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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스드루발 바르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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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하스드루발 바르카는 제2차 포에니 전쟁 시기 카르타고의 장군으로, 형 한니발이 이탈리아로 진격한 후 이베리아 반도에서 로마군과 맞서 싸웠다. 그는 기원전 218년 이베리아 지휘권을 맡아 로마군과 전투를 벌였으나, 이베라 전투에서 패배하며 이탈리아로의 육로 지원이 좌절되었다. 이후 이탈리아로 진격하여 형 한니발과 합류하려 했으나, 메타우루스 전투에서 패배하고 전사했다. 그의 죽음은 로마의 승리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군사적 역량에도 불구하고 전략적 실책으로 전쟁의 흐름을 바꾸는 데 실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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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스드루발 바르카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하스드루발 바르카
로마자 표기Hasdeurubal Bareuka
출생기원전 245년경
출생지카르타고
사망기원전 207년 6월 22일
사망지메타우로 강, 로마 공화국
민족페니키아인
군사 경력
소속카르타고
계급장군
참전 전투제2차 포에니 전쟁
에브로 강 전투
데르토사 전투
바이티스 강 상류 전투
바에쿨라 전투
메타우루스 전투

2. 하스드루발 바르카의 초기 생애와 이베리아 지휘권

하스드루발 바르카는 하밀카르 바르카의 차남이자 한니발의 동생으로, 초기 생애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아버지 하밀카르가 이베리아인과의 전투에서 사망했을 때 형 한니발과 함께 그 자리에 있었다.[2]

기원전 218년, 한니발이 이탈리아로 진격할 때 하스드루발은 히스파니아에 남아 병력을 지휘했다. 기원전 216년 칸나에 전투에서 한니발이 로마군을 격파하고, 북부에서는 갈리아인들이 실바 리타나 전투에서 로마군 및 이탈리아군 병사 25,000명을 전멸시키는 등 유리한 상황에서도, 이베리아 부족에 대한 카르타고의 권위가 취약하고 로마군이 강력하다는 이유로 이탈리아로 진군하지 않았다.

이베라 전투에서 카르타고가 패배한 후, 마고와 그의 군대는 이베리아로 파견되었다.[3]

2. 1. 이베리아 전선 초기 (기원전 218년 ~ 기원전 215년)

기원전 218년, 한니발이 이탈리아로 진격할 때 히스파니아에 남겨둔 보병 13,000명, 기병 2,550명, 전차 21대로 구성된 병력을 하스드루발이 지휘했다. 그는 이후 6년간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칼부스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형제가 이끄는 로마군과 맞서 싸웠다. 당시 푸니 해군은 히스파니아에 50척의 퀸퀘레메와 5척의 트리에메 함대를 주둔시켰지만, 제2차 포에니 전쟁 발발 당시에는 32척의 퀸퀘레메만 운용 가능했다.[3]

기원전 218년 그나이우스 스키피오가 이끄는 로마 원정대는 카르타고군을 기습했고, 하스드루발이 카탈로니아에서 하노와 합류하기 전에 키사 전투에서 승리하여 타라코에 군대를, 엠포리아에에 함대를 주둔시켰다. 하스드루발은 8,000명의 병력으로 로마군에 비해 수적으로 열세였지만, 경보병과 기병으로 구성된 기동 부대를 이끌고 로마군을 습격하여 해군 병력에 큰 피해를 입혀 전투력을 35척으로 감소시켰다. 이 손실은 마르세유에서 온 동맹 그리스 부대의 도착으로 상쇄되었다.[3]

기원전 217년 봄, 하스드루발은 로마군과 싸우기 위해 북쪽으로 연합 원정을 이끌었다. 그는 육군을 지휘했고, 그의 부관 히밀코는 함대를 지휘했다. 푸니 육군과 함대는 나란히 북쪽으로 이동하여 에브로 강 입구에 야영했다. 카르타고 함대의 부주의로 인해 그나이우스 스키피오는 카르타고군을 기습하여 에브로 강 전투에서 해군 병력을 격파했다. 하스드루발은 카르타고 영토에 대한 해상 공격을 두려워하여 카르타헤나로 후퇴했다. 이베리아 해군 병력이 궤멸되자 하스드루발은 고대 카르타고에 증원을 요청하거나 새로운 배를 건조해야 했다. 그는 둘 다 하지 않았다.[4]

