회의 집행 센터의 서기로 선출되었다.[19]
이 시기 우크라이나 프로메테우스주의 운동에는 1926년 5월 26일 파리에서 시몬 페틀류라 암살과 1930년 키예프에서 열린 세르히 예프레모프 재판,[17] 코카서스 문제에는 1930년 12월 7일 소련에 의한 노에 라미슈빌리 암살과 1930년 트빌리시에서 열린 조지아 공산주의자 회의에서 샬바 엘리아바의 코카서스 민족 운동 관련 발언 등 주목할 만한 사건들이 있었다.[19] 차라스키에비츠는 크림 반도의 정치적 활동에서 벨리 이브라히모프 재판, 솔탄갈리에프 재판을 통해 볼가 타타르인과 투르케스탄 민족들의 바스마치 운동 참여 사실이 드러났다고 언급했다.[20]
3. 5. 제5기 (1933-1939): 프로메테우스주의의 쇠퇴
전쟁 전 폴란드 프로메테우스주의의 마지막, 제5기(1933–1939)는 "7년의 흉년"이었다.[28] 여러 요인이 இதற்குப் பங்களித்தன.폴란드-소련 불가침 조약(1932) 체결로 폴란드는 현장에서 프로메테우스 활동을 공개적으로 추진하기 어려워졌다.[28] 소련에서는 자치 공화국의 존재, 민족 언어 교육에 대한 소련의 지원, 여러 현상에 대한 현지인들의 자연스러운 항의 반응 덕분에 프로메테우스 국가에서 어느 정도 국가 부흥 과정이 자발적으로 일어나고 있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현장 활동은 생략될 수 있었지만, 정치적 망명자 공동체의 연대와 힘은 계속 유지되어야 했다. 조약 체결로 폴란드 외무부와 정부 당국은 프로메테우스 사업에서 거리를 두게 되었고, 이는 사업 효과를 감소시켰으며, 국제 프로메테우스 서클에 폴란드가 프로메테우스주의에서 멀어지고 있다는 인식을 심어주었다. 이후 자금 관리 등 모든 프로메테우스 문제는 참모총장 제2부(정보)에 집중되었다.[28]
라미슈빌리와 자츠빌리호프스키(1930), 호워프코(1931)의 사망은 프로메테우스주의 운동에 돌이킬 수 없는 손실을 입혔다.[28] 세계 경제 위기로 인한 긴축 재정으로 가용 자금이 거의 50%나 감소하여 폴란드의 모든 노력이 최소 유지 수준으로 떨어졌다.[28] 1935년 5월 12일, 프로메테우스주의의 창시자인 유제프 피우수트스키 원수의 사망은 또 다른 강력한 타격이었다.[28] 피우수트스키의 죽음은 프로메테우스 민족들에게 개인적인 손실로 다가왔고, 이후 운동은 새로운 폴란드 의사 결정권자들의 격려보다는 관성에 의해 지속되었다.[28]
아돌프 히틀러의 독일 권력 장악, 베를린-로마-도쿄 축에서 반공주의 블록의 창설, 그리고 국가 프로메테우스 운동과의 협력에 대한 열망은 폴란드의 정치적 영향력 아래 있던 프로메테우스 조직에게 어렵고 복잡한 상황을 조성했다. 폴란드와 제휴한 프로메테우스 정치 세력은 더 높은 질과 잠재력을 가졌지만, 독일의 끈질긴 선전은 폴란드 프로메테우스 노력에 위험한 경쟁자를 만들었다. 이 기간 독일은 "활동, 성격 및 계획이 전혀 없었다."[28] 폴란드 서부의 위험 증가는 많은 폴란드인들의 마음속에 국가의 동쪽 국경을 진정시켜야 한다는 견해를 조장했다.[28]
유제프 피우수트스키가 1935년에 사망할 때까지, 폴란드 프로메테우스 측의 인력 변화는 거의 없었으나, 폴란드-소련 불가침 조약 체결로 인해 정부 지도자들이 공식적으로 거리를 두었다. 1935년 6월부터 시작된 정부 지도부의 변화와 함께 폴란드 프로메테우스 지도력의 뚜렷한 쇠퇴가 뒤따랐다. "대령 그룹"은 영향력을 잃었고, 타데우시 페우친스키 대령은 덜 적극적인 역할을 맡았으며, 그의 후임자 마리안 유제프 스몰렌스키 대령과 Charaszkiewicz의 직속 상사 얀 카지미에시 치아스토니 대령은 프로메테우스주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외무부 동부 부서 책임자였던 차젤 대령의 후임자 타데우시 코빌란스키는 프로메테우스주의를 지지하려는 경향이 있었지만, 정치적 기반이 부족했고 재정적 제약에 직면했다. 에드워드 리즈-시미글리 원수와 참모총장 바츠와프 스타히에비치 준장의 태도는 마지막까지 불확실하게 남아 있었다.[29]
