윈필드 스콧 핸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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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윈필드 스콧 핸콕은 1824년 펜실베이니아에서 태어난 미국의 군인이자 정치인이었다. 그는 멕시코 전쟁에 참전하여 명성을 얻었으며, 남북 전쟁에서 북군 장군으로 활약했다. 특히 게티즈버그 전투에서 제2군단을 지휘하며 뛰어난 업적을 세웠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미국 의회의 표창을 받았다. 전쟁 후에는 링컨 암살 공모자 재판을 감독하고, 서부 지역에서 인디언과의 갈등을 겪었으며, 재건 시대에 텍사스, 루이지애나 지역을 관할하는 군 사령관으로 활동했다. 1880년 대통령 선거에 민주당 후보로 출마했으나 제임스 A. 가필드에게 패배했다. 이후 대서양 군관구 사령관을 역임하고, 1886년 당뇨병 합병증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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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필드 스콧 핸콕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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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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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칭 | 극상의 핸콕 |
출생일 | 1824년 2월 14일 |
출생지 |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몽고메리빌 |
사망일 | 1886년 2월 9일 |
사망지 | 미국 뉴욕 뉴욕 시 |
안장지 | 몽고메리 묘지 (웨스트 노리턴 타운십, 미국) |
배우자 | 앨미라 러셀 (1850년 결혼) |
자녀 | 2명 |
학력 | 미국 육군사관학교 (이학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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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 경력 | |
소속 | 미국 육군 (북군) |
복무 기간 | 1844년–1886년 |
최종 계급 | 소장 |
참전 | 미국-멕시코 전쟁 -콘트레라스 -추루부스코 미국 남북 전쟁 -윌리엄스버그 -맬번 힐 -앤티텀 -프레데릭스버그 -챈슬러스빌 -게티즈버그 -황야 -스팟실베이니아 코트하우스 -콜드 하버 -제1차 딥 바텀 -제2차 딥 바텀 -제2차 림즈 스테이션 -보이드턴 플랭크 로드 인디언 전쟁 |
지휘 | 제2 군단 |
정치 경력 | |
정당 | 민주당 |
기타 경력 | 1880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 |
2. 어린 시절과 가족
윈필드 스콧 핸콕과 그의 일란성 쌍둥이 형제 힐러리 베이커 핸콕은 1824년 2월 14일, 펜실베이니아주 몽고메리 스퀘어에서 태어났다. 이곳은 오늘날 필라델피아 북서쪽의 몽고메리 타운십에 해당한다.[1][99] 쌍둥이 형제는 벤저민 프랭클린 핸콕과 엘리자베스 혹스워스 핸콕의 아들이었다.[2][3][100][101] 윈필드라는 이름은 1812년 전쟁의 영웅인 윈필드 스콧 장군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1][99] 윈필드 스콧은 이후 미국-멕시코 전쟁에서도 활약했으며, 남북 전쟁 초기 미국 육군 총사령관을 지냈다.
핸콕 가문과 혹스워스 가문은 여러 세대 동안 펜실베이니아주 몽고메리 카운티에 거주했으며,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 혈통이었다.[4][102] 아버지 벤저민은 아들들이 태어났을 때는 학교 교사였으나, 몇 년 후 가족을 카운티 소재지인 노리스타운으로 옮겨 법률 공부를 시작하고 변호사로 활동했다.[1][99] 그는 침례교 집사였으며, 민주당원으로서 지방 정부 활동에도 참여했다.[1][99]
핸콕은 처음에 노리스타운 아카데미에서 교육을 받았으나, 1830년대 후반 노리스타운에 최초의 공립학교가 문을 열자 그곳으로 옮겼다.[5][103] 1840년, 지역 하원의원인 조셉 포르네스의 추천으로 웨스트포인트에 있는 미국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6][104] 웨스트포인트에서의 성적은 평균 수준이었으며, 1844년 25명의 동기생 중 18등으로 졸업하여 보병 병과에 배정되었다.[7][105]
3. 군사 경력 시작
윈필드 스콧 핸콕은 1824년 2월 14일, 그의 일란성 쌍둥이 형제 힐러리 베이커 핸콕과 함께 펜실베이니아주 몽고메리 스퀘어에서 태어났다. 이곳은 당시 필라델피아 북서쪽에 위치한 작은 마을이었으며, 현재는 몽고메리 타운십에 속한다.[1][99] 쌍둥이의 부모는 벤자민 프랭클린 핸콕과 엘리자베스 혹스워스 핸콕이었다.[2][3][100][101] 윈필드라는 이름은 1812년 전쟁과 미국-멕시코 전쟁에서 활약한 저명한 장군이자, 훗날 남북 전쟁 초기 미국 육군 총사령관이었던 윈필드 스콧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1][99]
핸콕 가문과 혹스워스 가문은 여러 세대 동안 펜실베이니아주 몽고메리 카운티에 거주했으며, 영국계 미국인, 스코틀랜드계 미국인, 웨일스계 미국인 혈통이었다.[4][102] 아버지 벤자민 핸콕은 아들들이 태어났을 때는 학교 교사였으나, 몇 년 후 가족을 노리스타운으로 이주시켜 법률을 공부하고 실무를 시작했다.[1][99] 그는 침례교 교회의 집사였으며, 민주당원으로서 지역 정치에도 참여했다.[1][99]
핸콕은 처음에는 노리스타운 아카데미에서 교육을 받았으나, 1830년대 후반 노리스타운에 공립학교가 처음 개교하자 그곳으로 옮겼다.[5][103] 1840년, 지역 연방 하원 의원인 조셉 포르네스는 핸콕을 웨스트포인트에 위치한 미국 육군사관학교에 지명했다.[6][104] 웨스트포인트에서의 학업 성적은 평균 수준이었으며, 1844년 25명의 동기생 중 18등으로 졸업하여 보병에 배속되었다.[7][105]
3. 1. 멕시코 전쟁 (1846-1848)
