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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타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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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글 타자기는 한글을 기계적으로 입력하기 위해 개발된 장치이다. 1914년경 이원익이 최초의 모아쓰기 한글 타자기를 제작한 이후, 송기주, 공병우 등 여러 인물들이 한글 타자기 개발에 기여했다. 공병우는 가로 모아쓰기를 실용적으로 구현한 세벌식 타자기를 개발했으며, 김동훈은 5벌식 타자기를 실용화했다.

한글 타자기의 자판 배열은 두벌식, 세벌식, 네벌식, 다섯벌식 등으로 다양하게 시도되었으며, 1969년에는 4벌식 표준 자판이 제정되었다. 한글 타자기는 컴퓨터 보급 이전까지 한글 기계화를 이끌었으며, 특히 세벌식 타자기는 글꼴 디자인에 영향을 미쳐 한글 폰트 디자인의 한 종류로 자리 잡았다. 한글 타자기의 개발과 보급 과정에서 겪었던 자판 배열 논쟁은 컴퓨터 자판 배열에도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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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타자기
하ングル 타자기
국립한글박물관 내부2.jpg
국립한글박물관의 하ングル 타자기 전시
한글한글 타자기
한자한글打字機
로마자 표기Han-geul Ta-ja-gi

2. 역사

한글 타자기의 역사는 20세기 초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14년경 재미교포 이원익이 영문 타자기를 개조한 것을 비롯하여, 선교사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목사 김준성 등이 초기 형태의 한글 타자기를 만들었다.[10] 1929년에는 유학생 송기주가 새로운 한글 타자기를 개발하고 1934년 개량된 세로쓰기 모델을 선보였으나,[11] 당시 일제 식민지기 조선에서는 타자기 수요 부족과 한글 표기 방식에 대한 사회적 합의 부재 등으로 널리 보급되지 못했다.[12]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한글 타자기는 송기주의 타자기로 국립한글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11]

송기주의 타자기


본격적인 한글 타자기 개발과 보급은 해방 이후 이루어졌다. 1949년 안과 의사였던 공병우가 실용적인 가로 모아쓰기 방식의 세벌식 타자기를 개발하였고,[13] 이는 한국 전쟁 휴전 협정의 한글 정본 작성에도 사용되었다.[2] 1959년에는 김동훈이 5벌식 타자기를 실용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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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병우식 자판 배열(세벌식)을 사용한 타자기


이후 다양한 방식의 타자기가 등장하면서 1969년 대한민국 정부는 표준 자판(4벌식, 텔레타이프용 2벌식)을 제정하기도 했다. 또한 국어학자 최현배의 호를 딴 외솔타자기 등 여러 자판 방식이 공존하며 벌어졌던 자판 표준에 대한 논의는 이후 컴퓨터 자판의 표준 논쟁으로 이어지는 배경이 되었다.

2. 1. 초창기 한글 타자기

최초의 모아쓰기 한글 타자기로는 1914년경 재미교포인 이원익이 미국에서 7행식 스미스 프리미어 10호(Smith Premier 10) 타자기의 활자를 한글로 개조하여 만든 것이 꼽힌다.[1][2] 이외에도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가 개발하여 1913년 미국 특허를 출원한 언더우드(Underwood) 타자기, 또 다른 재미교포 목사였던 김준성이 만든 타자기도 초창기 한글 타자기로 언급된다.[10]

이후 1929년경, 당시 미국 유학생이었던 송기주가 한글 타자기를 만들었고, 이는 《동아일보》 등의 주목을 받았다.[11][1] 송기주는 1934년 언더우드사(Underwood Typewriter Company)의 휴대용 타자기를 개조하여 4벌식 세로쓰기 타자기를 조선에서 공개했다.[11][1][5][2] (송기주의 한자 이름은 자료에 따라 "宋基周"[3][4] 또는 "宋基柱"[2]로 표기된다.) 이 송기주 타자기는 취급 설명서와 함께 현존하며, 국립한글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이는 한국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한글 타자기로 인정받아 대한민국 등록문화재 제771호로 등록되었다.[11][5]

