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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켓의 돌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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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피켓의 돌격은 1863년 7월 3일 게티즈버그 전투 마지막 날, 남군이 북군 중앙을 돌파하기 위해 감행한 대규모 공격이다. 제임스 롱스트리트가 전체 지휘를 맡았으며, 조지 피켓, 존스턴 페티그루, 아이작 트림블 소장이 지휘하는 3개 사단이 공격에 참여했다. 남군은 대규모 포격을 가했으나 실패했고, 약 12,500명의 보병이 1,200 미터를 달려 묘지 능선으로 전진했으나 격퇴당했다. 이 작전의 실패로 남군은 큰 피해를 입었고, 로버트 E. 리는 펜실베이니아 공격과 워싱턴 D.C. 고립 작전에 실패했다. 피켓의 돌격은 남북 전쟁의 전환점이 된 게티즈버그 전투의 주요 장면으로, 역사적 논쟁과 평가의 대상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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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켓의 돌격 - [전쟁]에 관한 문서
전투 개요
교전게티즈버그 전투
날짜1863년 7월 3일
장소펜실베이니아주게티즈버그
결과북군의 승리
교전 세력 1(북군)
지휘관 및 지도자
북군 지휘관조지 미드
윈필드 스콧 핸콕
존 기번
알렉산더 헤이스
남군 지휘관로버트 E. 리
제임스 롱스트리트
조지 피켓
존스턴 페티그루
아이작 R. 트림블
전력
북군 전력약 10,000명, 10개 여단
1개 포병 여단
남군 전력12,500명 보병, 9–11개 여단
150–170문 대포
피해 규모
북군 피해1,500명 사상
남군 피해1,123명 사망
4,019명 부상
3,750명 포로
이미지
게티즈버그에서 피켓 장군의 유명한 돌격 (알프레드 워드 그림)
게티즈버그에서 피켓 장군의 유명한 돌격 (알프레드 워드 그림)

2. 배경

미국의 남북전쟁(1861~1865)은 노예 해방을 둘러싼 남부와 북부의 갈등으로 발발했다. 전쟁 초기에는 남군이 로버트 리 장군의 지휘 아래 우세를 보였다. 1863년 6월, 남군은 북군의 수도 워싱턴 D.C.를 위협하며 북쪽으로 진군했다. 남군은 필라델피아, 볼티모어, 워싱턴 등 북부 주요 도시를 위협하여 남부의 독립을 허용하는 평화협정을 맺으려 했다.

2. 1. 군사적 상황

미국의 남북전쟁(1861~1865)은 노예 해방을 둘러싼 남부와 북부의 갈등으로 발발했다. 전쟁 초기에는 남군이 로버트 리 장군의 지휘 아래 우세를 보였다. 1863년 6월, 남군은 북군의 수도 워싱턴 D.C.를 위협하며 북쪽으로 진군했다. 남군은 필라델피아, 볼티모어, 워싱턴 등 북부 주요 도시를 위협하여 남부의 독립을 허용하는 평화협정을 맺으려 했다.

3. 전투의 전개

북군은 워싱턴 앞을 흐르는 포토맥(Potomac) 강을 등지고 남군을 견제하고 있었다. 6월 29일 북상하던 남군이 방향을 틀어 워싱턴 쪽으로 남하하자 북군 또한 이를 막기 위해 집결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만난 곳은 워싱턴에서 서북쪽으로 90km 떨어진 게티즈버그라는 작은 마을이었다. 당시 이름조차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이곳에서 16만여 명의 남군과 북군이 결전을 벌이게 되리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6월 30일, 남군이 게티즈버그를 향해 진군하는 사이 이곳에 먼저 도착한 것은 존 뷰퍼드(Buford) 장군이 이끄는 북군의 기병대였다. 존 뷰퍼드는 남군이 게티즈버그 북쪽과 서쪽에서 공격할 것이라는 것을 간파하고 마을 북쪽에 견고한 방어선을 구축했다.[38]

7월 1일 새벽, 게티즈버그로 진군하던 남군은 존 뷰퍼드의 기병대와 만나 역사적인 전투를 벌이게 된다. 게티즈버그 전투가 시작된 것이다. 이날 전투에서 5만여 명의 양측 군대가 맞붙었다. 북쪽과 서쪽 능선을 장악한 북군이 전술적으로 유리했지만 사기충천한 남군을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오후부터 방어선이 붕괴되기 시작하자, 북군은 마을 남쪽의 언덕과 능선으로 후퇴해 낚싯바늘 모양의 방어진을 구축했다. 이후 이틀간의 전투는 이 언덕과 능선을 중심으로 벌어지게 된다. 이곳을 중심으로 강력한 방어벽을 설치한 북군에 대한 남군의 처절한 공격이 계속됐다. 북군은 전술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언덕 고지에 방어벽을 설치하고 아래에서 달려오는 남군을 향해 총탄과 포탄을 퍼부었다. 총알이 떨어진 북군의 한 연대는 거의 자살에 가까운 총검 공격을 감행해 남군을 막아내기도 했다.[38]