윈필드 스콧 핸콕은 미국 육군사관학교 졸업 후 제6 미국 보병 연대의 명예 소위로 임관되어, 처음에는 레드 강 계곡의 인디언 준주에 주둔했다. 당시 이 지역은 비교적 평온하여 핸콕은 별다른 사건 없이 시간을 보냈다.[8][106]
1846년 미국-멕시코 전쟁이 발발하자, 핸콕은 최전선에서 복무하기를 희망했다.[9][107] 그러나 처음에는 켄터키주에서 징병 관련 업무를 맡게 되었다. 그는 이 업무에서 뛰어난 능력을 보여 상관들이 그를 다른 보직으로 보내기를 꺼렸다.[10][108] 마침내 1847년 7월, 그는 멕시코 푸에블라에 주둔 중인 자신의 연대에 합류할 수 있었고, 이 부대는 그의 이름의 유래가 된 윈필드 스콧 장군이 지휘하는 군대의 일부였다.[10][108]
스콧 장군의 군대는 푸에블라에서 별다른 저항 없이 내륙으로 진군하여 남쪽에서 멕시코시티를 공격했다. 1847년 작전 중 핸콕은 콘트레라스 전투와 추루부스코 전투에서 처음으로 실전을 경험했다.[11][109] 이 전투들에서의 용감하고 훌륭한 복무로 그는 명예 중위로 진급했다.[110] 하지만 추루부스코 전투에서 무릎 부상을 입고 열병을 앓게 되었다.[26][93]
이후 몰리노 델 레이 전투에는 연대를 지휘하며 참전할 수 있었으나,[13] 열병 때문에 멕시코시티로의 최종 돌파에는 참여하지 못했는데, 이는 그에게 평생의 후회로 남았다.[13][111] 전쟁이 미국의 승리로 끝난 후, 핸콕은 1848년 과달루페 이달고 조약이 체결될 때까지 제6 보병 연대와 함께 멕시코에 머물렀다.[14]
3. 2. 결혼 생활과 평시 (1848-1861)
윈필드 스콧 핸콕은 미국-멕시코 전쟁 이후 육군 군수관 및 부관으로서 여러 임무를 수행했으며, 주로 미네소타주 포트 스넬링과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에서 근무했다.[15] 그는 세인트루이스에서 앨미라("앨리") 러셀(Almira "Allie" Russell)을 만나 1850년 1월 24일에 결혼했다.[16] 앨리는 두 자녀, 러셀(1850년 출생)과 에이다(1857년 출생)를 낳았으나, 두 아이 모두 부모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17]
핸콕은 1855년 대위로 진급하여 플로리다주 포트 마이어스에 배속되었다.[18] 핸콕의 어린 가족은 그의 새로운 부임지에 함께했으며, 당시 앨리 핸콕은 그곳의 유일한 여성이었다.[19] 핸콕의 플로리다 근무 기간은 제3차 세미놀 전쟁의 종결 시기와 일치했다. 그의 임무는 주로 군수관의 임무였으며, 그 작전에서 전투를 치르지는 않았다.[20]
플로리다의 상황이 안정되자 핸콕은 캔자스주 포트 리번워스로 재배치되었다.[20] 그는 노예제 찬반을 둘러싼 갈등인 "피의 캔자스" 사태 동안 서부에서 복무했으며, 유타 전쟁 이후 제6 보병연대가 파견된 유타 준주에서도 근무했다.[2] 이 갈등이 해결된 후, 핸콕은 1858년 11월 캘리포니아주 남부에 배치되었다.[21]
그는 1861년 남북 전쟁이 발발할 때까지 아내 앨리와 자녀들과 함께 캘리포니아에 머물렀다. 이곳에서 그는 대위이자 부군수관으로서, 훗날 남부 연합군 장군이 되는 앨버트 시드니 존스턴 휘하에서 복무했다.[3] 캘리포니아 근무 시절 핸콕은 여러 남부 출신 장교들과 친분을 쌓았는데, 특히 버지니아 출신의 루이스 A. 암스테드와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22] 남북 전쟁이 발발하자 암스테드를 비롯한 다른 남부 출신들은 남부 연합군에 합류하기 위해 떠났고, 핸콕은 미국 육군에 남았다.[23] 암스테드는 떠나면서 핸콕에게 "이것이 나에게 얼마나 큰 고통인지 당신은 결코 알지 못할 것이오, 하지만 안녕, 안녕."이라고 말했다.[24]
4. 남북 전쟁 (1861-1865)
남북 전쟁이 발발하자, 캘리포니아주에서 근무하던 핸콕은 남부 출신 동료 장교들이 남부 연합에 합류하기 위해 군을 떠나는 상황에서도 미국 육군에 남기로 결정했다.[119] 동부로 돌아온 그는 처음에는 보급 장교 임무를 맡았으나, 곧 야전 지휘관으로 나서 1861년 9월 23일 준장으로 진급하여 포토맥군의 윌리엄 F. 스미스 사단 예하 보병 여단을 지휘하게 되었다[93].
핸콕은 1862년 반도 전역 중 윌리엄스버그 전투에서 중요한 반격을 성공적으로 지휘하면서 동료들로부터 "탁월한 핸콕"(Hancock the Superb)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는 당시 군 사령관 조지 B. 매클렐런이 워싱턴 D.C.에 보낸 전문에서 "오늘 핸콕은 최고였다"라고 언급한 데서 유래했다[94]. 앤티텀 전투에서는 제2군단 제1사단장 이즈레일 B. 리처드슨 소장이 치명상을 입자 그 지휘를 이어받았다[121]. 1862년 11월 29일 자원병 소장으로 진급했으며[93], 이후 프레더릭스버그 전투와 챈슬러스빌 전투에서 사단을 이끌며 두 차례 부상을 입었다[123]. 챈슬러스빌 전투 후에는 제2군단의 지휘를 맡아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이끌었다[94]. 한 작가는 그의 전술적 기량으로 인해 경쟁자들조차 그를 '포토맥군의 뇌성'으로 불렀다고 기록했다[95].
핸콕의 군 경력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은 1863년 게티즈버그 전투였다. 그는 전투 첫날 존 F. 레이놀즈 소장의 전사 이후 조지 미드 소장의 명령으로 전선 지휘를 맡아 북군의 방어선을 조직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125][126]. 둘째 날과 셋째 날에도 중앙 방어선을 지키며 피켓의 돌격을 성공적으로 격퇴했으나, 이 과정에서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129][131]. 이 전투에서의 공로로 그는 연방 의회로부터 감사장을 받았다[95]. 한 군사 사학자는 "게티즈버그에 참전한 북군 장군 중에서 핸콕만큼 자신의 존재감을 완전히 보여줌으로써 부대를 장악한 자는 없었다"고 평가했다[94].
게티즈버그 부상에서 회복한 후, 핸콕은 1864년 봄 오버랜드 전역에 복귀하여 와일더니스 전투와 스포트실베이니아 코트하우스 전투 등에서 제2군단을 지휘하며 활약했다[134]. 특히 스포트실베이니아에서는 남군의 방어선을 돌파하는 결정적인 공격을 이끌었다. 1864년 8월에는 정규군 준장으로 진급했다[93]. 그러나 피터스버그 포위전 중 림스 역 2차 전투에서 패배를 겪었고[135], 게티즈버그 부상의 지속적인 후유증과 맞물려 1864년 11월 야전 지휘관직에서 물러났다[136]. 이후 셰넌도어 계곡 지역 지휘 등을 맡았으며, 전쟁이 끝난 후인 1865년 3월, 스포트실베이니아 전투에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정규군 명예 소장으로 진급했다[93].
