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프 도를레앙 (183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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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필리프 도를레앙(1838년)은 프랑스의 왕위 요구자이자 군인, 역사가이다. 그는 1838년 루이 필리프 1세의 손자로 태어나 파리 백작 칭호를 받았으며, 1842년 아버지의 사망으로 왕위 계승자가 되었다. 1848년 2월 혁명으로 망명하여 미국 남북 전쟁에 참전, 연방군 장교로 복무했다. 프랑스 귀국 후 왕정 복고를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1883년 앙리 5세 사망 후 대부분의 왕당파에게 필리프 7세로 인정받았다. 1886년 국외 추방되어 영국에서 거주하다 사망했으며, 아들 필리프 도를레앙에게 왕위 계승권을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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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프 도를레앙 (1838년)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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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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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루이 필리프 알베르 도를레앙 |
출생 | 1838년 8월 24일 |
출생 장소 | 튈르리 궁전, 파리, 프랑스 |
사망 | 1894년 9월 8일 |
사망 장소 | 스토 하우스, 버킹엄셔 주, 영국 |
매장지 | 생 카를로 보로메오 예배당, 웨이브리지 (1894–1958) 드뢰 왕실 예배당 (1958년 이후) |
종교 | 로마 가톨릭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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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위 주장 | |
작위 | 파리 백작 |
왕가 | 오를레앙 가 |
부친 | 페르디낭 필리프 도를레앙 공작 |
모친 | 헬레네 추 메클렌부르크슈베린 공녀 |
배우자 | 마리아 이사벨 데 에스파냐 왕녀 (1864년 5월 30일 결혼) |
자녀 | 아멜리아, 포르투갈 왕비 필리프 도를레앙 공 엘렌 도를레앙 공녀, 아오스타 공작부인 이사벨 도를레앙 공녀, 기즈 공작부인 루이즈, 인판타 카를로스 데 에스파냐 페르디낭 도를레앙, 몽팡시에 공작 |
프랑스 왕위 주장자 | |
작위 | 오를레앙주의 왕위 주장자 |
재위 기간 | 1848년 2월 24일 – 1873년 8월 5일 |
이전 | 루이 필리프 1세 |
다음 | 주장 종료 |
작위 | 연합주의 왕위 주장자 |
재위 기간 | 1883년 8월 24일 – 1894년 9월 8일 |
이전 | 앙리, 샹보르 백작 |
다음 | 필리프, 오를레앙 공작 |
작위 | 프랑스인의 왕 (논쟁 중) |
재위 기간 | 1848년 2월 24일 (짧게) |
이전 | 루이 필리프 1세 |
2. 생애
1838년 8월 24일 루이 필리프 1세와 마리아 아말리아 테레사 디 시칠리아 왕녀의 손자이자 페르디낭 필리프 도를레앙 공작과 메클렌부르크슈베린의 헬레네의 장남으로 파리에서 태어났다. 파리와 카페 왕조 선조에 대한 존경을 담아, 루이 필리프 1세는 그에게 파리 백작 칭호를 부여했다. 1842년 아버지 페르디낭 필리프가 마차 사고로 사망하자 왕위 계승자인 프린스 로열이 되었다. 그러나 왕의 적자가 아니라 적손자였기 때문에 공식적인 왕세자가 아닌 추정 상속인이었다.
1848년 2월 혁명으로 할아버지 루이 필리프 1세가 퇴위하고 프랑스 제2공화국이 선포되면서, 파리 백작은 왕실에서 쫓겨났다. 그는 어머니 헬레네 폰 메클렌부르크슈베린의 섭정 하에 "루이 필리프 2세"로 즉위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가족과 함께 망명길에 올랐다. 잉글랜드에서 교육을 받은 후, 남북 전쟁에서 북군의 조지 매클레런 장군의 부하로서 육군 경험을 쌓았다.
역사가이자 저널리스트이며, 민주주의자였던 필리프는 동생 샤르트르 공작 로베르와 함께 미국 남북 전쟁에서 연방군 장교로 자원했다. 그는 1861년 9월 24일 대위 계급의 부관 보좌관으로 임명되었으며 파리 백작 필리프 도를레앙이라는 이름으로 복무했다. 그는 약 1년 동안 포토맥군 사령관 조지 B. 매클레런 소장의 참모로 근무했다. 그는 실패한 반도 전역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1862년 7월 15일 동생과 함께 연방군에서 사임했다. 필리프의 저서 《미국 남북 전쟁사》는 이 주제에 대한 표준 참고 자료로 여겨진다.