게티즈버그 전투의 마지막 날, 남군은 북군 중앙을 돌파하기 위해 대규모 공격을 계획했다. 이 공격은 '피켓의 돌격'으로 알려져 있으며, 제임스 롱스트리트가 전체 지휘를 맡았다.[4] 조지 피켓, J. 존스턴 페티그루, 아이작 R. 트림블 소장이 지휘하는 3개 사단이 공격에 참여했다.[3] 남군은 공격 전 대규모 포격을 가했으나, 부적절한 포병 지휘와 결함 있는 장비의 조합으로 인해[8] 북군에 큰 피해를 주지 못했다.[13]

약 12,500명의 남군 보병이[18] 1,200 미터를 달려 묘지능선으로 전진하기 시작한다.[4] 남군은 빗발치는 총격을 뚫고 묘지 능선에 도착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전군은 전투에서 전사하고 이 작전의 실패로 인해 결과적으로 리는 펜실베이니아 공격과 워싱턴 D.C. 고립 작전에 실패하게 된다.[4]

피켓의 돌격을 막아낸 핸콕의 방어, 피켓의 돌격에 의해 공격받음


피켓의 돌격 전 묘지 언덕의 모습, 알프레드 워드가 스케치


남부 연합 공격의 목표는 연합군 포토맥군의 제2군단의 중심부였으며, 소장 윈필드 S. 핸콕이 지휘했다.[3] 정중앙에는 준장 윌리엄 해로우, 대령 노먼 J. 홀, 준장 알렉산더 S. 웹의 여단이 있는 준장 존 기번의 사단이 있었다.[3] 이 위치의 북쪽에는 준장 알렉산더 헤이스의 사단에서 여단이 있었고, 남쪽에는 준장 조지 J. 스태너드의 제2 버몬트 여단과 대령 채프먼 비들 휘하의 제121 펜실베이니아 연대를 포함한 제1군단의 소장 애브너 더블데이의 사단이 있었다.[3]

북군은 강력한 포병 사격과 소총 사격으로 남군에 큰 피해를 입혔다.[19] 남군은 '더 앵글' 지역에서 북군 방어선을 일부 돌파했으나, 결국 격퇴되었다.[25]

"피켓의 돌격을 격퇴한 대포와 포수"(''남북 전쟁 사진 기록''에서). 이것은 앤드루 코WAN의 제1 뉴욕 포병대였다.


묘지 능선, 멀리 리틀 라운드 탑과 빅 라운드 탑을 바라보며 능선을 따라 남쪽으로. 전경의 기념비는 펜실베이니아 제72 보병 연대 기념비이다.


게티즈버그 전장의 나무 숲과 "남부 연합의 최고 수위"; 북쪽을 바라봄


피켓의 돌격 지점, 앵글 북쪽에서 서쪽을 바라봄


투르 드 툴스트럽의 ''게티즈버그 전투''에서 피켓의 돌격을 보여줌


게티즈버그 전장의 기념비로, 아미스테드가 치명상을 입은 대략적인 지점을 표시한다. 기념비 뒤의 벽은 연합군 전선을 표시한다.


이 돌격작전의 실패 후, 롱스트리트는 "리가 12,500명의 목숨을 앗아가고 모든 걸 망쳤다."라는 말로 리를 질책했으며, 리도 자신이 한 일을 후회하며 제퍼슨 데이비스 남부연합 대통령에게 사직서를 보내나, 데이비스는 이를 수리하지 않는다.[4]

3. 1. 게티즈버그 전투의 시작

6월 29일, 북상하던 남군이 방향을 틀어 워싱턴 쪽으로 남하하자 북군 또한 이를 막기 위해 집결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만난 곳은 워싱턴에서 90km 서북쪽에 위치한 게티즈버그라는 작은 마을이었다.[38] 6월 30일, 남군이 게티즈버그를 향해 진군하는 사이 이곳에 먼저 도착한 것은 존 뷰퍼드(Buford) 장군이 이끄는 북군의 기병대였다. 존 뷰퍼드는 남군이 게티즈버그 북쪽과 서쪽에서 공격할 것이라는 것을 간파하고 마을 북쪽에 견고한 방어선을 구축했다.[38]

7월 1일 새벽, 게티스버그로 진군하던 남군은 존 뷰퍼드의 기병대와 만나 역사적인 전투를 벌이게 된다. 게티즈버그 전투가 시작된 것이다. 이날 전투에서 5만여 명의 양측 군대가 맞붙었다. 북쪽과 서쪽 능선을 장악한 북군이 전술적으로 유리했지만 사기충천한 남군을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오후부터 방어선이 붕괴되기 시작하자, 북군은 마을 남쪽의 언덕과 능선으로 후퇴해 낚싯바늘 모양의 방어진을 구축했다. 이후 이틀간의 전투는 이 언덕과 능선을 중심으로 벌어지게 된다.[38]