훗날 율리시스 S. 그랜트는 그의 회고록에서 핸콕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핸콕은 독립적인 지휘를 맡지 않은 모든 장관 중 가장 눈에 띄는 존재였다. 다른 누구보다 오랫동안 군단을 지휘했고, 그의 이름이 전투 중에 저지른 실책에 책임이 있다고 지목된 적이 없었다. 외모도 매우 눈에 띄는 사람이었다... 온화한 성품으로 친구를 만들었고, 그의 개인적인 용기와 전투가 한창일 때에도 그가 지휘하고 있다는 존재감으로 그 아래에서 종군하는 병사들에게 자신감을 얻게 할 수 있었다. 아무리 전투가 격렬해도 제2군단의 병사들은 항상 그들의 지휘관이 돌봐줄 것이라고 느꼈다.''[124]
4. 1. 포토맥 군 복무

남북 전쟁이 발발하자, 핸콕은 급증하는 북군의 병참 장교 임무를 맡기 위해 동부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는 곧 야전 지휘관으로 나서게 되어, 1861년 9월 23일 준장으로 진급하여 포토맥 군의 윌리엄 F. 스미스 준장 사단 예하 보병 여단을 지휘하게 되었다[93].
핸콕은 1862년 반도 전역 중 윌리엄스버그 전투에서 결정적인 반격을 이끌면서 "Superb"(최고)라는 별명을 얻었다. 당시 군 사령관이었던 조지 B. 매클렐런 소장은 워싱턴 D. C.에 "핸콕은 오늘 최고였다(Hancock was superb today)"라는 전문을 보냈고, 이 별명은 그에게 굳어졌다[94]. 하지만 매클렐런은 핸콕의 성공적인 공격을 후속 작전으로 연결하지 못했고, 남부 연합군은 방해받지 않고 철수할 수 있었다[120].
앤티텀 전투에서는 '피의 길'(Bloody Lane)이라 불리는 곳에서의 격렬한 전투 중, 제2군단 제1사단장 이즈레일 B. 리처드슨 소장이 치명상을 입자 핸콕이 그 지휘를 이어받았다. 핸콕과 그의 참모들은 움푹 파인 길(Sunken Road)에 평행하게 말을 달리며 아군과 적군 사이를 질주하는 극적인 모습으로 전장에 나타났다[121]. 그의 부하들은 지친 남군에게 반격을 명령할 것으로 기대했지만, 핸콕은 매클렐런의 지시에 따라 현재 위치를 사수했다[122].
1862년 11월 29일, 핸콕은 자원병 소장으로 진급했다[93]. 다음 달 프레더릭스버그 전투에서는 메리스 하이츠(Marye's Heights)를 향한 비극적인 돌격을 지휘하다 복부에 부상을 입었다. 이후 챈슬러즈빌 전투에서는 조지프 후커 소장의 군대가 철수하는 것을 그의 사단이 엄호했으며, 이 과정에서 핸콕은 다시 부상을 당했다[123]. 챈슬러즈빌 전투 후, 당시 제2군단장이었던 더리어스 N. 카우치 소장이 후커의 지휘에 항의하며 포토맥 군을 떠나자, 핸콕이 제2군단의 지휘를 맡게 되었고, 전쟁이 거의 끝날 때까지 이 군단을 이끌었다[94].
4. 2. 게티즈버그 전투 (1863년 7월 1일 ~ 3일)
핸콕의 군 경력 중 가장 두드러진 활약은 1863년 7월 1일부터 3일까지 벌어진 게티즈버그 전투에서 새로운 군단장으로서 보여준 활약이었다.[43][94] 7월 1일, 그의 친구였던 존 F. 레이놀즈 소장이 전투 초반에 전사하자, 포토맥군의 새로운 사령관 조지 미드 소장은 핸콕에게 전장으로 가서 부대를 지휘하고 상황을 파악하라는 임무를 맡겼다. 이로써 핸콕은 당시 북군의 제1군단, 제2군단, 제3군단, 제11군단으로 구성된 군대의 좌익을 임시로 지휘하게 되었다. 당시 핸콕은 게티즈버그에 있던 북군 장교 중 가장 선임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는 미드 사령관이 그에게 큰 신뢰를 보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31][125] 핸콕은 자신보다 선임이었던 제11군단 사령관 올리버 O. 하워드 소장과 지휘권 문제로 잠시 논쟁을 벌였으나, 결국 핸콕이 지휘권을 확보했다. 그는 남군 병력이 제1군단과 제11군단을 마을 밖으로 밀어내자 묘지 언덕(Cemetery Hill)에 북군의 방어선을 조직했다. 미드로부터 군대를 철수시킬 권한을 부여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핸콕은 게티즈버그에서 싸움을 계속하기로 결정하는 책임을 졌다.[32][126] 그날 밤 미드가 도착하여 전체 지휘권을 인수했다.