1848년 혁명으로 루이 필리프가 실각하면서 오를레앙 가문은 망명 생활을 하였다. 파리 백작은 결혼 초기에 트위크넘, 요크 하우스에서 살았으나, 프랑스-프로이센 전쟁과 나폴레옹 3세의 몰락 이후인 1871년 프랑스로 돌아와 재산의 상당 부분을 회복했다. 같은 해 국민 의회 의원이 되었다.
1873년, 나폴레옹 3세 몰락 이후 선출된 친왕당파 성향의 프랑스 국민 의회는 앙리 5세를 위해 폐지된 프랑스 왕위에 대한 주장을 철회했다. 그러나 앙리 5세가 삼색기를 프랑스 국기로 인정하는 것을 거부하면서 왕정 복고는 무산되었다.
1883년 샹보르 백작이 사망하자, 파리 백작은 대부분의 왕당파에 의해 '''필리프 7세'''로 인정받았다. 1871년 프랑스 총선에서 의석 과반을 차지한 부르봉 왕가 지지파와 오를레앙가 지지파들이 입헌군주제하에서, 자녀가 없는 앙리 5세를 국왕으로 하고 필리프 도를레앙을 왕위 계승자로 삼기로 합의했으나, 앙리 5세의 시대착오적인 이념 탓에 프랑스에 왕정이 들어서지 못했고, 1883년 앙리 5세가 사망했을 때는 필리프 도를레앙이 왕위에 오르기에는 너무 늦어버렸다.
이 계승은 카를주의의 스페인 왕위 계승자들에 의해 이의가 제기되었는데, 그들은 루이 14세의 직계 후손이기 때문에 오를레앙주의자들보다 왕위에 대한 권리가 더 크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주장은 위트레흐트 조약에 따라 프랑스 왕위에 대한 펠리페 5세와 그의 후손들의 포기를 명백히 무시한 것이었다.
1886년 6월 11일, 프랑스 왕위 요구자 및 그 상속인을 프랑스 국외로 추방하는 법률이 성립되자 파리 백작은 다시 추방되어 영국으로 돌아갔다. 이후 그는 영국에서 거주하다 1894년 9월 8일 버킹엄셔의 스토 하우스에서 사망했다.[1][2] 그는 폐지된 프랑스 왕위 계승자로 아들 필리프 공에게 계승되었다.
2. 1. 초기 생애
1838년 8월 24일, 루이 필리프 1세와 마리아 아말리아 테레사 디 시칠리아 왕녀의 손자이자 페르디낭 필리프 도를레앙 공작과 메클렌부르크슈베린의 헬레네의 장남으로 파리에서 태어났다. 파리와 카페 왕조 선조에 대한 존경을 담아, 루이 필리프 1세는 그에게 파리 백작 칭호를 부여했다. 1842년 아버지 페르디낭 필리프가 마차 사고로 사망하자 왕위 계승자인 프린스 로열이 되었다. 그러나 왕의 적자가 아니라 적손자였기 때문에 공식적인 왕세자가 아닌 추정 상속인이었다.1848년 2월 혁명으로 루이 필리프 1세가 영국으로 추방되면서, 어머니 헬레네 폰 메클렌부르크슈베린을 섭정으로 하여 '루이 필리프 2세'로 즉위시키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실패하고 프랑스 제2공화국이 선포되었다. 필리프는 모친, 동생 로베르와 함께 국외로 도피했다. 이후 잉글랜드에서 교육을 받았고, 남북 전쟁에서 북군의 조지 매클레런 장군의 부하로 복무하기도 했다.