3. 2. 피켓의 돌격

게티즈버그 전투의 마지막 날, 남군은 북군 중앙을 돌파하기 위해 대규모 공격을 계획했다. 이 공격은 '피켓의 돌격'으로 알려져 있으며, 제임스 롱스트리트가 전체 지휘를 맡았다.[4] 조지 피켓, J. 존스턴 페티그루, 아이작 R. 트림블 소장이 지휘하는 3개 사단이 공격에 참여했다.[3] 남군은 공격 전 대규모 포격을 가했으나, 부적절한 포병 지휘와 결함 있는 장비의 조합으로 인해[8] 북군에 큰 피해를 주지 못했다.[13]

약 12,500명의 남군 보병이[18] 0.75 마일(약 1,200 미터)을 달려 묘지능선으로 전진하기 시작한다.[4] 남군은 빗발치는 총격을 뚫고 묘지 능선에 도착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전군은 전투에서 전사하고 이 작전의 실패로 인해 결과적으로 리는 펜실베이니아 공격과 워싱턴 D.C. 고립 작전에 실패하게 된다.[4]

남부 연합 공격의 목표는 연합군 포토맥군의 제2군단의 중심부였으며, 소장 윈필드 S. 핸콕이 지휘했다.[3] 정중앙에는 준장 윌리엄 해로우, 대령 노먼 J. 홀, 준장 알렉산더 S. 웹의 여단이 있는 준장 존 기번의 사단이 있었다.[3] 이 위치의 북쪽에는 준장 알렉산더 헤이스의 사단에서 여단이 있었고, 남쪽에는 준장 조지 J. 스태너드의 제2 버몬트 여단과 대령 채프먼 비들 휘하의 제121 펜실베이니아 연대를 포함한 제1군단의 소장 애브너 더블데이의 사단이 있었다.[3]

북군은 강력한 포병 사격과 소총 사격으로 남군에 큰 피해를 입혔다.[19] 남군은 '더 앵글' 지역에서 북군 방어선을 일부 돌파했으나, 결국 격퇴되었다.[25]

이 돌격작전의 실패 후, 롱스트리트는 "리가 12,500명의 목숨을 앗아가고 모든 걸 망쳤다."라는 말로 리를 질책했으며, 리도 자신이 한 일을 후회하며 제퍼슨 데이비스 남부연합 대통령에게 사직서를 보내나, 데이비스는 이를 수리하지 않는다.[4]

4. 남북군 지휘관 및 부대

4. 1. 북군 (Union)

게티즈버그 전투 당시 북군은 조지 미드 소장이 지휘하는 포토맥군이었다. 주요 부대로는 윈필드 핸콕 소장의 2군단, 애브너 더블데이 소장의 1군단 등이 있었다. 존 기번 준장, 윌리엄 해로우 준장, 알렉산더 S. 웹 준장 등이 주요 지휘관으로 활약했다. 특히, 알렉산더 헤이스 준장은 뛰어난 활약으로 부대 사기를 북돋았다.

4. 2. 남군 (Confederate)

남군(Confederate)은 로버트 E. 리 장군이 지휘하는 북버지니아군이었다.[4] 주요 부대로는 제임스 롱스트리트 중장의 제1군단과 A.P. 힐 중장의 제3군단 등이 있었다.[3] 이 돌격은 제임스 롱스트리트 중장의 제1군단과 A.P. 힐 중장의 제3군단 부대로 구성된 조지 피켓 소장, J. 존스턴 페티그루 준장 및 아이작 R. 트림블 소장이 지휘했다.[3] 페티그루는 헨리 히스 소장의 구 사단에서, 트림블은 윌리엄 도시 펜더 사단을 지휘했다.[3] 리처드 H. 앤더슨 소장의 사단에서 캐드머스 M. 윌콕스 준장과 데이비드 랭 대령의 2개 여단이 우측면에서 공격을 지원하기로 되어 있었다.[3]

일반 역사에서 "피켓의 돌격"이라고 불리지만, 전체 지휘는 제임스 롱스트리트에게 맡겨졌으며, 피켓은 그 사단 지휘관 중 한 명이었다.[4] 리는 롱스트리트에게 피켓의 지칠 줄 모르는 사단이 돌격을 선도해야 한다고 전했기에, 그 이름이 적절하지만, 최근의 역사가들 중에는, 그 공적(혹은 비난)을 보다 공평하게 나누기 위해, "피켓-페티그루-트림블의 돌격"이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자도 있다.[4] 힐 장군을 옆으로 하고, 페티그루와 트림블의 사단은 롱스트리트의 지휘 하에 붙여진 것이었다.[4] 그리하여, 참가한 전력의 약 3분의 1을 지휘한 피켓 장군의 이름이, 전체는 그 군단 지휘관의 감독 하에 있던 돌격에 붙여지게 되었다.[4] 피켓의 부대는 거의 예외 없이 버지니아 병사였으며, 다른 사단은 노스캐롤라이나 주, 미시시피 주, 앨라배마 주 및 테네시 주 출신의 부대로 구성되었다. 윌콕스와 랭의 지원 부대는 앨라배마 주와 플로리다 주 출신이었다.[4]

