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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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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아기는 어릴 때부터 천주교 신앙을 접했으나 결혼 후 신앙을 잠시 떠났다가 다시 돌아와 신앙생활을 했다. 1836년 김업이와 함께 체포되어 고문과 심문을 받았지만 신앙을 굽히지 않았으며, 1839년 5월 24일 서소문 밖에서 순교했다. 1925년 복자, 1984년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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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아기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한아기 바르바라
출생일1792년
사망일1839년 5월 24일
축일9월 20일
교파로마 가톨릭교회
출생지강원도 광천
사망지서울 서소문
직업순교자
시복일1925년 7월 5일
시복인교황 비오 11세
시성일1984년 5월 6일
시성인교황 요한 바오로 2세

2. 생애

한아기는 어머니가 천주교 신자였기 때문에 어릴 적부터 예수에 대해 배웠다. 어머니의 가르침과 모범으로 깊은 신앙심을 갖게 되었지만, 천주교 신자가 아닌 사람과 결혼하면서 신앙생활을 멀리하게 되었다. 그러다 한아기의 어머니가 김업이 막달레나와 만나게 되었고, 김업이의 도움으로 한아기는 다시 신앙을 되찾았다.[1]

이후 한아기는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고 열심히 교리를 배우며 그리스도교의 덕성을 실천하였다. 30세에 남편과 세 자식을 잃는 비극을 겪었지만, 신앙은 약해지지 않았다. 친정으로 돌아온 한아기는 예비 신자들을 가르치고, 위독한 이웃 자녀들에게 세례를 주었으며, 죄인들에게 회개를 권고하며 금욕적이고 순결한 삶을 살았다.[1]

1836년 9월, 김업이와 한아기, 김아기가 체포되었다. 김아기가 그들과 함께 체포되었는지, 아니면 그녀의 집에서 체포되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셋은 같은 날 구금되었다. 감옥에서 그들은 남명혁 다미아노, 권득인 베드로, 박아기 안나, 이호영 베드로, 이소사 아가타 등 다른 천주교 신자들을 만났다.

심문 과정에서 김아기는 "저는 예수와 마리아 밖에는 아는 것이 없습니다."라고 답했고, "예수와 마리아를 버릴 바에야 차라리 죽겠다."라며 신앙을 굽히지 않았다. 혹독한 고문에도 굴하지 않았고, 옥중에서 다른 천주교 신자들로부터 "예수와 마리아밖에 모르는 김아기 아가타"라고 불리며 세례를 받았다.

1839년 5월 11일, 남명혁, 권득인, 박아기에게 사형 선고가 내려졌고, 다음날에는 이광헌 아우구스티노와 박희순 루치아 또한 사형 선고를 받았다. 김업이, 한아기, 김아기가 천주교 신앙을 버리지 않아 사형 선고를 받기까지는 사흘간의 심의가 더 있었다.

1839년 5월 24일, 조신철 가롤로는 사형 집행 과정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숨을 거둔 때와 같은 시간인 오후 세 시에, 아홉 명의 순교자가 영광을 얻었다. 형법에 따라 시신들은 사흘간 사형장에 방치되었다.

당시 형조 문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앵베르 주교는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2. 1. 김업이 막달레나

김업이 막달레나는 한아기 바르바라의 개종에 큰 영향을 준 인물이다. 한아기의 친정 어머니는 김업이와 함께 한아기를 설득하여 개종하도록 이끌었다. 김업이는 독실한 천주교 신앙을 바탕으로, 1836년 9월에 한아기와 함께 체포된 후에도 혹독한 고문과 심문 속에서 신앙을 굳건히 지켰다. 포장에게 천주교 교리를 설명하며 자신의 신앙을 증언하기도 했다. 결국 김업이는 천주교 신앙을 버리지 않아 1839년 5월 24일 서소문 밖에서 처형되었다.

2. 2. 김아기 아가타

1836년 9월, 김업이와 함께 체포되었는데, 김아기가 그들과 함께 체포되었는지, 아니면 그녀의 집에서 체포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셋은 같은 날 구금되었다. 감옥에서 그들은 남명혁 다미아노, 권득인 베드로, 박아기 안나, 이호영 베드로, 이소사 아가타 등 다른 천주교 신자들을 만났다.

심문 과정에서 김아기는 "저는 예수와 마리아 밖에는 아는 것이 없습니다."라고 답했고, "예수와 마리아를 버릴 바에야 차라리 죽겠다."라며 신앙을 굽히지 않았다. 혹독한 고문에도 굴하지 않았고, 옥중에서 다른 천주교 신자들로부터 "예수와 마리아밖에 모르는 김아기 아가타"라고 불리며 세례를 받았다. 이는 박해 기간 동안 옥중에서 세례를 받은 첫 번째 사례였다. 세례는 그녀에게 새로운 힘을 주었고, 혹독한 고문과 형벌을 견뎌냈다.

1839년 5월 24일, 김아기는 김업이, 한아기와 함께 천주교 신앙을 버리지 않아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날, 조신철 가롤로의 묘사에 따르면, 사형수들은 팔과 머리카락이 십자가에 결박된 채 서소문 밖 사형장으로 끌려갔고, 망나니들에 의해 참수되었다.