그러나 이원익, 송기주 등 미국 거주자들이 영문 타자기를 개조하여 만든 초기 한글 타자기들은 당시 조선에서 널리 보급되지는 못했다.[12][2] 여기에는 아직 타자기 수요가 많지 않았고, 한글 표기 방식에 대한 사회적·문화적 합의가 부족했으며, 무엇보다 일제 식민지라는 시대적 상황이 큰 영향을 미쳤다.[12]

2. 2. 공병우와 김동훈의 등장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한글을 인쇄하기 위한 전용 타자기 개발이 본격화되었다.[1] 1949년, 조선발명장려회는 가로쓰기 한글 타자기 발명안을 공모했는데,[1][2] 이때 2등 수상자 중 한 명이 안과 의사였던 공병우(孔炳禹)였고, 3등 수상자 중 한 명이 김동훈(金東勳)이었다.[1][2] 공병우는 구술된 원고를 확인하는 번거로움을 덜기 위해 타자기 발명에 매진했으며,[1] 같은 해 초성, 중성, 종성을 사용하는 세벌식 글자판을 갖춘, 실용적인 가로 모아쓰기 한글 타자기를 개발했다.[13] 공병우식 타자기는 타자 속도가 빠르다는 장점이 있었고, 그는 특허를 취득하고 시제품을 세상에 내놓았다.[2]

한편 1959년에는 김동훈이 개발한 다섯벌식(자음 2벌, 모음 2벌, 받침 1벌) 타자기가 실용화되었다. 그러나 1949년 당시에는 아직 한글 전용 정책이 실시되기 전이었고,[1][2] 한자를 입력할 수 없는 한글 타자기는 널리 보급되기 어려웠다.[1] 또한 공병우식 타자기로 인쇄된 글자체가 네모반듯하지 않고 다소 울퉁불퉁하다는 점[2] 역시 초기 보급의 어려움으로 작용했다.

그럼에도 공병우는 꾸준히 타자기 개발을 이어가 1968년에는 기계식 한영 겸용 타자기를 발명하기도 했다. 1969년에는 대한민국 정부가 표준 자판(4벌식, 텔레타이프용 2벌식)을 제정했으며, 국어학자 최현배의 호를 딴 외솔타자기(처음에는 자음, 모음 각 한 벌씩이었으나 이후 세벌식으로 변경) 등 다양한 방식의 타자기가 등장했다. 이 시기에 벌어진 자판 표준에 대한 논의는 이후 컴퓨터 자판의 표준 논쟁으로 이어지게 된다.

2. 3. 한국전쟁과 타자기

공병우의 한글 타자기 시제품이 완성된 직후 한국 전쟁이 발발했다.[2] 전쟁 중, 타자기 개발에 참여했던 송기주는 북한에 납치되어 소식이 끊겼다고 한다.[2] 공병우 또한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에 의해 정치범으로 체포되었으나, 타자기에 관심을 보인 인민군 장교 덕분에 석방되었고, 인민군이 서울에서 철수하는 혼란 속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2]

한글 타자기 보급의 전환점은 한국 전쟁 중인 1952년 대한민국 해군이 행정 사무 효율화를 위해 도입하면서 마련된 것으로 보인다.[1][6] 당시 해군참모총장이었던 손원일은 타자기 시제품에 관심을 보였고, 공병우식 타자기를 미국에서 생산하여 해군에서 사용했다.[2]

2. 4. 대한민국에서의 한글 타자기 보급

해방 후인 1949년 안과 의사인 공병우가 최초로 가로 모아쓰기를 실용적으로 구현한 한글 타자기를 개발하였다.[13] 이 타자기는 초성, 중성, 종성의 세벌식 글자판을 가졌으며, 1968년에는 기계식 한영 겸용 타자기를 발명하였다. 한편 1959년에는 김동훈식 5벌식(자음 2벌, 모음 2벌, 받침 1벌) 타자기가 실용화되었다.