작전의 시작부터 일은 남군에게 좋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갔다.[3] 피켓의 사단은 게티즈버그에서 아직 사용되지 않았고, A.P. 힐의 건강이 문제가 되어 돌격에 사용될 부대의 선택에 참여하지 못했다.[3] 힐 군단의 몇몇 부대는 7월 1일의 전투에 가볍게 관여했고, 7월 2일은 전투를 전혀 하지 않았다.[3] 그러나 7월 1일에 격렬하게 교전한 부대는 결국 돌격에 참여했다.[3]

리는 아침 일찍부터의 공격 시작을 원했지만, 보병 돌격대를 정렬시키기 위해 오전의 대부분을 소모했다.[5] 리의 작전 본부도 롱스트리트의 작전 본부도 새벽까지 그 사단을 전장에 배치하라는 명령을 보내지 않았다.[5] 역사가 제프리 D. 와트는 롱스트리트의 이 간과가 리의 구두 명령의 오해이거나 혹은 명령의 오류라고 언급하며 비난하고 있다.[5] 전후의 "남부의 잃어버린 대의"의 저자들 중에는 게티즈버그에서의 롱스트리트의 업적을 비판하는 많은 자들이, 롱스트리트가 일부러 리의 전투 작전을 망쳤다는 증거로 이 실수를 지적하고 있다.[6]

5. 돌격의 실패와 영향

피켓의 돌격은 남군의 막대한 인명 피해로 끝났다. 제임스 롱스트리트는 "리가 12,500명의 목숨을 앗아가고 모든 걸 망쳤다."라며 리를 질책했고, 리 자신도 제퍼슨 데이비스 남부연합 대통령에게 사직서를 보냈으나 수리되지 않았다.[27] 연방군은 약 1,500명의 전사자와 부상자를 냈지만, 남부 연합군의 사상률은 50%를 넘었다.[27] 피켓 사단은 2,655명(전사 498명, 부상 643명, 부상 후 포로 833명, 포로 681명)의 사상자를 냈다.[27] 페티그루 사단의 손실은 약 2,700명(전사 470명, 부상 1,893명, 포로 337명)으로 추산된다.[27] 트림블의 두 여단은 885명(전사 155명, 부상 650명, 포로 80명)의 손실을 입었다.[27] 윌콕스의 여단은 200명의 손실을 보고했고, 랭의 여단은 약 400명의 손실을 보고했다.[27] 따라서 공격 중 총 손실은 6,555명이었으며, 그 중 최소 1,123명의 남부 연합군이 전장에서 전사했고, 4,019명이 부상당했으며, 부상자 중 상당수가 포로로 잡혔다. 연방군 보고서에 따르면 3,750명이 포로로 잡혔다.[27]

사상자는 돌격 지휘관들에게도 많았다. 트림블과 페티그루는 그날의 가장 고참 사상자였다. 트림블은 다리를 잃었고, 페티그루는 손에 경상을 입었다(결국 버지니아로 후퇴하는 동안 소규모 교전에서 복부에 총을 맞아 사망).[28] 피켓 사단에서는 40명의 야전급 장교(소령, 중령, 대령) 중 26명이 사상자였다. 12명이 전사 또는 치명상을 입었고, 9명이 부상당했으며, 4명이 부상 후 포로로 잡혔고, 1명이 포로로 잡혔다. 그의 모든 여단 지휘관이 쓰러졌다. 켐퍼는 중상을 입고 연방군 병사에게 붙잡혔다가 구조된 후 버지니아로 후퇴하는 동안 다시 붙잡혔다. 가넷과 아미스테드는 전사했다. 가넷은 이전에 다리에 부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적의 집중 포화를 받으며 말을 타고 돌격했다. 아미스테드는 연방군 전선을 가장 멀리 돌파했다. 그는 치명적인 부상을 입고 현재 남부 연합의 최고 수위선이라고 불리는 "더 앵글" 근처에서 쓰러졌고 이틀 후 연방군 병원에서 사망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아미스테드에게 치명상을 입힌 연방군 부대는 그의 오랜 친구인 윈필드 스콧 핸콕의 지휘를 받았으며, 핸콕 자신도 전투에서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28] 피켓 사단의 15명의 연대 지휘관 중 버지니아 군사 학교에서 11명이 배출되었으며, 모두 사상자였다. 6명이 전사하고 5명이 부상당했다.[28]

보병 공격을 간접적으로 지원한 스튜어트의 기병 작전은 실패했다. 그는 동쪽으로 약 5km 떨어진 동부 기병 전장에서 데이비드 맥머트리 그레그 준장의 지휘를 받는 연방군 기병대에 의해 저지당했다.[29]

병사들이 세미너리 릿지를 따라 남부 연합군 진영으로 후퇴하면서, 리는 연방군의 반격을 두려워하여 자신의 중앙 부대를 규합하려 했고, 돌아온 병사와 윌콕스에게 실패는 "모두 내 잘못"이라고 말했다. 피켓은 그날 나머지 시간 동안 위로할 수 없었고 리가 공격을 명령한 것에 대해 결코 용서하지 않았다. 리가 피켓에게 방어를 위해 그의 사단을 규합하라고 말했을 때, 피켓은 "장군, 제게는 사단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30]