2. 2. 1848년 혁명과 망명
1848년 2월 혁명으로 할아버지 루이 필리프 1세가 퇴위하고 프랑스 제2공화국이 선포되면서, 파리 백작은 왕실에서 쫓겨났다. 그는 어머니 헬레네 폰 메클렌부르크슈베린의 섭정 하에 "루이 필리프 2세"로 즉위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가족과 함께 망명길에 올랐다. 잉글랜드에서 교육을 받은 후, 남북 전쟁에서 북군의 조지 매클레런 장군의 부하로서 육군 경험을 쌓았다.결혼 초기에 트위크넘, 요크 하우스에서 살았지만, 프랑스-프로이센 전쟁과 나폴레옹 3세의 몰락 이후인 1871년에 프랑스로 돌아갈 수 있었고, 몰수되었던 오를레앙 가문의 재산도 반환받았다.[1] 1873년, 파리 백작은 정통왕위 계승자 후보인 앙리 5세를 위해 폐지된 프랑스 왕위에 대한 주장을 철회했다.[1] 그러나 앙리 5세가 삼색기를 인정하는 것을 거부하면서 복원에 대한 희망이 무산되었고,[1] 1883년 앙리 5세가 사망하면서 대부분의 왕당파는 파리 백작을 '''필리프 7세'''로 인정하였다.[1]
1886년, 프랑스에서 왕위 요구자 및 상속인을 국외로 추방하는 법률이 성립되자, 파리 백작은 다시 추방되어 영국으로 돌아갔다. 처음에는 리치먼드 근처의 쉰 하우스에서 살았으며,[1] 1890년에는 스토우 하우스로 이사했다.[2]
2. 3. 미국 남북 전쟁 참전
역사가이자 저널리스트이며, 솔직한 민주주의자였던 필리프는 동생 샤르트르 공작 로베르와 함께 미국 남북 전쟁에서 연방군 장교로 자원했다. 그는 1861년 9월 24일 대위 계급의 부관 보좌관으로 임명되었으며 파리 백작 필리프 도를레앙이라는 이름으로 복무했다. 그는 약 1년 동안 포토맥군 사령관 조지 B. 매클레런 소장의 참모로 근무했다. 그는 실패한 반도 전역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1862년 7월 15일 동생과 함께 연방군에서 사임했다. 필리프의 저서 《미국 남북 전쟁사》는 이 주제에 대한 표준 참고 자료로 여겨진다.
미국에 머무는 동안, 왕자들은 그들의 체류 기간 동안 많은 수채화를 그린 삼촌 주앙빌 공 프랑수아 도를레앙과 동행했다. 1880년 11월 10일 필리프는 미국 남북 전쟁 동안 복무했던 연방군 장교들의 조직인 미국 충성군단 군사 훈장 펜실베이니아 지부의 1등급(즉, 참전 장교) 동료로 선출되었다. 그는 2107번의 휘장을 받았다. 그의 장남 필리프 도를레앙은 1890년에 2등급 회원(즉, 참전 장교의 장남)으로 선출되었고, 필리프가 사망한 후 훈장 1등급 회원이 되었다.
2. 4. 프랑스 귀국과 왕정 복고 노력
1848년 혁명으로 루이 필리프가 실각하면서 오를레앙 가문은 망명 생활을 하였다. 파리 백작은 결혼 초기에 트위크넘, 요크 하우스에서 살았으나, 프랑스-프로이센 전쟁과 나폴레옹 3세의 몰락 이후인 1871년 프랑스로 돌아와 재산의 상당 부분을 회복했다. 같은 해 국민 의회 의원이 되었다.1873년, 나폴레옹 3세 몰락 이후 선출된 친왕당파 성향의 프랑스 국민 의회가 군주제를 부활시킬 것으로 예상되면서, 파리 백작은 정통왕위 계승자 후보인 앙리 5세를 위해 폐지된 프랑스 왕위에 대한 주장을 철회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파리 백작이 앙리 5세의 추정 상속인이며, 앙리 5세 사후 왕위를 계승하여 1830년 이후 프랑스 왕당파를 분열시킨 두 개의 왕위 주장을 통합할 수 있을 것으로 추정했다. 그러나 앙리 5세가 삼색기를 프랑스 국기로 인정하는 것을 거부하면서 왕정 복고는 무산되었다.