대한민국에서 한글 타자기의 보급에는 한글 전용 정책이 채택되어 공문서를 한글만으로 작성하는 방침이 기여한 것으로 여겨진다.[1] 특히 1961년에는 모든 공문서를 타자기로 작성하도록 제도화되면서 타자기 수요가 늘어났다.[6]

정부 부처에서의 타자기 도입이 진행되면서, 부처별로 선호하는 타자기 방식이 달랐다. 국방부외교부 등 정보 처리 속도를 중시하는 부처에서는 공병우식을 선호했고, 문교부나 원호처(상이군경 치료·원호, 전몰자 유족 원호 등을 담당)에서는 한글 자형이 보기 좋게 나오는[1] 김동훈식(5벌식)을 선호했다.[1][2] 관공서에서는 공병우식과 김동훈식이 시장을 양분했지만(공병우식이 약간 우세)[2], 이 외에도 장봉선(5벌식), 백성죽(4벌식), 진윤권(3벌식) 등 다양한 자판 배열의 타자기가 생산되었고[2], 1960년대에는 그 종류가 16종에 달했다고 한다.[7]

이렇게 다양한 규격으로 인해 혼란이 발생하자, 정부는 자판 표준화를 시도했다. 1957년 문교부 내에 "한글 타자기 글자판 합리적 배열 협의회"가 설치되어 조정을 시도했고, 프로스기(자모를 조합하지 않고 가로쓰기로 나열하는 방식)를 바탕으로 한 2벌식 규격도 제안되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1][2] 이후 1969년에는 국무총리 훈령으로 "표준 키보드"(4벌식)가 공포되었으나[7], 기존 타자기 제조사들의 반발로 규격 통일은 결국 이루어지지 못했고[1], 관공서에서 일부 사용되는 데 그쳤다.[2]

한편, 1969년부터 상업고등학교에서 타자기가 실업과 교과목으로 지정되어 교육이 이루어졌고, 기업들이 채용 시 타자기 활용 능력을 고려하게 되면서 타자기는 점차 일반에 보급되었다.[1] 1970년에는 문교부가 타자 능력 검정 시험 규칙을 제정하여 5등급의 기능 검정을 실시하기도 했다.[6]

한글 타자기는 1980년대 컴퓨터가 보급되기 시작할 때까지 한글 기계화를 이끌었다.[8] 1983년, 국무총리 훈령으로 기존 타자기의 "표준 키보드"(4벌식)는 폐지되고, 텔레타이프용 2벌식 키보드와 같은 2벌식 키보드가 새로운 "표준 키보드"로 지정되어 타자기, 텔레타이프, 컴퓨터의 자판 통일이 시도되었다.[2] 이러한 자판 배열에 대한 논쟁은 이후 컴퓨터 자판 논란으로 이어지는 배경이 되었다.

3. 한글의 특징과 자판 배열

한글의 구성. 빨간색은 초성, 파란색은 중성, 검은색은 종성을 나타내는 자모.


자모의 조합 방식을 나타내는 개념도. 빨간색은 초성, 녹색은 중성, 보라색은 종성의 배치.


한글은 자모라고 불리는 구성 요소들을 조합하여 글자를 만드는 문자 체계이다. 한글 타자기의 각 키는 이 자모에 해당한다. 한글 자모는 크게 모음 자모와 자음 자모로 나뉘며, 하나의 음절을 이루기 위해 초성(첫소리 자음), 중성(가운뎃소리 모음), 종성(끝소리 자음, 즉 받침)의 위치에 따라 조합된다 (한글 자모의 조합 참조). 초성(자음)과 중성(모음)은 글자에 따라 좌우 또는 상하로 조합될 수 있으며, 종성(자음 받침)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인쇄된 글자처럼 한글을 네모반듯한 틀 안에 맞추어 쓰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타자기는 이렇게 조합 방식에 따라 달라지는 자모의 위치와 모양을 모두 처리해야 하므로 구조가 복잡해지는 경향이 있다.

한편, 자모 조합을 고려하지 않고 각 자모를 풀어쓰면 영문 타자기처럼 단순화할 수도 있다. 20세기 초 한글 표기법을 현대화하는 과정에서 언어학자 주시경최현배 등은 한글을 '풀어쓰기' 방식으로 표기하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한글'이라는 단어를 'ㅎㅏㄴㄱㅡㄹ'처럼 자모를 순서대로 나열하는 방식이다. 풀어쓰기를 채택하는 것은 단순히 타자기 규격의 문제를 넘어 언어 표기 방식과 문자 자체의 본질에 관한 문제였다.[1]

이처럼 독특한 구조를 가진 한글을 타자기로 구현하기 위해 여러 가지 자판 배열 방식이 고안되었다. 여기서 '벌'은 '조' 또는 '묶음'(영어의 set)을 의미하는 우리말 고유어이다.