7월 2일, 핸콕의 제2군단은 북군 전선의 중앙 부분인 묘지 능선(Cemetery Ridge)에 자리를 잡았다. 이날 남군 사령관 로버트 E. 리는 북군 전선의 양쪽 끝을 공격했다.[33][127] 북군 좌측에서는 남군 중장 제임스 롱스트리트의 공격으로 제3군단이 무너졌고, 핸콕은 즉시 존 C. 콜드웰 준장이 지휘하는 제1사단을 보내 밀밭(Wheatfield)에서 싸우는 북군을 지원했다. A. P. 힐 중장의 군단이 북군 중앙을 계속 공격하자, 핸콕은 방어선을 강화하고 중요한 지점으로 부대를 급파했다.[33][127] 그는 먼저 조지 윌라드 대령의 여단을 투입하여 남군 윌리엄 바크스데일 준장의 진격을 막았고,[34] 이어서 유명한 일화인 제1 미네소타 의용 보병 연대의 희생적인 돌격을 명령했다. 핸콕은 이 1개 연대에게 자신들보다 4배나 많은 남군 여단을 향해 돌격하라고 지시했고, 이 과정에서 연대는 87%라는 엄청난 사상자를 냈다.[35][128] 연대에게는 큰 희생이었지만, 이 영웅적인 행동 덕분에 북군은 방어선을 재정비할 귀중한 시간을 벌 수 있었고, 그날의 전투에서 승리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35][128] 또한 핸콕은 제1군단 소속 제13 버몬트 의용 보병 연대를 보내 남군이 점령하려던 북군 포대를 탈환하게 했으며,[36] 동쪽 묘지 언덕에서 벌어진 위기 상황에서는 사무엘 S. 캐롤 대령의 여단을 투입하여 남군의 주벌 얼리 사단 병력을 격퇴하고 포대를 지켜냈다.[37][38]

7월 3일, 핸콕은 묘지 능선에서 자신의 위치를 굳건히 지키며 남군의 대규모 공격인 피켓의 돌격을 정면으로 막아냈다.[39][129] 남군의 대대적인 포격이 보병 돌격에 앞서 쏟아지는 동안에도, 핸콕은 말을 타고 병사들 사이를 오가며 눈에 띄게 부대를 검열하고 격려했다. 한 부하가 "장군님, 군단장이 그런 식으로 목숨을 걸면 안 됩니다."라고 걱정하며 말하자, 핸콕은 "군단장의 목숨이 중요하지 않은 때도 있다."라고 대답한 것으로 유명하다.[40][130] 이어진 보병 돌격 중, 핸콕의 오랜 친구였던 루이스 A. 아미스테드 준장이 조지 피켓 소장의 사단 예하 여단을 이끌고 공격해왔다. 아미스테드는 이 전투에서 치명상을 입고 이틀 뒤 사망했다. 핸콕 역시 전투 중 심각한 부상을 입어 친구를 만날 수 없었다. 총알이 그의 안장 앞부분을 맞고 부서진 나무 조각, 큰 못과 함께 오른쪽 허벅지 안쪽을 관통했다.[41][131] 부하들의 도움으로 말에서 내려진 핸콕은 지혈대로 응급 처치를 받은 후, 직접 몸에 박힌 못을 빼내며 "저런 탄환을 던지다니, 탄약이 부족한 모양이군."이라고 고통 속에서도 농담을 했다고 전해진다.[42][132] 아미스테드가 치명상을 입었다는 소식은 핸콕의 참모인 헨리 H. 빙엄 대위가 전해주었다. 핸콕은 극심한 고통에도 불구하고 전투가 완전히 끝날 때까지 후방으로 후송되는 것을 거부하며 지휘를 계속했다. 그는 3일간의 전투 내내 자신의 부대에게 큰 영감을 주었다. 전투 후 핸콕은 "...그 위대하고 결정적인 승리에 대한 그의 용감하고 훌륭하며 눈에 띄는 공헌"으로 미국 의회로부터 감사를 받았다.[3][95]
한 군사 역사가는 "게티즈버그에서 핸콕만큼 그의 존재감만으로 병사들을 완벽하게 지배한 북군 장군은 없었다."라고 평가했으며,[43] 다른 역사가는 "그의 전술적 기술은 그를 '포토맥 군의 번개'로 알게 된 적들에게 빠른 존경을 받게 했다."고 기록했다.[44]
4. 3. 버지니아와 종전 (1864-1865)

핸콕은 게티즈버그 전투에서 입은 부상의 후유증으로 남은 전쟁 기간 동안 고통을 겪었다.[43][94] 펜실베이니아주 노리스타운에서 요양한 후, 겨울 동안 신병 모집 임무를 수행했고, 1864년 봄 율리시스 S. 그랜트 중장이 지휘하는 오버랜드 전투에 제2군단의 야전 지휘관으로 복귀했다. 그러나 부상으로 인해 완전한 기동력을 회복하지 못했고 이전과 같은 젊음의 활력도 되찾지 못했다.[45][133]
그럼에도 불구하고 핸콕은 와일더니스 전투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였으며, 5월 12일 스포트실베이니아 코트하우스 전투에서는 뮬 슈(Mule Shoe) 돌출부의 '피의 앵글'(Bloody Angle)에서 결정적인 돌파 공격을 지휘하여 스톤월 여단을 포함한 남부 연합 방어선을 무너뜨렸다.[46][134] 하지만 콜드 하버 전투에서는 그랜트가 명령한 무모하고 희생만 큰 정면 공격으로 인해 그의 군단은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47]
그랜트의 군대가 리 장군의 군대를 피해 제임스 강을 건넜을 때, 핸콕은 전쟁을 끝낼 수도 있는 중요한 위치에 서게 되었다. 그의 군단은 윌리엄 패러 스미스 장군이 피터스버그의 허술한 방어선을 공격하는 것을 지원하기 위해 도착했다. 그러나 핸콕은 스미스가 지형을 더 잘 알고 하루 종일 그곳에 있었다는 이유로 그의 판단을 따랐고, 결국 남부 연합군이 방어선을 강화할 시간을 주어 결정적인 공격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이는 전쟁의 흐름을 바꿀 수 있었던 큰 기회 중 하나를 잃은 것으로 평가된다.[2][100] 그의 군단이 딥 보텀 1차 전투의 공격에 참여한 후, 핸콕은 1864년 8월 12일부로 미국 정규군 준장으로 진급했다.[26][93]
핸콕의 군 경력에서 유일한 주요 패배는 피터스버그 포위전 중에 발생했다. 그의 제2군단은 윌밍턴 및 웰던 철도를 파괴하기 위해 피터스버그 남쪽으로 이동했다. 1864년 8월 25일, 남부 연합의 헨리 히스 소장이 림스 역 2차 전투에서 방어 준비가 미흡했던 북군의 진지를 공격하여 제2군단을 크게 격파하고 많은 포로를 잡았다.[48][135] 이후 보이드턴 플랭크 로드 전투(해처스 런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림스 역에서의 굴욕적인 패배는 게티즈버그 부상의 지속적인 영향과 더불어 그가 11월에 야전 지휘관직을 내려놓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49][136] 그는 1년 동안 4만 명 이상의 사상자를 냈지만 동시에 중요한 군사적 승리를 여러 차례 거둔 제2군단을 떠났다.
야전 지휘를 떠난 후, 핸콕은 의장 부대 성격의 제1베테랑 군단(First Veteran Corps) 지휘를 맡았다.[49][136] 이후 추가적인 징병 업무를 수행하고 중부 군관구(Middle Military Division)를 지휘했으며, 비교적 잠잠해진 셰넌도어 계곡 지역의 지휘를 필립 셰리던 소장으로부터 인계받았다.[2][100] 스포트실베이니아 전투에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1865년 3월 13일부로 정규군 명예 소장으로 진급했다.[26][93]
5. 전쟁 이후 군 복무
핸콕은 게티즈버그 전투에서 입은 부상으로 전쟁의 남은 기간 동안 어려움을 겪었다.[94] 펜실베이니아주 노리스타운에서 회복기를 보낸 후, 겨울 동안 신병 모집에 힘썼다. 1864년 봄, 율리시스 S. 그랜트 중장 휘하의 오버랜드 전역에 복귀하여 제2군단을 지휘했으나, 부상 후유증으로 이전의 활력을 완전히 되찾지는 못했다.[133]
그럼에도 황야 전투에서 성과를 냈고, 스폿실베이니아 코트하우스 전투에서는 "피의 앵글"(Bloody Angleeng)에서 결정적인 돌파 공격을 지휘하여 남군의 스톤월 사단을 격파하는 큰 공을 세웠다.[134] 하지만 콜드 하버 전투에서는 그랜트가 명령한 공격으로 인해 군단에 큰 손실을 입었다.
