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프 5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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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필리프 5세는 1291년에 태어나 1322년에 사망한 프랑스 국왕으로, 1316년부터 즉위했다. 그는 형 루이 10세의 사망과 조카 장 1세의 요절로 카페 왕조의 직계 남계가 끊어지자, 살리카법을 내세워 왕위를 계승했다. 필리프 5세는 내정 개혁을 추진하고 플랑드르 분쟁을 외교적으로 해결했으며, 십자군 운동에도 관여했다. 그는 부르고뉴 백작 잔 2세와 결혼하여 많은 자녀를 두었지만, 아들들은 모두 요절했다. 필리프 5세 사후에는 동생 샤를 4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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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프 5세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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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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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칭 | 필리프 르 롱 (Philippe le Long) |
즉위 | 1316년 11월 20일 |
대관식 | 1317년 1월 9일 |
사망 | 1322년 1월 3일 |
매장 | 1322년 1월 8일 |
묻힌 곳 | 생드니 대성당 |
신분 | |
직위 | 프랑스 국왕, 나바라 국왕 |
왕가 | 카페 왕가 |
개인 정보 | |
출생 | 1291년경 |
출생지 | 리옹, 프랑스 |
사망지 | 롱샹 수도원, 부아 드 불로뉴, 파리, 프랑스 |
배우자 | 부르고뉴 여백작 잔 2세 (1307년 결혼) |
자녀 | 부르고뉴 여백작 잔 3세 부르고뉴 여백작 마르그리트 1세 비엔누아의 도팽 이자벨 프랑스의 블랑슈 |
아버지 | 필리프 4세 |
어머니 | 나바라 여왕 호아나 1세 |
2. 성격과 혼인
필리프 5세는 1291년 리옹에서 태어났다. 그는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와 나바라의 여왕 후아나 1세의 둘째 아들이었다.[1] 그의 아버지는 그에게 푸아티에 백작령을 상속지로 주었다. 현대 역사가들은 필리프 5세를 "상당한 지능과 감수성을 지닌" 인물이자 필리프 4세의 세 아들 중 "가장 현명하고 정치적으로 능숙한" 인물로 묘사한다. 필리프는 아버지와 형인 프랑스의 루이 10세가 겪었던 어려움의 영향을 받았다. 필리프 4세와 루이 10세 모두에게 문제의 핵심은 세금과 위기 상황이 아닌 때에 세금을 거두는 어려움이었다.
1316년 형인 루이 10세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인 요한 1세 또한 태어난 지 4일 만에 사망하면서 카페 왕조의 직계 남계는 단절되었다. 이 때문에 루이 10세의 딸인 잔을 차기 국왕으로 옹립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잔의 어머니 마르그리트 드 부르고뉴가 1314년에 일으킨 불륜 사건 때문에 잔이 카페 가문의 혈통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2]
필립 5세는 국내적으로 불확실한 상황과 계속되는 흉작에도 불구하고 "강력하고 인기 있는" 국왕으로 평가받았다.[2] 그는 아버지 필립 4세의 정책을 이어받아 프랑스 왕실의 재정을 튼튼하게 하려고 노력했으며, 전임 국왕이자 형인 루이 10세의 인기 없었던 정책들을 상당수 철회했다. 또한 정부 개혁을 실시하고, 통화를 개혁했으며, 도량형 단위를 표준화하기 위해 노력했다.[2] 필립 5세의 주요 측근 중에는 훗날 추기경이 된 피에르 베르트랑이 있었는데, 그는 이후 프랑스 왕실 정부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요한 22세는 아비뇽 교황청의 두 번째 교황으로, 초기에는 십자군 운동 후반기에 필리프 5세의 측근이었으나, 1320년 폭력적인 목동의 십자군을 비난하는 데 그와 함께했다.[7]
1321년, 프랑스에서는 "나병 공포"라 불리는 음모가 발각되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는 근거가 없는 것으로 보이며, 나병 환자들이 여러 도시의 우물에 독을 풀었고, 이 활동은 외국 무슬림의 비밀 지시를 받은 유대인 소수 민족에 의해 조직되었다는 주장이었다.[19] 이 공포는 전년도의 셰퍼드 십자군과 그 이전 10년 동안의 흉작으로 인해 불안한 분위기 속에서 확산되었다.[19]
필리프는 개혁 계획을 추진하던 중 여러 질병으로 건강이 악화되었다.[20] 잠시 회복하는 듯했으나 파리 롱샹 수도원에서 사망했다. 그는 생드니 대성당에 매장되었고, 내장은 파리에 있던 현재는 철거된 자코뱅 수도원 교회에 매장되었다.