2. 3. 한아기 바르바라

한아기는 어머니가 천주교 신자였기 때문에 어릴 적부터 예수에 대해 배웠다. 어머니의 가르침과 모범으로 깊은 신앙심을 갖게 되었지만, 천주교 신자가 아닌 사람과 결혼하면서 신앙생활을 멀리하게 되었다. 어느 날, 한아기의 어머니는 김업이 막달레나와 만나게 되었고, 김업이의 도움으로 한아기는 다시 신앙을 되찾았다.[1]

한아기는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고 열심히 교리를 배우며 그리스도교의 덕성을 실천하였다. 30세에 남편과 세 자식을 잃는 비극을 겪었지만, 신앙은 약해지지 않았다. 친정으로 돌아온 한아기는 예비 신자들을 가르치고, 위독한 이웃 자녀들에게 세례를 주었으며, 죄인들에게 회개를 권고하며 금욕적이고 순결한 삶을 살았다.[1]

1836년 9월, 김업이 막달레나와 함께 체포된 한아기는[1] 혹독한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신앙을 지켰다. 1839년 5월 24일, 한아기는 서소문 밖에서 십자가형을 받고 순교하였다.[1]

3. 체포와 순교

한아기는 친정 어머니와 김업이의 권유로 다시 천주교 신앙을 갖게 되었다. 30세에 남편과 세 자녀를 잃었지만, 신앙은 약해지지 않았다. 그녀는 예비 신자들을 가르치고, 위독한 아이들에게 세례를 주었으며, 죄인들에게 개종을 권고하는 등 신앙생활에 헌신했다.

1839년 5월 24일, 한아기는 김업이, 김아기 등과 함께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시신은 사흘간 방치되었다가 신자들에 의해 수습되어 안장되었다.

3. 1. 체포 과정

1836년 9월, 김업이와 한아기는 천주교 신자라는 이유로 체포되었다. 김아기가 그들과 함께 체포되었는지, 아니면 그녀의 집에서 체포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세 명은 같은 날 구금되었다.

감옥에는 남명혁, 권득인, 박아기, 이호영, 이소사 등 다른 천주교 신자들도 함께 갇혀 있었다.

3. 2. 심문과 고문

1836년 9월, 김업이와 한아기가 체포되었다. 김아기가 그들과 함께 체포되었는지, 아니면 그녀의 집에서 체포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세 명은 같은 날 구금되었다.

감옥에는 남명혁 다미아노, 권득인 베드로, 박아기 안나, 이호영 베드로, 이소사 아가타 등 다른 천주교 신자들도 있었다.

심문 과정에서 박아기는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신앙을 지키겠다고 말했다. 한아기 역시 혹독한 고문을 받았지만 신앙을 굽히지 않았다. 김업이는 포장에게 천주교 교리를 설명하며 신앙을 증언했다.

김아기는 "저는 예수마리아 밖에는 아는 것이 없습니다."라고 말하며 신앙을 지키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그녀는 고문에도 굴하지 않았고, 이를 본 포장은 그들을 감옥으로 보냈다. 김아기는 옥중에서 다른 천주교 신자들에게 세례를 받았는데, 이는 박해 기간 동안 옥중에서 세례를 받은 첫 번째 사례였다. 세례는 그녀에게 혹독한 고문과 형벌을 견딜 힘을 주었다.

3. 3. 순교

1836년 9월김업이와 한아기가 체포되었다. 김아기가 그들과 함께 체포되었는지, 아니면 그녀의 집에서 체포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세 명은 같은 날 구금되었다. 감옥에서 그들은 남명혁 다미아노, 권득인 베드로, 박아기 안나, 이호영 베드로, 이소사 아가타 등 다른 천주교 신자들을 만났다.

심문재판이 끝난 후, 1839년 5월 11일에 남명혁, 권득인, 박아기에게 사형 선고가 내려졌다. 김업이, 한아기, 김아기가 천주교 신앙을 버리기를 거부하여 사형 선고를 받기까지는 사흘간의 심의가 더 있었다.

1839년 5월 24일, 김업이, 한아기, 김아기는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이 사건은 조신철 가롤로에 의해 다음과 같이 묘사되었다.:

> 정해진 날에 보통 키의 사람보다 더 큰 십자가가 세워진 소달구지들이 감옥으로 보내졌다. 모두들 준비가 되어 있었고, 포졸들은 사형수들을 끌고 나와 그들의 팔과 머리카락을 십자가에 결박했다. 발받침대에 그들의 발이 놓여졌고, 출발 신호가 떨어졌다.

>

> 그들이 서소문 앞의 내리막길에 왔을 때, 포졸들은 갑자기 발받침대를 치워 버렸고, 달구지꾼들은 소들이 곧바로 내리뛰도록 다그쳤다. 길은 거친 자갈밭이었으므로, 달구지가 덜컹거리며 팔과 머리카락이 십자가에 묶인 죄수들에게 극심한 고통을 야기했다. 그 내리막길 밑에 사형장이 있었다. 포졸들은 죄수들을 십자가에서 끌어내리고 그들의 옷을 벗겼다. 망나니들은 그들의 머리카락을 들보에 묶은 뒤 그들의 목을 베었다.

순교자들의 시신은 사흘간 사형장에 방치되었다가 신자들에 의해 수습되어 안장되었다.

4. 시복 및 시성

김업이 막달레나, 김아기 아가타, 한아기 바르바라는 1925년 7월 5일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교황 비오 11세가 집전한 시복식을 통해 복자 품에 올랐다.[2] 1984년 5월 6일에는 서울특별시 여의도에서 한국 천주교 창립 200주년을 기념하여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집전한 미사 중 거행된 시성식을 통해 성인 품에 올랐다.

참조

[1] 웹사이트 http://newsaints.fai[...]
[2] 뉴스 복자 124위 특집. 124위 시복 후속 조치·현황 http://www.catholict[...] 가톨릭신문 2014-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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