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자마 미츠카제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하자마 미츠카제는 아코 낭사 하자마 미츠노부의 차남으로, 아코 사건에 가담하여 복수에 참여한 인물이다. 텐류검술을 익혔으며, 아코번 부교의 양자로 들어갔으나 낭인이 되었다. 이후, 에도로 가서 아버지, 형과 함께 복수를 준비했으며, 키라 요시히사 저택 습격에 참여했다. 겐로쿠 16년, 막부의 할복 명령에 따라 스스로 배를 갈라 할복했으며, 46명의 낭사 중 유일하게 센가쿠지에 무덤이 없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아코 낭사 - 오이시 요시오
오이시 요시오는 아사노 나가노리를 섬기다 아코 번이 폐지되자 46명의 로닌과 함께 키라 요시나카를 공격하여 살해하고 할복한 인물이며, 일본에서 이상적인 사무라이의 본보기로 여겨진다. - 아코 낭사 - 야다 스케타케
에도 시대 아코번사이자 아사노 나가노리의 가신이었던 야다 스케타케는 겐로쿠 아코 사건에서 기라 요시히사 저택 토벌에 참여한 후 할복한 인물로, 무예는 뛰어났지만 급한 성격에 낭인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 1680년 출생 - 조문명
조문명은 김창협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숙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참의를 역임했으며, 경종실록 편찬과 이인좌의 난 진압에 기여하여 분무공신에 책록되고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영조의 탕평책에 앞장선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 1680년 출생 - 에드워드 티치
에드워드 티치는 검은 수염으로 더 잘 알려진 18세기 초 영국의 해적으로, 벤자민 호니골드의 선원으로 해적 생활을 시작하여 '앤 여왕의 복수'호를 기함으로 삼고 찰스 타운 항구 봉쇄 등의 행위로 악명을 떨쳤으나, 로버트 메이너드 중위와의 전투에서 사망하며 해적의 황금시대를 마감하는 상징적 인물이 되었다. - 1703년 사망 - 박세당
박세당은 조선 중기 문신이자 학자로, 소론 계열에서 활동하며 주자학 비판과 독자적인 학문적 견해를 제시했고, 농업 기술 서적 《색경》을 저술했으며 사후 문정 시호를 받았다. - 1703년 사망 - 명빈 박씨
숙종의 후궁 명빈 박씨는 궁녀 출신으로 숙종의 총애를 받아 연령군 훤을 낳고 빈에 책봉되었으며, 사후 숙종의 특별한 배려로 장례가 치러지고 경기도 고양시 서오릉 경내에 묘소가 있다.
하자마 미츠카제 | |
---|---|
기본 정보 | |
![]() | |
본명 | 하자마 신로쿠 (間 新六) |
별명 | 신로쿠 (新六), 신로쿠로 (新六郎) |
출생 | 1887년 12월 25일 |
사망 | 1970년 4월 20일 (향년 82세) |
출생지 | 일본 아키타현유자마치 (현 유리혼조시) |
국적 | 일본 |
직업 | 서양화가 |
학력 | |
출신 학교 | 도쿄 미술학교 |
활동 | |
사사 | 구로다 세이키 |
소속 | 슌요카이 |
장르 | 회화 |
영향 | 후지시마 다케지 |
수상 | 일본 예술원상 (1958년) |
기타 정보 | |
문화재 지정 | 국가 지정 중요 문화재 (구 가네코 현장 사무소) |
2. 생애
겐로쿠 15년 (1702년) 12월 14일, 아코 사건 토벌에서 하자마 미츠카제는 후문대에 속해 야외에서 싸웠다.[1] 토벌 후에는 나가토 쵸후번 모리 츠나모토의 아자부 카미야시키에 맡겨졌다.[1] 겐로쿠 16년 (1703년) 2월 3일, 에도 막부는 아코 낭사에게 할복을 명령했고, 미츠카제는 단도를 집어들고 바로 할복했다.[1] 유해는 매형인 나카도 마타스케에게 인계되어 츠키지혼간지에 묻혔다.[1] 할복한 46명의 낭사 중 유일하게 센가쿠지에 무덤이 없다.[1] 향년 24세.[1] 계명은 귀진석종진신사(帰真釈宗貞信士일본어)이며, 훗날 센가쿠지에는 인모유검신사(刃模唯劔信士일본어)라는 계명이 붙여졌다.[1]
2. 1. 출생과 성장
엔호 8년(1680년) 아코 낭사 하자마 미츠노부의 차남으로 태어났으며, 서출이었다. 형으로는 하자마 미츠오키가 있다.[1]할아버지 대대로 하자마 가문에 전해지던 텐류검술을 아버지로부터 배웠다. 처음에는 아코번 후나부교였던 사토무라 츠에몬의 양자로 보내졌지만, 양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아 출분하여 낭인이 되었다. 이후 아키모토 타지마노카미의 가신 나카도 마타스케에게 시집간 누나를 의지하여 에도로 갔다.[1]
겐로쿠 14년 (1701년) 3월 14일, 번주 아사노 나가노리가 코가 히젠 키라 요시히사에게 전중에서 칼로 상처를 입힌 사건이 발생했다. 이로 인해 나가노리는 당일 할복했고, 아코번은 몰수되었다. 미츠카제는 아버지와 형이 복수를 위한 의맹에 가담했음을 알고, 오오이시 요시오에게 자신도 의맹에 참여하고 복귀할 것을 간청했으나 거절당했다. 그러나 호리베 타케츠네나 오쿠다 시게모리 등을 통해 거듭 청하여 허락을 받았다. 그 후, 미츠카제는 에도로 내려간 아버지와 형과 함께 신코지마치 4초메 오오야 시치로에몬점에 잠복했으며, 소마노소신로쿠로(杣荘新六郎|소마노소 신로쿠로일본어)라고 자칭했다.[1]
2. 2. 낭인 생활
엔호 8년(1680년), 아코 낭사 하자마 미츠노부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형은 하자마 미츠오키이며, 서출이었다.할아버지 때부터 하자마 가문에 전해지던 텐류검술을 아버지에게서 배웠다. 처음에는 아코번 후나부교였던 사토무라 츠에몬의 양자로 보내졌으나, 양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아 출분하여 낭인이 되었다. 이후 아키모토 타지마노카미의 가신 나카도 마타스케에게 시집간 누나를 의지하여 에도로 나왔다.
