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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호스바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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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리드리히 호스바흐는 독일의 군인으로,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 그는 육군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참모 장교로 복무했으며, 1934년 아돌프 히틀러의 총통 부관이 되었다. 1937년 히틀러와 군 수뇌부의 비밀 회의 내용을 기록한 '호스바흐 메모'는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히틀러의 침략 전쟁 계획을 입증하는 증거로 채택되었다. 호스바흐는 블롬베르크-프리치 사건에서 프리치를 변호하며 히틀러에게 반항하여 부관에서 해임되기도 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동부 전선에서 군단을 지휘하다가 히틀러의 명령을 거부하고 부대를 철수시킨 혐의로 해임되었다. 그는 전쟁 후 게슈타포에 체포될 위기에 처했으나 미군에 의해 보호받았으며, 1947년 석방된 후 1980년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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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호스바흐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934년의 호스바흐
1934년
출생일1894년 11월 22일
사망일1980년 9월 10일
출생지운나, 독일 제국
사망지괴팅겐, 서독
별칭해당 사항 없음
군 경력
소속독일 제국 육군
바이마르 공화국군
독일 국방군 육군
복무 기간1913년–1945년
최종 계급보병대장
지휘제82보병사단
제56기갑군단
제4군
참전 전투/전쟁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서훈기사 철십자 훈장에 참나무 잎 추가

2. 생애

프리드리히 호스바흐는 1894년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 운나에서 태어나 육군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1913년 독일 제국 육군에 입대했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는 참모 장교로 동부 전선에서 복무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호스바흐는 국방성에서 참모 본부 중앙 과장을 역임했고, 1934년에는 현역 군인 신분으로 히틀러의 부관이 되어 그를 가까이에서 보좌했다.

1937년 11월 5일, 호스바흐는 히틀러와 군 수뇌부 간의 비밀 회의 내용을 기록한 호스바흐 메모를 작성했다.[1] 이 메모는 훗날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히틀러의 침략 전쟁 계획을 입증하는 중요한 증거로 사용되었다.[1]

1938년 초, 호스바흐는 헤르만 괴링이 베르너 폰 프리치 장군에게 동성애 혐의를 씌우려는 시도를 알게 되자, 히틀러의 명령을 어기고 프리치에게 이를 경고했다.[2] 이 일로 인해 호스바흐는 히틀러의 부관 자리에서 해임되었으나,[2] 1939년 참모총장으로 복귀했다.[3]

2. 1. 초기 생애 및 제1차 세계 대전

호스바흐는 1894년, 현재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 운나에서 태어났다. 육군 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1913년 독일 제국 육군에 입대했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는 참모 장교로서 동부 전선에서 싸웠다.

2. 2.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차량에 동승한 호스바흐(오른쪽).


호스바흐는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후 국방성에 들어가 참모 본부 중앙 과장을 역임했다. 1934년 현역 군인 신분으로 총통 부관이 되어 히틀러를 가까이에서 보좌했다.

2. 3. 호스바흐 메모

1937년 11월 5일, 아돌프 히틀러와 군 수뇌부 간의 비밀 회의가 열렸고, 이 회의 내용을 프리드리히 호스바흐가 기록한 것이 호스바흐 메모이다.[1] 이 회의에서 히틀러는 독일의 '생존권' 확보를 위한 영토 확장 계획을 발표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8,500만 명이 넘는 독일 국민의 생존을 위해 식량과 자원이 필요하며, 영토 확장이 필요하다.
  • 바다는 영국이 장악하고 있으므로, 유럽에서 영토를 찾아야 한다.
  • 독일이 우선적으로 점령해야 할 목표는 체코슬로바키아오스트리아이다.
  • 전쟁 시기는 다음 세 가지 중 하나로 고려되었다.
  • 1943년부터 1945년 사이에 개전한다. (1945년 이후에는 타국의 군비가 강화될 것으로 예상)
  • 프랑스가 내분으로 독일과 싸울 힘을 잃었을 때.
  • 프랑스가 다른 나라와 전쟁으로 독일과 싸울 힘을 잃었을 때.


히틀러는 프랑스가 이탈리아와 전쟁을 할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고, 스페인 내전이 지속되면 이탈리아와 영국, 프랑스 간의 전쟁이 발생할 수 있으며, 이르면 1938년에도 일어날 수 있다고 예상했다. 또한, 독일이 체코와 오스트리아를 공격해도 폴란드소련, 소련은 일본을 경계하여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체코에 대한 공격은 "전격전"으로 수행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1]

베르너 폰 블롬베르크와 베르너 폰 프리치는 독일군의 군비가 아직 부족하고, 프랑스는 이탈리아와 동시에 독일과 싸울 능력이 있다고 반박했다. 블롬베르크는 체코의 방어선이 마지노 선만큼 견고하여 돌파하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에리히 레더는 해군에 전함이 없는 상황에서 전쟁은 불가능하다고 했고, 콘스탄틴 폰 노이라트는 영국, 프랑스와의 조기 충돌은 생각할 수 없다고 말했다.[1]