샹보르 백작이 1883년 사망하자, 파리 백작은 대부분의 왕당파에 의해 '''필리프 7세'''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이 계승은 카를주의의 부르봉 왕가의 스페인 왕위 계승자들에 의해 이의가 제기되었는데, 그들은 루이 14세의 직계 후손이기 때문에 오를레앙주의자들보다 왕위에 대한 권리가 더 크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주장은 위트레흐트 조약에 따라 프랑스 왕위에 대한 스페인 국왕 펠리페 5세와 그의 후손들의 포기를 명백히 무시한 것이었다.
1886년 6월 11일, 프랑스 왕위 요구자 및 그 상속인을 프랑스 국외로 추방하는 법률이 성립되자 파리 백작은 다시 추방되어 영국으로 돌아갔다.
2. 5. 왕위 요구자로서의 말년
1873년, 나폴레옹 3세 몰락 이후 선출된 친왕당파 성향의 프랑스 국민 의회는 앙리 5세를 위해 폐지된 프랑스 왕위에 대한 주장을 철회했다.[1] 그러나 앙리 5세가 삼색기를 인정하는 것을 거부하면서 복원에 대한 희망이 무산되었고, 1883년 앙리 5세가 사망하면서 대부분의 왕당파는 파리 백작을 '필리프 7세'로 인정했다.[1] 1871년 프랑스 총선에서 의석 과반을 차지한 부르봉 왕가 지지파와 오를레앙가 지지파들이 입헌군주제하에서, 자녀가 없는 앙리 5세를 국왕으로 하고 필리프 도를레앙을 왕위 계승자로 삼기로 합의했으나, 앙리 5세의 시대착오적인 이념 탓에 프랑스에 왕정이 들어서지 못했고, 1883년 앙리 5세가 사망했을 때는 필리프 도를레앙이 왕위에 오르기에는 너무 늦어버렸다.이 계승은 카를주의의 스페인 왕위 계승자들에 의해 이의가 제기되었는데, 그들은 루이 14세의 직계 후손이기 때문에 오를레앙주의자들보다 왕위에 대한 권리가 더 크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주장은 위트레흐트 조약에 따라 프랑스 왕위에 대한 펠리페 5세와 그의 후손들의 포기를 명백히 무시한 것이었다.[1]
1886년, 프랑스 왕위 요구자와 그 상속인을 국외로 추방하는 법률이 제정되면서, 파리 백작은 다시 프랑스에서 추방되었다. 이후 그는 영국에서 거주하다 1894년 9월 8일 버킹엄셔의 스토 하우스에서 사망했다.[1][2] 그는 폐지된 프랑스 왕위 계승자로 아들 필리프 공에게 계승되었다.
3. 가족
1864년, 필리프는 루이 필리프 1세의 막내아들인 몽팡시에 공작 앙투안 드 오를레앙의 장녀이자, 사촌인 마리 이자벨(1848년 - 1919년)과 결혼했다.[7] 두 사람 사이에는 4남 4녀가 태어났다.
- 아멜리 (1865년 - 1951년) - 포르투갈 왕 카를루스 1세와 결혼.
- 루이 필리프 로베르 (1869년 - 1926년) - 오를레앙 공작, 오를레앙 가문의 수장.
- 엘렌 (1871년 - 1951년) - 아오스타 공작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와 결혼.
- 샤를 (1875년)
- 이자벨 (1878년 - 1961년) - 사촌인 기즈 공작 장 (오를레앙 가문의 당주를 계승)과 결혼.
- 자크 (1880년 - 1881년)
- 루이즈 (1882년 - 1958년) - 양시칠리아 왕자 카를로스 탄크레디와 결혼. 둘째 딸 마리아 데 라스 메르세데스는 전 스페인 국왕 후안 카를로스 1세의 모친.