그랜트 군이 제임스 강을 건너 피터스버그로 향했을 때, 핸콕의 군단은 볼디 스미스의 공격을 지원하러 도착했다. 그러나 스미스의 조언에 따라 즉각적인 공격을 주저하면서 남군이 방어선을 강화할 시간을 주었고, 이는 전쟁을 조기에 끝낼 수 있었던 기회를 놓친 것으로 평가된다.[100] 딥보텀 전투에 참전한 후, 핸콕은 정규군 준장으로 승진했다(1864년 8월 12일 부).[93]
핸콕의 군 경력에서 유일한 큰 패배는 피터스버그 공방전 중 제2차 림 역 전투(1864년 8월 25일)에서 겪었다. 그의 제2군단은 웰던 철도를 파괴하던 중 남군의 헨리 히스 소장에게 기습 공격을 받아 큰 피해를 입고 많은 포로를 내주었다.[135] 이후 해처스 런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림 역에서의 패배와 게티즈버그 부상의 지속적인 영향으로 1864년 11월 야전 지휘관 직을 사임했다.[136]
제2군단을 떠난 핸콕은 의례적인 성격의 제1퇴역병 군단(First Veterans Corpseng) 지휘를 맡았다.[136] 또한 징병 업무를 담당하고, 중부 방면군(Middle Military Divisioneng)을 지휘했으며, 셰넌도어 계곡 지역의 지휘관이었던 필립 셰리던 소장을 교대시켜 주었다.[100] 스폿실베이니아 전투에서의 공적을 인정받아 1865년 3월 13일 부로 정규군 명예 소장으로 진급했다.[93]
5. 1. 링컨 암살 공모자 재판 (1865)

남북전쟁이 끝나갈 무렵, 핸콕은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 암살 공모자들의 처형을 감독하는 임무를 맡았다.[50][137] 링컨 대통령은 1865년 4월 14일에 암살되었고, 그해 5월 9일 군사위원회가 소집되어 피고인들을 재판했다.[51][137] 암살범인 존 윌크스 부스는 이미 사망했지만, 그의 공모자들에 대한 재판은 신속하게 진행되어 유죄 판결이 내려졌다. 앤드루 존슨 대통령은 7월 7일에 사형 집행을 명령했다.[138] 핸콕은 사형 선고를 받은 이들의 처형을 감독하라는 지시를 받았다.[138] 그는 죄가 비교적 가벼운 공모자, 특히 메리 서랫(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사형된 여성)의 처형을 주저했지만,[139] 명령을 따라야 했고, 이후 "모든 군인은 비슷한 상황에서 내가 한 것처럼 행동할 의무가 있었다."라고 기록했다.[52][139]
5. 2. 대초원 복무 (1866-1867)
남북 전쟁 이후, 핸콕은 볼티모어에 본부를 둔 새롭게 조직된 중부 군사부(Middle Military Department)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53][140] 1866년, 그랜트의 추천으로 정규군 소장으로 진급했으며, 같은 해 후반에는 미주리주, 캔자스주, 콜로라도주, 뉴멕시코주를 관할하는 미주리 군사부(Department of the Missouri) 사령관으로 전임되었다.[54][141] 핸콕은 캔자스주 포트 리번워스에 부임하여 새로운 임무를 시작했다.[54][141]부임 직후, 핸콕은 윌리엄 T. 셔먼 장군의 지시에 따라 샌드크리크 학살 이후 관계가 악화된 샤이엔족과 수족과의 협상을 위한 원정대를 이끌게 되었다.[55][142] 그러나 협상은 처음부터 순조롭지 않았고, 핸콕이 캔자스주 중부에 있던 버려진 샤이엔족 마을을 불태우라고 명령하면서 양측의 관계는 원정 시작 전보다 더욱 악화되었다.[56][143] 이 원정은 양측에 큰 인명 피해는 없었지만 성공적이라고 평가받지는 못했다.[144]
원정 과정에서 핸콕은 부하인 조지 암스트롱 커스터 중령과 갈등을 겪었다. 이는 커스터가 탈영병에게 가혹한 처벌을 가한 사건과 관련이 있었으며[144], 결국 커스터는 휴가 없는 결석(무단이탈) 혐의로 군사 재판에 회부되어 유죄 판결을 받았다.[144]
이후 인도 평화 위원회(Indian Peace Commission)가 대통령에게 제출한 공식 보고서는 핸콕의 원정이 샤이엔족과 수족의 폭력적인 보복을 유발했다고 비판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핸콕의 부하들이 마을을 포위했을 때 이미 전사들은 떠난 상태였고 남겨진 노인과 정신지체 소녀가 발견되었으며, 이후 이 소녀가 강간당해 사망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도망친 인디언들이 역을 파괴하고 사람들을 살해하자 핸콕은 마을 전체를 불태우라고 명령했고, 이는 평원 부족 전체와의 전면적인 적대 상태를 초래했다. 보고서는 이 원정 이후 군인과 정착민의 피해, 재산 손실이 증가했다고 지적했다.[57]
다만, 보고서는 "우리는 이 원정을 조직한 것에 대해 핸콕 장군을 비난하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고 명시하며, 핸콕이 부임 직후 상황에 속았을 가능성이 있고, 다른 분야에서의 애국적인 공헌으로 인해 이러한 문제에 익숙하지 않았을 수 있다고 언급했다. 또한 실수가 있었다면 그 책임은 다른 하급 지휘관이나 상부에 있을 수 있다고 덧붙였다.[57]
5. 3. 재건 (1867-1868)

핸콕이 서부에서 보낸 시간은 짧았다. 앤드루 존슨(Andrew Johnson) 대통령은 재건 하에서 공화당 장군들이 남부를 통치하는 방식에 불만을 품고 그들을 대체할 인물을 찾고 있었다.[58][145] 존슨 대통령이 특히 불만을 가졌던 장군은 필립 셰리던(Philip Sheridan)이었는데, 존슨은 곧 그랜트 장군에게 핸콕과 셰리던의 임무를 교체하라고 명령했다. 민주당원인 핸콕이 존슨의 정책 방향에 더 부합하게 통치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59][146] 이 결정에 대해 핸콕과 셰리던 모두 만족하지 않았지만, 셰리던은 포트 리븐워스로, 핸콕은 뉴올리언스(New Orleans)로 부임했다.[59][146]
핸콕의 새로운 임무는 텍사스(Texas)와 루이지애나(Louisiana)를 관할하는 제5군관구 사령관직이었다. 부임 직후인 1867년 11월 29일, 핸콕은 '일반 명령 제40호'를 발표하여 분리주의 성향의 백인들에게 호감을 얻었다. 뉴올리언스로 이동 중에 작성된 이 명령에서 핸콕은 존슨 대통령의 정책을 지지하며, 만약 관할 구역 주민들이 평화롭게 행동하고 민간 관료들이 자신의 의무를 다한다면 "군사력은 지휘를 중단하고 민간 행정이 자연스럽고 정당한 지배권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밝혔다.[60][147] 이 명령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포함했다.
