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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라 모토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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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하라 모토토키는 게이안 원년(1648년)에 태어나 아코 번사로 아사노 나가나오를 섬겼다. 겐로쿠 14년(1701년) 아사노 나가노리가 기라 요시히사에게 칼로 부상을 입힌 사건 이후, 아코 성을 비우고 오사카에서 오오이시 요시오의 어가 재건 운동을 보좌했다. 이후 급진파에 동조하여 복수를 강요하기도 했으며, 겐로쿠 15년(1702년) 12월 14일 기라 저택 습격에 참여했다. 겐로쿠 16년(1703년) 막부의 명으로 할복하여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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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라 모토토키
기본 정보
하라 모토토키
하라 모토토키
이름하라 모토토키
로마자 표기Hara Mototoki
별명소우에몬
로마자 표기Soemon
생애
출생지일본 가즈사국
사망지일본 미카와국
사망일1575년 6월 29일 (향년 59세)
사인나가시노 전투 전사
가문
씨족하라 씨
하라 미쓰다네
자녀하라 시게타네
경력
소속다케다 씨
주군다케다 신겐, 다케다 가쓰요리
주요 전투제4차 가와나카지마 전투
미카타가하라 전투
나가시노 전투

2. 생애

겐로쿠 14년(1701년) 12월 14일, 오오이시 요시오를 도와 키라 저택 습격에 참여하여 정문대 지휘를 맡았다. 저택 침입 때 지붕에서 발을 삐끗하여 센가쿠지로 향할 때 가마를 탔다.

겐로쿠 16년(1703년) 2월 4일, 호소카와 쓰나토시 저택에 맡겨진 후 막부의 명에 따라 호소카와 가신 마스다 사다에몬의 가이샤쿠로 할복했다. 향년 56세. 법명은 인봉모검신사(刃峰毛劔信士|인봉모검신사일본어)이다.

2. 1. 아코 번사 시절

게이안 원년 (1648년), 요네자와번우에스기 쓰나카쓰의 가신 (우마마와리 100석)이자 훗날 다이쇼지번주・마에다 도시하루의 가신 (쵸쇼인 포함)・하라 사다토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와다 쇼켄 (오가사와라가 가신)의 딸이며, 동생은 오카지마 츠네시게이다.

아버지 사다토키는 쇼오 3년 (1654년) 즈음에 어떤 사정으로 인해 마에다가우에스기가를 떠나 낭인이 되었지만, 엔호 3년 (1675년), 모토토키는 아코번아사노 나가나오에게 등용되었고, 후에 동생 츠네시게도 아코번을 섬기게 되었다. 엔호 7년 (1679년), 아코번사 나가사와 로쿠로에몬의 딸과 결혼하여 슬하에 4녀를 두었으나, 겐로쿠 5년 (1692년)에 아내는 쌍둥이를 낳다가 사망했다. 이후 미즈노 시치로에몬 (히메지번 혼다가 가신)의 딸을 후처로 맞이했다. 겐로쿠 6년 (1693년) 분한장에는 250석을 받았고, 겐로쿠 10년 (1697년) 8월 14일, 50석이 가증되어 도합 300석을 받고 아시가루가시라에 취임했다.

겐로쿠 14년 (1701년) 3월 14일, 칙사 어치주역(御馳走役)을 맡고 있던 주군 아사노 나가노리에도성 마츠노오오히로마에서 키라 요시히사에게 칼로 부상을 입히는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모토토키는 텐소 저택에 들어가 있었는데, 텐소 저택으로부터의 퇴거를 지휘해 아사노가의 집기류를 옮겼으며, 이 수법이 훌륭하여 에도막부 메츠케가 감탄했다고 한다. 그날 밤, 오오이시 노부키요와 함께 제2의 사신으로 하야카고를 타고 아코로 향했다. 평소라면 15일이 걸리는 거리를 4일 만에 주파하여 3월 19일, 아사노 나가노리할복 소식을 아코에 알렸다. 가로 오오이시 요시오는 모두 등성하라고 명해 연일 평정을 열었다. 평정은 농성하면서 죽을지(농성토사), 성을 열고 명을 따를지(개성공순)의 두 가지로 대립했고, 모토토키는 개성공순을 주장하며 오오이시에게 이의를 제기하는 가로 오노 토모후사를 추궁해 퇴거시켰다.