필리프는 1291년 리옹에서 태어났다.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와 나바라의 여왕 후아나 1세의 둘째 아들이었다. 1307년 1월, 필리프 5세는 부르고뉴 백작 오토 4세의 딸이자 상속녀인 부르고뉴 백작 부인 잔 2세와 결혼하여 다섯 자녀를 두었다.[2]
[1]
웹사이트
drapeaux des comtes de Poitiers
http://svowebmaster.[...]
필리프는 1307년 1월 21일에 부르고뉴 백작 부르고뉴의 후아나(부르고뉴의 오토 4세와 아르투아의 마호의 장녀)와 결혼했다.[2] 원래 계획은 루이 10세가 후아나와 결혼하는 것이었지만, 루이가 부르고뉴의 마르가레트와 약혼한 후 변경되었다. 현대 학자들은 이 결혼이 행복했는지에 대한 증거를 거의 찾지 못했지만, 두 사람은 짧은 시간 안에 많은 자녀를 두었다. 그리고 필리프는 당시 기준으로 후아나에게 매우 관대했다. 필리프는 후아나에게 토지와 돈을 제공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가 일찍 죽을 경우 이러한 선물이 취소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다양한 선물들 중에는 궁전, 마을, 보석을 위한 추가 자금, 그리고 그녀의 하인들과 부르고뉴에 있는 모든 유대인들의 재산이 포함되었는데, 그는 이것들을 1318년에 후아나에게 주었다.
후아나는 1314년 마르가레트의 간통 사건에 연루되었다. 후아나는 비밀리에 간통을 알고 있었던 것으로 의심되었고, 처벌로 두르당에 가택 연금되었으며, 그 후 후아나 자신도 간통 혐의를 받았다. 필리프의 지지 속에 그녀는 계속해서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고, 1315년에는 부분적으로 필리프의 영향력을 통해 파리 고등 법원에서 그녀의 이름이 깨끗해졌고, 그녀는 법정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필리프가 그녀를 그렇게 지지한 이유는 분명하지 않다. 한 가지 이론은 그가 후아나를 버리면 부르고뉴도 잃을 수 있다고 우려했기 때문이라는 것이고, 또 다른 이론은 그가 그녀를 매우 깊이 사랑했다는 것이다.
3. 왕위 계승과 살리카법
필립은 샤를 드 발루아와 오도 4세 등 잠재적 섭정 후보들을 제치고 스스로 섭정에 임명되었다.[2] 그는 조카 요한 1세가 태어난 후 며칠 동안 섭정으로 있다가, 요한 1세가 불과 5일 만에 사망하자 왕위 계승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필립은 정치적 협상을 통해 오도 4세와 샤를 드 발루아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였다.[2] 오도 4세는 필립의 딸과 결혼하는 대가로 조카딸 잔의 프랑스와 나바라 왕위 계승권을 포기했다. 1317년 1월 9일, 필립은 랭스에서 대관식을 치렀지만, 귀족 대다수는 참석을 거부했다. 샹파뉴, 아르투아, 부르고뉴에서 시위가 벌어졌고,[3] 필립은 2월 2일 파리에서 귀족 회의를 소집했다.[2]
필립은 여성은 프랑스 왕위를 계승할 수 없다는 원칙을 내세우고, 자신이 기름부음을 받은 왕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권력을 확고히 했다.[2] 여성과 그들의 남성 후손의 왕위 계승 배제는 훗날 발루아 왕가에 의해 살리카 법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잔은 살리카 법을 적용하지 않던 나바라 왕위는 1328년에 계승했다.