미국 자유의 위대한 원칙은 여전히 이 국민의 합법적인 유산이며 항상 그래야 한다. 배심원 재판을 받을 권리, 인신 보호 영장, 언론의 자유, 언론의 자유, 개인의 자연권 및 재산권은 반드시 보존되어야 한다. 자유로운 제도는 국민의 번영과 행복에 필수적인 동시에 평화와 질서를 위한 가장 강력한 유인책을 제공한다.[61][149]
핸콕의 명령은 민간 정부로의 빠른 복귀를 희망하던 남부의 백인 민주당원들을 고무시켰지만, 남북 전쟁 이전의 백인 지배 체제로 회귀할 것을 우려한 남부의 흑인들과 공화당원들에게는 불안감을 안겨주었다.[62][148]
일반 명령 제40호는 워싱턴 D.C.의 공화당원들, 특히 급진 공화당원들로부터 즉각적인 비난을 받았으나, 존슨 대통령은 이를 전적으로 승인했다.[63][150] 워싱턴의 상황에 개의치 않고, 핸콕은 곧 자신의 말을 행동으로 옮겨 선거와 법원 판결을 뒤집기 위한 권한 행사를 거부했으며, 공개적인 반란은 진압될 것이라고 알렸다.[63][150] 이러한 행보는 민주당 내에서 핸콕의 인기를 크게 높였고, 1868년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의 유력한 대선 후보로 거론될 정도였다.[64][151] 실제로 1868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상당수 대의원의 지지를 확보했지만, 최종적으로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후 정치계에서 보기 드문 인물, 즉 민주당의 전통적인 가치인 주의 권리와 제한된 중앙 정부 원칙을 지지하면서도 연방 탈퇴에 반대하는 확고한 입장을 가진 인물로 평가받았다.[65][152]
5. 4. 대초원으로 복귀 (1868-1872)
1868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율리시스 S. 그랜트가 승리하면서 공화당이 워싱턴 D.C.의 주도권을 확고히 잡았다. 이 정치적 변화의 결과로, 민주당 성향이었던 핸콕은 남부 재건이라는 민감한 임무에서 벗어나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다코타 관구로 전출되었다.[66][153] 이 관구는 미네소타, 몬태나, 그리고 다코타스를 관할하는 광활한 지역이었다.[66][153]핸콕은 이전 서부 지역 근무 경험을 살려 인디언 부족 지도자들과의 회담을 통해 평화적인 관계를 구축하고자 노력했으며, 초기에는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다.[67][154] 그러나 1870년 미 육군 원정대가 블랙피트족을 대상으로 마리아스 학살을 자행하면서 양측의 관계는 급격히 악화되었다.[68][155] 또한, 백인 정착민들이 1868년 포트 라라미 조약을 위반하고 수우족에게 신성한 지역인 블랙힐스로 무단 침입하면서 수우족과의 관계 역시 심각한 갈등 국면으로 접어들었다.[69][156] 이러한 긴장 상황에도 불구하고, 핸콕의 재임 기간 동안 전면적인 충돌은 가까스로 피할 수 있었으며, 대부분의 기간은 비교적 평화롭게 유지되었다.
이 시기 핸콕은 훗날 옐로스톤 국립공원으로 지정될 지역의 탐사에 기여할 기회를 가졌다. 1870년 8월, 그는 포트 엘리스에 주둔한 제2 기병대에 헨리 D. 워시번 장군이 이끄는 옐로스톤 지역 탐험대에 대한 군사 호위를 제공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워시번-랭퍼드-도인 탐험대로 알려진 이 탐험은 옐로스톤 국립공원 설립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핸콕의 지시에 따라 구스타부스 체이니 도인 중위와 5명의 기병이 탐험대의 안전을 책임졌다. 이듬해인 1871년, 옐로스톤 지역을 탐사하던 존 W. 바로우 대위는 핸콕의 지원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공원 남쪽 경계 부근의 한 봉우리에 마운트 핸콕이라는 이름을 공식적으로 명명했다.[70]
5. 5. 동부에서 지휘와 정치적 야망 (1872-1880)
1872년, 미드 장군이 사망하면서 핸콕은 육군의 선임 소장이 되었다. 이로써 그는 더 중요한 지휘권을 맡게 되었고, 남부 지역에 핸콕을 두기를 원치 않았던 그랜트 대통령은 그를 대서양 관구의 지휘관으로 임명했다. 관구 사령부는 뉴욕 시 거버너스 아일랜드의 포트 콜럼버스에 두었다.[71] 이 광대한 관할 구역은 미국의 북동부 지역을 포괄했으며, 군사적으로는 대체로 평온한 지역이었다.그러나 1877년 대철도 파업 당시 육군이 개입하는 예외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철도 노동자들이 임금 삭감에 항의하며 파업에 돌입하자, 국가의 철도 교통망이 마비되었다. 이에 펜실베이니아주, 웨스트버지니아주, 메릴랜드주 주지사들은 헤이스 대통령에게 연방군을 투입하여 철도 운행을 재개해 달라고 요청했다. 연방군이 도시에 투입되자 대부분의 파업 참가자들은 해산했지만, 일부 지역에서는 폭력적인 충돌이 발생하기도 했다.[72]
핸콕은 뉴욕에 주둔하는 동안에도 정치적 야망을 놓지 않았다. 그는 1876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일부 표를 얻었으나, 뉴욕주 지사 새뮤얼 틸던이 2차 투표에서 압도적인 표차로 승리하면서 그는 유력한 후보가 되지 못했다.[73] 이 선거에서는 공화당 후보인 러더퍼드 B. 헤이스가 승리했다. 1876년 선거 분쟁과 1877년 재건 시대의 종료는 많은 관찰자들에게 1880년 선거가 민주당에게 수십 년 만에 최고의 승리 기회를 제공할 것이라고 확신시켰고,[74][159] 핸콕은 1880년 대선을 목표로 다시 집중했다.