히틀러는 군의 반항적인 태도에 불만을 품었고, 이후 블롬베르크-프리치 사건으로 군을 숙청하는 계기가 되었다.[1]

호스바흐 메모는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히틀러의 침략 전쟁 계획을 입증하는 중요한 증거로 채택되었다.[1]

2. 4. 블롬베르크-프리치 사건

1938년 초, 헤르만 괴링아돌프 히틀러에게 육군 총사령관 베르너 폰 프리치 장군에게 동성애 혐의가 있다는 내용의 서류를 제시했다. 이때 호스바흐는 그 자리에 있었다. 호스바흐는 히틀러의 명령을 어기고 프리치에게 해당 혐의를 경고하기 위해 서류를 가져갔다. 프리치는 혐의가 사실이 아니라고 맹세했고, 호스바흐는 이 내용을 히틀러에게 전달했다. 이 일로 호스바흐는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으나, 이후 히틀러의 부관 자리에서 해임되었다.[2] 1939년 참모총장으로 복귀했다.[3]

3. 제2차 세계 대전

프리드리히 호스바흐는 제82보병연대장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을 맞았다. 1940년 10월, 나치 독일의 프랑스 침공에서 공을 세워 기사 철십자 훈장을 받았다.[3] 이후 제31보병사단장 등을 역임하며 주로 동부 전선에서 싸웠다. 1942년 11월 육군 중장, 1943년 11월 보병 대장으로 진급했고, 1943년 9월에는 백엽 기사 철십자 훈장을 받았다.[3]

1943년 8월부터 제56기갑군단장을 맡았다. 그러나 붉은 군대의 반격으로 독일군은 점차 밀려났다. 1944년 6월 바그라티온 작전으로 크게 패한 후, 7월 18일 북방 집단군 휘하 제4군 사령관이 되었다. 1945년 1월, 제4군은 동프로이센에서 제3기갑군과 함께 붉은 군대에 포위되어 고립되었다.

이후 호스바흐는 독단적인 퇴각으로 해임된 뒤, 괴팅겐에서 요양 중 게슈타포의 체포 위협을 받았다. 4월 7일 게슈타포가 들이닥치자 권총을 발사하며 저항했지만, 1시간 후 미군이 진주하여 체포되었다. 1947년에 석방되었다.[3]

3. 1. 주요 참전 기록

1939년 제82보병연대장으로서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 1940년 10월 나치 독일의 프랑스 침공에서의 전공으로 기사 철십자 훈장을 수여받았다.[3] 이후 제31보병사단장 등을 역임하며 주로 동부 전선에서 활약했다.[3] 1942년 11월 육군 중장, 1943년 11월 보병 대장으로 진급했으며, 1943년 9월에는 백엽 기사 철십자 훈장을 수여받았다.[3]

1943년 8월부터 제56기갑군단장을 맡았다.[3] 1944년 7월 18일 북방 집단군 휘하 제4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으나,[3] 1945년 1월 동프로이센에서 붉은 군대에 포위되어 고립되었다. 호스바흐는 독단적으로 제4군을 퇴각시켰고, 이로 인해 1월 29일 해임되었다.[3]

3. 2. 동프로이센 철수

1945년 1월, 동프로이센에서 붉은 군대에 포위되자, 제3기갑군 사령관 에르하르트 라우스와 함께 북방 집단군 사령관 게오르크-한스 라인하르트에게 철수를 건의했다. 이때 호스바흐는 "우리에게는 총통의 환상과 현실 사이에 놓여 있을 여유가 남아 있지 않다"라며 히틀러의 사수 명령에 반대했다.[3]

그러나 동프로이센은 독일의 본령이었고, 많은 독일 시민이 남아 있었기에 히틀러는 철수를 거부했다. 그럼에도 호스바흐는 독단적으로 제4군을 철수시켰다. 1945년 1월 29일, 히틀러의 명령 불복종으로 라인하르트와 함께 해임되었다.[3]

4. 서훈 내역

훈장수여 일자내용
철십자 훈장 2급1914년 9월 26일[4]
철십자 훈장 1급1916년 5월 26일[4]
철십자 훈장 부장 2급1940년 5월 11일[4]
철십자 훈장 부장 1급1940년 5월 30일[4]
육군 명예장1941년 7월 22일[4]
기사십자 철십자 훈장1940년 10월 7일대령(Oberst)으로서 제82 보병 연대장[4]
오크 잎1943년 9월 11일중장(Generalleutnant)으로서 제56 기갑군단 지휘 대행[4]


참조

[1] 간행물 Documents of German Foreign Policy
[2] 서적 The Rise and Fall of the Third Reich
[3] 서적 Who's who in Nazi Germany
[4]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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