4. 내정 개혁
1317년, 필립 5세는 1311년 그의 아버지가 처음 통과시킨 법령을 다시 발표하여 지방에서 왕실 자원과 직책이 양도되거나 절도되는 것을 규탄했다. 1318년, 정치적 상황이 안정되자 필립 5세는 더 나아가 새로운 법령을 발표했다. 이 법령에서는 프랑스 왕실 영토(왕실에 영구적으로 속한 핵심 토지와 작위)와 어떤 이유로든 왕실에 몰수된 토지 및 작위를 구분했다. 필립 5세는 프랑스 왕실이 귀족들에게 새로운 토지를 부여하거나 하사할 경우, 대개 몰수된 토지에서 제공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이는 왕실의 핵심적이고 양도할 수 없는 권력을 강화하는 동시에, 귀족들이 범죄나 위법 행위로 왕실에 몰수되지 않는 한 자신의 토지는 신성불가침이라는 것을 보장하는 양면적인 발표였다. 필립 5세는 1320년에 왕실 회계 감사를 담당하는 법원인 쿠르 데 꽁프트를 설립하여 적절한 지불을 보장하고자 했다.[4] 이 법원은 오늘날까지도 존재한다. 실제로 필립 5세는 왕실 토지와 작위 부여에 대한 자신의 선언 원칙을 완전히 준수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직계 전임자들보다는 훨씬 보수적이었다.
5. 플랑드르 분쟁 해결과 잉글랜드와의 관계
필립은 플랑드르 문제를 성공적으로 해결했다. 플랑드르 백작은 “엄청나게 부유한 국가”[5]를 다스렸는데, 이 국가는 프랑스 국가의 변방에서 대체로 자치적인 존재로 기능했다. 프랑스 국왕은 일반적으로 플랑드르에 대한 종주권을 가진 것으로 여겨졌지만, 최근 몇 년 동안 관계는 악화되었다.[5] 필립 4세는 1302년 프랑스의 지배를 재확립하려는 시도에서 쿠르트레 전투에서 패배했고,[5] 이후 몽앙페벨 전투에서 프랑스가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관계는 여전히 긴장 상태였다.
로베르 3세는 계속해서 프랑스에 군사적으로 저항했지만, 필립이 왕위에 오르자 플랑드르 내에서 정치적으로 고립되었다. 한편, 프랑스는 전시 체제를 유지해야 할 필요성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다. 루이 10세는 1315년에 플랑드르로의 곡물 및 기타 물자 수출을 금지했는데, 이로 인해 밀수 산업이 성행하여 국경 지역에서 프랑스와의 합법적인 무역을 저해했다. 루이 10세는 군대에 식량을 직접 징발해야 했고, 이는 지역 영주와 교회의 불만을 야기했다. 필립은 1317년에 적절한 보상 계획을 시행했지만, 상황은 불안정했다.
필립과 로베르는 군사적 해결책 대신 정치적 타협을 모색했다. 1320년 6월, 로베르는 필립과 타협하여 자신의 어린 손자 루이를 상속자로 확정하는 대신, 루이를 필립의 둘째 딸 마르그리트와 결혼시키기로 약속했다. 이는 로베르와 루이에게 플랑드르 내에서 강력한 프랑스의 지원을 제공했다. 루이는 이미 필립의 영향 아래 있었으며, 프랑스 중부 네베르와 필립의 궁정에서 자라 사실상 프랑스 왕자와 같은 문화적 배경을 가졌다. 이 합의는 필립의 정책에 있어 큰 성공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루이의 친프랑스 성향과 플랑드르 내 정치적 기반 부족은 정치적 혼란과 농민 반란을 초래했다.
필립은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2세와도 갈등을 겪었다. 에드워드는 가스코뉴 통치자로서 프랑스 국왕에게 충성을 맹세해야 했지만, 스스로 국왕이자 자치적인 가스코뉴 지방의 수장으로서 그렇게 하려 하지 않았다.[3] 에드워드는 루이 10세에게 충성을 맹세하지 않았고, 처음에는 잉글랜드에 더 호의적인 필립에게도 맹세를 거부했다.[3] 1319년 필립은 에드워드가 대리인을 통해 충성을 맹세하도록 허용했지만, 1320년에는 직접 맹세할 것을 기대했다.[3] 에드워드는 아미앵에 도착했지만, 필립은 에드워드에게 개인적인 충성 맹세를 추가로 요구했다.[6] 에드워드는 충성 맹세는 했지만, 개인적인 충성 맹세는 거부했다. 이는 가스코뉴를 둘러싼 프랑스의 잉글랜드에 대한 압력이 증가했음을 보여준다.