  • 2벌식: 자모를 '모음 자모'와 '자음 자모'의 두 그룹으로 나누어 배치한 방식이다.
  • 3벌식: 자모를 '초성', '중성', '종성'의 세 그룹으로 나누어 배치한 방식이다.
  • 4벌식: 자모를 네 그룹으로 나누어 처리하는 방식이다.
  • 5벌식: 초성과 중성의 조합 방식 및 종성 유무에 따라 자모를 다섯 그룹으로 나눈 방식이다.[1]

3. 1. 두벌식 자판

두벌식 자판은 한글 자모를 "모음 자모"와 "자음 자모"의 두 그룹으로 나누어 키를 배치한 방식이다. 키 수가 적어서 배열을 외우기 쉽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초성과 종성에 같은 자음 자모 활자를 사용하기 때문에, 3벌식과 비교했을 때 디자인적으로는 어렵다는 평가가 있다.[8]

1970년대에는 한글 텔레타이프용 키보드 배열에 사용되었고[8], 1983년에는 국가 표준 자판으로 채택되었다.[2]

3. 2. 세벌식 자판

3벌식 자판 배열의 예 (초기 (1950년대) 공병우식 자판 배열). 녹색이 초성, 갈색이 중성, 빨간색이 종성을 입력하는 키.


세벌식 자판은 자모를 초성, 중성, 종성의 세 그룹으로 나누어 키를 배치한 방식이다. 초성에 사용하는 자음 자모와 종성에 사용하는 자음 자모를 다른 키에 할당하며, 글자 모양(서체)도 각각 별도로 디자인한 것이 특징이다.[8]

대표적인 세벌식 자판으로는 공병우식 자판이 있다. "한글 기계화의 아버지"로도 불리는[1] 공병우(1907년 ~ 1995년)는 1949년 처음 타자기용 자판 배열을 발표한 이후에도 꾸준히 개량을 거듭하며 1990년대 컴퓨터 시대까지 활동했다. 공병우식 자판은 김동훈식(5벌식) 자판에 비해 타자 속도가 빠르다는 평가를 받는다.[1]

세벌식 자판으로 입력하여 인쇄된 한글은 글자가 네모반듯한 틀(정방형)에 딱 맞지 않고 다소 들쭉날쭉한 모양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오히려 이런 점 때문에 가독성(글자를 인식하는 속도)은 더 뛰어나다는 견해도 있다.[8]

3. 3. 네벌식 자판

4벌식 자판은 자모를 4개의 그룹으로 나누어 처리하는 방식이다. 1983년에 제정된 "표준 키보드"에서는 초성, 종성이 없는 중성, 종성이 있는 중성, 종성의 네 그룹으로 자모를 나누었다[8]. 네벌식 자판은 다섯벌식 자판과 마찬가지로 조합된 한글이 정방형 안에 보기 좋게 들어가도록 설계되었고, 글자체도 별도로 디자인되어 시각적으로 아름답다는 평가를 받았다[8].

3. 4. 다섯벌식 자판

초성과 중성의 조합 방식, 그리고 종성의 유무에 따라 자모를 5개의 그룹으로 나누어 배치한 자판 방식이다.[1]

대표적인 다섯벌식 자판으로는 1959년에 처음 나온 김동훈식 자판이 있다. 김동훈식은 자모를 초성 2조(변자음 14자모, 관자음 14자모), 중성 2조(종성이 이어지는 모음 13자모, 종성이 이어지지 않는 모음 13자모), 종성 1조(16자모)의 총 5개 그룹으로 나누어 조합했다.[7]

김동훈식 자판은 공병우식 세벌식 자판에 비해 한글의 글자 모양이 더 가지런하고 정돈되어 보인다는 평가를 받는다.[1] 또한, 다섯벌식 자판은 (사벌식 자판과 마찬가지로) 조합된 한글 글자가 네모반듯한 정방형 안에 보기 좋게 들어가도록 설계되었고, 글자체도 별도로 디자인되어 시각적으로 아름답다는 장점이 있다.[8]

4. 한글 타자기의 유산

한글 타자기는 단순히 과거의 기계로만 남지 않고, 현대 한국 사회의 문자 생활 여러 방면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특히 한글 타자기 개발 과정에서 있었던 다양한 한글 자판 배열에 대한 경쟁과 논의는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컴퓨터 자판의 표준을 정하는 과정으로 이어지는 등 지속적인 영향을 주었다. 또한 공병우와 같은 개발자들이 타자기의 가독성과 미적 요소를 개선하기 위해 시도했던 글꼴 디자인은 현대 한글 글꼴 디자인 발전의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이처럼 한글 타자기는 기술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문화적인 측면에서도 현대 사회에까지 이어지는 중요한 유산을 남겼다고 평가할 수 있다.