연방군의 반격은 결코 없었다. 포토맥군은 지쳐 있었고 3일이 끝날 무렵 북부 버지니아군과 거의 비슷한 피해를 입었다. 조지 미드는 전장을 지키는 것에 만족했다. 7월 4일, 양군은 비공식 휴전을 지키며 전사자와 부상자를 수습했다. 한편 율리시스 S. 그랜트 소장은 미시시피 강을 따라 빅스버그 주둔지의 항복을 받아들여 남부 연합을 둘로 쪼갰다. 이 두 연방군 승리는 일반적으로 미국 남북 전쟁의 전환점으로 여겨진다.[31]

역사는 게티즈버그에서 리의 진정한 의도를 알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는 회고록을 출판한 적이 없고, 전투 후 보고서는 대략적이었다. 공격의 대부분의 고위 지휘관들이 사상자였고 보고서를 쓰지 않았다. 피켓의 보고서는 분명히 너무 격렬해서 리가 그에게 파기하라고 명령했고, 사본이 발견되지 않았다.[32] 버지니아 신문들은 피켓의 버지니아 사단이 돌격 중에 가장 많은 진전을 이루었다고 칭찬했고, 피켓의 비교적 성공을 다른 주들의 병사들의 행동을 비판하는 수단으로 사용했다.[33] 피켓의 돌격은 패배의 원인으로 알려진 문학과 문화 운동에서 상징적인 존재가 되었다.

5. 1. 남군의 피해

피켓의 돌격에서 남부 연합군의 사상률은 50%를 넘었다.[27] 피켓 사단은 2,655명(전사 498명, 부상 643명, 부상 후 포로 833명, 포로 681명)의 사상자를 냈다.[27] 페티그루 사단의 손실은 약 2,700명(전사 470명, 부상 1,893명, 포로 337명)으로 추산된다.[27] 트림블의 두 여단은 885명(전사 155명, 부상 650명, 포로 80명)의 손실을 입었다.[27] 윌콕스의 여단은 200명, 랭의 여단은 약 400명의 손실을 보고했다.[27] 따라서 공격 중 총 손실은 6,555명이었으며, 그 중 최소 1,123명의 남부 연합군이 전장에서 전사했고, 4,019명이 부상당했으며, 부상자 중 상당수가 포로로 잡혔다.[27] 연방군 보고서에 따르면 3,750명이 포로로 잡혔다.[27]

사상자는 돌격 지휘관들에게도 많았다. 트림블과 페티그루는 그날의 가장 고참 사상자였다. 트림블은 다리를 잃었고, 페티그루는 손에 경상을 입었다(결국 버지니아로 후퇴하는 동안 소규모 교전에서 복부에 총을 맞아 사망).[28] 피켓 사단에서는 40명의 야전급 장교(소령, 중령, 대령) 중 26명이 사상자였다. 12명이 전사 또는 치명상을 입었고, 9명이 부상당했으며, 4명이 부상 후 포로로 잡혔고, 1명이 포로로 잡혔다. 그의 모든 여단 지휘관이 쓰러졌다. 켐퍼는 중상을 입고 연방군 병사에게 붙잡혔다가 구조된 후 버지니아로 후퇴하는 동안 다시 붙잡혔다. 가넷과 아미스테드는 전사했다. 가넷은 다리에 부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을 타고 돌격했다. 아미스테드는 연방군 전선을 가장 멀리 돌파했으며, 남부 연합의 최고 수위선이라고 불리는 "더 앵글" 근처에서 치명적인 부상을 입고 이틀 후 연방군 병원에서 사망했다. 아미스테드에게 치명상을 입힌 연방군 부대는 그의 오랜 친구인 윈필드 스콧 핸콕의 지휘를 받았으며, 핸콕 자신도 전투에서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28] 피켓 사단의 15명의 연대 지휘관 중 버지니아 군사 학교에서 11명이 배출되었으며, 모두 사상자였다. 6명이 전사하고 5명이 부상당했다.[28]

5. 2. 돌격 실패의 원인

남군의 포격은 북군에 충분한 피해를 주지 못했다. 남군의 포병대장 윌리엄 N. 펜들턴 소장은 포를 제대로 배치하는데 실패하였고, 포탄은 보병 전선을 넘어갔다. 북군 포병대장 헨리 J. 헌트 준장은 탄약 절약을 위해 포격을 중단하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이는 알렉산더에게 많은 대포가 파괴되었다고 오인하게 만들었다.[13] 7월 3일의 포격은 이 전쟁에서 가장 큰 규모였다.[9] 남군의 이벤더 로 준장은 "중앙의 연속 포격은... 전쟁 중 목격한 것 중 가장 장엄한 전투 장면 중 하나였다."라고 기록했다.[12]