6. 십자군 운동
필리프 5세는 당시 진행 중이던 십자군 운동에서도 역할을 맡았다. 1316년 필리프 5세가 리옹에서 소집한 추기경단 회의에서 요한 22세가 교황으로 선출되었고, 그는 새로운 십자군을 보고 싶다는 희망을 밝혔다.[7] 1312년 빈 공의회에서 필리프 4세는 프랑스 주도의 새로운 십자군에 대한 공동 계획에 동의했고, 그의 아들 필리프 5세는 1313년에 십자군에 참여했다.[8] 왕이 된 필리프 5세는 이 계획을 수행해야 할 의무가 있었고, 1316년 이후 요한 22세에게 추가 자금을 요청하여 받았다.[7]
그러나 필리프 5세와 요한 22세는 플랑드르의 군사 상황이 불안정한 동안 프랑스 십자군은 불가능하다는 데 동의했다.[9] 그럼에도 요한 22세는 아르메니아인들에게 필리프 5세가 곧 그들을 구원하기 위한 십자군을 이끌 것이라고 보장했다.[9] 클레르몽의 루이 1세 휘하 프랑스 남부에서 출발한 해군 선봉대를 파견하려는 시도는 실패했고, 1319년 제노바 앞바다에서 전투에서 패배했다.[10] 1319년에서 1320년 겨울 동안 필리프 5세는 잠재적인 두 번째 원정을 준비하기 위해 프랑스 군 지도자들과 여러 차례 회의를 소집했고,[8] 이는 윌리엄 뒤랑의 십자군 논문에 영향을 미쳤다.[11] 필리프 5세의 통치 말기에 그와 요한 22세는 새로운 자금과 그 사용에 대한 약속 문제로 불화를 겪었고, 두 사람 모두 목동의 십자군 문제를 처리하는 데 집중했다.[10]
1320년 노르망디에서 목동의 십자군이 발생했다. 필리프 5세와 그의 전임자들은 반복적으로 대중 십자군을 촉구했지만, 실제로 대규모 원정이 없었던 것이 결국 통제되지 않은 대중적인 십자군으로 폭발했다는 주장이 있다.[12] 1320년 봄, 새로운 십자군에 대한 필리프 5세의 의도는 널리 알려졌고, 플랑드르와 프랑스 북부의 평화가 이어짐에 따라 많은 농민과 군인들이 쫓겨났다. 그 결과, 지역 유대인, 왕궁,[13] 부유한 성직자,[14] 파리를 위협하는 대규모의 폭력적인 반유대주의 운동이 발생했다. 이 운동은 십자군을 수행할 진정한 의도가 있는지 의심한 요한 22세에 의해 비난받았다.[15] 필리프 5세는 이 운동에 대항하여 군사적으로 진압하고, 잔당들을 피레네 산맥을 건너 아라곤으로 몰아냈다.