4. 1. 컴퓨터 자판 배열에 미친 영향

한글 타자기 개발 과정에서 있었던 다양한 자판 배열에 대한 경쟁과 논쟁은 이후 컴퓨터 자판 시대로 이어졌다. 1969년 대한민국 정부가 표준 자판으로 4벌식과 텔레타이프용 2벌식을 제정하는 등 여러 방식이 경쟁했으며, 이러한 자판 논쟁은 컴퓨터 시대까지 계속되었다.

컴퓨터와 워드 프로세서의 등장으로, 기계식 타자기에서 문제가 되었던 점, 예를 들어 자음과 모음의 조합 방식에 따라 글자 위치나 모양이 달라지는 문제가 소프트웨어를 통해 해결되었다.[2] 컴퓨터 키보드에서는 2벌식이 "표준 키보드"로 채택되어 널리 보급되었다.[2]

하지만 2벌식 키보드가 널리 보급된 이후에도, 3벌식 키보드를 꾸준히 선호하는 사용자들이 있었다. 이들은 타자 속도가 더 빠르고, 초성·중성·종성을 구분하는 방식이 논리적이라는 점 등을 들어 3벌식이 2벌식보다 우수하다고 주장했다.[2] 공병우는 이러한 세벌식 자판을 계속 발전시켜 1990년대에 3-90 자판과 3-91 자판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 95가 보급되면서 일반 사용자도 누구나 쉽게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로 인해 "한글의 기계화" 자체나 어떤 자판 배열이 더 우수한지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논쟁은 점차 줄어들게 되었다.[2]

4. 2. 글꼴 디자인에 미친 영향

자모를 단위로 하는 3벌식 타자기의 문자 디자인은 한글 폰트 디자인의 한 종류로 자리 잡았다(서울 퀴어 문화 축제의 로고).


3벌식 타자기를 개발한 공병우는 인쇄 효율을 유지하면서 글자 모양의 아름다움도 충족시키기 위해 여러 차례 글꼴 디자인을 개선하는 노력을 기울였다.[9] 그는 글꼴 및 자모의 인쇄 위치를 고안하면서, 자모를 조합한 글자나 가로쓰기 문서 전체의 균형까지 고려한 정밀한 문자 디자인 설계를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9] 이렇게 3벌식 타자기를 통해 시도된, 자모를 중심으로 한 글꼴 디자인은 현대 한글 글꼴 디자인의 중요한 한 갈래로 자리 잡게 되었다.[8][9]

참조

[1] 웹사이트 타자기 http://theme.archive[...] 국가기록원 2020-07-16
[2] 웹사이트 한글 자판의 역사 https://www.hangeul.[...] 국립한글박물관 2020-07-16
[3] 웹사이트 시대를 앞선 개발자, 송기주 https://www.hangeul.[...] 국립한글박물관 2019-07-01
[4] 웹사이트 송기주 타자기 제품 설명서 https://www.emuseum.[...] 국립중앙박물관 2022-02-02
[5] 웹사이트 송기주 네벌식 타자기 http://heritage.go.k[...] 2020-07-16
[6] 웹사이트 타자기(打字機) http://encykorea.aks[...] 한국학중앙연구원 2020-07-16
[7] 웹사이트 한글 타자 자판 표준화 등 한글 기계화 1969년 http://theme.archive[...] 국가기록원 2020-07-16
[8] 웹사이트 【概論】パソコン上のハングル環境 Ver.0.935 http://www.kmml.net/[...] 2020-07-16
[9] 학위논문 ハングルタイプライターの開発がもたらした文字デザインの変化についての研究 https://id.ndl.go.jp[...] 2023-01-13
[10] 문서 김태호 (2011)
[11] 웹인용 송기주 타자기 https://www.hangeul.[...] 2023-04-19
[12] 문서 김태호 (2011)
[13] 문서 김태호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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