제임스 롱스트리트 장군은 애초부터 돌격에 부정적이었으며,[16] 이는 작전 수행에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 롱스트리트는 리에게 "이 전투에서 1만 5천 명의 병사를 투입해도 저 진지를 점령할 수 없다는 것이 제 의견입니다"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16] 결국 롱스트리트는 마지못해 피켓의 돌격 요청에 동의했지만, 피켓을 지원할 탄약이 있는 남군 대포는 없었다.[17]

5. 3. 전투의 결과와 의의

게티즈버그 전투는 미국 남북 전쟁의 중요한 전환점으로 여겨진다.[31] 이 전투에서 로버트 E. 리가 이끄는 남군은 큰 타격을 입고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 특히 피켓의 돌격 실패는 남군의 사기를 크게 저하시켰다.[30] 남군은 많은 병력을 잃었고, 이후 전쟁에서 계속 내리막길을 걸었다.

피켓의 돌격에서 남부 연합군의 사상률은 50%를 넘었다.[27] 피켓 사단은 2,655명, 페티그루 사단은 약 2,700명, 트림블의 두 여단은 885명의 손실을 입었다. 윌콕스 여단과 랭 여단은 각각 200명, 400명의 손실을 보고했다. 공격 중 총 손실은 6,555명에 달했으며, 최소 1,123명이 전사하고 4,019명이 부상당했다.[27] 많은 부상병들이 포로로 잡혔으며, 연방군 보고서에 따르면 3,750명이 포로로 잡혔다.[27]

돌격 지휘관들의 피해도 컸다. 트림블은 다리를 잃었고, 페티그루는 손에 경상을 입었으나 결국 사망했다.[28] 피켓 사단의 여단장 3명과 연대장 15명 전원이 사상자에 포함되었다. 켐퍼는 중상을 입고 포로로 잡혔다가 구조되었으나 다시 포로가 되었고, 가넷과 아미스테드는 전사했다. 특히 아미스테드는 연방군 전선을 가장 멀리 돌파했으나 치명상을 입고 쓰러졌다.[28]

반면, 연방군은 약 1,500명의 전사자와 부상자를 냈지만, 전투에서 승리했다.[27] 그러나 연방군 역시 지쳐 있었고, 3일간의 전투로 인해 남군과 비슷한 피해를 입었다. 조지 미드는 전장을 지키는 것에 만족했고, 적극적인 반격을 가하지는 않았다.[31]

7월 4일, 양군은 비공식적인 휴전을 통해 전사자와 부상자를 수습했다. 같은 날, 율리시스 S. 그랜트빅스버그 전투에서 승리하여 남부 연합을 둘로 쪼갰다.[31] 게티즈버그 전투와 빅스버그 전투의 승리는 남북전쟁에서 북군에게 유리한 흐름을 가져왔다.[31]

전투 후, 리는 자신의 판단 착오를 후회하며 제퍼슨 데이비스 남부연합 대통령에게 사직서를 제출했지만, 데이비스는 이를 수리하지 않았다.[32] 한편, 버지니아 신문들은 피켓의 버지니아 사단을 칭찬하며 다른 주 출신 병사들의 행동을 비판하는 데 이용했다. 이는 '피켓의 돌격'이라는 명칭이 붙는 데 영향을 미쳤다.[33]

피켓의 돌격은 남부의 '패배의 원인' 문학과 문화 운동에서 상징적인 존재가 되었다.[35] 윌리엄 포크너는 그의 소설 『먼지를 헤치는 자』("Intruder in the Dust")에서 이 용감하지만 무익했던 돌격에 대한 남부인들의 기억을 묘사했다.[35]

6. 역사적 논쟁과 평가

피켓의 돌격은 특히 버지니아 주민들에게 잃어버린 대의로 알려진 문학 및 문화 운동의 중심 상징 중 하나가 되었다. 지지자들은 연합군 부대를 향해 돌진하는 남부 연합 군인들의 용맹함, 남부 장군들의 유능한 지휘력으로 그들의 병사들, 특히 피켓과 같은 버지니아 출신들의 압도적인 신뢰를 불러일으켰으며, 궁극적인 승리에 대한 아슬아슬한 근접성을 찬양한다. 전형적인 남부 소설가인 윌리엄 포크너는 이 용감하지만 무익한 에피소드의 남부 신화에 대한 그림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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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세의 모든 남부 소년에게, 단 한 번이 아니라 원할 때마다 1863년 7월 오후 2시가 아직 되지 않은 순간이 있으며, 여단은 철도 울타리 뒤에 위치해 있고, 총은 숲 속에 놓여 있으며 준비되어 있고, 펄럭이는 깃발은 이미 풀려 피켓 자신이 긴 기름칠한 곱슬머리와 모자를 한 손에, 아마도 칼을 다른 손에 들고 언덕을 올려다보며 롱스트리트가 신호를 보내기를 기다리고 있으며 모든 것이 균형을 이루고 있으며 아직 일어나지 않았고, 아직 시작조차 하지 않았고, 아직 시작조차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가네트, 켐퍼, 아미스테드, 윌콕스보다 더 많은 사람들을 심각하게 보이게 만들었던 그 위치와 상황에 대해 시작하지 않을 시간도 아직 있지만, 시작될 것이고, 우리 모두는 그것을 알고 있으며, 너무 많은 것을 걸고 너무 멀리 왔으며, 그 순간에는 14살 소년조차도 이번에는 그렇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쩌면 이번에는 이 모든 것을 잃을 것이고 이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펜실베이니아, 메릴랜드, 세계, 워싱턴 자체의 황금 돔은 절망적인 도박, 2년 전에 행해진 배팅을 절망적이고 믿을 수 없는 승리로 장식하기 위해.