7. 1321년 나환자 공포
당시 프랑스 유대인들은 프랑스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필리프 5세는 왕실 관리들에게 유대인 금융업자들이 기독교인들로부터 빚을 회수하는 것을 돕도록 명령했으며, 일부 지역 관리들은 왕실이 사망한 유대인 상인들의 재산을 상속받을 것이라고 주장했다.[16] 1320년 사건 이후 필리프 5세는 셰퍼드 십자군 당시 유대인들을 공격한 자들에게 벌금을 부과했는데, 이는 프랑스의 유대인 소수 민족에 대한 반감을 더욱 증폭시켰다.[17] 나병 환자들에 대한 소문과 주장 또한 1320년에 유포되었으며, 일부는 십자군 당시 체포되기도 했다.[18]
필리프 5세는 6월에 남부 재정 제도 개혁을 목표로 한 남부 순방 중 푸아티에에 있었는데, 그때 나병 공포에 대한 소식이 전해졌다. 그는 유죄 판결을 받은 나병 환자는 모두 화형에 처하고 그들의 재산은 왕실에 귀속된다는 초기 칙령을 발표했다.[19] 왕의 남부 순방과 개혁 계획은 현대 기준으로 볼 때 행정적으로 훌륭했지만, 많은 지역에서 반대를 불러일으켰고, 현대 역사가들은 푸아티에에서 왕의 역할과 갑작스러운 폭력 사태의 발생을 연결짓고 있다.[20] 이 모든 상황은 필리프 5세를 어려운 입장에 놓이게 했다. 그는 나병 환자, 유대인, 무슬림의 잘못을 주장하는 자들 편을 공개적으로 들 수 없었는데, 그럴 경우 불필요한 폭력을 더욱 부추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그가 그들의 편을 들지 않으면, 무단 폭력을 더욱 조장하여 왕권을 약화시킬 위험이 있었다.[21] 나병 공포로 인해 일부 유대인들이 프랑스를 떠났지만, 필리프 5세는 공식적인 칙령에 서명하는 것을 성공적으로 저지하여 그 영향을 어느 정도 제한했다.[22]
8. 죽음과 계승
1316년 필리프가 주장했던 남계 상속 원칙에 따라 필리프는 아들이 없었기에 그의 남동생 샤를 4세가 계승했다. 샤를 또한 남자 후계자 없이 사망하여 결국 에드워드 3세가 프랑스 왕위를 주장하게 되었고, 이후 백년 전쟁이 발발하게 되었다.
루이 10세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인 장 1세 또한 탄생 4일 만에 요절함으로써 카페 왕조의 직계 남계는 단절되었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루이 10세의 딸인 잔느 2세를 차기 국왕으로 원하는 목소리가 있었지만, 잔느가 카페 가문의 혈통이 아니라는 의문이 제기되었다. 잔느의 어머니 마르그리트 드 부르고뉴와 필리프 자신의 아내인 잔느 2세, 그리고 왕의 동생 샤를(훗날 샤를 4세)의 아내 블랑슈 드 부르고뉴 세 명이 1314년에 큰 스캔들이 된 불륜 사건의 당사자였기 때문이다.[30] 따라서 필리프는 잔느가 왕가의 혈통을 잇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와, 살리카 법에 따라 여자의 왕위 계승은 금지되어 있다는 이유로 잔느를 왕위에서 배제하고 자신이 국왕으로 즉위하게 되었다.
1322년 필리프 5세는 성장한 남자아이 없이 사망하였고, 뒤를 이어 동생 샤를 4세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9. 가족
1307년에 결혼한 부인 잔 드 부르고뉴와의 사이에서 2남 5녀를 두었으나, 아들은 모두 요절하였다.[32]이름 출생 사망 비고 잔 1308년 5월 1일 1349년 8월 10일 또는 15일 부르고뉴 공작 오드 4세와 결혼. 마르그리트 1310년 1382년 5월 9일 플랑드르 백작 루이 1세와 결혼. 이자벨 1312년 1348년 4월 비에누아 영주 기그 8세와 결혼. 블랑슈 1313년 1358년 4월 26일 수녀. 필리프 1313년 1317년 요절. 루이 1316년 1317년 요절. 여자 1322년 1322년 요절.
현대 학자들은 이 결혼이 행복했는지에 대한 증거를 거의 찾지 못했지만, 두 사람은 짧은 시간 안에 많은 자녀를 두었다. 그리고 필리프는 당시 기준으로 후아나에게 매우 관대했다. 필리프는 후아나에게 토지와 돈을 제공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가 일찍 죽을 경우 이러한 선물이 취소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다양한 선물들 중에는 궁전, 마을, 보석을 위한 추가 자금, 그리고 그녀의 하인들과 부르고뉴에 있는 모든 유대인들의 재산이 포함되었는데, 그는 이것들을 1318년에 후아나에게 주었다.
후아나는 1314년 마르가레트의 간통 사건에 연루되었다. 후아나는 비밀리에 간통을 알고 있었던 것으로 의심되었고, 처벌로 두르당에 가택 연금되었으며, 그 후 후아나 자신도 간통 혐의를 받았다. 필리프의 지지 속에 그녀는 계속해서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고, 1315년에는 부분적으로 필리프의 영향력을 통해 파리 고등 법원에서 그녀의 이름이 깨끗해졌고, 그녀는 법정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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