겐로쿠 14년 (1701년) 3월 14일, 번주 아사노 나가노리가 코가 히젠 키라 요시히사에게 칼로 상처를 입힌 사건이 발생했다. 나가노리는 당일 할복하고, 아코번은 몰수되었다. 미츠카제는 아버지와 형이 복수를 위한 의맹에 가담했음을 알고, 오오이시 요시오에게 복귀와 의맹 참여를 간청했으나 거절당했다. 그러나 호리베 타케츠네나 오쿠다 시게모리 등을 통해 거듭 청하여 허락을 받았다. 그 후, 미츠카제는 에도로 내려간 아버지와 형과 함께 신코지마치 4초메 오오야 시치로에몬점에 잠복해, 소마노소신로쿠로(杣荘新六郎|소마노소 신로쿠로일본어)라고 자칭했다.[1]
2. 3. 아코 사건 가담
겐로쿠 14년(1701년) 3월 14일, 번주 아사노 나가노리가 키라 요시히사에게 칼로 상처를 입힌 사건으로, 나가노리는 당일 할복하고 아코번은 몰수되었다. 미츠카제는 아버지와 형이 복수 의맹에 가담했음을 알고, 오오이시 요시오에게 복귀와 의맹 참여를 간청했으나 거절당했다. 그러나 호리베 타케츠네나 오쿠다 시게모리 등을 통해 거듭 청하여 허락을 받았다.그 후, 미츠카제는 에도로 내려간 아버지와 형과 함께 신코지마치 4초메 오오야 시치로에몬점에 잠복해, 소마노소신로쿠로(杣荘新六郎|소마노소 신로쿠로일본어)라고 자칭했다.
겐로쿠 15년 (1702년) 12월 14일, 아코 사건의 토벌에서 후문대에 속해 야외에서 싸웠다. 토벌 후에는 나가토 쵸후번 모리 츠나모토의 아자부 카미야시키에 맡겨졌다. 겐로쿠 16년 (1703년) 2월 3일, 에도 막부는 아코 낭사에게 할복을 명령했고, 미츠카제는 단도를 집어들고 바로 할복했다.
2. 4. 키라 저택 습격
겐로쿠 15년(1702년) 12월 14일, 아코 사건 당시 하자마 미츠카제는 뒷문대에 속하여 밖에서 싸웠다.[1] 공격 후에는 나가토 조후번 모리 츠나모토의 아자부 상가옥에 맡겨졌다.[1]2. 5. 최후
에도 시대의 할복은 실제로 배를 자르지 않고 형식만 갖춘 상태였다. 할복하는 사람이 단도에 손을 대면 카이샤쿠가 목을 베는 식이었다.[1]그러나 하자마 미쓰카제는 옷도 벗지 않고 갑자기 와키자시를 뽑아 배를 찌르고 가로로 갈랐다. 놀란 카이샤쿠인 에라 요시키치가 급히 목을 쳤다. 검시역이었던 사이토 치자에몬 등은 달려가서 훌륭하다고 칭찬했다 전해진다.[1]
3. 할복
에도 시대의 할복은 형식만 남아있었고, 실제로 배를 가르지 않았다. 할복하는 사람이 자리에 앉아 단도에 손을 대면 카이샤쿠가 목을 베는 방식이었다.[1]
그러나 하자마 미츠카제는 옷도 벗지 않은 채 갑자기 미츠호의 와키자시를 뽑아 배를 찌르고 가로로 갈랐다. 놀란 카이샤쿠인 에라 요시키치가 급히 목을 쳤다. 검시역이었던 사이토 치자에몬 등은 달려가 훌륭하다고 칭찬했다 전해진다.[1]
4. 유품
할복에 사용한 "쿠니스케 단척 와키자시" 및 하자마 가문 전래의 "동(同) 2척 2촌・소도"는 센가쿠지의 주지가 무단으로 매각하여 절의 비용으로 충당했기 때문에 현존하지 않는다.[1]
5. 가계
6. 아코 낭사로서의 평가
하자마 미츠카제는 아코 사건에서 활약한 아코 낭사 중 한 명이다. 아코 47사에서는 하자마 신로쿠로(間 新六郎)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아버지 하자마 키헤에를 따라 키라 저택 토벌에 참가하여 무공을 세웠다.
7. 대중문화 속의 하자마 미츠카제
아코 사건을 소재로 한 작품에서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작품명 | 배우 |
---|---|
츄신구라(1958년 영화) | 토아미 죠지 |
츄신구라(1999년 드라마) | 무라카미 히로아키 |
츄신구라 1/47 | 츠마부키 사토시 |
츄신구라(2004년 드라마) | 오카다 요시노리 |
츄신구라 요젠인 | 사이토 쇼타 |
최후의 츄신구라 | 아리무라 카스미 |
츄신구라의 사랑~48번째 충신~ | 후쿠시 세이지 |
결산! 츄신구라 | 스즈키 후쿠 |
참조
[1]
서적 # or other appropriate type
[2]
서적 # or other appropriate type
[3]
간행물
赤穂四十七士列伝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