|윌리엄 포크너|''먼지 속의 침입자''}}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러한 견해는 남북 양측의 그룹의 초기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전투에 대한 인식을 지배하게 되었다. 특히 북부 참전 용사들은 공격하는 남부 연합 군대의 용기와 희생을 칭찬하는 대신, 시체티(Cemetery) 능선에 대한 그들의 치열한 방어에 대한 강조가 줄어드는 것에 반대했다. 버지니아 출신이 아닌 남부 사람들은 버지니아 연대가 더 많은 사상자를 냈지만 버지니아 지도자들과 버지니아 군대에 신화가 지나치게 집중하는 것에 불쾌감을 느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십 년간의 격렬한 역사화 이후 이 이야기는 확고하게 자리 잡았고, 1913년 전투 50주년이 되면서 여러 면에서 일어난 일에 대한 표준적인 해석이 되었다.

그러나 현대 분석은 잃어버린 대의 해석의 많은 원칙에서 점점 더 벗어나고 있다. 20세기 후반에 잃어버린 대의가 학문적 지지를 대부분 잃었듯이, 역사학자들은 피켓의 돌격에 대한 전통적인 이야기를 비판하기 시작했다. Carol Reardon의 ''역사와 기억 속의 피켓의 돌격''(1997)과 Earl J. Hess의 ''피켓의 돌격 - 게티즈버그의 마지막 공격''(2001)은 역사와 기억을 풀려고 시도했다. 그들은 피켓의 돌격의 기억을 형성하려는 투쟁이 그 역사를 모호하게 하고, 버지니아 출신이 아닌 사람들의 역할을 평가 절하하고, 전쟁의 맥락에서 공격의 중요성을 과장했다고 주장했다. 의 공격 결정은 여러 전략적, 전술적 실수의 정점으로 묘사되었으며, Davis는 다음과 같이 썼다. "[리]는 스튜어트가 제공했을 수 있는 장기 및 중거리 전술 정찰을 포기했고, 그 결과 전체적인 전투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다. 그는 연합군의 움직임을 너무 늦게 알아차려 대응할 수 없었고, 자신의 노력을 최대한 효과적으로 지시하기 위해 미드의 중심을 파악하지 못했다. 그는 이 그렇게 하지 말라는 지시에도 불구하고 주요 교전을 벌이도록 했고, 그런 다음 효과적이지 않은 너무 부정확하고 재량적인 명령을 내렸다. 5년 후 리는 패배에 대한 두 가지 이유를 제시했다. 스튜어트의 부재로 인해 그는 맹인이 되었고, 그는 승리를 보장했을 것이라고 믿었던 '하나의 단호하고 통일된 일격'을 전달할 수 없었다. . . . 그는 궁극적으로 책임이 있다는 것을 말하지 않았다. 그는 스튜어트를 보냈고, 그의 자유 방임적인 관리가 7월 1일과 2일의 공격을 망치는 데 도움이 되었다. . . . 모든 장군에게는 최악의 전투가 있다. 게티즈버그는 리의 것이었다." 그의 군대의 희생은 불필요했다. 사상자 기록, 포획 보고서 및 직접적인 설명을 검토한 결과, 공격에 참여한 상당수의 남부 연합 군대가 마지막 돌격을 거부하고, 대신 에미츠버그 도로의 가라앉은 함몰지에 몸을 숨기고 전투 후 연합군에게 항복한 것으로 밝혀졌다. 그리고 이후의 연구는 피켓의 돌격이 리가 상상했던 결정적인 승리를 제공했을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란체스터 모델을 사용하여 여러 대안 시나리오를 검토한 연구에 따르면 리가 몇 개의 보병 여단을 더 돌격에 투입했다면 시체티 능선에 교두보를 확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가 그 이후에 그 위치를 유지하거나 활용하기에 충분한 예비군을 남기지 못했을 것이다.