- 페르디낭 (1884년 - 1924년)
3. 1. 결혼과 자녀
필리프 도를레앙은 1864년 5월 30일 잉글랜드 킹스턴어폰템스의 세인트 라파엘 교회에서 사촌인 마리 이자벨 도를레앙(1848–1919)과 결혼했다.[7] 마리이자벨 도를레앙은 루이 필리프 1세의 막내 아들인 몽팡시에 공작 앙투안과 스페인 공주 루이사 페르난다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다. 이들 부부는 슬하에 4남 4녀를 두었다.[7]사진 | 이름 | 생일 | 사망 | 기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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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멜리 | 1865년 9월 28일 | 1951년 10월 25일 (86세) | 포르투갈의 카를루스 1세와 결혼. |
![]() | 루이 필리프 로베르 | 1869년 2월 6일 | 1926년 3월 28일 (57세) | 오를레앙 공작, 오를레앙 가문의 수장. |
![]() | 엘렌 | 1871년 6월 13일 | 1951년 1월 21일 (79세) |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 디 사보이아아오스타 공작과 결혼. |
샤를 | 1875년 1월 21일 | 1875년 6월 8일 | 요절. | |
![]() | 이자벨 | 1878년 5월 7일 | 1961년 4월 21일 (82세) | 사촌 장 3세와 결혼. |
자크 | 1880년 4월 5일 | 1881년 1월 22일 | 요절. | |
![]() | 루이즈 | 1882년 2월 24일 | 1958년 4월 18일 (76세) | 카를로스 데 보르본 도스-시칠리아스 왕자와 결혼. 후안 카를로스 1세의 외할머니. |
![]() | 페르디낭 | 1884년 9월 9일 | 1924년 1월 30일 (39세) | 몽팡시에 공작. |
3. 2. 가계
파리 백작의 가계는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 유럽 여러 왕가와 연결되어 있다.[7]1. 필리프, 파리 백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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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오를레앙 공작 페르디난 필리프 | 3. 메클렌부르크-슈베린 공작부인 헬레네 | ||||||
4. 프랑스의 루이 필리프 1세 | 5. 나폴리와 시칠리아의 공주 마리 아멜리 | 6. 메클렌부르크-슈베린의 세습 대공 프리드리히 루이 | 7.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의 공주 카롤린 루이세 | ||||
8. 오를레앙 공작 루이 필리프 2세 | 9. 루이즈 마리 아델라이드 드 부르봉 | 10. 양시칠리아의 페르디난도 1세 | 11. 오스트리아의 대공녀 마리아 카롤리나 | 12. 메클렌부르크-슈베린의 대공 프리드리히 프란츠 1세 | 13. 작센-고타-알텐부르크의 공주 루이즈 | 14.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의 대공 카를 아우구스트 | 15. 헤센-다름슈타트의 공주 루이즈 |
1864년, 루이 필리프 왕의 막내아들인 몽팡시에 공작 앙투안 드 오를레앙의 장녀이자, 사촌인 마리 이자벨(1848년 - 1919년)과 결혼하여 4남 4녀를 두었다.[7]
- 아멜리 (1865년 - 1951년) - 포르투갈 왕카를루스 1세와 결혼.
- 루이 필리프 로베르 (1871년 - 1926년) - 오를레앙 공작, 오를레앙 가문의 수장.
- 엘렌 (1871년 - 1951년) - 아오스타 공작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와 결혼.
- 샤를 (1875년)
- 이자벨 (1878년 - 1961년) - 사촌인 기즈 공작장 (오를레앙 가문의 당주를 계승)과 결혼.
- 자크 (1880년 - 1881년)
- 루이즈 (1882년 - 1958년) - 양시칠리아 왕자카를로스 탄크레디와 결혼. 둘째 딸 마리아 데 라스 메르세데스는 전 스페인 국왕후안 카를로스 1세의 모친.
- 페르디낭 (1884년 - 1924년)
4. 평가
참조
[1]
문서
The Wandering Princess
[2]
문서
The Wandering Princess
[3]
웹사이트
Großherzogliche Hausorden
https://zs.thulb.uni[...]
Staatshandbuch für das Großherzogtum Sachsen / Sachsen-Weimar-Eisenach
2020-06-08
[4]
서적
Statshaandbog for Kongeriget Danmark for Aaret 1893
https://dis-danmark.[...]
J.H. Schultz A.-S. Universitetsbogtrykkeri
2020-06-26
[5]
서적
Le comte de Paris
[6]
서적
Moi Amélie, dernière reine de Portugal
[7]
웹사이트
Paris, Count de
[8]
웹사이트
Paris, Louis Philippe Albert d'Orléans, Comte de
[9]
문서
Les Orléans : Une famille en quête d’un trône
페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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