이베리아인 해군 병력은 전투에서 형편없는 모습을 보였고, 그들의 해고는 투르데타니 부족에서 반란을 일으켰다.[4] 하스드루발은 기원전 216년 한 해를 카디스 인근 지역의 반란군을 진압하는 데 보냈다. 그는 카르타고에서 이탈리아로 이동하여 한니발과 합류하여 로마 본토에 압력을 가하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이베리아 부족에 대한 카르타고의 권위가 너무 취약하고 그 지역의 로마군이 그가 계획한 이동을 실행하기에는 너무 강력하다고 주장하며 지연했다. 하스드루발은 보병 4,000명과 기병 500명의 증원을 받았으며, 카르타고 원로원의 명령에 따라 같은 해 이탈리아로 진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기원전 215년 봄, 하스드루발은 카르타헤나를 떠나 에브로 강으로 진격하여 친로마 도시를 포위하고 이베라 전투에서 전투를 제안했다. 이 전투에서 하스드루발은 기병의 우위를 이용하여 전장을 정리하고 보병으로 적의 양쪽을 포위하려 했다. 그러나 로마군은 카르타고군의 얇아진 중앙을 돌파한 다음 각 측면을 개별적으로 격파하여 심각한 손실을 입혔고 자체적으로도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스키피오 형제의 승리는 카르타고가 이탈리아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을 때 하스드루발이 육로로 한니발을 지원하는 것을 실패하게 만들었고, 한니발에게 예상된 해상 증원을 빼앗았고 이베리아 부족에 대한 카르타고의 지배력을 더욱 약화시켰다.

3. 공동 지휘 체제와 로마군의 반격 (기원전 215년 ~ 기원전 210년)

기원전 218년부터 211년까지의 스페인 로마 작전. 여러 역사적이지 않은 교전이 포함되어 있다.


기원전 215년 이베라 전투 패배 이후, 마고와 하스드루발 기스코가 이베리아에 도착하여 바르카 가문의 확고한 지휘는 종식되었다. 카르타고군은 스키피오 형제들과 싸웠고 기원전 215년부터 212년 사이에 전반적으로 불리한 상황이었지만, 영토를 잃는 것은 막을 수 있었다. 리비우스는 로마군이 기원전 215년부터 214년까지 일리투르기, 문다, 오롱기에서 에브로강 남쪽에서 카르타고군과 여러 차례 전투를 벌였다고 기록했지만,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이 교전들을 역사적이지 않다고 본다.

기원전 213/212년, 로마의 사주를 받은 누미디아 부족의 왕 시팍스가 아프리카의 카르타고 영토를 공격했다. 하스드루발은 이베리아 군대를 이끌고 아프리카로 건너가 시팍스의 위협을 분쇄했고, 이 과정에서 30,000명의 누미디아인이 죽임을 당했다. 로마식으로 훈련된 군대가 붕괴된 시팍스는 마우리타니아로 도망쳤다. 이때 누미디아 왕자 마시니사의 지원이 매우 컸으며, 아프리카 원정이 끝난 후 하스드루발은 3,000명의 누미디아 기병과 함께 이베리아로 돌아왔다.

로마 사령관들은 기원전 212년 사군툼을 점령했고, 기원전 211년에는 군대를 강화하기 위해 20,000명의 켈트이베리아 용병을 고용했다.

3. 1. 상 바에티스 전투 (기원전 212년/211년)

기원전 212년 말, 하스드루발은 마고 바르카 및 하스드루발 기스코와 협력하여 상 바에티스 전투에서 로마군을 격파하고 스키피오 형제를 전사시켰다. 이 승리로 카르타고는 에브로 강까지 이베리아를 장악했지만, 장군들 간의 협력 부족으로 로마 잔존 병력의 북상을 막지 못했다.

4.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등장과 이탈리아 원정 (기원전 210년 ~ 기원전 207년)

기원전 210년, 대 스키피오가 이끄는 로마 증원군이 이베리아 반도에 도착하면서 전황이 급변했다. 기원전 209년, 카르타고 노바가 스키피오에게 함락되었다. 하스드루발은 바에쿨라 전투에서 패배했지만, 군대 대부분을 온전히 이끌고 퇴각했다. 스키피오는 타라코로 철수하여 카르타고 노바와 바에쿨라 전투 이후 로마 편으로 돌아선 이베리아 부족들과 동맹을 맺었다.[5]