6. 1880년 대통령 선거
1872년 미드 장군이 사망하면서 핸콕은 미국 육군의 선임 소장이 되었다. 이로 인해 그는 더 중요한 지휘권을 맡게 되었는데, 그랜트 대통령은 핸콕을 남부 지역에 배치하고 싶어 하지 않아 뉴욕 시 거버너스 아일랜드에 사령부를 둔 대서양 관구의 지휘관으로 임명했다.[71][157] 이 관할 구역은 미국의 북동부 지역을 포괄했으며, 1877년 대철도 파업 당시 연방군이 개입한 사건을 제외하고는 군사적으로 큰 사건은 없었다. 당시 철도 노동자들이 임금 삭감에 항의하며 파업에 돌입하자 국가 교통 시스템이 마비되었고, 펜실베이니아, 웨스트버지니아, 메릴랜드 주지사들의 요청으로 헤이스 대통령은 연방군을 투입하여 철도 운행을 재개시켰다. 연방군 투입 후 대부분의 파업 참가자들은 해산했지만, 일부 폭력적인 충돌이 발생하기도 했다.[72][157]
핸콕은 뉴욕 주둔 중에도 정치적 입지를 다지려 노력했다. 1876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약간의 표를 얻었으나, 새뮤얼 J. 틸든 뉴욕 주지사가 압도적인 표차로 후보가 되면서 큰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73][158] 공화당 후보 러더퍼드 B. 헤이스가 선거에서 승리하자, 핸콕은 1880년 대선을 목표로 삼았다. 1876년 선거 분쟁과 1877년 재건 시대의 종료는 1880년 선거가 민주당에게 유리한 기회가 될 것이라는 전망을 낳았다.[74][159]
핸콕은 40년간의 군 복무 경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미국-멕시코 전쟁 참전과 남북 전쟁 당시 북군 장군으로서의 활약으로 명성이 높았다. 동료들로부터는 "탁월한 핸콕"(Hancock the Superb)이라고 불렸고[93], 특히 1863년 게티즈버그 전투에서는 뛰어난 지도력으로 주목받았다. 한 군사 사학자는 "게티즈버그에 참전한 북군 장군 중 핸콕만큼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 부대를 장악한 인물은 없었다"고 평가했으며[94], 다른 이는 "그의 전술적 기량은 경쟁자들조차 감탄하게 만들었고, 그를 '포토맥군의 뇌성'으로 불렀다"고 기록했다.[95] 남북 전쟁 이후에는 재건 시대 미국 남부의 군정 통치와 미국 서부 프론티어 방어에도 참여했다.
이러한 군인으로서의 명성과 보수적인 헌법 원칙 지지자로서의 평판은 그를 대통령 후보로 여러 차례 거론되게 만들었다. 특히 정치 부패가 만연했던 시대에 그의 청렴함은 더욱 돋보였다. 러더퍼드 B. 헤이스 대통령은 핸콕에 대해 "군인이자 민간인으로서 뛰어난 공복의 모습을 만들어낼 때, 우리는 먼저 그리고 주로 그 인간성, 고결함, 청렴함, 일관성 및 의무에 대한 사심 없는 헌신을 고려해야 하며, 핸콕에 대해서는 철저히 순금이라고 진심으로 말할 수 있다"라고 평가했다.[96] 이러한 전국적인 인지도를 바탕으로 핸콕은 188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다.[97] 선거 결과, 공화당 후보 제임스 A. 가필드에게 미국 역사상 가장 근소한 일반 투표 차이로 패배했다.[98]
6. 1. 민주당 전당 대회

핸콕의 이름은 이전에도 여러 차례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거론되었지만, 과반수 대의원을 확보하지는 못했다.[75] 그러나 1880년에는 핸콕에게 유리한 상황이 조성되었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헤이스는 두 번째 임기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며, 이전 민주당 후보였던 틸던 역시 건강 악화를 이유로 재출마를 거절했다.[75][160]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핸콕은 대통령 후보 지명을 놓고 토머스 A. 헨드릭스, 앨런 G. 서먼, 스티븐 존슨 필드, 토머스 F. 베이어드 등 여러 경쟁자와 맞붙게 되었다.[76][161] 핸콕은 당시 주요 쟁점이었던 통화 문제에 대해 중립적인 입장을 취했으며, 특히 재건 시대 동안 발표했던 일반 명령 40호 덕분에 남부 지역에서 꾸준한 지지를 받고 있었다. 이는 핸콕이 다른 어떤 후보보다 더 폭넓은 전국적인 지지를 확보하고 있음을 의미했다.[76][161]
1880년 6월, 오하이오주 신시내티에서 민주당 전당대회가 열렸다. 핸콕은 첫 번째 투표에서 가장 많은 표를 얻었지만, 후보 지명에 필요한 과반수를 확보하지는 못했다.[77][162] 그러나 이어진 두 번째 투표에서 핸콕은 필요한 3분의 2 이상의 표를 얻어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최종 지명되었다.[78][79][163] 부통령 후보로는 인디애나 출신의 윌리엄 헤이든 잉글리시가 선정되었다.[78][79][163]
6. 2. 가필드와의 선거 운동

공화당은 오하이오주 출신 미국 하원 의원이자 남북 전쟁 참전 용사이며 노련한 정치인이었던 제임스 A. 가필드를 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 핸콕과 민주당은 전통적 지지 기반인 미국 남부(Solid South)를 확실히 확보할 것으로 예상했지만,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북부 주 몇 곳을 추가로 확보해야 했다. 양당 간의 실질적인 정책 차이는 크지 않았고, 공화당은 핸콕이 남북 전쟁 영웅으로서 가진 높은 명성 때문에 그에 대한 직접적인 인신 공격을 꺼렸다.[80][164]
공화당이 파고들 수 있었던 유일한 정책적 차이점은 민주당 강령에 포함된 "tariff for revenue only|오직 수입 확보를 위한 관세eng" 조항이었다.[81][165] 가필드 측 선거 운동원들은 이 내용을 활용하여, 민주당이 높은 보호 관세로 혜택을 보는 산업 노동자들의 고충에 공감하지 못하는 세력으로 묘사했다. 이 관세 논쟁은 민주당의 과반수 확보에 필수적이었던 산업화된 북부 주에서 민주당 지지 기반을 잠식하는 결과를 낳았다.[82][166]
결국 핸콕과 민주당은 뉴저지주를 제외하고는 목표로 했던 북부 주에서 승리하지 못했다. 1880년 미국 대통령 선거의 일반 투표 결과는 미국 역사상 가장 근소한 차이 중 하나로 기록되었는데,[98] 핸콕은 가필드에게 불과 1만 표 미만의 차이로 패배했다. 하지만 선거인단 투표에서는 가필드가 214표, 핸콕이 155표를 얻어 상당한 격차를 보였다.[83]