아코성을 비워서 내어준 후에는 오사카에 살면서 오오이시 요시오의 어가재건운동을 보좌했고, 같은 해 9월에는 원수를 갚겠다고 주장하는 급진파를 설득하기 위해 오오타카 타다오 등과 함께 에도로 내려갔다. 그런데 반대로 호리베 타케츠네 등에 동조하여 급진파의 중심이 되어, 교토 야마시나에 가서 오오이시에게 원수를 갚을 것을 강요했다. 또한, 복수를 결행하려고 하지 않는 오오이시에게 화가 난 급진파는 한때, 모토토키를 대장으로 해서 습격하려는 계획도 있었다. 겐로쿠 15년 (1702년) 7월, 막부는 아사노 나가노리의 동생 아사노 나가히로의 히로시마 종가에 금고령 처분을 결정해 어가 재흥의 희망이 사라졌다. 이에 따라 교토 마루야마 회의에서 오오이시가 복수를 결정하자, 같은 해 10월에 모토토키는 오카지마 츠네시게, 하자마 미츠노부 등과 함께 에도로 내려갔다.

2. 2. 아코 사건

겐로쿠 14년 (1701년) 3월 14일, 칙사 대접 역할을 맡고 있던 주군 아사노 나가노리에도성 마쓰노오히로마에서 기라 요시히사에게 칼로 부상을 입혔다. 하라 모토토키는 이 사건이 일어났을 때 텐소 저택에 있었으며, 텐소 저택에서 사람들을 내보내는 지휘를 하여 아사노 가문의 집기류를 옮겼다. 에도 막부의 메츠케는 이 솜씨를 감탄했다고 한다. 그날 밤, 오오이시 노부키요와 함께 제2의 사신으로 하야카고를 타고 아코로 향했다. 보통 15일 걸리는 거리를 4일 만에 달려, 3월 19일 아사노 나가노리할복 소식을 아코번에 알렸다. 가로 오오이시 요시오는 모두 등성하라고 명해 연일 회의를 열었다. 회의에서는 농성하면서 죽을지(농성토사), 성을 열고 명을 따를지(개성공순)를 두고 대립했고, 모토토키는 개성공순을 주장하며 오오이시 요시오에게 이의를 제기하는 가로 오노 토모후사를 추궁해 퇴거시켰다.

아코성을 넘겨준 후, 하라 모토토키는 오사카에 살면서 오오이시 요시오의 아사노 가문 재건 운동을 보좌했다. 같은 해 9월에는 원수를 갚겠다고 주장하는 급진파를 설득하기 위해 오오타카 타다오 등과 함께 에도로 내려갔으나, 반대로 호리베 다케쓰네 등에 동조하여 급진파의 중심이 되었다. 그는 교토 야마시나에 가서 오오이시 요시오에게 원수를 갚을 것을 강요했다. 복수를 결행하려고 하지 않는 오오이시 요시오에게 화가 난 급진파는 한때 모토토키를 대장으로 해서 습격하려는 계획도 세웠다. 겐로쿠 15년 (1702년) 7월, 막부가 아사노 나가노리의 동생 아사노 나가히로를 히로시마번 종가에 금고령 처분을 결정하면서 아사노 가문 재흥의 희망이 사라졌다. 이에 따라 교토 마루야마 회의에서 오오이시 요시오는 복수를 결정했고, 같은 해 10월에 모토토키는 오카지마 츠네시게, 하자마 미츠노부 등과 함께 에도로 내려갔다.

12월 14일 키라 저택 습격에서 하라 모토토키는 정문대에 속해 오오이시 요시오를 도와 지휘를 맡았다. 저택 침입 때 지붕에서 발을 삐끗하여, 센가쿠지로 향할 때 가마를 타고 갔다.

2. 3. 기라 저택 습격

겐로쿠 14년 (1701년) 3월 14일, 주군 아사노 나가노리에도성 마쓰노오히로마에서 키라 요시히사에게 칼로 부상을 입히는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하라 모토토키는 텐소 저택에 있었으며, 텐소 저택으로부터 퇴거를 지휘하여 아사노 가문의 집기류를 옮겼다. 이 수법이 훌륭하여 에도 막부의 메츠케가 감탄했다고 한다.

그날 밤, 오오이시 노부키요와 함께 제2의 사신으로 하야카고를 타고 아코로 향했다. 평소 15일 걸리는 거리를 4일 만에 주파하여 3월 19일 아사노 나가노리할복 소식을 아코에 알렸다. 가로 오오이시 요시오는 모두 등성하라고 명해 연일 평정을 열었다. 평정은 농성하면서 죽을지(농성토사), 성을 열고 명을 따를지(개성공순)로 의견이 대립했고, 모토토키는 개성공순을 주장하며 오오이시에게 이의를 제기하는 가로 오노 토모후사를 추궁해 퇴거시켰다.

아코성을 비워서 내어준 후에는 오사카에 살면서 오오이시 요시오의 어가재건운동을 보좌했고, 같은 해 9월에는 원수를 갚겠다고 주장하는 급진파를 설득하기 위해 오오타카 타다오 등과 함께 에도로 내려갔다. 그런데 반대로 호리베 타케츠네 등에 동조하여 급진파의 중심이 되어, 교토 야마시나에 가서 오오이시에게 원수를 갚을 것을 강요했다. 또한, 복수를 결행하려고 하지 않는 오오이시에게 화가 난 급진파는 한때 모토토키를 대장으로 해 습격하려는 계획도 있었다.