4. 1. 이탈리아 원정과 메타우루스 전투

기원전 208년, 하스드루발은 이탈리아에 있는 형 한니발과 합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는 서쪽 끝에서 피레네 산맥을 건너 스키피오를 따돌리고 기원전 208년 겨울에 안전하게 갈리아로 들어갔다.[5] 로마 원로원은 스키피오가 하스드루발의 이탈리아 진격을 막지 못한 것에 대해 비판했다.[5] 하스드루발은 기원전 207년 봄까지 기다려 알프스 산맥을 통과하여 북부 이탈리아로 진입했다. 하스드루발은 형보다 훨씬 더 빠르게 진격했는데, 부분적으로는 10년 전 한니발의 군대가 같은 경로를 통과하면서 남겨둔 시설 덕분이었고, 또한 한니발 초기에 괴롭혔던 갈리아족의 위협이 사라졌기 때문이기도 했다. 갈리아족은 이제 카르타고인을 두려워하고 존경했으며, 하스드루발은 알프스를 방해받지 않고 통과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군대는 많은 열성적인 갈리아족 병사들로 강화되었다. 하스드루발은 형과 마찬가지로 히스파니아에서 길러지고 훈련된 전차 코끼리를 데리고 오는 데 성공했다.

하스드루발이 한니발에게 전령을 보낸 후에야 결정적인 조치가 취해졌다. 하스드루발은 남부 움브리아에서 형과 만나고 싶어했다. 그러나 이 만남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하스드루발의 전령들은 붙잡혔고, 그는 결국 두 개의 로마 군대에 의해 저지되었다. 전투를 강요당한 그는 메타우루스 전투에서 결정적으로 패했다. 그의 군대가 패배하고 완전히 궤멸된 채 후퇴하는 가운데, 하스드루발은 자신의 죽음을 각오하고 전투에 돌입하여 참수되었다. 그의 머리는 자루에 담겨 형 한니발의 진영에 던져져 완전한 패배를 알렸다.[5] 이는 한니발이 전사한 로마 집정관의 시신을 처리한 것과 극명한 대조를 보였다.

메타우루스 전투의 중요성은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인정받고 있다. 폴 K. 데이비스는 이 전투의 중요성을 "카르타고의 패배는 한니발을 지원하려는 시도를 끝냈고, 이탈리아에서의 그의 노력을 파멸시켰으며, 로마는 스페인에 대한 지배력을 확립할 수 있었다"고 보았다.[5]

5. 기타 하스드루발


  • '''하스드루발 (하밀카르의 사위)'''(기원전 270년 - 기원전 221년): 하밀카르 바르카의 사위로, 하밀카르 사후 이베리아 반도를 지배했다. 제1차 포에니 전쟁 이후 하밀카르를 따라 이베리아 반도로 가서 정복과 식민지화를 시작했다. 기원전 228년 하밀카르가 사망하자 군 지휘권을 계승하여 정복을 추진했다. 카르타고 노바(현재 카르타헤나)를 건설하여 수도로 삼았다. 기원전 226년 로마와 에브로 강 이북으로 진출하지 않는다는 맹약을 맺었다. 기원전 221년 켈트족 암살자에게 살해당했다.
  • '''하스드루발''' : 제2차 포에니 전쟁한니발의 부하로서 주요 전투에 참가했다. 기원전 216년 칸나이 전투에서 카르타고군 좌익의 스페인-골 기병을 지휘하여 로마군의 기병을 격파하고, 로마군 본대 후방으로 돌아 포위를 완성하여 승리하였다.
  • '''하스드루발 기스코''' :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히스파니아 전선이 열세에 놓이자 증원군으로 카르타고에서 파견된 장군. 리비우스의 기록에는 하밀카르 바르카의 아들로 기재되어 있으나, 현재는 카르타고 출신의 다른 인물로 여겨지며, 바르카 가문의 일원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 '''하스드루발'''(제3차 포에니 전쟁) : 제3차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의 지휘관. 스키피오 아에밀리아누스(소(小) 스키피오)에게 패배했다.

6. 역사적 의의 및 평가

하스드루발 바르카는 뛰어난 군사적 역량을 보여주었지만, 몇 차례의 전략적 판단 착오는 전쟁의 흐름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특히 메타우로 전투에서의 패배와 죽음은 로마의 승리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참조

[1] 서적 Geschichte der Karthager https://books.google[...] C.H. Beck 1985
[2] 간행물 Hamilcar Barca http://www.britannic[...] Encyclopædia Britannica, Inc. 2018-12-09
[3] 서적 Hannibal’s War
[4] 서적 Hannibal's War
[5] 서적 100 Decisive Battles from Ancient Times to the Present: The World's Major Battles and How They Shaped History Oxford University Press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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