7. 이후의 생애 (1880-1886)
핸콕은 선거 패배를 덤덤하게 받아들였고, 가필드의 취임식에 참석했다.[84][167] 선거 이후에도 핸콕은 대서양 군관구 사령관 직을 계속 수행했다.[84]
1881년 그는 전미 총기 협회(National Rifle Association, NRA)의 회장으로 선출되었으며, 협회의 목적에 대해 "혁명 시대만큼이나 무기 사용 기술을 널리 보급하여 국가의 군사력을 증강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85][168] 또한 핸콕은 1878년부터 1886년 사망할 때까지 미국 군사 연구소(Military Service Institution of the United States)의 창립 이사이자 초대 회장을 역임했으며,[86] 1879년부터 1886년까지는 재향 군인 단체인 미국 충성 군단(Military Order of the Loyal Legion of the United States)의 사령관이었다.[86]
핸콕이 마지막으로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낸 주요 행사는 1885년 그랜트 전 대통령의 장례식을 주재한 것이었다.[87] 그는 뉴욕 시에서 그랜트의 9마일 장례 행렬을 조직하고 이끌었으며, 행렬 시작 시 가벼운 박수가 나오자 손짓으로 고인에 대한 침묵과 존경을 표하도록 했다.[90] 같은 해, 그는 게티즈버그로 덜 알려진 여행을 하기도 했다.[87]
핸콕은 1886년 2월 9일, 여전히 대서양 군관구 사령관으로 재직 중 거버너스섬에서 사망했다. 사인은 감염된 큰 종기(carbuncle)와 당뇨병(Diabetes mellitus)의 합병증이었다.[43][2][100] 그는 펜실베이니아주 노리스타운 인근 웨스트 노리턴 타운십의 몽고메리 묘지(Montgomery Cemetery)에 안장되었다.[26][93] 핸콕은 두 자녀보다 오래 살았으며, 그의 아들 러셀이 낳은 세 명의 손주가 있었다. 핸콕의 아내 앨미라는 1887년 『Reminiscences of Winfield Scott Hancock|윈필드 스콧 핸콕의 회상록영어』을 출판했다.[26]
핸콕 사후, 공화당 소속이었던 프랜시스 아머사 워커 장군은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비록 나는 핸콕 장군에게 투표하지 않았지만, 최근 몇 년 동안 국가가 잃은 가장 좋은 것 중 하나는 백악관에 있었을 저 기사도적이고 위엄 있으며 훌륭한 신사의 모범과 영향력이었다고 굳게 믿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마도 지난 13년 동안 양당 모두 불행하고 해로운 것으로 인식한 많은 것들이 핸콕 장군이 당선되었다면 피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88]
러더퍼드 B. 헤이스 전 대통령 역시 핸콕의 청렴함을 높이 평가하며 이렇게 말했다.
만약 우리가 군인으로서나 공직에서 두드러진 공직자에 대한 평가를 할 때, 그의 인격, 청렴성, 순수함, 목적의 단일성, 그리고 의무에 대한 사심 없는 헌신을 먼저 그리고 주로 생각한다면, 우리는 핸콕에 대해 그가 처음부터 끝까지 순수한 금이었다고 진실로 말할 수 있습니다.[89][96]
8. 유산
윈필드 스콧 핸콕은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다양한 방식으로 기념되고 있다. 여러 조각상이 세워졌으며,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게티즈버그 전장 동부 묘지 언덕에 있는 기마상.[26]
- 사이러스 에드윈 댈린이 게티즈버그의 펜실베이니아 기념관의 일부로 제작한 초상 조각상.[26]
- 피켓의 돌격 중 핸콕의 부상을 묘사한 부조로, 게티즈버그의 뉴욕 주 기념물에 있다.[26]
- 워싱턴 D.C. 펜실베이니아 애비뉴와 7번가 북서쪽에 위치한 기마상 (윈필드 스콧 핸콕 기념관).[26]
- 필라델피아, 펜실베이니아 페어마운트 공원의 스미스 기념 아치 위에 있는 기마상.[26]
- 조각가 제임스 윌슨 알렉산더 맥도날드가 제작한 뉴욕 핸콕 광장의 기념 청동 흉상.[26]
또한, 그의 이름을 딴 지명과 시설도 있다.
- 텍사스주의 포트 핸콕 (텍사스)[26]
- 뉴저지주 샌디훅의 포트 핸콕 (뉴저지)[26]
- 펜실베이니아주 노리스타운에는 핸콕의 이름을 딴 윈필드 스콧 핸콕 초등학교가 있다. 1895년 아치 스트리트와 이스트 스프루스 스트리트에 처음 건립되었고, 1962년 아치 스트리트와 서밋 스트리트에 새 건물이 세워져 현재 노리스타운 지역 교육구에서 사용 중이다. 1895년 건물도 남아 비영리 단체에서 사용하고 있다.[26]
- 1947년 9월 11일, 핸콕이 태어난 곳 근처인 펜실베이니아주 베들레헴 파이크(PA 309)를 따라 펜실베이니아 역사 표지판이 헌정되었다.[26]
핸콕의 초상화는 1886년 미국 화폐인 2달러 은화 증서 시리즈에 등장했다. 이 지폐는 수집가들 사이에서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91]
핸콕은 샤라 가문의 남북 전쟁 역사 소설에서도 중요한 인물로 다루어진다. 마이클 샤라의 ''킬러 앤젤스''와 그의 아들 제프리 샤라의 ''신과 장군들'', ''마지막 희생'' 등이 대표적이다. 이 소설들을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 ''게티즈버그''(1993)와 ''신과 장군들''(2003)에서는 배우 브라이언 말론이 핸콕 역을 맡았으며, 두 영화 모두에서 핸콕은 매우 긍정적인 인물로 묘사되었다.[92][169]
핸콕의 청렴함은 당대의 부패와 대조를 이루며 높이 평가받았다. 러더퍼드 B. 헤이스 대통령은 핸콕의 인격, 청렴성, 순수함, 사심 없는 헌신을 언급하며 그가 "처음부터 끝까지 순수한 금이었다"고 평가했다.[89] 공화당원이었던 프랜시스 A. 워커 장군조차 1893년에 핸콕이 대통령이 되었다면 국가가 그의 모범적인 리더십 아래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갔을 것이라고 회고하며 그의 인품을 높이 샀다.[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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