6. 1. '잃어버린 대의' 관점

피켓의 돌격은 잃어버린 대의로 알려진 문학 및 문화 운동의 중심 상징 중 하나가 되었으며, 특히 버지니아 주민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지지자들은 연합군 부대를 향해 돌진하는 남부 연합 군인들의 용맹함, 남부 장군들의 유능한 지휘력, 그리고 궁극적인 승리에 대한 아슬아슬한 근접성을 찬양했다. 특히 리(Lee)와 피켓(Pickett)과 같은 버지니아 출신 장군들에 대한 압도적인 신뢰를 불러일으켰다. 남부의 소설가 윌리엄 포크너는 이 용감하지만 무익한 에피소드의 남부 신화를 묘사하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러한 견해는 전투에 대한 인식을 지배하게 되었지만, 초기에는 남북 양측 모두에서 이에 대한 항의가 있었다. 북부 참전 용사들은 공격하는 남부 연합 군대의 용기와 희생을 칭찬하는 대신, 시체티(Cemetery) 능선에 대한 그들의 치열한 방어에 대한 강조가 줄어드는 것에 반대했다. 버지니아 출신이 아닌 남부 사람들은 버지니아 연대가 더 많은 사상자를 냈지만 버지니아 지도자들과 버지니아 군대에 신화가 지나치게 집중되는 것에 불쾌감을 느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십 년간의 격렬한 역사화 이후 이 이야기는 확고하게 자리 잡았고, 1913년 전투 50주년이 되면서 여러 면에서 일어난 일에 대한 표준적인 해석이 되었다.

그러나 현대의 분석은 잃어버린 대의 해석의 많은 원칙에서 점점 더 벗어나고 있다. 역사학자들은 피켓의 돌격에 대한 전통적인 이야기를 비판하며, 버지니아 출신이 아닌 사람들의 역할을 평가 절하하고, 전쟁의 맥락에서 공격의 중요성을 과장했다고 주장한다. 리의 공격 결정은 여러 전략적, 전술적 실수의 정점으로 묘사되며, 그의 군대의 희생은 불필요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6. 2. 현대 역사학계의 비판적 시각

현대 역사학계는 피켓의 돌격을 잃어버린 대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견지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은 주로 남부, 특히 버지니아 주민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것으로, 남부군의 용맹함과 남부 출신 장군들의 뛰어난 지휘력을 강조하며, 승리가 눈앞에 있었다는 식의 해석을 담고 있다. 윌리엄 포크너와 같은 남부 출신 작가들은 이러한 신화적 서사를 작품에 투영하기도 했다.

그러나 현대 역사학자들은 이러한 "잃어버린 대의" 해석에서 벗어나, 리의 전략적, 전술적 실수를 지적하며 피켓의 돌격이 무모했음을 강조한다. 리가 장거리 정찰을 소홀히 하여 전반적인 전투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고, 그 결과, 연합군의 움직임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으며, 미드(Meade)의 중심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효과적인 공격을 지시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또한, 상당수의 남부 연합 군인들이 돌격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고 에미츠버그 도로 인근에 숨었다가 항복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더 나아가, 란체스터 모델을 이용한 연구에 따르면, 피켓의 돌격에 더 많은 보병 여단이 투입되었더라도 시체티 능선에 교두보를 확보했을 뿐, 그 이상의 전략적 이점을 얻기는 어려웠을 것이라는 분석도 제기된다. 이는 피켓의 돌격이 전쟁의 결과를 바꿀 수 있는 결정적인 공격이 아니었음을 시사한다.

6. 3. 돌격의 목표에 대한 논쟁

7. 게티즈버그 전장

게티즈버그 원형 파노라마의 작은 부분


피켓의 돌격이 있었던 장소는 게티즈버그 전장에서 가장 잘 보존된 지역 중 하나이다. 매년 수백만 명의 방문객이 게티즈버그 국립 군사 공원을 방문한다.[36] 미국 국립공원 관리청은 에미츠버그 도로 바로 동쪽에 위치한 웨스트 컨페더레이트 애비뉴의 버지니아 주 기념비에서 덤불 숲 방향으로 이어진 울타리를 따라 깔끔하게 잔디가 깎인 보행로를 유지하고 있다.[36]

프랑스 화가 폴 필리포토가 그린 "게티즈버그 전투"라는 제목의 원형 파노라마 회화는 게티즈버그 사이클로라마라고도 불리며, 세메터리 능선 상의 북군 방어 진지에서 피켓의 돌격을 조망한 그림이다. 이 그림은 1883년에 그려져 전시되었으며, 미국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원형 파노라마 중 하나이다. 2008년 9월에 복원되어 국립공원 관리청 관광 센터로 옮겨졌다[37]

참조

[1] 서적
[2] 서적
[3] 서적
[4] 서적
[5] 서적
[6] 서적
[7] 서적
[8] 서적
[9] 서적
[10] 서적
[11] 서적
[12] 서적
[13] 서적
[14] 서적
[15]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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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서적
[18] 서적
[19] 서적
[20] 서적
[21] 서적
[22] 서적
[23] 서적
[24] 서적
[25] 서적
[26] 서적
[27] 서적
[28] 서적
[29] 서적
[30] 서적
[31] 서적
[32] 서적
[33] 서적
[34] 서적
[35] 서적
[36] 문서 Harman, pp.77, 116; Sears, map, p.427
[37] 웹사이트 The Gettysburg Cyclorama http://www.nps.gov/a[...] National Park Service 2005
[38] 뉴스 보관된 사본 http://kookbang.dema[...] 2018-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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