4.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도 독일(특히 우크라이나와 관련하여), 핀란드(소련과의 갈등), 프랑스, 그리고 소련의 이웃 국가인 터키를 포함한 다른 국가들은 프로메테우스주의에 관심을 계속 보였다.[30] 에드문트 차라스키에비치는 1940년 2월 12일 파리에서 발표한 논문에서 "폴란드가 이러한 프로메테우스 과정에서 멀어지는 것은 그것들을 전혀 막을 수 없으며, 우리를 방관하게 하고 '부재하는 자는 잃는다'는 오래된 원칙에서 비롯되는 막대한 손실에 노출시킨다. 프로메테우스 사슬에서 폴란드의 중심적 위치는 우리에게 러시아의 모든 해체 과정에 대한 준비와 참여를 요구하며, 그 성취에 대한 폴란드의 주도적인 참여를 요구한다."라고 결론 내렸다.[31]
전쟁 이후, 공산 폴란드 정부는 사실상 소련의 괴뢰 국가였기 때문에, 공인된 프로메테우스 프로그램을 재개할 입장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폴란드 국민들은 자유 노조를 통해 1989년 혁명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91년 소련의 해체는 이 사건을 예상하고, 어떤 경우에는 이를 위해 노력했던 폴란드인들과 다른 사람들의 예측을 대체로 입증했다.
2007년 11월 22일, 조지아 트빌리시에서 프로메테우스 동상이 조지아 대통령 미헤일 사카슈빌리와 폴란드 대통령 레흐 카친스키에 의해 헌정되었다.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티탄이 올림푸스 산에서 불을 훔쳐 인간에게 준 후 제우스에 의해 투옥되고 고문을 당했던 땅에 세워진 이 동상은 폴란드인과 조지아인이 러시아 제국과 그 후계 국가인 소련으로부터 조지아의 독립과 다른 민족들의 독립을 달성하기 위한 노력을 기념한다.
프로메테우스주의는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정치적 담론에서 다시 중요성을 얻었다. 탈러시아 자유국 포럼은 러시아 연방 내 소수 민족의 독립을 목표로 하는 여러 운동을 모으고 있다.
5. 대한민국과의 관계
6. 현대적 의의
참조
[1]
논문
"The Promethean Movement in Interwar Poland"
1984-09
[2]
서적
Survival and Consolidation: The Foreign Policy of Soviet Russia, 1918–1992
https://books.google[...]
McGill-Queen's Press
1992
[3]
문서
Prometheism
[4]
서적
2000
[5]
서적
2000
[6]
서적
2000
[7]
서적
2000
[8]
서적
2000
[9]
서적
2000
[10]
서적
2000
[11]
서적
2000
[12]
서적
2000
[13]
서적
2000
[14]
서적
2000
[15]
서적
2000
[16]
서적
2000
[17]
서적
2000
[18]
서적
2000
[19]
서적
2000
[20]
서적
2000
[21]
서적
2000
[22]
서적
2000
[23]
서적
2000
[24]
서적
2000
[25]
서적
2000
[26]
서적
2000
[27]
서적
2000
[28]
서적
2000
[29]
서적
2000
[30]
서적
2000
[31]
서적
2000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