겐로쿠 15년 (1702년) 7월, 막부는 아사노 나가노리의 동생 아사노 나가히로를 히로시마 종가에 금고령 처분을 결정해, 어가 재흥의 희망이 사라졌다. 이에 따라 교토 마루야마 회의에서 오오이시는 복수를 결정했고, 같은 해 10월에 모토토키는 오카지마 츠네시게, 하자마 미츠노부 등과 함께 에도로 내려갔다.

12월 14일 키라 저택 습격에서는 정문대에 속해 오오이시 요시오를 도와 지휘를 맡았다. 저택 침입 때 지붕에서 발을 삐끗하여 센가쿠지로 향할 때 가마를 타고 갔다.

2. 4. 최후

겐로쿠 14년(1701년) 3월 14일, 주군 아사노 나가노리에도성 마쓰노오히로마에서 기라 요시히사에게 칼로 부상을 입히는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모토토키는 텐소 저택에 있었으며, 텐소 저택에서 사람들을 물리는 일을 지휘하여 아사노 가문의 세간살이를 옮겼다. 이 솜씨를 에도 막부의 메츠케가 감탄했다고 한다. 그날 밤, 오오이시 노부키요와 함께 제2의 사신으로 하야카고를 타고 아코로 향했다. 보통 15일 걸리는 거리를 4일 만에 달려, 3월 19일 아사노 나가노리할복 소식을 아코번에 알렸다. 가로 오오이시 요시오는 모두 등성하라고 명해, 연일 회의를 열었다. 회의에서는 농성하며 죽을지(농성토사), 성을 열고 명을 따를지(개성공순)를 두고 의견이 대립하였는데, 모토토키는 개성공순을 주장하며 오오이시 요시오에게 이의를 제기하는 가로 오노 토모후사를 추궁해 퇴거시켰다.

아코성을 넘겨준 후 오사카에 살면서 오오이시 요시오의 어가재건운동을 보좌했다. 같은 해 9월에는 원수를 갚겠다고 주장하는 급진파를 설득하기 위해 오오타카 타다오 등과 함께 에도로 내려갔으나, 호리베 다케쓰네 등에 동조하여 급진파의 중심이 되어 교토 야마시나에서 오오이시 요시오에게 원수를 갚을 것을 강요했다. 복수를 결행하려고 하지 않는 오오이시 요시오에게 화가 난 급진파는 한때 모토토키를 대장으로 해서 습격하려는 계획도 있었다. 겐로쿠 15년(1702년) 7월, 막부가 아사노 나가노리의 동생 아사노 나가히로의 히로시마번 종가에 금고령 처분을 결정해 어가 재흥의 희망이 사라졌다. 이에 따라 교토 마루야마 회의에서 오오이시 요시오는 복수를 결정했고, 같은 해 10월에 모토토키는 오카지마 츠네시게, 하자마 미츠노부 등과 함께 에도로 내려갔다.

12월 14일 키라 저택 습격에서는 정문대에 속해 오오이시 요시오를 도와 지휘를 맡았다. 저택 침입 때 지붕에서 발을 헛디뎌 센가쿠지로 향할 때 가마를 타고 갔다.

호소카와 쓰나토시 저택에 맡겨져 겐로쿠 16년(1703년) 2월 4일, 막부의 명에 의해 호소카와 가신 마스다 사다에몬의 가이샤쿠로 할복했다. 향년 56세였다. 법명은 인봉모검신사(刃峰毛劔信士|인봉모검신사일본어)이다.

3. 가족 관계 및 자손

하라 모토토키가 할복할 당시 3살이었던 아들은 출가하여 슌코(春好일본어)라 불렸다. 1725년(교호 8년) 히로시마번 아사노 본가에 250석으로 고용되었다. 보다이의 명복을 비는 공양탑이 토우카산에 있다. 후년 히로시마번 아사노가 사무라이장(侍帳)에 하라 씨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절가 또는 우에스기 집안처럼 야마다 성씨로 고쳤을 가능성이 있다.

아코 사건으로 인해 죄가 미치는 연좌를 피하기 위해, 모토토키는 우에스기가에 남아있는 하라 일족과 의절했다. 사촌의 자손은 요네자와번사로 이어지고 있다. (하라 성 이외의 토바(鳥羽일본어), 야마다(山田일본어) 씨가 있다)

4. 평가 및 기타

원수를 갚지 않은 모토토키를 노모가 자살하며 충고했다는 이야기가 오늘날 전해지고 있는데, 이것은 후세의 창작이다.

5. 대중문화 속의 하라 모토토키

하라 모토토키가 원수를 갚지 않자 그의 어머니가 자살하며 충고했다는 이야기가 오늘날 전해지고 있지만, 이는 후세의 창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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